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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영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12.05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요?...
  2. 2011.12.05 아멜리에, 관계 맺기의 달인!
2011.12.05 02:24 메종드 쭌/무비일락

<마당을 나온 암탉> 이전, 내겐 <오세암>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그닥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 이 애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카우보이 전쟁광의 온당치 못한 침략전쟁이 일단락됐던 시기였다.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은 ‘끝’이란 단어를 쉬이 허용하지 않을 터이지만, 당면했던 전쟁의 포성은 멎었다(고 여겨졌다).

21세기에도 야만이 계속되고 있음. 그것을 증명하는 건, 언제나 전쟁이다. 명분이야 그럴듯해도, 결국엔 이권을 위한 다툼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이권과 폭력.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길지 않았다. ‘꽃보다 아름답고 픈’ 바람도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부르짖음도 공허한 메아리이자 거짓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자위할 순 있어도. 

문명의 발전이 곧 인류의 진보를 보장하거나 확언하지는 않는다. 문명이랍시고 시작돼 늘 그래왔듯, 세상은 가혹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세상을 조장하거나 혹은 세상에 공조해 왔다. TV브라운관을 통해 나타나는 전쟁이후의 혼란상을 보자니, 상반된 감정들이 파편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끝난데 대한 안도감. 그리고 오만한 카우보이 매부리코를 꺾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 혹은 아쉬움.

당시 나는 전쟁을, 파병을 반대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목소리를 냈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른 방향이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자잘한 메아리들이 희망의 지푸라기를 부여잡게 해 줬지만, ‘힘’과 ‘다수’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현실은 존재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나마 전쟁의 포화가 멎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내 마음의 야비함.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평온함을 갈망했을 뿐인 이기심.

궁금했다.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 천인공노할 무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나의 무력함.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라크 아이들의 상처입은 눈망울을 향해 눈물밖에는 짜낼 게 없는 허탈함. 분노와 슬픔은 관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구호와 시위 속에 던져졌지만, 그것은 평화와는 무관했다.

그리고 그 피흘림이 채 마르기 전에 우린 '핵'이라는 위험에 직면했다. 어디 하나 마음 편히 둘 곳 없이 불안을 품고 살아가야 할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역시나 하는 마음의 교차로는 위태로운 사람살이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줄 따름이다.

그렇듯 마음의 위무가 필요한 시기. 위태롭게 출렁이는 현실의 강 위에서 무엇이 평정심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런 힘을 가진, 차가운 금속성의 첨단 무기들이 박힌 시신경에 따스함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런 상상의 세계가 그리워지는 나날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시절을 위로하듯, 그땐 고 정채봉 동화작가의 따스한 감성을 담은 동화 《오세암》이 스크린에 부활했다. 작은 위안이나마 얻을까하고 담채화 같은 풍경을 눈에 넣었다.


영화 <오세암>은 남매의 엄마찾기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얼핏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시킨다. 맞다. 엄마를 찾아 길 떠나는 길손이와 감이의 여정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슬픔’을 동반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야하니까. 문득,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엄마아빠를 잃은 이라크의 아이들이 중첩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세암>의 동심은 ‘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소재로 그리움을 덧칠한다. 다른 이름도 아닌, 엄마니까. 다섯살배기 개구쟁이 길손이와 눈 먼 누나 감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오누이. 그들의 여정은 이미 슬픔과 신파를 동반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상황을 보자. “하늘처럼 생긴 물이 꼭 보리밭처럼 움직인다”며 바다의 모습을 길손이가 묘사하면, 누나는 귀를 통해 이를 형상화하면서 세상을 마주대한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이런 형용모순의 순간. 

그러나 뭣보다 감이는 엄마를 보는 것이 소원인 길손이에게 차마 불길에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떠돌던 오누이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설정스님을 따라 절간에서 겨울을 나기로 한다. 개구쟁이 길손이는 절간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고 악동짓을 해댄다. 그것이 결코 밉지 않다. 그 천진난만한 동심에 깃든 애틋함이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길손은 그것이 궁금하다. “자신보다 나쁜 아이들에게도 있는” 엄마가 자기에겐 없다는 것. 마음의 눈을 뜨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스님의 말에 길손이 혹하는 건 당연하다. 설정스님을 따라 길손이 암자로 들어가는 건, 눈 먼 감이가 엄마를 보고도 놓쳐버릴까 걱정이 돼서다.

문제는 거기서 또 발생한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터로 내려간 설정스님은 거친 눈보라를 만나고, 발을 헛디뎌 의식을 잃는다. 비극이 깃든다. 홀로 암자에 남은 길손. 스님을 기다리다 지쳐 관세음보살과 대화를 시작하고,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엄마를 애타게 찾던 아이는 마음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된 암자, 그래서 ‘오세암’은 탄생한다. 

<오세암>은 이렇듯 길손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았다. 굴곡도 별로 없고 클라이맥스의 극적인 구성도 없다. 다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감성을 자극하고 동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을 건드릴 뿐이다.

느린 구성과 듬성듬성 드러나는 어색한 신들은 관객의 감정폭을 극대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할 것을 권유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불교적 해탈이나 기적에 대해 쉽게 동화하기 어렵다. 길손의 바람이 이뤄졌다는 기쁨보다, 마무리가 느닷없이 빠르게 치달음으로써 관객들에게 감정의 파고를 조정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라는 <섬집아기>의 선율이 가슴속에 몽클하게 접근하고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같은 스크린 속 빛깔이 미덕이 될 순 있지만, 이것이 완성도를 보장해 주진 않는다. 한국형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지만, 일본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길을 돌리기엔 힘이 부친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일정 간격의 틈을 둔 <오세암>은, 다만 꽃(?)같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동심을 접하고 싶을 때, 미덕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발을 빼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이미 주변부로 내몰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패권주의가 피를 튀기고 사람을 살육한다. 국가의 이기심은 현대판 흑사병과 같은 사스(SARS)가 창궐하도록 방치한다. 되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국가의 시스템이자 체제다. 실체도 없는 국익논쟁은 또 어떤가. 거기에 개인은 없다. 인간은 없다.  

서로를 불신하고 피하게끔 만드는 세상의 이기는 점점 파괴력을 키운다. 자본은 교묘하고 이권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것들은 정감 있고 따스한 세상에 대한 기대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유도한다. 무력함을 심어주는 가장 극악한 방법. 주변에서 힘을 북돋아주기보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서 타인을 짓밟고 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더 많은 현실. 영화는 동심은 과연 탈출구가 될까.

정말, 마음을 다해 원하면 세상의 평화가 올까? 지금의 인류에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고 정채봉 작가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중에서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2.05 02:03 메종드 쭌/무비일락
“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 안도현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관계》 중에서 -


우리, 관계 맺을까?
‘나’, 하나만 덜렁 있다면, 관계는 없다. 그래, ‘너’, 좋다. 나와 너가 합쳐서, 함께 하면 ‘우리’가 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기본. 즉, 관계 맺기는 원맨밴드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 사물, 그 누군가가 됐건, 무엇이 됐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가진 무언가들 사이, 관계가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연과 사람 등 모든 자연지물 사이에 나타나는 일종의 의식. 그것이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가슴 한 구석을 텅 비워야만 살 수 있는 이 역겹고 험한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관계 맺기 아닐까. 그럼에도 세상은 부인할 수 없이, 관계 맺기의 연속이다. 하다 못해 이글을 읽는 당신과 나도, 독자와 필자라는 ‘관계’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린 ‘관계인’이고.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이 어찌 그냥 두고 넘기겠는가 말이다.
 
생각해 봤다. 웃고 울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며, 홀가분하고 참담한, 사랑하고 무관심한, 세상 모든 감정과 우리가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일이 힘들기보다 인간 관계 때문이라지 않나. 아무렴.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알려줘야 할 것은, 국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관계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사랑, 우정, 미움 등의 모든 관계가 세분화될 수도 있겠다.


왕따에서 행복 전도사로 

그땐 좀 그런 게 어려웠다. 학교는 물론이요,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도 있고,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다. 직장에서 동료라곤 하지만, 이거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니, 어떤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조건 옳았다고 내세울 건 아니지만, 그 관계들, 참 어려웠다. 나를 비롯해 다들 지가 잘났다고 고집하는데, 스파크가 튀고 마찰이 생겼다. 여자친구와의 관계 역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맺기의 꼬임.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럴 때, 세상 속에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그 때,  아멜리를 만났다. 《아멜리에》. 와우, 보면서 놀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관계 맺기의 명수였다. 그것도 ‘행복 바이러스’를 세상에 별빛처럼 뿌리는 행복 전도사.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관계 맺기의 달인이었던 건 아니다. 아빠의 오해가 낳은 심장병 때문에, 그녀는 외롭게 자랐다. 관계 맺기가 심장에 줄 충격을 염려해, 제대로 관계 맺기를 못했다. 그런 아멜리가 변신하는 것은, 관계 맺기의 달인으로 바뀌는 것은 극적인 이야기를 품는 것으로 처리됐다.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상자의 구슬, 플라스틱 군인, 빛바랜 사진 따위가 아멜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와 닿지도 않고,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할 따름이다. 말과 글의 한계다.

하여튼, 낡은 상자는, 절망을 담았던 판도라의 상자와 다르다. 그 상자와의 만남은 행복을 나눠주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상자만 아니었다면 아멜리는 아마도, 흐지부지, 지리멸렬, 엄벙덤벙에 불과한 소녀이자 여자였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순간, 그녀는 그 어렵다는 관계와 무척 친해진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던 관계도 초강력 오공본드처럼 척척 그리고 단단하게 붙여줄 수도 있고, 관계를 행복하게 만든다. 혹시 그녀는 초강력 슈퍼접착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와중에서도 아멜리의 능력은 신통방통이다. 

신경과학자들이 그랬다. 인간의 마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천체물리학도, 뇌수술도 아닌,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견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곧, 관계 맺기의 핵심이 아닐까. 
아멜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아멜리, 이 깨물어주고 싶은 깜찍녀

변신에 이어 아멜리가 꾸미는 음모는, 앙증맞고 깜찍하다. 종횡무진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폐쇄적이 된 아빠를 위해, 친구에게 부탁해 세계 각지에 아빠의 인형 사진을 놓고 찍는다. 그렇게 아빠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아래층 아줌마를 위해 남편의 편지인양 가짜 편지를 보내고, 50년 전 추억의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담배 가게 아가씨와 그 주변을 맴도는 총각을 연결해주고, 착한 야채가게 청년을 구박하는 주인아저씨를 혼내주고... 굳이 정의를 위해 나서진 않더라도 상관 없다.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아멜리가 원더우먼이다.

아멜리의 관계 맺기는 환상적이다. 그녀가 맺는 관계 속에, 행복의 꽃이 가득 피어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바이러스를 팍팍 뿌려대는데, 왜 부메랑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니노와 눈 맞은 아멜리. 달콤한 미소를 지닌 정체불명의 그 남자, 니노. 행복은 이제 아멜리 차례다.

아멜리의 심장은 주책없이 방망이질을 해대고 사랑은 찬연한 불빛을 뿜어댄다. 모든 관계 속에서도 제일은 ‘사랑’ 아니겠는가. 아! 두근두근 콩콩!! 국보자매의 노래, '두근두근'이 아니라도, 심장이 뛴다. 독고진(<최고의 사랑>)이라도 그럴 것이다.  

행복 포자의 생명력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엉뚱한 행동이 결합된 아멜리의 행복 포자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가 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삶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수고롭고 짐진 자에게 행복을. 그것이 바로 아멜리식 관계 맺기의 정수가 아닐까?

아멜리는 자신을 위해 산다. 행복을 주는 것이 기쁘다. 단지 그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녀는 바이러스를 살포한다. 아멜리가 있어 모든 무생물들도 금방 숨 쉬고 뛰어다닐 것처럼 생명력을 가진다.

아, 내가 행복해야 하는 구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돌아볼 수도 있고,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할 수 있구나.

아멜리를 찾습니다, 혹은 내 자신이 아멜리?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을 통해 고래처럼 숨 쉰다. 아멜리가 꿰어 맞추는 관계의 앙상블은, 이 동정 없는 세상에는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가깝게 평택의 쌍용차도 그랬고, 지금 부산의 한진중공업이 그렇다. 그 속엔 관계라곤 찾아볼 수 없다. 특히나 있는 자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관계 맺기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세상.  

그래서였을까. 아멜리가 펼쳐놓는 판타지에 한없이 중독되고 싶다. 기실 동화적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그 도저한 선한의지의 전염성에는 마찰 계수를 계산하고 싶지 않다.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이 일갈한 자신의 삶에 대한 규정을 관계 속에서도 대입해보고픈 욕심이 생긴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덕분일까. “당신 없는 오늘의 삶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이라는 관계망의 형성에 나는 마음을 뺏기고야 만다. 헤어짐이 잦은 세대, 그냥 가벼운 눈웃음만으로 충분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했지만. 안도현 시인은, 이 세상 어른들은 ‘눈사람을 만들 줄 모르는, 단지 눈사람을 발로 찰 줄만 아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지만.

묻고 싶은 거지.
 
관계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관계 덕분에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아, 현실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딨니? 아멜리...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좋은 관계는 삶을 재밌고, 풍요로우며 흥미롭게 만든다. 뭣보다 살아갈 용기와 열정을 제공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좋은 관계란 그런 것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좋은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참, 직장에서의 관계 맺기는 어떻게 됐냐고? 아멜리가 돼서 직장의 화목한 웃음을 책임졌냐고? 아니. 그런 마찰적 관계 맺기에 내 마음을 더 이상 썩어 문드러지게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 나갔지. 내 진짜 마음을 감춘 채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건, 더 나쁘다는 걸 아멜리가 알려줬거든. 그러니, 안녕. 

다만, 함께 본 여자친구에겐 더 깊고 너른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됐었지. 그녀를 나는 '아멜리'로 불렀고, 그녀는 아멜리처럼 내게 행복포자가 됐다. 물론, 과거형이지만. ^^; 그래도 행복했다, 아멜리. 고맙다, 아멜리.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