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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11월10일, 특별히 이 커피콩을 볶는다.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사람들이 만든 커피. 그 남자가 오기 때문이다. 그 남자, 밤 9시부터 詩를 낭송할 계획이다.

시즌이다. 10월20일부터 시즌에 돌입하긴 했다. 한 20일에 걸쳐 있는데, 오늘 11월10일이 정점이자 마지막 날이다. 커피 이름은 쉽다. 

랭보. 

이날, "랭보 한 잔이요~"라고 주문하면 나는 하라르 커피를 내놓는다. 그래, 오늘 120주기라서 그렇다. 1891년 11월10일, 서른 일곱의 나이였다. 요절이었던 거지. 죽기 몇 달 전, 병 때문에 다리를 자른 뒤, 그는 특유의 시니컬함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불행한데, 버티고 견딘다. 아주 사소하고 엉뚱한 성공에 감읍해서. 

열 다섯에 데뷔, 빅토르 위고로부터 "어린 셰익스피어"라는 극찬을 받았던 랭보는, 스무 살, 詩를 덜컥 놓았다. 그 얘긴 예전에 했던 블라블라를 참조하시고.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詩에 작별을 고하고, '스무 살 이후'를 살게 된 랭보는 커피 상인(무역상)으로서도 살았다. 당시 백인으로서 커피무역상에 고용된 것은 랭보가 처음이었단다. 그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했단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하라르로 갔다. 해발 1850m의 이슬람 도시. 이슬람 4대 성지 중 하나다. 하라르(의 커피)에 대해선 이런 유언비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지역의 커피가 커피의 왕이고,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커피가 커피의 여왕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디가 풍부하고 중간 정도의 산미에 초콜릿 향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타이틀을 달 만큼은 아니다. 내 코와 혀는 그리 말한다. 

개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랭보는 "지저분하고 커피도 맛이 없는 곳"이라고 하라르를 평했다. 하지만 하라르 커피는 랭보의 간택을 못 받았을 뿐, 그리 최악은 아니었다. 하라르 커피의 미묘한 밸런스는 예멘으로 전파됐고, 그 유명한 '예멘 모카'를 잉태했다.

그러니 하라르 커피는 랭보나 예멘 커피에 얽힌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오늘의 특별한 커피, '랭보'는 그래서 나온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중2병(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 청소년들이 겪는 허세적 착각)'을 앓았을 무렵의 랭보를 추억해도 좋고, 더 이상 랭보에 빠질 수 없음을 아는 속물적 현실을 자각할 수도 있다.

랭보는 詩에 작별을 고한 뒤, 철저히 돈 밝히는 속물로 살았다. 극과 극의 체험을 겪은 천재가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분열 혹은 죽음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라르 커피에 섞인 랭보적 자취는 그래서 찐~하다. 터키의 속담, '커피는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하라르 커피를 지칭한 것인데, 랭보의 질척한 방랑이 섞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 랭보를 읊을 남자의 이니셜은 L.D.다. 아마, 당신도 본 적 있을지도 모른다. 천하의 꽃미남! 꽃랭보가 그러했듯. 나는 그 남자에게 이걸 부탁하려고. 아님, 내가 읊던가.

「가장 높은 탑의 노래」.

300일이 넘은 308일째, 김진숙 위원을 위해. 11월9일 노사 잠정합의안이 나오면서 김진숙 위원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경찰이 삑살이를 놨다. 병력을 투입하는 과잉반응이 결국 김진숙의 귀환을 막았다. 개새끼들. 하는 꼬라지하곤. 

아, 김진숙 위원님이 내려와서 건강이 회복되면,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다.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나는 생각한다, 좋아
그대와 만나지 않을지라도,
그대와 얘기하는 덧없는 기쁨의
약속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아
당당한 은퇴를 그대가
멈추게하여 주기를 바라네

언제까지나 내가 꾸었던 헛된꿈을
그토록 참고 견디었다
공포도 고통도 하늘높이 날아가버렸고
그런데 불쾌한 갈증이 내 혈관을 어둡게 하는구나

평원이 버려진채로 커지고
향과 갈라지색 꽃을 피우는 것처럼
수많은 불결한 파리떼가
잔인한 소리를 내는도다

아아, 그토록 가여운 영혼
말할 수 없는 홀아비 생활
그것은 오직 노트르담 교히의
모습이구나
성모마리아에게
간구하는 것인가?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그러니까, 굳이 밤 9시의 커피가 읊는 시 낭송회에 오지 않아도 좋다.
그저 오늘, 랭보 한 잔 마시며 시를 만나도 좋은 시간. 김진숙 위원의 귀환을 기다리며. 한때 랭보의 격정적인 연인이었던 베를렌이 랭보를 일컫길,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당신에게도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 오늘만큼은.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오늘(11월10일).

나는 어쩔 수 없이, 랭보를 떠올렸고,

아무래도 그에 걸맞는 커피레시피는 '내 심장의 임무', 에스프레쏘 리쓰뜨레또.

그 검은 액체를 내 심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삶이든, 커피든, 두 번이 없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를렌이 랭보와의 사랑을 회상하며, 아마도 나지막히 읊조렸을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검은 액체는 내 심장에 묻고 있었다.

네 생애 가장 빛나는 죄악이 있니? 너는 살아가는 동안, 그걸 만날 수 있겠니?

글쎄... 동성애까지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럴 것까진 없겠지만,

나는 심장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길 건넸다.

삶이야말로, 어쩌면 꾸역꾸역 삼켜야하는 비루한 생과 일상이야말로,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지 않을까.


.... 물론, 내 심장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액체를 꿀꺽~ 삼켰을 뿐...



젠장, 바람 참 많이도 분다. 너도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를 그리는 것이냐.

아니면, 랭보의 시마냥,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고, 퇴출시키며, 강제출국이나 시킬 줄 아는, 

이 기똥차게 엄한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존재가 없음을 한탄하는 것이냐. 

<토탈 이클립스>라도 보고 싶은 날이다... 하~~~


자고로,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랭보가 그랬듯, 우리에게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시인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랭보의 이말도.

"시인은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1871년 5월 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차츰 그가 세상과 절연했던 나이에 도달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시인도 아니요, 꽃미남도 아니기에,

어느 순간, 그가 살았던 시간을 훌쩍 건너뛸 것이다.

다행스런 일이지. 하~~~


에라잇, 술 모임이나 가야지~ 랭보를 위하여~

오늘 누가 랭보를 떠올리기나 하겠냐만.

뭐, 어때. 내가, 내 심장이, 바람구두를 얘기하잖냐.

당신의 랭보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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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랭보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머니의 꿈, 그것보다 더 따뜻한 침구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새들,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듯이

손발이 얼어버린 이 어린아이들은 아름다운 환영으로 가득 찬 감미로운 꿈을 장만한다.

- 아르튀르 랭보, 「고아들의 새해 선물」 중에서 -


열다섯 살, 아직은 청소년이었던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0.20 ~ 1891.11.10)의 데뷔작은, 어쩐지 지금의 우리 시대를 연상 시킨다. 어머니가 없는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을 하는 존재의 부재에 시달리는 우리들. 열다섯의 천재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우리들. 찬바람이 불어줄 이즈음, 랭보를 떠올리는 이유다.


그러나 이 천재시인은,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 방랑이 질퍽댈 것 같은 11월, 세상과 절연했다.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난 연인처럼, ‘바람구두’를 신고 떠났다. 그것은 아마 외로움과 불화 때문이었으리라.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폴 베를렌과의 격정적인 연애를 끝내고 세상에 삼투압하지 못한 천재가 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기에, 시큰둥해져버린 생. 더디 가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의 예술적 탐험은 조금이라도 더 가능했을까.


반항과 불화가 만든 시 세계


우리가 아는 랭보의 모든 것은 불과 5년, 열다섯부터 스무 살 무렵에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조숙한 천재를 만든 것일까. 그의 생을 잠깐 훑어보자. 보병 대위였던 아버지는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 그는,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과도한 엄격함과 아버지 없는 결핍감 사이에서 랭보는 반항을 꾀하고 자유를 갈구했다. 중학시절 은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열여섯 살, 학업을 포기했다. 이듬해 스승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서 절대자에게 도달”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탕아적이고 반항적인 천재의 기질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열일곱,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천재의 행보는 ‘견자(見者, voyant)’라는 말로 압축된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우스, 루소와 보들레르 등으로부터 문학적․사상적 자양분을 흡수한 그는, 가출을 하고 방랑을 일삼았다. 시도 함께 익어갔다. ‘시인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하듯, 그의 시는 세상을 꼬집고 흔들었다. 동시대 유럽문명에 대한 회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혐오, 제 구실을 못하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경멸, 우월주의에 빠진 식민통치자들의 거만함과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부패와 타락을 향한 개탄 등 그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론자이기도 했다. 즉, 시인은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을 꿰뚫고 개인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제약과 통제를 무너트리는, 예언자적인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시 세계를 펼쳤다.


십대의 천재시인은 그렇게 기존의 문학을 초월하려는 일대 모험에 나섰다. 그가 처음 견자라고 믿었던 시인이 바로, 폴 베를렌이었다. 대중들에게 세기의 스캔들로 더욱 많이 회자되는 랭보와 베를렌의 사랑. 대작이었던 「취한 배」를 들고, 그는 베를렌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1871년, 랭보는 열일곱의 나이였다. 문학적으로 서로에게 매료된 두 사람에게 닥칠 운명은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당시 베를렌은 결혼한 상태였지만, 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관계도 영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방랑의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아내와 랭보 사이에서 베를렌은 때론 갈팡질팡했고, 랭보는 지나치게 집착했다. 1873년 브뤼셀에서 술에 취한 베를렌이 랭보와 논쟁을 벌이다, 권총을 쐈다. 랭보는 왼손에 상처를 입었고, 베를렌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이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랭보는 이 2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썼다. 베를렌은 이때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회상했다. 형용모순이 빚어내는 이 아찔한 생의 기억, 예술가들의 특권일까. 베를렌이 랭보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다. 하지만 천재에게도 힘겨운 시기는 상흔을 남기는 법인가보다. 문학적 열의가 식기 시작했는지 랭보는 살 길을 모색한다. 그 시기를 관통하는 산문시집 《일루미나 시옹》(1886)은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랭보에게 더 이상 시는 모든 것이 아니었다.




바람구두를 신고 떠난 모험가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라르에서 쓴 랭보의 편지 중에서 -


부르주아와 물질만능의 부조리를 십대에 깨닫고 이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시대를 거스르던 랭보는 그래서 모험가였다. 예술적 방랑도 너무도 많은 체험이 압축된 탓일까. 새롭고 물질적 세계를 향한 마음의 쏠림 역시 강했다.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스무 살이 넘자 문학을 단념했고, 예술적 자아를 배신했다. 시를 황금과 상품으로 바꿨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무대로 상인이자 무기밀매상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오만이 잃어버린 자비보다 낫다”며 예술적 자유인으로서의 오만은 풀이 꺾인 것이다. 그것이 견자로서의 또 다른 방랑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돌아온 탕아’와 같은 레떼르를 거부했다. 시인과 무기밀매상의 간극이 메워지진 않지만, 한편으로 시 역시 세상에 저항하는 랭보만의 무기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만의 극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혐오하던 물질세계에 빠져 지내다 한쪽 다리를 절단(매독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있다)하고, 홀연히 서른일곱의 나이로 쓸쓸히 맞이한 죽음.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마냥 보내다 요절한 바람구두. 그 바람구두의 생이 끝난 지점은 11월이 맞다.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그를 떠올리기에도 11월은 어울린다. 다만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격정의 시절을 관통하면서 랭보에 매혹당할 순 있겠지만, 두 번은 없다. 랭보 역시 그러했으므로.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2009 11·12월호 기고]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시월의 마지막 날.
그 날이 주는 감상과 함께 찾아오는 한 사람. '리버 피닉스'.

어제밤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아이다호' DVD를 틀었다. 정리를 하면서 힐깃거렷다.
어차피 시월의 마지막 날, 어떻게든 떠오르는 그 사람의 흔적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났다. 아름다워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1993년10월31일. 14년이 지났다.
나는 14년을 고스란히 흡수했지만, 그는 이미 박제된 청춘.
9월의 마지막 날은 제임스 딘, 10월의 마지막 날은 리버피닉스.
가을 시즌은 요절한 청춘들의 이야기가 널리 퍼진다.

'아이다호'를 다시 떠올리다. 3년 전 국정브리핑에 긁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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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우스꽝스러우리만치
격렬한 슬픔에 빠진다 할지라도 스스로 생명을 단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몇 년쯤의
참된 규칙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라르에서 쓴 ‘랭보’의 편지 중에서 -

◆ 또 다른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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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 포스터

어쩔 수가 없다. 그 10월 31일이 오면. '또!'냐는 소리가 나와도, 어쩌란 말이냐.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듣자면, 가을 낙엽의 방랑에 눈길을 주자면, 희뿌연 거리의 표정을 보자면, 관념은 하염없이 부유한다. Fly Fly~ 그리고 꽂힌다. Feel Feel~ 두 사람. 이 즈음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두 사람. 바람구두를 신은 그 사람들 말이다.

얼마 전 10월 20일 탄생 150주년을 맞았던 아르튀르 랭보의 방랑은, 37년의 삶을 지옥에서의 한철처럼 살다가, 지난 11월 10일에 종결됐었다. 바람구두를 신고 훌쩍 생을 마감했던 그처럼 또 하나의 바람구두는 리버 피닉스의 몫이었다. ‘아~ 피곤해’하며 길바닥에 철퍽 드러눕고선 일어나지 않은 바람구두.

역시나 아이다호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피곤했다. 10월 31일은 어쩌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그리 랭보의 삶과 죽음 사이에 끼인 날을 택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 마음의 고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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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그 날 리버를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다. 

‘열일곱에 방탕할 것을 권고’했던 랭보의 말을 뒤늦게 섭렵했기 때문일까. <아이다호>의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길 위에서 ‘오만방탕’하게도 흐느적거린다. 초점 없는 눈빛과 휘청대는 발걸음. 안식처를 잃은 마이크는 바람구두를 신고 거리에서 부랑한다. 부랑부랑방탕방탕.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이들의 필연적인 행보다. 또한 집시의 피를 물려받은 자에겐 숙명과도 같은 궤적이다.   

선택은 결국 하나다. 마음 깊은 곳의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아이다호행. 포틀랜드의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 고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건 더 할 짓이 못된다. 그런데 유일한 이정표라곤 사막 한 가운데 자리한 아담한 집과 끝없이 뻗은 아스팔트뿐이다. 긴장하면 갑자기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기면발작증 환자인 주제에 기어코 길을 나서는 그 똥고집은 어떻고.

그나마 스콧(키아누 리브스)의 동행이, 이 젊은 날의 고독과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부서지는 청춘의 자화상

여느 청춘이라고 다르겠느냐마는 마이크는 유난하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 남창에, 부랑자에, 기면발작증에, 동성애까지. 어느 하나 건조하고 동정 없는 이 세상으로부터 냉대 받지 않을 요인이라곤 없다. 과연 길이라고 그를 환대해줄까? 하지만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빼앗긴 젊음과 고독한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그 길은 필요하다. 그건 마이크의 길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뭐, 스콧이 있다고? 정말 녀석을 믿었나보지? 포틀랜드 시장 아들로 뭐하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녀석의 응석을. 스콧의 스트리트 라이프는 그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다. 녀석에겐 물려받을 ‘유산’과 세습될 ‘계급’이 있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지탱할 배경이자 뚜렷한 한계다. 결국 녀석은 냉정하게 내치면서 배신하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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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와 스콧은 포틀랜드 사창가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그나마 스콧 아버지와 부랑자의 대부인 밥이 공교롭게 같은 날 장례식을 치루는 날,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의 길이 다름’을 깨닫게 해준다. 두 사람의 교차하는 눈빛. 마이크는 슬프도록 서글펐고, 스콧은 차갑고 냉정했다. 청춘은 그렇게도 부서진다, 부서진다, 부서진다...

◆ 해브 어 나이스 데이

“Have a nice day” 그런 날을 기다리는 마이크. <아이다호>는 마이크의 삶을, 길과 중첩시켜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그런 나날을 형상화한다. 툭하면 쓰러지는 마이크의 모습은 영화의 끝까지 등장하고 그의 신발, 그의 육체가 각기 다른 차에 실려 또 어딘가로 나선다. “Have a nice day”는 또 그렇게 마이크의 알 수 없는 여정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처럼 들러붙는다. 멈추기 위해 그렇게 쉴 새 없이 길을 떠나고, 감식하는 그 남자의 아이러니.

묻고 싶었다.

기면발작증을 일으켜 픽픽 쓰러지는 마이크의 모습이 결국 리버가 아스팔트 위에서 맞이한 차가운 죽음과 오버랩될 수밖에 없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지만, 아스팔트가 차갑지도 않더냐, 그렇게 잠이 오더냐,고 말이다. 이제 제대로 길을 찾았냐고 말이다. 추워, 추워, 추워...

◆ 보고 싶다... 듣고 싶다...

<아이다호>는 천상 한 여인도 떠올린다. 라디오 방송에서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애처로이 울먹이던 그 여인, “리버 피닉스의 <아이다호>, 정말 좋지 않으세요”라며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던 그 여인, 소외받은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영화와 세상의 연결고리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넌지시 건네던 그 여인. 고 정은임 아나운서.

그로 인해 <아이다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종의 컬트로 소수에 의해 회자되던 이 영화를 작은 목소리, 큰 울림으로 알려주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던 그도 우연찮게도 ‘길’을 그 배경으로 했다. 어쩌면 그렇게 좋아했던 리버와 <아이다호>와의 인연 때문이었을까. 하늘은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경계가 되지 않았고, 리버와의 만남은 성사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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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로 가기 위해 마이크는 끝없이 나 있는 길 위를 걷고 또 걷는다.


하지만, 박제된 것이 아닌 그녀의 생생한 목소리가 너무도 듣고 싶고, 단 한순간, 짧은 찰나가 될지라도 길 위의 감식자였던 리버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것이, 길 위에 여전히 남아 단 한번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의 이루지 못할 소망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