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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meeting'만큼이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4.25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하여... (10)
2008.04.25 23:11 메종드 쭌/무비일락

살다보니, 만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별이더라. 이별은, 물론 만남이 있어야 가능한 사건이고. 둘은, 뗄 수 없다. 그래서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의,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어찌보면 매순간 맞닥뜨리는 진리인 셈이다. 


그러나 이별은 그 중요성에 비해, 확실히 저평가됐다. '만남'에 대한 세상의 충고는 넘쳐도, 이별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쳐도, 이별은, 아니다. 슬픔 때문일까. 감히 건드리기 미안해서? 이별 역시 만남만큼이나 일상다반사지만, 이별에 대한 언급은 꺼리기 마련이다. 기실, 이별은 만남과 동등한 위치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별을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만 떠넘기는 건 너무도,가혹하다.


김광석의 노래도 그랬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내 곁을 떠나고야 마는 어떤 이별. 조병준 선생님도 언급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언제나 형벌일 그 슬픔. "그렇잖아도 이미 충분히 쓸쓸하고 허전한 삶인데, 떠난 자를 기억하는 슬픔까지 더해야 하는가. 더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렇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가 치러야 할 대가. 이별을 겪고 난 후의 상실. 그것 역시 남은 자의  몫. 어쩔 수 없이 가혹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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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매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살아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할아버지, 시게키(우다 시게키). 33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죽음은, 아내의 몫이었지만, 슬픔과 상실은 시게키의 몫이었다. 치매에도 불구, 그는 아내를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또 한명의 상실자가 있다. 아이를 잃은 마키코(오노 마키코). 헤어져 사는 듯한 남편에게 "왜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냐"는 타박을 여전히 듣고 있다. 그런 두사람이 요양원에서 만난다. '이별'을, '슬픔'을, 시계추처럼 달고 사는 이들. 과연 그들은, 살아있는 것일까. 밥을 먹고 반찬을 먹고 있는 '살아있음'이 아닌, 살아있는 기분, 살아있는 의미, 살아있는 목적, 그런 것. "나는, 살아 숨쉬고 있냐?"고 자문했을 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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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너를 보내는 숲>은 시종일관, 그 질문을 따라간다. 이별을 겪고,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살아있음'에 대한. "어쨌든 산자는 살아야 한다"는 명제만 아니라면, 그들도 이미 생을 놓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원치 않던 이별을 받아들이면서, 하루를 지탱한다. 무엇이 그들을 견디고 버티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 같다. 고통과 슬픔을 품고 있는 이들을 서로가 알아보는 것 같은. 물론, 할아버지는 치매 때문에 오락가락한다. 평상시, 다른 이의 감정에는 무심하다. 


그런 두 사람이 시게키 할아버지 아내의 무덤을 찾아 떠난다. 죽은 뒤 33년이 지나면 완전히 이승을 떠난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그리고 숲, 온전히 숲. 치매 할아버지의 럭비공 같은 행적으로 숨바꼭질을 하다가, 숲을 헤매게 되는 두 사람. 이별을 쉬이 떨쳐버리지 못한 미망 때문인지, 두 사람은 헤매고 또 헤맨다. 밥과 반찬을 먹으면서 살아있어도, 생은 미로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두려움이 때론 엄습하고, 앞길을 막는 폭우가 그들의 처지를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영화는 그들의 이별의식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할아버지는 사실, 이별의식이 어떡해야 치러야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그는 걷고 또 걷는다. 미치코는 그런 할아버지를 힘겹게 쫓을 뿐이지만, 한순간, 고통과 슬픔의 감정 앞에 대면하는 법을 깨닫는다. 급류 속으로 무작정 걸어가려는 할아버지를 붙잡기 위해 내뱉는 통곡. 아이의 손을 붙잡지 못했으나, 이제는 손을 내밀어, 가지말라고 외치는 마키고의 통곡. 덩달아, 나는 울고 있었다. 타인의 감정에 그렇게 무심하던 할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순간도 있다.

그것은 아마, 티어스테라피(tears therapy). 눈물로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슬픔을 치유하게 되는 순간. 그런 순간을 겪고 난 그날 밤, 마키코는 오한으로 떨고 있는 할아버지를 웃옷을 벗어 온몸으로 살을 부비며 체온을 유지시켜준다.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몸짓. 뭐랄까. 그건 (고통받고 있는)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이었다. 


생은 누군가에겐, 갑자기 닥쳐오는 오한과도 같다. 이별이나 상실 역시 그렇고. 그럴 때, 그것을 버티고 견뎌내기 위해 필요한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야 할 무엇이다. 그들이 체온을 나누는 장면은, 실로 눈물겹다. 마치코의 행위는, 할아버지의 몸 온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 온도까지 높이는 치유의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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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이별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이들. 세상에는 너무나 큰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아무일 없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액면일 뿐, 그들이 견디고 버텨냈을 숲의 시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고 자체일 것이다. 상처를 품고 있는 이들이라고, 찰나의 행복이나 기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온전하게 이별을 감내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마치코는, 아내와 춤을 추는 할아버지의 환상을 경험하고, 할아버지는, 자신이 품고만 있으려고 고집부리던 가방을 마치코에게도 넘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화되는 순간. 이젠 타인을 바라보게 되고, 타인에게 자신의 짐을 맡길 수도 있게 됐다. 살아있음은, 그런 것이다. 내 안의 이별에만 집착하지 않는 것. 고통에는 크기가 없다. 나의 고통을, 타인의 것과 견줄 필요도 없다. 타인을 통해, 때론 그 이별도 감내할 수 있다. 때론 내 안에 있는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 혹은 상처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어주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타인의 기쁨까지도. 어쩌면, 그것이 '살아있음'이다.

그들이 숲을 헤치면서,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하거나 나누진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경험하고 교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연출은 큰 굴곡없는 이 이야기를, 어떤 느낌으로 전달하는 희귀한 재능을 가졌다. 영화는 이별이, 생의 전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건넨다. 만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별이라고. 이별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살아있음'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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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한편으로, 최근 본 <어웨이 프롬 허>에서 한 남편(그랜트)이 치매걸린 아내(피오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는 장면과도 오버랩된다. 생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헤어짐, 이별을 어떻게 잘 요리할 것인지. 'Well meeting'만큼이나, 'Well Farewell'이 중요하다는 것을. 물론, 이별에 있어, <너를 보내는 숲>의 대사마냥, "정해진 규칙 따윈 없다." 규칙을 만들 수도 없다.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만남과 자웅동체나 다름없다. 어떻게 이별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또한 언젠가 맞닥뜨릴 자신의 죽음과도 연계될 것이다.

<너를 보내는 숲>의 원제인 '모가리 숲'에서 모가리(殯)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장소를 뜻한단다. 죽음 역시 이별이라는 큰 개념에 포함될 터. 이별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우리가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장소가 필요하겠다. 온전하게, 너를 보내고, 나는 살아있기 위해서. 세계는, 어차피 내가 이별을 맞았다손, 멈추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는 트루먼 카포티의 속삭임은, 실상은 그렇지 않은 우리네 사람살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

'너를 보내고',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너에게,
나는 이 영화를 권한다.
조용히, 묵묵하게, 모가리의 숲으로 들어가 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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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기억의 숲속에 자리할 수 없는 사랑이란...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