나탈리 포트만. 등장부터 남달랐던 그녀였다. 그렇다. <레옹>. 그때 그녀 나이 열두 살이었다. 허나 그런 나이 따위, 그녀에겐 무의미했다. 포스, 아우라, 그녀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 열두 살의 마틸다가 휘어잡은 것은 레옹만이 아니었다. 스크린 밖에 있는 나도 홀딱 넘어갔다. 나도 킬러가 되고 싶다, 는 생각을 순간 했다. 킬러가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제는 물론 마틸다, 그러니까 나탈리 포트만의 존재지만. 혹은 그녀에 버금가는 포스를 지닌 소녀만 옆에 있다면,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내게 청부를 할까...^^;;) <히트>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뷰티풀 걸> <화성침공> 등에 이어, 그녀는 아미달라로 돌아왔다. 아우, 황홀했다. 그녀의 뷰우티는 우주의 공주로 손색없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의 아미달라 공주. 그녀는 진짜 여인이 돼 있었다.
아나킨이 그녀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고, 어쩌면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다스베이더가 되는 것도 당삼빳데루였다.
대학입학으로 그녀는 바빴던지, 필모가 다소 뜸했고, 나도 그녀를 향한 시선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만난 <클로저>(2004). 그녀, 파격이었다. 평소의 행실(?)과 엄청 달랐다. 와우~ 나의 원조 여신, 줄리아 로버츠 덕분에 찾은 극장이었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더 마음을 뺏긴 것은 나탈리였다. 물론, 나탈리는 이미 내게 둥지를 틀고 있는 배우지만,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글쎄. 김도훈 기자의 이 말을 인용하자.
"…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하기도 한 내털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한 번 비교해보자. 당신이 남자라면, 둘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가? 대답 안 해도 알고 있다. 당신이 여자라면, 하버드 심리학과 출신에 온갖 정치활동에 나서며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an)에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내털리 포트먼과 적당히 풀어헤친 웃음으로 함께 고기를 씹으며 파티를 즐기는 스칼렛 요한슨 중 누구와 파티에 가고 싶은가."
나? 알다시피, 난 남자다. 날 더 안다면,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하악하악~을 이미 발설한 것을 기억할 테지. 나는 수줍게 스칼렛을 지목할 것이다. 나탈리가 그것밖에 안 되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탈리는 범접하기 힘든, 박제된 여신의 이미지가 있다. 그건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게 그녀였을 뿐이다. 아마도, 착한 여신. 나탈리는 낮에 사진을 붙여놓고 경배하는 무엇이라면, 스칼렛은 함께 밤을 지새고픈 여자다.
(두 사람,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한 바 있으며, 각각 평소 이미지와 반대 역을 맡았다. 나탈리는 이 영화를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두편 중 한편으로 꼽았다. 나머지 한편은 <브이 포 벤데타>.)
그러니, 내 음탕한(?) 놋북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둥지를 튼 폴더는 있지만, 나탈리 포트만의 폴더는 없다. 감히 어찌!
아무래도 나는 스칼렛이 어울리는 남자인가 보다.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의 나탈리도 나름 매력 있었다. <블랙 스완>은 일단 나탈리의 도약이 아닌 날개와도 같은 영화다.
곧 삼십대로 접어들 나탈리는 점점 더 멋있는 배우, 아니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유? 물론 내 멋대로의 해석이다.
그녀는 <블랙 스완>의 안무가이자 발레리노 벤자민 밀피예를 만나 임신 중이며 약혼을 했다.
이른바 '혼전 임신'인데, 평소 나탈리의 반듯한 이미지를 감안했을 때, 파격이다. 그녀는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나는 긍정 평가한다. 팬이니까! 근데 밀피예는 부럽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담배와 술과 마약을 하지 않는 금욕주의자란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긴 글렀다. 에잉.
<클로저>가 아프고 가슴에 각인됐던 것은,
댄(주드 로)이 꼭 나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댄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택도 없이 따르지 못하면서...ㅋ)
사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을 위해 진실해야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을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 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 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네 사랑의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아, 봄이다, 봄.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자기 살을 찢으며 꿈틀꿈틀 소생하느라 잔인함을 동반한다는 계절이지만, 싱그러움 또한 온전하게 봄의 캐릭터다. 온몸으로 봄 햇살을 흡수하면서 상큼한 노래로 귀를 간질인다면, 아, 꿈결 같은 세상. 그렇게, 지금 봄이 내린다. 좋아,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좋을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여기, 렌카(Lenka)! 누구냐고? 좋아. 이름은 처음 들어본 것 같아도 어쩌면 혹시나 들어보고 어깨를 들썩들썩해 봤을 법한 이 노래들. 미국드라마 <어글리 베티>에
삽입된 ‘The Show’. 이 노랜, 배우 고현정이
나온 고이 잠든 아기의 모습이 귀여운 모석유화학 CF에도 삽입돼 있다.
아니라면, 나의 완소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풍성하게 만든 ‘Trouble Is A Friend’ 혹은
‘Live Like You’re Dying’. 후욱, 입안에
절로 달콤한 침이 고이지 않아?
그래도
모르겠어? 좋아. 그렇다면 블로고스피어에 차고 넘치는 이런
상찬들. ‘찬란햇’은 ‘렌카, 솜사탕 같은 목소리’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딱 한번 들었을 뿐인데, 입가에서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중독성 짙은 리듬과 그녀 특유의 발랄한 보이스!··· 멍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뭔가 상큼한 자극이 절실하다면, 피곤에 지친 저녁 혹은 퇴근길, 유쾌한 기분전환을 원한다면! 렌카의 ‘Show’를 들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하늘여시’는
‘봄을 부르는 렌카의 음악’이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 ‘The Show’를 “정말 봄을 부르는 노래 같지 않나요?”라고 그 상큼함을 전달한다. 미국 미디어들의
다소 호들갑스런 상찬도 곁들이자면, “렌카의 음악은 밝고, 청명하고
흥이 난다. 친한 여자친구들끼리 모여 놀러 가는 밤에 들으면 딱 좋은 음악이다.”(저스틴) “렌카는 리스너들을 어떻게 하면 지겹지 않고 단번에 중독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오레거니언) “캐시미어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교한 편곡을 감싸 안는다. 직접 연주한 피아노, 퍼커션, 비브라폰, 철금종에서는 관현악 느낌이 가미됐던 60년대 초반의 팝 음악이 연상된다.”(스핀) 그리고
렌카(의 음악)를 만난다면,
저 상찬들에 당장,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찬성’표를 던지고 말 것이다. 내기 걸어도 좋다. 머리는 끄덕끄덕, 어깨는 들썩들썩,
입은 흥얼흥얼. 다소 오버하자면, 나는 렌카의
노래가 ‘봄날의 아기곰’ 같다. 봄날의 아기곰? 뭥미? 이런
거다.
“봄날의
들판을 내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내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 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봄날의 아기곰과 함께 뒹굴고 싶다면, 렌카의 음악을 지금 이 봄에 들어보는 것, 꽤 괜찮지. 말하자면, 슈거 팝(Sugar
Pop). 그렇다고 이가 썩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고. ‘과일향 츄잉팝 라즈베리 소녀’의 해피 바이러스가 당신과 나의 일상에도 잔잔히 묻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히피처럼
자유분방한 아우라가 온몸을 감싸고 있는(그건 아마도 히피였던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때문이리라), 어렸을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호주로 입양된
아이여서 한국을 아주 조금 알고 있는, 비빔밥을 아주 좋아한다는 렌카와 나눈 이야기 속으로, 고고씽. 그냥 ‘쇼’를 즐기는 렌카 그는 지금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첫
싱글 ‘The Show’로 단숨에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얻은 그.
그 노래에 나오는 이 구절, “Just enjoy the show(그냥 쇼를 즐기기만 하면
돼)”.자신에게 혹은 우리에게
건네는 듯한 그 말, 딱이다. 물론 바로
앞에 나오는 가사인, “I want my money back”과 결합하면 이건 좀 요즘의 상황을 은유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렌카 왈. “인생은 쇼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쇼를 조절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즐기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때론 정말 형편없는 공연을 보면 ‘내 돈 환불해줘’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 않은가. 인생도 살다 보면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데, 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크게 소리 한번 지르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꼬마전구’라는 블로거는 이런 말로 이 노래의 흥겨움을 표현한다. “극장에서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망설이다 도전한 신메뉴의
참담한 맛을 보고 나서, 그리고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에게 가서 귀에 바짝 달라붙어 불러대고 싶다. I want my money back.” 하나의
사례지만, 이런 반응들은 그가 이미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는 뜻이렷다.
라디오 에어플레이 3위권에 꾸준히 머무는 등 한국에서도 그는 이미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직비디오도 참 예쁘고, 재미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싱글은 뭘까. 역시나 흥미로운 뮤직비디오도 나올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Trouble Is A Friend’
(<그레이 아나토미> 삽입)가 될
확률이 높다. 아마 온 세상이 원하는 곳이 그 노래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웃음) 뮤직비디오도 계획하고 있다. 아마 곧 만들 것 같다. 작은 줄 인형을 이용한 내용으로 수정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들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다. 1년 전쯤에
‘viral video’ (인터넷상에서 공유를 통해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단편 동영상)가 있긴 한데, 이번에 더 많은 사진을 찍어서 제대로 된 비디오를
만들 예정이다.” 음악은 렌카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그러니까, 능력이다. 그는 어린 시절, 피어싱을 위해,
즉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접했다. 아버지가 재즈뮤지션이었지만, 그는 음악에 마음에 열지 않았다. 귀를 뚫기 위해 피아노와 트럼펫을
배우고 음악시험에서 B학점 이상을 받아야 했던 소녀.
그의
예능 기질은 되레 ‘연기’에서 발현됐다. 우연이었지만, 8살에 연기자로 데뷔했고, 명배우 ‘케이트 블란쳇’(<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임 낫 데어> 등)을 선생님으로 연기지도를 받았다. “케이트 선생님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영감이 넘치며 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제가 연기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고 처음으로 전문적인
직업을 갖게 해줬죠.”
그러니까, 당시 렌카는 음악보다는 연기였다. 물론 예능분야에 그만큼 재질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지만,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운명이라고 이름 붙여도 된다. 연기를 통해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2002년 <Somesault>라는 영화에 가수 역할과 함께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렌카. 영화음악에 참여한 호주의 유명 익스레피멘탈 록그룹인 ‘디코더 링’의 드러머 토마스 슛징거는 그에게 밴드 보컬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당시 호주의 거의 모든 영화음악상을 싹쓸이했다.
이 과정에서
렌카는 음악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기 싫어했던 소녀였건만, 음악이 다시 그에게로 왔다. 디코더 링과 한 장의 앨범을 더 만든
그는 솔로활동을 결심한다. 애초 밴드 보컬로 활동하기 전부터 품었던 열망이었고, 하고 싶은 음악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솔로활동의 새로운
둥지는 미국 LA. 그리고 2008년, 렌카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생애 첫 솔로앨범 <LENKA>를 세상에 내놨다.
그렇다. 오늘은 준수의 아름다운 여신님을 알현하는 날이기 때문. 우리 연아? 오~ 노!
연아 따윈 상관 없어.
연아의 몸놀림과 움직임은 예술이지만,
그 예술을 떠올리지도 못하게 한 준수의 아름다운 여신님.
김.선.우.
시인. 혹은 소설가.
그러니까, 작가이며 예술가.
그러니까, 오늘! 2월24일.
준수의 아름다운 여신님, 드디어 알현.
아침부터 약간의 조증. 아아, 어떠케요.
뭔가 붕붕 거리며 두근두근 쿵쿵.
왜케 여신님 뒤에선 빛이 나는 거야. 흑.
그야, 당연. 준수의 아름다운 여신님이니까.
너, 이놈, 왜 이리 여신님이 많냐고 타박해도, 우짜겠노.
좋은 걸 어떡해.
그래도 아름다운 여신님을 그렇게 지근거리에서 뵙고,
나를 향해 말씀을 건네주신 분은, 선우 여신님이 아마도 처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휴.............
이름을 건넨 쪽지를 보고 건네신 그말 한마디. "본인이세요?"
아, 수줍어 제대로 말도 몬하고 눈도 못 맞추고... 수줍준수!
아름다운 여성 앞에 한 없이 쑥맥인 준수는,
오늘 여신님 앞에서 끝도 없이 쑥맥인 채로 총총...
쪽 팔리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모냐...ㅠ.ㅠ
아, 그래도 오늘 다른 일이야 어찌됐건,
오늘은 무조건 좋은 날. 기분은 붕붕붕~
꽃 향기를 맡으면 힘이 솓는 꼬마 자동차 준수!
그렇게, 나의 2010년 2월24일은 아름다운 선우 여신님을 알현한 날.
아, 좋아라~ 오늘, 준수는 행복한 사람~
송혜교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동거할까"라고 말할 때, 나는 혼자 히죽 웃으며 "응, 좋아~"라고 혼잣말을 해댔다.
송혜교가, 실컷 싸우다가, 우리 화해한 거지? 라며 "그럼 뽀뽀해줘"라고 말할 때, 나는 혼자 미칠 듯이 좋아죽다가, TV에 다가가 뻐뻐뻐뻐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뽀뽀를 했던가, 미처 몰랐다. 그렇게 많은 뽀뽀들의 향연이 왜 그리 가슴을 짜하게 하던지.
미친 게지. 지가 현빈도 아니고. '텅빈'이나 '골빈' 정도나 될까.ㅋㅋ
송혜교. 바야흐로 내겐, 송혜교의 발견이었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눈부신 등장에도 그저 지상의 여인 같지 않아서, 시큰둥 했던 그녀. 이후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나는 그녈 반기질 않았다. 좋다 나쁘다도 아닌, 뭘하든 말든 그저 무관심. 그랬던 그녀가 주준영이 되는 순간, 나는 주준영이 닥좋미(닥치고 좋아 미치겠다)였다. 그러니까, 저 앞의 송혜교는 사실, 주준영이 돼야 옳다.
올해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나싶다. <그들이 사는 세상>, '그사세'. 안타깝고 아쉽지만, 나는 그 좋은 선물에 감사한다. 마지막의 그 상투적이고 흔해 빠진 해피엔딩에도, 그것이 그사세의 맥락에서는, 어디 용서 뿐이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콩깎지.
비록 닥본사 못하고 늘 재방송과 함께 였지만,
정말 고맙다.
노희경 작가, 표민수 PD.
노 작가는 언제나 날 울려. 킁.
근데, 그사세에서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주준영보다는 사실,
양언니(최다니엘)랑 손싸가지(엄기준)!
그 씨방새들 은근 중독성 있더군.ㅋㅋ
글고 김군(이다인)도 쪼아~!
이제 그들이 없는 세상을 살려니,
쩝, 정말 아쉽군.
올해 뉴하트 이후 처음으로 몰입한 드라마였는데.
아, 그사세가 끝남으로써 나의 2008년도 가는구나.
이 영화, 보면 된다. 이 영화, 보고 행복해지지 않으면, 나에게 돌 던져도 좋다. 더불어 입장료 환불해 줄 용의 충분히, 있다. 이 영화, ☞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이 영화 보고, 완전 나는 행복하였노라. ☞ 부산에 부는 시월의 산들바람, 완전 사랑스러워~ 오죽하면, 이런 20자평 나오겠는가. "스크린의 뺨에 입맞추고 싶다"(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 나는, 오나전 동감. 더불어 함께 소리라도 치고픈 심정. 이제라도 극장 개봉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서. 24일 개봉이란다.
오매불망까지는 아니었다손, 매년 한 번가량 <러브레터>를 통해 만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오겡끼데쓰까(お元気ですか)"
작년에도 언뜻 소식이 있긴 했지만, 구체적인 크랭크인 소식까지 전해졌으니, 이 어찌 맨발로 뛰어나가 반갑다고 하지 아니할쏜가.
소식대로라면, 5월에 크랭크인 한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한창 촬영 중이 되겠다.
한일 합작 프로젝트에, 그의 남편, 츠지 히토나리(《냉정과 열정사이》의 'Blu' 작가)가 쓴 《사요나라 이쓰카(サヨナライツカ)》가 원작이라니, (《사요나라 이쓰카》는 국내에서 《안녕, 언젠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복귀를 위한 조합이라면 훌륭하다.
영화 출연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남편과 함께 비밀리에 한국을 찾아오기도 했다는데, 여전한 그의 미모를 보지 못해 안타깝긴 하다.
책은 읽지 못한 상태인데, 출판사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츠지 히토나리'식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허허. 그 애잔한 사랑의 기억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단 말이지. 넉 달 간의 사랑이 그 후 인생의 전부가 된 어떤 사랑의 이야기란다.
나카야마 미호는 아마, 역시나, 애잔한 사랑의 기억을 놓지 못하는 주인공인가보다. 단 넉 달 간의 사랑이 남긴 추억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25년 만의 재회.
후~. 이런 기시감하곤. 저 멀리 담배 한 모금 날아간다. <러브레터>에서도 그는 그랬지 않았던가. 먼저 구름의 저편으로 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해 '오겡끼데쓰까'를 외치던...
잘 지내시나요(お元気ですか).. 나는 잘 지내요(私は元気です)...
나는 정말 잘지내는데.. 당신은 대답이 없네요..
오겡끼데스까. 나도 그렇게 따라서 흐느꼈던 기억. <러브레터>는 그랬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도 함께 설산이라도 올라 그를 따라 외치고 싶었으니까.
하얀 눈 펑펑 내리던 12월이나 1월이 아닌, 땡볕 내리쬐는 6월에 그를 떠올려야 함도, 어쩔 수 없는 일.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국가에서 6월은 그럴 수밖에 없는 달이니까. 6월이 품은 기억 때문에...
나의 기억이여! 당신의 기억이여!! 가난한 청춘에게도 너무도 아름다웠던 우리의 기억이여... 그래, 안녕, 언젠가...
역시나 나도 묻고 싶다. 당신에게.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결국 부치지도 못할 편지...
언제라도 그렇게 돌아봐 줄 수만 있어도 좋을 어떤 사랑. 후후...
아마도 나는, 나카야마 미호 상의 영화가 개봉한다면, 이렇게 하리라.
꽃관 머리에 쓰고 꽃술 저고리 걸치고 아홉 폭 무지개 치마 걸쳐 입으니 어디선가 피리 소리 들려와 퍼지는구나.
비췻빛 구름 사이로 용 그림자, 말 울음소리, 넓은 바다에 반짝이는 달빛
나는야 님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 허 난설헌의 시, <선녀의 나들이> -
아랜, 2002년 나카야마 미호의 결혼 소식과 맞물렸던 어떤 단상이었다. 그땐 보림극장이 없어졌고 장만옥은 이혼을 했다. 아무 연관도 없는 것끼리 묶었던, 이른바 '크로스오버 시네메모리'(말도 안되는 조악한 조어하곤...-.-;;)
최근 몇 가지 영화와 관련된 일과 뉴스를 접하게 됐다. 대수롭지 않은 사적인 기억의 조각이 꿈틀거린 것에 불과하지만 가끔 그런 감상은 누구에게나 문을 두들길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굳이 보편성의 굴레를 뒤집어씌울 필요없이 개인사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얼마전 고향을 '방문'(이런 표현을 써야 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나보다...)했다. 이미 가슴속에서만 넘실대는 파도의 이미지와 어린 시절의 흔적들이 고이 자리잡은 그 곳은 지난해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내질렀던 <친구>의 무대가 됐던 도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발을 디뎠던 일부 공간은 내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내게도 삼류(이른바 그렇게 불리워지는)극장의 추억이 있다. 싸고 나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질풍노도 시절의 까까머리들에게 삼류극장은 맛있는 불량식품에 다름 아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연달아 생산됐던 산딸기와 앵두의 시식을 비롯해 무릎과 어둠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거나 뼈와 살이 어떻게 타는지 살피는 일은 일종의 짜릿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삐질삐질 불완전하게 형성된 감수성에 불을 지피듯 했던 <천장지구>를 보고 의기양양하게 ‘깡패’가 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환상을 그렸던 시절이었다(<천장지구>에서 유덕화와 오천련이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세상과 맞장뜨는 장면은 그 극장 최고의 기억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영화관의 메뉴는 분명했다. 사춘기 소년들의 가슴을 자맥질하게 만들고 호기심 천국의 길목이기도 했던 에로영화 혹은 이미 개봉관에서 닳고닳아 비디오로 가기 전 마지막 통관의 절차를 거치는 액션영화들이 주메뉴. 골라먹는 재미?
간헐적으로 거치는 일명 짜바리(경찰)의 단속만 없다면 표를 끊어주는 아가씨나 입구를 멀거니 지키는 아저씨에게 주민등록번호는 대수롭지 않은 수치일 뿐이었다. 단지 그들에게 우리는 돈내는 사람의 일부였을 뿐이었을까?
무언가 음침하면서도 쾌쾌한 냄새가 대변하듯, 그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에게 알 수 없는 범죄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는 은근한 스릴을 안겨다주곤 했다. 학교라는 꽉 막힌 울타리를 벗어나 일탈을 하고 있다는 묘한 감정은 영화관람의 정서를 좀더 업시키는 요인이 됐지 않았을까? 그땐 그런 모험(!)이 삐딱선을 탄 항해가 됐다. 다음날 친구들 앞에서 숨막히는 영화의 장면을 묘사하게끔 만드는 것은 특별부록. 우린 그렇게 스토리텔러가 되곤 했다. 없는 살까지 덧붙여서.
그런 기억을 뒤로 영화 <친구>에도 나왔던 극장 주변의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원래 명칭이 아닌 ‘보창’이란 -이유를 알 지 못한 채- 이름으로 일컬어졌던 한 극장이 문을 닫은 것 같다는 친구의 이야기로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고등학교 이후 10여년의 시간동안 한 번도 입구를 열어보지 못한 채 게이들의 아지트가 됐다는 확인하지 못한 소식만 듣고 옆을 스쳐 지나기만 했던 그 추억의 장소. 기억의 숲 속에는 부지불식간에 이름 모를 수풀과 생물만이 곁가지를 치고 있었던 셈이다.
기억의 숲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린 추억은 왠지 짜하다. 욕지꺼리가 난무하고 바퀴벌레가 제 집마냥 활보하고 삐걱대던 의자에 기대었던 그림은 녹슨 해방구 마냥 빛이 바랜 건 사실이다.
그곳의 스크린을 통해 보았던 영화들의 감상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영화관 특유의 분위기나 사춘기시절 온당한 모험이었다고 여겨 고무됐던 치기어림이 감상의 저편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내 기억의 숲 속에서 이미 그 영화관은 잠식당했었다.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시네마천국>에서 토토가 그랬듯. 토토는 어린 시절,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길러준 극장을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와 복원시켰다. 그리고 홀로 그 극장에서 고인이 된 알프레도 아저씨가 남겨둔 필름 속에서 잊을 수 없는 키스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 어느 날, 나도 기회를 만들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철 지난 산딸기와 앵두를 씹으면서 말을 사랑했던 한 부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낼는지, 아님 오토바이를 타고 이미 고인이 돼 있을 지 모르는 유덕화의 모습에 찡한 기운을 느끼고 있을 지.
여하튼 내 사춘기를 관통했던 추억의 파노라마가 담긴 스크린은 일단 현실 속에서 묻혀버렸나보다.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멀티플렉스에선 느껴보지 못할 조악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흩날린다. 그닥 당시에는 유쾌하지 않았음직한 삼류극장에의 기억이 세월의 흐름에 깎여 애틋한 감정으로 승화됨은 또한 기억이 주는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한다.
이런 극장 단상 외에도 두 여인에 대한 소식을 최근 들었다. 실루엣(Silhouette)을 통한 자태가 너무도 고혹적이었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며 독백하듯 말을 건네던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이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오겡끼데쓰까∼”하며 눈밭에서 울먹이던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결혼했다는 것.
두 여인의 이혼과 결혼을 놓고 상반된 소식은 나를 미묘한 감정으로 밀어넣었다. 지난 96년 <이마베프>란 영화에서 배역을 맡아 감독이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함께 살아왔던 장만옥은 ‘우호적인 이별’을 했다고 전해졌다. 10년을 훌쩍 넘긴 시간, 성룡과 함께 <폴리스스토리>에 출연, 눈도장을 찍은 미스 홍콩은 멜로드라마의 정수, <첨밀밀>을 통해 뚜렷하게 각인됐고 <화양연화>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댔다. 우옷.
억척같이 살아오며 엇갈린 사랑의 흔적을 찾아 헤매이던 <첨밀밀>의 장만옥은 어느 덧 중년의 여인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 혹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란 뜻의 <화양연화>, 그리고 꽉 끼는 차이나 드레스, 뾰족한 하이힐, 곧추세운 머리를 지니고 있었던 이 여인. 아주 더디게 우아한 발걸음을 내딛고 사랑이라는 가변차선에서 멈칫멈칫 애잔한 눈빛을 내비치던 장만옥의 실생활에서의 이혼은 이 영화와 별개임에도 괜스리 오버랩됐다.
옆집 부부와 서로의 배우자에게 바뀌어버린 애정의 행로였지만 끝내 영화에선 이루지 못했던 사랑. 사회가 조장한 관습의 틈바구니에서 내면의 충동과 자존심 사이의 간극을 망설임으로 표현했던 장만옥. <첨밀밀>에서 결국 10년의 방황을 우연으로 기워냈던 그녀는, <화양연화>의 고아한 자태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내 자신의 사랑을 뒤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10년 뒤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장만옥을 떠올릴 것이다. 과연 그녀는 그 미래에 어떤 자태를 띠고 있을까.
반면, 나카야마 미호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러브레터를 쓰지 않을 것 같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국내에도 알려진, 일본의 인기작가인 츠지 히토나리와 최근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츠지에게서 소설 작법을 배우고 있다고 알려진 여인.
이미 하늘로 먼저 간 연인을 마음 깊이 담아둔 채 설산에서 그 미망을 떨쳐내기 위해 울부짖던 나카야마 미호는 현실 속에선 너무도 이쁜 신부였을 것 같다. 첫 사랑으로 각인됐던 사랑의 아픔은 <러브레터>에서 봉인돼 있을 뿐인 것을. 나말고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와 흔적을 품고 있는 타인을 통해 타임머신에 탑승했던 그녀는 그 존재감만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웠었다.
망자는 이미 세상과의 접점을 차단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망자의 꼬리를 떨쳐내지 못하곤 한다. 그 사람을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 잊으라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있었던 것을 ‘바보같다’'고 치부하거나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카야마 미호는 결국 결혼을 선택했다. 매년 겨울, 하얀 눈과 편지를 떠올리며 비디오플레이어를 돌리는 <러브레터>를 다시 보게 되면,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반사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추신) 뒈길, 어줍잖지만 두 여인은 내게 영화의 이미지 자체로 담겨 있었나부다. 나야말로 바보같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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