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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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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할 때, 폴짝 땅을 딛고 허공에 발을 놀리고 있을 때,
가장 알흠다운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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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년을 참으로 좋아했다.
권투를 종용하는 아버지의 강권을 뒤로하고,
발레를 택하는 소년의 속깊은 강단이 그랬고,
탄광촌 노동자 집안이라는 가정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꿈의 부름을 따라 자신만의 몸짓으로 세상과 맞장뜨는 어른스러움이 그랬으며,
여자들과 섞여서 전혀 어색함 없이 노닐고,
커밍아웃하고픈 친구를 대하는 사려깊음도 그랬다.
특히나, 뜀박질하고 춤을 추는 장면에선,
눈물을 자아내는 꼬맹이 녀석.
어쩜, 나보다 낫다. 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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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소년의 이름은,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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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무장한 대처리즘이 노동자를, 서민들을 가혹하게 옥죄던 시대.
어쩌면, 미운 오리 새끼 같던 녀석이었다.
아버지나 형의 실존적 고민은 아랑곳 없이,
그저 자신의 꿈에만 매진하고픈 개구쟁이였다.
그래서 녀석은 뛰고 굴렀다.
권투글러브 대신 토슈즈를 신고.
꿈을 좇아, 마음을 따라.
중력을 거슬러 힘껏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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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다시피, 녀석은 백조가 됐다.
역시나 비상할 때 가장 아름다운.
나는 그런 빌리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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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빌리는 이 소년,
제이미 벨.
주근깨 빼빼마른 어린 댄서.

그랬던 녀석이,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간간히 <킹콩> <아버지의 깃발> <점퍼> 등을 통해 얼굴이나 소식을 접했지만,
아무래도 압권은, 바로 이 영화,
<할람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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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잘' 자란 아해들을 보면, 므흣해진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더구나, 그곳은 곳곳에 함정과 늪이 도사린 엔터테인먼트의 세계.
매컬리 컬킨, 브래드 렌프로, 린제이 로한, 드류 배리모어(비록 재기에 성공했지만..) 등등은,
망가진 채 진창을 헤맸다.
그러나 제이미 벨은, 역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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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녀석 불안정하고 별나다.
나무 위 오두막에 서식하거나,
항상 무언가를 훔쳐본다.
특히나, 다른 이들의 애정행각을.
한마디로 '피핑 톰(Peeping Tom)'.
어른이 돼 가는 녀석의 이름은 '할람 포'.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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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할람, 트라우마로 똘똘 뭉쳤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와는 충돌한다.
그러고보면, 빌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엄마라는 완충장치가 없었고, 아빠 세대와는 불화.
빌리가 다른 아이들의 발레하는 모습을 훔쳐봤다면,
할람은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나누는 모습이나 어머니를 닮은 여인을 훔쳐본다.
다만, 좀더 크다보니 할람의 성장통이 좀더 다이내믹하고 빡센 측면이 있다.
새엄마를 증오하면서도 성적열망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이디푸스의 상흔이 뚝뚝 묻어난다.
혈혈단신 런던으로 가출해 시계탑 뒤 다락에 기거하면서 훔쳐보기를 멈추지 않는 할람.
잘 사는 집안을 뛰쳐나온, 세상 물정 모르는 반항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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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잘 자란 제이미 벨이 그냥 피핑 톰으로만 머무를리 없잖은가.
열여덟(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이 밍숭맹숭한 건, 어쩌면 인생에 대한 모욕.
이 알흠다운 청년이 너무 반듯하기만 하다면 그것 또한 심심.
역시나, 그의 알흠다움을 알아본 한 연상의 여인.
엄마를 빼다 박은 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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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디높은 관음의 둥지에서 희한하게 건져올린 사랑.
그녀와 함께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모습은 완전 기시감.
앗, 그놈이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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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그 사랑이 항상 탄탄대로는 아니지만,
트라우마를 완전 극복한 것도 아닌 듯 하지만,
훔쳐보기를 그만두게 됐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할람은, 그 옛날 빌리처럼 고통 속에서 피어난 성장의 한 단면사를 보여준다.
탄광촌을 벗어나, 고딕풍의 건축물이 우뚝 솟은 에딘버러의 풍경은 그런 할람에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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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meff에 이어 다시 본, <할람 포>.
아마 당신도 이 영활 본다면, 훌쩍 이런 말이 건네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어쩜, 이리도 잘 자랐니, 제이미 벨."
뭐 이렇게 잘 자랐으니 앞으론 걱정 안해도 되겠다고?
맞다. 빌리도 그랬지만, 할람도 묘한 안심을 심어준다.
흔들리고 불안하면서도 외줄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은.
그건 곧 '제이미 벨'에 대한 안심.
할리우드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흉악함에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함.

...“그들 모두가 자신이 갖지 않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구라는 땅에서 20년 정도를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지옥 같은 날들이 많이 남아 있군. 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앞으론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난다. 특히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때 오스카를 수상하지 않은 게 나의 행운”이라고 말하는 벨은 클럽과 재활원을 부메랑처럼 오가는 ‘셀리브리티’가 되는 대신,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욱 내기를 걸고 싶어지는 스물두살의 흥미로운 배우로 성장했다...  - 씨네21 최하나 기자의 글 중에서 -

그런데 언니들은, 누나들은 정말 좋겠다.
이만큼 잘 자란 완소남이 있어서.
완전 누나들의 로망.
아마, 이런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겠지? ㅎ 오메, 부러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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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말한다.
"맙소사,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나는 남자다. 사람은 자란다니까."
("I’m not a kid now, Jesus. I’m a guy. People grow.")
어잌후, 한방 먹었다. 짜식.(입가에 미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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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난 은근히, 이 누나(소피아 마일즈)가 매력적이더만.
완전 예쁘진 않지만, 사람을 막막 끄는 매력이 솔솔 있더라구.
그래서, 나는 이번에 다시 생각했건데,
18살이 아니어서, 다시 한번 참으로 분했다.
그때 내겐, 왜 이런 누나가 없었냐고!!! 흑...
눈물 나. 된장. ㅠ.ㅠ



2007/10/21 - [메종드 쭌/시네피아] - 훔쳐보기의 성장사, <할람 포> & 비극의 속깊은 이해, <그르바비차>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10.22 16:16 메종드 쭌/무비일락
올해 8회를 맞은 메가박스 유럽영화제(meff). 역시 빼놓을 수 없지. PIFF에 이어지는 나의 연례행사. 그리고 지난 12회 PIFF 때, <할람 포>를 리스트에서 뺀 것은 유럽영화제에 프로그래밍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람 포>는 그렇게 나의 기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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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포스터. 출처 : www.meff.co.kr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할람 포>를 만날 설렘으로, 나는 meff를 기다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할람 역을 맡은 '제이미 벨'을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다. 훌쩍 커버린, 쪼메난 발레리노 소년의 또 다른 성장담. 영화가 괜찮다는 입소문까지. 그 중간에 <데쓰 워치> 등이 있었지만, <할람 포>는 입소문을 통해 제이미 벨의 '바람직한' 성장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고통을 거쳐 제이미 벨은 또 성장의 역사를 그릴까. 궁금궁금.

그리고 영화를 본 뒤,
나는 '훔쳐보기의 성장사'라 는 타이틀을 덜컥 달아줬다. <할람 포>에. 물론 할람은, 이 타이틀을 좋아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어. 할람은 훔쳐보기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세계와 만나는 한편으로 어줍잖지만, 타인과의 소통을 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성장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지. 훔쳐보기가 도덕적, 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훔쳐보기에 따른 댓가도 치러야 한다. 여느 성장통이 그러하듯.
 
그렇게 시종일관 훔쳐보고, 지켜보는 할람의 시선. 그 시선은 어머니를 얼척없이 잃은 소년의 트라우마와 겹쳐 있다. 할람은 불안정하고 별나다. 그런 할람에 제이미 벨은 제격이더군. 전작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그렇지 않았는가. 빌리에게도 어머니는, 저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충돌했다. 아버지 세대와의 불화를 통해, 빌리도 할람도 성장의 고통과 기쁨을 관통하고 있었다. 빌리의 제이미 벨도 다른 아이들이 발레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훔쳐보기를 통해 자신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도시로 가출한 할람도, 어머니를 닮은 한 여인을 훔쳐보면서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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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할람이 훔쳐보기를 통해 엮은 소통과 성장의 굴곡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 엄마에 대한 용서도, 아버지를 통해 들은 진실도, 할람의 트라우마를 씻은 듯이 치유하진 못한다. 사랑 역시 그리 만만치 않다. 어쩌면 할람은 훔쳐보기를 그만두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선, 할람을 그닥 걱정하고 싶진 않았다. 바로 그 빌리처럼, 할람은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제이미 벨의 너끈한 연기 덕분이었을까. 그는 흔들리고 불안하면서도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묘한 안심을 심어준다.
 
음악 또한 할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영상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영상 밖으로 튀어나와 오버하는 감도 있었지만, 할람이 혼자임을 토로할 때, 고통이 극대화할 때, 그 음악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그리고 제이미 벨, 아주 바람직하게 컸네. 극중에서 할람이 뜀박질을 하거나 그런 포즈를 취할 때마다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빌리를 다시 보는 듯한. 제이미 벨이 가장 빛나는 순간 아닐까 싶다. 아오이 유우가 발레 장면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처럼. 저렇게 바람직하게 커줬으니, 누나들이 완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누나들의 완소남 혹은 로망, 제이미 벨. 어쩌면 빌리 혹은 할람. 성장영화를 통해 계속 자라고는 있으나 그도 성장영화의 틀을 벗어던질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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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컸다. 제이미. ^.^ 누나들이 좋아하겠어~ 그래서 혹시, 용서가 됐을까. 피핑 톰, 할람의 훔쳐보기를 용서한 극중 연상의 여인도 혹시...^^;

흠, 그래서일까.
김혜리 씨네21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18살이 아니어서 분하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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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또 하나의 시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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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포스터. 출처 : www.meff.co.kr

<그르바비차>
.
지난해 3월 56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행했던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수상소감이 나를 이 영화로 이끌었다. 영화는 보스니아 사태 당시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고통을 다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간절히 소망한다. 보스니아는 이제 서구 미디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보스니아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강간 피해자들은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사회생활의 최저단계에 놓여 있으며, 한달에 정부로부터 겨우 15유로를 받으며 살아간다. 내 영화가 많은 시선을 끌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기만 빈다."

<그르바비차>는 발칸반도의 비극에서 파생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미디어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비극에 희생당한 보통 사람들의 힘겨운 일상과 비극으로부터 파생됐으나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 사실 그 비극은,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어떤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극과 이들에 대해 몰랐던, 아마 외면했던, 우리들의 무관심에 작지만,  반드시 필요한 경종을 울린다.

<그르바비차>는 비극을 사유하는 방식이 담백하되 깊었다. 그것은 비극을 다루고 전달하는 방식 때문이다. 비극의 통시적 관찰과 전시보다는, 그 비극에서 비롯된 잔해와 후유증을 일상과 함께 더듬었다. 비극의 직접적이고 스펙터클한 전시를 꾀한 <화려한 휴가>보다 성숙한 시선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르바비차> 같은 영화가 더욱 울림이 크고 좀더 세밀하게 사건을 찾아보게끔 만든다. 관객의 사유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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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그리고,
여성 감독이라 그런지, 여성들을 세심하고 잘 보듬고 있었다.
극 중에서 전사자에 대한 보상시스템은 완벽하게 남성위주의 시선이었다. 전장에서 희생당한 남자들은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족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역시 같은 비극을 통해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은 어떤 식으로도 보상이나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저 여성들만의 연대에 족하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남자 중심으로만 보상체제가 구축된 사회적인 시스템에 역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딸의 수학여행을 위해 '전사증명서'를 떼지 못한 채, 월급을 가불해서라도 이를 마련해야 하는 여성의 비극.

나는 주인공인 에스마를 보면서, 왠지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그 나라의 정부, 비극과도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미안했다. 거참. 그리고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을 좀더 알고 싶어졌다. 미디어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어떤 비극을. 우리는 과연 이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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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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