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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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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이고 쌓인 것. 그것도 차곡차곡. 오늘에서야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

 

나의 (영화) 여신으로 등극하시다. '여신남발자'라는 놀림에도 꿋꿋하게!

 

줄리아 로버츠는 이제 만신전에 올려놓고, 그 자리, 이젠 앤 해서웨이의 것이다.

 

 

<원 데이(One Day)>, 확인 사살을 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부터 내 마음을 두드리던 앤이었다.

 

앤, 나를 홀린 여신.

<원 데이>. 나를 울려버린 영화.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도록 하자.

 

 

오늘, 앤을 만나서 나는 행복하였도다. 오늘 이런저런 일들을 만나던 와중에도, 앤과 엠마가 내게로 왔다. 7월15일, 성 스위딘의 날. 그 어느해에는 그날, <원 데이>를 돌려볼 것 같다. 그들의 Kiss를 눈물겹게 바라볼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당신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이렇게,

당신 손을 잡고,

골목길을 달릴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있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해. 당신이어서.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3.01.22 17:21 메종드 쭌/무비일락

재난은 이야기를 낳는다. 재난의 불가피한 속성이다. 그 속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재난의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다. 지금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인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많은 재난영화가 스펙터클 보여주기에 급급한 이유다. 그리고 실재 사건마저도 그것을 재난처럼 다루는 미디어로 인해 우리는 마음을 뺏기고 있다. 제 마음, 없다. 오로지 수동성만 지배한다. "영화 같다"는 말로 우리는 이미 재난을 스펙터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 수동성이다.

 

<더 임파서블>은 그러나 다르다. 다른 재난영화가 보여주기에 급급해 하는 스펙터클을 무기로 내세우지 않는다. 쓰나미(tsunami)가 소재라고 해서 스펙터클의 전시와 억지 인간애를 끌어내는 구도이겠거니 했다. 뭐, 비슷하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르다. 쓰나미가 덮치지만 카메라는 쓰나미 아닌 쓰나미에 휩쓸린 인물의 육체적 상처에 집중한다. <해운대>에서 엄청난 파고를 과시하던 쓰나미의 것과 다른 태도다. <해운대>는 쓰나미를 스펙터클로만 소비했었다.

 

100년도 더 된 쓰나미는 이제 지진해일의 대명사가 됐다. 1896년 일본 산리쿠 연안, 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쓰나미는 국제 공용어가 됐다. 익숙하지 않던 그 단어, 널리 알려진 것은 2004년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였다. <더 임파서블>은 그때를 다시 호명한다. 실화에 기반해 이야기를 푼다. 다시 말하지만, 스펙터클은 뒷전이다. 쓰나미가 덮친 폐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래서 상처에서 피는 계속 나오고 찢긴 살점은 너덜거린다. 그럼에도 약은 물론 병원도 없다. 걷고 또 걷고 쓰나미가 또 닥칠까 나무에 기를 쓰고 올라야 한다. 인간은 이다지도 나약하다. 그것을 보는 것, 일종의 통각(痛覺)다. 내 것이 찢겨 떨어진 양, 피가 철철 흐르는 양, 아프고 아프다. 앞도 보이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야말로 멘붕(멘탈 붕괴). 객석에 앉아서 이런 대리체험을 하게 하다니. 이 영화의 배짱은 한편으로 놀랍다.

 

생각해보라. 여느 재난영화가 스펙터클을 소비하게 만드는 방식은 '쾌감'에서 비롯된다. 즉, 내가 저기(재난)에 없음으로 느끼는 안도감에 맞물려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으로 파국 직전 일거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게임은 끝. 관객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자본은 재난영화를 소비하는 패턴을 그렇게 길들였다. 재난영화가 블록버스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블록버스터가 재난영화를 선호하는 이유이다.  

 

<더 임파서블>을 그래서 선뜻 여느 재난영화와 같은 선상에 배열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재난영화라 함은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를 뜻한다. (물론 재난영화마다도 결이 조금씩 다르다.) 이 영화의 감독 후안 안토니요 바요나도 재난영화라기보다 재난을 당한 가족에 겪은 체험기라고 했단다.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공식은 없다. 재난에 저항하는 인류애와 위기 극복의 드라마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재난으로 모든 것이 망가지고 흩어진 페허 위에서 가족이 고난을 헤쳐 상봉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이 가족에게 오로지 집중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다. 가족의 성장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숱한 인간 군상의 등장으로 헤맬 이유도 없고, 복선이나 암시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성장한다. 정확하게는 등장인물들이. 내가 받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함께 돌봐주기, 서로 챙겨주기.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가족과 헤어진 아픔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전개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성장한다. 나는 그것을 '서로 돌봐주기의 신공' '상호 챙겨주기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큰 아들 루카스의 변신(?)이 가장 극적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 사치라고 여기던 루카스(톰 홀랜드)는, 고통과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엄마 마리아(나오미 왓츠)를 간병하던 중,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을 맛본다. 마리아의 권유였지만, 그는 그것에서 기쁨을 맛본다. 뭔가 가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마리아의 말이 허튼 말이 아님을 확인한다.   

 

 

마리아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되찾은 아빠 헨리(이완 맥그리거)는 엄마를 잘 돌봐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성큼 성장한 루카스는 이리 답한다. "서로 돌본 거예요." 아,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이 저릿한 감정은 무엇인가. 함께 돌보고 챙김으로써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디 삶이요, 세상의 원리다.

 

헨리도 그런 경험을 한다. 아내와 루카스를 잃고 상심에 빠져 있는 그가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오열하면서 남의 전화라며 서둘러 끊은 헨리에게 휴대폰을 빌려준 남자는 말한다. "다시 거세요. 그렇게 끊으면 안 돼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번져야 산다. 혼자여선 안 된다. 서로 챙기고 함께 돌봐줘야 한다. <더 임파서블>이 내게 준 번짐이다. 블록버스터니 재난영화니 따위의 수사에 현혹되지 마시라. 이것은 번짐의 영화요, 함께 돌봐주기의 신공을 보여주는 영화다. 자본의 쓰나미가 모든 것을 삼킨 시대. 그 쓰나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쓰나미는 메타포(은유)인 셈이다. 자본의 쓰나미로 고통이 일상화된 시대, 우리는 서로 함께 돌보고 챙겨야 하는구나. 마을공동체, 공유도시, 사회적경제, 공정무역,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어들이다. 쓰나미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영화 <더 임파서블>, 재난영화 블록버스터가 아닌 감동 실화 블록버스터다. 감동이 블록버스터급으로 다가온다는 얘기다.  

 

그래서, 고맙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12. 여기저기서 고통 섞인 비명이 섞여 나옵니다. 미디어에 게재된 사진을 봅니다. 그런데, 사진을 그냥 사진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사진에 담긴 이미지가 통각을 불러옵니다. 아픕니다. 슬픕니다.

 

12, 그렇습니다. 체로키족이 명명한 '다른 세상의 달'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크리크족이 말한 '침묵하는 달'이 됐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침묵하는 달. 주류 언론 대부분은 침묵합니다. 지난 21, 한진중공업 복직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른다섯, 두 아이의 아빠는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 먼저 나쁜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나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듦입니다. 이제야 내가 많이 모자란 걸 압니다. 슬픕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자신의 행복이라던 가족을 버려야 했을까요.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을까요.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뽑은 커피 한 잔, 내 눈물 한 자락이 담깁니다. 우리는 그의 힘겨움을 덜어주지 못했습니다. ‘함께 살자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녔습니다. 22, 현대중공업하청지회 노동자가 19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습니다. 한중노동자 소식을 듣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곳일까요.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사회라니요. 그럼에도 이 국가는, 이 나라의 정치(권력)는 묵묵부답입니다. 젊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응답하라고 부르짖건만 말입니다. 이 사회는 왜 남의 고통에 무덤덤하기만 한 것일까요.

 

생각해봅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크리스마스였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만으로 흥겹고 즐겁고 벅찼던 시간,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하는 부류로 나눠지나 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본(화폐)의 자장 안에 들어간 까닭일까요? 온 누리에 선물을 베풀지 못하나 봅니다. 크리스마스가 슬픈 이유입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1.16~2004.12.28)을 떠올립니다. 8년 전, 세상을 떠났던 뉴욕의 지성이자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뭣보다 지금 그를 떠올린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성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지 속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도 간파한 대중문화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손택 여사는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였습니다. 1966, 그가 서른세 살에 내놓은 문화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는 세계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책은,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발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었죠. 미국 뉴욕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빠져 지냈고, 영민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를 닮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철두철미했습니다. 평생 4시간의 수면을 삶의 규칙으로 삼았고, 스물다섯에 이혼하면서 남편이 준다는 양육비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강의와 기고로 고집스럽게 자신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졌고, 자신만의 사상적 체계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손택 여사는 그렇게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쉽게 자신을 놓거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40세 무렵 유방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2년 이상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은유로서의 질병을 발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임에도 불구, 학자나 작가들이 만들어낸 병에 대한 은유적 이미지가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라는 삶의 좌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발터 벤야민, 아르토, 바르트 등의 유럽의 지성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했습니다. 생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로 사회현실에의 참여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뭣보다, 특정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작가, 문화비평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시대와 세계에 문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의 자극을 줬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예술적인 심미안을 갖춘 사회적 행동가로서, 이성과 감성이 균질하게 배분된 행복한 경우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실천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무엇보다 손택 여사, 911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 불어 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비판하며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언급했고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전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미국의 패권욕에 제동을 걸고, 세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고자 현실 참여와 감수성의 자극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2003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독일출판협회는 그에게 "거짓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하면서 '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손택 여사, 문학가이면서 세상과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실천한 운동가였습니다. 무릇 작가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그는 백퍼센트 작가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이 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지 않나요?

 

손택 여사가 사라예보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고 나의 고통처럼 받아들여야합니다. 어떤 매체가 타인의 고통을 어떤 태도로 다루는지,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의식을 가지는 일, 중요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것은 능력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손택 여사가 떠났던 이맘 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힘들어서, 돈이 없고 무서워서, 세상을 등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어떤 아픔과 고통에도 응답하지 않는 이 사회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세상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내 책임도 아닐 법한. 그러나 그 모든 것, 동떨어진 무엇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억해야 합니다. 나 역시 아무런 악의 없는 누군가나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고 아픔을 겪게 될 수 있음을. 내가 외면하면 언젠가 혹은 곧 나도 외면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편하지만, 잊어선 안 될 진실입니다.

 

그렇다고 막연히 희망을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차라리, 희망을 버려!’ 이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망은 현실에서 꽃필 수 있는 것이지, 막연한 기대에선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은 그랬습니다.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전쟁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이상적인 세상은 오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나빠지거나 최악으로 가는 것만 막아도 다행이 아닐까요. 수잔 손택은 그런 면에서 당연히 읽어야 할 작가이며, 타인의 고통도 반드시 읽어야할 책입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버려!”, 그것은 비관이 아닌 현실 긍정이며, 고독한 자기푸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사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소식과 인류를 짓밟는 해악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다손,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몸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당사자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고문과 폭력을 연구한 영문학자인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도 아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투쟁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는 눈길, 자본과 폭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폭도로 모는 시선. 이 모든 것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와도 연결돼 있지 않을까요.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지금 시대의 명징한 징후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챙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고통은 타자를 분석하거나 교정하지 말고 돌봄의 윤리를 갖는 시선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을 것은 물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까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는, 수잔 손택의 나지막한 속삭임을 지금 떠올리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워야했던 수잔 손택도 힘을 잃고 마는 때가 왔습니다. 20041228, 향년 71,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지성을 잃었습니다. 8년 전,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해지지 않기를.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11.17 00:51 메종드 쭌/무비일락

(스포일러 있음! 알아도, 영화관람에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다음에 꺼내는 이 말, 우스개지만, 백퍼 진실을 담은 뼈대 있는 우스개. 

답을 보기 전, 한 번 유추해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가 50대가 넘어설 때, 필요한 다섯 가지는? 


친구, 딸, 집, 돈, 건강.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50대는? 


아내, 부인, 와이프, 마누라, 집사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의 모습, 그려진다. 우리나라 남자를 놓고 한 뼈대 있는 우스개지만, 아이슬란드의 이 남자에게도 다르지 않아 뵌다. 



화장실에서 우는 남자


그 남자가 화장실에 앉아 울고 있다. <볼케이노 :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그것은, 온 슬픔을 담은 몸짓이다. 삶의 회한이 묻은 울먹임. 그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뚝뚝하며, 퉁명스럽고, 가족들에게 심술 궂은 말만 내뱉는데다, 가시 돋힌 행동만 일삼던 남자. 중요한 것은 그 남자, 하네스(테오도로 줄리어슨)는 아버지였다. 우리네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은 그 남자, 울고 있다. 왜? 


그것은 단순히 오십 넘은 남자에게 닥친, 아내의 뇌졸중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가 쓰러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바다에 뜨지 못한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은 결국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삶의 공허함과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때문이리라. 


하네스에겐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섬을 떠났고, 어부의 이름을 포기했다. 나중에 실토하지만, 그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부 역시 그의 진짜 꿈이었다. 꾹꾹 아니라고 눌렀으나, 결코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학교 수위로 37년을 근무하다가 은퇴한 그에게 닥친 것은 공허함이요, 무상함.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에게 은퇴가 주는 충격이란 그런 것이다. 죽을 것도 생각했으나, 결국 그것도 당장 그의 몫, 아니었다. 


한때 가장이었으나 이제는 '뒷방 늙은이(꼰대)'로 전락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다. 심술과 심통. 오랜 세월, 뒷바라지만 해 온 아내 안나(마그렛 헬가 요한스토디어)에게 줄 수 있는 건 면박과 트집뿐.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는 외계인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존재는 곧잘 무시당하며, 가장의 권위는 안드로메다에 있는 무엇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은퇴때문에 불거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였고, 가족에겐 '불통'의 대명사였다. 


물론, 안 됐다. 불쌍하게 보인다. 애초롭다. 아무리 자초한 것이지만, 뒷방 늙은이도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네스의 '버럭'은 그런 심리에 기초하리라. 자신을 알아달라는, 내 무력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호소다. 몸부림이다.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볼케이노'는 그럴 때 갑작스레 터진다. 오십 넘은 남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 아내가 쓰러졌다! 뇌졸중. 그것도 전날, 아내에게 쭈뼛쭈뼛 할 말이 있다며 힘겹게 다가가 모처럼 애정을 나눈 그들이었다. 못난 지아비는 아내에게 수줍은 사과를 건넸고, 아내는 지아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온몸으로 받아줬다. 오래된 부부의 진한 교감이 이어졌던 다음날, 터진 볼케이노. 아내가 좋아하는 넙치수프를 준비한 하네스 앞에서 아내가 쓰러졌다. 


그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명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쓰러진 안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달려온 딸과 아들은 하네스와 뚝 떨어져 앉아 자기들끼리 위로한다. 그 장면을 멀리서 풀숏으로 찍은 장면은 그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존재인지 보여준다. 아버지, 외롭다. 슬프다. 


볼케이노의 폭발, 그 이후...


             

그런데 이 남자, 변한다. 아니, 이제야 본래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 남자가 철 드는 것도 그럴 때이다.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 아내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니, 알았는데, 쑥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그녀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쏟는다. 병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온종일 옆에 두고 병간호를 한다. 아들의 반대를 평생을 함께 한 남편으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잘할 수 있을까? 스크린을 응시하는 나의 염려는 곧 그의 염려였다. 하네스 자신도 그것이 궁금했고 불안했다.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몸 곳곳을 닦아주고, 수프를 떠먹이면서, 말 못하는 아내에게 계속 말 걸어주고 책 읽어주기. 그의 삶의 중심은 이제 아내다. 평생 구박만 했던 아내에게 그는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속단을 했다. 그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아내가 깨어나리라는 흔한 결말을 떠올렸다. 아내를 병간호 하는 외에 그가 오로지 매달린 배의 수리.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물림하여 내려온 그 배, 그것의 재탄생과 함께. 치유된 아내와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것으로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다. 

설마했지만, 나는 살짝 경악했다. 아니, 그가 행한 행동을 수긍할 수 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리라. 배는 완성됐다. 손자와 함께 수리한 배는 어쩌면 그가 또 다른 삶의 전환점에 섰음을 보여주는 징표. 배의 존재는 곧 그였다. 배의 난파와 수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다시 섬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또 다른 오해를 했다. 기성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은 영화임을 간과하고, 익숙한 관성에 의해 사유한 셈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가 아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신파를 떠올렸다. 


아내 덕분에 다시 섬으로 돌아온 하네스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담고, 또 많은 것을 비우는 얼굴이라니. 그 얼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얼굴만한 스펙터클은 없었다. 지 아무리 가파른 해안절벽과 드넓은 바다도 그의 표정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나즈막이 읊조리고 말 나의 감상은 이랬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모든 게 조금씩 빛이 바래도, 삶은 짧은 계절만큼이나 전환에 전환을 거쳐 흘러간다.   


(* <볼케이노>라는 영화 제목 때문에 흔하디 흔한 재난영화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삶에 닥친 '재난'을 다룬 것은 맞지만,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와는 사유의 지점이 다르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11.09 02:25 메종드 쭌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세상에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없었을지도 몰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음악은 살포시 속삭인다.

 

오늘처럼, 이 음악. 우리의 음악.

에피톤프로젝트, 고마워.

 

 

어쩔 수 없는, 아직은 가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내 마음. 

에피톤프로젝트의 위로, 혹은 음악. 

이 음악으로 나는 오늘을 감사해.

 

내게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선사해준 당신들에게 또한 감사를.

3040의 어떤 이야기.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낯선 당신들에서의 하루.

우리, 월요일에 만나. 가을, 우리가 함께 했던 계절로 채워지는 나의 하루.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아름답다.

 

엽서를 처음 만난 순간, 숨이 턱.

그때 내 곁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그랬다. 

엽서 자체가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 카피가 내 숨결을 간질인다.

"30년 후 오늘, 당신과 키스할래요..."

 

그 말, 그 행간에 숨은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

어쩌면 미열 같은 희열, 기다림의 설렘.

그 모든 감정을 응축한 말 한 마디.


우리도 사랑일까.

이 가을, 나는 사라 폴리(감독)의 유혹을 거부할 자신이 없다.

이 가을, 숨이 막힌다면 아마도 이 영화 때문일 것 같다는 예감?

 

나도, 내 마음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사랑한다, 가을.


(다만, 아래 그림은 엽서의 색감이 주는 정서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24 00:08 메종드 쭌/무비일락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도둑들>(의 장르)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단어인데, 제목에 걸맞게 하나 같이 훔치는데 바쁘다. 강탈하고 절도하는 범죄를 향한 치밀한 준비와 실행과정의 묘사가 그렇다. 날고 기는 한국과 중국의 '전문가' 10명을 모이게 하기 위해 <도둑들>이 카드로 내세운 것은 으마으마한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이다. 2천만 달러. 군침이 돈다. 침이 고인다. 꿀꺽. 저 정도면 케이퍼, 할 만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태양의 눈물'은 맥거핀이로다. 

프로들께서 눈에 쌍심지는 물론 레이저까지 쏘면서 뎀비는 이 다이아몬드. 홍콩의 카지노에 고이 모신 이 다이아몬드의 '자리이동(?)'을 위한 위험천만한 모험담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이거 순전히, 연애 영화다. 그러니까, 멜로물이야! 다이아몬드, 훔치고 독차지하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지? 근데, 정작 그들 각자가 훔치고 싶은 건, 마음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꺄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로다. ㅠ.ㅠ 


사랑은 마음을 훔쳐야 한다. 

한때, 90년대의 실없는 혹은 닭살표 우스개. 

남자가 여자에게 공격적으로 묻는다. "당신, 도둑이죠?"  

여자, 갑자기 놀라서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요?"

남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내 마음을 훔쳐갔잖아요. (흐흐흐)" 

뻑뻑. 대패로 닭살을 깎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이 대화의 핵심은 세상에 더 없을 진실. 사랑은, 그래, 마음을 훔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것 쉽지 않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울 거다. 기가 막힌 재주를 가진,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절도의 프로께서도 마음을 훔치는 것만큼은 손사래를 칠 것이다. 이건 당최 용의주도한 계산이나 치밀한 계획과 실행도 통하지 않는다. 예측 불허다. 내 마음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는 마당에 남의 마음을? 에구구, 섣부른 도둑질이 화만 부른다. 


물론 흥미진진하다. 

태양의 눈물을 향한 동상이몽의 한중 전문가들이 펼치는 전문성은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훔쳐보겠다는 의지에 속한다. 즉, 부분집합이라는 거다. 잠파노(김수현)는 '미친년' 예니콜(전지현)을 향해 줄곧 순정이다. 마음을 훔치고 싶어 안달이다. 안 그런척 해도 숨길 수가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잠파노의 모든 것은 예니콜에 속한다. 극중 그의 마지막 외침이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복희야 사랑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가 꿈을 잘못 샀어." 

첸(임달화)를 향한 씹던껌(김해숙)의 마지막 고백인데, 진짜 잘못 샀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들린다. 10년 만에 벅찬 오르가슴을 선사한 첸을 향한 씹던껌의 찬란한 고백. 두 사람, 서로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티파니(태양의 눈물 소유자)를 잠깐 이용할 뿐이다. 그들, 진짜 훔치고 싶었던 것을 훔쳤다! 안타까운 결말이긴 해도.


삼각구도 역시 마찬가지. 

마카오박, 뽀빠이, 그리고 '으~~마으마한 쌍년'(예니콜의 표현) 팹시. 뽀빠이는 팹시의 마음을 빼앗고 싶었고, 마초상남자("여자는 치마는 짧고 머리는 길어야 해") 마카오박은 안 그런 척, 오해의 늪에 빠진 팹시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 배신 당했다는 생각에 마카오박에 대해 빠득빠득 이를 가는 팹시지만,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엔 마카오박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이 엇갈린 마음의 행보와 훔치고 싶은 사람의 마음. 뽀빠이가 마카오박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질투'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훔쳐간 수컷에 대한 수컷의 질투. 극중 앤드류(오달수)는 그런 상대가 없어 안타까울 뿐.ㅋㅋ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가 맞다.  

무언가를 훔치는 것을 묘사한 영화 장르가 케이퍼 무비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맥거핀을 써가며 용쓰는 <도둑들>은 케이퍼 무비가 맞다. '도둑들'이라는 제목 앞에 '(사랑하는 마음의 훔치고 싶은)'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는 거지. 주도면밀한 연애의 기술과 방법이 담긴 <도둑들>은 그래서 또한 로맨틱한 멜로물이기도 하다. 내 눈엔 그 도둑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질)하고 싶어서 태양의 눈물을 이용한 거다. 


아무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좆도 아니야.~ 

<도둑들>의 멋진 교훈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18 23: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정직하고 우직하다. 둘러 가지 않는다. 휘어서 가지도 않는다. 직사광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는다. 직구다. 그것도 돌직구. <토끼 울타리>가 그렇다. 스트레이트로 우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가슴을 움직인다. 감동이라면, 격정적인 격랑이 휘몰아치는 감동이 있고, 밑바닥부터 찰랑찰랑 물 차오르듯 서서히 수위를 높이는 감동도 있을 터. <토끼 울타리>의 감동은 후자다. 마음 저 깊은 곳을 움직인다. 먹먹함을 동반하는 감동이다.


그 감동,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도리스 필킹턴의 《토끼 보호 울타리를 따라서 》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 


필킹턴의 어머니, 몰리가 14살 때 거닐었던 여정을 다룬다. 무려 1500마일(약 2400㎞). 이 길을 가냘픈 발로 따라갔던 소녀의 이야기.


3명의 소녀, 어른도 상상하기 힘든 길을 떠나고 관객의 눈길을 모은다. 


"엄마를 찾아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똘똘 뭉친 험난한 도피길. 그들은 왜 도망을 가야했으며 왜 이토록 먼 길을 걸어야만 했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묵직한 발길을 멀리서 관찰하고 뒤따를 뿐이다. 카메라는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우리도 그 길을 묵묵히 따른다.


"엄마, 보고 싶어요…"


이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모성'을 향한 자연적인 끌림을 묘사했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달리 <토끼 울타리>는 그것 이상의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왜 인간에게 중요한가. 단지 엄마를 찾겠다는 것뿐 아니라 자유를 찾는 여정. 시대와 사회, 그리고 역사가 소녀들에게 부여한 가혹함이다.


이곳은 1931년의 호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 백인들, 박힌 원주민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굴러온 돌'인 백인이라는 이름의 지배계급, 1910년부터 '원주민 법'을 제정했다. 이어 지속적으로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을 말살하기 위한 칼을 빼든다. 그 칼에는 야만과 광기가 묻어 있다. 혼혈을 통해서라도 원주민의 '색깔'을 빼겠다는 어이 없음 혹은 안하무인. 그것이 영화를 지배하는 시대의 공기다.


지갈롱에 살고 있는 몰리와 데이지 자매, 사촌 그레이시는 백인과 애보리진의 혼혈아다. 색깔을 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낸 호주 (백인)정부, 세 자매를 엄마들에게서 떼어내 1500마일이나 떨어진 무어강 보호소로 보낸다. 당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는 격리 수용의 최우선 대상이다. 백인의 피로 희석해 백인에 가깝게 만들겠다는 것. '어이없는' 색깔론. 물론 우리의 색깔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몰리, 노예와 같은 생활도 싫고, 즉 자유가 그립고, 엄마도 그립다. 결심을 한다. 그래, 이곳을 떠나자! 두 동생과 함께 비 오는 날, 탈출을 감행한다. 비가 흔적을 지워줄 거라는 믿음을 품고. "다시 엄마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제아무리 광활하고 거친 호주 대륙이라도, 그들에겐 그것이 안중에도 없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사진 꺼내 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라는 노래조차 그들에겐 적용될 수 없다. 꺼내 놓을 엄마 사진도 없다. 곧 그들에게 '엄마'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허나, 정부가 그들의 탈출을 쉽게 허용할 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색깔을 다시 오염시키는 행위다. 소녀들을 수용소로 끌어오기 위한 백인들의 추격이 따른다. '엄마'를 보겠다는 사소하고 소박한 생각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이라고 백호주의는 봐주지 않는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소녀들의 소박한 희망도, 백인만의 울타리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욕망 앞에선 장애물이다.


가냘픈 발자국, 속 깊은 눈


단순한 구도다. 쫓기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영화적 구도의 핵심이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고 도망가는 자와 "붙잡고야 말겠"다고 추격하는 자들의 대결.


헌데, <토끼 울타리>에는 어떤 기교도 없다. 현란한 사기꾼적인 기질이나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한 술수, 없다. 자연 지형을 활용하거나 추격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지가 있을 뿐. 몰리는 잡힐 듯 말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같다.


이 영화의 장점, 바로 거기에 있다. 묵묵히 따라간다. 의도적이거나 억지로 고난을 부여하지 않는다. 흉포한 백인들을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도망가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몰리의 속 깊은 눈이 관객 마음을 움직인다. 그 눈이 이 어린, 그렇지만 여리지 않은 소녀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만든다. 진정성을 획득하는 순간! 감독은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공들여 치장하거나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하지 않아도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물들, 하나 같이 자기 일에만 열중한다. 몰리와 그의 자매들, 백인에 반대하고 체제 전복을 꿈꾸는 게 아니다.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다. 원주민법의 집행자인 네빌(케네스 브래너)도 마찬가지. 자신의 업무를 정확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은 성실한 직장인이다. 아이들을 뒤좇는 원주민 '개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개처럼 따를 뿐이다. 그게 그의 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순 없다. 생각해보자. 나치에 대한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념적 복무가 없었다손 전범이 아닌가.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일에 성실한 가장이었다. 아렌트는 그를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또 "아이히만은 말하기, 생각, 판단의 무능성을 지닌 지극히 보통사람이었으며, '나치에 대한 몰이해와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실행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무지 등을 이유로 나치를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거나 비서로 살육의 현장에 동참했던 사실을 씻을 수는 없다. 또 시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친일 행위를 했다손, 그 과오가 지워질 순 없다.


네빌이나 개코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죄를 사할 수는 없단 얘기다. 백호주의라는 분별 없는 신념(혹은 열정)의 이름으로, 피의 순결함에 집착하는 행위가 가져온 타인의 삶의 파괴.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패악이다. 타인의 자연스런 삶을 망치고 억압했다. 백인은 문명은커녕 야만의 씨앗을 뿌렸다. 


나는 소망한다, 강요당하지 않는 삶을...


철거가 일상이 된 시절이다. 자본은 토끼몰이처럼 원주민(세입자)을 내몬다. 용역깡패까지 동원한다. 철거라니, 도대체 그 무지막지한 단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자본의 피는 자본만의 울타리를 치고 싶다. 순수하고 싶은 것이다. 왜 가난한 자들까지 자신들이 먹여살리고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철거 용역 깡패는 그래서 자본의 군대다. 그들이 복무하는 건, 자본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역사는 형태를 바꿔 되풀이될 뿐이다. 우울함을 지울 수 있을 턱이 없다. 몰리는 엄마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 뒤에 숨어살아야 했다. 호주에서 원주민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된 것은 70년대다. 그들은 "도둑맞은 세대"로 불렸다. 강요와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평생을 숨어 지내야만 했다.


21세기. 별 다를 바 없다. 자본은 더욱 세차게 토끼몰이를 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산다. 고작 자본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우리는 강요 당하고 억압 받고 있다. 자유는 없다. 자유롭다는 착각만 유령처럼 떠돌 뿐. 노예의 편안이다. 철거 깡패의 무력이 두렵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는 돌직구처럼 직설로 우리의 사고를 깨운다. 갇힌 안온함보다는 거칠고 험한 자유가 낫다! 14살의 몰리가 그것을 몸소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깡패 자본주의에게 더 이상 '도둑 맞은 세대'처럼 숨어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토끼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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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8 15:52 메종드 쭌/무비일락


민족은 허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강력한 현실이고,

이 허구와 현실을 이어주는 것은 날조와 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이며, 이 기억이 만드는 집단적 정체감이 개인을 개인으로 정립시킨다.

현실적 실체가 된 상상의 공동체가 억압과 폐쇄의 위험을 벗어버리려면 ‘열린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민족적․문화적 소수파(이방인)의 존재다.


-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민족은 없다> 중에서 -


뜨겁다. 계절도 그렇지만, 올림픽 때문이다. 공식적인 국가대항전. 자본이 숨은 주인공이지만, 어쨌든 나라를 걸고 싸운다.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 없이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는 올림픽 공식 멘트는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다.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져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지만, 기억은 거기까지. 이긴 자만 기억하는 세상은 여전하고, 꼭 이겨야만 하는 그런 나라, 있다! 


후끈하다. 한국과 일본. 식민과 피식민의 기억은 영원할 마당. 쥐새끼는 느닷없이 바다를 건너 독도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뜬금포.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한일 양국 시끌시끌하다. 축구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점이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3·4위전. 한국이 이겼다. 그것도 2대0. 잘 했고, 이겼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공식적' 멘트도 막상 경기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고스란히 나는 태극전사였다. 한국팀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쏠렸다. 울트라 닛뽄은 그냥 들러리였다. 이겨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도 승리의 기쁨 앞에선 그저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


살짝 궁금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면 달랐겠지?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겠지? 독도에서 찍찍 거리는 쥐새끼, 당장 쥐어패고 싶었겠지? 일본에서 태어나서 조용한 외교라는 명분아래 일본에 슬쩍 마음을 두던 평소와 달리, 뭔 뻘짓을 한 거야? 


흠, 그건 그렇고 재일교포라면 어떤 심정일까? 재일교포도 물론 살아온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그 층위가 다르겠지만. 스기하라에게 묻고 싶었다. 

스기하라? 뉴규? <고(Go)>의 주인공이다. 



아참, 

이 글은 나(스기하라)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GO>,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다


나? 태어날 때 선택 따윈 못했다. 당연하다. ‘수십억분의 1’의 경쟁률을 힘겹게 뚫고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처지잖아. 어쭈구리,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족쇄가 나를 묶고 있었다. 가족의 일원, 국가의 구성원, 민족의 자손. 오호,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닌데, 그렇게 주어졌다. 


어쨌거나, 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코리안저패니즈.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만 살았어. 일본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그런데 남들은 나를 “재일한국인”이라고 불러. 이런, 이건 누가 붙인 이름이야? 이봐, 사자는 자신을 사자라고 안 불러. 너희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잖아. 난 나라구! 왜 날 너희 맘대로 만든 틀에 묶어 놓구 평가하나? 그렇게 이름을 붙여 차별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차이를 차별로 내모는 또라이들.


아차, 좀 오바했군. 이건 나의 연애 이야기였지. 잊어버려...^^;


나 좀 묶어 두지 말고 내버려 둘래?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애국, 통일, 동포, 친선

지배, 억압, 예속, 침략, 편견, 차별 … 제기랄

배타, 배척, 선민, 혈족, 순수, 혈통, 단결 … 지.겨.워.”



아빠는 이런 족쇄에서 나를 풀어주려고 국적을 바꿨다. 엄마와 하와이를 간다는 핑계로 대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는 내게 구시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재일교포니, 일본인이니, 엿이나 먹을 짓이다. 이 넓은 세상. 국경선 따위가 나의 행로를 제어할 게 무어냐고. 


그래서 닭들이나 할 짓인 ‘슈퍼그레이트치킨레이스’는 그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원 밖의 강한 적들과 싸우면 된다. 나를 둘러싼 이 허구의 세상과도 마찬가지. 다른 건 없다.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나는 즐긴다. 


사쿠라이(나의 여자친구지)! 그런데 넌 왜 그래? 내 피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그렇게 뭉개버리다니.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안 따라온다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피는 더럽다고? 이런,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론데 나는 ‘재일한국인’이 되는 순간, 왜 피가 더러워지는 거지? 웃기는군. 너처럼 자유분방해 뵈는 애가. 그것도 아빠 얘기라며 그걸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우스워.


아,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였지. 너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인데 너를 이렇게 묘사하면 안되지...^^; 어쨌든, 넌 예뻐서 좋아. 팬티가 보여도 쪽 팔리는지 모르는 네가 좋아.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건, 어느 민족이건, 정말 상관 않는 거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라잖아, 하하.


살아 있다, 사랑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이야기, 너무 무겁게 보인다고? 걱정마. 이건 발랄하고 경쾌한 사랑이야기니까. 그냥 내 연애이야기야. 살아있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즐겁고. 그래, 사랑 그놈, 부질없는 짓인줄 알지만, 그래도 어떡해. 내겐 사랑이 우선이고 최고야. 친구 정일의 죽음도 사쿠라이, 널 향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순 없어. 민족, 국가, 그런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물론 국경이 있고, 핏줄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잘 알아. 그렇지만 나 호들갑 같은 거 떨지 않아. 한국 국적이라고, 단일민족 한핏줄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내 나라 내 동포 내 민족이라고 감싸 안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지 않아? 5·16 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일이라고 빡빡 우기고, 공천을 현금으로 장사하는 족속들과 내가 한 동포라는 테두리에 들어갈 이유? 없잖아! 독재자의 딸이자 독재자 DNA를 그대로 물려 받은 자를 향해 거짓 충성을 맹세하는 권력 불나방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 받는 것도 기분 나빠. 완전 나빠! 


아, 또 깜빡했군. 이건 내 연애이야기일 뿐이야. 넘어가지...ㅋㅋ 정치적 발언? 그런 건 없는 걸로~ 내가 뭔 정치이야기 같은 걸 하겠어, 킁킁. 


그래, 불만 있냐?


뭐, 하나가 돼야만 직성이 풀리고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배알 꼴리겠지만, 별 수 있나? 난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이야. 당신들에게 동질감이나 민족 감정을 느껴야할 이유 따윈 없어!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것도 없고 ‘민족’을 기치로 연대해야 할 의무도 없지. 그 광란의 한-일전. 난 어느 편도 아니야. 내가 응원하고 싶은 쪽을 응원할 뿐이야. 어느 편인가 묻는 당신에게, 조까라 마이싱~! 


아, 내 연애이야기는 이걸로 끝. 난 사랑에 빠졌고 너무 아프다.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 내가 지껄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래. 불만있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난 당신들에 의해 내 삶의 선택과 주체성을 휘둘리고 싶진 않다! 다 맞아주마. 다 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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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름밤 사이로 쏙 숨어버린 별이 아쉬웠다.

 

그래서 스스로 별을 하나둘 띄워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이다.

 

내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돋게 해준,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던 그녀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그녀들을 호출해 준, 그녀들의 총합인 이 얼굴. 



그 아름답고 좋은 감정을 품게 해줘서, 그 존재만으로 나라는 세계를 변화시켜준 대단한 그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추억이 있다.

 

그녀들의 얼굴로 별 안 보이는 내 여름 밤하늘을 채웠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 건넸다.

작년 이맘때 비처럼 쏟아지던 동티모르의 별처럼, 그녀들이 반짝인다.  

 

별을 띄운 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때문이다.



물론 저 얼굴,

딱 남자로망판타지를 돋게 한다는 말, 부인하지 않겠다.

 

영화 또한 남성의 시각만 있을 뿐,

여성을 대상화했을 뿐이라는 비판의 지점,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저 얼굴이 주는 내 추억의 한켠에 울고 웃었다.

영화 카피로 내세운 <건축학개론>보다 성숙한 시선도 돋보인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글거리겠지만, 내겐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화라니!!!


추억, 돋는다. 뭉게뭉게. 몽실몽실.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소녀들 한 명씩 호명한다. 

그리고 짐승의 시절을 보낸 우리들 역시 한 명씩 부른다. 

짐승과 야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그럼에도 우리들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뭣보다 진연희.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마지막 장면 때문에 나, 훅~갔다. 

홀렸다. 별이 하나 떴다. 엔딩 크래딧 뜬다고 절대 나가지 마시라.


이런 언급 당최 않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이 영화 흥행가도 탄탄대로! 이른바 '초대박' 안 나면 이 얼굴, 내 안에서 당장 지우겠다!ㅋ 



나는 한동안, 진연희(첸옌시), 이 얼굴 때문에 사는 걸로~

그녀가 나왔다는, 곧 개봉할 거라는 <소울 오브 브레드> 역시 기대!  


진연희, 

꺄아~ You're the Apple of my eye(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

 

극중 커징텅처럼 나도 철들기는 글렀다.ㅠㅠ

그냥 계속 유치하게 사는 수밖에!

 

어쩌면 이 영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내겐 '올해의 영화'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르겠다.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38.72, 내가 사랑하는 영화 그리고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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