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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5.21 詩로 버무린 봄밤의 콘서트

지난 4월은 그야말로 '시인의 달'이었다.

詩를 통해서만 만나던 그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하늘의 영광, 땅위의 축복? 아니면 전생에 덕을 많이 짓다보니? 캬캬.


신경림 시인을 비롯, 최영미, 나희덕, 문태준 등 이름을 알고 있던 이들 뿐 아니라,

몰랐던 이시영, 김사인, 손택수 시인까지. 유후~


최영미 시인을 제외한 다른 시인을 만났던 사월의 그날도,

오늘처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지요.

아래는, 그날의 현장을 스케치했던 풍경.


오늘, 당신은 당신만의 시를 짓고 있겠지요.

그리하여 오늘, 당신의 詩가 내립니다.

나는 그 비를, 그 詩를 맞고 싶어요...

==========================


詩로 버무린 봄밤의 콘서트

창비시선 300번 시선집 출간기념 상상마당 북콘서트 현장


시와 음악이 만나 비를 내렸다.


촉촉한 봄비가 내린 지난 20일 KT&G상상마당 Live홀. 창작과 비평사의 ‘창비시선’ 300번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시와 노래로 익어가는 비오는 봄밤을 만끽하기 위한 관객들의 기대감도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비시선, 1975년 1번 신경림의 《농무》로 시작된 35년의 역사. 그 역사는 300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주제는 ‘사람과 삶’. 201번부터 299번까지 시집을 펴낸 86명의 시인들의 흔적 가운데 감동적인 작품이 실렸다. 200번 기념시선집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2000)이후, 300번을 채우기까지 9년의 시간이 걸렸다.


백낙청 창비 편집인은 이날 북콘서트 인사말을 통해 감격스러운 심경을 쏟아냈다. “오늘은 시인들과 함께 하면서 창비시선 300호를 채운 것을 기념하기 위한 뜻 깊은 자리다. 되돌아보면 감회가 깊고, 시가 노래와 대중을 만나는 귀한 자리인데, 세속의 말을 가다듬어서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준 시인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백 편집인은 그가 관여한 창비시선 출발의 우연도 언급했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는 처음부터 창비에서 나온 책이 아니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시인이 자비로 낸 시집이었는데, 그게 다 팔렸다. 더 찍고자 했는데, 더 이상 자비로 낼 이유도 없었고, 창비에서 이를 다시 찍어냈다. 그땐 ‘창비시선’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그렇게 몇 권의 시집이 나오고 나서야 후행적으로 붙게 됐다는 것이 백 편집인이 되새긴 창비시선의 출발점이다.



나희덕․문태준 시인의 이야기


인사말이 끝나고 박용환 평화방송 아나운서의 사회로 본격 시작된 북콘서트. 나희덕, 문태준 시인이 등장했다. 동인활동을 함께 한 인연을 지닌 두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로의 인연을 소개한다. “등단 이후 시를 쓸 공간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밥과 술로 격려해준 선배 시인”(문태준이 나희덕에게)이자, “오빠 같은 후배 시인”(나희덕이 문태준에게).


시인 나희덕(왼), 문태준(오). 사진 : 상상마당


그렇다면 창비시선의 선배시인과 ‘농무’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희덕 시인에겐 그랬단다. “75년인가 《농무》가 나왔을 때가 10살 때였다. 중2때 교과서에 없는 시를 처음으로 서점에서 찾아봤고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시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문학소녀의 감각을 일깨워준 것이다. 《농무》는 대학 때 봤다, 비교적 늦게 접했는데, 당시 대학생들에겐 교과서 같은 시였다.”


문태준 시인에게도 그랬다. “대학에 들어가서 시를 알게 됐고 창비시선을 만났고, 제일 처음 읽은 것이 《농무》였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등의 시를 접하면서 농촌․농민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농무》는 우리 동네 얘기다 생각하고 읽고, 가까이 두고 열심히 읽었다. 당시 선배들은 ‘신경림 시인의 시만 읽어라. 그러면 시가 보일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 창비가 위치했던 마포의 지금은 없어진 아몬드호프의 말석에서 신경림 시인을 비롯해 선배 시인들의 얘기를 말석에서 귀담아 듣던 기억도 난다. (웃음)”


그리고 각자의 시인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가다’(나희덕)와 ‘맨발’(문태준)을 낭송하는 시간. 문 시인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가다’가 마음을 실어주기 때문에 좋다고 언급했고, 나 시인은 ‘맨발’이 고즈넉한 언어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고, 낡음으로 새로움을 일궈낸 시라고 칭찬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나 시인은 창비시선 301번으로 《야생사과》를 낼 계획이라고 했다. 다음 달 초 발간예정으로, 예전보다 판형이 약간 커지고 표지 디자인도 새롭게 하는 등 변화가 있을 예정이다. 현재 방송일도 함께 하고 있다는 문 시인은 시 쓰는 자리로 돌아가서 열심히 시를 써서 독자들과 만날 계획임을 밝혔다.


이어 작사가에서 가수로 전환한 ‘민설’이 시가 흘러간 자리의 여운을 채웠다. 8년 전에도 앨범을 낸 바 있다는 그는, 일종의 중고신인가수. 신춘문예에 도전해 볼까 잠깐 생각도 했다는 민설은 이지리스닝을 추구하는 가수다웠다. 그가 부른 ‘100% 로맨틱’‘해프닝’은 관객의 흥을 돋웠다. 밤의 정령도 시와 노래가 이끄는 봄밤의 풍경에 충분히 홀릴만한 풍경. 



대한민국 시의 살아있는 역사, 신경림 시인의 이야기


민설의 노래가 끝나고, ‘대한민국 시의 역사’로 소개된 신경림 시인이 등장했다. “시를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해서 정말 기쁘다. 1970년대 유신체제, 그러니까 그 장난감 같은 체제에서, 나는 겁이 많다보니 (검열에) 걸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를 썼다. 결국 시를 써서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 (웃음)” 예의 그 넉넉한 웃음과 함께 하는 그의 인사말.


'대한민국 시의 살아있는 역사' 시인 신경림. 사진 : 상상마당


그의 시는 당시 그 암울하고 흉포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민들의 대변인이자 가늠좌 역할을 했다. 신 시인은 그것에 대해 “사회적인 정서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사람의 사는 모습을 상징․비유하면서 시를 썼다. 당시 시대를 대변했다고 하니까, 내가 굉장히 근사한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랬으면 훈장이라도 줘야하는 것 아니냐. (웃음)” 아나운서의 멘트에 따라 ‘박수훈장’이 쏟아졌다.


‘농무’라는 제목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잠깐 언급됐다. 친구들이 제목이 ‘농무’가 뭐냐고 바꾸라고 해서 바꿀 생각도 했다. 그러나 백낙청 편집인이 당시 쓴 발문에 ‘농무’라는 제목으로 돼 있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재미있는 것은, 2002년 수능의 언어영역에 ‘농무’가 지문으로 나왔다. 학원에 다니는 후배가 답을 묻기 위해 택시를 타고 찾아왔단다. 그 지문을 놓고 5문제가 출제돼 정답을 적어줬더니 3문제가 틀렸다는 것. 신 시인 왈. “수능이 참 어려운 것 같더라.”


이어 ‘농무’와 ‘파장’이 차례로 낭송됐다. 1956년에 등단해 반세기 넘도록 활동하고 있는 노 시인이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며 사랑을 받는 비결과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랑 받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쓰고 꾸준히 쓰는 것밖에는 비결이 없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써야 한다.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다른 계획은 특별하게 없다.”


넉넉하고 포근한 노 시인에 이어지는 노래 공연은 ‘반지’였다. 영원한 고전 ‘아름다운 강산’의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흥을 돋운 반지는 <내 운명>이라는 트로트곡으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김사인․손택수 시인의 이야기


2006년,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인 《가만히 좋아하는》을 내놓은 선배 시인 김사인과 《목련 전차》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 후배 시인 손택수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시인 손택수 (왼) 김사인(오). 사진 : 상상마당


80년대 문학과 시대를 관통한 김사인 시인에게 당시의 시단 풍경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5월을 떠나서 80년대를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 우리 사회 전체를 휩싸고 있던 공포와 죽음이 80년대를 열었다. 시인들은 다들 가난했으며, 사회적인 암울함이 지배했고, 개인 삶의 어려움들이 많았다. 문학입장에서도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뿌리깊은나무’의 폐간과 함께 80년이 시작됐다. 군부정권에 의해 마음을 기댈만한 매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8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자리가 술집이었다. (웃음)” 


김 시인이 19년 만에 시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런 시대와 연관을 지녔다. 80년대 독재에 맞서느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망을 다니던 시절. 컴퓨터도 없으니 저장할 곳도 없는 상태. 초고 상태로 써 놓은 시를 가방에 넣고 피해 다녔다. 다방에 들러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잠시 비운 새 누가 가방을 들고 내뺐다. 그 안에 있던 시와 함께. 자신의 시를 외우지 못하는 시인으로선 어쩔 수 없이 세월을 다시 쌓아야했다.


이런 선배의 무용담(?)에 손 시인은 한 마디 부러움을 건넨다. “당시 선배 시인들은 말과 세상 등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소통의 힘인 것 같고 부럽다.” 그 간절함의 원인에 대해 선배 시인은 이렇게 답변을 했다. “당시에는 선배 시인이나 문인을 따라 다니는 게 그렇게 좋았다. 그때가 27~28살 때인데, 창비 주변에 가면 어른들에게 술도 얻어 마시고, 용돈도 얻었다. (선배들) 옆에만 있으면, 아무리 시절이 어려웠다지만, 든든하고 좋고 별 걱정이 안 됐다.”


그리고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내놨던 손 시인에 대해 선배가 내놓은 상찬은 이런 것이었다. “오래된 미래 같은 시를 보여주면서 삶의 고달픔과 쓰디씀과 같은 실물적 실감을 가진 시인이다. 드물게도 농경․시골적 삶을 다루기도 했다. 그래서 굉장히 좋아한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후배는 김 시인에 대해 “세월이 바뀌고 유행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시적정신이 부럽다”고 언급했다. 


이어 차례로 손택수 시인의 ‘방어진 해녀’와 김사인 시인의 ‘봄밤’이 은은하게 퍼졌다. 고 박영근 시인 등 실존인물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담겨 있음을 알려주자 더욱 애틋해지는 봄밤. 그래 이래저래, 봄밤이다.



안치환(노래)와 이시영(시) 시인의 만남


가수 안치환. 사진 : 상상마당


안치환이 나왔다. 시로 만들어진 노래로 우리와 만나고 있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시로 만든 노래를 부르겠다는 그가 택한 첫 곡은 ‘담쟁이’. 이경림 시인의 시를 가사로 활용한 노래다. “오래 전, 노래를 만들면서 한계를 느낀 것이 노랫말이었다. 노랫말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방향을 잃었던 그때, 시를 노랫말로 노래를 만들었다.”


이어진 노래 역시 ‘귀뚜라미’. 나희덕 시인의 시. 시의 힘을 빌어서라도 좋은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로 노래를 만드는 이유란다. 그래서 불순한(?) 의도로 시를 많이 읽기도 한다는 것이 안치환의 설명.


시인 이시영. 사진 : 상상마당

그리고 창비의 편집자와 부사장을 지냈으며, 여러 권의 시집을 창비시선으로 낸 이시영 시인이 함께 자리했다.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니 80년대가 생생하게 전해온다던 그는 편집자 시절의 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비감한 얘기를 하나 하자면, 고 김남주 시인과 친구이기도 한데, 김남주가 9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하루는 광주교도소로 면회를 갔는데, 할아버지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당시 김남주가 40대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할 수 있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 감옥에서 볼펜이 없어서 우유 곽에 젓가락으로 꾹꾹 눌러쓴 시들이 창비에서 시집으로 나오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고인의 빈소에서 안치환씨가 노래했던 기억이 난다.”


안치환도 한 기억을 떠올렸다. “석방 되시고 나서 뵀는데, 어른의 눈이 저렇게 맑을 수 있구나, 하고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게 고 김남주 시인이었다.”


그렇게 80년대. 피할 수 없는 80년대. 검열 때문에 숨바꼭질(?)을 거듭하던 시절. 이시영 시인도 회고한다. “80년에 창비에 입사해, 20여년 간 창비시선 편집에 관여했다.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87년 6월 항쟁까지 검열이 꼬박 존재했다. 납본필증이 없으면 불법도서가 됐기 때문에 편집자 입장에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70년대 문인들은 반유신단체였는데, 고은, 백낙청, 신경림 등과 함께 수시로 안기부에 잡혀갔다. 80년대에는 김지하 시선집 문제로 고초를 겪었다. 황석영 방북기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편집인 시절, 그는 책을 내달라는 청탁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창비시선의 뚜렷한 정체성인 ‘리얼리즘’에 입각하지 않으면 냉정하게 거절했단다. 자고로 편집자는, 냉혹한 전당포 주인과 같아야 한다는 자위를 하면서. 그에게 시는 가닿을 수 없는 것, 와 닿을 수 없는 것을 다뤄, 그리하여 고통 없는 시는 없지만, 모든 고통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노래와 시는 어떤 관계일까. 안치환의 답변은 이렇다. “시로 노래를 만드는 것은 많지만, 문학성에 멜로디만 싣는다고 좋은 노래가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시영 시인의 ‘너’가 낭독되고, 안치환의 마지막 노래가 이어졌다. 정호승 시인의 ‘술 한잔’을 가사로 지난해 연말 내놓은 노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봄밤은 그렇게 깊어갔고, 시와 노래는 비를 뚫고 세상과 공명했다. 봄비는 사랑이라더니, 시와 음악이 흐르는 봄밤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


한편, 창비는 이날 북콘서트에 이어 6월 하순까지 수원, 광주, 울산, 부산, 전주, 제주 등에서 시인들이 참여하는 전국 낭송회를 연다.


[상상마당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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