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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7 10:14 메종드 쭌/무비일락
그제, 뉴욕에 사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녀석은 늘 그랬듯, 바빴다며 투덜댔다. 우린 웃기게도 서로를 부러워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서로의 공간을. 나는 뉴욕을, 녀석은 한국을. 녀석은 이른바 '뉴욕 촌놈'이다. 뉴욕에 있을뿐, 그 속살을 모른다. 일에 치여사는 직딩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러면서 우리는, 1년 전을 꺼냈다. 1년 전 우리는 뉴욕을 함께 누볐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녀석 덕분에 뉴욕의 '사백팔분의 일'을 맛봤다. 녀석도 마찬가지. 나 덕분에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핑계를 찾은 셈이었다. 그때 내 손엔 <<안녕 뉴욕>>(백은하 지음)이 있었다. <<안녕 뉴욕>>은 영화 속 뉴욕을 거니는 책이다. 우린 그 책을 일부 따랐다. <세렌디피티> <인더컴퍼니> <섹스앤더시티> 등의 동선을 따라, 센트럴 파크의 스케이트장에서 백만년만에 스케이트를 탔고, NYU 앞의 커피숍(레지오) 등에서 커피향에 취했다. 가장 아쉬운 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징징거렸다. 뉴욕을 다시 거닐고 싶다고.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뉴욕을 맛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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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봄날의 늦은 오후, 몬탁의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좀더 넓었고, 모래사장은 좀더 작았다,고 했다. 그 바닷가, 쓸쓸했나보다. 이동진은 몬탁의 풍경을 그리 상세히 서술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바닷가는 그래야 어울린다. 이동진은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끄집어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 것없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맞다. 이동진은 그 사랑을, 긍정하고 있다. 기억은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기억하고, 몸은 끝끝내 그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동진은 또 말한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손을 흔들어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음을 미소로 확인해 줄 수 있기를."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기억한다. 'Delete'를 누른다고 지워질 수 있는게, 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우개로 지워도, 꾹꾹 눌러쓴 흔적은 남는 법. 사랑은, 늘 꾹꾹 눌러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내 사랑에게, 가끔 속삭인다. 마음 속으로. 고마웠다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너의 곁에 잠시 살아서, 그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줘서...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안에서 방을 전세냈던 그 사람들을. 방을 뺀다고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가 있나. 다른 방이 생기면서 축소되고 희석될망정, 그 기억은 어느순간 불현듯 냄새를 피우곤 한다.

이동진은 내게, 이 말을 건넸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그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기행하고 썼던 말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말을 좋아했다.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노욕과 노회함으로 점철된 모리배들의 것과는 다른. 이동진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나는 버티고 견디려고 발버둥친다. 이 세계를, 이 일상을.

그래서,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한다. 이동진은 겨울에 치바를 찾았다(같은 바다지만,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은 봄이었다). 겨울바다는 역시나 외로움이 뚝뚝 묻어난다. 겨울바다에 간 이동진에게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 외로움도 크기가 없다.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 그렇고, 외로움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외로움의 잔을 마땅히 들이켜야 한다. 1인분을 지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조제와 츠네오가 이별여행을 했던, 일본 치바현 규주큐리 해변을 거닌 이동진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워도, 부디 1인분의 삶을 흘리지 않을 수 있길. 함께 가는 이가 흘린 삶은 또다른 항해자에게 암초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동진은 이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글 속에서 이동진은 그렇게, 1인분의 술잔만 말없이 비웠다고 했다. 현실에 딱 밀착된 생을 표현한다면 저보다 좋은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1인분'.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라기보단 '감식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동진의 (영화)언어는, 대개의 평론가의 것과 다르다. 내 인상비평이지만. 물론, 평론가라고 다 똑같진 않다. 영화평이나 기행문에서, 이동진은 오버하는 감이 없다. 덤덤한 게 좋지 아니한가? "내 감정에 책임을 지자"는 영화평 작성의 원칙도 얘기했지만, 이동진은 영화 속에서 생의 어떤 부분을 길어내는 것 같다. '벅찬 느낌'에서 비롯되는 리뷰의 시작,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감정에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야하는 결벽증(?)도 한몫하겠지.

<<필름 속을 걷다>>에서, 나는 외로움을 봤다. 단지, 혼자 그곳을 거닐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1인분의 생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아픔이 있었다. 흔적을, 리얼리티를, 시간을 찾아 흘러갔던 이동진은, 어쩌면 극악하게 시니컬한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이동진의 글이 따뜻해서, 감성적이어서, 좋다고 했지만, 나의 느낌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이동진의 글은,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밥벌이 혹은 생의 공포와 끊임없이 싸우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동진이 말했듯, 여행이라는 아픈 상태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훑은 기행문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제거한, 각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 물론,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괜스리 오버하는 여행기도 때론 좋다. 그것이 내게 삘을 꽂았을 경우겠지만.  

간접적으로 '필름 속을 걸'으면서, 홀로 걸었던 사람(이동진)의 길을 떠올렸다. <러브 액추얼리>의 런던, 모두가 쉬는 성탄절, 근위대 병사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속삭임을 들었다는 말에, 나는 부르르 떨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동진은 말했다. "떠들썩한 축일을 홀로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밀한 동료애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잠시 흘렀다." 나는 잠시, 그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동진은 또 말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든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종종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나는, <사랑해, 파리>의 백혈병 부인을 둔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나 역시, 필름 속을 계속 거닐고 싶다. 그런데 필름은 쌓이는데, 언제쯤 그 속을 거닐 수 있을까. 이 책에 나온 15개의 영화 가운데, 나는 이동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라는 <행잉록의 소풍>, <나니아 연대기>, <티벳에서의 7년>, <베니스에서 죽다>를 보지 못했다. 뭐, 영화를 보지 못해도 좋은데, 어쩐지 이들의 공간에는 한번쯤 발을 디디고 싶다. 그곳에서, 1인분을 말끔히 비우고 싶다. 다시 뉴욕도 가보고 싶다. 그 속의 필름들을 찾아. 아울러, <러브레터>의 오타루는 꼭 가야겠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당신이라면,
나는, 이 책을 권한다.

☞ 영화 읽어주는 남자 이동진을 만나다 (예스24 채널예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난 지금 노래를 듣고 있다.~ 5월8일의 노래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노래라고 짐작한다면, 틀렸다!

"달콤해요.당신의 미소는 달콤해요. 마치 봄바람 속에 꽃이 핀 것처럼 봄바람 속에 핀 것 처럼. 어디서, 어디서 널 보았었지. 너의 미소가 이렇게도 낮익은데, 잠깐 생각이 안났지만 꿈속에서... 꿈속에서 널 본 적이 있어..."

이런 닭살 가사가 촘촘히 박힌 노래다. 사실 이 닭살도 번역된거지, 실제 들리는 것은 "피엔니니닝 니샤이 친미미 하유센아얼 가이차보링 사이앙리 자이치궈닝 닝닝샤우롱... 불라불라... " 뭐 이런거다. 그렇다. 센스가 있다면 눈치챘겠지. 중국 노래다. 제목은 첨밀밀. 바로 등려군의 노래닷.

쯧. 어버이날 뭔 호들갑이냐고. 글쎄 말이다. 어버이(은혜)송가가 울려퍼지는 마당에 왠 중국 노래에, 첨밀밀이냐고. 범수가 버럭할 일이다. 이 돌대가리야! 하고 외치겠지. -.-;; 뭐 버럭범수가 버라라락한들 쪼릴 일은 아니다만, 그냥 그런 것 있지 않나. 세상이 불러대는 메아리와 때론 무관하게 그날 하루를 다른 이슈로 접수하는.

어버이 은혜야 내가 굳이 말 안해도 여기저기서 봇물이다. 어버이께 카네이션 달아드리고 말과 마음으로도 감사는 드렸지만, 이런 되바라진 생각도 하는 것이 나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있음에 당신들도 내게 고마워해야 하고, 내가 태어나서 당신들은 행복했고 지금도 그렇지 않냐고 말이다.^^; 그게 진짜 부모 자식 관계 아니겠나. 자식이 누군가에게 맞고 왔다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응징하는 치졸한 내리사랑 같은 것 말고 말이다.

말이 샛다만, (한국에서) 5월8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런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런 노래를 듣는건, 내가 이날을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버이날과 맞물린 덕에 더욱 생각이 잘 나는건지도 모르겠다. 이 노래는 한편으로 대단한 노래다. 식물인간도 깨어나게 했단다. 믿거나 말거나.
노래 '첨밀밀' 식물인간 깨어나게 했다

물론 이런 놀라운 기적이 전적으로 '첨밀밀' 노래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사람이 세상에 다시 길을 놓게끔 도와준 공로에 '첨밀밀' 노래도 있지 않았을까. 그 노래를 듣는 것이 그에겐 어쩌면 식물인간이 되기 전부터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식물인간으로서 뇌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서 아내가 틀어주는 그 노래가 어떻게 그의 뇌를 자극했을까. 나는 그 노래와 그 사람 사이에 놓인 길도 궁금하다.

뭐 그래서 노래를 듣냐고. 아니. 그럴리가. 난 식물인간도 아닌데.^^; 나와 5월8일 사이에 놓인 어떤 다리 때문이지. 그 노래 역시 거기서 한몫 하거든. 그저 내 별 볼 일 없는 생에 놓인 한 토막의 이야기. 나와 5월8일 사이에 놓인 이야기. 그래서 오늘 그 다리를 건너는 방법. 5월8일 내게 다가오는 영화들. 그 영화들을 통해 나는 5월8일을 소화한다. 꺼억~~~ 어버이날 만큼이나 내겐 각별한 이들. 그런데 괜히 아쉬운건, 작년 뉴욕을 갔을 때, 그들의 10년 간의 그리움이 다시 해후한 곳을 들르지 못했다는 거다. 아, 그럼 다시 뉴욕을 갈 핑계가 생기는건가. 좋다. 다음번 뉴욕 스토리는 첨밀밀이다.

작년에 긁적였던 5월8일의 두 영화 이야기. 나는 1년여 만에 다시 그들을 끄집어낸다. 근데 요 근래 몇년간 5월8일의 케이블TV에선 이 영화들을 볼 수가 없으니 그것도 한때? 담당 PD가 바뀌어서 그런가. 문득 궁금해지네.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들어와 둥지를 트는 것들이 있다. 의식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날이 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그건 일종의 주술이다. 비의도와 무의식을 가장한. 수리수리 마수리, 샤빌라빌라~~

그건 ‘어버이날’의 주술. 정확하게는 5월8일. 어느 때부터인가 그날이면 어쩔 수가 없다. 내 영화의 숲속 시계는 여지없이 종소리를 울린다. ‘촤르르~’ 돌아가는 영사기. 내 기억의 스크린에는 투사되는 영상들. 그리고 서랍 속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끄집어내듯, 수납장에서 DVD를 꺼낸다. 이 주술의 위력.

내가 이 주술에 걸린 건 순전히 영화 속 날짜 때문이다. ‘첨밀밀’과 ‘러브 어페어’의 5월8일. 다시 만나거나 혹은 어긋나는(줄 알았던) 날. 그리고 뉴욕. 사실 전혀 연관이 없는 조합.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기억이 버무려진 영화를 묶어놓은 혼자만의 동시 상영이다.

그래서 이 동시상영일은 ‘어버이날’이라는 세상의 구호와 달리 개인적인 취향과 기억에 편입된 하루다. 남들 ‘어버이날’이라고 왁자지껄해도 난 별개다. 이들의 어버이라도 되는 양 이들 영화(들)를 다독인다. 보듬어준다. (뭐 그렇다고 어버이날을 깡그리 무시하는 건 아니다. 카네이션 정도는 준비하는 ‘센스’는 있다. ^^;;)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비슷비슷한 ‘어버이송가’는 사실 좀 따분하다.

이런 혼자만의 주술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다. 1년에 한번 걸리는 ‘매직 데이’. 어쩌면 이 지리멸렬하고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단절되는 듯한 하루하루 속에서 씨줄과 날줄을 엮어 연결시키는. 그래서 호흡을 연장시키는. 5월8일은 특별한 극장이자 시간대다. 혼자 관람객이 돼 떠나는 나만의 영화 항해. 5월8일을 되씹는 어떤 기억.

어쨌든 이들 두 영화는 사랑의 ‘약속’과 ‘우연’한 해후를 다룬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은 어긋나게 마련이지만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그런 (뻔하지만 끌리는) 이야기. 사실 시시콜콜 따지고 보면 이 우연도 그냥 우연은 아니다. 워낙 잘 세공되다보니 우연인 것 마냥 홀딱 넘어간 것이지만.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는 하는 그 사랑. 그날 애절하고도 저릿한 사랑을 흡입하고픈 자라면 다시 봐도 무방할 터이다. 그러나 사랑의 너절함에 넌더리가 난 사람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당신의 선택이다.

왜 5월8일이었냐고. 가만히 당신의 기억저장소에 'rewind'를 눌러보라.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엇갈린 행보를. 지지지직...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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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의 기억, <첨밀밀>

첨밀밀.
그러보니 벌써 10년이 흘렀다. 1996년, 영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이듬해 3월에 개봉을 한 터이지만 햇수로는 10년(미쳤다. 그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니). 이요(장만옥)와 소군(여명)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의 그리움 10년을 합치면 그 첫 만남부터 어느덧 20여년인가. 아.직.도.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그치?

그 5월8일의 풍경
ㄱ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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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의 인연 앞에 역시나 ‘등려군’! 
뉴욕의 어느 전파상 TV는 등려군의 사망 뉴스를 전한다. 거기가 차이나타운이었을까?
이 넓은 세상 위에, 하고 많은 채널과 프로그램 중에 왜 등려군의 사망뉴스가?
그저 길을 거닐던 그들 앞에 놓인 ‘해후’. ‘우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허허. 10년. 그리고 지나친 엇갈림. 믿을 수 없다는 눈빛 교환과 함께 퍼져나는 미소.
아니나 다를까 등려군의 ‘첨밀밀’이 울려 퍼지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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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참 징했다.
첫 사랑의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시절.
‘만나야 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운명론을 강력 설파하던 이야기. 영화지만 현실로 곧 튀어나올 것 같았던. 사랑했던 날이 두 사람의 기억의 숲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면 장애물 따위는 그저 시시한 장난감인 것 같은.  

어지간하면 그만한 엇갈림 앞에 견뎌낼 장사 많지 않다. ‘운명’도 때론 좌절을 하기 마련 아니던가.
더구나 알다시피 처음부터 그들은 무척이나 달랐고 사랑이 아닌 척 거짓부렁을 했다.
그 ‘아닌 척 하기’가 들통 나서 사랑의 약속을 했다가도 운명의 가혹함은 여지없이 그들을 빗겨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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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만남에 ‘운명’이상의 적확한 단어는 없다. 아니 그것도 그저 ‘사랑’일 수도 있다.
“나의 목표는 네가 아니야. 너의 목표는 내가 아니고...”라며 부자가 되고파하던 이요에게나,
대륙에서의 첫 사랑이던 소정과 가정을 꾸미고 싶었던 소군에게나,
실은 그들이 진짜 꿈꾸었던 것은 “매일 눈을 떴을 때, 너를 볼 수 있길 바래”와 같은 서로의 마음 아니었을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던 그들의 어리석음이 빚은 기나긴 우회.
그래도 ‘타이밍’하곤...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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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의 미덕은 그들의 감정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촘촘하게 쟁여놓은 기억의 잔재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적절히 녹여낸 점이다. 어찌할 수 없는 엇갈림에도 그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은 변함 없었다.
옆에 있으면 소리라도 질러주고 끈이 있으면 던져서 연결시켜주고픈 욕망.
나는 동동 발을 굴렀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스토리라인이지 않나?
그럼에도 감정의 파고를 요동치게 하는 건 그들의 눈빛이,
사랑이 기억의 숲속에 있던 사랑을, 어떤 약속을 일깨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운명’ 따위 그저 갖다 붙이기 쉬운 허구임에도 그 이름표를 붙이고 싶은 이율배반적 욕망.

시간과 기억, 그리고 사랑의 삼중주는 문득 특정한 매개체의 등장으로 연주되는 즉흥곡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흘러간 노래를 듣게 되면, 시간의 한 끝자락을 잡고 따라오는 잊혀진 옛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말처럼. 그들의 사랑에는 ‘등려군’, 그의 노래가, 그런 존재였다.
흠, 과연. 당신의 사랑에도 어떤 노래가, 어떤 매개체가 있지 않은가.

이래저래 흘러간 10년.
‘너는 내 운명’에 마침표도 찍어보고, ‘사랑, 그까이꺼~’하며 냉소도 질러보고, ‘사랑은 3년이 유효기간 이래’하며 과학적 분석에 고개를 끄덕여 본 세월. ‘결혼은 미친 짓이지만, 사랑은 죽을 때까지 해야지’하는 친구 녀석의 말에 맞장구도 쳐 보는 시간도 있다. 10년은 그랬다.
그러나 영화 속의 그들은 늙지도 않는다. 세월을 머금는 건 오로지 영화 밖의 나 그리고 당신.

<첨밀밀>이 주는 또 하나의 팁.
사랑이, 차마 입밖으로 내놓지 못한 사랑이 눈앞에 사라지려 한다면
‘빵빵~’ 경적을 울려서라도 그 사람을 부르는 ‘센스~’.
그건 이요의 말 없는 간접화법이 알려준 키스의 공식(그런데 아직 써먹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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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옥누님에게 혹하고 말았던 결정적 장면!!!


아참, 그리고 실제 1995년 세상을 떠난 등려군이 불렀던 ‘첨밀밀’은 ‘달콤함’이란 뜻이란다.
인도네시아 민요에 가사를 붙였단다.
한국에서는 알지? 그래, 드라마 주제가로 알려졌었다.
감우성, 채림. 그네들 그때, 참 풋풋했었다. 유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 Love Affair >

‘5월8일 오후 5시2분’
그리고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그날도 '우연찮게도' 5월8일 이었다. 테리(아네트 베닝)와 마이크(워렌 비티)가 만나기로 했던 날.
그것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
처음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를 기어서라도 오르고 싶은 강렬한 충동.

왜 그 날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3개월 뒤를 기약하면서 그들이 맺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그 자리에 없었고, 사랑의 ‘약속’이 깨지는 듯하지만, 그들이 ‘운명’을 거역할 순 없는 법. 그들은 ‘첫 눈’에 알아본 사랑 아니겠는가. 바람둥이와 재벌의 약혼녀.
하긴 그런 표피는 그들의 ‘운명’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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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이런 키스. 당신은 해봤수? ㅎㅎ


<러브 어페어>는 <첨밀밀>보다 더 됐다. 1994년 제작돼 이듬해 3월 한국에서 개봉했었다.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온 사람들이 ‘개거품’을 물었던 기억도 자연히 뒤 따른다.
사랑과 운명에 대한 아포리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을 꿈꾸는 주변 사람들의 이바구 행렬.
물론 그 과정까지 그대로 답습하고픈 욕망은 없겠지. 그저 대리만족.

사실 <러브 어페어>는 그렇다. 누구나 한번쯤 그려봤을 법한 운명적인 사랑의 판타지다.
그들의 애정행각은 적당히 일탈과 안온함을 오가면서 감정을 부대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각자의 약혼자가 있는 상황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스파크.
예정된(?) 비행기 사고 이후 머문 타히티의 낭만적인 풍광. 그리고 행선지를 바꾸는 사랑의 이동.
덧붙여 이들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
마이크의 숙모(아, 캐서린 헵번의 등장이란).

한편으로 그들이 선보이는 한없이 부르주아적인 삶의 양태는 적당히 그 사랑을 윤색한다.
계급투쟁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유한계급의 잔잔한 사랑놀음.
그럼에도 사랑의 ‘힘’은 무시할 것이 못 돼서 그저 눈이 멀었다.
‘세렌디피티’를 믿고 싶은 자들에게 가하는 사랑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과 어우러진 아네트 베닝과 워렌 비티의 앙상블.
<벅시>와 <러브 어페어>로 실제 부부의 연으로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연기가 주는 안정감.
특히나 세기의 바람둥이로 알려진 워렌 비티를 한 큐에 잠재워버린 아네트 베닝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현현일 것이라는 확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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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이 청량한 사랑의 풍경.


3개월이었다. 다시 만나자고 한 유예기간. 그걸 둔 건 물론 신상의 정리에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첫 눈에 벌떡벌떡 뛰어버린 심장의 오작동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기간이었던 것도 아닐까.
그래서 만약 나오지 않더라도 ‘이유를 묻지 않기’라는 단서를 달았을 지도 모를 일이지.
묻지 않음을 미덕으로 삼은 세렌디피티의 베팅은 그러나 통과의례일 뿐이다.
교통사고로 사랑의 약속도, 운명도 어긋날 것처럼 애간장을 태우던 시추에이션은
역시나 그것을 다시 감정을 붐업시킨다. 

<러브 어페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한 줄 알았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게도 유용한 점도 있고
석양은 오해를 풀고 사랑을 확인하는데 적절한 배경임을 알려주기도 했다.

때론 인생도 사랑도 모험이다.
그래서 묻는다. “나에게 모험을 해보지 않겠어요?”라고.
그 모험에 때론 모든 것을 걸기도 하고, 불길 속인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이 사람인 것을.
서로의 약속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 역시 알려준 <러브 어페어>.

뻔하디 뻔한 결말로 향할 것임을 알면서도 눈길을 쉬이 떼지 못했던 영화.
그래서 닭살 느끼 커플의 대사도 그냥 퉁 쳐버렸다.
“우리 중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했다면.. 왜 그게 당신이어야 했지?”(마이크)
“걱정말아요 마이크, 기적이 일어나야 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걸을 수 있어요.”(테리)
췟, 지들끼리 놀고 있는 건 분명한데 나는 그들 사랑놀음에 푹 빠져 있었더랬다.


5월8일엔 이토록 서로 다른 계급과 상황의 두 사람이 만나 펼치는 운명적인 사랑(들)도 있다.
혼자 즐기던 5월8일을 구구절절 찌질한 감상이나 늘어놓으면서 약간이나마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가상타 생각된다면, 한번쯤 봐둬도 좋지 않나 싶다.
그 어느해 5월8일, 각자 다른 곳에서라도 나와 함께 기억의 숲 속을 뛰어다닐 수도 있지 않겠나.
고단하고 팍팍한 인생살이.
카네이션 달아주고 어버이은혜 목청껏 부르는 것도 좋지만 혼자 즐길 거리도 좀 만들어두면 혹시 아나.
5월8일이 어떤 운명을 안겨다줄지. 물론 싫음 말구.

아참, 그리고 언젠가 5월8일 뉴욕에 가보고 말 일이다.
이요과 소군이 만났던 그 거리, 그 전파상. 테리와 마이크의 약속의 장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우리 만나면 눈 인사라도 한번~ ^.^  
난 이요, 당신은 소군.
난 테리, 당신은 마이크.

혹시 내가 식물인간이 된다면 5월8일엔 이들 영화를 꼭 틀어주오. 그러면 아마 깨어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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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