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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18:13 메종드 쭌/무비일락
<씨네21> 763호의 피쳐기사인,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를 만나다 ① -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무척 흥미롭다. 세 명외에 정성일, 허문영 씨까지 해서 다섯 영화문필가들이 나누는 대화는, 흥미진진한 탁구경기를 보는 것 같다.

뭐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니고, 좀 엉뚱한 거다. 피쳐기사의 첫 장면에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사진을 보자마자 팡~ 터졌다. 김혜리 여사님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에 비해, 사람남자 둘의 포즈와 표정은 뭐랄까. 뭔가,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

사진은 여러모로 재미난 대비를 이룬다. 시소를 놓으면 사람남자 둘 쪽으로 기울어야 할 듯 싶지만, 구도 등 여러가지를 봐도 왠지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희한하기도 하지. 뒤에 있는 나무들을 봐도 그렇고. 참 재미난 사진이다.

김영진 씨는 몇 년 전, 그가 <필름2.0>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는 기억 못하겠지만) 목소리 좋고, 글 좋고, 무게감 짱이다. 이동진 씨는 광화문의 커피스트에서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고, 몇 번 그가 초대된 행사에 간 적이 있는데, 의외로 유머가 좔좔좔. 그의 글과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사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본인들은 어찌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봤다. 전설처럼 제목만 설핏 들었던 그 영화. 당최 뭐라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내겐 없다. 이동진 씨가 그 자리에 함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였구나. 괜히 반가웠다. 나는 빠돌이까지는 아니지만, 고레에다 감독 작품을 참 좋아한다. 특히, <원더풀 라이프>. 이동진 씨도 참 좋아한다고 했다. 괜히 또 반가웠다.

<환상의 빛>은, 동명의 원작에 나온 구절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좋겠다.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시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p.12) 그날의 기록이다. <환상의 빛>이 내 마음에 틈입했던 기록. 



‘왜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는가’

<환상의 빛> 출간기념 영화평론가 이동진과의 대화


“다만 삶의 하중荷重이, 그 무게가 불현듯 어깨를 짓누르고, 일상의 생의 부담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들면 홀연히,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뿐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질박하다면 그런대로 또 질박하다.”(『도깨비 본색, 뿔난 한국인』, p.251)


물론,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 알 것이다.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욕망. 아니,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저,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 걸어도 걸어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주무주주(住無住住)’라고 했던가.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머무름이라고 했던. 바람이 분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떠남은, 분명 그런 것이다. 이 자리에 있고도 없어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


안타깝다. 어디서 본 표현이었을까. 출처를 미처 적어놓질 못했다. “사슬을 풀고 구름이 되고 싶다. 연줄을 자르고 안개가 되고 싶다. 연관의 고리를 부수고는 물 흐름이 되고 싶다. 우리는 그러기를 바라는 존재다.”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공기인형> 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인 「환상의 빛」을 읽고, 퍼뜩 메모해놨던 이 표현이 틈입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혹은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의 마음이 아녔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미코. 남겨진 사람. 남편이 훌쩍 그렇게 떠난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당최 알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불쑥불쑥 침입하는, ‘왜’를 지울 순 없다. 생은 그렇잖나. 바삐 길을 가면서 모퉁이를 돌다, 전혀 예기치도 않게 첫 번째 첫 사랑을 만날 수 있듯,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아니 10년을 떠올리지 않다가도 느닷없이 한 순간을, 생각을 만난다. 하물며, 어떤 이유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에게서야.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온다. 허무함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감내해야 하며, 느닷없는 슬픔을 만나야 한다. 마침내, 삶에 덕지덕지 묻은 부조리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먹먹했다. 내겐 달리 표현할 방도도, 필력도 없다. 적어도 내게, 그 빛은 환상적이진 않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식상하고 진부하다. 내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을 뿐. 어둠과 빛을 등가로 놓는 감독의 시선에 마음이 때론 덜거덕거렸다. 특별하고 유별난 삶을 다룬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를 직접 비춘 것도 아니었다. 인물을 묵묵히 따라갔을 뿐인데, 그 카메라엔 삶이 묻어났다. <원더풀 라이프> <죽어도 죽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형이라. 명백한 인장이자 징표가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영화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난 7월13일, 서울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상영회였다. 원작인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지음/송태욱 옮김|서커스 펴냄) 출간 기념. “미야모토 테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박명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고 추천사를 썼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혈 팬인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름답고 쓸쓸한데, 장면 몇 개를 잘라서 벽에 걸어두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 한편으로 (그렇게 하면) 한 달 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웃음)” 지금부터 이것은, 그와 관객이 함께 나눈 기록의 일부다. 그 옛날, <원더풀 라이프>에 흠뻑 빠졌던 나는, 그 역시 이 영화의 신봉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무척 반가웠다. After Life…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맺은 인연


“저는 동시대 외국 감독 중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하면 <원더풀 라이프>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의 경험 자체가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매우 깊은 정서적 충격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을 선사한 사람에 대한 원초적 끌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말하자면, ‘고빠(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에 특히 좋아한다다.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 근작인 <공기인형>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환상의 빛>을 찍기 전까지 TV다큐멘터리 등을 찍다가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늦둥이인 셈인데, 이 영화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 중에 처음 본 것은 <환상의 빛> 아니고 <원더풀 라이프>(1998)다. 과할 정도로 좋아한다. 고레에다 감독 필모 중 가장 잘 만든 것은 <걸어도 걸어도>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나 <원더풀 라이프>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 간 이동진 평론가. 이런저런 시놉시스를 훑어보다가 재밌겠다 싶었던 것이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신인인가? 그런데, 이건 뭔가. 영화를 다 본 뒤, 다리가 꿈쩍을 않는다. 감동 먹어서, 영화에 취해서. 별 수 없이 관객과의 대화까지 지켜보게 됐다.


여든 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캐나다에서 오셨다는 할머니가 손을 들고 영화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뭐랄까, 묘했다. <원더풀 라이프>에 나오는 할머니를 언급하면서, ‘나는 오늘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며 예찬을 했다. 그리고선 고레에다 감독이 말을 시작하는데, “아, 저런 사람이니까 이런 영화를 찍는구나 싶더라.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도 감동을 받았다.” 감동 두 배. 이동진이 고레에다에 빠진 날.


그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더풀 라이프> 상영됐다. 극강이었다. 이동진 가라사대. “여태껏 내가 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GV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GV였다.” <공기인형>이 개봉했을 때, 주연배우였던 배두나와 인터뷰를 했다. 배두나가 던진 진담 혹은 농담? “고레에다 감독이 무척 멋있어서 미혼이었다면 프러포즈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유부남만 인기 좋은 더~러운 세상.


물론, 아무리 좋다손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아쉬움, 왜 없겠나. 완벽한(?) 감독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 그러니까, 네(사)가지까지는 아니고. “꽤 많이 만나본 감독 중 하나고, 고레에다 감독도 날 알게 됐다. 그의 영화는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는데, 세 번째 영화인 <디스턴스>만 없다. 만났을 때, 그 얘길 하니까, 반색을 하며 보내주겠다는 거다. 주소를 적어줬는데, 1년이 지나도 안 오더라. <걸어도 걸어도> 국내 상영 당시에도 인터뷰를 했는데, 끝나면서 이 얘길 하니까, 너무 미안해하면서 다시 주소를 받아갔다. 지금, 1년 반이 지났는데...(웃음) 그거 하나만 빼고는 완벽하다.” 고레에다 감독님, 들리세요? 줄 건 주셔야죠. ^.~


환상의 빛, 책과 영화 사이



<환상의 빛> 원작이 번역 출간되면서, 추천사 얘기가 들어왔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 때문에 책을 들었다. 그의 데뷔작을 잉태한 원작은 어떨까.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깜짝 놀랐다. “어떤 면에선 소설이 (영화보다) 더 훌륭한 면도 있다. 플롯으로 읽는 소설이 있는데, 이 책은 문체로 읽는 소설이었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은 중편인데, 문장을 보니 활자에서 소금기 같은 냄새가 났다. 짠 내. 문장이 워낙 좋아서 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남성 소설가가 여성을 화자로 서간체로 풀어나간다는 점이었다. 시쳇말로 ‘삑살이’도 없을뿐더러, 여성 작가도 써도 이렇게는 못 쓸것 같을 정도. 번역도 상당히 좋았던 데다, 예상 외로 소설이 무척 좋아서 기분 좋게 추천사를 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설은 영화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내용을 최대한 줄이자고 작심한 듯 영화를 풀어나간다. “소설에서 유미코가 다미오에게 시집가는 날, 기차 안에서 재일교포 여자를 만난다. 상당히 좋다. 그런데, 영화에선 생략됐다. 또 영화의 첫 장면. 유미코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집을 떠난 뒤 ‘아들이 죽여서 구들장에 묻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경찰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들장을 파본다. 물론 없다. 소설에 있는데, 영화에선 묘사가 안 돼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원형 같은 부분이 역시 있다. 이야기가 될 만한 부분을 거세하고 길을 거닐거나 노동을 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특히,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고레에다 감독은 대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데, <환상의 빛>은 원작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머릿속 꼬마전구가 ‘반짝’했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비유적으로 ‘박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엷을 薄, 빛 明. 일기로 말하자면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순간, 두 번이다. 두 번의 시간이 중요하다. 가장 인상적인 이 시간을, 영화는 프레임을 세로처럼 쓰면서 보여준다. 가로 프레임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문이나 벽을 이용하는데, 열린 문 사이로 좌우 벽을 보여주고 내부를 어둡게 보이게 하면 흡사 세로 프레임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세로 프레임에 애착이 많다. 이 영화 그런 게 많다. 고레에다 감독이 좋아하는 앵글 중 하나가 실내는 어둡고 바깥은 밝은 거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찍는. 근경의 어둠은 실내, 원경의 빛은 실외인 장면을 애호한다. 나는 그것이 폼 잡기로서의 애호가 아니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드러내는 징표라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삶은 어둠이자 실내에서, 빛은 저 멀리 바깥에, 작은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에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눈빛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진단한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이 영화에도 첫 장면부터 있으니까.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그렇듯.


“이건 감독의 인장 같은 거다. 오우삼의 흰 비둘기 같은 거. (웃음) 스타일면에서 이런 특성이 있는 한편, 이야기 측면에서도 그런 게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보면, 저밀도잖나. 드라마틱한 얘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얘기라면 아내가 한 대 후려친다거나 남자를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관습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없다. 재혼도 자연스럽고. 그게 원숙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p.47)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남은 여자. 이동진은 여자의 마음을 따라 간다. 첫 아이를 낳고 3개월, 그러니 생활력도 왕성할 즈음, 아침에 시시덕거리며 출근했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 왜, 왜, 왜!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나. 영화엔 안 나오지만,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다. 그런데, 이 남자가 죽은 거다.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깡촌으로 시집을 가고. 끝까지 해답을 주진 않는데, 영화는 소설보다 조금 더 나간다.”


그것이 클라이맥스였다. 여자가 지금의 남편과 바닷가에서 대화하는 장면. “좋긴 한데, 과하다고 생각한다. 환상의 빛, 바다의 유혹, 죽음의 유혹 같은 건데,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타나토스에 대한 근원적인 유혹이랄까. 살아야겠다는 유혹도 있지만, 스스로를 소멸하고픈 욕망도 있잖나.” 삶과 죽음 사이의 외줄타기. 연인 사이에만 ‘밀당(밀고 당기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밀당이 있다. 생사, 그 다르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그 무엇.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p.60)


남겨진 사람,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



그는 그리하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을 들먹인다. 이유를 찾고 싶은,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생각해보라. 셀러브리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신문은 방송은, 어떻게든 ‘왜’를 규정짓고 싶어 안달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이유가 단순하게 하나일까. 그럼에도 신문의 사회면은, 인간이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을 증명하듯, 불쑥 내뱉는다. “폭음을 한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나. 사실은 90%가 알코올 중독이라서 마신다. 그런데도 이유를 댄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니 뭐니 하면서, 사람은 이유를 갖다 댄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p.59)


다시 돌아가, 이 영화는 고레에다 영화가 그렇듯,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초지일관 남겨진 사람 혹은 던져진 사람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영화, “남편이 왜 죽었을까, 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질문했을 때, 답이 주어질리 만무하잖나.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살아야 하잖나. 그것이 <환상의 빛>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뒤집어 말하면 의미가 애당초 없었을 때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데, 텍스트가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든 예는, 여자가 지하실 계단을 닦는 장면. 오랫동안 여자는 계단을 닦는다. 한참 그것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자가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따라간다. 그때, 남편을 생각했다고 가정한다면, 근원적인 질문은 그렇게 느닷없이 삶에 틈입한다는 것.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끊임없이 그 문제만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남자는 왜 죽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부재와 쓸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여자의 재혼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팬티 하나만 입고 교태부릴 때의 행복도 있다. 그저 현재 생활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는 거다. 그것이 끊임없이 삐죽삐죽 삐져나와 틈입한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영화고 소설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p.80)


이어 이동진 평론가와 가진 질의응답 시간. 


영화 첫 부분에 미스터리처럼 죽음을 몰고선 풀려나갈 것처럼 가다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죽음이후 남겨진 시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레에다 감독은 왜 끝까지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가. 동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전제할 것은, 내가 고레에다 감독은 아니다. (웃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만약 이 텍스트에 반전이 있어서,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거나 ‘재혼남이 그 남자의 환상이었다’고 하면 이 텍스트는 완전히 깨지겠지. (웃음) 고레에다 감독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는다. 나는 고레에다 감독이 아직은 완성된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도상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볼 땐, 방법론적 회의론자 같은 측면이 있다. 장편 7편이 스타일 등이 다 달라서 같은 사람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환상의 빛>에서 롱쇼트와 롱테이크로 찍은 감독이, <원더풀 라이프>에선 전반은 다큐처럼, 후반은 극영화처럼 찍었다. <디스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찍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정해진 각본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배우의 미세한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찍었다. 연기부터 카메라, 편집까지 철저하게 가장 지독한 일본감독이 찍은 것처럼 만들었다. <하나>는 장르영화로 사무라이 코미디이며, <공기인형>은 한국배우를 데려다 만들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찍었던 베드신을 찍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직도 뭔가를 시도해보는 단계인거 같다. 흥미롭고 당분간 이렇게 할 것 같다. <하나>처럼 삑살이를 낼 것도 같지만, 현재 생각으론 끝까지 좋아할 것 같다. 좋은 영화는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고레에다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감독이 완성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완성된 감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고레에다가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의 온화해 보이는 영화들은 의외로 세상이나 삶 자체와의 철두철미한 마찰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에서 촬영 스타일까지, 전부 다르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아마도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끝까지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왔는데, 유미코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어떻게 봤나.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거기다. 유미코가 앙탈을 부리듯이 ‘왜 전부인을 사랑했는데, 나랑 결혼했냐’ 하면서 수습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불쑥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장면을 영화는 떼서 맨 뒤에 붙였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그래서 과하다싶은 장면을 만들었다. 


남자(다미오)도 그 못지않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삶의 길이 남은 거고, 두 사람은 그 길에서 만난 동반자인 거지. 그 장면은 리얼한 앙탈이면서 장면으로서도 좋다. 그런 부분을 덜어낸 것도 좋고. 


고레에다 감독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영화를 찍고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이 허우샤오시엔이고, 대만까지 가서 이 영화를 보여줬다더라. 딱 보고 스승님 왈, 영화 참 좋다. 근데 너는 모든 걸 미리 결정하고 찍었구나. 고레에다 감독이 머리에 한방을 맞은 것 같았다더라. 소설엔 강박이 없는데, 영화는 좋고 아름답지만 내 느낌엔 강박 같은 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지. 형식이 먼저 결정된 것 같은. ‘멀리 관조적으로 찍을 거야’와 같은 강박이 있었다는 거지.


[예스24 기고원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9.12.30 20:28 메종드 쭌/무비일락
매혹.
2009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 매혹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

매혹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매혹됐다. 첫 눈에, 한방에, 훅~
가슴은 벌렁벌렁, 자꾸만 그녀에게 파고 들어가고픈 마음은 후끈후끈. 

내 첫 번째 첫사랑 이후,
보자마자 나를 훅~ 가게 만들었던 두 여자가 있었다.
그야말로 매혹 덩어리. 나를 매혹으로 칭칭 동여맨 여자.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고양이의 도도함과 의도적이 아닌 섹시함을 뿜어냈으며,
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 지적수준 또한 간혹 나를 끌어당겼던 그녀.

각기 다른 시간,
두 여자와 술 한 잔을 꺾고 이야길 나누면서, 나는 그렇게 매혹당했다.
아무리 말을 늘어놔봐야 그때 매혹의 순간을 온전하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첫눈에 훅~ 가설랑은 그 도저한 매력에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튜브도 없이.
뻥을 좀 튀겨서, 그네들이 내게 살인을 교사했어도, 나는 꼼짝없이 그 분부를 수행했을 거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라는 생각도 언뜻 했으니까.
내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팜므 파탈이었다면,
아마 나는 소원 하나를 성취한 셈이었겠지.

물론, 그 매혹의 순간은, 앰블런스 차 같았다.
훌쩍 눈 앞에서 싸이렌만 크게 울리고 지나가 버리는.

그녀는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삶을 송두리째 망가지게 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하찮았던 게지.
아무렴, 큰 걸 해야지. 째째하게. 나 같은 피라미를, 송사리를. 쯧.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 중 한 사람을 다시 봤다.
그때처럼 가슴이, 가슴이, 자맥질하지 않았다.
사랑도, 매혹도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긴 하나,
뛰지 않는 가슴에게 말했다. "그때 고장났던 거니?"

글쎄, 모르겠다.
아마, 인생이 두 번 흘러가지 않듯,
어쩌면 매혹도 일생에 한 번이 아닐까. 한 사람에 단 한 번. 인생이 그러하듯.

헤어진 연인에게 다시 손을 뻗치거나,
다시 시작하자는 투의 애원을 건넨 적은 없다.
아팠지만, 헤어짐은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꾸질꾸질, 질척거리는 이별은 싫었다. 좋은 이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헤어졌다가 우연찮게 희한하게 다시 만났던 여자도 있었다.
두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나 머리와 가슴 사이는 멀었다.

나를 매혹이라고 불러주던 여자가 있었다.
글쎄, 내가 그녀를 매혹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지만,
그런 그녀도 나에게 헤어짐을 고했다. 그녀는 나를 다시 잡지 않았다.
그렇다. 매혹이, 차였다. 우와앗.

<렛미인>. 
열  두살 소녀에게 반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롤리타 증후군은 남 얘기라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누가 그녀를 열  두살이라고 보겠나. 이엘리.
훅~ 갔다. 물론 그녀는 뱀파이어다.
그러면 어때. 내 목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올해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 <렛미인>. (지난해 개봉 때 못 보고 특별상영회를 통해 봤거든!)

두 번은 살짝 겁이 난다.
처음 볼 때처럼 매혹당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그랬듯.
이엘리에게 더 이상 마음을 뺏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 목은 이미 그녀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언제나 나는 매혹당할 준비가 돼 있다.
2010년, 나는 다시 매혹 당할 것이다. 그녀에게, 당신에게.
다시 한번,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들어가게 해 줘....

지난 9월4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펼쳐진,
책  출간기념 특별상영회의 현장을 담았던 글. 그러니까, 어떤 매혹의 기록.


본성을 배반하는 순백의 잔혹한 사랑, <렛미인>을 만나다

[독자만남] 이동진과 함께하는 <렛미인> 특별상영회


‘아름답다’보다 더욱 진한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내 목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빨간 내 피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 못했던 ‘열두 살’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열두 살은 케빈(<케빈은 열두 살>)밖이었는데, 이젠 바뀌었다. 케빈 대신 들어선 그 이름은,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가 됐다.


그렇다. <렛미인>. 스웨덴에서 날아온 이상한 뱀파이어 영화.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의 관습에서 떨어진, 아름답고 슬픈 영화. 이 영화,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감식한 이동진 기자는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2살 8개월 9일’이라고 자신의 나이를 못 박는 소년과 ‘한 12살쯤’이라고 살아온 세월을 얼버무리는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시간과 존재의 벽을 넘어선다. 혹은 어린 인간과 여린 뱀파이어의 사랑은 상대의 입술에 핏자국을 남기거나 유리창에 희미한 손자국을 남기며 희미해져 간다.”


<렛미인>, 당신을 매혹시킬 어떤 사랑의 풍경


이 영화, 애초 원작이 있었다. 독일, 영국 등의 유럽 12개국에 번역된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John Ajvide Lindqvists)의 베스트셀러 『Lat Den Ratte Komma In(Let the Right One In)』. 이 제목은,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게 해 줘’라고 허락을 구하는 뱀파이어의 언어를 일컫는다고 한다. 과연, 영화에서 이엘리는 “들어가도 되니?”라며, 초대를 원한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집에 들어가는 것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인간의 초대 없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엘리의 그 하소연은, 우리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오스칼의 머뭇거림으로 이엘리는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스칼은 이내 이엘리를 안아준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장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관습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 자체로 신선하고 우리네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타고난, 이엘리는 소수이며 약자였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상상 속에서만 자신의 복수를 하는 오스칼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연대 혹은 사랑에서 나는 어떤 소수자의 연대를 경험했다면 오버일까.


내 마음을 아스라하게 했던 것은, 쾌락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피를 빨아야만 하는 생계형 뱀파이어, 이엘리의 존재였다. 특히 먹잇감(오스칼)을 앞에 놓고서도 침을 꿀꺽 삼키며, 꾹꾹 자신의 본성을 눌러대는 그 눈빛.


영화는, 뱀파이어의 존재로 인한 공포가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분명히 사랑. 열두 살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사랑은 못내, 그렇게 불쑥 다가온다. 외려 그들은 섹시하기까지 하다. 새벽녘, 창문을 열고 오스칼의 방에 찾아온 이엘리가 오스칼의 뒤에서 안아줄 때, 나는 그만 훅~하고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어떤 성인들의 것보다 섹시하였기에.

      

한편으로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 『렛미인』은 좀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적 각색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불분명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이엘리의 아버지 느낌을 주는 하칸이 그렇고, 이엘리나 오스칼 아버지의 섹슈얼리티 등에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알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된다!)  


지난 4일 서울 이화여대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한국어판 책 출간기념으로 <렛미인>을 다시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이동진과 함께 하는 <렛미인> 특별 상영회’. 처음이건, 아니건, <렛미인>을 보고 훅~ 갔던 사람들이 있었고, ‘내 귀에 캔디’ 이동진 기자(이동진닷컴)와 나눈 대화의 시간. 아직, 보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일단 보고나서 이야기하자. 책이든 영화든. 경고하자면, 훅~ 갈지 모른다. 조심하시라.


이동진 기자에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렛미인>


사진 제공: YES24 hohoazime™ 님


- <렛미인>에 대해, ‘피와 눈물의 연금술’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표현은 짜내서 나오기보다 머리에 떠오르는 경우다. 소설(원작)과 이 영화의 가장 다른 점이 잎을 떨군 겨울의 문장이다. 소설은 시적이라기보다 단아한 산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은 건, 다시 봐도 느끼는 게, 영화의 리듬이 정말 좋다. 좋은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그래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숏과 숏, 신과 신이 모이는 게 연금술 같다. 피와 눈물을 재료 삼아 만든 연금술 같은 영화다.


- 이 영화의 미덕과 문학의 장점은 뭔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서 영역으로 된 것을 읽을까 하다가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어로 된) 책이 나와서 추천사를 썼다. 내용적으로 영화에 수많은 함의가 있겠지만, 사랑 얘기로 봤다. 소설은 사랑 얘기도 많지만 성장소설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화가 특히 좋았던 것은, 동화와 호러를 접목하는 방식이 좋았다. 대개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잘 맞는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도 호러라고 생각하는데, 슬픔 감성이 있잖나. 그림형제 우화 등의 원전을 보면 끔직하다. 동화세계도 따져보면 끔직한 게 많다. 살인, 식인 등의 모티브도 많고.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을 봐도 알 수 있잖나.


어린이 개념이 확립된 것이 200~300년 전, 즉 근대 이전이다. 그때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봤다. 순수하고 악을 가려준다는 관념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호러와 동화는 잘 맞는다. 영화에서도 (오스칼이 이엘리를) 초대해 주지 않자, (이엘리가) 피를 흘리는 장면은 무섭기도 하면서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나. 그런 게 이 영화에서 잘 묘사돼 있다.



- 소설은 어떻게 봤나.


소설은 되게 재밌게 봤다. 기괴한 상상력이 있고, 책을 읽게 만드는 문체의 힘이 있다. 이런 뱀파이어 소설은 없었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영화 속에 나온) 암시적인 표현을 다 알려준다는 점이다. 가령, 오스칼의 아버지가 동성애자인 것이 감은 잡히지만, 정확하게 알려주진 않지만, 소설에서는 이를 알려준다.


감독이 원작의 섹슈얼리티를 잘 발라냈다고 본다. 또 원작에서 중요한 캐릭터가 영화에선 나오질 않는데, 책에서 제일 재밌는 것 중의 하나는 호칸이라는 캐릭터다. 책에서는 선생이고 소년성애애호증 환자다. 공중화장실에서 12살 소년을 사기도 하고. 그런데 이 캐릭터가 선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갈구하는 입체적인 면이 있다.


이엘리도 소설에는 이전 이름이 엘리아스이고 남자임을 알려준다. 영화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나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책은 이야기 고리를 속 시원히 열어주는 측면이 있다. 물론, 90%는 속이 시원하고 10% 정도는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웃음) 어쨌든, 소설은 소설대로 좋고, 영화는 영화대로 좋다. 감독이 각색을 참 잘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에 들어가 있는 이엘리가 모르스 부호를 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기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아주 영화적인 각색이다. 모르스 부호는 스페인어로 PUSS인데, ‘가벼운 키스’라는 뜻이다. 아주 앙큼하다. 조그만 놈들이. (웃음) (이걸 보고 써 먹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그걸 써 먹는 분들은 많을 것 같지 않다. 열 다섯 밑으로 써야지.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쓰면 닭살이다. (웃음)



-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면.


첫째는, 안데르센의 동화인데, 어릴 때 집에 계몽사 전집이 있었다. ‘하이얀 눈의 여왕’이라고. 안데르센 동화가 물론 대부분 유명했지만, 이건 상대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동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순간, 그 동화를 본 느낌이 확 떠올랐다. 내용은 다르다. 동화는 <나니아 연대기>랑 차라리 더 비슷한데, 이상하게 생각이 났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하이얀 눈의 나라에서…’라고 썼는데, 사실 어법이 틀렸지 않나. ‘하이얀’이 아니고 ‘하얀’이 돼야 하는데. 어릴 때, 본 ‘하이얀 눈의 여왕’ 때문에 그렇게 썼다.


둘째, 지금은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릴 때는 무서워했다. 전설의 고향이 특히 무서웠는데, 어느 해 겨울, 초등학교 4~5학년 때인가, 제목이 <설녀>라고 있었다. 귀신인데 사람을 해치고 그랬다. 그렇게 무서웠다. 이걸 보면서 <설녀>가 생각났다.


셋째, 이 영화의 첫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먼지처럼 날리는 눈. 그러다 오스칼이 나오게 되지. 보통 눈 올 때 소리가 나지 않잖나. 김광균의 시, ‘설야’에 보면,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릴 때도 (이 구절이)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눈이 올 때 의태어로 ‘펑펑’이나 ‘펄펄’을 쓰잖나. 이 영화에선 절대 펑펑이 아니고 펄펄이라고 생각했다. 어감 차이 대단히 크고, 펄펄은 왠지 서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눈 내림의 광경이 가장 좋았다. 리뷰의 첫 머리에서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쓴 이유가 그것이다.


- 리뷰를 쓸 때, 한 번 보고 쓰는데, 메모를 하나. 그리고 본인이 쓴 것에 확신을 하나. 


확신은 없다. 다만 영화에서 설득된 내 감정이 있을 뿐이다. 어떤 영화에 매혹당하거나 싫을 때, 곱씹어보는 방식으로 리뷰를 쓴다. 사후에 생각하는 거지. 감정은 리얼하지만, 진실은 확률로만 존재한다. 65%, 87%의 진실은 있어도, 100%의 진실은 없다고 본다.


리뷰를 쓸 때, 일단 메모를 한다. 평생 버릇 같은 거고.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메모를 세게 한다. 화면을 보면서 써서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 볼펜이 다 돼서 긁은 흔적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영화를 대략 5000~8000편을 본 것 같다. 영화도 그 정도 보면 모든 영화의 패턴이나 언어가 보인다. 아주 잘 본 영화는 숏이나 신의 구성도 생각이 나고. 일반인들은 이런 것까지는 기억을 잘 못하지만, 직업적으로 훈련이 돼 있으면 이도 가능하다. 나도 모르는 새, 단련이 된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보고도 리뷰를 쓸 수 있는 것 같다.


사진 제공: YES24 hohoazime™ 님


- 영화를 꽤 많이 봤는데, 10편 중 몇 편 정도나 감동을 받나.


사실 안 좋은 영화가 좋은 영화보다 많다. 직업적 후각도 있는데, 후질 것 같은 감이 들면 핑계를 대고 안 간다. 일부러 일을 만드는 거지. (웃음) 내 별점이 후하다고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그건 별점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안 보기 때문이다.


직업적 매너리즘이 없다고는 얘기 못한다. 그렇지만 영화를 봐서 행복한 경우도 많다. 최근 <걸어도 걸어도>와 같은 영화들. 휴가를 가면 영화를 한 편도 안 본다. 비행기를 타도 기내 영화는 기를 쓰고 보지 않는다. 악착 같이 자거나 책을 본다. (웃음) 휴가 때 영화를 안 봐서 행복하다. 1년에 51주는 영화를 보는데, 한 주만큼은 영화의 신도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웃음)


- 다른 영화에서도 <렛미인>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북구 영화의 성장 영화가 참 좋다.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정복자 펠레> 같은 영화들. 특히 <정복자 펠레>에서 떠날 때의 눈 장면이나 부감이 참 좋다. 북구 영화에서 비 냄새나 나거나 습하고 우울한데, 스코틀랜드나 아이슬랜드 영화도 그렇다. 프레드릭 토드 프레드릭슨 감독(아일랜드)의 영화를 보면 이런 느낌들이 난다.


-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는 책도 냈는데, 스웨덴에도 관심이 있나.


작년까지 4년 간 여행을 갔다. 올해는 제반 여건상 시리즈를 안 하고 있다. 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고 이런저런 사정이 생겼다. 제일 안타까운 게, <렛미인>과 <더 폴>이다. 시리즈를 계속 했다면 꼭 갔을 거다. 11월에 책이 한권 나올 예정인데, 이것도 여행 책이다.


소설가 김중혁 씨가 씨네21에 연재를 하는 게 있는데, <렛미인> 촬영지를 갔다 왔더라.(주. <뱀파이어가 덮쳤던 곳이 여기야?>) 그런데, 그걸 보고 웃었다. 여행을 잘못 한 것이다. 영화는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 거기서 찍지 않았다. 설정 샷만 찍고, 루엘라라고 스웨덴 북쪽에서 찍었다. 소설가 출생지가 블라케베리인데, 영화 배경에 맞는 곳을 찾다보니 루엘라에서 찍은 거다. <카사블랑카>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찍은 것이 아니고, LA에서 찍었다. 극 중 장소를 어디라고 말해놓고 실제 찍는 곳이 다른 것도 비일비재하다. 시리즈를 다시 하게 된다면 루엘라에 꼭 갈 거다.



- 오스칼이 참 착해 보이고, 도덕적인 아이 같은데, 어떻게 흡혈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파워 오브 러브’ 아니겠나. (웃음) 영화를 볼 때, 사랑하는 감정을 이엘리에게 이입했다. 사랑도 처음에는 인간 본성을 따라가잖나. 그런데 다음 단계로 고양될 때는, 본성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이엘 리가 피를 보고 햝아 먹는 것을 보고, 이엘 리가 피를 갈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흡혈귀인데도, 오스칼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본성을 배반하는 것 아니겠나. 영화에 숭고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먹잇감(오스칼)이 있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이엘리도 본성을 배반한 것이다.

 


끝난 뒤,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뱀파이어와 나눈 사랑에 매혹된 밤. 이엘리를 만날 수 있다면, 내 피를 빨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소녀나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장 기차표를 끊을 수도 있고, 가방을 준비할 수도 있다. 열두 살(들)에게 보고 들은 사랑이 꽤나 인상 깊었나보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사랑은 그런 거다. 너에게 들어가고 싶은 것. 그리하여 다시 한번,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들어가게 해 줘...”


[예스24 기고 원문]




사진 제공: YES24 hohoazime™ 님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12.17 10:14 메종드 쭌/무비일락
그제, 뉴욕에 사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녀석은 늘 그랬듯, 바빴다며 투덜댔다. 우린 웃기게도 서로를 부러워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서로의 공간을. 나는 뉴욕을, 녀석은 한국을. 녀석은 이른바 '뉴욕 촌놈'이다. 뉴욕에 있을뿐, 그 속살을 모른다. 일에 치여사는 직딩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러면서 우리는, 1년 전을 꺼냈다. 1년 전 우리는 뉴욕을 함께 누볐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녀석 덕분에 뉴욕의 '사백팔분의 일'을 맛봤다. 녀석도 마찬가지. 나 덕분에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핑계를 찾은 셈이었다. 그때 내 손엔 <<안녕 뉴욕>>(백은하 지음)이 있었다. <<안녕 뉴욕>>은 영화 속 뉴욕을 거니는 책이다. 우린 그 책을 일부 따랐다. <세렌디피티> <인더컴퍼니> <섹스앤더시티> 등의 동선을 따라, 센트럴 파크의 스케이트장에서 백만년만에 스케이트를 탔고, NYU 앞의 커피숍(레지오) 등에서 커피향에 취했다. 가장 아쉬운 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징징거렸다. 뉴욕을 다시 거닐고 싶다고.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뉴욕을 맛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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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봄날의 늦은 오후, 몬탁의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좀더 넓었고, 모래사장은 좀더 작았다,고 했다. 그 바닷가, 쓸쓸했나보다. 이동진은 몬탁의 풍경을 그리 상세히 서술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바닷가는 그래야 어울린다. 이동진은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끄집어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 것없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맞다. 이동진은 그 사랑을, 긍정하고 있다. 기억은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기억하고, 몸은 끝끝내 그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동진은 또 말한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손을 흔들어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음을 미소로 확인해 줄 수 있기를."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기억한다. 'Delete'를 누른다고 지워질 수 있는게, 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우개로 지워도, 꾹꾹 눌러쓴 흔적은 남는 법. 사랑은, 늘 꾹꾹 눌러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내 사랑에게, 가끔 속삭인다. 마음 속으로. 고마웠다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너의 곁에 잠시 살아서, 그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줘서...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안에서 방을 전세냈던 그 사람들을. 방을 뺀다고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가 있나. 다른 방이 생기면서 축소되고 희석될망정, 그 기억은 어느순간 불현듯 냄새를 피우곤 한다.

이동진은 내게, 이 말을 건넸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그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기행하고 썼던 말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말을 좋아했다.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노욕과 노회함으로 점철된 모리배들의 것과는 다른. 이동진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나는 버티고 견디려고 발버둥친다. 이 세계를, 이 일상을.

그래서,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한다. 이동진은 겨울에 치바를 찾았다(같은 바다지만,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은 봄이었다). 겨울바다는 역시나 외로움이 뚝뚝 묻어난다. 겨울바다에 간 이동진에게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 외로움도 크기가 없다.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 그렇고, 외로움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외로움의 잔을 마땅히 들이켜야 한다. 1인분을 지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조제와 츠네오가 이별여행을 했던, 일본 치바현 규주큐리 해변을 거닌 이동진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워도, 부디 1인분의 삶을 흘리지 않을 수 있길. 함께 가는 이가 흘린 삶은 또다른 항해자에게 암초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동진은 이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글 속에서 이동진은 그렇게, 1인분의 술잔만 말없이 비웠다고 했다. 현실에 딱 밀착된 생을 표현한다면 저보다 좋은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1인분'.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라기보단 '감식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동진의 (영화)언어는, 대개의 평론가의 것과 다르다. 내 인상비평이지만. 물론, 평론가라고 다 똑같진 않다. 영화평이나 기행문에서, 이동진은 오버하는 감이 없다. 덤덤한 게 좋지 아니한가? "내 감정에 책임을 지자"는 영화평 작성의 원칙도 얘기했지만, 이동진은 영화 속에서 생의 어떤 부분을 길어내는 것 같다. '벅찬 느낌'에서 비롯되는 리뷰의 시작,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감정에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야하는 결벽증(?)도 한몫하겠지.

<<필름 속을 걷다>>에서, 나는 외로움을 봤다. 단지, 혼자 그곳을 거닐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1인분의 생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아픔이 있었다. 흔적을, 리얼리티를, 시간을 찾아 흘러갔던 이동진은, 어쩌면 극악하게 시니컬한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이동진의 글이 따뜻해서, 감성적이어서, 좋다고 했지만, 나의 느낌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이동진의 글은,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밥벌이 혹은 생의 공포와 끊임없이 싸우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동진이 말했듯, 여행이라는 아픈 상태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훑은 기행문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제거한, 각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 물론,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괜스리 오버하는 여행기도 때론 좋다. 그것이 내게 삘을 꽂았을 경우겠지만.  

간접적으로 '필름 속을 걸'으면서, 홀로 걸었던 사람(이동진)의 길을 떠올렸다. <러브 액추얼리>의 런던, 모두가 쉬는 성탄절, 근위대 병사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속삭임을 들었다는 말에, 나는 부르르 떨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동진은 말했다. "떠들썩한 축일을 홀로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밀한 동료애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잠시 흘렀다." 나는 잠시, 그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동진은 또 말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든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종종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나는, <사랑해, 파리>의 백혈병 부인을 둔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나 역시, 필름 속을 계속 거닐고 싶다. 그런데 필름은 쌓이는데, 언제쯤 그 속을 거닐 수 있을까. 이 책에 나온 15개의 영화 가운데, 나는 이동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라는 <행잉록의 소풍>, <나니아 연대기>, <티벳에서의 7년>, <베니스에서 죽다>를 보지 못했다. 뭐, 영화를 보지 못해도 좋은데, 어쩐지 이들의 공간에는 한번쯤 발을 디디고 싶다. 그곳에서, 1인분을 말끔히 비우고 싶다. 다시 뉴욕도 가보고 싶다. 그 속의 필름들을 찾아. 아울러, <러브레터>의 오타루는 꼭 가야겠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당신이라면,
나는, 이 책을 권한다.

☞ 영화 읽어주는 남자 이동진을 만나다 (예스24 채널예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