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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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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하시나. 크리스찬 슬레이터.

영화 관련 소식보다는 사고를 치거나 염문설 등에만 등장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
커리어 관리 실패의 전형으로 이름이 가끔 들먹거린다.
내 기억으론, 물밖에 보이질 않았다는 <하드레인>이 치명적이었다.

크리스찬은 이제 곧 사십이 될 테고, 더 이상의 모멘텀이 없다면, 아주 쓸쓸히 잊혀질 것이다.
또 모르지만, 불같은 재기의 악셀을 밟을 수도 있다. 물론 할리우드의 필요에 의해서겠지만.
크리스찬의 재능을 소진하고 소비한 그 할리우드가 말이다.

<볼륨을 높여라>나 <트루 로맨스>를 보자면, 아주 열광하고 싶어진다.
그 당시의 그에겐 누군가를 미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주 가끔은 그 모습이 그립다.
다시 그의 재능과 연기를 므흣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

2003년 오픈아이에 크리스찬 슬레이터를 그리며 긁적인 단상.


살아있다, 사랑한다, 불만있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녀석, 꽤나 거침없고 시쳇말로 '싸가지'따위도 없었다. 그 녀석이 스크린상에서 내뱉었던 말을 들어보자. "젊고 빠르게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지, 뭐. 인생이라는 게..."

오! 브라더스. 사람살이라는 거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란 사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리다니. 별반 인생에 쨍하고 볕들 날 없어 보이는 녀석의 세계관은 그냥 시니컬 그 자체다. 인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를 해 대는 성직자나 선생 등 여러 꼰대들이 들으면 설교나 빳다를 들겠지. 그래도 그 녀석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듯한 그 말이 왠지 더 진실 같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너무 진지하면 짜증난다. 엄숙함 같은 건 딱 질색"이라고. 맞다. 그 엄숙함은 언제나 세상을 은폐엄폐하고 현실을 혹은 진실을 왜곡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질러버리고 속에 너무 많은 걸 묵혀둘 필요는 없다.


삐딱선을 타다...

크리스천 크리스찬 슬레이터. 이 삐딱한 반항아. 그 건들대는 몸짓과 은근히 쏘아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녀석은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선 불만 있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 이제 잘 나가는 스타나 배우가 아니다. 한때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탄탄대로를 보장하는 엘리트 코스는 체질상 맞지 않아서였을까. 사생활에서 잦은 폭력이나 마약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인기나 연기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건 왠지 그 녀석답기도 했다. 인생은 어차피 젊고 빠르게 살다 가는 거 아닌가 말이다. ^.^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인생은 그런 선택을 요구할 때가 있다.


볼륨 좀 쪼까 높여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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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라>는 그런 녀석이 처음 강렬하게 각인된 영화다. 국내 개봉당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던 이 영화는 숨은 다수에게 일종의 '보석'같은 존재다. 뽀송뽀송한 얼굴로 어리버리 고등학생을 연기하던 그 시절, 그 녀석은 참으로 신선했다.

특히 해적방송을 통해 쏘아대는 녀석의 살풀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봉건적 교육 시스템 내에서 획일적인 인간을 양성하고 훈육해대던 당시의 내가 처한 시대상황도 영화의 임팩트에 한몫했다.

낮에는 순진한 모범생에서 밤만 되면 해적방송의 DJ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마크 헌터로 분한 녀석은 반항적이면서 비타협적이고 저돌적이었다. 마크는 '또 다른 나'를 여과없이 쏟아냈다. 파괴적이고 격정적인, 또한 성적인 신음이나 멘트까지도.

모범생은 혆실속에서도 반항아가 되었고 싸웠다. 거대한 학교당국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그것이 바로 그 녀석이었다. 현실에서 무기력한 학생에 지나지 않던 나는 그 녀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좋아졌고 그 건들거림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발산이 부러웠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싶었고 그 녀석이 볼륨을 높였던 방법을 빌리고 싶었다.


Tal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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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볼륨을 더 높인 <초보영웅 컵스>를 지나 <트루로맨스>에서 그 녀석은 폭발했다. <...컵스>에서 형의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와는 달리 그 익살맞음과 짓궂음은 인상적이었고 <트루로맨스>는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슬렁슬렁 세상과 마주대하던 그 녀석에게 닥친 엉뚱한 파고. 로맨스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는데 피가 온 사방으로 튀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주윤발을 좋아하고 매춘부를 사랑했던 만화가게 청년, 클로렌스에게 유일한 낙이라곤 토요일 밤 동시상영 극장에서 홍콩영화를 본 뒤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크리스찬은 세상과 삐걱대던 반항아에서 아예 세상을 왕따시키기 시작했다. 피는 사방에 튀겼고 '트루'에 방점을 둔 엉망진창 로맨스투어가 진행됐다. 그 녀석은 피가 가득찬 잔과 인육을 집어넣은 햄버거를 들고 세상을 이죽거렸다. 부적응자는 선악 어떤 구분도 없이 먹고 살기위해, 아니 트루라이프를 위해 흥건하게 피를 흩뿌렸다. 그 피에 흠뻑 젖었던 그 시절의 기억.

그 녀석은 또 그런 얘기를 했다. "Talk hard"라고. 용기를 가지란 그런 얘기. 내가 꿈꾸는 것 역시 트루라이프였다. 차라리 핏빛으로 뒤범벅될망정 무채색 인생은 싫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그래서 크리스찬의 무한질주가 마냥 부러웠나보다.

하지만 그 녀석은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을까. 점차 하강곡선을 그리며 스크린상에서 힘이 떨어졌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일급살인> <브로큰 애로우> <미스터 플라워> 등 그와의 만남은 계속 됐지만 어쩐지 더 이상 반항의 눈빛을 거둔 그 녀석에게서 볼륨을 높일 수가 없었다.

가끔 집에 있는 <볼륨을 높여라> 비디오를 볼 때마다 그 녀석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반항의 기운을 걷어내자 그 강렬함이 힘을 잃은 탓에 녀석을 기억하기 위해 재생장치를 돌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과거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계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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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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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9.02.05 16:40 신고  Addr  Edit/Del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