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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유약했다. 눈빛에서도 그것은, 드러났다. 그러나 의외의 강단이 있었다. "오 캡틴, 마이 캡틴"(<죽은 시인의 사회>)을 외칠 때, 나는 완전 뒤집어졌다. 감동도 만빵 우적우적. 영화관에 책상이 있었다면, 냉큼 올라갔을 게다. 당시, 나는 '토드 앤더슨'이 되고 싶었다. 영화 속 토드처럼, 나도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소년은, 세상과 처음 그렇게 맞장을 떴다. 여리고 내성적이었던 소년의 흔적.
"...당시 에단 호크와 로버트 숀 레너드가 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라가 “마이 캡틴”을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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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솔직하고 개구진데다 능글능글했다. 기찻칸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눙치더니, 자신의 목적지에 여자를 내리게까지 만들었다. 그리곤 원나잇스탠드까지. 진정한 '꾼'의 자세닷!  '제시'는 오래 산 부부의 권태감을 얘기하고, 사랑과 로맨스를 때론 회의했다. 그러면서 사랑을 긍정하는 '셀린느'와 죽을 딱딱 맞췄다. 해 뜰 때까지 산책과 수다로 충만했던 그들. 당시, 나는 '제시'가 부러웠다.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하고 싶었다. 특히, 독일어를 쓰는 중년부부가 말다툼을 벌이는 칸에. 그리곤 기차에 그녀를 태워보내며, "9번 트랙, 6개월 후 6시"(<비포 선라이즈>)를 기약하고 싶었다. 영화 속 제시처럼, 나도 그때, 20대였다. 청년은, 로맨스와 그렇게 마주했다. 젊고 생기발랄한 청춘의 표상.
"...20대의 호크는 미래가 궁금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늘 살짝 열려 있는 민감한 입술,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일찌감치 파놓은 미간의 주름, 항상 눈부신 것을 보는 듯한 눈과 그와 대조를 이루는 사내다운 턱. 그는 여자로 하여금 “넌 언젠가 꼭 근사한 남자가 될 거야”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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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우수와 그리움이 깃들어있었다. 움푹 파인 눈가와 주름 자글자글한 미간. 찬란했던, 그러면서도 유약함을 품고 있던 미모는, 세월에 깎여 까끌까끌. '이토록 뜨거웠던 순간'을 관통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형의 모습이랄까.^^; 지리멸렬하고 섹스리스와 다름없는 윤기없는 생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9년 전과 달리 이제는 로맨스를 옹호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제시'처럼 파리를 거닐고 싶었다. 오래된 로맨스를 품고서. 그리곤, 어떤 노래를 들으며, "I know..."라는 말을 툭 던지고 싶었다. 영화 속 제시처럼, 나도 그때, 30대였다. 청년과 중년 사이에서, 현실은 촘촘히 생을 옥죄고 있었다. 그럼에도, 까르페 디엠(Carpe Diem)
"...혹시 지금 그는 7년의 결혼을 공유했던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비포 선셋>의 제시는 결혼을 가리켜 “한때 데이트했던 사람과 조그만 탁아소를 운영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 대사는 누가 쓴 것일까? 지금까지 에단 호크가 쓴 소설과 감독한 영화들은 매우 사적이다. 아직 딱지가 앉지 않은 본인의 체험을 예술로 옮겨놓는 행위에 따르는 위험을 호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 나 역시, 에단 호크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다. 10대 <죽은 시인의 사회>부터, 20대 <비포 선라이즈> 30대<비포 선셋>. 그리고 이후에 올 무언가. 특히나 <비포~> 연작은 내 20대와 30대의 감성과 로맨스를 지배하는 중요한 영화포인트. 내 생애 후일담이 가장 궁금했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9년 후 어쩌면 가장 세월을 현명하게 머금은 영화, <비포 선셋>은 그래서, 내겐 너무도 소중한 영화. 톰 크루즈과(科)는 아니지만, 에단 호크는 독특한 꽃미남이었다. 그 유약해뵈는 눈빛에선, 슬픔과 외로움이 늘 한켠에서 묻어있었다. 마냥, 세월을 먹은 것이 아님을 드러낸 눈빛의 진화. 세월의 농익음이, 현실의 고단함이, 시간의 잔인함이...

너에게, 에단 호크를 권한다. 물론, 소설보다는 영화. 나도 에단 형의 소설은 못봤으니까.^^;
에단 호크와 동년배라는 김혜리 씨네21기자의 맛깔스런 대화록. 찬찬히 에단 호크를 느껴보시라~

<이토록 뜨거운 순간>도 그래서, 기대!

그리고 또 언젠가, 좀더 에단호크에 대해 풀어볼께. 내가 간직하고 있는 에단 형에 대해.

근데, 뭐니뭐니해도,
입술이 뽀개질 정도의 이 강렬한 키스~
나도 기차역 플랫폼에서, 떠날 기차를 앞에 두고, 절절한 이 키스를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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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2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떠올리다...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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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뉴욕에 사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녀석은 늘 그랬듯, 바빴다며 투덜댔다. 우린 웃기게도 서로를 부러워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서로의 공간을. 나는 뉴욕을, 녀석은 한국을. 녀석은 이른바 '뉴욕 촌놈'이다. 뉴욕에 있을뿐, 그 속살을 모른다. 일에 치여사는 직딩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러면서 우리는, 1년 전을 꺼냈다. 1년 전 우리는 뉴욕을 함께 누볐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녀석 덕분에 뉴욕의 '사백팔분의 일'을 맛봤다. 녀석도 마찬가지. 나 덕분에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핑계를 찾은 셈이었다. 그때 내 손엔 <<안녕 뉴욕>>(백은하 지음)이 있었다. <<안녕 뉴욕>>은 영화 속 뉴욕을 거니는 책이다. 우린 그 책을 일부 따랐다. <세렌디피티> <인더컴퍼니> <섹스앤더시티> 등의 동선을 따라, 센트럴 파크의 스케이트장에서 백만년만에 스케이트를 탔고, NYU 앞의 커피숍(레지오) 등에서 커피향에 취했다. 가장 아쉬운 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징징거렸다. 뉴욕을 다시 거닐고 싶다고.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뉴욕을 맛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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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봄날의 늦은 오후, 몬탁의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좀더 넓었고, 모래사장은 좀더 작았다,고 했다. 그 바닷가, 쓸쓸했나보다. 이동진은 몬탁의 풍경을 그리 상세히 서술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바닷가는 그래야 어울린다. 이동진은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끄집어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 것없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맞다. 이동진은 그 사랑을, 긍정하고 있다. 기억은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기억하고, 몸은 끝끝내 그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동진은 또 말한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손을 흔들어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음을 미소로 확인해 줄 수 있기를."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기억한다. 'Delete'를 누른다고 지워질 수 있는게, 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우개로 지워도, 꾹꾹 눌러쓴 흔적은 남는 법. 사랑은, 늘 꾹꾹 눌러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내 사랑에게, 가끔 속삭인다. 마음 속으로. 고마웠다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너의 곁에 잠시 살아서, 그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줘서...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안에서 방을 전세냈던 그 사람들을. 방을 뺀다고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가 있나. 다른 방이 생기면서 축소되고 희석될망정, 그 기억은 어느순간 불현듯 냄새를 피우곤 한다.

이동진은 내게, 이 말을 건넸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그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기행하고 썼던 말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말을 좋아했다.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노욕과 노회함으로 점철된 모리배들의 것과는 다른. 이동진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나는 버티고 견디려고 발버둥친다. 이 세계를, 이 일상을.

그래서,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한다. 이동진은 겨울에 치바를 찾았다(같은 바다지만,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은 봄이었다). 겨울바다는 역시나 외로움이 뚝뚝 묻어난다. 겨울바다에 간 이동진에게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 외로움도 크기가 없다.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 그렇고, 외로움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외로움의 잔을 마땅히 들이켜야 한다. 1인분을 지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조제와 츠네오가 이별여행을 했던, 일본 치바현 규주큐리 해변을 거닌 이동진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워도, 부디 1인분의 삶을 흘리지 않을 수 있길. 함께 가는 이가 흘린 삶은 또다른 항해자에게 암초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동진은 이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글 속에서 이동진은 그렇게, 1인분의 술잔만 말없이 비웠다고 했다. 현실에 딱 밀착된 생을 표현한다면 저보다 좋은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1인분'.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라기보단 '감식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동진의 (영화)언어는, 대개의 평론가의 것과 다르다. 내 인상비평이지만. 물론, 평론가라고 다 똑같진 않다. 영화평이나 기행문에서, 이동진은 오버하는 감이 없다. 덤덤한 게 좋지 아니한가? "내 감정에 책임을 지자"는 영화평 작성의 원칙도 얘기했지만, 이동진은 영화 속에서 생의 어떤 부분을 길어내는 것 같다. '벅찬 느낌'에서 비롯되는 리뷰의 시작,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감정에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야하는 결벽증(?)도 한몫하겠지.

<<필름 속을 걷다>>에서, 나는 외로움을 봤다. 단지, 혼자 그곳을 거닐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1인분의 생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아픔이 있었다. 흔적을, 리얼리티를, 시간을 찾아 흘러갔던 이동진은, 어쩌면 극악하게 시니컬한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이동진의 글이 따뜻해서, 감성적이어서, 좋다고 했지만, 나의 느낌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이동진의 글은,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밥벌이 혹은 생의 공포와 끊임없이 싸우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동진이 말했듯, 여행이라는 아픈 상태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훑은 기행문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제거한, 각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 물론,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괜스리 오버하는 여행기도 때론 좋다. 그것이 내게 삘을 꽂았을 경우겠지만.  

간접적으로 '필름 속을 걸'으면서, 홀로 걸었던 사람(이동진)의 길을 떠올렸다. <러브 액추얼리>의 런던, 모두가 쉬는 성탄절, 근위대 병사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속삭임을 들었다는 말에, 나는 부르르 떨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동진은 말했다. "떠들썩한 축일을 홀로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밀한 동료애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잠시 흘렀다." 나는 잠시, 그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동진은 또 말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든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종종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나는, <사랑해, 파리>의 백혈병 부인을 둔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나 역시, 필름 속을 계속 거닐고 싶다. 그런데 필름은 쌓이는데, 언제쯤 그 속을 거닐 수 있을까. 이 책에 나온 15개의 영화 가운데, 나는 이동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라는 <행잉록의 소풍>, <나니아 연대기>, <티벳에서의 7년>, <베니스에서 죽다>를 보지 못했다. 뭐, 영화를 보지 못해도 좋은데, 어쩐지 이들의 공간에는 한번쯤 발을 디디고 싶다. 그곳에서, 1인분을 말끔히 비우고 싶다. 다시 뉴욕도 가보고 싶다. 그 속의 필름들을 찾아. 아울러, <러브레터>의 오타루는 꼭 가야겠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당신이라면,
나는, 이 책을 권한다.

☞ 영화 읽어주는 남자 이동진을 만나다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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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담배를 빨았다. 그 시큼함이란.
'다정'도 병이라는 말. 그리움 혹은 사랑이 깊어지면 슬픔이 된다는 말.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믿었다.
브로크백에 문득 오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 그곳엔 어떤 사랑이 있겠지.

씨네큐브 스크린에 불이 꺼지고, 많은 이들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눈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고 하면 거짓이고.
다시 만난 잭과 에니스에게,
그들은 '다정'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으리라.

'띠리~'하면서 시작하는,
구스타보 산타올라야(Gustavo Santaolalla)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오프닝이 나올라치면,
심장박동이 뛰어버리는 사람들.

그랬다.
"어떨 땐...
 정말이지...
 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라던 잭의 다소곳한 고백에 나는, 사랑의 씁쓸한 행복을 곱씹어야 했고,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그 언젠가,
그녀를 향해 그리하였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리고, "난 널 20년동안 그리워했어"라는 잭의 절규엔 울컥했다.
그 사무친 그리움이 절절하게 와닿아서.
그것을 맛본 사람은 알 터이지.

무너져 내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 역시 한없이 허물어져야 했다.

한편으로 다시 그들을 만나면서,
새로이 발견했다. 로린 역시 잭을 많이 사랑했다는 것.
여자의 눈물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미신(?)도 있지만,
나는 로린의 눈가와 표정, 말투에서 그렇게 느꼈다.

브로크백은 그렇게,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I Sw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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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6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랑, 잭과 에니스를 추억하며...
2007/08/03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브로크백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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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더라. 이쁜 상품에 눈이 어두웠다. 대답해줬다.
그런데 궁금하다. 감성스토리. 감성과 스토리텔링의 조화.
감성과 스토리텔링, 제대로 잘 풀어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감성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감성은 곧 사랑이다! 내 감성의 근원은 사랑이 아니면 안된다.
사람에 대한, 사물에 대한 사랑이 샘솟아나는 그 순간, 감성은 시작된다.

내 감성이 풍부해지는 순간은 '사랑'에 빠지는 사건과 일치한다.
그 어떤 사건보다 온전하게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스펙트럼이 곧 감성의 스펙트럼으로 직결된다.
감성을 흔든다? 그건 '사랑'의 어떤 흔들림 때문이다.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좌절도, 감성마저도 사랑이 조절하더라.

내가 감성을 이야기함은,
바로 사랑을 말함이요,
나는 그 사랑을, 감탄한다.
내 감성은 사랑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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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바이텐'이라는 사이트에서 <<SENSATION 센세이션展 : 세상을 뒤흔든 천재들>>이란 책을 놓고 이벤트를 하는데,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무엇인가요?"

물론 이 책은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고정관념에 딴지를 걸고 새로운 시각과 사고로 지각변동을 일으킨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책 소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책. 이 책에 소개된 예술가들은 예술적 관습을 뒤엎고 전통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낯설기 기법의 원조들이다."

이벤트 물음의 답변을 보자면, 신정아 사건이나 911테러 등을 들고 있는데,
나는 좀더 사적으로 접근했다. 뭐 동의하거나 말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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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에 빠지는 사건이 가장 센세이셔널하지 않을까. 그건 어떤 다른 사건보다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가질 수 있는 사건이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세계를 확장하게 되는 사건보다 센세이셔널한 것이 있겠는가. 사랑은 그렇게 다른 세계를 만나는 통로이다. 일생을 살면서 사랑은 한번이 올 수도, 몇번을 거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센세이션 그 자체다. 우리는 그 '사랑'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좌절도, 그 모든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말이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극심한 아픔도 겪는다.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이 담긴 사랑이야말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


당신이라면,
어떤 센세이셔널한 사건을 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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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연의 아픔이 온몸을 옥죄어오던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 몸도, 가슴도, 머리도. 실연은 그렇게 잿빛이다.

그래서 순전히 궤변이지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답변한다.

실연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실연을 현실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쉬고,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시절은 갔다. 실연은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품게끔 강요한다. 그 강요로 인해 나는 갈증에 시달리고, 길을 걷다 눈물에 젖고, 골방에 쳐박힌다. 세상 모든 슬픈 노래는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나는 실연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감당한다. 실연으로 인해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실연 이후의 나의 모든 행동과 의식 모두가 그 강요의 극복을 위한 것이다. 실연을 실연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극복은 이뤄질 수 있다. 믿지 못할,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내가 실연에 대처하는 자세.

한편으로 실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극복해야 하는가. 실연은 실연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다. 실연이 없었다면, 미처 경험하지 못할 행동과 감정이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실연은 우리 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실연을 소중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연 이전의 사랑을 생각하라. 사랑에 고마워해라. 나의 세계가 넓어졌음에. 또한 실연으로 나의 세계가 더 넓어졌음에.


웃긴다. 실연한 사람한테 이따위 말이 통할 리가 있어?ㅋ
그래도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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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네. 맞아.

언제 어느때, 내쳐질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영원할 것이란 믿음은 허상.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사랑도 미움도.

사랑 앞에 늘 비정규직이기에, 힘겨운 감정노동.

그래서 절대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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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부로 정의할 것이 못된다. 한 사람이라도 몇번이라도 바뀔 수 있다. 사랑의 대상에 따라 사랑의 정의는 문어발처럼 퍼진다. 사랑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넓다는 게지.

그럼에도 사랑 없는 사람살이는 끔찍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나 색깔을 가지건,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 소중하다. 나는 믿는다. 사랑이 이 삶이라는 치명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임을.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을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랑'을 다룬 영화를 좋아한다. 그 사랑은 때론 나를 달뜨게도 한다. 영화 속의 사랑에 나는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시키곤 한다. 물론 그 사랑이 내 가슴을 움직일 때만. 사랑 영화라고 모두 내 심장피를 뜨겁게 달구진 않는다.

이 영화가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 나는 이 사랑에 심장으로 울었다. 눈 밖으로 북받쳐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터뜨린 울음. 정말로 아렸다. 심장이 바짝바짝 쪼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나는 사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썰미의 둔함을 원망해야지..^^;;

에니스는 잭의 죽음이후, 잭이 살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잭의 옷장에서 겹쳐진 셔츠를 발견한다. 잭과 자신의 셔츠다. 잭의 파란색 셔츠가 에니스의 격자무늬 셔츠를 감싸고 있었다. 이후 거의 마지막 장면, 에니스가 그 겹쳐진 셔츠를 자신의 방에서 바라볼 때. 잭의 파란색 셔츠는 에니스의 셔츠 안에 있다. I swear... 라고 읊조리는 에니스는 잭을 그렇게 품은 것이다. 아, 이런 것을 놓치다니. 알면 더 감질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나는 사랑이 고플 때, 사랑이 힘겨울 때, 사랑이 그리울 때, 아주 가끔 이 영화를 보거나 떠올린다. 에니스와 잭을 다시 보고, 그들의 사랑을 곱씹는다. 아~ 살앙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당시 개봉되기 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고 긁적였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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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브로크백마운틴>. 제목부터 왠지 끌렸다. 이안 감독 작품이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어떤 "사랑"을 만났다.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의 사랑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 사랑이 지독하게 쓸쓸하고 아팠다. 시큼거리는 눈시울만큼이나 내 가슴에도 징한 대못이 박혔다.

사랑은 쓸쓸하고 아프려고 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희열이고 기쁨이지만 때론 아픔을 동반한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이다. 열정을 부정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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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의 충동이었는지, 고립된 산속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동성애 성향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그리고 그것을 어느 특정한 이유를 들이대며 설명하는 것도 우습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어느 한가지로 규정할 수 있던가). 그닥 알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그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른바 "허락 받지" 못한 사랑이다. 이성애가 아닌 사랑을 "금기"로 여기는 주류의 이기심. 그들 또한 그 사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어쩌다 한번 만나 아무도 모르게(브로크백마운틴만이 알 수 있는) 탐닉하고 열정을 불사르는 수밖에. 특히나 "남성성"을 더욱 강요당하는 카우보이들에겐 더욱 힘들 것 같은 사랑.

사랑에 관한 한 어느 사랑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동성애가 됐든 뭐든간에. 하지만 동성애에 대해 여전히 관대하지 않은 세상의 시선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더 로맨틱하고 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쓸쓸했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으스러진 그들의 감정. 그 감정을 억누른채 살아가야 했던 에니스의 머뭇거림. 합일하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해 부유할 수밖에 없었던 잭의 열정. 무엇보다 나즈막하게 에니스에게 "어떤 때 니가 보고 싶어 견딜수가 없어"라던 말을 건네던 잭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은 못내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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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만큼이나 쓸쓸했던 또 다른 두 사람. 에니스의 아내, 알마와 잭의 아내, 로린. 남편의 비밀을 알고서도 못내 그것을 안으로안으로 곰삭여야 했던 알마의 쓸쓸함. 계산기 앞에 몰두하는 로린 역시 점점 멀어지는 남편에게 받은 절망감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에니스와 잭의 사랑 뒤에 가려진 그들의 쓸쓸함.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맞다. 그거였다.


"동성애"를 여전히 "희귀종"으로 생각하고 배격하는 쪽에 가까운 한국에서 정서적으로 몰입하기가 쉽지 않을 법 하지만 그저 "사랑"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나는 그 사랑이 그저 가슴 아팠고 쓸쓸했다. 그래서 안구 밖으로 터져나오는 눈물보다 더 징한 가슴으로 울먹이게 만든 영화였다. 나에겐 그랬다.

"살앙"을 아는 당신이라면, 그 아픔과 쓸쓸함을 경험해본 당신이라면, 그들의 "살앙"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사족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일행이 아닌 옆에 계신 여성분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못해서였는지, 감정의 파고가 높아진 후반부부터 연신 눈물을 훌쩍이셨다. 다시 내게 사랑이 온다면 나는 그런 감성을 지닌 여성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정도 감성이라면 나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ㅎㅎㅎ

또한 뱀발이지만... 세상엔 너무도 큰 슬픔을 가슴에 담고서도 태연자약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이들을 봤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정작 감당하기 힘든 슬픔은 겉으로 폭발할듯 표현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에니스를 연기한 히스레저는 그런 면에서 증말 탁월했다. 그의 무표정이 얼마나 가슴을 후벼파던지...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 쓸쓸함이 잔상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어쨌든 결론은... 쉽다. 내겐 너무도 좋은 영화였고 다시 보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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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는 사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이 미친 놈의 순정'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의.
그 이상한 순정에 빠졌던 기억. 순정의 주인공은 재섭(이훈).  
약 4년 전이네. '시청률'도 높지 않고 제목도 촌스럽게 '죽도록 사랑해'란다.
평소 주말 드라마는 잘 챙겨보지 않았으나 이 드라마는 왠지 나를 끌어당겼다.
이유는 딱히 꼬집을 수는 없었다.
그냥 복작복작하게 살아가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깊이 박혔다.
그리고 아직까지 가끔 난 이 드라마를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한 여자만 죽도록 사랑하는 바보같은 남자, 재섭
언제나 화려한 변신을 꿈꾸는 여자, 설희
그리고... 그 남자 주변의 땀내나는 이야기
"70년대 우리의 자화상, 죽도록 사랑해"

이것은 이 드라마의 카피다.

* 이 드라마. 그닥 알려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시청률이 죽을 쒔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은 또 안다.
이 드라마, 알게 모르게 좋아하는 양반들이 있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
2003.3.1~2003.8.17까지 6개월여 방영됐다.
당시 마지막회를 보고 써내려갔던, 그 이상한 순정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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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당최 그런 말은 쓸 수가 없었다. 오히려 수수께끼였고 불가사의라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불편하기도 했다. "왜 그러냐? 제발 정신 차려라!!!"(버럭) 내가 그 녀석 친구라도 그렇게 쏘아붙였을 것 같다. 아니, 두들겨패서라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건 대개의 사람들 생각과 행동거지로선 외계의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속도전이 횡행하고 감정의 깔끔한 처리, 쿨함을 경배하는 디지털월드, 즉 21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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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하면 이 시대는 과연 얼마나 이를 믿어줄까. 그 당시에야 솔깃하고 좋아서 몸둘 바를 몰라해도 사람들은 조만간 현실을 얘기할 것이다. 그게 언제적 얘기였는가 싶게 말이다.

이 사내, 재섭(이훈)이 이 여우, 설희(장신영)를 만났다. 그리고 이 사내의 순정이 시작됐다. 그 순애보는 '죽도록 사랑해'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사내, 도통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치는 까고 있었지만 이 바위같은 사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포커판의 히든카드였다.

다른 년놈들 있는 것 없는 것 다 홀라당 까뒤집어놓을 동안 그는 묵묵히 포커판의 동향만 보고 있었다. 답답했다. 멀쩡히 다 보이는데 혼자 품은 것처럼 숨기다니. 그런 녀석이었다. 보는 내가 "얼레리 꼴레리~ 재섭이는요, 설희를 사랑한대요, 사랑한대요~"하고 내지르고 팠다. 차라리 온 동네 화장실벽에다 써놓을까 보다. 콱!

그런데 이 사내,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내지르며 설희에게 내뱉었다. "사랑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나중에도 그럴 것이며, 지금도 그렇다"는 말과 함께. 물컹 눈물이 또그르르르 떨어졌다. 제길, 머리에서는 이해는커녕 화가 나는데 눈물은 왜 눈치없이 떨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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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더 이상 현실에서는 자취를 감춘 (얘기라고 여기고 있는) 순정남이 가슴 속에 콱 박혔다. 도저히 머리 속에는 강제 주입이 불가능한 이야기. 일편단심 민들레는 열광이나 폐인을 불러내지는 못하지만 가슴을 움직일 수는 있다. 앞선 시대의 촌스런, 일명 클래식한 사내를 나는 알았고 앞으로 그를, 그의 순정을 기억할 것이다.(물론 내가 그 순정을 따르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현실에 없을 것 같은 그 순정을 내 기억의 박물관에 박제해 놓겠다는 뜻이다)

나는 내심 마지막을 향해 치달을 때까지 그가 다른 여자(모시던 사장의 딸, 재섭과 선을 보기도 했던)에게 눈길을 돌리길 바라고 바랬다. 설희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때까지 간 뒤 종적을 감췄을 때, 1년 후라는 시간을 건너뛰었을 때, 나는 내심 다른 여자와 함께 선 그를 기대했다. 바로 순정파의 변심을...ᄒᄒᄒ 호쾌하게 "그럼 그렇지"하고 무릎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작가는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이 사내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 재섭을 연기한 이훈은 너무나 리얼했고 내 가슴을 징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사내의 순정은 순백의 결정체였다. 설희에 대해서라면 한오라기 티끌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바위같이 견고한 사랑'은 재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첫사랑에 영혼을 빼앗긴 한 남자의 일편단심' 김운경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베팅을 하려던 나는 '오링'을 불렀다. 그 순정, 그 사랑에는 누구도 삿대질하거나 돌을 던질 권리가 없다. 재섭은 자신의 선택을 했고 마음의 소리에 충실했다. 어머니의 울음에도, 형의 권유에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에도 그의 순정은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영혼의 촛불은 태풍에도 끄덕이 없더라'는 그런 말이다.

개발독재가 세상을 지배하던 1970년대. 고단한 사람살이의 풍경은 예나 지금에나 다를 바 없다손 치더라도 그 시대는 좀 더 끈적끈적했다. 정면돌파도 있었고 맞장을 뜨면 합을 겨루던 낭만도 있었다. 속전속결보다는 지구전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정말 그 시절엔 저런 사랑의 풍경이 있었을까하는 궁금해 하는 건 고고학적(?)인 관심인가?

저리도록 아프다는 둥, 핏빛보다 아름답다는 식의 어설픈 관용어구는 사실 낯뜨겁다. 어쩌면 단순하다. 한 여자가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노래 가사마냥 "그 아픔까지 사랑"하거나 "그 아픈 굴절까지 죽도록 사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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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섭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 드라마의 쫑이 정말 아쉽다. 나는 하릴없이 극중 삽입된 노래들을 듣고 있다. 재섭의 애창곡인 '그집 앞' 그리고 이동건의 음색이 감미롭고 너무도 재섭's story와 딱 어울리는 'My Lady'. "그 수줍은 미소의 그녀가 내게로 다가왔죠/ 아무말 할 수가 없었죠/ 꿈처럼 사라질까봐.../ 처음 본 그 순간 내 마음 흔들어놓은 너의 미소/ 그대를 사랑해..." 아무말 할 수 없었던 이유. 맞다. 꿈이 될까봐 그랬다. 마지막에야 털어놓은 그의 "사랑해"란 말과 딱 매칭되는 가사의 조각들.

따지고 보면 현실적이고 혹은 속물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설희는 재섭의 순정을 더욱 빛나게 해주기 위한 장치다. 극의 구조나 이야기의 인과관계는 하나같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설희가 더욱 나쁘게 악랄하게 나올수록 재섭의 순정은 때깔나고 지지를 받을 것임은 뻔하지 않은가. 사랑이 거추장스러운 사치일 뿐인 설희(요즘 시쳇말로 쿨하다)에 반해 재섭은 우리에게 일정부분 덧씌워져 있는 사랑의 신성함과 숭고함을 강화해주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재섭은 친구에게 의리있고, 가족에게 기댈 언덕이 된다. 또한 정의를 위해서만 주먹도 쓰고 부패척결에 앞장선다. 자고로 그 시대가 요구해왔던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갖춘 모범생이다. 그의 어깨는 늘 듬직하다. 주변 남자들이 신체나 정신적으로 비루하거나 문제를 겪는데 대비되어 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하찮은 문제를 떠나 나는 재섭의 결정을, 그 순정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설희가 처한 설정을 무시하려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 아름다운 청년, 재섭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리고 싶을 것이다. 구구절절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리라.

재섭은 어쨌든 말했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라고. 사람살이가 어찌보면 또 그렇다. 내가 했던, 다른 누군가 그리했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재섭이 그랬다. 그가 설희에 대해 모르는게 뭐가 있나.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이미 설희는 재섭의 모든 것이 돼 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재섭은 선택을 했다. 그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병신"이라고 놀려도 그가 귀담아 들을 리도 없다. 욕하거나 설득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얘기다. 그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이다. 더 오랜 시간 끌지 않아도 됐다. 그의 청춘을 그냥 흘러보냈다고 생각지 않는다. 순정은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던가. 그 여우같기만 하던 설희가 그의 순정을 마침내 받아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누군가에겐 그 순정을 받아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나는 그런 재섭이가 문득 부러웠다. 누군가의 영혼은 아직도 순정의 대상을 잃고 부유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남들은 미망이라 얘기하는 그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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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내 휴대폰의 컬러링이 바로 이 드라마에 나온 노래다. 아는 사람, 거의 없다.
그 컬러링은 드라마 주제가인 'My Lady'이며 드라마에 출연한 이동건이 불렀다.
내 첫 컬러링이자, 이를 삽입한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질긴 생명력의 컬러링.
내게도 이런 순정(!)이 있다!! 컬러링을 향한. ^.^;;

그 수줍은 미소의 그녀가
내게로 다가 왔죠
아무말 할수가 없었죠
꿈처럼 사라질까봐
단 한번도 표현을 못했죠
멀어질까봐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돌아선 내게
I Love My Lady
처음 본 그 순간
내마음 흔들어 놓은
너의 미소
그대를 사랑해
이젠 내게 더 바라는게 없죠
세상 그 무엇도 그대를 내게서
데려갈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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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읽은 글이었다. 거기엔 한 줌의 진실이 있었다. 연인에 대한, 사랑에 대한. 내가 알고 있는 한!
플로베르의 말이라는데, 아마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일 것이다.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

"마음은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줄 수 있는 보물"이라고도 했던 플로베르임을 감안하면,
보물을 주더라도 똑같은 크기나 가치의 마음을 받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란 말이렸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진실(!)이다.

사랑에 있어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더 많이 사랑하면 행복하고 기쁘다, 는 말. 니기미 뽕이다. 그건 그저 교과서에 박제된 유물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반박해도 좋수.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고통도 더 받고 내상도 심하게 입는다. 주화입마!
그렇다고 Give&Take의 정량교환이 가능한 것이 사랑도 아니다.
 
사랑은 늘 한사람이 약자일 때 생성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사랑은 시작된다.
사랑의 전제조건!

프랑스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롤랑 바르트도 그래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 이것 역시 진실.

바르트는 에세이집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읊조리기도 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평생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다.

그래. 사랑해서 좋다지만, 연애의 진실은 따지고들면 아프다. 많이 아프다.
똑같이 사랑할 수 없음.
하지만 그 고민이야말로 연애의 유일한 가능성임을 감안하면,
그것은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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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두 사내가 있다. 더 많이 사랑했던 약자들.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했던 패자들.
두 사내는 이른바 '순정남'!
좋아서였겠지만, 그 고통과 상처야 말해 무엇하리.
뭐 좋게 말해 순정남이지. 나쁘게 말하자면 미친 게지. 사랑에, 연인에.
그래도 '사랑에 미치다'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도 그땐 그랬지 않았던가!  

그 중 맑은 눈을 지닌 청년이었던 한 사내.
나는 한때 그 사내의 연애와 순정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러나 그 사내는 결과적으로 버림받았다.  
이유야 있겠지만, 나는 그 사내가 더 많이 사랑함을 눈치챘고 그는 참으로 오랜시간 아파했다.
그 트라우마는 아직 그 사내의 일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던 그 사내는 최근 몇 년 전 다른 사랑을 시도했다. 이번엔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했다.
사내는 몇 년을 쏟아부었다. 거의 매일 같이 이메일을 보내고,
자그마한 피드백에도 그 사내는 한껏 부풀어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얼마전 그 사랑의 어려움을 내게 토로했더랬다.
눈 맑던 청년은 사랑에 지쳐갔다.
다른 이유와 겹쳐 그의 맑은 눈은 어느덧 세상에 대한 증오가 끓었고, 탁함을 내뿜고 있었다.
순정을 쏟아부었던 마음은 탁류에 휩싸여 가고 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닥 없다. 그저 그의 푸념을 들어주고 다시 사랑으로 예전의 그의 눈을 되찾길 바라는 것뿐.

사실 나는 순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순정이 밥먹여주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엔,
'XY염색체의 순정'을 원하는 일부 XX염색체의 환상도 있고,
'XX염색체의 순정'을 강요하는 많은 XY염색체의 택도 없는 욕심도 있지만,
사실 나는 그 환상을 믿지 않는다.
때론 한번 짓밟힌 순정은 엉뚱한 증오로 발산되곤 하더라.  
열번을 찍는다고? 맙소사. 그건 내겐 행여 그 대상이 거의 종교에 가까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고로 나는 종교가 없다.

다시한번 되새김질 해보자. 순정, 남자의 순정.
국어사전에만 남아 있고 현실 세계에선 거의 멸종됐다고 학계에 보고된 희귀동물.
폐광 깊숙이 묻힌 채 탐사발굴팀이 연장을 들고 나서지 않는 이상 눈으로 확인키 어려운 존재인 것이다.

또 다른 한 남자의 순정!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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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수 없는, 버려져선 안되는 생의 사랑 by 필감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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