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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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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3.13 나탈리 포트만, 그녀는 전진한다 (2)
  2. 2008.03.18 우산 없이 맞는 비 같은,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2)
나탈리 포트만. 등장부터 남달랐던 그녀였다.
그렇다. <레옹>. 그때 그녀 나이 열두 살이었다.
허나 그런 나이 따위, 그녀에겐 무의미했다. 포스, 아우라, 그녀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 열두 살의 마틸다가 휘어잡은 것은 레옹만이 아니었다.
스크린 밖에 있는 나도 홀딱 넘어갔다. 나도 킬러가 되고 싶다, 는 생각을 순간 했다.
킬러가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제는 물론 마틸다, 그러니까 나탈리 포트만의 존재지만.
혹은 그녀에 버금가는 포스를 지닌 소녀만 옆에 있다면,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내게 청부를 할까...^^;;)

<히트>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뷰티풀 걸> <화성침공> 등에 이어,
그녀는 아미달라로 돌아왔다. 아우, 황홀했다. 그녀의 뷰우티는 우주의 공주로 손색없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의 아미달라 공주. 그녀는 진짜 여인이 돼 있었다.
아나킨이 그녀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고, 어쩌면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다스베이더가 되는 것도 당삼빳데루였다.



대학입학으로 그녀는 바빴던지, 필모가 다소 뜸했고, 나도 그녀를 향한 시선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만난 <클로저>(2004). 그녀, 파격이었다. 평소의 행실(?)과 엄청 달랐다. 와우~
나의 원조 여신, 줄리아 로버츠 덕분에 찾은 극장이었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더 마음을 뺏긴 것은 나탈리였다.

물론, 나탈리는 이미 내게 둥지를 틀고 있는 배우지만,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글쎄. 김도훈 기자의 이 말을 인용하자.

"…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하기도 한 내털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한 번 비교해보자. 당신이 남자라면, 둘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가? 대답 안 해도 알고 있다. 당신이 여자라면, 하버드 심리학과 출신에 온갖 정치활동에 나서며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an)에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내털리 포트먼과 적당히 풀어헤친 웃음으로 함께 고기를 씹으며 파티를 즐기는 스칼렛 요한슨 중 누구와 파티에 가고 싶은가."

나? 알다시피, 난 남자다. 날 더 안다면,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하악하악~을 이미 발설한 것을 기억할 테지. 나는 수줍게 스칼렛을 지목할 것이다. 나탈리가 그것밖에 안 되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탈리는 범접하기 힘든, 박제된 여신의 이미지가 있다. 그건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게 그녀였을 뿐이다. 아마도, 착한 여신. 나탈리는 낮에 사진을 붙여놓고 경배하는 무엇이라면, 스칼렛은 함께 밤을 지새고픈 여자다.
(두 사람,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한 바 있으며, 각각 평소 이미지와 반대 역을 맡았다. 나탈리는 이 영화를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두편 중 한편으로 꼽았다. 나머지 한편은 <브이 포 벤데타>.)

그러니, 내 음탕한(?) 놋북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둥지를 튼 폴더는 있지만, 나탈리 포트만의 폴더는 없다. 감히 어찌!
아무래도 나는 스칼렛이 어울리는 남자인가 보다.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의 나탈리도 나름 매력 있었다.
<블랙 스완>은 일단 나탈리의 도약이 아닌 날개와도 같은 영화다.
곧 삼십대로 접어들 나탈리는 점점 더 멋있는 배우, 아니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유? 물론 내 멋대로의 해석이다.
그녀는 <블랙 스완>의 안무가이자 발레리노 벤자민 밀피예를 만나 임신 중이며 약혼을 했다.
이른바 '혼전 임신'인데, 평소 나탈리의 반듯한 이미지를 감안했을 때, 파격이다. 그녀는 껍질을 깨고 나온다(고 나는 긍정 평가한다. 팬이니까! 근데 밀피예는 부럽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담배와 술과 마약을 하지 않는 금욕주의자란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긴 글렀다. 에잉.

<클로저>가 아프고 가슴에 각인됐던 것은,
댄(주드 로)이 꼭 나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댄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택도 없이 따르지 못하면서...ㅋ)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 … <클로저>

사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을 위해 진실해야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을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 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 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네 사랑의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실연극복'에 대해, 나는 이렇게 지껄인 적이 있다.
실연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실연을 현실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쉬고,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시절은 갔다. 실연은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품게끔 강요한다. 그 강요로 인해 나는 갈증에 시달리고, 길을 걷다 눈물에 젖고, 골방에 쳐박힌다. 세상 모든 슬픈 노래는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나는 실연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감당한다. 실연으로 인해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실연 이후의 나의 모든 행동과 의식 모두가 그 강요의 극복을 위한 것이다. 실연을 실연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극복은 이뤄질 수 있다. 믿지 못할,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내가 실연에 대처하는 자세.

한편으로 실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극복해야 하는가. 실연은 실연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다. 실연이 없었다면, 미처 경험하지 못할 행동과 감정이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실연은 우리 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실연을 소중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연 이전의 사랑을 생각하라. 사랑에 고마워해라. 나의 세계가 넓어졌음에. 또한 실연으로 나의 세계가 더 넓어졌음에.

사실, 이건 허접한 관념의 너울이다. 아마, 실연으로부터 멀찍하게 떨어진 시점이라 가능했던 머리놀림이었을 거다. 사랑이 그러하듯, 실연 또한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다. '실연'을 경험케 한 그 작자(?)가 다시 누군가와 행복하기를 빌어줄 수 있는 건, 아마, 일백이십칠만년의 시간이 지난 후다. 실연의 고통엔, 크기가 없다. 세상 무엇도 그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장담컨대 없다. 애초에, 시작한 것부터가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연애가 그렇지 않더냐. 변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세월의 풍화작용이 모든 감정의 결을 깎아낼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감정을 배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겪었고, 겪을 연애가 아니더냐.

실연은, 맞다. 폭탄이다. '트루먼 카포티'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읊어댔다지.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나는, 킹왕짱 오나전 동의한다. 그래서 실연의 아픔은, 사랑, 그 연애의 시작이 언젠가는 스러질 운명과 함께 한다는 단순한 섭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에서 비롯된다. 실연 당한 사람의 잘못도 엄연히 있다. 그 섭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실연은, 알면서도 준비할 수 없는 벼락 같은 것. 비 올 것을 알았으면서도,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것.

후루룩쩝쩝, 블루베리 파이

왕가위 감독의 새로운 시식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이런저런 평들이 나부끼고 호불호가 갈렸지만, 상대적으로 이전작들에 비해, 왕가위의 할리우드판 레시피, '블루베리 파이'는 껄쩍지근한 편이었나보다. 자기복제에 대한 토악질을 해놓은 분도 있더만.

그러나, 나는 한입 베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바람결에 부대끼는 혹평, 왕가위의 나르시시즘과 매너리즘에 대한 비판은 그저 뒤로 돌리고. 늘 마지막으로 남는다는, '블루베리 파이'를 남겨둘 수 없었다. 손님의 간택을 받지 못해,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자기 이름도 잊어먹을지도 모를 그 파이를. 블루베리 파이 사이사이 흐르내리는 우유를 온몸으로 핥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나는 모든 감각을 열었다. 신경을 늘어뜨렸다. 최대한 느슨하고 흐리멍텅하게.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져도 된다. 왕가위의 (장편)전작주의자로서, 그의 영화를 보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한 터. 전작들이 투사되면 되는대로, 나는 그저 블루베리 파이를 부유하는 우유처럼 흐른다. 그것이 내가 왕가위를 대하는 방식. 그 남자, 왕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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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있는 사람들

똑같다. 현란한 카메라워킹과 화려한 색감의 향연 속에서도 그의 페르소나들은 여전하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기쁘다가도 아파하고,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부박한 삶은 또한 니힐하다. 주룩주룩 흘러 내린다. 기쁨, 슬픔, 웃음, 울음, 관심, 무관심, 쾌활, 우울, 안정, 불안, 온순, 분노, 연민, 감탄, 암담, 황홀, 고뇌, 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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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엘리자베스(노라 존스). 세상 모든 실연의 아픔은, 혼자 떠안았다. 그녀에겐 더 이상 열쇠가 없다. 언제든 문을 따고 들어갔던 그곳엔, 이젠 다른 여자가 차지했다. 사랑을 잃고 징징거리는 캐릭터는 여타 전작들에선 대부분 남자들이 맡았던 캐릭터. 카페의 마지막 성찬, 그러나 간택받지 못한 블루베리 파이만이 그녀를 위로한다. 물론 그 파이는 바로 제레미(주드 로)의 페르소나. 거부하고 싶은 실연을 안고 떠나는 그녀는, 그저 차를 갖고 싶다. 어디로 몰 것인가는 자신의 의지. 사랑은 어디에도 있고, 이별도 어디에도 있더라. 누구에게나, 스토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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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레미는 누군가의 절실한 부름을 받고 싶어한 남자가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고, 다른 이의 이야기가 담긴 열쇠를 모아두던, 자신의 이야기엔 인색하던 그 남자. 그의 사연을 추정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마지막 남은 블루베리 파이처럼. 엘리자베스가 주소 없는 편지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는 동안에도 그는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녀의 예약석을 만들어놓고. 블루베리 파이 또한 주인을 기다렸겠지. 그를 간택할 수 있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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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사랑의 집착에서 벗어나고픈, 그리고 고통 받은 이 여자. 왠지 가장 끌렸다. 수린(레이첼 바이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너무도 스타일리쉬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지닌 아픔에 비하자면, 이상할 것 같지만, 묘하게 그것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 고독한 사람이었다. 남편을 만나게 된 계기도 그렇고, 그 남편의 집착에 못이겨 떠난 것도 그렇다. 온몸에 고독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던. 결국은, 죽은 남편의 외상값까지 갚고, 당분간 그 계산서를 벽에서 떼지 말아줄 것을 부탁하고야 말던 이 여자.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던. 나는 그 말을 하는 순간이 가슴에 박혔다. 어찌할 수 없이 고독을 아는 여자. 롱테이크 한 순간으로 나를 사로잡아 버린 여자. 참고로,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이 맡은 역할의 이름이 '수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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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버거워서, 미워서, 카지노를 전전하던 이 여자, 레슬리(나탈리 포트만). 거침 없고, 쿨한 것 같지만, 가슴 속엔 결국 상처가 있다.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싶지만, 결국엔 아버지의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다. 포커판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큰 소리 치지만, 자신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 나탈리 포트만은 하루하루 커지는 배우 같다. 더구나, 몸매까지 저렇게 착해주시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 스칼렛 요한슨과의 <천일의 스캔들> 왕 기대!

왕가위가 내린다

굳이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우유처럼 흘러내리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눈으로 핥고 음미했다. 엘리자베스의 실연 여행도, 그리고 제레미와의 재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기억을 품은 스크린에 들러붙어서 서식하고 있었을 뿐. 노라 존스의 끈적끈적한 음색과 기름진 영상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맡기고 의식을 내동댕이 쳤으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블루베리 파이를 함께 나누고 있는 기분. 당신에겐 모르겠지만, 내겐 맛있는, 블루베리 파이!

실연은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없더라. 영화도 그랬고, 나에게도 그랬다. 그저 몸을 맡기고, 실연과 함께 하는 것. 왕가위의 영화가 그러했듯. 비가 내리면, 우산을 펼 때도 있고, 그냥 비를 맞을 때도 있다. 그런데 왕가위가 내리면, 우산보다는 그냥 맞고 지나는 것이 훨씬 낫더라. 나는 그렇더라.  
 
2008/03/05 - [메종드 쭌/그 사람 인 시네마] - 지독한 갈증과 슬픔, 그리고 왕.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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