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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8 22:49 메종드 쭌/무비일락
To. 빌리(Billy).

안녕, 빌리. 소식, 들었어? 아마 지금 넌, 뉴욕 주에 살고 있어서 그 소식에 환호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긴 한데. 뉴욕 주의 동성 결혼 합법화! 동성 커플이 결혼할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됐고,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받는 기초적 보호를 누릴 수 있게 됐잖아.

물론 앞서 미국의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코네티컷, 아이오와, 버몬트 주가 동성 결혼을 제도화한 바 있어서, 이번 뉴욕 주의 담대한 결정은 6번째였지만, 인구(1900만명)를 감안했을 때, 그 파급 효과는 남다를 거란 분석도 나오더라.

너도 만났을지도 모를 이 사람. <천재소년 두기>에서 두기 역을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 5년 전 프러포즈를 했던 동성 약혼자와 곧 결혼하겠다고 하더라. 몇 년간 약혼반지만 끼고 있어야했던 고문(!)은 이제 끝이라지? 그래, 다행이고, 잘 된 일이야.

남들 다 하는 ‘결혼’이 그렇게 어려웠던 사람들. 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요, 그저 죄라면 사랑한 죄?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것, 당연한데도, 그것을 제도적으로 막는다는 게 말이 돼? 응? 그래, 뉴욕 주의 결정, 잘 된 거지, 잘 된거. 널리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동성을 좋아한다는 게 뭐가 나빠? 미국도 이번에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한다고 하잖아. 그네들 삶인데 그걸 왜,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욕할 필요는 없는 거야.” 데뷔 48주년, 1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한, <예술하는 습관>에서 동성애자 시인을 맡은, 일흔 살의 배우, 한국의 이호재 아저씨는 이런 말도 하더라. 배우 예술을 하는 분이라, 타인의 삶을 잘 이해하고자 하시는 것 같아. ^^



하여튼, 뉴욕 주의 소식을 듣곤, 빌리, 네가 떠올랐어. 뜬금없지? 네가 동성애자인 것도 아니고, (물론 극중에선 너의 성정체성을 알 순 없지만) 영화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내세운 것도 아닌데, 왜 너였을까?


아마도 그건, 너를 통해 내가 남자다움에 대한 첫 회의를 가지면서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야. 넌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게끔 도와준 거야. 무슨 얘기? 빌리, 그래 천천히 읽어보렴. 이 편진, 온전히 널 위한 연서니까.

<빌리 엘리어트>, 그 다양한 함의들

<빌리 엘리어트>. 그 영화를 통해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게서 꿈을 보았어. 아버지에게, 세상에게 번번이 부딪히고야마는 꿈이었지만, 네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나는 꿈을 꾸고 싶은 사람이었거든. 꿈이 있다면 좌절하지 말고, 발걸음을 내딛어라! 그렇게 단순했다. 그것이 발레이든, 무엇이든.

처음 봤을 때부터 <빌리 엘리어트>에 홀딱 반했던 나는, 간혹 널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잡곤 했어. 어떻게 널 잊을 수 있겠니. 두 발을 딛고 비상하는 네 모습. 그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했어. 헌데, 이상한 건, 널 볼 때마다 영화가 달리 보였다는 것. 희한했어. 그러니, 넌 늘 새로웠다.

다시 만날 때는, 성장 통을 다룬 성장영화였어.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갈등을 빚고 화해하는가. 그것도 처음에는 소년이 먼저였지만, 다시 볼 땐 아버지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성장할 수 있구나.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네 아버지의 변심(?)이 정말 놀랍게 보였거든.


그랬던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봤을 땐, 그것은 신자유주의 반대 영화이기도 했어.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마가렛 대처가 빚어낸 광산 공동체의 와해. 지금 폐해를 잔뜩 뿜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일어섰는지, 보여줬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대처해야 하는가 등등. 정말, 정치적인 영화였어, <빌리 엘리어트>는.

그것으로 끝이냐. 노노. 연대가 왜 중요한지도 알려준 영화였지. 그것은 꼭 노조의 이야기만 그런 것이 아녔어. 너와 네 친구, 마이클. 너와 발레 선생님이었던 윌킨슨 선생님. 그리고 네 진학을 위해, 없는 살림이지만 삼삼오오 돈을 내놓는 탄광촌 동네 분들. 그래, 네가 살던 그곳에서 느꼈던 짠한 공동체. 당장 눈앞에 닥칠 붕괴 앞에서도, 미래를 굳이 떠올리진 않았겠지만, 널 위해, 공동체의 아이를 위해 주머니에서 페니를 꺼내는 사람들. 그들은 널 희망이라고 불렀지, 아마.

<빌리 엘리어트>가 놀라운 건, 그 다양함 때문이었어. 어떤 시선에서, 누구를 주목해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카멜레온. 넌, 거기서도 물론, 항상 가장 강렬한 포스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성애 혐오증’이 남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그리고 뭣보다, 날 깨어나게 만들어준 건, 네가 빚어낸 남자다움에 대한 생산적 파괴였어. 처음에 한 얘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빌리 엘리어트> 곳곳에는 동성애 혐오증(호모 포비아)이 묻어나. 광산의 남자들. 거기서 연상되는 정형화된 이미지와 편견도 있겠지만, 그들이, 특히 아버지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행동이 그래.


남자다움. 아버진 네게도 권투를 하라고 강요하잖아. 그건 어쩌면, 널 게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마초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애(?)였을지는 몰라도, 난 그 모습이 위태해보였어. 그건 아마도 게이로 비춰지는데 대한 두려움이겠지? 정작 넌,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나 형, 대부분의 광산 남자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시달렸을지도 몰라.

네 아버지도 그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잖아. 고작해야 화내는 게 전부야. 그 화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나오는, 즉 자기 방어본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까, 동성애 혐오증 같은 거지. 호주에서 연구 결과가 있었대. 이성애자 남자들이 게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제한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는. 가령, 이런 거야. 학창시절, 미술, 음악, 문학 수업을 피한대. 여자들이나 하는 수업이라는 핑계로. 심지어 학문적 기술이 다소 여성적으로 보인다며 일부러 실력 발휘를 하지 않는 형태로도 나온대.

동성애 혐오증은 결국, 이성애 남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셈이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재능조차 감춤으로써 진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거지. 그게 뭐야. 자신이 자신을 감춰야만 하다니.

연구는 또 말한대. 나이든 남자의 경우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허참, 죽음을 부를지도 모르는 것까지 나아가다니, 그 동성애에 대한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거야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 아닐까?

빌리, ‘남자다움’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다

마초이즘이 지배하는 광산촌. 그 속에서 너의 결정(발레를 하겠다는)과 너의 행동(아버지에게 저항하는)이 가져다준 충격은 꽤 컸다. 나? 네 아버지나 형보다 아주 조금 덜 했을지는 몰라도, 나, 마초였다. 바닷바람 맞고 자랐다는 이유로, 마도로스의 고장에서 태어났단 이유로, 그곳 남자들은 ‘(비겁한 혹은 비루한) 남자다움’을 은연중에 강요받고 자라거든.

그 남자다움이란 게 이래. 투박하고 무뚝뚝한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풍토 속에, 퇴근해서 아내에게 하는 말이 딱 세 마디래. 아(애)는? 밥 도(줘)!, 자자. 남자는 여자처럼 입을 놀리는 것이 아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한단다. 이른바 한국 갱(경)상도 남자들의 전형. 그런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발레 하고 무용하는 남자는 머스마(사내)도 아닌 기라. 

조금씩 그런 물이 빠지곤 있었다고 하나, 그 마초이즘이 횡행한 도시가 아니더라도, 한국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덕목들이 있어. 빌리, 너로선 당최 이해가 안 될 것이긴 한데, 가령 이런 거야.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어때? 이 거 이 거, 완전 폭력적인 말이지 않아? 그런데도 그 말이 여기에선, 아직 통용돼. 남자의 눈물이란, 그저 끔찍한 것이거나 지질한 것이거나. 사실이 그러하니, 네 아버지와 형이 단호하게 너의 발레를 반대했던 건, 일견 이해가 가더라. 광산의 힘든 노동과 시위로 일생을 살아왔을 그들에게, 남자가 발레를 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더구나, 그게 아들이자 동생이? 아유. 그건 동네 창피한 일이자 수치였던 게지.

마초들에겐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모든 것이 될 때가 있어. 특히 어줍지 않은 남자다움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내가 널 보면서, 깨닫게 된 건, 그 남자다움에 대한 허상이었어. 그건 남자다움도 아니요, 남자로서 해야 할 일도 아니었던 거야. 아버지가, 형이, 그리고 세상이 옭아매온 인습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진짜 남자다움은 아닐까.

아버지 세대에서 형까지 묻어난 남자다움을 생산적으로 파괴했던 너. 나는 그것이 통쾌했어. 그리고 그 통쾌함이 내 가슴을 흔들어 깨우더라. 나의 남자다움이 얼마나 허술하게 조직돼 있었는지.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애 쓰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미숙하며,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하려고 애를 썼던 모습. 내 부끄러움이 보이더라.

동성애라면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짓처럼 여겼던 우둔함까지. 나는 널 보면서, 나를 감싸고 있던 허울 좋은 마초 옷이 날 얼마나 옥죄고 있는 것인지 알았던 거지. 그래, <빌리 엘리어트>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즉 동성애 혐오증이 어떤 식으로 소년을 가둬놨는지를 보여준 영화였어.

너는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그 마초 옷을 찢고 나온 용감하고 바람직한 남자였지. 모든 남자가 아마 너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겠지만, 널 만나 그런 옷을 입고 있고, 그런 옷을 찢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운 좋은 나도 있어.
 


성인이 된 네가 <백조의 호수>에 등장해, 멋있게 도약하고 비상하는 장면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물론, 너의 그 비상을 본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네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건, 네가 이뤄낸 남자다움의 생산적 파괴가, 내 속 좁았던 마음의 도약을 도왔다는 것. 그것으로 나는, 내게도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어. 남자다움에 포박되지 않고, 내 마음과 감정에 조금 더 다가가고 표현할 수 있음에 감사해. 

빌리, 네게 하는 말인데, 너처럼 멋있게 도약하진 못하겠지만, 60이 됐든, 70이 됐든, 나는 발레리노가 될 꿈도 꾼다. 취미일지라도, 나는 네 덕분에 발레가 그렇게 매력적인 것임을, 발레리노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네가 했던 이 말도 여전히 난 기억해.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물음에 네가 답했던.

음…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같은 느낌,
날아가는 것 같아요.
모든걸 잊어버려요.
춤을 출 때 저는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을 그때, 널 초대하고 싶어. 올 수 있겠니? ^.^
고마워. 빌리. 오늘, 이걸로 줄일 게. 안녕. 이만 총총.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도약할 때, 폴짝 땅을 딛고 허공에 발을 놀리고 있을 때,
가장 알흠다운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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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년을 참으로 좋아했다.
권투를 종용하는 아버지의 강권을 뒤로하고,
발레를 택하는 소년의 속깊은 강단이 그랬고,
탄광촌 노동자 집안이라는 가정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꿈의 부름을 따라 자신만의 몸짓으로 세상과 맞장뜨는 어른스러움이 그랬으며,
여자들과 섞여서 전혀 어색함 없이 노닐고,
커밍아웃하고픈 친구를 대하는 사려깊음도 그랬다.
특히나, 뜀박질하고 춤을 추는 장면에선,
눈물을 자아내는 꼬맹이 녀석.
어쩜, 나보다 낫다. 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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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소년의 이름은,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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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무장한 대처리즘이 노동자를, 서민들을 가혹하게 옥죄던 시대.
어쩌면, 미운 오리 새끼 같던 녀석이었다.
아버지나 형의 실존적 고민은 아랑곳 없이,
그저 자신의 꿈에만 매진하고픈 개구쟁이였다.
그래서 녀석은 뛰고 굴렀다.
권투글러브 대신 토슈즈를 신고.
꿈을 좇아, 마음을 따라.
중력을 거슬러 힘껏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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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다시피, 녀석은 백조가 됐다.
역시나 비상할 때 가장 아름다운.
나는 그런 빌리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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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빌리는 이 소년,
제이미 벨.
주근깨 빼빼마른 어린 댄서.

그랬던 녀석이,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간간히 <킹콩> <아버지의 깃발> <점퍼> 등을 통해 얼굴이나 소식을 접했지만,
아무래도 압권은, 바로 이 영화,
<할람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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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잘' 자란 아해들을 보면, 므흣해진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더구나, 그곳은 곳곳에 함정과 늪이 도사린 엔터테인먼트의 세계.
매컬리 컬킨, 브래드 렌프로, 린제이 로한, 드류 배리모어(비록 재기에 성공했지만..) 등등은,
망가진 채 진창을 헤맸다.
그러나 제이미 벨은, 역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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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녀석 불안정하고 별나다.
나무 위 오두막에 서식하거나,
항상 무언가를 훔쳐본다.
특히나, 다른 이들의 애정행각을.
한마디로 '피핑 톰(Peeping Tom)'.
어른이 돼 가는 녀석의 이름은 '할람 포'.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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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할람, 트라우마로 똘똘 뭉쳤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와는 충돌한다.
그러고보면, 빌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엄마라는 완충장치가 없었고, 아빠 세대와는 불화.
빌리가 다른 아이들의 발레하는 모습을 훔쳐봤다면,
할람은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나누는 모습이나 어머니를 닮은 여인을 훔쳐본다.
다만, 좀더 크다보니 할람의 성장통이 좀더 다이내믹하고 빡센 측면이 있다.
새엄마를 증오하면서도 성적열망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이디푸스의 상흔이 뚝뚝 묻어난다.
혈혈단신 런던으로 가출해 시계탑 뒤 다락에 기거하면서 훔쳐보기를 멈추지 않는 할람.
잘 사는 집안을 뛰쳐나온, 세상 물정 모르는 반항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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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잘 자란 제이미 벨이 그냥 피핑 톰으로만 머무를리 없잖은가.
열여덟(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이 밍숭맹숭한 건, 어쩌면 인생에 대한 모욕.
이 알흠다운 청년이 너무 반듯하기만 하다면 그것 또한 심심.
역시나, 그의 알흠다움을 알아본 한 연상의 여인.
엄마를 빼다 박은 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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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디높은 관음의 둥지에서 희한하게 건져올린 사랑.
그녀와 함께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모습은 완전 기시감.
앗, 그놈이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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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그 사랑이 항상 탄탄대로는 아니지만,
트라우마를 완전 극복한 것도 아닌 듯 하지만,
훔쳐보기를 그만두게 됐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할람은, 그 옛날 빌리처럼 고통 속에서 피어난 성장의 한 단면사를 보여준다.
탄광촌을 벗어나, 고딕풍의 건축물이 우뚝 솟은 에딘버러의 풍경은 그런 할람에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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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meff에 이어 다시 본, <할람 포>.
아마 당신도 이 영활 본다면, 훌쩍 이런 말이 건네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어쩜, 이리도 잘 자랐니, 제이미 벨."
뭐 이렇게 잘 자랐으니 앞으론 걱정 안해도 되겠다고?
맞다. 빌리도 그랬지만, 할람도 묘한 안심을 심어준다.
흔들리고 불안하면서도 외줄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은.
그건 곧 '제이미 벨'에 대한 안심.
할리우드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흉악함에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함.

...“그들 모두가 자신이 갖지 않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구라는 땅에서 20년 정도를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지옥 같은 날들이 많이 남아 있군. 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앞으론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난다. 특히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때 오스카를 수상하지 않은 게 나의 행운”이라고 말하는 벨은 클럽과 재활원을 부메랑처럼 오가는 ‘셀리브리티’가 되는 대신,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욱 내기를 걸고 싶어지는 스물두살의 흥미로운 배우로 성장했다...  - 씨네21 최하나 기자의 글 중에서 -

그런데 언니들은, 누나들은 정말 좋겠다.
이만큼 잘 자란 완소남이 있어서.
완전 누나들의 로망.
아마, 이런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겠지? ㅎ 오메, 부러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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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말한다.
"맙소사,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나는 남자다. 사람은 자란다니까."
("I’m not a kid now, Jesus. I’m a guy. People grow.")
어잌후, 한방 먹었다. 짜식.(입가에 미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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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난 은근히, 이 누나(소피아 마일즈)가 매력적이더만.
완전 예쁘진 않지만, 사람을 막막 끄는 매력이 솔솔 있더라구.
그래서, 나는 이번에 다시 생각했건데,
18살이 아니어서, 다시 한번 참으로 분했다.
그때 내겐, 왜 이런 누나가 없었냐고!!! 흑...
눈물 나. 된장. ㅠ.ㅠ



2007/10/21 - [메종드 쭌/시네피아] - 훔쳐보기의 성장사, <할람 포> & 비극의 속깊은 이해, <그르바비차>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10.22 16:16 메종드 쭌/무비일락
올해 8회를 맞은 메가박스 유럽영화제(meff). 역시 빼놓을 수 없지. PIFF에 이어지는 나의 연례행사. 그리고 지난 12회 PIFF 때, <할람 포>를 리스트에서 뺀 것은 유럽영화제에 프로그래밍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람 포>는 그렇게 나의 기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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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포스터. 출처 : www.meff.co.kr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할람 포>를 만날 설렘으로, 나는 meff를 기다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할람 역을 맡은 '제이미 벨'을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다. 훌쩍 커버린, 쪼메난 발레리노 소년의 또 다른 성장담. 영화가 괜찮다는 입소문까지. 그 중간에 <데쓰 워치> 등이 있었지만, <할람 포>는 입소문을 통해 제이미 벨의 '바람직한' 성장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고통을 거쳐 제이미 벨은 또 성장의 역사를 그릴까. 궁금궁금.

그리고 영화를 본 뒤,
나는 '훔쳐보기의 성장사'라 는 타이틀을 덜컥 달아줬다. <할람 포>에. 물론 할람은, 이 타이틀을 좋아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어. 할람은 훔쳐보기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세계와 만나는 한편으로 어줍잖지만, 타인과의 소통을 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성장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지. 훔쳐보기가 도덕적, 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훔쳐보기에 따른 댓가도 치러야 한다. 여느 성장통이 그러하듯.
 
그렇게 시종일관 훔쳐보고, 지켜보는 할람의 시선. 그 시선은 어머니를 얼척없이 잃은 소년의 트라우마와 겹쳐 있다. 할람은 불안정하고 별나다. 그런 할람에 제이미 벨은 제격이더군. 전작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그렇지 않았는가. 빌리에게도 어머니는, 저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충돌했다. 아버지 세대와의 불화를 통해, 빌리도 할람도 성장의 고통과 기쁨을 관통하고 있었다. 빌리의 제이미 벨도 다른 아이들이 발레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훔쳐보기를 통해 자신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도시로 가출한 할람도, 어머니를 닮은 한 여인을 훔쳐보면서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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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할람이 훔쳐보기를 통해 엮은 소통과 성장의 굴곡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 엄마에 대한 용서도, 아버지를 통해 들은 진실도, 할람의 트라우마를 씻은 듯이 치유하진 못한다. 사랑 역시 그리 만만치 않다. 어쩌면 할람은 훔쳐보기를 그만두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선, 할람을 그닥 걱정하고 싶진 않았다. 바로 그 빌리처럼, 할람은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제이미 벨의 너끈한 연기 덕분이었을까. 그는 흔들리고 불안하면서도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묘한 안심을 심어준다.
 
음악 또한 할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영상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영상 밖으로 튀어나와 오버하는 감도 있었지만, 할람이 혼자임을 토로할 때, 고통이 극대화할 때, 그 음악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그리고 제이미 벨, 아주 바람직하게 컸네. 극중에서 할람이 뜀박질을 하거나 그런 포즈를 취할 때마다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빌리를 다시 보는 듯한. 제이미 벨이 가장 빛나는 순간 아닐까 싶다. 아오이 유우가 발레 장면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처럼. 저렇게 바람직하게 커줬으니, 누나들이 완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누나들의 완소남 혹은 로망, 제이미 벨. 어쩌면 빌리 혹은 할람. 성장영화를 통해 계속 자라고는 있으나 그도 성장영화의 틀을 벗어던질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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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컸다. 제이미. ^.^ 누나들이 좋아하겠어~ 그래서 혹시, 용서가 됐을까. 피핑 톰, 할람의 훔쳐보기를 용서한 극중 연상의 여인도 혹시...^^;

흠, 그래서일까.
김혜리 씨네21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18살이 아니어서 분하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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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의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또 하나의 시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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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포스터. 출처 : www.meff.co.kr

<그르바비차>
.
지난해 3월 56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행했던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수상소감이 나를 이 영화로 이끌었다. 영화는 보스니아 사태 당시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고통을 다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간절히 소망한다. 보스니아는 이제 서구 미디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보스니아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강간 피해자들은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사회생활의 최저단계에 놓여 있으며, 한달에 정부로부터 겨우 15유로를 받으며 살아간다. 내 영화가 많은 시선을 끌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기만 빈다."

<그르바비차>는 발칸반도의 비극에서 파생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미디어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비극에 희생당한 보통 사람들의 힘겨운 일상과 비극으로부터 파생됐으나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 사실 그 비극은,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어떤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극과 이들에 대해 몰랐던, 아마 외면했던, 우리들의 무관심에 작지만,  반드시 필요한 경종을 울린다.

<그르바비차>는 비극을 사유하는 방식이 담백하되 깊었다. 그것은 비극을 다루고 전달하는 방식 때문이다. 비극의 통시적 관찰과 전시보다는, 그 비극에서 비롯된 잔해와 후유증을 일상과 함께 더듬었다. 비극의 직접적이고 스펙터클한 전시를 꾀한 <화려한 휴가>보다 성숙한 시선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르바비차> 같은 영화가 더욱 울림이 크고 좀더 세밀하게 사건을 찾아보게끔 만든다. 관객의 사유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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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그리고,
여성 감독이라 그런지, 여성들을 세심하고 잘 보듬고 있었다.
극 중에서 전사자에 대한 보상시스템은 완벽하게 남성위주의 시선이었다. 전장에서 희생당한 남자들은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족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역시 같은 비극을 통해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은 어떤 식으로도 보상이나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저 여성들만의 연대에 족하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남자 중심으로만 보상체제가 구축된 사회적인 시스템에 역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딸의 수학여행을 위해 '전사증명서'를 떼지 못한 채, 월급을 가불해서라도 이를 마련해야 하는 여성의 비극.

나는 주인공인 에스마를 보면서, 왠지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그 나라의 정부, 비극과도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미안했다. 거참. 그리고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을 좀더 알고 싶어졌다. 미디어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어떤 비극을. 우리는 과연 이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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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스틸컷. 출처 : www.mef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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