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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5 17: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사료에 의하면) 세종은 '성군'이라는 호칭에 가장 부합한 임금이다. 진짜 그만한 성군이 없단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의 대가, 김별아 작가는 그랬다. 소설을 쓰기 전, 철저하게 역사를 공부하고 파악하는 그의 작가의식을 감안하면, 그 말은 100%일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는 조선조 처음으로 '대왕'이라는 직함을 세종에게 부여했을까. 그 뒤 정조대왕이 있지만, 글쎄, 잘은 모르지만, 정조에게 대왕은 좀 어색하다.


그런데, 그의 즉위는 좀 놀라운 데가 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는 장자(맏아들)가 아니다. 그것도 셋째 아들.

장자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권이 부여된 시대, 그는 왕에 즉위했다.

물론 나는 자세한 이유와 배경을 잘 모른다.

양녕과 효녕의 실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충녕에 대한 아비(태종)의 신뢰와 왕의로서의 자질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왕위에 올라서 성군이 되고 대왕이 됐으니까, 그건 아비의 정확한 판단이었다.


헌데, 왕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왜냐!

태종도 다섯째 아들이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조도 둘째 아들, 세 번째 왕 태종도 다섯째임을 감안하면,

태종으로선 장자에 당연히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그리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충녕은 간택됐다.


아마 아비는 갈등했을 것이다.

정당성이냐, 왕권의 안정이냐. (물론 그것은 연결돼 있기도 하다.)

충녕이 왕권 안정에 적합한 인물이자,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아비의 선택은 옳았다.


그런데, 궁금했던 건, 충녕 본인은 왕위에 오를 생각이 있었을까?

공부가 가장 쉬웠고, 형들과 달리 놀 줄도 모르고, 잘은 모르지만, 범생 분위기가 자욱하게 풍겼을 그에게 그런 야망이 있었을까?

찌질한 것은 아니어도, 그는 딱 FM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육두문자를 지껄이는 세종은 완벽하게 허구다!)

충녕은 야망 없는 날라리를 꿈꾸는 내 기준에서는 슈퍼울트라 비재미.

친구할 생각은커녕, 신하였어도 그를 임금으로 모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 간단하다. 재미 없을 것 같아서!

그의 뇌구조를 뒤적이면 한 83.27%는 '백성의 고단함'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본투비 킹.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그런 궁금함에서 출발한다.

이제야 영화 이야기에 본격 들어가는 셈인데, 장규성 감독은 충녕을 찌질한 샌님으로 설정한다. 아비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후덜덜. 형들한테도 미안하고,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언감생심, 왕이 다 뭐다냐! 야망도 없고, 성장에 대한 욕심도 없으며, 그렇다고 책 외에는 삶을 즐길만한 건덕지도 없어 보인다.


영화는 '왕자의 거지'의 모티브를 차용, 심약한 충녕이 어떻게 세종이라는 성군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결정적 계기!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만듦새, 영 아니올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야 만다. 


심약한 샌님, 충녕이 어떻게 임금이 되고자 하며 성군이 되는지, 

그 역사적 상상력의 소재,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가!  

허나, 소재로만 끝난다. 아쉽다. 

연출력이 가장 큰 문제로 보여지는데, 

충녕과 우연히 뒤바뀐 노비 덕칠의 왕 행세는 어설프다. 

충녕이 백성들이 고단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세자 행세를 한다고 모질게 맞고, 고난을 당하는데, 대역죄인이라는 어명까지 내려온 마당인데, 너무 쉽게 빠져나간다. 세자임을 증명할 방법도 충분히 있을 터인데, 덕칠은 궁궐에서 너무 무기력하고, 충녕의 민생탐방(?)은 작위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살짝 아깝다. 

변희봉, 백윤식, 김수로, 임원희 등 연기력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어딘가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극에 완벽하게 묻어있지 않다.   

 

그리고 연기 잘'했'던 젊은 배우, 주지훈의 복귀작. 그는 덕칠일 때보다 충녕일 때 더 빛난다. 확실히 그 간지, 제 아무리 분장을 하고 열연한다손, 노비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연기가 완벽하다거나 충분하다는 뜻, 아니다. 

배우 주지훈, 충분히 몸이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재밌다. 주지훈의 캐스팅. 

마약사건으로 불가피하게 군대에 가야했던 주지훈의 처지.

그리고 '벌써?'라는 논란이 따르고 있지만, 그는 어쨌든 복귀했다.  

그것, 극중 충녕의 탈피와 묘하게 맞물린다.

샌님 나부랭이였던 충녕의 깨달음 그리고 성군의 탄생.  


이 캐스팅, 충분히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주지훈 역시 마찬가지일 듯하다.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렸지만, 

이 영화에 왜 별 세 개를 줬냐고? 

물론 이유, 있다! 

만듦새만 놓고 보면, 꽝이요, 두 개로도 충분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만듦새에 대해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진정성 같은 걸 느꼈다. 

어떻게든 잘 만들고 싶은 필사의 노력 같은 게 내 마음에 닿았다. 


나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 아무런 관련도 호감도 없다. 

그저 연기 잘하는 배우 주지훈이 다시 배우로서 뿌리를 내리는 정도?

(그가 군대 가기 직전, 내가 매니저로 있던 카페에 화보를 찍으러 왔던 어설픈 '인연' 정도는 있다.ㅋ 눈앞에서 주지훈을 보면서, 감탄했다. 저 길쭉길쭉한 간지, 깎아지른 외모. 남자가 봐도, 주지훈, 아름다웠다!)  


관객들과 호흡하고 싶다는 열망을 감지했고, (어느 영환들 그게 없으랴마는!)

뭔가 지금의 정치적 세태와 맞물려 좋은 지도자를 갈망하는 어설픈 정치의식까지 느꼈다. 

그러니까, 별 하나는 그 잘 만들고 싶은 그 마음. 그 마음에 대한 화답이다. 


일부러 영화를 권하지는 않겠지만, 

이 장면만큼은 찡하였다.  


백윤식이 분한 황희 정승, 야인으로 살면서 일갈한다! 임금의 도리에 대해. 

충녕임을 알아차리진 못한 채. (근데, 황희가 충녕을 못 알아보는 것, 아무리 영화적 장치라지만, 이해가 안 돼!ㅠ.ㅠ)


"백성의 고단함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더냐?"


충녕이 세종으로 탈피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 한 마디!

충녕이 180도 변신하는 것이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어설픔에도, 

영화를 관통하는 이 호통(?)은 찡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세상에서 멸종한, 더 이상 우리에게 없을 지도자(최고통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는 결론을 짓는다. 국민성군은 더 이상 없다. 

안철수? 개뿔! 그는 그저 온건한 보수이자, 포악한 자본주의에 살짝 균열을 가게 하고 싶은 체제 지킴이다. 그만한 대안이 없다는 게 참 아쉬울 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많은 사람들, 안철수를 삶의 태도와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에 대한 신물, 단순한 트렌드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우습게도 단언하건대, 혁명이 없는 한,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성군을 향한 열망도, 결국 내 삶의 미세한 부분에서도 바꾸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말만 번지르르하다. 안타깝게도 그것, 생명력이 없다. 

삶의 최소주의와 일상의 정치의 최소주의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내가 씨부렁한 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결코 심각한 영화가 아니로소이다~ㅎㅎ  

<선생 김봉두> <이장과 군수> 등의 장규성 감독은 너무 오랜만에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참,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있다. 마지막 풍경. 

노비 덕칠과 양반집 규수 수연(이하늬)가 가정을 이뤄 애들 순풍순풍 낳고 산다. 

노비와 양반의 결합. 당대로선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일텐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담긴 장면이리라. 

물론 수연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영애인데, 계급을 넘어선 사랑과 결혼, 그것은 늘 감동을 준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7.21 20: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인간 잔혹사의 발자취

 

이성(理性)을 동력으로 삼았던 근대는 인류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했다. 이성중심주의의 굳건한 구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의 발현, 세계의 주체를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겼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식민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근대성은 물질적 풍요까지 등에 업었다. 이성의 힘은 더욱 탄탄해졌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찬란한 문명의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세울만 했다. 그리고 인간도 변화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이성, 어느 순간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유래없이 쌓아왔던 물질적 풍요를 단숨에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광기 혹은 야만이 출현했다. 계량화와 각종 수식과 이론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던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물살에 휩쓸린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했다. 인류의 생존과 이성의 힘은, 전방위로 위협당한다. 만신전에 오르길 그토록 열망하던, 혹은 장담했던 인류는 그렇게 나락을 경험했다.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그토록 믿고 싶었던 근대이성의 총체적 결과물은 인류문명의 허구성에 대한 직시였다. 우리(인간)는 만물의 영장인가, 지구라는 혹성의 지배자인가. 회의와 의문. 실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 만들어졌다. 이성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란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한계와 역기능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이라 명명된 근대이성의 한계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른바 ‘비판 이성’을 주장, 이성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강조하면서, 믿고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인류는 첫 번째 이성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생채기를 발판삼아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패가 반드시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니다.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며,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인류의 문명 발전에 대한 집착은 이어졌다. 숱한 전쟁과 살육 등에 의한 희생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야만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 협잡과 조작을 일삼는 동안 대중들도 이에 현혹됐다. 지배세력의 이권이 곧 자신의 것인양 착각했다. 노동은 차츰 힘을 잃었고, 자본은 더욱 힘을 불렸다.

 

과거라면 손사레를 쳤을 유전자조작, 복제인간 등 디스토피아적인 발상도 활개를 쳤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합리적 이성마저도, 가출했다. 인류 스스로 집단 취면을 걸었다.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인 멘붕의 시대. 그것이 마냥 허풍은 아니다. <28일 후...>는 그 뚜렷한 징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은유일 수도 있고, 직유법일 수도 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하나. <28일후...>는 인류의 이성을 부정한다.

고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워야 할 인류문명의 결정체(이성)는 차디찬 돌멩이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분노', 그 사소한 감정조차 조절 못하는 족속이다. 인류 따위에게 이성이란? 서류상의 유물에 지나지 않을 뿐! 세상은 분노하지만 인간은 어떤 힘도 없다. 허세였고, 허풍이었다. 고작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등 돌리기. 내게 불이익이 닥칠까봐, 서로를 밀어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단초는 바이러스. 그것도 인간에 의해 배양된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바이러스의 기승은 인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고 영화는 출발한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유혈폭력과 광기의 현장. 영장류들은 이른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들에 의해 비극의 종이 울렸다.


바이러스 유출이후 28일이 지난 날, 주인공인 짐(킬리언 머피)이 병원에서 깨어난다.(그가 '퀵서비스 배달원'이란 사실도 재미있다. 분노 바이러스가 20초안에 감염자를 극단적인 분노상태로 이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 산업화가 시작된 문명의 땅, 영국은 폐허인 상태다. 거리엔 아무도 없다.(황폐화된 도시의 풍경은 <28일후...>의 영상미가 표현할 수 있는 압권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힌 불안과 의심을 품은 런던은 장엄한 레퀴엠(장송곡)이다.) 


이 살풍경, 피로 얼룩진 묵시록이다. 이성 따윈 없다. 이미 대피령이 떨어진 도시, 런던에서 짐이 처음 대면한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붉은 눈빛의 좀비. 역시 이성은 없다. 오로지 (바이러스)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 본능, 진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집어삼킨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본능이다. 신자유주의가 전파한 물성 바이러스와 다르지 않다. 경쟁과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 좀비 자본주의가 오버랩 된다.  

 

좀비는 짐을 습격한다. 위기에 처한 짐, 몇 안 되는 생존자, 셀레나와 마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를 모면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건, 그들은 고립돼 있으며 살기 위해 한때 같은 인류였던 좀비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 20초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룰은 이성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명제만 뚜렷하다. 그것이 생존의 룰이다.


할리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보증수표를 내세우고 참패한 <비치>이후, 대니 보일 감독, 심기일전을 했나보다. 생존 앞에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이성을 들고 나왔다. 감히, 누가 목숨 앞에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장삼이사라면 말이다. 그는 폐허 혹은 연옥의 현장을 짠하게 펼친다. 인간 이성을 철저히 짓밟는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인류에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양.


<28일후...>는 지옥화다. 곧, 현실이다. 과장했으나, 그 실상은 다르지 않은. 마크도 죽고 짐과 셀레나는 또 다른 생존자, 프랭크와 해나 부녀를 만난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무장 군인의 방송도 듣는다. 얼마나 반가울 쏜가. 지옥에서 만나는 인류의 흔적이라니. 그들, 무장군인이 있다는 맨체스터로 떠난다. 지옥에도 찰나의 행복은 있다. 그들, 유사가족의 형태를 띠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행복을 맞본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을 향한 눈속임이다. 바이러스 감염자, 좀비의 습격보다 더욱 흉포한 존재의 등장. 대니 보일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다.  잠시의 안도감은 영화의 속도조절을 위한 장치였다. 짧은 잔치가 끝나고, 대니 보일은 진짜 타깃을 향한다. 인간의 진짜 속성을 까발린다. 폭력과 권력의 힘은 어떻게 이성을 배반하는가! 팡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인간의 진짜 내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 


그런 본성은 무장군인 둘의 대화를 통해서도 발설된다. 철학적인 한 군인은 말한다. "지구상에서 인류의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은 결국 정상으로의 회귀다" 이성에 따를 것을 호소하는 말이다. 반면 부대를 지휘하는 군인의 입장은 다르다. 그에게, "인류사는 폭력의 역사"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국 생존자들을 지킨다던 군인(인간), 이성을 시궁창에 처박는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위장술에 불과한 레토릭이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당신은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 그리곤 파열음을 내며 대답한다. 그것? 믿을 거 못된다.

 


둘. <28일후...>는 이성의 한계 인식과정에서 나타났던 파시즘(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을 비꼰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무렵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갓 지나간 직후였다. 영국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무인도로 전락했고 어디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는 마스크로 대변되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남겼던 어떤 고립감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홍콩, 사스가 창궐했던 국가가 당했던 혹은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왕따의 순간들. 미국의 음모론까지 유포됐던 고립무원의 현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돌아올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근거조차 희박한 갖가지 유언비어와 침소봉대의 맞춤법은 '피의 순결함'으로 무장해 유대인 학살의 기치를 들었던 나치의 만행과 연결된다. 그 경계가 희미해도, 그 호들갑에 심어진 국가 혹은 민족적 분파의 연결고리는 섬뜩했다.


대니 보일은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보인다.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이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28일후...>에서도 영국에 대한, 국가에 관한 밀착감은 약하다. 대영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마크는 초반에 죽고, 애국심에 불타는 것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종족 번식과 성욕의 충족에 미친 괴물이었을 뿐이다. 국가를 내세운 이들을 일찍 죽이거나 괴물로 삼는다는 것. 박수, 짝짝짝.  


다만 유순하고 투덜이 스머프였던 짐의 반전은 극적이긴 하나 영웅주의 냄새도 살짝 풍긴다. 증오와 생존을 위한 폭력 전사로 변신한 폭이 너무 컸다는 얘기다. 

 


뱀발로, 제목과 관련해 들었다. 왜 28일일까. 한달에 약간 못 미치는 4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의아심, 가질 법한데. 여성들은 어쩌면 빨리 눈치 챌 수도 있었겠다. 28일은 여성의 생리주기.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극중 미래를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는 장교의 말을 떠올리면, '28일후'라는 제목,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는 말씀. 그렇다면? 28일후는, '새로운 시작'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희망의 도래'보다 '절망의 지속'에 배팅하고 싶다. 다시 '28일후...'가 지나도, 이성의 개안(開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 문명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당장 지금-여기의 우리는 그것을 목도했다. 과거 위정자들과 지배세력은 위선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마저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뻔뻔함이 지배하는 시대, 멘붕이 일상화된 시대, 이성은 없다! 물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바람의 딸, 한비야도 지치고 힘들어서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를 달래주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기, 또 하나는 베스트 프렌드,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 물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그녀, 일기를 들었다. 그녀, 여전히 매일 같이 일기를 쓴다. 틈날 때마다 쓴다. 현재와 순간을 살아가는 바람의 딸에게 일기는 일상다반사. 그녀는 말한다. “아마 나는 일기를 안 썼으면 건달이 됐을 거예요. (웃음)”


그녀 이전, 일기쓰기로 삶을 지탱한 사람이 있었다.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 6.12~1945.3.12). 


일기는 나치 치하의 유대인 소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의 결과였다. 개인적인 것이 곧 역사적인 것임을 상기시켜준 《안네의 일기》. 그것은 어떻게 한 소녀를 지켜준 것일까. 6월, 안네가 태어나고,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달. 학살과 억압을 뚫고, 세계를 품은 여인들의 정신을 지켜준 ‘일기의 힘’을 엿보자.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6월12일, 안네가 태어난 날이자, 《안네의 일기》가 시작된 날이다. 1942년, 피난 생활 중이었다. 안네는 13세 생일 선물로 붉은 체크무늬 일기장을 받았다. 안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키티(Kitty)’라는 이름을 붙였고, “생일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적었다. 일기는 일기 이상이었다. 열세 살 소녀는 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일기는 자연스레 안네의 친구가 됐다.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소녀의 모습처럼, 안네는 키티에게 시시콜콜 털어 놓았다. 일기는 그렇게 가혹하게 바뀐 주변 환경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소녀의 절친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제도 됐다. 그녀는 외로웠다. 친구도 없었다. 아니, 친구를 둘 수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일기에 그것을 토로한다.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를 말할 차례인데,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내겐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할게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외롭고 또 외로웠다. 몸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마음마저 닫아야했던 억압적인 상황. 세상이 좁다며 발랄하게 뛰어다닐 열세 살 소녀에게, 현실은 감옥이었다. 독일군을 피해자니 어쩔 수 없었다. 은신처가 세상의 전부였던 소녀.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친구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법을 차츰 터득한다.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완성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www.annefrank.org)에는 각국에서 번역된 《안네의 일기》가 전시돼 있다.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는다. 그럼에도 개인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네의 일기》에는 시대 상황이나 나치의 만행 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십대 소녀의 눈으로 본 세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얀 백지는 안네의 마음이 쓴 필체로 채워졌고, 거기엔 안네가 또박또박 새겨졌다.


소녀는 글의 힘, 종이의 힘, 일기의 힘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안네의 일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딥니다.” 그녀의 생은 너무도 일찍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일기를 쓴) 종이는 남았다. 잘 참고 견뎠다. 오래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남았다. 십대 소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른들이 만든 참혹한 세상에서 일기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던 소녀는 일찍 어른이 됐던 것일까.


일기를 통해 성숙해진 소녀


실은 안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란 그녀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자, 유대인에 대한 온갖 박해와 차별이 이뤄졌다.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1938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거주의 자유를 박탈당한데 항의하던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의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했다. 이를 구실로,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집단 테러를 가했고, 학살을 본격화했다.


유대인이었던 안네의 집안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안네의 아버지는 미국 망명에 실패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그녀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1942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유대인을 색출해 수용소로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안네 가족(과 다른 가족들)은 옴짝달싹도 못한 채 네덜란드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 숨죽이며 살았다. 건물 내 비밀공간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오로지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소수의 지인만이 유일한 소통 통로였다.


 안네 프랑크 우표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은 살고야 만다.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먹을 것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부족했고, 한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갈등도 많았다. 어머니나 언니와 말다툼을 했다. 불만도 쌓였다.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도 있었다. 오랜 감금에 따른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따랐다. 반면 작고 소박한 행복이라고 그들을 지나치진 않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도 일기장 곳곳에 자리한다.


안네는 일기를 통해 성장했다. 또한 일기를 통해 갑갑하고 꽉 막힌 생활에서 탈주했다. 상상력이 나래를 폈고,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기다렸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녀의 키는 계속 자랐고, 그녀의 글도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그 일기, 1944년 8월 1일로 끝이 난다. 8월 4일 밤, 나치의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급습, 전원이 체포됐고, 안네 가족은 수용소로 이송했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한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45년 3월 12일, 열여섯의 나이, 안네는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죽었다. 나치로부터 해방되기 불과 2달 전이었다.


은신처에서 함께 지내면서 사랑을 느꼈던 페터도 사라졌다. 안네의 아버지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게슈타포가 휩쓴 은신처에 덩그러니 남겨진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던, 은신생활을 도와준 미프 기스에게 일기장을 건네받았다.(미프는 지난 2010년 1월, 100세로 타계했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안네의 일기장을 출간했다. 우리가 아는 《안네의 일기》는 그렇게 빛을 보게 됐다. 물론 첫 출판 당시 아버지는 안네의 성적 호기심과 부모와 다른 가족을 비난한 부분을 삭제했었다. 무삭제판은 안네 사망 50주기를 맞아 출판됐다.


일기를 쓰면서 여성은 강해진다!


안네의 은신생활을 견디게 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일기쓰기’를 통해, 자유를 박탈당한 엄혹한 시절을 버텼다. 다른 것을 하기도 힘든 환경이었지만, 안네의 글쓰기는 어머니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글 쓰고 있는 안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프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보다시피, 나의 딸은 작가랍니다.”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결과적으로 과소평가됐다. 작가 앞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생략된 셈이다. 《안네의 일기》는 약 60개 언어로 번역돼, 약 3200만 권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 소녀의 기록이 후세에게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과감 없이 보여줬다. 안네가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공기를 그만큼 정교하게 포착하진 못했을 것이다.


한비야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안네 프랑크가 있었다. 일기를 쓰면서 강해지고 세상을 좀 더 품게 된 여성들을 우리는 이제 안다. 삶이 힘겹고, 위로 받고 싶다면,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내 작고 사소한 글쓰기가 세상을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조 : 《안네의 일기》, 위키백과

 

[서울여성가족재단 기고]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7.02 01:01 메종드 쭌/무비일락

어린 날, 친구 놀려 먹을 때 쓰던 단어들. 바보, 똥개, 축구, 천치, 온달 등 많았다. 그 가운데 똥개. 개 중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고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씹혔던 존재였다. 똥을 핥아먹는 개였고, 이른바 족보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밥 구걸하는 개, 똥개였다. 


뭐 어설프지만, 좀 어린 시절, 진짜 양아치를 꿈꿨다. 건들건들, 유유자적, 허허실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닐 수 있는.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지닌 'A급' 양아치. 그러나 그리 되지 못할 팔자였나 보다. 어설픈 B급 양아치도 되지 못했다. A급 양아치 선망은 여전하지만, 나는 그냥 대세를 따르는 순응자로 살아가고 있다. 간혹 궁금하다. 내가 설계했던 그 양아치,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의 도플갱어?   


똥개, 양아치. 세상은 그들을 루저 혹은 떨거지라고도 부를 것이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의 부족에 따른 잉여인간. 이른바 잘 나가지도 못하고 학벌, 돈, 빽 어느 하나 기댈 곳도 없다. 세상이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 한 번 제대로 던져줄 리도 무방하다. 소외되고 배제된 아웃사이더에게 세상이 왜 눈길을 던지겠나.


꼰대들이 하는 말이래야, 고작 이런 말일 것이다. "너 그 따위로 살래?" 판에 박힌 으름장. 아니면 "인생은 여차저차하니까 이래저래 살아라" 고리타분한 일장 훈시.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처럼 개무시하는 세상의 작동원리가 있다. 화폐가 심화시킨 경쟁구도에서 낙오한 자들에게 이곳은 동정없는 세상. 그러고선, 이런 말도 내뱉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위로하는 척, 멘토링 하는 척, 자신들이 펼쳐놓은 그물에 포획된 먹잇감을 살살 달랜다. 그들이 날뛰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그물망이 찢어지거나 흠집이 생기거든.  


<똥개>. 그 잘난 분들이 세팅해 놓은 세계 밖에서 부유하는 평범한 청춘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만의 소박한 꿈을 품고 사는 이른바 열외자의 삶.

 

그 중에서도 "아부지는 경찰, 내는 양아치"라고 읊조리는 청춘, 차철민(정우성)이 있다. 정우성이 똥개? 양아치?

 

사실,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다.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이자 청춘의 아이콘을 '똥개'이며 '양아치'로 전락(?)시키다니! 곽경택 감독, 큰 맘 먹었구나.  

 

정우성은 똥개다! 


<똥개>의 콘셉트, 명확하다. 정우성, 망가뜨리기. 청춘, 반항, 자유의 아이콘인 그를, 여전히 꽃미남이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같은 그를, 하릴없는 양아치 '똥개'로 바꿔치기 하기. 정우성은 망가지기로 작정했고, 곽경택 감독은 그를 망가뜨리기로 합의했다.


망가지기로 작정한 정우성, 그때까지 쌓아온 이미지에 한 방 날린다. 생각해보라. "제 친구입니다. 성공보다 중요한 건 행복이라나요." 광고에서 그의 친구는 이런 멋진 멘트 날려주셨다. 근사한 식당, 폼 나는 명품 정장을 입고 아름다운 고소영을 향해 미소를 띄우며 카드에 사인을 하던 그다. 멋있다. 아름답다. 그것을 코스프레처럼 입고 있던 그였다.

 

<똥개>의 그는 다르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에, 걸쭉한 사투리를 구사한다. 삐딱하고 구부정한 어깨로 어기적 어기적 걷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긴장 풀린 자세로 일관한다. 코에서 액체까지 질질 흘린다. 정우성에 대한 환상을 깨기로 작정했다.


정우성, 말한다. 이미지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똥개>를 선택했다. 노력한 흔적, 엿보인다. '똥개' 같기도 하다. 느릿느릿, 뮝기적뮝기적, 어리버리, 어영부영. 여느 길가에서 볼 수 있는 똥개다. 방바닥 긁으며 TV를 보며 소일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놓고 아버지와 싸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토라진다. 싸움을 걸어오는 동네 양아치들에게 "겉저리에 밥 좀 묵고하자. 어차피 싸움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 아이가"라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무심한 듯 시크함.

 

친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가 속한 MJK(밀양주니어클럽, 당연 'K'라는 철자법, 오류다!)의 멤버들, 별 다를 바 없다. 엉뚱한 꿈 하나씩 간직한 시골의 똥개모임. 그들 역시 소박한 언저리의 삶이다. 도시의 입장에선 루저들이고, 양아치에 똥개다. 감독이 너무 기름을 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면도 있다.  

 


차철민에게 붙여진 똥개라는 별명, 사연이 있다. 철민을 낳고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 죽고 나자, 이집저집 밥동냥하면서 키워진 데서 유래했다. 아버지가 똥개를 키우는 방식도 도시의 것과 다르다. 사람을 죽고 살리는 문제나 감옥에 들어갈 일이 아니라면, 똥개가 하는 대로 내비둔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나, 똥개가 친 사고를 뒷수습하고, 부자간에 계란 프라이를 놓고 아웅다웅하면서도 속 깊은 정을 품고 있다. 하나 같이 선한 사람들. <똥개>의 약점이다. 

 

정우성 또한 약점이다. 똥개 코스프레에도 불구, 그만의 이미지와 모습, 살아 있다.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 멋진 놈은 아무리 코스프레를 해도 멋지다. 기침, 가난, 사랑만 숨길 수 없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까불지 마라, 확 물어 삔다, 콱 쌔려뿔라.


어쨌든 그렇게 띄엄띄엄한 똥개도 눈이 뒤집힐 때가 있다. 허허실실 똥개 같아도 그만의 기준이 있다. 무기력하게 흐느적 거리는 듯해도, 철민은 정의파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없는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고, 있는 놈은 밖에서 떵떵거리는 현실, 외면하지 않는다. 잔머리 굴리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다. 아니다 싶으면 달려드는. 철민 역시 그렇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 그것이 똥개의 진수 아니던가.

 

영화는 한결 같다. 조미료나 향신료, 뿌리지 않는다. 싸움도 정직하다. 생생하다. 속된 말로 개싸움. 오로지 상대방의 피를 봐야겠다는 정신 하나로 똘똘 뭉친 쌈마이들의 맞장뜨기. 살과 살이 맞부딪힌다. 똥개가 감옥에서 펼치는 결투신,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똥개>는 어느 소도시의 일상을 과장되지 않게, 소박하게 담았다. 어깨에 힘을 뺀 티도 난다. 그런 한편으로 너무 정직하다고나 할까. 경박한 오버 액션과 말 장난으로 치장한 허접한 코미디보다는 낫지만, 지나치게 담백하다. 

 

다만, 잉여에게 눈길을 준 것에 나는 더 집중한다. 우리는 늘 크고 빛나는 반짝이는 성공에만 집중하고 관심을 주지 않았던가. 세상엔 빛나지 못하는 언저리 청춘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까지 빛나지 않을 것이라 보장도 없다. <똥개>는 잉여를 구박하고 내친 어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어른들, 치졸하다. 그들은 여전히 언저리 청춘에게 열패감과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고부가가치 인간형 양산에만 매몰돼 있고, 그들만 바라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인간형 양산에만 골몰한다. 이명박은 그들의 아바타였고, 박근혜라는 또 다른 아바타를 내세우려고 한다.

 

그들에게 똥개를 풀어야 한다. 한 번 물어서 절대 놓지 않게끔. 다 물어라, 똥개야. 그래, 나도 양아치 똥개가 되고 싶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6.29 01:12 메종드 쭌/무비일락

Bad Boys. 직역하면, 나쁜 녀석들.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을 응시하기도 전에 이미 안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되레 나쁜 적을 검거하고 섬멸하는 '착한' 우리(?) 편이다. 그들은 정의(正義)와 선(善)의 편에 있(다고 주입 받)는 경찰이며, 그들의 종횡무진은 악(惡)을 없애는 정당한 작업이자 활동이다. 그들은 물론, 현실에서 늘 만날 수 있는 비리(非理)와 결탁한 무적 경찰도 아니다. 그냥 '우리' 편이다.


그렇다면, 왜 '나쁜(bad)'이란 수식어를 선사했지? 심각하게 생각할 이윤 없겠다. 그저 웃고 즐기자는 레토릭이다. 일종의 반어법? 표현하려는 내용과 반대되는 말을 통해 어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 아마도 이런 표현 효과를 통해 그들이 '좋은 녀석들(Good Boys)'임을 주입시키고자 한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좋은 녀석들이 맞을까? 


미안하다. 솔직히 이런 고민, 불필요하다. <나쁜 녀석들2>는 여름 무더위를 날려 보내기 위한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일 뿐이다. 때리고 부수고 깃발을 높이 들어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악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아드레날린 지수를 치솟게 하는 것이다. 별책부록으로, 행여 비위에 맞지 않아 성질이 나면 '우싸~'라고 외치면서 '성질 죽이는 법'도 들어가있다. 이래저래, 여름 영화, 맞다.

 

You Guys, Back... Man~


그들을 만나는 건, 여름이 제격이다. 1편 <나쁜 녀석들>의 성공이후 8년, 오래 걸리긴 했다. 성공한 블록버스터 치고는 말이다. 2편이 나오기 8년 전, 빛나는 재담과 익살을 통해 쾌감을 선사해주던 두 악동들. 돌아온 조건은 하나다. '더 커져라, 세져라, 빨라져라'는 주문을 외치며 속편의 룰에 충실할 것.

 


마커스(마틴 로렌스)와 마이크(윌 스미스), 재미난 콤비다. 두 악동, 2편의 출발선상부터 화끈하다. 백호주의에 인종차별을 일삼는 KKK단의 집회에 깜짝 등장한다. 극의 긴장감 단숨에 유발시킨다. 총알, 무차별로 갈겨댄다. 관객을 향한 선전포고다. 보고 화끈하게 즐기시라. 앞으로 나올 영화의 모든 것을 그렇게 규정짓는다.


도로 추격씬이 빠질 수 없다. 전반부 관객의 시각을 압도한다. 무분별한 차량 파괴, 짜릿한 속도감 등을 통해 관객의 재미와 긴장감을 보장한다. 60대의 차량, 150여명의 경찰을 투입했다는 이 추격씬, 페라리의 위용은 유난히 돋보인다(PPL로 추정되지만). 끝내준다. 스크린이 터져나갈 것 같다. 1편보다 더 커지고 세진 증거다.  


더불어 살상과 폭력의 강도에서도 전편을 압도한다. 고어 장면도 태연하게 선보인다. 시체는 거리를 나뒹굴고, 머리 뚜껑이 툭하니 열린다. 주검의 배를 갈라 아무렇지 않게 심장을 들어내기도 한다. 비위 약한 사람, 토 나온다. 너무 나간다. 속편의 중압감에 눌렸다는 증거다.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유쾌하다면, 두 악동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입담 덕분이다. 물에 빠져 익사해도 주둥이는 죽지 않고 둥둥 떠다닐 것 같은 현란한 입담. 두 악동, 제리 브룩하이머(제작자)와 마이클 베이(감독)의 자장 안에서 빛을 발한다. 콤비 플레이의 정수다. 


마이크와 마커스. 흑인이라는 인종적 동질감 외에 다른 요소에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과잉․과격(마이크)과 온순․소심(마커스)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펼쳐진다. 그건 필연적으로 한쪽의 이탈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그들을 묶는 끈이 단단하다. 'Bad Boys For Life'라는 슬로건이 이를 대변한다. 전자양판점에서의 게이 소동이나 마커스의 동생, 시드를 둘러싼 신경전은 둘 사이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삐걱거리면서도 의리, 충만하다. 때론 달라서 더 좋은 사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경멸 등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도 존재하지만 블록버스터 유머로 넘길 수는 있다. 물론 그것,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게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추정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들은 뭉쳤고 콤비 플레이는 잘 빠진 상품이다. 그들의 화학 작용, '1+1=2'라는 수학적 공식을 넘어선다. 신나고 박진감 넘친다. 아드레날린 팍팍. 함께 붙여 놓으니, 그야말로 두려울 게 없다. 시너지 확실하다. 다만 그들의 찰떡궁합, 과잉 화학작용도 야기한다. 쿠바 반격 작전이 그렇다. 오버였다. 미국의 적성국 쿠바에 대한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방법도 밉상이다. 밉다면 쿠바 정부가 미워야지, 쿠바 인민, 그것도 판자촌에 사는 인민을 무시하는 건, 졸렬하다. 그 잔혹무도함, 불편하다. 그것만 놓고 보면, 그들은 진짜 나쁜 녀석들이다. 똥오줌 구별 못하는 무지의 처사이자 소양 없는 짓거리다. 

 

그래서, 짧지만 불편한 어떤 여운!  


또 있다. 이념에 의한 냉전시대가 일단락된 이후 미국은 '마약'도 적으로 상정해 놓은 것 같다. 허나 그것이 지독히 편향적인 데다 왜곡까지 가세한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마약에 대한 응징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정작 그들의 의도는 따로 있다. 그걸 교묘히 감췄다. 불편부당하다.


<나쁜 녀석들2> , 1편과 마찬가지로, 마약 카르텔의 소탕 작전에 이야기의 핵심을 둔다. '마약 제조지'라는 설명까지 친절히 곁들여 쿠바의 판자촌을 밀어버리는 무대뽀 과격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시감을 느낀다.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땡깡으로 이라크를 밀어 버렸던 미국의 모습. 바로 오버랩 된다. 쿠바가 왜 그들의 파괴행각에 희생양이 돼야 하는지, 타당성 떨어진다. 적성국? 이념 대립?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더 이상 무기를 투하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이념차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그냥 미국에게 개기는 모든 녀석들이 미운 거다. 졸렬한 미국이다. 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그런 미국의 졸렬함이 DNA처럼 박혀 있다.  

 


또 하나, 마커스가 마약을 우연찮게 흡인하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 (마약이라면 극도로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 읽지 마시라. 심경이 극도로 불편해 질 수 있다.) 개인의 자유는 그 행위가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자유주의에 근거했을 때, 마약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는 뭔가 구리다. 물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마약이 늘 범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 가정 파괴니 범죄 유도니, 온갖 해악의 근원인 것처럼 호도하는 건 뭔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물론, 중독의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만, 마약류 모두가 중독성을 지닌 건 아니다. 마약이라고 규정된 것을 해서 행여 자해를 하더라도 그것이 범죄로 규정돼야 하는가의 문제. 도덕적인 비난은 가능하겠다. 그러나 법적인 제재는 우습지 않나? 순수한 개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장전 중 하나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 개인에게 실존의 책임을 안겨준 의미가 있었다.


마약을 굳이 옹호하기 위한 발언은 아니다만, 마약이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 당하는 건 불편하다. 가령, 1960년대 문화적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도어즈, 특히 짐 모리슨. 그(들)에게 문화적 자유주의의 질료는 마약이었다. 고종석 선생에 의하면, 이들의 문화적 자유주의는 기성체제의 갑각을 깨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로 뻗어나갈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였으며, 앙드레 지드의 문학적 선양을 받았던 미쇼의 경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신의 한 극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마약복용을 했다. 마약복용, 반드시 비난만 받아야 하는 걸까?


아, 오해는 마라. 예술성 발현을 위해 마약 복용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니다. 면죄부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영역 안에서 마약소지 혹은 복용이 범죄의 요소가 되는 게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함께 고민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이다. 그래서 이땅에서 대마초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대마초가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대마초, 무조건 마약이다. 왜 마약인지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펴도, 지배층은 막무가내다. 무조건 마약!

 

대마초 경험을 한 연예인들도 왠지 불쌍하면서, 한 번쯤 제대로 한 판 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유 영혼을 지닌 예술적 연예인들이 끼를 부려보는 건 어떤가. 대마초를 했다가 발각될 때마다 그들은 죽을 죄를 지은 듯 스스로 범죄자임을 실토한다. 미안하다고 별 생각 없이 사과를 한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유'를 떠올린다.

 

아울러, 그것이 진짜 속마음일까, 가끔 궁금하다. 그러다 죗값(?)을 치르고 복귀할 때마다 왈가왈부 말도 많다. 마약쟁이라는 주홍글씨까지 꼼꼼하게 새겨서 주신다. 과연 우리는 자유를 얼마나 알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무책임한 발언일 수 있다. 연예인들, 여전히 권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밥줄 끊기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용히 수그리고 들어가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누구를 위한 것일까. 대중을 위한다면 그러진 않을 텐데. 결국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 직조해 놓은 시스템은 허투루 된 것이 아닐세. 허허.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6.24 23:11 메종드 쭌/무비일락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의 버스. 일부러 볼 생각은 아니었다. 바깥을 보고자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문자가 들어왔다. 이별을 통보한다.  

 

'오빠랑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연락하지 마.'

 

힐긋. 옆에 앉은 여자의 표정을 본다. 무덤덤한 듯 짜증이 섞인 얼굴. 물론, 그 뒤에 일렁이는 감정은 또 다른 물결이리라. 헤어짐 앞에 무덤덤과 짜증은 제3자의 남의 속도 모르는 지껄임일 테니. 오빠라는 남자, 전화를 시도했으나 여자는 받지 않더니, 전원을 꺼버렸다. 본의 아니게, 헤어지는 연인들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

 

그냥 궁금했다. 다시 힐긋.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쓸쓸해 보였다. 어떤 생각들이 여자를 헤집고 있을까. 알 수 없었지만, 사랑이 깨지는 세계는 슬픈 표정일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트루먼 카포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그들에겐, '멈춤'이 필요하나, 세상은 무심한 듯 시크하다. 젠장, 내가 다 슬프네.   

 

그 상황이 참으로 묘했던 것은, 애틋하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만나고 직후였기 때문이다.

<스롤란 마이러브>. 캄보디아에서 펼쳐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어떤 실화였기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냐!

  

 

남자는 대학 졸업 후 캄보디아로 배낭여행을 온 독일 남자.

여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에이즈에 걸린 캄보디아 여자.

장난 같이 시작한 사랑, 그러나 남자,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캄보디아판 <너는 내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허나 만듦새, 구성 등 영화는 허술하다. 

그토록 애절한 사랑이건만, 영화는 극적인 소재의 무게감에 턱도 없이 모자란다.

어설프게 소재를 휘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극중에선 벤이 스레이케오와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결연함의 계기나 이유가 크게 와닿진 않는다. 

왜 그가 그토록 매달리는지, 왜 저토록 백방으로 애를 쓰는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충실하게 그려주지 못했다. 

오로지 신파와 감정적 접촉으로 뒤범벅한다.   

 

그럼에도 나는 묵묵히 그들을 지켜봤다. 

벤(데이빗 크로스)과 스레이케오(아핀야 사쿨자로엔숙)의 사랑을 흡입했다.

첫 눈에 빠진 사랑을 믿으니까. 그것이 때론 생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음을 아니까.

그녀가 생계를 위해 몸을 판다는 것을 알아도,

그녀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들어도,

벤이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음을 바라본다. 

살다보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거나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는, 그래야만 하는 사건이 온다. 

물론 벤도 짜증도 내고, 슬픔을 억누르기도 한다. 사람이니까.

그래서 지켜봤고, 끝까지 그들을 응원했다. 그것을 사랑으로 봐야할지 헷갈렸지만.

 

스레이케오를 연기한 아핀야는 태국의 유명 배우라는데,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벤의 데이빗은 <더 리더>의 바로 그 어린 남자다. 어느덧 훌쩍 큰 청년이 됐다.

 

극중 성격도, 문화도, 국적도, 그 모든 것이 다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을 하고, 헤어짐을 거부하더라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확인했던 버스 안. 문자(디지털) 통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헤어짐의 방식. 그렇게 당해 본 나는,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안다.

 

문자 통보를 당한 그 남자. 여자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별의 방식 때문에, 나는 그 남자가 아팠다.

영화는 잠시 아름다웠지만, 세상은 잔인하구나.

 

아, 그나저나 나는 캄보디아에 갔을 때,

스레이케오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왜 만나지 못했을까. ㅠㅠ

팔자로다.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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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길지 않았지만, 여름비가 왔어.

 

좋더라.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호우시절(豪雨時節).

빗소리, 어쩌면 빗소리를 질료 삼아 빚어낸 것 같은 니 하이톤의 목소리, 그 목소리.

니 생각이 잠깐 났어. 그래, 우린 여름에 만났는데, 여름비를 함께 맞이한 적이 없더라.


오래된, 너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 함께 늙어가는 아해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역시 니 이름이 호명되고, 이 늙어가는 아해들은 볼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로 웃음을 터트린다.

그만큼 우린, 즐거웠고 행복했던 거지. 호우시절이었을 거야.

날짜를 봤어. 아, 그렇구나. 6월 들어 생각이 들긴 했는데, 이젠 코앞이네. 

 

사랑이다, 아니다. 아해들은 그때 그 시절, 각자의 추억을 놓고 그렇게 주판알을 튕구더라.

하하호호. 즐거웠어. 너도 꼭 함께인 것 같은 시간. 상호, 진희, 종민이도 그렇게 즐거운 시간.

 

그래, 모든 게 여름비 때문이었을 거야.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

 

여름이야, 여름.

네 하이톤으로 여름이에게 건네는 인사가 듣고 싶네.
네가 알려준 거야. 그렇게 인사하는 것. 나 여름이한테 지난주 인사했거든. 안녕, 나의 여름. :)

 

여름비가 좀 더 내려줬으면 좋겠어. 좋다, 여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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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7 23:59 메종드 쭌

어제, 문경새재에서 '봄날은 갔'고. 굿바이, 봄.



오늘, 창원 대신 서울에서 아쉬움 묻은 무더위 속에서, 여름이 오는 소리.


에피톤 프로젝트가 내 무더위를 달래주다. 



내게 다시 다가온 여름밤의 아스라한 선율.


좋다! 계절이 스쳐가도, 노래는 스쳐가질 않아.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호우시(好雨時節). 좋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를 기다리는 마음.


때를 알고 울려퍼지는 좋은 선율, 에피톤 프로젝트.

그렇게, 호가시절(好歌時節).


그렇게 에피톤 프로젝트가 노래를 들고 찾아온 여름.

나의 2012년 여름의 시작. 굿하이, 여름. :)


곧, 이 여름 안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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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촌부라고 생각했었다. 미셸 윌리엄스. 그녀를 처음 인식했을 때 그랬다. <브로크백 마운틴>. 동성애자(게이)임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에니스(故 히스 레저)의 슬픔, 그것이 이 영화의 정조를 지배했었다. 

 

헌데 그런 에니스를 지아비로 삼고 살아야했던 엘마(미셸 윌리엄스). 동성애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와 공간. 그속에서 그저 보수성을 머금고 살아야 했던 엘마. 가슴에 돋는 슬픔을 품은 그녀의 이야기, 나는 궁금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뒤로 밀려야 했던 두 여자, 루린(앤 헤서웨이)과 엘마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히스 레저의 죽음이 있었고,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와 결혼하질 않아서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헤어진 히스 레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어머니. 그런 삶의 비극 역시 품은 여성으로서 미셸 윌리엄스. 실은 예쁘거나 아름다운 배우는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엘마의 배역 정도로 스크린에 존재할 줄 알았다.  

 

 

그러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깜딱이야. 알마가 마릴린 먼로라고? 뭐야, 미친 거 아냐? 말도 안돼. 그러나, 내가 틀.렸.다. 그것도, 완.벽.하.게. 마릴린 먼로와 다르지만, 그녀는 마릴린 먼로였다. 마릴린 먼로를 우리가 몰랐던 만큼, 미셸 윌리엄스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던 그녀(마릴린)의 로맨스'를 살짝 드러낸 그녀(미셸)는 결과적으로 '소수만 알았던 그녀의 진면목'을 드러낸 셈이다. CNN은 그녀의 연기에 대해 이리 표현했다. “미셸 윌리엄스는 사라지고 마릴린 먼로만 남았다.”

 

미셸 윌리엄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어야 했다. 

마릴린 먼로는 물론, 미셸 윌리엄스를 알게 해 준 이 영화. 괜찮다아~

 

그리고,  우리가 오해했던 마릴린 먼로. 올해 50주기. 

살아 있었다면, 6월1일은 86세 생일이다. 마릴린,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 선물로, 그녀에 대한 오해 한꺼풀, 벗긴다.

내가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뷰즈> 기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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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먼로 씽킹(Monroe Thinking)!

[People View] 마릴린 먼로 50주기,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그녀가 진짜 예쁜 이유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배우,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던 용기 있는 배우,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배우,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 속에 투사하며 가부장적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존을 시도했던 파워 페미니스트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성, 연기를 통한 자아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 시인 같은 지성적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하게 자기 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인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성, 그러면서도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을 직면했던 마릴린 먼로!”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이 발언, 도발적(?)이다. ‘영원한 섹스 심벌’이자 ‘백치미의 대명사’인 마릴린 먼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뒤집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마릴린 먼로’라는 설명이 없다면, 저 발언에서 먼로를 끄집어내기란 쉽지 않다. 유지나에 의하면, 먼로는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용기와 지성을 갖춘 배우였다.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먼로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섹시와 관능으로만 덧씌워진 그녀의 이미지, 정당한 것일까? 마릴린 먼로가 궁금하다!


2012년, 마릴린 먼로 50주기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6.1~1962.8.5).

 

2012년, 사망 50주기를 맞았다. 죽은 먼로를 향한 다양한 이벤트, 당연한 일이다.

 

칸영화제는 먼로를 ‘2012년의 아이콘’으로 선정, 그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공개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협회 매그넘 소속 작가들이 찍은 미공개 사진들이 수록된 ‘마릴린 바이 매그넘’도 출간된다.

 

앞서, 먼로의 전성기 중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도 만들어졌다. 먼로의 새로운 모습이 대중들에게 속속 공개되고 있다.

 

헌데 이런 움직임, 과연 먼로에 대한 전형적이고 박제된 이미지를 깰 수 있을까. 섹시하다, 관능적이다, 와 같은 수식어로부터 먼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글쎄, 아닐 것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먼로의 지성미는 어색하다. 먼로에 대한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먼로의 농염한 사진으로부터 지성과 사회적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긴 싫다. 먼로의 지성, 한마디로 배신이다. 먼로가 섹시할 때에라야 대중은 반응하고, 소비할 뿐이다.   


먼로가 탄생시킨 고유명사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먼로 효과(Monroe Effect). 그녀가 주연한 <7년만의 외출>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고층빌딩 아래 발생하는 난기류나 지하철 환기통에서 발행하는 바람 때문에 스커트가 갑자기 뒤집히는 경우를 일컫는다.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걸음걸이에는 먼로 워크(Monroe Walk)라고 이름을 붙였다.

 

먼로 룩(Monroe-Look)은 허리를 졸라매고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글래머룩을 뜻한다.

 

먼로 메이크업(Monroe Make-up)도 있다. 하얀 피부, 입가의 점, 새빨간 립스틱으로 메이크업할 경우, 이렇게 붙이는데 당시 여성들은 일부러 입가에 점을 찍기도 했다.

 

먼로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더욱 각인시킨 명사들이지만, 한 결 같이 진짜 먼로(의 삶)는 없다. 먼로의 (영화 속) 이미지에만 기댔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먼로의 불행이었다. 지독하게 불행했던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지독하게 애를 썼던 한 여성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그녀의 육체에만 관심을 가졌다. 조울증에 시달리면서 36세에 요절한 그녀. 의혹은 여전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의해 타살당한 것 아닐까. ‘섹스 심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다. <라이프>紙와 했던 마지막 인터뷰에 실렸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섹스 심벌이 사물화 될 때 그렇다. 나는 물건 취급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든 스튜디어의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살고 있다.”


다시 지켜보자, 먼로의 삶

 


먼로가 가장 좋아한 미국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그녀처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이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살지 않았고,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였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먼로는 양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고아원을 전전했다. 그녀는 철저히 가난했고,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16세, 첫 결혼을 했고, 먹고 살기 위해 방위산업체에서 위장도색 페인트칠을 했다. 우연하게 사진 모델 일을 하게 됐고, 단역배우로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일과 꿈을 하찮게 여겼다. 결혼한 지 4년,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후 먼로는 단역배우를 거쳐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마릴린 먼로는 이 과정에서 얻은 이름이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로 섹시스타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7년만의 외출>(1955), <버스 정류장>(1956), <왕자와 쇼걸>(1957), <뜨거운 것이 좋아>(1959), <부적합자>(1961) 등에 출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연기자로서의 그녀는 결코 다른 배우에 뒤지지 않았다. 섹시와 관능의 이미지에 매몰돼 연기력이 저평가 받았을 뿐이다. 섹스 심벌은 다분히, 남성판타지가 만든 산물이었다.

 


아울러 먼로를 ‘하찮게 여기게’ 만든, 사생활에 대한 편견도 따랐다. 그녀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극작가 아서 밀러 등과 결혼과 이혼을 했고, 아인슈타인, 프랭크 시네트라, 이브 몽탕, 존 F 케네디 등과 염문설을 뿌렸다. 이런 것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바람둥이 이미지를 그녀에게 각인했다. 그것은 동서고금 대중들의 악취미다. 셀러브리티의 연애담을 멋대로 각색한다. 그리고 주홍글씨를 새긴다.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에 의하면, 먼로는 진정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은 여인이었다. 조 디마지오와 혼인했을 때, 남편 가족의 종교인 가톨릭을 믿으려 애썼고, 아서 밀러와 혼인하고선 그를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그녀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남자를 사랑했다.

 

성격차이에 의해 헤어졌지만, 디마지오와 다시 재결합을 추진했다. 재결합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사랑은 더욱 아파해야했지만. 실제로 디마지오는 20여 년 이상 매주 그녀의 무덤을 찾아 장미꽃을 바쳤다. 1999년, 그가 숨을 거두기 전 했던 말에서 우린 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구나.”

 


 

마릴린 먼로, 자신의 가난만을 극복하려고 애쓰진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언론인이자 작가, 링컨 스테펀스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녀 지인 중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녀 또한 FBI에 의해 그렇게 분류돼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한 이의 편에 서서 모순된 사회구조에 맞서고자 했다. 가난이 개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금발의 백치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지 50년이 흘렀지만, 많은 우리는 먼로를 섹스 심벌과 백치미에 가둔 채 오해(!)하고 있다. 금발의 반쯤 풀린 눈과 도발적인 입술로 교태를 부리는 몸짓, 풍만한 가슴과 큼지막한 엉덩이로 발산하는 관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여인. 《마릴린 먼로: : The Secret Life》의 저자, J.랜디 타라보렐리는 말한다. “마릴린 먼로는 단순한 유명 영화배우, 훨씬 그 이상이다. 그녀는 연약한 정신이자 관대한 영혼 그리고 그녀 자신의 마음과 황폐한 싸움을 한 용감한 투사였다.”

 

모순과 비겁, 정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백치미라며 우습게 여겼던 마릴린 먼로만큼의 사회 인식을 품고 있을까? 먼로의 50주기.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다가올 먼로의 모습을 지켜보자. 그 속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찾자.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함께 지켜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 먼로의 또 다른 고유명사, 먼로 씽킹(Monroe Thinking).   

 


참고자료 : 위키백과, <네이버 [인물 세계사] :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 : The Secret Life》(J. 랜디 타라보렐리 지음/성수아 옮김|체온365 펴냄),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칼 롤리슨 지음/이지선 옮김|예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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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0 14:46 메종드 쭌/무비일락

최근 '사령카페'라는 기이한 모임이 입길에 올랐다. 한 젊은이의 죽음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사령(死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사령카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낼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이들은 사악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사령을 불러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칠게 말해 종교적 의식의 일환인데, 물론 그것을 종교라고 말할 순 없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가 뒤를 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소리, 한 교회 목사가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이건 해프닝 이상이다. 사람들의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사기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지옥불 같은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의 약함을 악용한 사기극이다.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년의 스웨덴 영화가 그런 즈음 개봉한 것은 우연일 것이다. 종교(기독교)가 득세한 시절, 중세의 십자군 기사가 저승사자와 맞닥트린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죽음의 사자"라고 답한다. 그러고선 별다른 놀라움도 없이, 기사와 죽음의 사자는 체스를 둔다. 이기면 24시간 죽음을 유예한다는 조건을 걸고. 

 

<제7의 봉인>은 체스의 승자인 기사가 24시간 세상을 돌아보는 것으로 풀어나간다. 신, 종교, 죽음, 구원 등이 그의 행보에 따라붙는다. 중세를 빗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의 원초적 질문을 던지는 구조다.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만드는 구조.

 

이 영화의 미덕은 그것이다. 영화가 사유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영화를 얕본 지식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 잉마르 베리만이라는 거장이 있었다. 지난 2007년 7월30일 세상을 떠난 스웨덴의 영화철학자.

 

그도 신의 존재와 종교적 구원이 궁금했나 보다. 저승사자와 승산 없는 내기를 펼치는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의 존재는 그것을 대변한다. 신의 부르심이라는 명분을 내 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페스트다. 그런 배경부터 베리만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내기에서 이겨 24시간 세상을 돌아보지만, 그가 원하는 구원은 보이질 않는다.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은 별로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교회를 찾아가도 그렇고, 마녀사냥을 당하는 소녀를 지키봐도 그렇다. 어딜가도 죽음만 횡행한다. 신(종교)가 말한 구원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광대 부부를 만나 평화를 느끼고, 블로크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동행한다. 영화가 흑백톤을 유지하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다. 흑백이라는 형식은 사유를 또 다른 공간으로 이끈다. 그러나 마냥 재밌지는 않다. 간간이 끼어드는 유머가 흑백톤의 무거움을 상쇄하지만, 기본적으로 최근의 영화적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런 형식이 버거울 수 있겠다. 

 

뭔가 삐가번쩍한 자극도 없다. 그저 사유를 끊임없이 요하는 스크린 앞에 자극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영화적 몰입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이 이 영화의 헛점은 결코 아니다. 죽음과 구원, 혹은 종교에 대한 이 영화의 화두는 극장 밖에서 충분히 이어질 테마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지만, 그 죽음마저도 악용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사령카페도 그렇고, 최진실도 그렇다.

 

 

여전히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 되고, 종결되지도 않겠지만, <제7의 봉인>은 신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사유를 요구한다. 기사의 여정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신도 지금의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이 원한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신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일까?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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