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687,932total
  • 4today
  • 15yesterday


어느 해,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첫사랑이 결혼한다고 알려왔다며, 인연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더라, 고 회한 섞인 넋두리를 털어놓았다. 자기는 먼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주제에 그녀가 결혼한다고 마음이 흔들리다니, 뭔 도둑놈 심보냐고 놀려댔다. 허나 그들의 사랑했던 날을 알고 있던 나는 문자에 꾹꾹 눌러 담은 녀석의 마음을 엿봤다. 흔들리는 마음, 그건 죄가 아니다.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결혼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불공평하니 그렇지 않니, 저울질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녀석은 흔들리는 마음의 실체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마음이 허한 것도 같고 이상하다고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녀석에겐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그러지는 인연이었던 그 사랑, 첫사랑이었다. 물론 그 기억, 첫사랑이라는 이유로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임도 분명했지만. 녀석과 술 한 잔 마셨다. 물었다. 마음이 아파? 흔들리는 거야? 진짜 첫사랑이야?


사람은 처음 하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 

‘첫’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시간이 흐르면서 ‘첫’은 모든 것을 천천히 삼킨다. 세상의 모든 ‘첫’은 아련해지고 애틋해진다. 첫사랑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그런데 한 결혼정보회사가 결혼하지 않은 351명에게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 ‘첫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가장 많은 답변(62%)은 ‘가장 많이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첫’에서 흔히 생각하는 ‘가장 처음 좋아한 사람’을 답변한 사람은? 25%였다. ‘가장 아프게 좋아한 사람’을 첫사랑으로 생각하는 응답도 10% 있었다. 첫사랑은 따라서 (각자의) 해석이다.

 

문제는, 첫사랑은 과거로만 끝나지 않는다. 

현재와 교류하거나 영향을 미친다. 좋거나 나쁘거나, 현재진행형이다. 요절이 슬픈 것은 열어볼 수 없는 미래의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깨진’ 첫사랑도 마찬가지다. 첫사랑의 요절과도 같은 그것은 영원히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기다림이다. 쉽게 잊히지 않는 사건이다. 첫사랑이 현재의 사랑이라면 다른 문제이겠으나, ‘첫사랑은 깨진다’는 속설처럼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 사건이 첫사랑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역설적으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생의 시간을 지배하거나 향을 남긴다.


첫사랑처럼 광범위한 사회 공통의 경험도 드물다. 

대부분 한 번쯤 겪고 앓는다. 그리고 신성시된다. 과거 ‘순수한 한때’를 상징하는 시공간으로 특권을 부여받는다. ‘그때와 달리’ 세속의 때도 적당히 묻고 속물이 돼 버린 지금, 첫사랑은 ‘잃어버린 순수를 품고 있었던 시절’을 상징한다. 현재의 비루함이나 궁상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종교적 체험이다. 그땐 그랬지, 라고 우리는 과거는 물론 첫사랑을 미화한다.


술 한 잔하면서 다시 확인하니 친구의 그 첫사랑, ‘처음’은 아니었다. 

가장 아프게 사랑한 기억이라고 했다. 뭔가 아쉬움이 남았고 그것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젠 마음에서 보낼 수 있겠다고 했다. 첫사랑 장례식! 다만 그것이 왜 결혼 때문이어야 하는지, 나는 할 말이 있었으나 녀석 앞에서 꺼내진 않았다. 애도는 녀석의 몫으로 남길 뿐.


첫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흔들리게 하는 마술 같은 단어다. 

세상에 단 하나여야만 할 것 같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재.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내가 하는 모든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명명했다. 그 사람과 내가 하는 처음 사랑이니까, 첫사랑. 그러니까 나는 첫사랑‘들’을 겪었다. 따라서 첫사랑이라고 특별할 것도, 유난스러울 것도 없다. 오래 전,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나는 첫사랑을 억지로 ‘사수’할 생각이 없다. 


첫사랑은 사수보다 (마음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 정여울(《마음의 서재》)의 말을 곱씹는 이유다. “모든 첫사랑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한 번씩은 죽는다. 안타깝게 끝나버린 첫사랑을 위한 가상의 장례식을 치러야만, 첫사랑은 매번 ‘그 다음 사랑’과의 고통스러운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평생 첫사랑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첫사랑의 애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세상 거의 모든 이들에게 그토록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첫사랑.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첫사랑이 끝난 뒤, 꼬리를 잘 잘라야 한다. 만남이 우연에 의해 조작된다면 이별은 의지가 작동한다. 진즉 끝냈어야 할 것을 질질 끄는 것은 나쁘다. 첫사랑과의 이별 역시 마찬가지. 사랑하는 동안 다 쏟아야 한다. 어설프게 꼬리를 남기고 마는 사랑은 나쁘다. “가장 슬픈 이별도 나쁜 지속보다는 낫다”는 말을 긍정하는 이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널 사랑하지 않아. 기억할 뿐이야. 굿바이, 내 첫사랑들.


>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에로스’라는 말을 들으면 서야 하는 인간이 있다. 에로스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신화 속 에로스(神)가 이 세간의 오해를 맞닥뜨린다면 얼마나 슬플까. 가난한 어미(페니아) 아래 늘 결핍 속에 살지만, 풍요를 대변하는 아버지(포로스)의 피를 받았기에 그는 선과 미, 그리고 진리를 사랑했다. 지의 사랑, 곧 철학의 정신인 에로스는 뭣보다 중간자였다. 지와 무지의 중간자. 끊임없이 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이유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게끔 만드는 정신적 욕구의 의인화가 에로스였다. 고대인에겐 따라서 에로스는 육체적 생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을 무한으로 끌어올리는 정신적 생식의 힘이었다.

 

그러니 세간에는 ‘사랑’에 대해 무지막지한 오해도 있다. 사랑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란다. 사랑은 살면서, 저절로 주어지는 감정이라는 편견이 횡행하고 있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행복을 안겨준다는 편견도 빠질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사랑은 행복과 함께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안락과 편의와는 함께 할 수 없다. 안락과 편의에 대한 기대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진짜 사랑을 해본 당신, 알 것이다. 사랑은 쉬이 주어지는 감정과 다르다. 좋아하는 감정은 그저 감정의 일부일 뿐 사랑의 실체가 아니다. 사랑은 당사자에게 그(녀)의 능력과 의지를 최대한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실패할 수 있다. 사랑은 늘 밑바닥을 바라보게 한다. 부족함을 드러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고도 경고한다. 사랑은 꽃놀이패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에게 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게 행복이기도 했지만, 아픔이었고, 쪽팔림이었으며, 나를 성찰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무엇이었다. 달이 차오를 때까지, 사랑했지만, 헤어짐도 피할 순 없었다. 아팠지만, 쓰라렸지만, 사랑의 반대말은 헤어짐(이별)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이렇게 말하더라.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대놓고 반박하진 않지만 어이가 없었다. 그걸 위로라고 하다니! 인연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그 위로의 전제에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다. 나름대로 그 어쭙잖은 위로를 해석하면 이렇다. 인연이 아니라는 말 앞에는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결혼에 이르지 못했으니’가 생략된 것이다. 아니, 사랑이면 사랑이지, 왜 결혼과 늘 연결을 지을까?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는 엉성하고 빈약한 이데올로기에서 사람들은 왜 벗어나질 못하는 거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답을 얻었다. 사랑에 대해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내게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었다. “인연이 아닌 게 아냐. 인연이 딱 그만큼이었던 게지.” 인연이 아니라는 말, 내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은 거듭 그것을 확인해준다. 사랑은 한 세계(우주)가 다른 세계(우주)를 만나는, 일대 사건 혹은 사고임을. 평행우주의 궤적이 어쩌다 공명하게 된 순간이다. 사랑사건 혹은 사랑사고. 오죽하면, 트루먼 카포티는 이런 말을 했을까.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그리하여, 헤어졌지만 새로운 세계를 알려 준 그 사랑(연애)에 나는, 늘 고마워했다. 물론 경우마다 사유의 깊이나 폭은 달랐을지언정, 나는 그 사랑(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요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내 안에 그들(사랑) 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할 호기심 천국이다. 세상엔 ‘사랑 불능 환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사랑 타령이 넘실대지만,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도 넘치지만,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고프다. 사랑이 아프다. 왜?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다. 배우지 못했으니 체화할 수도 없다. 사랑(연애) 불능자가 넘쳐나는 이유다. 연애가 불가능한 시대인 이유다. 기이하고 기괴할 정도로 ‘싱글 지옥, 커플 지옥’에서 차고 넘칠 것 같은 연애지만, 그런 분위기는 상업주의 자본이 만든 지옥도다. 우리는 그 지옥도에서 사랑과 연애에 오해의 딱지를 붙여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분류하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사랑 안에 있다. 사랑만 제대로 알아도 (사람으로서) 기본은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만난 ‘사랑학’에 공감했다. 사랑은 그저 한 사람의 마음에 똬리를 튼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모름지기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고 사회적 소통이다. 세간의 사랑에 대해 불만이 있다손, 마냥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니다. 그들이 배우고 훈육 받은 것이 그랬다. 학교고, 사회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시부렁거리면서, 정작 사랑을 공부하고 배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 못한 죄. 고작 미디어 등을 통해 왜곡된 사랑(연애)의 형태나 편견을 강화하도록 전달했다.

 

고대부터 사랑은 공부하는 것이었다는 증거도 있다. 《인문학스터디》는 이렇게 전달한다. “철학적 삶에 대해 플라톤이 주목한 또 하나의 사랑이나 욕구, 즉 에로스(eros)가 지닌 중요한 역할이다.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는 활력에 넘쳐 에로스의 요소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사랑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우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해 우리의 사랑을 아주 작게 줄여야 하는가? 이것들은 오늘날 젊은 남녀들도 당연히 호기심을 품는 문제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하다. 사랑을 공부하라. 사랑을 하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사랑은 살아가는 시공간과의 소통이다.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사건사고! 더 넓은 세계로 입문하는 통로. “사랑은 궁극적으로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행위”이며, 사랑은 그래서, 어떤 시대적 기준을 들이대도, 불온하다.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이다. 사랑이, 혁명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유다. 부디 당신의 사랑과 연애가 우리 각자의 삶과 유리되지 않길 바란다. 연애한다고 친구를 끊고, 사회적 관계망을 좁히는 것은 연애가 아니다. “사랑의 능력에서 핵심은 사랑과 삶이 맺는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반복한다. 사랑은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고로, 사랑을 공부하지 않는 후천성사랑결핍증 환자들에게, 이 책을 권함! 


(특히 <안 생겨요>(개그콘서트)의 두 안 생긴 개그맨들에게 권함! 아차차, 그러면 안 되겠구나. 그들이 이 책 읽고 생기면, 코너가 폐지될지 모르니까~ㅎ)


  

p.s.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연애컨설턴트랍시고, 연애 코칭, 연애 멘토링을 자처하며 펴낸 연애기술서들을 보겠다면, 쌍수 들어 말린다. 그것들 거의 모두 쓰레기다. 그깟 쓰레기따위 다 소각하거나 개무시하시라.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와 다음의 책들을 권한다.




(* 2008년, 그린비 판본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리뷰의 개정판이다. 반디앤루니스의 다정한 에디터(콘텐츠팀) 요청으로 일부 수정해서 '오늘의 책'에 게재했다. 또 보낸 원고에서 아주 살짝 수정하거나 빠진 부분을 회복(눈 밝은 이는 눈치 챘으리라~ㅋ)했다. 북드라망 개정판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은 읽질 않아서 어떻게 수정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믿고 보는 '고미숙' 선생님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제목은 <굿 닥터>인데, <배드 닥터>가 됐다. ㅠ.ㅠ
왜? 심장 터져 죽을 뻔 했으니까! 


차윤서(문채원)의 가을밤 고백, 심장이 그만 퍼펑~ 하고 터져 버렸다. 

시온(주원)이는 좋겠다. 그건 '기적'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것, 세상에 그만한 기적은 없다. 

아, 둑흔둑흔 빠담빠담 <굿 닥터>!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그리고, 어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 부재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부재한 풍경일 뿐이지.  

그럼에도 기억을 지속하는 건, 당신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어.

당신이라는 내 생의 심리적 자원을 잃고 싶지 않아서.

당신은 어느 책에 나왔듯, 당시 내가 읽었던 아픈 책을 같이 읽은 사랑이니까.

 

사랑 앞에 '다시'라는 말은 불가능한 테제야.

그럼에도, 다시는 어떤 회한의 것에 대한 인간적인 토로일 수밖에 없어.

 

나는 당신을 여전히 감탄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아직도 아프다.

 

이 노래, 당신 앞에서 그렇게 불러댔던 이 노래. 

그땐 몰랐다. 이 노래 가사가 그렇게 아픈 것인줄...

그래서 나는 이 노랠, 잊을 수 없나보다. 내 심장이 부르던 노래니까...

 

그래, 잘 지내지? 

아주 가끔 당신이 그립고, 그립다. 오늘 같은 날. 안녕, 고마운 내 사랑.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아름답다.

 

엽서를 처음 만난 순간, 숨이 턱.

그때 내 곁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그랬다. 

엽서 자체가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 카피가 내 숨결을 간질인다.

"30년 후 오늘, 당신과 키스할래요..."

 

그 말, 그 행간에 숨은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

어쩌면 미열 같은 희열, 기다림의 설렘.

그 모든 감정을 응축한 말 한 마디.


우리도 사랑일까.

이 가을, 나는 사라 폴리(감독)의 유혹을 거부할 자신이 없다.

이 가을, 숨이 막힌다면 아마도 이 영화 때문일 것 같다는 예감?

 

나도, 내 마음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사랑한다, 가을.


(다만, 아래 그림은 엽서의 색감이 주는 정서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그 뒷모습, 서두르고 있다.

벚꽃은 이미 지고 없지만, 그것은 엔딩.

쓸쓸한 뒷모습에 대고 말한다. 미안해.

 

그 시간, 지옥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지옥을 아니까.

그럼에도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별에 대한 예의.

 

그래, 비겁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 이별에 대한 예의.

 

고맙다. 그리고 안녕.

벚꽃이 진짜 지는구나.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욕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함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 시인의 것이 그랬다. 그래서 나도 밤에만 읽어야 했다. 은교, 은교, 은교.

 

칠십 노시인의 마음에 어찌할 수 없이 감정이입한 것도 오로지 은교 때문이었다.

은교를 '십칠세 소녀'로만 규정하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다.

은교는 로리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

 

나잇살 먹은 노인네가 여고생을 탐한다고 쉽게 재단하는 것도 어리석다.

그것은 사랑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뱉는 발언이다.

추문이요, 더러운 스캔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얼마나 고결하기에 그런가.  

 

물론 우리는 온갖 도덕이라는 이름의, 윤리라는 이름의 감옥에 산다.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은 모름지기 당사자의 것이어야 한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이적요의 탄식이 나는 절절했다.

은교를 만난 것이 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관음이라도 좋고, 관능이라도 좋다. 

인생에 있어 때론 무언가를 탐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은교의 향기는 봄밤에 더욱 어울린다.

내가 은교를 처음 만난 것도 봄이었다. 봄밤.

그래서 봄밤, 다시 몰래 보고 만나고 싶다. 슬쩍 엿보고 싶다. 은교.


아, 나는 싱그러운 관능에 한없이 너그러운 혹은 약한 남자로다.

 

-=-=-=-=-=-=-=-=-=-=-= 

 


쉿, 일흔, 열여덟을 욕망하다. 밤에만 읽으시라 

 『은교』 박범신




 (※ 2009년 5월17일, 서울 북촌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은교』(박범신 지음|문학동네 펴냄) 출간기념 작가와의 만남 현장을 재구성했습니다. 외람되지만, 구름의 저편으로 가신 이적요 시인을 화자로 모셔서 이야기를 풉니다. 박범신 작가의 말씀을 따로 뺐지만, 화자의 이야기 속에도 살짝 녹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역시나 당부 드리자면, 부디, 밤에만 읽으시라.)



은교,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잘 있니. 대학생이 됐다며. 그 모습, 저 멀리서나마 보고 있다.

할아부지는 잘 있어. 우리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쓴다.

나의 몰스킨 노트도 봤으니, 그때 널 향한 내 마음도 알았겠구나. 허허.


괴테. 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 양반, 팔십 넘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여든 셋에 세상을 떴는데, 앞선 해 『파우스트』2부를 탈고했다. 도정일 선생은, 괴테가 근 60년 동안 마르지 않은 창작 샘을 가동할 수 있었던 단초로, 어릴 때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야기 지어내기’, 즉 ‘별들 사이에 길을 놓’은 일을 들기도 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자 한다. 연애(사랑)의 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첫 사랑의 여인, 케트헨은 호프집 처녀였고, 세 번째 여인은 친구의 약혼녀였던, 그리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게 했던 로테였다. 16세의 아름다운 릴리는 네 번째 여인이었다. 약혼까지 했던 그는 “자유를 동경하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정의 행복이라는 항구 가까이 가려는 생활의 배를 다시 먼 바다로 밀어낸다”는 말만 남겨 놓고 그녀와 헤어져 스위스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계속해줄까? 다섯 번째 여인, 슈타인은 일곱 자녀를 둔 7년 연상이었다. 그는 슈타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다고 한다. 여섯 번째 여인이 쉰여섯의 나이에 정식으로 결혼한 크리스티아네였다.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 와중에 그는 서점 주인인 프로만의 양녀 민나를 탐닉했다. 일곱 번째 여인이었다. 


압권은 1816년 아내가 사망하고 7년 뒤인 1823년, 일흔 넷의 괴테는 여덟 번째 여인을 만났다. 그 대상은 울리케 폰 레베초, 열아홉 소녀였다. 이른바,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다. 혹자는 이것을 ‘스캔들’이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야겠다. 당시,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꺼냈다. 안타깝게도, 울리케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괴테는 이때, 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를 썼다.


잠깐 읊어주마. 눈은 감는 대신 귀를 열고 들어다오.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아마, 괴테가 울리케의 사랑을 받았다면, 「마리엔바트의 비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파우스트 2부 역시 장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이 절절함을 보거라.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A. 앙드레(Endre),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는  『괴테의 사랑』을 통해 이 마지막 사랑을 진지하고 정중하게 대우한다. 발저는 괴테가 울리케를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 느꼈을 감정의 동요를 전한다. 일흔 넷과 열아홉, 대문호 괴테의 내적 갈등이 오죽 했겠니.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고. 울리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아흔다섯 독신, 아마 괴테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괴테의 사랑 이야길 하는 건, 너를 향한 내 사랑이, 특별한 것만은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일흔, 너는 열여덟. 오십이 년. 괴테와 울리케의 것과 별 차이는 없다만, 나는 생전에 네게 나의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p.12)


괴테나 울리케, 이적요와 은교에게 나이 차는 사실, 문제가 아니다. 너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들과 우리에게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pp.107~108)


호사가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괴테와 울리케에게도 그랬고, 아마 우리에게도 그럴 것이다. 노트에 적었듯, 너에게 그건 참으로 미안한 것이지만, 잊지 마라. 사람들은 단순한 이치를 잊고 산다.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 모든 사랑은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 났을 뿐이다. 사랑은 늘 당사자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고 했던가. 서지우가 그랬듯, 사람들은 그렇게 삿대질도 하고, 자기네들의 비루한 잣대도 들이댈 것이다. 은교 너와 나의 이야기를 쓴 노트는 분명 오해도 받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노트를 참으로 행복하게 썼다.


작가의 말

“950매쯤 되는 소설인데, 한 달 반 만에 썼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왔지만 두 달 안에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는 처음이었다. 연재의 시작은 하루 서른 명 정도 밖에 안 들어오는 블로그였다. 블로그에 쓰면, 하루에 한 줄만 써도 뭐라는 사람 없고, 쓰다가 지치면 일주일 쯤 안 써도 뭐라 할 사람 없잖나. 널널하고 편하게 연재도 할 겸, 작가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려고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쓰니 폭풍 같이 다른 문장들이 뒤따라오는 바람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루 30~50매 썼다.


작가로서 행복한 경험이었다. 한번 쯤 막힐 법도 한데 한 번도 막힌 적 없이 내 안의 문장들이 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워드프로세서가 돼서 내 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받아쓰는 느낌으로 썼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 두 달 동안 설사만 했다. (웃음) 이 소설을 쓰면서 행복했지만, 내 몸은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쓰고 나서 죽정이만 남은 느낌으로 봄을 보냈다. 소설은 뻥이지만, 내 자신의 어떤 것들을 강력하게 반영한 느낌이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이적요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강력하게 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나의 신부, 은교. 삶은 어떻게든 유한하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늙는 것도 죄가 아닌 ‘자연’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만나면서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나의 노트를 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한때 사회주의운동에도 몸을 담았다.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기도 했다. 그건 목표가 아니었다. 꿈이었다, 꿈.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삼십 대에는 감옥에 있었고, 사십 대부터 나는 시인으로 살았다. 나의 문학은, 나의 시는 그래서 모든 것이었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내게도 생피처럼 더운 욕망이 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작가의 말 

“1976년 데뷔해서 이른바 운동권 문학도 썼는데, 79년에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을 쓴 뒤, 15년 동안 연애소설을 많이 쓰는,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살았다. 돈 벌겠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본질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은 그랬는데, 나이 드니까 소수지만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숫자로 승부할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로 편 가르기가 심했던 문학판이 준 고통과 재판에서 받아야 했던 형벌도 있었다. 이래저래 40대 후반에 고통이 많았다. 아홉수 있다더니, 스트레스 많은 지옥 같은 시기였다.


문학을 어떻게, 인생을 어떻게 재편할지 암담한 시절도 있었다. 인기의 허망함도 느꼈고, 시대가 준 스트레스와 번뇌도 있었고, 나이에 밀려나가는 고통도 있었다. 어떻게 나를 구할 수 있지, 고민했다. 문학으로 이룬 사회적 기득권 같은 게 있다면, 반납하자. 그래서 절필하고 용인의 외딴 오두막에 들어가서, 3년 동안 혼자 지내는 시기를 겪었다. 시장에서 잘 나가는 사장이 이유도 분명하지 않게 그 자릴 박차고 나간 셈이었다. (웃음) 3년 지났더니 풀을 매면서 중얼거리는 거다. 이걸 받아쓴다면 소설이지. 입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거다.(웃음) 내 안에 우물이 넘치고 말이 넘쳐서 안 쓰면 고통스럽더라. 그래서 문단으로 돌아왔다.”


너를 만나면서 내겐 늘 시간이 문제였다.

어떻게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안에 지니면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절실하고 중요했다. 과실도 씨를 갖고 태어나듯,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씨앗을 갖고 나온다. 할아부지가 괜히 인생이랍시고 어렵게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도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곧 스물이 될 테니 말이다.


내가 아는 인생은 그렇다. 과육이 썩듯이, 죽음의 씨가 배 밖으로 언젠가는 나온다. 돈을 많이 번다? 유명해진다? 사랑을 한다? 그 모든 것을 해도, 우리는 죽음의 사이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단다. 죽음에서 먼 것이 젊음이라지만, 내밀한 곳에는 그런 불안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그것 역시, 자연이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p.250)


그래, 너는 내게, 갈망이었다. 다다를 수 없는 신적인 것, 초월적인 꿈같은 것. 허리 잘록하고 젖가슴이 아름답게 앞으로 뻗어 나온 처녀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꿈의 그림자였다. 나라고 길을 걷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안 쳐다보겠니. 물론 마음에 드는 처녀도 있고, 아닌 처녀도 있다. 집에 가서 누워있으면, 나는 여자를 봤던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평생 뭔가를 그리워하고 살았는데, 그게 여자였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너로 인해 확실해졌다. 나는 모순 속을 그렇게 오가면서, 죽을 때까지 가 닿을 수 없는 로망을 그리워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p.151)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p.194)


그게 너였고, 너는 그렇게 관념이었다. 어쩌면 너는 내게, 실체하지 않는 영혼의 구멍 속을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너는 잡을 수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너는, 손을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관념.


작가의 말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갈망의 3부작이라고 썼는데, 앞선 두 개가 우회했다면, 이번 『은교』는 직접적이며 정직하고 뜨겁게 토로한 소설이 됐다. 앞으로 내 영혼의 중심에 구멍이 뻥 뚫렸다고 느끼는 날이 많을 것 같다. 누가 뚫어서 뚫린 것은 아니고. 그런 텅 빈 공간에 뭘 채워야 하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절필 이후 내 소설은 대부분 갈망을 담고 있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꿈을 말하고 있는데, 꿈은 사랑의 완성,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 다시는 소설을 안 써도 될 위대한 하나의 작품 같은 것을 말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불타는 것 아닌가! 나이 들면 이런 게 더 커진다. 초월에 대한 욕망이랄까. 십 몇 년은 아내가 어떤 소리를 해도 히말라야에 간다. 그 꼭대기를 보고 있으면 영원성 같은 게 있다. 지금의 인생은 가장 절실하고 고단한 문제가 됐다. 어떻게 하면 삶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껍데기 다 날려버리고 남는 것,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진실로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에 비하면, 내가 내걸었던 명분의 기치는 모두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다. 처녀인 네 앞에서 나는, 누추할 뿐이었다”(p.96)


너는 확실히 달랐다.


노트에도 적었지만, 내게도 여인들이 있었다. 수많은 여자와 눈을 마주보며 차도 마셔봤다. 이 할아부지는 여자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나는,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졌다. 몰랐구나. 정녕 몰랐구나. 그러니, 내가 무너졌을 게다.


“내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전적으로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평생 신뢰해온, 평생 자신만만했던 나의 이성이 그애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서 단번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p.129)


남자는, 그래 너도 이젠 알겠지만 수컷은 대체로 그렇다. 참 소모적이고 쓸쓸하고 슬픈 동물이다.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수컷에게 동정심을 부러 가질 필요는 없다. 반면, 여자는, 그러니까, 너는 자궁이 있다. 그건 굉장한 것이다.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애를 낳을 수 있으며, 영원히 뭔가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면, 그것은 여자다.


너는 그렇게, 내게 영원성이었다. 영원히 가 닿을 수 없겠지만, 영원히 그리워하고 진선미가 갖춰진 존재. 강력하게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나에겐 바로 갈망. 세속적인 목표가 아니라 근원적인 갈망의 한 그림자. 그게 은교, 너였다.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그늘의 떨림,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서 비상하는 네 허리의 고혹을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고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p.93)


‘본시창’이라도 좋다.


혁명을 꿈꾸며 감옥에서 10년을 있었고, 시인으로 영원히 남고자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은 카리스마? 천만에, 그런 명분 따위 다시 말하지만, 거짓이다. 나는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다. 다행히 죽기 전에 네가 그 욕망을, 본능을 건드려줬다. 다행이다. 감히 말하겠다. 모범적으로 사는 인생? 몽땅 거짓이다. 자신에 대한 명백한 거짓이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거짓 인생이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p.394)


작가의 말

“이 책, 밤에만 읽으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본능이 우리 안에서 비합리적으로 억눌려서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을, 가족이나 친구를 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웃음) 눈 뜨면 사회활동하면서 돈도 벌고 직장생활도 하고 가정도 챙기고, 출세도 해야겠고, 경쟁시대에 살아남아야겠고, 사회적 자아를 꼿꼿이 내세우면서 열심히 산다.


하지만 깊은 밤 누웠을 때는 달라져도 된다. 사회적 자아를 내려놔라. 그 사회적 자아의 억압에, 횡경막에 눌려 있던 본능, 오욕칠정 등은 깊은 밤 남몰래 터져 나와야 되지 않겠나. 이적요를 통해 우리에게도 강력한 오욕칠정이, 어쩌면 더럽고 슬프고 추하면서도 아름답기도 한 그것들이 오장육부의 창자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건드렸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더 열심히 사는 게 아니고, 깽판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불온한 서적이다. 인생에 전혀 도움 안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걸 통해서 목표에 불과한 것을 꿈이라 알고, 평생을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사는 것보다 한 번쯤은 오장육부에 있는 욕망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그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요즘도 저는 불가능한 꿈을 꿉니다. 진선미가 갖춰진 여인과 북극해로 도망간다거나, 영원히 살고 싶다거나, 혁명적으로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것들을 꿈꾸지요. 육체적으로는 이미 정점을 훨씬 지난 나이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꿈 앞에선 제 자신이 지금도 화염병처럼 뜨겁게 타오릅니다. 꿈을 갈망이고 그리움이지요. 이렇게 나이가 든 사람도 꿈을 꾸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스럽습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5)


“내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 사회의 욕망에 맞춰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명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에 보면 ‘천복(天福)을 좇으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살고, 자신이 행복하겠다 싶은 길로 나아가라는 뜻이지요.”(『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8)


할아부지가 하늘에서 보자니, 그곳이 그립다.

은교 너 때문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선사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부디, 너는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지도 말아라. 그 여름, 온전히 너의 것으로 너의 욕망으로 채워라. 소설가 김훈이 그랬던가.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여자의 옷을 보는지 몸을 보는지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그의 즐거움이라고.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나라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라고.


네가 없는 이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힘과 기쁨도 없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할아부지가 힐긋 보니,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네 모습,


관능적이다.


더보고 싶다면,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사랑, 첫
어쩌다 그렇게 겹치는 날이 있다. 온전히 우연이지만. 
채식레스토랑에서 한 송년회. 첫사랑, 언제였느냐고 묻는다.
내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지만, 안다. 묻는 것은 첫 번째 첫사랑.
스물 셋. 첫 번째를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니까. 안녕, 내 사랑.

그리고 최지우. 몰랐는데, <귀천도>에 캐스팅됐다가 낙마했단다.
귀천도. 귀천도애. 영화 못 봤지만, 노래 주야장천 듣고 읊었다. 맞다, 표절.
상관 없었다. 이미 노래가 파고든 뒤였으니까. 그런 내가 세뇌를 한 까닭일까.
그녀, <귀천도애>와 다른 한 노래를 가끔 원했다. 그녀, 원한다면 나는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주크박스. 추억 돋네. 하늘로 돌아가는 길의 슬픔, 歸天道哀.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사랑
알싸하게 차가운 날씨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까지 꼭 쓰고 싶은 책이 떠올랐다. 사랑.
매우 거대하고 넓고 깊은 주제라, 사실 난망한 것이 사실이나,
아는 만큼, 알고자 최대한 노력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혹한의 칼바람을 맞아서 화들짝 놀라서겠지. 그래도, 사랑.
너는 나고, 나는 너 자신이야, 우리는 한 사람이야.
온 삶을 걸거나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든가, 사랑.
참, 미칠듯이 매혹적인 주제다.
지금처럼 비루하고 천박하게 쓰일 단어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판타지라고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냉면
겨울의 맛은 역시 냉면.
오늘, 4대천황의 하나로 꼽히는 필동면옥이었는데,
장충동 평양면옥의 슴슴한 담백함에 비해선 아쉬운 감이 있다.
어쩌면, 누구와 함께였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평양면옥에선 사랑이 앞에 있었을 때니, 그 맛이라는 게 얼마나 감질났겠는가.
쩝, 그리 생각하자니 좀 슬프군.
계절의 맛보다, 더 진한 것이 사랑의 맛인가 보다.
아, 나는 맛칼럼 같은 건 쓰기 글렀다.


원 데이
어쩜 이리, 한 마음을 한 순간에 홀라당 빼앗는 영화포스터가 다 있는가.
포스터 하나 때문에 이 사랑을 만나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앤 헤서웨이! <브로크백 마운틴>때부터 알아봤다. 된장, 이토록 알흠답다니.
Twenty years, Two people... 내용이야 어쨌든 닥치고 관람.
혹시 실망하더라도, 포스터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영화가 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나이
의도한 바는 아니나, 12월이 주는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나이 얘기가 꼭 들이민다. 그저께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누군가는 오십이라서, 누군가는 사십이라서. 이십대 중반부터였나. 얼른 나이를 잡숫고 싶던 나는, 

아직 여전히 그렇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나이듦은 뭔가 감투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이듦을 꿈꾼다. 물론, '제대로' 나이듦. 사십,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에, 나는 어느덧 사십줄을 바라보는 나와 내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그 나이를 이야기한 내 오래된 친구들에게.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슬픈 것이다. 

'한 사람의 나이-누군가가 내게 가장 슬픈 단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죽음이니 가난이니를 다 제쳐두고 나이라고 말하겠다. 그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어쩐지 스무 살이라는 말도 슬프고 서른 살이라는 말도 그것대로 슬프다. 쉰 살은 쉰 살이어서 여든은 여든이어서 슬프다.

어떤 세상 없는 부모 형제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이까지도 모두,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우치는 데에 어떤 사람은 이십 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사십 년이 걸린다. 또는 영영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일찍 깨우치는 사람들은 그래서 슬프고, 끝내 깨닫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또 그래서 슬프다..."                                  

                                                                - 김한길, 《눈뜨면 없어라》중에서


요리
오래된 친구들과의 식사. 하하호호. 웃고 떠든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때론 그렇다. 서로를 신뢰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연놈들, 결혼 연식도 좀 됐고, 아이들도 숭숭 큰다. 인생이 그렇듯, 결혼도 언제든 업다운이 있는 법이지만, 그 결혼이란 게, 그냥 안주하고 있는 느낌.

그들에게도, 여느 부부가 그렇듯, 결혼이 감정을 죽이고 사랑보다 일상이 강해진 그런 것이 됐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고 대신 정이 둥지를 텄다고 하겠지만, 좀 안타까운 면도 있다. 그 빛나던 사랑이 으스러진 것. 다시는 빛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은 그저 오래된 기억일까? 지금, 사랑하냐고 물으면, 웃으며 툭 던진다. 에이, 그냥 가족이야, 하하호호. 그 웃음이 왠지, 나는 아쉽다. 사랑의 지지고볶기 보다는, 그저 일상이 강해진 풍경.

그러다 그들, 으레 결혼얘길 스윽~ 꺼낸다. 결혼, 어떡할거야? 떼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누. 허나 분명한 것은, 나는 꼭 커피를 포함해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다짐한다. 《요리 본능》에선, 화식, 즉 요리가 성별 분업을 가져오고, 요리는 여자의 것으로 규범처럼 굳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더 자주 부엌에서 요리하리라. 장석주의 詩가 아니더라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는 남자만큼 멋있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하긴, 내 친구도 결혼 전에는 그랬다. 하하.  

그러니까,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마구마구 불러 일으키는 여자, 그런 여자라면 나는 첫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은 늘 첫사랑, 모두 첫사랑. 일상보다 강한 사랑을 위해, 나는 당신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 자, 오늘은 어떤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리할까요? *^.~*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으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 장석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