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690,096total
  • 2today
  • 21yesterday
2009.12.19 19:42 메종드 쭌/무비일락

서울독립영화제2009 폐막작,

두 편의 단편, <남매의 집>과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감상.

공통점이라면, 주인공을 감싸주고 안아줄 수 있는 존재의 부재.

그들은 어떻게든 '사회적' 고아들이다. 우리의 지금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닿을 수 없는 곳(김재원 감독)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이 펼쳐진다. 엄마와 아들딸로 구성된 가족은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스무 살 진섭이다.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엄마와 다섯 살 동생. 아버지는 없다. 10여 년 전 가족을 버리고(어떤 이유든 있었겠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나갔다. 

새벽 전단지를 돌리는 것부터 주유소 일을 하면서 진섭은 힘겨운 스무 살을 버티고 있다. 그 고단함은 그의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무 살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감, 청춘의 활기라곤 없다. 친구와 시덥잖게 농담따먹기를 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랄까.   

그런 진섭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온다. 병무청을 찾아 생계형 면제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 아픈 엄마의 진단서를 떼오란다. 검진비용만 백만원이 넘는 거금이지만, 어떻게든 떼야만 한다. 병원은 돈 없는 자에게 냉담하고 어떤 사정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환자의 병은 곧 돈으로 치환되는 기제일뿐.

친구에게 돈을 빌려 가까스로 처리하지만, 서류상 남아 있는 아버지가 문제다. 없는 아버지까지 찾아내란다. 서류상으로 처리가 안 된단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없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국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얼떨결에 '없는' 아버지를 죽이라고까지 말하는 병무청의 무심함. 아버지를 찾아나선 진섭 앞에 병든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진섭의 선택은.

왜, 제목이 '닿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국가는 아무 것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는 이제, 그냥 기업이니까. 대통령이 CEO인 세상에 말이다. 묻고 싶다. 비가 오면 피하게 해주는, 감싸고 위로하는 존재는, 그저 힘 없는 개인들의 몫일 뿐이냐. 진섭의 막막한 눈빛이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남매의 집(조성희 감독)

한 눈에 보기에도 가난을 등에 업은 반 지하의 집. 아버지, 어머니도 없다. 남매만 덩그러니 있는 집. 동생은 오빠에게 한복도 자랑하고 싶지만, 오빠는 빨간펜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숙제를 마쳐야 한다. 과연 빨간펜 선생님이 올까 싶지만.

언제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줘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만 남아 있다. 남매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반지하의 집에서만 모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감언이설로 남매를 꼬드긴다. 물만 먹겠다는 조건으로 괴한들은, 들이닥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괴한 외계적 행동들.

‘알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하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소년은 그 기괴한 일들이 꿈같다. 고립에서 오는 인간의식이 어떻게 똬리를 틀고 무한 증식하는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눈에는 고아처럼 내버려진 남매의 무기력함이 약탈자를 맞이한 지금 우리의 모습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고아들의 시절, 부모 없는 시대.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9.12.18 18:10 메종드 쭌/무비일락

제발 어디든,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잡히지 말고 가주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나는 그렇게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거의 스크린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영병이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인 범죄자였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들처럼, 그네들이 서 있는 이곳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억지로 끼워맞추면, 그것은 스톡홀름신드롬이 아녔을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발적) 인질이었고, 그들에게 호감과 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탈영이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것은 사회적 알레고리였다. 그들이 탈주를 시도한 곳은 군대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그러니, 감정이입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이유는 분명하다. 박민재 상병(진이한)은, 속사정은 군대 간부의 성추행을 견디다 못해, 명분상으론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함이라는. 강재훈 일병(이영훈)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말도 안되는 이유로 상관은 재훈에게 휴가를 보내지 않았다.)  거기에 한 명 더. 소영(소유진). 재훈이 군대 가기 전, 할인점에서 같이 일했던 인연. 자수를 권유하던 그녀는, 어쩐 이유에선지 그들의 탈주를 돕는 공범이 된다. 역시나 스톡홀름신드롬?


그렇게 세 명을 축으로 로드탈주무비는 본격화된다. 그들은 6일 동안 갖가지 위기와 위협, 예기치 않은 살인 등을 거친다. 승용차는 개장수트럭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모터바이크에 몸을 싣는다. 도망자의 불안감이 내부적으로 충돌을 불러오고 갈등도 빚지만, 그들은 어차피 더 이상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존재 아니던가. 이미 경계 밖으로 내몰린 존재의 선택은 두 가지다. 죽느냐, 떠나느냐.

감정은 고조되고, 인질이 된 나는 어느 순간 그들이 탈영이 아닌 탈주를 꾀하고 있다고 동화된다. 그래서 '탈영'이 아닌 '탈주'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아마도 <탈영>이었다면, 나는 그저 군대라는 범주에서만 그들의 행위를 읽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모양새는 군대를 탈출한 이들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 <탈주>는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무자비한 국가와 사회에 내몰린 자들의 이야기다.

 

저항은 딱 그만큼이다. 탈주 성공을 간절하게 바랐건만, 집단적 공포감으로 무장한 국가권력의 처벌은 언제나 냉혹하다. 내일 따윈 없어, 탈주.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감정의 파고. 그 안타까움, 그 애처로움, 그 무력함. 여기만 아니면 된다고 했던, 그들의 마음이 나를 후벼판다. 털썩 주저앉아 울고 싶도록 만든 마지막 장면.

그 결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부 함께 탈주를 시도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임병이 그러지 않았나. "어디에 있든 지옥"이라고. 집으로 가든, 군대에 있든,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로 가기만 하면 달라졌을까. 이 영화, 마음을 참으로 서걱거리게 만든다. 꼭 개봉하라. 개봉촉구!!!

P.S...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무장탈영' 소식이 나면, 나는 그들이 전하는 '이유'에 대해 늘 불신한다.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단순화시킨다.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재단한다. 공포감을 조장하지. 그 이유는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러면 군대가 쓰나. 존립기반이 흔들거리는 걸. 군대? 조까라 마이싱! 참, 소유진 다시 봤다. 서프라이즈~ 영화든, 소유진이든, 예기치 않은 선물.  


'메종드 쭌 > 무비일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번의 매혹은 없다?  (0) 2009.12.30
'사회적' 고아들의 시대  (0) 2009.12.19
여기만 아니라면, 어딘가에...  (0) 2009.12.18
서독제가 있는 풍경  (0) 2009.12.17
이리, 익산이 아닌 이유  (0) 2009.12.17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가 있다?  (0) 2009.12.14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6년 전, 2003년 12월9일.

요즘과 같은 강추위가 강타하던 그날,
혜화동 부근에서 한 사람이 추위에 떨다 숨을 거뒀다.
그야말로, 동사. 누구도 챙기지 않은 혹은 외면한 죽음.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2005년 김동원 감독님(<송환> <상계동 올림픽> 등)께서 국가인권위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다섯개의 시선> 가운데 <종로, 겨울>을 연출하신단 소식과 함께였다.


오늘 모진 추위, 알코올 유혹을 뿌리치고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를 찾았다.
세상엔 알코올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 (음, 인간이 초큼 학실히 달라졌다;;)

영화는 장률 감독님의 <이리>.

그것 자체로도 뿌듯했는데, 상영 직전에 꺄아아아아아아~ 소릴 지를 뻔 했다.

내 앞앞자리에 김동원 감독님이 성큼 앉으시는 것 아닌가!!!!!!!!!!!!!!

역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3년 전 뵀을 때와 함께, '아, 이 즈음이었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그 사람, 고 김원섭 씨.
우리의 무관심으로 차디찬 고국 땅에서 동사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를 본 뒤, 냉큼 김동원 감독님께 꾸벅, 인사했다.^.^
당연히 감독님은 날 기억하지 못했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고,
사진을 부탁드렸다.

언제 다음 작품을, 내년에는 볼 수 있냐는 질문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확답을 못하시던 감독님.
"괜찮습니다. 계속 기다릴 수 있습니다." (-> 내 마음 속)

간단히 감독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바깥 무시무시한 추위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종로통을 거니면서,
6년 전 길바닥에 쓰러져 살을 에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을,
무엇보다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마음 깊이 후벼파는 추위에 더욱 쓰라렸을,
김원섭 씨를 떠올렸다.

흥청망청 종로의 밤은 깊어갔고,
나의 마음에도 밤이 내렸다.
오늘 나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스치듯 지나갔는가.
봉석아, 오늘 너의 아픔을 충분히 위로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외로웠을 김원섭 씨,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김동원 감독님을 만나뵀던 3년 전의 인터뷰를 꺼냈다.


"동북공정엔 흥분하면서 그 땅에 사는 동포엔 왜?..."

2년전 세밑을 앞두고 흥청거리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골목통에서 한 조선족 동포가 동사한 채로 발견됐다. 경찰 지구대 사무실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장소였다.

고(故)김원섭씨. 그 날의 사건을 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법무부의 장기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농성을 해오던 중국동포가 체불 임금을 받으러 나간 뒤 하루만인 9일 새벽 서울 도심 거리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이 중국 동포는 숨지기 전에 112와 119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김씨에게 고국의 품은 차가웠다. '잘 살아보겠다'며 조국을 찾아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김씨에게 고국의 기업은 임금을 체불했다. 정부는 장기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여 김씨를 강제추방 대상에 넣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 속에서 헤매던 그가 십여 차례 이상 119,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돼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불법체류로 체불의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한 재중동포는 차디찬 골목바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죽어갔다. 그는 '동포'였지만 '우리 안의 타자(他者)'였다. 차별과 소외가 내재화한 사회. 그런 엄혹한 현실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어떻게 보면 김원섭씨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한 셈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 이번에는 동사한 조선족의 흔적을 좇았다.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종로, 겨울'을 연출한 우리의 어떤 시선이 조선족 동포를 동사하게 만들었는지, 왜 그는 죽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짧지만 굵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감독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상황들을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게끔 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다음은 29일 서울 신대방동에 위치한 푸른영상에서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  이번 영화의 참여 제안은 언제 받았으며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찍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지난해 8월 인권위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제안을 받고 상계동 철거민(<상계동 올림픽>)이나 비전향장기수(<송환>) 뒷얘기 등 다른 것들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고 김원섭씨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맺혀 있었고 이를 풀고 싶었다.

또 조선족동포를 바라보거나 우리의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에 이 문제를 택했다. 우리는 만주 땅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그 땅에 있는 동포한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이쪽 동포들은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다. 재외동포법에서도 미국과 유럽과 같은 제1세계 동포보다 한국에서의 권리를 차별받고 있다.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 처음 고 김원섭씨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더보기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9.12.10 18:08 메종드 쭌/무비일락

금융위기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선언은, '상상의 휘모리'였다.

그 휘모리가 펼쳐진 지난해 개막식, 나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화폐의 부작용이 커질 만큼 커져, 곪을 만큼 곪아, 금융위기라는 이름으로, 불황이라는 타이틀로 사람들의 목줄을 움켜쥔 이 시기. 도전과 가능성의 이름, 독립영화라고 그 파고를 맞닥뜨리지 않을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독립영화가 언제 꽃피는 봄날이었던 적이 있나. 뺄 기름기도, 감축해야 할 지방질도, 버려야 할 과소비도 없는 형편. 그래서 여느 때와 같이 올해도 그저 달린다.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줬듯이. 그렇게 똑같이."

 

아직, 여전히, 얼어붙은 이땅.

용산은 불탔고, 사람이 죽었다. 그럼에도 일상은 굴러간다.

고작 주가 좀 올랐다고, 우리네 팍팍한 사람살이가 나아진 것도 없다.

토건국가의 흉포함은 현재진행형이며, 세상은 돈만한 가치가 없다고 설파한다.

그야말로 똑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치고 달리기'란다.

야큐 좋아하는 나로선, 익숙한 단어라 더욱 반갑다.  

 

서울독립영화제2009는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2009의 슬로건 '치고 달리기'는 독립영화의 명랑하고 역동적인 활기와 더불어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했던 긴장을 동시에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치고 달리기'는 베이스에 주자가 있을 때 쓰는 작전으로, 타자가 타격을 하는 것과 동시에 주자가 달리는 것을 일컫는 야구용어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제 이름 안에 '치다'와 '달리다'라는 두 개의 동사를 두고 있는 단어. 이름만 들어도 참 바빠 보입니다만, '치고 달리기'가 내표포하고 있는 끊임없는 에너지는 세상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독립영화와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침체를 활기로 바꾸는 작전 '치고 달리기' 새슴스럽게 이 작전명을 되뇌는 것은, 단순하지만 끊임없이 치고 쉼 없이 달리는 역동적 실천이 독립영화에게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라는 그라운드 위에서 말입니다.

 

자 그럼, 준비되셨나요?"

 

그래, 대답한다. "네~ 준비됐어요~ 저, 여기 있어요~"


 

독립영화, 인디의 이름으로 이 풍진 세상, 한방 훅~ 갈기고 토끼는 거닷!  

잽이면 어떠랴. 늘 카운터 펀치만 날리란 법은 없다.

잽으로 툭툭 치고 빠지고, 지칠 때까지, 그리하여 승리할 때까지!

 

세상의 떨거지이지만, 나는 그렇게 인디를, 독립영화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인디 커피하우스를 죽을 때까지 꿈꾸는 나로선!

 

그래도 다시 이말, 내 인디의 경구.  
<해바라기 씨> <햇살의 맛> <너와 나>의 감독, 웨이아팅이 했던 이말.
"영화는 결국 찍어서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다.
독립영화의 독립이라는 단어는 제작이나 투자의 독립, 감독의 생각, 사상의 독립을 말하는 거지, 관객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관객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한편의 독립영화가 온전히 품고 있는 감독의 생각, 생각, 사유 등을 전달하고 나눌 수 있기를.  

 

인디의 현장에서 우리 만나면, 가벼운 눈 인사라도. ^.^


아, 그리고 오늘 난, 원나잇 스탠드 한다!!! @.@

그러니까, 이건 전설로만 내려오던, 예고 원 나잇 스탠드?

.

.

.

.

.

.

.

.

.

.

서독제 2009 개막작이 <원 나잇 스탠드>다..ㅋㅋ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