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691,424total
  • 13today
  • 68yesterday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5.29 당신의 욕망은 안녕하신가! (8)

사용자 삽입 이미지
2년 전, 5월30일 인간사에서 욕망의 중요성을 알려주던 한 노인네가 타계하셨더랬다. 일본인이었다. 몇몇 그의 작품을 통해 감탄을 자아냈던 감독님이셨다. 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 당시, 향년 80세였다. 간암이었다. 역시나 암암암. 엊그제 시드니 폴락 감독님이 그랬던 것처럼. 암은 참 나쁘다. 감독님들 자꾸만 데리고 간다.ㅠ.ㅠ

그런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의 간암 타계는 그의 한 필모를 떠올리게 했다. <간장 선생>. 간염 퇴치를 목적으로 밤낮으로 왕진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며 어떤 환자든 '간염'이라고 진단을 내리던 아카기 선생. 그래서 별명도 '간장 선생'이던 (돌팔이)의사.

그러나 그의 돌팔이 행세는, 무조건 나쁘다고 쏘아붙일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액션은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렸다. 군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페인팅 모션 같은 것. '부조리'한 세상을 풍자하는 내공 같은 것.

영화는 즐거웠다. 이마무라 감독님도 즐긴 것 같았다. "관객을 숨쉬게 해 줄 영화를 찍고 싶다"던 그 말은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뭐니뭐니해도 자신의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염 퇴치는 아직 안 됐고 이마무라 감독은 간암으로 세상을 등진 묘한 아이러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필모 가운데 가장 먼저 접했던 <우나기>도 참 괜찮은 영화였는데, 그의 작품 중 마지막으로 봤으으며 가장 짜릿했던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는 한마디로 '감탄'이었다. "쪼잔하게 살지말고 욕망대로 살라"는 노익장의 속삭임은 '구원'과도 같았다. 에로티시즘을 향한 예찬. 천박하지도 않았으며, 은근히 혹은 대놓고 '욕망'을 감추고 살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는 가히 고희가 넘은 '할아버지'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다(이 '편견'도 얼마나 웃긴가. 나이에 기대 개인을 평가하거나 규정해 버렸던 나의 무지함). 그의 이름을 세계 영화계에 알린 <나라야마 부시코>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인간의 '욕망'을 이해했던 사람. 그리고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를 무겁지 않게 풍자하고 비꼬았던 사람.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욕망을 감옥에 가둬놓고 사식이나 주면서 연명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구름의 저편으로 훌쩍 가버린 그는 이제 어떤 욕망을 사색하고 있을까.

4년 전, 거의 비슷한 시기인 5월말경. 아마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 극장이 아니었나 싶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을 봤다. 그리고 그 감탄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읊조린 욕망 예찬. 나는 과연 내 욕망에 얼마만큼 충실한가. 당신은 당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진짜 제대로 나의 욕망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그래, 제발 꼴리는대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막스 베버가 갈파하고 근대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이었던 '프로테스탄티즘'은 근면성실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한마디로 ‘열심히 뺑이 치라’(소명론)는 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이었다. 당시 형성되기 시작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이 같은 점을 적극 활용하면서 자본가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프로테스탄티즘을 탄환으로 삼아 뻗어나갔고 그 우월함을 과시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참을 인(忍)’자를 새겨야만 했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누가 그 견고함에 비수를 들이댈 수 있으랴.

현재 우리를 되돌아보자. 우리는 일하지 않고 배겨날 수 없는, 혹은 적극적으로 노동을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 편입돼 있다. 이를 거부하는 자는 이른바 ‘낙오’라는 허울을 뒤집어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광고는 부르짖지만 실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 (회사에서 혹은 사회에서) 떠나라”는 말이 숨어 있다는 사실.

그렇다. 우린 속았다. 시민이 주인이라고? 국민이 주인이라고? 그렇다면 그 주인의 욕망은 왜 뒷전인가? 기업, 조직, 전체 앞에 개인의 욕망은 기지개를 펼 수가 없다. 늘 조직 앞에 희생해야 하는 건 개인의 욕망이다. 그러니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한 이들이 이 땅에 빌붙어 살기 위해, 연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고개 숙인 것은 남자뿐 아니다.

욕망하지 않는 자, 유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이런 개인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기발하고 야~한 삶의 찬가를 지휘하며 악기들의 앙상블을 연출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하 <붉은 다리…>)은 상상력의 성찬을 차려놓는 동시에 개인의 욕망을 두둔한다. 생의 소중함은 무엇보다 개인의 욕망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갈파한다.

<붉은 다리…>의 주인공이 그렇다.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내쫓기고 가정에서도 내몰린 요스케(야쿠쇼 고지). 이 평범소심남은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전형이다. 21세기는 그렇다. 노동력, 즉 고용없이도 생산성을 높이려는 기업들의 몸부림은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인간소외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최고 통치자건 경제 수장이건 자본주의는 이미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사실. 기업들은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이윤에 극도로 목을 매단다.

그런 구조 앞에 어깨를 늘어뜨린 요스케는 파란텐트 철학자, 타로를 찾아가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다. 답답함을 토로할 곳마저 잃은 그가 무턱대고 찾아간 곳은 타로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불상이 숨겨진 곳. 전쟁 직후 노토반도의 한 마을, 붉은 다리 옆에 있는, 창가로 바다가 보이는 집이다. 그 곳에서 요스케는 사에코(시미즈 미사)를 만난다. 성욕이 차오르면 몸에서 물이 나오는 여자. 섹스를 하면 분수처럼 물을 내뿜는 여자.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끌끌~ 혀를 차지 말 지어다. 그건 감독이 욕망을 두둔하고 본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냥 즐겁게 즐길 지어다. 우린 욕망을 누르고만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조직의 명에만 너무 익숙하지 않았던가. 일탈하고 싶다는 그 욕망. 스크린은 그런 욕망의 한 켠을 서슴없는 상상력으로 가득 채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삶의 욕망을 잊은 채 살아가는 요스케와 본능의 분출구를 찾지 못해 서성이던 사에코는 결합한다. 두 삶의 욕망이 어떻게 결합하는지, 욕망에 충실한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영화는 천천히 그러나 찰지게 보여준다. 그 쾌감은 보는 사람에게도 한줄기 시원한 청량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욕망의 과정에도 갈등과 불협화음이란 내재하기 마련이다. 개인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 왜 빈틈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그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 또한 욕망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건 한편으로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욕망이 욕심을 부르고 질투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제어하면서 그 욕망의 합일점을 찾는다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이야기. 이마무라 감독은 “후회하며 죽지 말 것”을 진심으로 권하고 있다. 타로 노인을 통해 이마무라 감독은 자신의 할 말을 쏟아낸다.

“욕망에 충실한 것이 진짜 삶이야”

살아생전 타로 노인은 요스케에게 말한다. “쪼잔하게 살지 말고 욕망대로 살라”고. 비록 자신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요스케에겐 다 제쳐두고 ‘즐기고 살 것’을 권유한다. 새로울 것 없는 하루하루, 21세기가 오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변한 것 따위는 없는 세상. 20세기를 관통했던 ‘야만’은 세기를 넘어서도 칼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은 설 자리가 없다. 지치고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삶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회사는 말없이 일만하는 사원을 좋아하는 법이다. 회사도 유기체인 마냥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수용해 질적인 삶의 향상을 꾀할 듯한 감언이설을 내뱉지만 속을 필요는 없지. 개인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회사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타로 노인은 그걸 위해 ‘뇌세포에 쥐가 날 때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서 행복을 찾는 거라면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욕망에 충실한가. 개인의 자아실현 욕구와 회사의 목표를 조화시킨다고? 글쎄. 이마무라 감독이 영화에서 언뜻언뜻 보여주는 조직에 대한 단상을 유추컨대 그건 불.가.능.이다. 개인의 자유의지는 조직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자아실현이란 단어조차 어떤 지위나 위치, 명예 등을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그건 조직이나 기업 속에서 형성될 법한 이야기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란 풍류를 읊조렸던 과거의 한량들이 어쩌면 옳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제대로 된 풍류고 놀이여야 한다(타락이나 환락과 같은 방종의지(자유의지가 아닌)는 오히려 욕망을 모욕하는 짓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건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요구가 어느 정도 톱니바퀴를 맞물렸을 때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가 성실한 노동자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오로지 로또적 역전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인양 부여잡는 필부들에게 그 경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자본이 자본만을 증식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빠져나갈 탈출구는 로또 밖에 없지 않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 차라리 욕망에 충실하게 살라는 이마무라 감독의 목소리는 충분히 경청할만하다. 욕망이 만발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며 삶은 그 욕망을 동력원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욕망예찬’은 늙은 거장이 젊은이들에게 넌지시 건네는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하기 싫다. 그래도 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문화사회’ 혹은 ‘놀이사회’의 도래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친구야~놀자”라는 부름을 엔간하면 거절하지 말라. ‘놀자’는 친구의 말은 진짜 삶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물론 욕망이 시키지 않는 다면 갈 굳이 응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ㅎㅎ)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