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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7.29 갓 퐈더, 브란도 형님, 잘 계시오?
  2. 2007.07.02 영원한 대부, '말론 브란도' 3주기
그, 빠바바바 바 바바, 빠바바바 바 바바... 하고 사운드가 기어나올 때,
나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런 감격이 있나, 허. 눈물까지, 시큼.

<대부>를 필름으로 첫 대면하는 그 순간.
이제야 필름 스크린으로 알현하게 된 송구스러움도 꾸물거리고,
지금에라도 필름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도 꿈틀대고,
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엔 내 필력이 딸릴 뿐. 띠바.

<대부>가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빌어먹을 가족 서사는 지금에서도 충분히 현실을 향한 사유를 가능케한다.
하긴 어느 시대에든, 이 서사가 사유와 흥분을 멈추게 할 리는 없지.


아울러, 말론 브란도가 아닌 돈 콜레오네는 상상 불가능.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탓해도 어쩔 수가 없다. 된장.

그가 떠난지 6년.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돈 콜레오네가 쓰러질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부>에선, 시쳇말로, 브란도의 미친 존재감!이 캐작렬.

말론 브란도를 그렸다.
지난 1일이 6주기였다. 아래 기고문은 그래서 나왔다.

p.s. 지난 5월에 개봉한 <대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은,
아직 극장(씨네코드 선재)에 걸려있다. 놓치지 않길 권한다.
특히, 필름으로 아직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오는 30일 팡파레를 울리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 서울!

그 바캉스 시즌에 <대부>가 역시 껴 있다는 즐거운 소식.
8월8일(일) 김영진 평론가의 씨네토크와 함께 펼쳐지는 <대부> 박항스~
13:00다. 엔간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



말론 브란도,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부정한 이름
예술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지난 5월 <대부>가 재개봉했다. 국내 개봉이 1977년(미국은 1972년)이니, 33년 만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이번 버전은, 향수와 함께 바뀐 세대의 스크린 경험을 위한 것이겠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부>는 그렇게 다시 왔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난 <대부>는 위엄 있고, 웅장했다. 경건함과 비장미까지 갖춘 고전적 서사의 재등장이었다. <대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후광효과에 기댄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대부>는 표피만 놓고 보자면, 마피아 협잡극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오해가 되겠다. 마피아로 포장됐을 뿐, <대부>는 당시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관된 문화적 산물이자 서사였다.


마리아 푸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로 우선 각인돼 있다. 재능 있는 신예 감독에서 이 영화로 거장 대열로 성큼 올라선 코폴라의 연출력이 <대부>를 만신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마피아 세계를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류학적으로, 뭣보다 누구도 자유롭기 힘든 가족서사로 <대부>는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돈 콜레오네였던 사나이


그 핵심에, ‘돈(비토) 콜레오네’가 있다. 가족과 패밀리의 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오해받는) 가부장, 돈은 <대부>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말론 브란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제임스 딘도 선망했던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그는, 당시 전성기가 지난 처지로, 제작사는 그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다. 코폴라의 고집이 위대한 <대부>를 만들어냈지만, 돈을 스크린에 현현시킨 것은 전적으로 브란도의 공이었다.



여기, <대부> 카메라 테스트에서의 일화. 브란도는 구두약을 머리에 발라, 비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설 속 인물이 불도그 같이 생겼으니, 화장지를 입안 양쪽 볼에 집어넣었다. 늙은 얼굴과 염색, 어눌한 말투까지 곁들여 우리가 아는 비토, 대부는 창조됐다.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편으로 브란도가 비토를 맡은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이나 스크린에서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연기는 노동자 계급의 것에 가까웠다. 앞선 남자 배우들이 도덕군자와 정의의 사나이에 붙박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그는 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그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 <아가씨와 건달들> 등을 통해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반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는 당대 미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50~60년대 젊은 미국에게 어울리는 배우였다.


침체기였다고는 하나, 그런 반영웅이 선택한 <대부>는 의외였다. 말하자면, 돈 콜레오네는 가부장의 화신이다. “내 말이 곧 법”인 마피아의 절대군주로,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 아버지. 세월에 굴복한 것일까, 그도 늙은 것일까. 아버지가 만든 기성의 규율에 반항하고, 투쟁했던 그가 전성기 이후에 택한 배역이 아버지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거친 짐승 같은 그가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그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반항 기질과 퇴폐적인 매력은 불혹의 나이에도 어딜 가지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짐승을 어찌하겠는가.


파리에서의 한 가지 표정, 브란도


<대부>의 선택이 아버지의 규율에 편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다. 브란도의 다음 선택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졌다.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얼굴. 부성의 체화가 불러온 반발이었을까. 신랄하고 퇴폐적인 폴로 변신한 브란도의 무기력한 정사가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정사를 나누면서 그는 외친다.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세상에 지치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폴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하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허무가 감싼 폴의 얼굴. 그것은 또한 브란도의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증명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개봉 즉시 논란이 됐다.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신 등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것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폴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 그 표정은, 1970년대의 어떤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혁명의 시대가 지났거나, 실패로 끝난 혁명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에 남은 흔적은, 곧 당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끝난 혁명의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던 그 표정.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녹슨 해방구만 남았고, 파멸을 친구 삼아야했던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고.


내가 가장 강렬하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때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파리지앵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자취 때문이 아니었다. 68혁명의 도시를 가고 싶다는 욕구도 아니었다. 숱한 사상과 혁명을 잉태했던 커피하우스에서 향미를 맡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폴의 표정을 잉태한 파리가 궁금했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가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파리에 가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건 브란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배역과 한 몸이 되고 표정으로 말하는 ‘말론 브란도’를 볼 순 없다. 6년 전, 2004년 7월1일, 향년 80세, 그는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무명 시절, 돈을 벌려고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매부리코를 얻었던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이라기보다 반항을 일삼는 터프가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시대를 열어젖혔을 때도, 그는 쉽게 투항하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의 자세였다. 연기에 대해 늘 회의했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불평했지만, 그는 연기했고, 천생 배우였다. 오직 하나였던 배우. 그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죽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일.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일. 그것이 버르장머리 없는 반항아의 파괴적인 일탈일지라도 시도해보자. 예술 안에서 당신안의 짐승을 깨워보자.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7·8월호 기고]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덧 없이 스러지곤 하는 인생길. 하나의 생명이 나고 자란 길목에는 무엇이든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것이 티끌만치 소소하건, 밤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나건. 그건 상관없다. 그리고 그 흔적은 인생길목 곳곳에서 파생품을 남긴다.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한 생명과 아무 연관이 없어도 그만이다. 그 길목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고, 우연이 어떤 재밌는 그림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런 글 역시 그런 파생품이다. 나와는 실상 무관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 속에서 생을 영위하던, 어쩌면 몇개의 고리를 연결하면 끈이 닿았을 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추모 혹은 소회. 근데 내가 끊임없이 기억의 회로를 돌려대는 이유는 뭘까. 나 자신도 뚜렷하게 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그냥 인위적으로 분절된 시간의 흐름에서 특정 시간에만 작동하는 무언가가 나의 뇌 회로 속에 있는건가?

어쨌든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가 날을 축축하게 만들 즈음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서 비롯된 오열과 슬픔은 누군가에겐 분명 일상의 분열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는 2년 전 여름 찾아갔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그들과 어떤 일면식이나 인연이 없음에도 묘한 연결고리가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유가족이나 친구들에 비할 바는 완전 아니겠으나 슬픔은 좀더 구체적이 되고 감정도 좀더 애틋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내가 밟았던 땅을 2년 후에 밟은 사람들이 맞닥뜨린 사고.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연상이 가능해져서일까.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리고, 오늘 알게 된 에드워드 양 감독님의 부고 소식에 밀렸지만, 어제(7월1일)는 말론 브란도의 3주기였다. 7월 전후엔 또 하나의 역사들이 자리잡게 됐다. 에드워드 감독님은 미국 현지시각으로 6월29일 돌아가셨다니, 뒤늦게 알려진 셈이다. 그리고 어제는 위대한 배우이자, 영원한 '대부'로 자리매김한 말론 브란도가 떠난지 3년이 되는 날. 생긴 것 하나는 끝내줬던 배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엉덩이가 그토록 육감적이던 배우. 눈빛만으로도 카리스마 짱이던 배우.

지난해 개봉한 <슈퍼맨 리턴즈>에서 CG의 힘을 빌어 스크린에 등장하기도 했지. 78년 <수퍼맨>에서 주인공 수퍼맨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인연 때문이었다지. 78년작의 영상샘플을 가져와 3D 그래픽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면서 죽음 이후에도 존재감을 과시했던 배우.

에드워드 양 감독님도 말론 브란도도 저 하늘의 저편에서 편안하시길. 그러고보니 두 사람. 살아생전 인연은 없었겠지만 구름의 저편에서 만나 영화 한편 찍어보시는 건 어떠실지. 나도 언젠가 구름의 저편으로 가는 날, 두 사람이 찍은 영화를 보게 되길. 3년 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은 뒤 긁적였던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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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만으로 스크린 상에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배우들이 있다. ‘말론 브란도’가 그렇다. 어떤 역할이건 탁월한 연기력과 공력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배우를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영화는 그 배우들로 인해 더욱 빛이 나거나 생명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말론 브란도는 그런 면에서 ‘대배우’나 ‘명배우’란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  

그런 ‘말론 브란도’가 현지시간 지난 1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캘리포니아대학(UCLA) 의료센터 대변인은 폐질환으로 사망했으나 고인이 더 이상은 알리길 원치 않아 더 이상 밝힐 수 없다고 전했다.

어쨌든 명확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영화를 위해 어떤 배역도 맡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스크린 속의 그는 영원히 박제된 채 남아 있겠지만 그가 어떤 영화에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과연 누가 영화 속에서 ‘말론 브란도’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그는 오직 하나였고 그 삶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에서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는 더 이상 영화를 위해, 관객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


파리에서의 그 탱고는 마지막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그의 죽음 앞에 떠오른 건, <대부>에서의 그 강건하고 근엄한 표정이 아니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보여준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그 얼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향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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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자살한 아내를 둔 중년의 폴(말론 브란도)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나누는 밑도 끝도 없는 정사. 폴은 세상에 지쳤으며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뿐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진 그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의 대상이다. 그래서 신상에 대해 묻는 잔느에게 소리친다. “너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는 이름도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거야.” 그건 절규였다.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의 무의미함에 대한. 다수에 의해 타협된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개개인의 본질을 꿰뚫지 못함을 폴과 잔느는 온 몸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불러온 논란만큼이나 말론 브란도의 표정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은 한결 같았다. 그의 얼굴은 혁명의 시대가 지나친 자리에 남은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했다. 파멸은 친구였고 녹슨 해방구만이 남아있었다.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

내가 처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낀 건, 사실 그 영화 때문이었다. 파리지앵들의 우아한 발자취나 흔적보다, 68혁명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보다, 수많은 사상들이 잉태했던 카페에서 맡을 수 있는 사상가들의 향취보다, 파리로 오라고 유혹한 건 말론 브란도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그래서 파리가 궁금했다. 파리에 가면 그렇게 되나 싶어서. 물론 그건 말론 브란도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말론 브란도의 몫이었다. 앞으로 누구도 그 모습을 대체할 수도 없을 테고 표정은 더욱 난감하다. 내게 있어 파리는 이제 더 이상 탱고를 출 수 없는 도시다. 이미 그건 말론 브란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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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잔느는 서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다.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영원한 ‘대부’로


그는 사실 ‘부러진 코’를 지녔다. 무명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인상 깊은 매부리코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의 이미지보다는 터프하고 강인한 인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날 때부터 탁월한 연기자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보다 배우였던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말론 브란도는 미네소타의 연극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가 퇴교당한 뒤, 뉴욕으로 가 ‘스텔라 애들러’를 스승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당시 그는 스승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천부적인 배우” “브란도가 연기하지 못할 인간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연기력만큼이나 그의 외모는 특출했다. 특히나 젊은 시절, 그는 제임스 딘과 비교되곤 했다. 성난 눈빛은 당대의 젊은 카리스마로 인정받으며 반항아로서 그의 입지를 단단하게 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방황하는 청춘들의 아이콘으로서, 승전국이 된 미국의 전형적인 ‘아메리칸 마초’로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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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카리스마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1951)에서 거칠고 황량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이나 <와일드 원>(1953)에서도 갱두목 역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인정받았다. <워터 프론트>(1954)에서 외로운 복서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딘이 죽어서 신화가 됐으나 말론 브란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인 임팩트가 강한 사람이었고 배우로서의 캐리어를 쌓아갈 뿐 신화가 된 제임스 딘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한때 식탐과 여탐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1950년대의 활발한 연기 활동 뒤 60년대 들어 그는 뜸하게 활동했다. 대신 그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으며 인디언들을 위한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언제나 넘치는 에너지를 곳곳에 발산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 중년의 카리스마를 뽐낸 것이 <대부>(1972)였다. ‘말론 브란도’하면 떠오르는 대명사가 바로 ‘대부’이듯, 그에게서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다. 어눌한 말투의 시실리 출신의 뉴욕 마피아는 말론 브란도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대부’인 ‘돈 콜레오네’에서 시작되는 마피아 가문의 대서사시 첫 장을 장식한 이 작품에서 말론 브란도의 역은 의당 ‘대부’였다.

캐스팅 과정에서 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외에 제작진이나 회사는 말론 브란도를 반대했다. 40대 중반인 말론 브란도가 60대로 키가 작고 뚱뚱하며 회색머리를 가진 돈 콜레오네를 맡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폴라 감독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가진 스크린 테스트의 돈 콜레오네 역이 극찬을 받았는데 그 분장을 한 이가 바로 말론 브란도였다. 늙은 얼굴과 염색, 입안에 솜뭉치까지 넣어 어눌한 말투로 완벽히 변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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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으나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반항 기질은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했고 연기에 대한 열정만은 변함없었다. 영화계의 ‘대부’마냥 그는 영화를 통해 생의 끝 날까지 자신을 확인했다. 말론 브란도는 지난해 6월에 애니메이션 <빅 벅 맨>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았고 자신의 생애를 담을 예정이던 <브란도 앤 브란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말론 브란도의 반세기를 넘은 연기 일생의 마무리를 통해 분명 한 시대가 접혔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말론 브란도는 그러나 연기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했다. 따분하고 지루하고 유치한 것이 연기라는 소회를 내뱉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그럼에도 그는 천상 ‘배우’였고 영원히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신화는 되지 못했지만 ‘대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는 영원히 박제된 ‘대부’로서 그를 좋아했던 영화 팬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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