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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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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 등장부터 남달랐던 그녀였다.
그렇다. <레옹>. 그때 그녀 나이 열두 살이었다.
허나 그런 나이 따위, 그녀에겐 무의미했다. 포스, 아우라, 그녀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 열두 살의 마틸다가 휘어잡은 것은 레옹만이 아니었다.
스크린 밖에 있는 나도 홀딱 넘어갔다. 나도 킬러가 되고 싶다, 는 생각을 순간 했다.
킬러가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제는 물론 마틸다, 그러니까 나탈리 포트만의 존재지만.
혹은 그녀에 버금가는 포스를 지닌 소녀만 옆에 있다면,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내게 청부를 할까...^^;;)

<히트>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뷰티풀 걸> <화성침공> 등에 이어,
그녀는 아미달라로 돌아왔다. 아우, 황홀했다. 그녀의 뷰우티는 우주의 공주로 손색없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의 아미달라 공주. 그녀는 진짜 여인이 돼 있었다.
아나킨이 그녀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고, 어쩌면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다스베이더가 되는 것도 당삼빳데루였다.



대학입학으로 그녀는 바빴던지, 필모가 다소 뜸했고, 나도 그녀를 향한 시선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만난 <클로저>(2004). 그녀, 파격이었다. 평소의 행실(?)과 엄청 달랐다. 와우~
나의 원조 여신, 줄리아 로버츠 덕분에 찾은 극장이었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더 마음을 뺏긴 것은 나탈리였다.

물론, 나탈리는 이미 내게 둥지를 틀고 있는 배우지만,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글쎄. 김도훈 기자의 이 말을 인용하자.

"…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하기도 한 내털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한 번 비교해보자. 당신이 남자라면, 둘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가? 대답 안 해도 알고 있다. 당신이 여자라면, 하버드 심리학과 출신에 온갖 정치활동에 나서며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an)에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내털리 포트먼과 적당히 풀어헤친 웃음으로 함께 고기를 씹으며 파티를 즐기는 스칼렛 요한슨 중 누구와 파티에 가고 싶은가."

나? 알다시피, 난 남자다. 날 더 안다면,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하악하악~을 이미 발설한 것을 기억할 테지. 나는 수줍게 스칼렛을 지목할 것이다. 나탈리가 그것밖에 안 되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탈리는 범접하기 힘든, 박제된 여신의 이미지가 있다. 그건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게 그녀였을 뿐이다. 아마도, 착한 여신. 나탈리는 낮에 사진을 붙여놓고 경배하는 무엇이라면, 스칼렛은 함께 밤을 지새고픈 여자다.
(두 사람,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한 바 있으며, 각각 평소 이미지와 반대 역을 맡았다. 나탈리는 이 영화를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두편 중 한편으로 꼽았다. 나머지 한편은 <브이 포 벤데타>.)

그러니, 내 음탕한(?) 놋북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둥지를 튼 폴더는 있지만, 나탈리 포트만의 폴더는 없다. 감히 어찌!
아무래도 나는 스칼렛이 어울리는 남자인가 보다.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의 나탈리도 나름 매력 있었다.
<블랙 스완>은 일단 나탈리의 도약이 아닌 날개와도 같은 영화다.
곧 삼십대로 접어들 나탈리는 점점 더 멋있는 배우, 아니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유? 물론 내 멋대로의 해석이다.
그녀는 <블랙 스완>의 안무가이자 발레리노 벤자민 밀피예를 만나 임신 중이며 약혼을 했다.
이른바 '혼전 임신'인데, 평소 나탈리의 반듯한 이미지를 감안했을 때, 파격이다. 그녀는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나는 긍정 평가한다. 팬이니까! 근데 밀피예는 부럽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담배와 술과 마약을 하지 않는 금욕주의자란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긴 글렀다. 에잉.

<클로저>가 아프고 가슴에 각인됐던 것은,
댄(주드 로)이 꼭 나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댄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택도 없이 따르지 못하면서...ㅋ)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 … <클로저>

사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을 위해 진실해야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을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 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 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네 사랑의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3.12 17:41 메종드 쭌/무비일락
<블랙 스완>의 히로인은 나탈리 포트만이지만,
숨겨진 히어로는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아닐까.
지금은 없는, 종로의 코아 아트홀에서 내가 본 그의 첫 영화, <레퀴엠>.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다. 흔들리는 스크린은 충격에 휘둘린 내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제니퍼 코넬리는 뭘 어찌해도 치명적이고, 아름답다. 여신, 맞다. 
'치명적 지성미'라는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 나도 한 표 보탠다.

중독된 당신에게 고함, 꿈은 죽었다!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참함을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영상을 대면하는 동안 먹먹해지는 가슴은 감독의 의도인 듯하지만,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감정을 피할 수 없다. 피폐함이 밀려오고 갈증도 수반된다. 데뷔작, <파이>로 미국 독립영화계의 앙팡테리블이 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인 <레퀴엠>의 원제는 <Requiem for a Dream (꿈을 위한 진혼곡)>
.

중독된 자들의 추락사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극과 같은 꿈을 다룬다. 현대사회의 ‘중독’에 대한 가감 없는 표정과 뜨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절망에 대한 보고서다. 중독이란 ‘늪’에 한발씩 다가서면서 파멸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사회의 빛과 어둠사이 간극을 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독의 이면에 존재하는 ‘결핍’까지.

<레퀴엠>은 도입부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신경전을 통해 각자가 집착하는 -내면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중독을 한 꺼풀씩 드러낸다. TV다이어트쇼 시청이 유일한 낙인 어머니와 그 TV를 팔아 마약비용을 마련하는 아들간의 허무맹랑한 핑퐁식 공방은 차츰 외연을 확대하는 모양새다.


어머니, 사라(엘렌 버스틴)는 TV다이어트쇼와 다이어트약에 빠져들면서 환상에 빠진다.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친구 타이론은 마약과 본격적인 거래를 튼다. 그들에게 마약은 정신적인 만족뿐 아니라 폼나는 삶을 꿈꾸게끔 만드는 ‘무기’다.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중독의 확장성은 놀랍다. 차츰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게끔 유도한다. 그 과정은 계절의 바뀜을 통해 드러난다.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은 중독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그들의 경쾌한 발걸음처럼 빠르고 희망적으로 채색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도달하면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결국 그들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봄은 결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계절로 망각되고 만다.

그 절망의 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희망, 꿈은 바로 여기에 있어’라고 간드러진 울림으로 그들 삶의 구심점이 됐던 중독은 단숨에 갈라진 목소리로 ‘카운트 블로’를 날린다. ‘이건 현실이 아냐’라고 거부하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산산조각난다. 누구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환멸로 가득한 시선만이 배회할 뿐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남은 건? 맞다. 결핍’밖에 없다. 사라에겐 좋았던 시절의 가족에 대한 공허함이, 해리는 꺾어져 버린 지난 꿈에 대한 상실감이 둥지를 틀었다. 마리온에겐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애정이 결핍돼 있다.

한편으로 영화는 중독과 결핍, 파멸의 수순을 숨 가쁜 영상으로 표현한다. 관객이 흡사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영상 메시지를 전파한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반쪽으로 조각내고 하얀 가루, 동공의 숨 가쁜 움직임, 덜거덕거리는 이를 빠르게 교차 편집한 몽타주(감독은 이를 ‘힙합 몽타주’라고 명명했다). 편집은 정교하고 빠르다.

그러나 이 같은 현란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담은 화면이 영상의 기교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인간 내면의 풍경을 극한으로 끌고 가면서 관객을 화면에 부착시킨다.

중독은 자기 증식한다


사라는 중독의 자기 증식과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TV부터 다이어트, 약물로 이어지는 중독의 확대 재생산. 냉장고는 ‘변신괴물’이 되어 사라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고, TV다이어트쇼의 환영들은 스멀스멀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와 사라뿐 아니라 관객을 혼비백산하게끔 만든다. 중독의 심화로 치닫는 계단을 통해 현대인이 맞닥뜨린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난다.

중독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산물이다. “소비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행복해질 것이다”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자본의 횡포는 이미 일상을 주무르고 있다. 일례로 자동차와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문명화는 인간 영혼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준족의 발전(?)을 이룬 상태다.

헤로인,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에 대해 ‘중독’이란 단어를 우선 떠올리지만 기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TV, 음식, 과자, 섹스, 다이어트, 게임 등 버라이어티한 상품이 진열된 자본의 백화점은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중독이라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고 강요하고 자본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낙오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즐기는 것을 넘어 집착과 의존의 단계로 점프하는 순간, 삶은 다름 아닌 중독과 마주대하게 되는 셈이다.

<레퀴엠>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허버트 셀비 주니어는 “그러한 판타지의 뒤를 좇을 때 마음속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돼간다”라고 일갈했다. 구멍은 곧 결핍을 뜻하고 중독은 자연스레 결핍과 공존을 꾀하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일지도 모른다.

꿈이라고 자위하면서 더욱 집착하는 중독은 상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통령병’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중독 증세를 보인 사람들을 보아왔고 ‘신용카드’란 이름의 병폐를 겪고 있다. 미디어를 가장한 중독성 전파는 여전히 횡행하고 인터넷도 자칫 잘못하는 순간 중독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중독돼 있을지 모르는 우리네 모습.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중독된 영상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는 금요일(9일) 밤 0시 55분 KBS1TV 독립영화관에서 <레퀴엠>을 방영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2004년 7월 국정브리핑 기고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