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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이 뇌관을 건드린 가족공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5.21 부부의 날? 가족과 사회의 안녕을 '독하게' 묻는다
2010.05.21 14:53 메종드 쭌/무비일락
<개그콘서트>의 과거 인기코너였던 '분장실의 강선생님'. 이 코너는 때론 지금-여기를 '독하게' 풍자했다. 액면에서 드러난 선후배 사이의 관계뿐 아니었다. 사실 '관습법'에 의해 지배당하는 선후배 관계는, 단순하다. 서열과 (위계)질서. 선배-동생인 안영미가 후배-언니(김경아, 정경미)들을 다그칠 수 있는 기제이다. 그리고 안영미는 강유미에게 절대 복종한다. 온갖 알랑방귀를 다 뀌면서. 대한민국에서 서식한, 제도권 교육(이라고 읽고, 사육이라 말한다)을 습득한 사람은, 특히 남자라면, 사무치게 느껴봤음직한 기시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기시감을 포획한다. 지금 이 엄혹한 시대를 뒤덮고 있는 공포와 좌절이다. 다시 말하자면, '분장실의 강선생님'은 실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메타포(은유)를 품고 있다(고 나는 봤다).


우선 그들의 분장은 하나같이 독하다. 웃기지 않으면, 즉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그들은 퇴출이다. 잘린다. 아웃이다. 많은 이들은 그 분장에서부터 '빵' 웃음부터 터뜨리지만, 그 분장에서 나는 절박함을 본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묻어난다. 성과를, 효율성을,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구조조정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실직의 공포. 개그우먼인 그들의 분장이 독한 것은, 어쩌면 그런 시대의 엄혹함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안영미는 말한다. "똑바로 해, 이거뜨라(이것들아)." "우리 땐 안 그랬어, 이거뜨라." "미친 거 아냐?" 후배-언니들은 쩔쩔 맨다. 선배-동생의 일 제대로 하라는 다그침이 아니꼬우면서도 무섭다. 그것이 합리적이라면 상관없지만, 이 '어린 것'은 일단 다그치면서 자신의 권위를 강요할 뿐, 알맹이라곤 없다.

자, 그런 안영미를 보자. 경기 안 좋다고, 세상 어렵다고, 고통 분담하면서 일만 하라고 다그치는 회사와 그리 다른가? 조직의 권위와 유보금 쌓기가 우선인 그들(회사)이 칼자루를 쥐고 있기에, 우리는 쩔쩔 맬 수밖에 없다.
화폐의 시대, 일하지 말라는 곧, 죽음에 가깝다.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님에도. 화폐는 생존여탈권을 쥔 것으로 간주된다.

강유미도 말한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말은 좋다정작 그는 후배-언니들의 고충을 모른다. 알려고도 않고, 안영미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 그의 분장은 늘 무겁다. 최고 선배,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도 한 방송분에선 비정규직의 비애를 보여줬다. 안영미가 아닌 다른 누군가, 골룸 분장을 하자는 PD의 요청이 있었단다. 후배-언니들의 연기가 신통치 않자, 그대로 안영미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잘못 들었다. PD는 골룸 분장을 강유미가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 거다. 당장 강유미는 골룸 흉내를 낸다. 비정규직은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PD(회사)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실직이 뇌관을 건드린 가족공포


아, 미안. 서론이 길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쿄 소나타>는 실직, 그것도 가장인 아버지의 실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름 좋은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사사키(가가와 데루유키)는 허울 좋은 세계화의 희생양이다. 회사는 뻔한 말을 건넨다. "회사를 위해 충분히 해 준 것은 알지만, 사사키씨가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가요." 나가란 얘기다. 너, 아웃. 그렇지, 깜빡했다. 지금-여기의 자본주의는, 성실하게 일한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지~ 화폐에 노예처럼 복무하는 곳에선 어딜가나 마찬가지~

물론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비밀. 서무업무를 오래해서 인간관계 좋음이 유일한 내세울 거리지만, 집안에서 그는 허울뿐인 권위로만 유지되는 시체(?)다. 그는 아내는 물론, 자식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직업소개소를 전전하고 노숙자 배급소에서 끼니를 해결하지만, 아무 일자리에서나 일할 생각은 없다. 회사의 후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개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실 이 '도쿄 가족'('서울 가족'이라고 바꿔도 무방하지 않을까!)의 누수는 그것만이 아니다. 어머니 메구미(고이즈미 교코)를 보자. 그녀는 늘 외롭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다손, 그들이 메구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손 내밀어 "날 좀 일으켜줘"라고 말해보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도 손길도 뻗치질 않는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상이 시큰둥한 큰 아들 다카시(고야나기 유우). 그는 갑작스레 미군에 지원한다. 이유? 어쨌든 명분은 있다. "일본을 지켜주는 건, 오로지 미국이다." 진짜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정치적 진공상태의 젊은 세대. 아마도 그는 영미식 신자유주의가 주입한 정치적 쾌거(!)의 산물이 아닐까.

역시나 기댈 곳 없고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과 어긋난다고만 느끼는 막내 켄지(이노와키 가이)가 있다. 이 아이, 피아노에 갑자기 홀리고 몰래 배운다. 어쩌면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가족은 과장하자면,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나씩 거짓말을 품고 억지로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탱하는 그들. 신경쇠약 혹은 침몰 일보 직전의 가족이다. 이 살풍경, 어쩐지 낯설지 않다. '외환위기'라는 이름의 IMF체제에 이어 맞닥뜨린 불황의 시대. 자본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고 지탱된 가족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다시 내쳐진 신세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실직 가장인 아버지는 외친다. "뭐든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왜 우릴 받아주지 않지?" 미군은 꿈도 꾸지 말고 일본에 있으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아들은 되묻는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죠?" 어머니는 집에서 청소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복면 쓴 강도를 맞닥뜨린다.

이 가족에게 자존이나 실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그들은 일상의 공포에 짓눌려 있다. 싫든 좋든, 현실이라는 복면을 쓰고 그들을 옥죄는 자본의 테두리에서, 그들은 단지 그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가족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거짓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가 "나와 함께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게요"라고 속삭인다면, 그들은 냉큼 따라 나설 것이다. 실제로 메구미는 그렇게 한다. 강도의 인질로 끌려 나왔다가 자발적으로 그를 따른다. 황망하지만, 이건 그들이 살고 있는 감옥을 보여주는 증명이자 바로미터다.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각자 큰 사건사고를 겪은 사사키와 메구미는 절규한다. "이게 아니야!" 그건 자신의 삶을 향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시대를 향한 울부짖음이다. 어떤 혐오나 환멸을 거쳤다손, "시대나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온전하게 거짓이다. 개인이나 가족이 시대나 정치에 격리돼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요, 착각이다. 자신이 가족을 지킨다고 큰 소리 뻥뻥치는 사사키지만,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아들이 묻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세계와 세계는 직간접적으로 잇닿아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도쿄 가족은 일본 뿐 아니라, 현대, 그리고 우리사회와도 공명할 여지를 갖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구로사와가 직조한 파국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난다. 쇼핑몰 청소부로 일하면서 아내를 맞닥뜨린 사사키의 자동차 사고도,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며 바닷가로 향하는 메구미의 일탈도, 가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켄지의 철장행도. 모두가 한꺼번에 집을 비웠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정신적 공백을 드러내는 은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집안에 모여 밥을 함께 먹는다. 판타지 같은 느낌을 주는 장면이 이어진다. 나는 아직 그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던 켄지는 음악중학교 입학 오디션을 본다. 드뷔시의 <월광>(Clair De Lune)을 신들린 듯 연주하는데, 사사키는 아들의 연주에 눈물을 글썽인다. 꿈결 같은 연주가 끝나고 가족들은 함께 일어나 퇴장한다. 미군으로 중동에 파견됐던 다카시도 예전에 미국을 잘못 알았다며, 이제는 침공당한 그들(중동)의 아픔을 알고 싶다며 그곳에 남아있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사사키는 한껏 핀 얼굴로 쇼핑몰 청소를 한다.

켄지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그들의 불협화음은 과연 봉합이 된 것일까. 모르겠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세상과의 관계를 부정한 채 가족 안에서만 맴돌았던 그들의 세계가 넓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해결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물론 그 시도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들은 분명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니까. 분명하게도, 삶은 어떻게든 지속될 것이니까. 

"왜 피아노를 배우면 안돼요?"라고 물었던 켄지의 질문을 무시했던 사사키였지만, 이제는 그도 왜 켄지가 피아노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다. <도쿄 소나타>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의 변화를 갈구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바람이 담긴 영화다. 우리는, 세계는, 분명 변화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고 싶다고? 그건 군대나 자본, 그러니까 탐욕의 체제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직 그 답은 모르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고민하게끔 만든다. 그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미안하다. 한마디만 더 하자. 이 가족잔혹사 혹은 가족변천사를 가정의 달, 5월, 특히 21일, '부부의 날'에 긁적이는 건, 짓궂은 짓이겠다. 이 좋아야 할 날, 실직과 가족간 공허를 들먹이다니. 이해하시라. 시큼털털한 노총각이 설움(?)에 겨워 괜한 딴죽을 건다고 치부하시라. 그런데, 마지막으로 딴죽 더 걸자면, 이 부부의 날, 그 의미 한 번 시대착오적이다. 둘(2)이 하나(1)가 돼서 21일이라니.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를 말하고자 함인가 본데, 개뿔.

이 감언이설, 참 많은 사람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유배시켰다. 결혼생활은 으레 그래야한다고 강요하면서. 봐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된다는 것. 가능하던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가? 환상이요, 거짓이다.

그러니까, 이심이체(二心二體)가 맞다. 각자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이견을 허용하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가장 최소한의 것이다. 또한 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일심동체랍시고,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에 맞추거나 내가 상대방에게 끼워맞춰야한다는 것, 건강하지 않다. 불건전한 타협보다 건강한 갈등이 나은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니, 차라리 (5월)22일로 바꿔라. 두 사람 각자가 스스로 개별성을 갖고 움직이면서 연대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도쿄 소나타>의 부부, 사사키와 메구미는 그것을 못했다.

혹여나, 부부가 되더라도, 나는 일심동체 않겠다. 내 이렇게 선언(?)했으니, 기억해주시게. 당신이 곧, 증인이다. 다만, 나는 '남(의)편'이 아닌, '네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장담하냐고? 에이, 결혼 생활은, 부부는, 장담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당신에게 들려주고픈 오늘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 또, 보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