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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서울과 노동자의 삶'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6.07 ‘뉴욕’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서울과 노동자의 삶

‘뉴욕’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서울과 노동자의 삶

[북리뷰]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4년여 전, 뉴욕.

이곳에 첫발을 디딘 청년은 휘둥그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변화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던 여행객이자, ‘까르페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순간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둔 그는, 사진 속 뉴욕이 제 눈앞에 펼쳐지자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말하자면, 뻑 갔다는 얘기다. 짧은 시간, 뉴욕에 사는 친구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곳만 다니고, 좋은 것만 먹고 마셨으니, 좋을 수밖에. 이방인에게 뉴욕은 더할 나위 없는 별천지였다. 뉴욕은 먹기 좋은 솜사탕이었다. 


맞다. 인정해야겠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경험한 뉴욕이었다. 표백제로 말끔히 얼룩이 탈색된 뉴욕. 고작 여행을 떠나 잠시 스친 뉴욕에 내 로망을 던졌다. 물론 인정했다. 여행하는 이방인의 찰나적 도착증에 가깝다는 것. 정작 도시의 속살은 알지 못한다는 것. 휘황찬란함과 빛나는 문화예술 역시 노동자들이 지탱하고 있으리란 것. 그렇다고 그 로망을 압도할 순 없었다. 내 짧은 뉴욕은 ‘신자유주의의 중심 요새’라는 강박적 관념을 일순간에 날릴 정도로, 나를 휘감았으니까.


영화, 뉴욕을 만나다.

그해 겨울, 뉴욕으로 떠나기 전 읽은 책이 『안녕 뉴욕』. 저자 백은하(의 글)를 흠모했던 나로선, 그녀가 기자질을 털어내고 훌쩍 뉴욕으로 떠나 영화와 함께 한 408일이 참 좋았다. 그녀처럼 온전하게 털어내지 못했지만, 그 휴가의 끝물에는 털어내야 할, 아니 털어내기로 작정한 직장이 있었다. 영화로 뉴욕을 즐긴 그녀만큼은 아녔지만, 뉴욕의 여느 명소 따윈 필요 없어! 책이 말하는 곳이 곧, 나의 발걸음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잖아! 내 심장을 건드린 영화의 장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 그건 곧 영화가 다시 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과 동의어 아니던가! 아, 물론 아니면 말공. ^^;


뷰티풀 워킹 뉴욕데이즈! 

뉴욕촌놈, 그래도 뉴요커였던 친구 녀석과 싸돌아다녔다. 녀석은 집과 회사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당시 나의 뉴욕행 덕분에 뉴욕을 함께 엿본 녀석이 더 놀랬다. 아니, 뉴욕에 이런 것이~  <세렌디피티>의 흔적을 찾아, <인 더 컴퍼니>의 사랑이 꽃피는 커피하우스 등을 찾아다니며 황홀했다. 그저 나는 여행객이었으니까. 나는 어떤 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을 휴가를 받은 상태였으니까.

아, 걷고 또 걸어도 아름다운 뉴욕의 날들이여. 그땐 그랬다. 



뉴욕, 한국을 삼키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뉴욕은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채색되고 있었다. 그건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뉴욕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유령(?)도 배회했다. 한국 사회까진 몰라도 적어도 내가 발 디딘 서울은 그렇게 뉴욕에 목을 매고 있었다. “현란한 형용사에 매혹당한 한국 사회는 뉴욕의 창조성, 예술, 문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에만 취해 있다.”(p.8)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뉴욕에서 좋은 기억만 품고 온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도 며칠 가봤는데, 뉴욕 정말 좋더라.” 내가 뉴욕의 속살을 제대로 맛보기라도 했어야지. 관념이야 뻔했다. 뉴욕 역시 먹고사는 게 전쟁이며, 각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겨울 거라는. 안타깝게도 내가 헤매고 다닌 뉴욕의 거리와 시간은 내게 그런 삶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보질 못했다. 나라고 다를 바 있었겠나. 나는 고작해야 뉴욕의 빛나는 문화예술의 현장을 목도하고 싶은 이방인이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첼시의 화랑, 타임스광장, 센트럴파크, 소호 등. 월스트리트 정도만 빼고는 내게 뉴욕은 뷰티풀, 판타스틱, 어메이징 시티였다.


‘시크한 디즈니랜드’, 뉴욕.

그럴듯한 묘사다. 어른들의 로망이랄까. 시크함이라는 표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 뉴욕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최소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쩌면 나도 그 스타일 소비에 작게나마 일조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꼭 가보라며, 주위를 선동하면서 환상을 주입한 죄! 뉴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뉴욕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면서. 나는, 반성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뉴욕은 ‘하이퍼뉴욕 hyper-New York’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대중문화․잡지와 신문을 통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뉴욕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의 과정은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것처럼 “기원의 흔적을 철저하게 은폐시키며, 그것들을 생산해낸 노동과정이나 생산에 내포된 사회적 관계들의 흔적도 모두 은폐시킨다.”(p.29)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미덕은 이렇다. 스타일로서만 존재하던 뉴욕에 어떤 피가 흐르고, 속살을 벗기면 어떤 아픔이 있는지, 무엇이 진짜 뉴욕을 지탱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 들렀을 때, 그 표피에 압도당한 탓에, 나는 몰랐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커피를 뽑아주는 사람, 커피를 건네주는 사람, 커피 값을 계산해주는 사람, 그들도 나 같은 노동자임을. 그들은 투명인간이 아니었다. 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행복 하고 싶고, 꿈을 꾸고 가꾸면서 하루를 버티는 노동자. 어디 매장이나 식당을 들러도 역시나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노동자들.


진짜 뉴욕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뉴욕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뉴욕의 속살을 볼 수 있다. 고난의 시절을 거쳐 뉴욕에서 잘 나가게 됐다는, 가령 한국인의 뉴욕 유수의 투자은행(IB) 입문기였던 서른 살, 꿈에 미쳐라와 같은 성공 서사로 포장된 뉴욕 소유담, 아니다. 꿈도 아닌, 어떤 목표에 도달한 것을 놓고선, 성찰이나 세계에 대한 고민 없이 ‘나처럼 따라하면 돼’라고 읊조렸던 어이없던 기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생한 뉴욕. 눈에 띄지 않지만, 뉴욕을 진짜 지탱하는 것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다. “…소비자본주의 시대 한국에서는 뉴욕에서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한국인 뉴요커의 도전과 좌절, 성공과 실패, 자아 찾기 식의 서사가 많아졌다. 아이비리그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꿈과 노력이 부각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p.261)


브런치의 사회적 의미를 아는가.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브런치. 우리가 ‘아점’이라고 부르던. 그런데 브런치라고 호명함으로써, 그것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른바 ‘구별 짓기’가 이뤄진다. 아점을 먹는 사람과 브런치를 먹는 사람 사이. 생각해보라. 그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웃긴 거다. 브런치는 하나의 뉴욕 라이프 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그러나 저자는 브런치가 뉴욕의 보편적 문화도 아니요, 중간계급 이상의 전문직업인, 예술가, 대학생 등 충분한 여가시간과 경제적 능력을 가진 계층이 선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브런치가 곧 뉴욕, 아니올시다.


뭣보다 브런치를 내놓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하나의 계급적 상징이자 남과 구별 짓기 위한 기호로 쓰이는 브런치. 그 우아하고 맛있는 브런치를 내놓기 위해 누군가는 일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서만 추구되고 충족될 수 있다.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정리하거나 레스토랑에서 물을 따라주고 가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 네일숍에서 손발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칠해주는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뉴요커의 삶은 결코 있을 수 없다.”(p.46)



브런치의 가격이 비싸지 않은 이유가 있더라.

다른 도시보다 임대료가 높은 뉴욕임에도 레스토랑의 브런치 혹은 식사료가 다른 도시와 비슷하거나 낮은 이유는 바로 저임금 이주노동자 때문이다. 이들은 물론 뉴욕의 화려한 때깔과 매끄럽게 다듬어진 풍경 뒤에서 보이지 않는다. 디폴트임에도, 모두에게 쉽게 인식될 수 없는 비극. 그들이 자취를 드러내면, 브런치는, 뉴욕(스타일)은 없어지는 모순. 젠장, 일하는 사람들의 고단함이란.


커피노동자인 내게도 그것은 어쩌면 슬픔이다.

커피를 볶고 추출해서 손님에게 건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 커피 생산자들의 노고와 자연의 고마움을 인식하고 있지만, 나의 고단한 노동은 아마 베일 속에 가려있을 것이다. 커피 한 잔에 담긴 노동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종종 커피 한 잔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커피가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커피 노동의 보람과 행복을 찾지만, 그것이 이 팍팍하고 부박한 현실의 삶을 바꾸진 못한다. 그저 그것은 버티고 견뎌야 하는 일일 뿐이다.


‘워킹푸어’가 떠올랐다.

뉴욕이나 서울, 이 커다란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는 삶. 일하고 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일할수록 가난의 덫에 더 강하게 묶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외로운 존재. 뉴욕이든 서울이든, 그곳이 제공하는 많은 삶의 기회는 그런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월스트리트의 부와 타임스광장의 대중문화, 소호와 첼시의 예술이 뉴욕을 활기차게 만들지만,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이 없다면 뉴욕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p.65)


이 말은 분명한 현실이기에 아프다. 

“이제 부지런히 일하던 이들이 도시의 주인임을 주장하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한때 사회민주주의적 도시를 경험했던 노동자들은 지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다.”(p.66) 저임금 노동자들이 없으면, 한 도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함에도, 누구나 이에 동의할 것임에도, 누구도 그만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 뉴욕에서도 그렇겠지만,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뉴욕의 속살을 보면서 한국의 도시를, 당신과 내 노동의 실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뉴욕은 그래봤는지 몰라도, 노동자가 한국에서 어느 한 도시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다. 하긴 지금은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비극은 그것. 워킹푸어 혹은 가난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한 사회의 지탱 혹은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도, 그들의 행복은 사회 전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건 정혜윤의 말인데, 뉴욕의 저임금 이주노동자나 이 땅의 저임금 노동자에게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지방선거가 있었다.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는 뉴욕에 어느 시장이 들어서는가에 따라 변화된 모습, 즉 뉴욕의 역사와 감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려준다. 흥미롭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도 책은 수정해줬다. 줄리아니가 범죄적 뉴욕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발붙이고 사는 서울을 생각한다. 이곳의 시장은 앞선 4년 전과 같은 사람이다. 아마 삽질은 계속 될 것이다. 노동자를, 워킹 푸어를, 청년을 생각하지 않는 건 매한가지일 거라고 예단(!)하고 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 정부도 가난을 구제하고 약자를 지켜야하는 책임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책임이 회복되지 않을 4년을 속단(!)하고 있다. 편파적인 생각이라도 어쩌겠나. 지난 4년의 학습효과다.


실은 걱정이다.

커피 노동자면서, 서울 시장이랑 니 삶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묻는 당신에게, “당연히 상관있다”고 말하겠다. 지금 서울은 내 삶의 터전이고, 내 삶의 질은 도시 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좌우된다. 르네상스 시장의 재등장은 기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정치적 기획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들끓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뒤로 미뤄졌다. 아마, 커피 노동자로서의 내 삶은 서울을 지탱할 의무가 없음에도 서울을 지탱하는 작은 한 축이 될 것이며, 내 삶을 향상시켜줄 의무가 있는 서울시는 언제 그런 의무가 있었냐는 듯이 말간 얼굴로 삽질을 계속할 것이다.


‘새로운 서울 만들기’라고? 

그러면서 만든 구호들은 붕붕 떠다닌다. ‘세계 디자인 수도’ ‘명품도시 마케팅’ ‘한강 르네상스’ 등등. 그런데, 그게 좀 웃긴다. 서울에 사는 보통 사람들, 노동자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이 없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겠단다. 브랜드 가치는 뭐고, 경쟁력은 또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삼투압할 건데? 그저 성과를 자랑질할 수 있는 수치에만 죽도록 매달린다.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서울 시민도 서울이란 도시에 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다며 자신의 비전을 정당화하지만, 어떤 파리지앵이고 뉴요커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도시 마케팅에 수천억을 쏟아 붓고, 한강 인공 섬을 만드는 데 9백억을 들여 서울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010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이뤄냈다.”(p.262)


광장이 필요해.

뉴욕의 광장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1910년대의 유니언광장. “우리는 혁명을 하기 위해 모였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유니언광장에서 말할 권리는 우리가 땀 흘려 버는 빵보다 더 중요했다.”(p.163) 광장에서 말할 권리와 개방성. 광장의 정신은 ‘Let It Be’라고 했다. 그런데, 당신과 내게 있는 광장에는 그 정신이 없다. 우리의 것도 아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권력의 조급함과 강박증만 느껴진다.… 정치적 야심을 위해 만들었건 건축학적으로 실패작이건 시민들에게 주어져야 비로소 ‘광장’이 된다.”(p.170)


물론 뉴욕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이윤과 분리주의에 입각한 공공장소의 개방성 축소문제. “이런 현상은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어떤 특정한 인구를 끌어들이고 다른 특정한 인구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친다. 소비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개방적이지만, 저항하러 오는 자들에게는 닫혀 있다. 돈 미첼은 공공장소에 대한 위협은 단순히 “공공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고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을 줄이는 관리와 디자인의 방식이다.”라고 주장한다.”(p.167)



다시 뉴욕을 생각한다.

지난 뉴욕 방문에서, 나는 ‘뉴욕’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뉴욕을 만드는 노동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특정 시공간과 인간 사이의 구체적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뉴욕 스타일에만 현혹됐던 게다. 상품화된 라이프스타일, 즉 교환가치를 가진 기호에 홀딱 넘어가면서 뉴욕의 속살을 살펴보고 사유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뉴욕을 낭만으로만 인식했던 허약한 사유체질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뉴욕을 간다면, 스타일이 아닌, 생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은 미국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말했고, 뉴욕 스스로도 그렇게 선언했다. “소설가 폴 오스터는 어느 인터뷰에서 “뉴욕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 도시국가가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뉴욕에 애정을 가진 많은 이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아메리칸’보다는 ‘뉴요커’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제국의 국민보다는 관용이 살아 있는 뉴욕의 시민이 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민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pp.342~343)


그러나 지금은 뉴욕이 그 뉴욕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다움’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한 공연에서 부시 행정부를 풍자하던 코미디언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뉴욕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욕이 점점 아메리카처럼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오래된 농담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뉴요커로서의 자부심과 미국인으로서의 자괴감이 뒤섞인 씁쓸한 웃음이었다.”(p.343) 관용은 휘발되고 법과 처벌을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재하고 추방하는 현실. 내가 있는 이곳의 지금이라고 다른가.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제목이 품고 있듯, 여기 나온 뉴욕도 뉴욕의 모든 것이 아니다. 편파적 보고서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지 않았던가. 모든 뉴욕은 모두 편파적이다. 그게 뉴욕이다. 너의 뉴욕, 나의 뉴욕, 그들의 뉴욕. 저자는 뉴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상인으로서 뉴욕을 전해줬다. 이방인이자 여행객으로 뉴욕을 살짝 맛보고 온 나의 뉴욕이라고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벗겨보지 못한 속살을 남겨뒀을 뿐. 그 속살의 일부를 저자가 전해줬을 뿐. 간혹은 그가 전하는 뉴욕의 흔적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뉴욕은 여전히 내 기억의 숲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게다. 내게 한 뼘 정도는 넓어진 뉴욕, 언젠가는 그곳에 내 일상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아마 내 세계는 두 뼘 정도 더 넓어지고, 내 우주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때도 여전히 나는 노동자로서, 뉴욕을 지탱하는 저임금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내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는 날, 당신에게도 그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p.s. 책은 아쉽게도, 오타가 간혹 보인다.

아프리칸 이메리칸(p.56) -> 아프리칸 아메리칸

신보주수주의자들의...(p.203) -> 신보수주의자들의... 

미국 국세청 규정의미국 국세청은...(p.240) -> 미국 국세청은...

 

2쇄 찍을 때 교정을 보겠지?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