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685,616total
  • 2today
  • 41yesterday
2010.06.09 11:56 러브레터 for U
이게 다, 최근의 내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호스피스 스님과 수녀님들의 이야기, 《이 순간》《죽이는 수녀들 이야기》.

올해도 빠지지 않고 돌아왔다. 5년째, 내 심장을 울린다.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그리고, 어쩔 수 없이 6월이다.
11년 전부터 내게 굳이 의미를 부여하던 6월.


그렇게, 그 모든 것이 모인 것이 이 노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만날만날 듣는다. 흥얼거린다.
승환 형이 휴먼다큐 <사랑> 중 '너는 내 운명'을 보고 만들었다는 이 노래.

승환이 형, 최근 10집이 나온 마당인데, 자꾸 이 노래만 듣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운명이다.


그때까지 다른 이 사랑하지 마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행복한 거짓말, 은밀한 그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랑.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6월. 한해의 반이 지나갈 시점. 그래서일까. 유난히도 얼룩이 많은 것은. 무언가 아쉬워서? 아니면 부족해서?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언가 차고 넘쳐서?

그 6월의 복작복작한 풍경에, 올해 한폭의 그림이 추가됐다. 촛불. 쇠고기에서 본격 점화된, 우리네 촛불. 2008년 6월은, 그렇게 촛불로 밝혀졌고, 그렇게 촛불과 함께 뜨거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6월에 활짝 핀 '개나리'덕분이었다. 이 땅의 위정자 '나리'들은, 알고 보니 '개'였다는 사실. 2008년의 6월은 개나리가 활짝 핀 촛불시즌. 내겐 그렇게 기억되겠다. 나는 그렇게, 6월이 아프다.  

아래는, 2004년 6월에 긁적였던 <아들의 방>에 대한 단상. 그래,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균열을 버티고 견뎌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해 6월, 우리가 또 다른 사건사고와 맞닥뜨리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달려야 한다.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혼자 달리다보면 누군가가 함께 옆에서 뛰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느슨하게 연대하겠지...  하지만, 99년 6월의 균열은 정말 큰 상처였다...

=====================================================================================

‘6월’은 유독 공동체의 기억을 많이 품고 있다. 또 그 기억은 유난스레 핏빛과 붉은 색이 도드라진다. 그러고보면 6월은 ‘평온’과는 거리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 2002년. 월드컵이라는 거대 이벤트가 불러온 ‘붉은 악마’가 온 나라를 들썩이고 들끓게 한 반면 이 함성에 묻힌 채 미군의 군화발에 짓밟힌 두 영혼, 미선이와 효순이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4년 전 6월 15일에는 적색국가로 공동체의 안보의식에 뿌리박힌 북한을 방문, 역사적인 악수를 청한 ‘6·15공동성명’이 있었다.

세월을 건너뛰어 1987년에는 6·10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라 거대한 광장을 형성하면서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훌쩍 세월을 거슬러 20세기 한국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아픔을 토해내곤 하는 1950년의 6·25가 있었다. 6·6 현충일도 있다.

그리고 22일 김선일씨의 주검이 공동체의 기억 속에 박혔다. 한국민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라크 저항세력 앞에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김씨의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또 그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 김씨의 주검은 공동체를 경악과 분노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같은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도 개개인마다 사적인 기억의 풍경 또한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내게도 6월의 풍경화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스크래치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런저런 잊지 못할 사건들이 길지 않은 삶을 관통하고 있다. 그 어떤 날에 박힌 기억은 내 일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공동체나 개인의 사건과 기억들이 뒤범벅돼 있으리라. 지우거나 불태우고 싶은 기억도 있고 심하면 인생에서 없었던 것으로 해 버리고픈 나날도 있을 것이다. 반면 반드시 소중하게 품고 영원히 기억될 나날을 가꾼 사람도 있으리라. 세세한 사변적인 기억들은 그렇게 일상 속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쳇바퀴 같은 삶’이라는 둥, ‘반복의 연속’이라는 둥, 대개의 사람살이는 그렇게 칭얼댄다. 사실 현실에 발을 붙인 일상적인 삶의 풍경은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와는 머나먼 나날이지 않는가. 오히려 지리멸렬하고 팍팍하다거나 지지리 궁상같다는 표현이 더 끈적끈적하게 와 닿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니면 더 좋고. 그래도 그 나달나달한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고 느끼는 것이 또한 사람살이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균열 앞에 선 삶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 와중에 여기, 균열이 일어난 삶의 풍경이 있다. <아들의 방>은 그 ‘균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느닷없이 찾아온 일상의 균열은 굳이 영화나 소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일어날법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혹자는 견고하다고 자부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균열에 대한 인과관계만 형성되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정해진, 계획된 범위에서 삶의 궤적을 그려나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평온하고 안정돼 있다고 생각하는 삶 속에서도 균열은 부지불식간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그건 ‘며느리도 모르’는 일이니까. 호숫가에 퍼지는 잔물결처럼 삶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균열은 사실 예고가 없다. 물론 파장이 짧아서 노곤하고 지루한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거나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균열은 어떤 인과관계나 맥락 없이 일상을 기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로기로 몰릴 수도 있음을 감안한다면 ‘균열 이후’가 기실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준비’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 기습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일어나지 않으리란) 확신’보다는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사랑, 이별, 죽음 등 어떤 형태로든 삶이란 호수에 파장을 일으키는 균열은 ‘전과 같지 않음’을 상정한다. 어떤 형태의 균열을 거친 뒤 변함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그것을 겪은 사람은 알고 있다.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읽거나 경험해도 이전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Before' 그리고 ’After' 두 단어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삶은 기실 균등하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가족이 있다. 온화하고 침착한 정신과의사 아버지, 사랑으로 가족을 돌보는 어머니, 사춘기지만 큰 말썽 없이 부모님 말 잘 듣고 따르는 딸과 아들. 서로를 신뢰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의 풍경은 안정적인 사각(四角)구도를 이루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도 이상적인 가족 풍경이다.

여느 때처럼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급작스런 환자의 연락에 아버지는 아들과의 조깅 약속을 미루고 아들은 할 수 없이 친구들과 스쿠버다이빙을 간다. 그리고 사고는 예기치 않게 문을 두들기며 아들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안정적인 사각의 한 변을 잃은 가족. 균열은 그렇게 평온하던 가정의 균형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 모서리가 빠진 구도는 좀처럼 예전처럼 안정적일 수가 없다.

이처럼 갑작스레 뻥하고 뚫린 빈자리로 인해 구성원들의 삶은 휘청거린다. 아버지는 조깅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시에 당시 갑자기 자신을 호출했던 환자를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자신의 괴로움에 못 이겨 환자들의 고통을 돌볼 여유가 없는 정신과 의사. 다른 사람의 심정적 안정을 다스리는 정신과 의사가 막상 자신에게 닥친 균열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어머니 역시 안정감을 잃은 채 아들의 여자친구를 통해 곁에 ‘없는’ 아들의 흔적을 찾으려한다. 온순하던 딸은 점점 난폭해지면서 농구 경기 중 퇴장을 당하기도 한다. 가족은 그렇게 한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돛단배에 몸만 건사한 채 풍랑에 휩쓸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한 축을 잃어버린 배가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다.

남은 가족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지만 함께 있는 순간에도 그들은 전과 같이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수 없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은 현실에서 여과 없이 투영되고 차마 내뱉지 못하는 가슴 깊은 구석의 안타까움이 자맥질한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 균열을 가져왔던 인과관계를 따지고 싶어 할 뿐이다. 되돌릴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그러니까, 혼자 달려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죽음이 갈라놓은 것은 단지 이승과 저승의, 땅과 지하(혹은 하늘)의 공간적 경계만이 아니다. 남은 사람들의 일상을 이전(before)과 이후(after)로 구획 짓는 것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자식이나 부모, 혹은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겐 고스란히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에릭 클랩톤이 네살배기 아들이 옥상에서 실족사한 뒤 내놓은 ‘Tears in heaven’을 들으면 그의 슬픔과 진한 부성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얼마 전 더 이상 공식석상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아들의 방>은 죽음을 앞둔 긴장과 슬픔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죽은 ‘이후’의 남은 자들의 감정의 결을 보여준다. 그 어떤 설명이나 개입 없이, 때론 거칠게 날 것 그대로, 남은 자들의 흔들림이 현실적으로 드러난다. 과장되거나 부족함 없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도 아들 혹은 동생의 방이 ‘비었음’을 인정하고 그 슬픔과 격정을 감당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래도 삶이 지속되고 있음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자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다시 일을 한다. 일상 속에 발을 담가놓고 아무 일 없듯 표정 관리를 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 그것이 때론 지옥 같은 일로 불쑥 다가옴을.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갑작스레 뇌리를 스치는 떠난 자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 특정 장소나 행동, 어떤 사물을 접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모습. 죽은 자는 그렇게 가고 없지만 추억은 방울방울 남은 자들의 슬픔의 감정을 자극하고 박제되기 마련이다. 특정 기억을 팔 수 있는 가게는 없다. 그 기억을 빼고선 정체성도 없다.

<아들의 방>은 또 찬찬히 보여준다. 그들이 ‘아들’을 뺀 일상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아들의 흔적을 ‘변화 없이’ 유지하고 싶어 한다. 무전여행중인 아들의 옛 여자친구가 집 앞을 지나다 들렀고 빈자리에 여전히 허우적대던 그들은 그녀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를 그들이 원하는 곳까지 밤새워 차로 태워주고 밥을 먹이고 떠나보낸다. 그런 와중에 그 둘이 사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깨닫는 듯 하다. 아들의 빈자리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함을.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있음을. 온 가족이 화목하게 웃고 떠들던 이전의 ‘가족 찬가’와 같지 않고 다시 되돌리지 못할 시간이겠지만 일상의 균열에 각자 대처해야 함을 말이다. 아들과 달리던 길, 이젠 아버지 혼자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 한통의 전화에 너를 잃게 될 줄이야.
악착스런 승부근성이 없어도
그저 묵묵히 침묵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그렇게도 특별했던 너
그래, 너는 어쩌다 마법의 동굴에서 잠깐 길을 잃은 거야.
인생을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
그래도 아들아
너에게 꼭 하고픈 말이 있었는데
시간을 돌리지 못하는 아빠를 용서하렴.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래서 너의 웃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