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런 순간이 내게 닥친 것이다. 우리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 전날, 그녀는 카메라를 사고 싶다며, 다운타운에 동행해달라고 했다. 주말에 하릴없이 하숙집에 박혀있기가 무료했든, 바깥공기가 그리웠든, 쇼핑을 하고 싶었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하숙집을 나왔다. 나는 접속장소였던 학원의 정원 앞에서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싶었다. 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데, 뭐랄까, 눈이 아득해졌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파란빛 자켓, 얼굴을 감싸는 챙 넓은 모자와 푸른 선글라스로 한껏 분위기를 낸 모습이 가을 햇살과 뒤범벅됐던 순간, 나는 아주 작은 탄식을 냈다. 심장은 박동속도를 높였고, 쿵쿵쿵 우렁찬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그건 교통사고 같은 ‘사랑사고’였다. 느닷없이 당하고야 마는. 준비도 예고도 없이 맞닥뜨리는. 그렇게 작동한 심장을 부여잡고, 다운타운을 거닐다가 들어간 곳이 백화점 옥상 테라스에 위치한 커피숍. 가을풍경이 잘 보일 것 같다며 들어간 그곳의 커피 한잔 가격은 25센트. 가난한 학생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가격이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지만, 그날은 특별했다. 서로의 마음에 들어간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전혜린’을 이야기했고, ‘사포’를 기억했고, ‘전태일’을 기렸다. 그녀는 남자가 ‘전혜린’을 알고 있는 것에 신기해했고, 악몽 같았던 군대 시절의 상처를 보듬어줬다. 나는 주절주절 있는 것, 없는 것 다 풀어놓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일까. 그 25센트짜리 커피에 나는 흠뻑 취했다. 커피향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처음 느꼈다. 그렇게 커피와 함께 한 그녀와의 대화에 젖어들면서 나는 진정 이끌림을 맛봤다. 그 커피향에는 내 설렘이 가미됐고, 내 첫 번째 첫사랑은 그렇게 커피와 함께 시작됐다. 가을날의 햇살이 그렇게 부추겨서였을지는 몰라도.
커피 한잔. 25센트 커피 한잔의 잊지 못할 가을의 기억. 25센트짜리 커피한잔에 담긴 25달러짜리 커피향을 맡으며 새긴 25만 달러짜리 기억. 조잘대던 그녀의 입술, 가을햇살 담은 그녀의 맑은 눈, 빙긋 미소 지을 때 들어가는 그녀의 보조개, 내 말에 자지러지던 그녀의 함박웃음, 그리고 내 심장박동을 뛰게 하던 당신. 나는 그날,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인근의 대학 캠퍼스까지 섭렵했다. 원래 목적이었던 카메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날을 꾹꾹 담았다. 가을햇살을 맞았고, 산책을 했고, 커피를 마셨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우연히 고향이 같았던 탓일까. 우린 생각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고, 각자의 기억을 이식했다. 커피와 함께 한, 커피향 같은 그녀와 마주한 그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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