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가지 영화와 관련된 일과 뉴스를 접하게 됐다. 대수롭지 않은 사적인 기억의 조각이 꿈틀거린 것에 불과하지만 가끔 그런 감상은 누구에게나 문을 두들길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굳이 보편성의 굴레를 뒤집어씌울 필요없이 개인사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얼마전 고향을 '방문'(이런 표현을 써야 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나보다...)했다. 이미 가슴속에서만 넘실대는 파도의 이미지와 어린 시절의 흔적들이 고이 자리잡은 그 곳은 지난해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내질렀던 <친구>의 무대가 됐던 도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발을 디뎠던 일부 공간은 내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내게도 삼류(이른바 그렇게 불리워지는)극장의 추억이 있다. 싸고 나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질풍노도 시절의 까까머리들에게 삼류극장은 맛있는 불량식품에 다름 아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연달아 생산됐던 산딸기와 앵두의 시식을 비롯해 무릎과 어둠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거나 뼈와 살이 어떻게 타는지 살피는 일은 일종의 짜릿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삐질삐질 불완전하게 형성된 감수성에 불을 지피듯 했던 <천장지구>를 보고 의기양양하게 ‘깡패’가 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환상을 그렸던 시절이었다(<천장지구>에서 유덕화와 오천련이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세상과 맞장뜨는 장면은 그 극장 최고의 기억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영화관의 메뉴는 분명했다. 사춘기 소년들의 가슴을 자맥질하게 만들고 호기심 천국의 길목이기도 했던 에로영화 혹은 이미 개봉관에서 닳고닳아 비디오로 가기 전 마지막 통관의 절차를 거치는 액션영화들이 주메뉴. 골라먹는 재미?
간헐적으로 거치는 일명 짜바리(경찰)의 단속만 없다면 표를 끊어주는 아가씨나 입구를 멀거니 지키는 아저씨에게 주민등록번호는 대수롭지 않은 수치일 뿐이었다. 단지 그들에게 우리는 돈내는 사람의 일부였을 뿐이었을까?
무언가 음침하면서도 쾌쾌한 냄새가 대변하듯, 그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에게 알 수 없는 범죄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는 은근한 스릴을 안겨다주곤 했다. 학교라는 꽉 막힌 울타리를 벗어나 일탈을 하고 있다는 묘한 감정은 영화관람의 정서를 좀더 업시키는 요인이 됐지 않았을까? 그땐 그런 모험(!)이 삐딱선을 탄 항해가 됐다. 다음날 친구들 앞에서 숨막히는 영화의 장면을 묘사하게끔 만드는 것은 특별부록. 우린 그렇게 스토리텔러가 되곤 했다. 없는 살까지 덧붙여서.
그런 기억을 뒤로 영화 <친구>에도 나왔던 극장 주변의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원래 명칭이 아닌 ‘보창’이란 -이유를 알 지 못한 채- 이름으로 일컬어졌던 한 극장이 문을 닫은 것 같다는 친구의 이야기로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고등학교 이후 10여년의 시간동안 한 번도 입구를 열어보지 못한 채 게이들의 아지트가 됐다는 확인하지 못한 소식만 듣고 옆을 스쳐 지나기만 했던 그 추억의 장소. 기억의 숲 속에는 부지불식간에 이름 모를 수풀과 생물만이 곁가지를 치고 있었던 셈이다.
기억의 숲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린 추억은 왠지 짜하다. 욕지꺼리가 난무하고 바퀴벌레가 제 집마냥 활보하고 삐걱대던 의자에 기대었던 그림은 녹슨 해방구 마냥 빛이 바랜 건 사실이다.
그곳의 스크린을 통해 보았던 영화들의 감상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영화관 특유의 분위기나 사춘기시절 온당한 모험이었다고 여겨 고무됐던 치기어림이 감상의 저편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내 기억의 숲 속에서 이미 그 영화관은 잠식당했었다.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시네마천국>에서 토토가 그랬듯. 토토는 어린 시절,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길러준 극장을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와 복원시켰다. 그리고 홀로 그 극장에서 고인이 된 알프레도 아저씨가 남겨둔 필름 속에서 잊을 수 없는 키스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 어느 날, 나도 기회를 만들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철 지난 산딸기와 앵두를 씹으면서 말을 사랑했던 한 부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낼는지, 아님 오토바이를 타고 이미 고인이 돼 있을 지 모르는 유덕화의 모습에 찡한 기운을 느끼고 있을 지.
여하튼 내 사춘기를 관통했던 추억의 파노라마가 담긴 스크린은 일단 현실 속에서 묻혀버렸나보다.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멀티플렉스에선 느껴보지 못할 조악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흩날린다. 그닥 당시에는 유쾌하지 않았음직한 삼류극장에의 기억이 세월의 흐름에 깎여 애틋한 감정으로 승화됨은 또한 기억이 주는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한다.
이런 극장 단상 외에도 두 여인에 대한 소식을 최근 들었다. 실루엣(Silhouette)을 통한 자태가 너무도 고혹적이었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며 독백하듯 말을 건네던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이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오겡끼데쓰까∼”하며 눈밭에서 울먹이던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결혼했다는 것.
두 여인의 이혼과 결혼을 놓고 상반된 소식은 나를 미묘한 감정으로 밀어넣었다. 지난 96년 <이마베프>란 영화에서 배역을 맡아 감독이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함께 살아왔던 장만옥은 ‘우호적인 이별’을 했다고 전해졌다. 10년을 훌쩍 넘긴 시간, 성룡과 함께 <폴리스스토리>에 출연, 눈도장을 찍은 미스 홍콩은 멜로드라마의 정수, <첨밀밀>을 통해 뚜렷하게 각인됐고 <화양연화>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댔다. 우옷.
억척같이 살아오며 엇갈린 사랑의 흔적을 찾아 헤매이던 <첨밀밀>의 장만옥은 어느 덧 중년의 여인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 혹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란 뜻의 <화양연화>, 그리고 꽉 끼는 차이나 드레스, 뾰족한 하이힐, 곧추세운 머리를 지니고 있었던 이 여인. 아주 더디게 우아한 발걸음을 내딛고 사랑이라는 가변차선에서 멈칫멈칫 애잔한 눈빛을 내비치던 장만옥의 실생활에서의 이혼은 이 영화와 별개임에도 괜스리 오버랩됐다.
옆집 부부와 서로의 배우자에게 바뀌어버린 애정의 행로였지만 끝내 영화에선 이루지 못했던 사랑. 사회가 조장한 관습의 틈바구니에서 내면의 충동과 자존심 사이의 간극을 망설임으로 표현했던 장만옥. <첨밀밀>에서 결국 10년의 방황을 우연으로 기워냈던 그녀는, <화양연화>의 고아한 자태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내 자신의 사랑을 뒤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10년 뒤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장만옥을 떠올릴 것이다. 과연 그녀는 그 미래에 어떤 자태를 띠고 있을까.
반면, 나카야마 미호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러브레터를 쓰지 않을 것 같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국내에도 알려진, 일본의 인기작가인 츠지 히토나리와 최근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츠지에게서 소설 작법을 배우고 있다고 알려진 여인.
이미 하늘로 먼저 간 연인을 마음 깊이 담아둔 채 설산에서 그 미망을 떨쳐내기 위해 울부짖던 나카야마 미호는 현실 속에선 너무도 이쁜 신부였을 것 같다. 첫 사랑으로 각인됐던 사랑의 아픔은 <러브레터>에서 봉인돼 있을 뿐인 것을. 나말고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와 흔적을 품고 있는 타인을 통해 타임머신에 탑승했던 그녀는 그 존재감만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웠었다.
망자는 이미 세상과의 접점을 차단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망자의 꼬리를 떨쳐내지 못하곤 한다. 그 사람을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 잊으라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있었던 것을 ‘바보같다’'고 치부하거나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카야마 미호는 결국 결혼을 선택했다. 매년 겨울, 하얀 눈과 편지를 떠올리며 비디오플레이어를 돌리는 <러브레터>를 다시 보게 되면,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반사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추신) 뒈길, 어줍잖지만 두 여인은 내게 영화의 이미지 자체로 담겨 있었나부다. 나야말로 바보같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