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즐겨봐요. 닥본사는 아니지만, 보면 그냥 좋아 헤벌쭉 해요. 김태희 때문, 아니에요. 그녀는 존재감제로 종속변수에 가까울 뿐이에요.
차라리 김소연이 훨 낫다고 보아요. 그렇다면 블록버스터 첩보액션 아니냐고요? 천만에라고 해요. 그건 초절정 '뻥'이에요. 첩보는 허술하고, 액션은 포스가 느껴지질 않아요.
그래도 돈을 처발랐으니, 블록버스터 정도는 선심쓰기로 해요.
보고 있자면, 아주 짜집기의 흔적이 역력해요.
참신이라곤, 손톱에 끼인 때를 다른 손톱으로 긁어낸만큼도 없어요.
<쉬리>, <본 .....>시리즈, <무간도> 등 아주 골고루 섞었어요.
제대로 섞어서 새로운 종류의 샐러드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냥 띄엄띄엄 노는 걸 보니, 버무림도 신통치 않아요.
내가 보기엔 <아이리스>는, 신파에요. 바로 그것 때문에 보아요. 참신하진 않아도, 그럼 어때요, 하고 봐요.
현준(이병헌)이 뱉었던 그말, 아직도 생생 기억해요. "부국장님 저 꼭 살아서 돌아가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우우, 부국장님 있으면, 그말 한번 흉내내보고 싶어져요.
승희(김태희)도 마찬가지에요.
"나 현준씨 절대 버릴 수 없어. 죽더라도 같이 죽을 거야."
우우우, 현준씨 있으면, 나도 한번 눈물 흘려보고 싶어져요.
그토록 훅~ 가게 만드는 신파가, <아이리스>에요.
'블록버스터 여보신파'라고 붙여보아요.
<아이리스>를 즐겨보는 아주 사소한 이유도 있다고 봐요.
가장 좋아하는 꽃이 아이리스에요. 보라색 그 빛깔 때문이에요.
최승희라는 이름, 친일도 깎아내리지 못한, 흠모하는 무용가에요.
함께 늙어간다는 느낌. 에단 호크가 그렇다. <죽은 시인들의 사회>가 그랬고, (10대) <비포 선라이즈>가 그러했으며, (20대) <비포 선셋>이 또한 그랬다. (30대)
그리고, 얼마 전, 보았던 <뉴욕, 아이러브유>에서 그는, 제시(<비포...>의 남자 주인공)가 40대가 되면 저러할 것 같다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제시를 기억하는 이라면,
<뉴욕, 아이러브유>를 보면 참 반가울 거다.
무엇보다, 오늘(10월22일)은, 한국에서 비포 선셋이 개봉한 지 5주년 되는 날.
사랑할 때, 당신과 꼭 함께 보고 싶은 이 영화(들).
함께 보실래요? ^.^*
그리하여, 난 제시, 당신은 셀린느.
아울러,로맨스.
이 말만 들어도 나처럼 가슴 설렐 당신에게 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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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나잇 스탠드 그리고 하루(들)
2004년, 한 영화가 개봉했소. 그 영화의 개봉이 특별했던 건, 기다림 때문이었다오. 그것도 무려 9년이라는 시간. 한 사람을 1년도 기다릴 자신조차 없던 녀석이 9년이라니! 글쎄, 나도 웃긴다오. 고작 2시간도 되지 않을 시간인데, 그들의 특별한 하룻밤에 푹 빠져 9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으니. 모기가 피를 빨아먹기 위해 한 사람만을 기다린 것과 같이, 정말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소. 더구나 그 기다림은 예정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오. 후속편? 언감생심!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소. 혹시나 했던 것은 사실이라 해도 말이오. 그런데 나는 어떤 주술에 빠져 그저 막연하기 그지 없는 그 기다림을 하고 말았다오. 오호, 통재라. 어찌 하오리까.
“9번 트랙, 6개월 후 6시”
이 말만 없었어도 나는 그들을 궁금해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소. 미쳤지. 이 말이 뭐라고.-.-;; 그러고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눴던 1995년, 나 역시 그들처럼 20대였소. 군대라는 철창에 갇혀 있던 그때. 휴가를 나와 우연히 그들의 이야길 접했고 그 대단하지도 않은 이야기에 어쩌다 마주친 ‘매혹’. 한마디로 당한거지. ‘원나잇 스탠드’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아~ 나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 기차를 타야겠다. 한 커플이 싸우고 있는 기찻칸을 찾아 책을 읽다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누군가와, 같이 내려야겠구나!
그리곤 혼자 두둥~ 상상의 나래를 폈소. 휴지도 없이 화장실에 들어간 그들의 뒷일을 봐준 것이오. -.-;; 내 생애 가장 후일담이 궁금했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그렇게 6개월 뒤를 기약했지만, 그 뒷일은 그 로맨스에 도취된 각자의 몫이었지요. 그러다 불쑥 9년이 지난 뒤 30대가 된 그들이 돌아오다니. 이번엔 <비포 선셋>! 해 뜰 때까지 체력을 자랑하며 빛나게 떠오르던 수다남녀는 이젠 해 질 때까지만 쌩쌩한, 지는 해가 된 거유?
그런데 나도 그들처럼 나이를 먹었더랬소. 나도 당신들처럼 30대라오. 하하하^^;; ‘6개월 후’란 약속은 증발하고 9년 만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래 어떻소? 그런데 당신들 참 많이 늙었구료. 그동안 참 궁금했는데, 그리하여 후속편이 나온단 얘기를 듣자마자, 정식 개봉 전 선보인 그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보고 말았다오.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거든. 후후.
재미있는 건 말이오. 당신들의 행적을 따라 내 마음이 그대로 움직였다는 거요. 나이를 먹고 세월을 머금었는데도 나는 당신들이 여전히 좋은가보우.
그들의 후일담, <비포 선셋>을 만나자, 나는, 비엔나가 아닌 파리를 가고 싶어졌고, 기차가 아닌 유람선을 타고 싶어졌고, 음악 청취실이 아닌 사랑하는 누군가의 집에 가기 위한 계단을 오르고 싶어졌고. 그리고 왈츠풍의 노래가 너무도 듣고 싶어졌다오.
다음엔 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거요? 그땐 아마 우리 모두 40대? 푸하하. 끔찍하오. 세월이. ^^;; 그런데 그것도 재미있구료. 해 뜨기 전과는 또 다르지만 부채살처럼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한 채, 선셋의 풍경을 닫지 않았소. 다음에는 ‘애프터 선셋’? 혹은 ‘비포 문라이즈’? 대체 비포 비포만 읊어댄 당신들 다음엔 뭐 할거유? 애들은 재웠수? 이 담엔 (나도 40대가 될 땐) 40세 미만 관람불가로 어떻수, 콜?
수다남녀의 비엔나 여정에 빠진 이유
보고 또 보고 그들을 보는 재미란 쏠쏠하오. 특히나 가을이 짱이겠지만, 어느 계절이라도 상관은 없겠소. 가슴 저릿한 로맨스를 하거나 엿보는 것이 꼭 특정 계절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듯 말이오. 그들의 이야기는, 로맨스를 꿈꾸거나 로맨스를 하고 싶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교재라오. 사랑에 목마르거나 통째로 사랑열매를 갈아 마시고픈 우리에겐, 그들은 하나의 축복이라오. 음하하.
여기서, 그들이 처음 만난 얘기 잠깐.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채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 그건 마법에 빠지는 순간이라오. 사랑했던, 아니 사랑에 풍덩 빠진 그때를 당신은 기억하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호감, 사랑이 전개되는 과정을. 단언하지만 그건 ‘마법’이라오. 각자 다른 세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마법은 ‘사랑’이란 형태로 변신하지. ‘우연’의 이름으로 기워진 ‘운명’과 ‘필연’의 사진첩 같은 거.
아 그런데,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표정이 보통이 아닌 거라. 일체의 영화적 장치나 우연의 남발 따위는 없소. 쫄깃쫄깃하게 밀착한 듯한 현실감. 더불어 여느 사랑이 그러하듯, 계획되지 않은 생의 어느 한 순간에 깜짝 다가온 사랑의 마법. 그들은 어느덧 마법이 아닌, 사랑의 포로가 돼 있더라오. 나는 그런 그들의 로맨스에 빠진 포로. ^.^
‘이 순간 (함께 내리자고) 말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지 몰라’라고 생각했을 제시(에단 호크)의 ‘타임머신론’이 비엔나에서의 동행을 촉발하고, ‘비엔나는 사랑을 싣고’ 익어간다오. 나는 이전엔 ‘하루’가 짧다고만 생각했지만, 아뿔싸 하루는 사실 충분한 시간이었소. 삶과 죽음, 인간, 남성과 여성, 가족, 미래, 사랑과 실연 등 그 수다는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더라오. 그것이 밍숭맹숭할 수도 있었던 수다남녀의 여정에 빠져든 이유요. 거기엔 또한 사랑이, 로맨스가 있었으니까. 사랑에 대한 방정식 풀이!
서로를 알고 싶을 때 ‘진실게임’을 통해 솔직하게 자신의 첫 번째 성적 감정을 내뱉거나, ‘전화게임’으로 현재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는 것도 괜찮다오. 무엇보다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를 들을 수 있는 음반가게 청취실의 풍경이 가장 짜릿하더이다. 몰래 상대를 훔쳐보다가 상대방 시선이 느껴지면 아닌 척 다른 곳을 쳐다보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 애를 쓰는 표정과 분위기에, 내 가슴은 그저 콩닥콩닥. 무지무지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아웅~. 결국 셀린느는 나중에 “내가 다른 곳을 볼 때 날 몰래 훔쳐보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라며 고백까지 하구. (여기서 Tip. 몰래 훔쳐 볼 때는 상대방이 알게 하라! ^.^)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원나잇스탠드’
고백하자면, 뭐니뭐니해도 그들의 ‘원나잇 스탠드’가 가장 짜릿했소이다. 큭큭. 애당초 ‘내일’이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은 그 ‘하룻밤’이 모든 것이었나보우. 근데 그 제약이 로맨스를 더욱 깊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소. 서로의 내면에 다가갈 시간이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미국과 프랑스라는 물리적 거리감까지. 에구구 사랑이 어쩌면 이렇게 멀고도 험하오. 하지만 그들은 지금-여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한다오. 역시, 그들은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오.
“내일이 지나고 나면 우린 아마 다시는 못 만나게 되겠지?”라고 묻는 셀린느의 질문부터,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오. 흔들리면서도 그들은 말을 잇지. “오늘밤뿐이라고 해도 그리 나쁘진 않잖아?” “왜 사람들은 관계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오늘밤뿐이라고 생각해. 망상도 추측도 없겠네” “그냥 오늘밤을 멋지게 만드는 거야”
서로 사랑에 빠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아오. 그렇듯 사랑은,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사랑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은’ 시간을 함께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소!
그래서 “키스 받고 싶어”라고 제시에게 속삭이던 셀린느의 표정! 나는 잊지 못하오. 그들이 그 순간 얼마나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는지, 그 감정이 찌리릿. 그리곤 깊은 밤을 함께 날았겠지? 직접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게 자연스럽잖소~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비포 선셋>은 아주 쉽게 그 날의 순간을 풀어놓더오. “그날 밤 함께 잔 기억이 없어. 난 콘돔 없이 안 하거든”이라며 딱 잡아떼던 셀린느는 제시의 추궁(?)에 “우리 그날 밤 두 번이나 했어”라고 그 날의 짜릿한 원나잇스탠드에 대해 발설하기도 한다오. 흐흐. ^______^
그들은 인간관계의 한계를 아는 것 같소. 대개의 사람들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생각하지만, 어디 모든 경우가 그런가. 누군가를 만나고 연락처를 주고받지만 그 뒤 한두번 만나고 전화하다가 흐지부지되거나, 아예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잖오.
그렇다면 딱 그만큼의 관계이고 인연 또한 소중하지 않을까! 나는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서 깨달았고,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소. 어떤 관계든, 헤어진 연인이든, “인연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기. “딱 그만큼의 인연이고 관계”인 셈이라오. 그리하여, 그 순간에 충실하고 좀더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해! 인연이 아니란 식으로 관계가 지속되지 못했음을 단정 짓는 건, 그저 자기 위안이 아닐까 하오. 그 인연을 맺었던 사람에겐 어쩌면, 예의가 아닌.
단 하룻밤, ‘원나잇 스탠드’라고 규정짓더라도 그들은 그 시간, 자신들의 감정에 분명 충실했음이 분명하오. 누구에게나 휘발되고 말 ‘순간’이라도 추억과 낭만이 곁들여질 수 있겠지. 평생을 잊지 못하고 간직할 어느 감정을 품을 수도 있겠지. 그렇듯, 낭만에는 ‘순간성’이 존재하오. 낭만의 (끝나지 않은) 끝에 허무와 슬픔이 존재하더라도, 어쩌면 다시 만나 낭만을 다시 살릴지 모른다는 기대 혹은 희망이 있기에 사랑은 끝나지 않는 법. (어째, 그럴 듯한 궤변(!) 같소?ㅎ)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은 법이오. “오늘밤뿐이라고 생각하자”던 그들이 다시 만날 약속을 힘겹게 하는 걸 보아하니. “내 맘과 다를까봐 두려웠어”라며 다시 만나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던 그들은 결국 5년에서 1년, 그리고 6개월. 어젯밤부터, 즉 6월16일부터 6개월 후 저녁 6시, 12월에 다시 만나기로 한다오. 어땠소? 이게 또한 사람의 마음 아니겠소. 어젯밤과 또 다른 아침의 마음. 아침의 주림을 저녁의 다담상으로 잊는, 우리네 사람살이.
비엔나의 연인에서 파리의 연인으로
그들이 다시 만날까,하는 건 그저 관객의 마음에 맡긴 것으로 생각했다오. 그런데 감독(리처드 링클레이터)와 두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도 궁금했나보우.
전화나 편지는 우울하다며 다른 어떤 안전장치도 하지 않은 그들은 9년 전 ‘later’이란 말로 서로를 보냈다고 하오. 사랑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주문. 낭만의 끝에 약속을 담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끝이 아닌) 헤어짐. “너와 있어서 행복해. 넌 모를 거야. 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토록 중요한지. 멋진 아침이야. 이런 아침이 또 올까”라며 사랑에 달뜬 사람들의 후일담이 궁금하지 않으면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우. 커흑~ ‘최악의 이별은 추억할 만한 게 전혀 없다는 것’인데 그들에겐 추억이 너무너무 많지 않던가 말이오.
사실, 6개월의 약속은 어긋났다오. 낭만의 깨어짐이지. <비포 선셋>에선 그렇게 설명된다오. 9년 전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이리 기억했소. 기차역에서 헤어진 제시는 버스를 타고 피곤한 듯 머리를 뉘이고, 셀린느는 기차에서 창밖을 응시하며 미소를 짓다가 눈을 감는. 그들의 로맨스가 흩뿌려진 비엔나 곳곳의 풍경들이, 그들 없이 덩그러니 남은 풍경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면서 이야기는 접혔고.
근데 <비포 선셋>을 다시 만나니, “낭만은 죽지 않는다, 다만 부활할 뿐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이 났소. 다시 따따부따 수다를 풀기 시작하는 수다 로맨스의 재현이라. 근데 꽃미남에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지닌 한편으로 개구졌던 제시는 움푹 패인 얼굴에 주름이라는 훈장을 차고 훌쩍 커버린 남성의 향기를 품고 있었고, 아침햇살 같은 상큼한 매력의 셀린느도 역시나 같은 훈장에 농익을 대로 농익은 저녁노을 같은 여인이 돼 있었소. 그러나 그게 나쁜 건 아니었소. 나 역시 그들처럼 세월을 머금고 30대가 돼 있었거든. 좋잖아~ 제대로 나이를 머금는다는 것. 앞선 해와는 다른 나, 내가 겪은 세월의 흔적을 품을 수 있다는 것.
이 낭만은 항상 시간의 한계에 봉착하는 속성을 지니오. 전과 달리 해 지기 전까지의 시간. 다시 헤어짐을 전제로 옛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
그들은 그날처럼 수다를 떨고 산책을 하더오. “나 좀 변했어?”라고 묻는 셀린느에게 제시는 “벗은 걸 봐야 알겠는데~”라고, 세월만큼 농 익은 그들의 수다를 풀어놓고. 물론 20대의 매혹적인 어록과는 다른 30대에 맞는 대화록을 재구성하오. 허투루 먹은 나이가 아닌, 현명하게 세월을 담금질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들의 수다에 매혹 당했다오. 같이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들의 수다가 귀에 쏙쏙 꽂히고 그 느낌과 감정을 알 것 같았소. 낯선 공간과 하룻밤이라는 제약이 준 강렬하고 절실한 감정과는 또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의 흐름. 나는 무엇보다 해 뜨기 전에 나타나지 않은 그들의 힘겨움이 가슴에 박히더군.
지리멸렬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제시는 “누가 만지기만 해도 내 가슴은 무너져”라며 공허감을 토로하고 셀린느는 “그날 밤 내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밤을 보냈는데, 다른 로맨스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라는 로맨스의 후유증을 내뱉지. 에휴~ 사랑아, 사랑아, 길을 묻고 싶다.
그러나! 30대라고 낭만이 없을쏘냐. 서글프고 지리멸렬한 삶에 끼어든 로맨스의 마술. 낭만은 그때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수다는 계속 돼야 하는 법이오. 우하하.
따져보자면, 두 사람, 로맨스에 대한 생각이 서로 바뀌긴 했소. 사랑하는 사람이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할 건지, 그렇게 서로를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던 셀린느는 사랑에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현실적인 여인이 됐다오.
반면 같이 오래 산 부부들의 권태감을 얘기하던 20대의 제시는 그래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며 로맨스를 옹호하는 30대가 됐다오. 허허. 재미있더군. 그들은 한결같은 순수와 로맨스로 살아가는 20대가 더 이상 아닌 로맨스에 대한 환상과 허상의 교차로에서 자신들의 현실과 위치를 인식하고 있는. 세상을 근거 없는 낙관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택하는 냉소까지.
로맨스, 당신 생의 로맨스에 축복을..
중요한 건, 로맨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었소. 해 뜨기 전의 그 잊지 못할 낭만은, 해 지기 전이라고 변하지 않았고 다른 모습과 형태의 낭만으로 나타나는 마술. 나는 그 수다를 다시 만나면서 행복했다오. 당신들도 알잖소. 9년 전 그들이 나누었던 그 하룻밤 로맨스가 얼마나 짜릿했는지. 사랑했던 기억은 세월이 흐르고,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고, 옛 모습과 달라지더라도 잊혀 지지 않는 법인가보오. 그리고 다시 열린 결말을 던지는 그들의 잔인함(?).
로맨스. 이 말만 들어도 나처럼 가슴 설렐 당신에게 권하오. 내게 이 영화(들)은 사랑 혹은 로맨스, 관계와 인연, 감정의 교류, 사람살이를 알려준 영화였다오. 내 가슴에, 심장에 박힌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신도 이들을 만나보시오. 다시 이들을 만나도 좋고, 이들과 비슷한 세월을 머금지 않아도 좋소. 혹시나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서 유럽 배낭여행의 낭만을 꿈꾸었거나 하다못해 기차나 고속버스를 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기라도 했다면. 낯선 곳에서의 낯선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새로운 관계를 같은 비일상의 판타지도 빙고~
뭐 꼭 그런 게 아니라, 잊지 못할 옛사랑의 추억이 있어도 좋겠소. 당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있소? 아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생각해 본 적 없소?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선택을 달리했다면 달라졌을 법한 잃어버린 기회. 물론 그런 가정은 무쓸모이지만, 현재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를 나눴던 사랑을 우연히 만난다면, 추억과 그리움으로 쌓였던 그 날을 다시 복구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은 어떡하겠소? (질문이 좀 가혹하더라도 용서하시오! ㅎㅎ)
아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건네고, 다소 길었던 내 인생의 어떤 영화(들)에 대한 허접한 감상을 접겠소.
<비포 선라이즈>를 꼭 봐야할 열사람!! (오래 전, PC통신 천리안에 나온 글)
1. 유럽여행의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은 사람. 2. 헌팅 또는 헌팅 당하려고 하는 족족 실패하는 사람. 3. 유럽여행 계획을 짜면서 비엔나의 갈만한 곳을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 4.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과의 가슴 찡한 데이트코스 일정을 고민하는 사람. 5. 친구인지 애인인지 헷갈리는 상대방에게 유치하지 않게 속마음을 터놓고자 하는 사람. 6. 오래된 연인과의 지루한 만남에 지겨움을 느끼며 화이트의 ‘7년간의 사랑’에 오직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 7. 정확한 표준영어회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8. 인터넷이나 영어 채팅방에 들어가서 감히 영어로 이성친구를 꼬시려고 하는 사람. 9. 이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을 위해 미리 인터넷 사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줄 사람. 10. 비포 선라이즈를 아직 보지 않은 모든 사람.
이건 내 마음대로 정한, <비포 선셋>을 꼬옥 봐야 할 열 사람!
1. 사랑했던 사람과의 지키지 못한 약속이나 바람 맞은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 2. 파리의 골목골목과 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픈 사람. 3. 유람선을 타고 지나간 사랑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픈 사람. 4. 잊지 못할 옛 사랑을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고픈 사람. 5. '이젠 더 이상 내게 사랑을 없어'라며 사랑에 회의적인 사람. 6. 사랑에 거듭 실패하면서도 '그래도 사랑은 있어'라며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7. 하룻밤이라도 평생을 잊지 못할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8. 언젠가 그 사랑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은 사람. 9.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 10.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그 영화를 잊지 못하는 모든 사람.
첫사랑이라고 했다.
어떤 감정의 파고가 출~렁일 때, 녀석에겐 그 '첫사랑'이 있었다.
인연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더라, 며 어떤 회한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그렇게 첫사랑.
그 첫사랑이 곧 결혼을 한다고 알려왔단다.
지는 벌써 결혼한 주제에 그녀가 결혼한다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고 녀석을 놀려댔지만,
그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문자와 녀석의 옛 추억을 생각하자니,
나는 녀석의 마음을 지지하고 싶었고 지지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누군 결혼하고 누군 결혼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그 마음이 불공평하니, 그렇지 않니, 저울질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다른 것도 아니고, 그건 마음인데 말이다.
녀석은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마음이 허한 것도 같고 좀 이상하다고도 했다.
내가 알기론, 녀석이 약간의 과장을 가미했을지는 몰라도,
십수년, 녀석에겐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그러지는 인연이었던 그 사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첫사랑'에 흔들리는 녀석의 감정을 지지한다.
마음의 흔들림, 그것은 또한 그 녀석이 살아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의 강한 힘에 다시 한번 놀란다.
결혼으로서 모든 관계에 종지부를 지어야 하는 그 놀라운 파괴력.
그러면서도,
세상 거의 모든 이들에게 그토록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그 '첫사랑'이 참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했다.
첫사랑, 대체 누구냐, 넌!!!
하찮은 나는,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며 인정 못한다고도 했지만,
언제든 불쑥 찾아오는 모든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과 내가 나누는 첫사랑.
그래서 그 첫사랑에 처음 사랑에 빠진 양, 최선을 다할 뿐.
모든 사랑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나는,
어쩌면, 첫사랑 환자?ㅋㅋ
첫사랑의 소식에 마음이 흔들린 녀석과,
그리고 이 노래를 듣고 싶어한 당신에게 바친다...^.^
소라누나의 '첫사랑'!
참, 제목의 '첫사랑, 그 이후…'는 뭐냐고?
'첫사랑, 그 이후에도 첫사랑은 계속 된다'는 나의 궤변이지.ㅋㅋ
“파란 대문의 우리 집 / 넓은 마당엔 널 닮은 유채꽃 / 니가 좋아하는 상추, 고추, 강아지도 몇 마리 기르고~ / 아침 햇살이 밝으면 / 새벽등산은 언제나 그대와 / 밤엔 도란도란 둘의 얘기 / 너의 손을 꼭 쥐고 자는 꿈.”
그리고 거듭 강조한다. 진심이라고. 이제는 돌아오라고. 내 꿈을 받아달라고. 사십년 동안 품어왔다는 그 꿈. 어떤 황혼녘, 사랑을 원하는 한 남자의 노래다. 갈구다. 욕망이다. 고백이다. 한 여인 앞에서 그는 여느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광경이 익숙하지 않다. 왜냐고. 고백하는 그와 고백 받는 그녀는, 눈에 익은 ‘젊은’ 이가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노인네’들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등이 구부정하며, 어두침침한 눈과 잘 들리지 않는 귀를 가진,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잃고 있는 이들.
묻고 싶었다. 그 익숙하지 않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들은 사랑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존재들인가. 그들의 욕망은 그저 늙은 자의 ‘노망’이고 ‘주책’인 걸까. 그 대세라는 ‘동안(童顔)’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어리게 보임 혹은 젊게 보임’에 대한 과도한 찬사가 야기하는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이 뮤지컬이 가져온 단상이었다. 여관 혹은 모텔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섯 빛깔 사랑을 그린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이하 ‘사랑소묘’)>. 소노여남(小老女男)의 ‘사랑’을 버무린 이 뮤지컬은 1996년 연극으로 초연된 뒤 뮤지컬로 변신한 작품이다. 연극시절부터 <사랑소묘>는 캐릭터보다는 드라마의 힘이 강한 작품이었다. 뮤지컬로 변신하면서도 드라마의 힘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동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극 때 봤던 작품을 뮤지컬로 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연극에서 힘을 발휘했던 언어가 뮤지컬에서의 음악으로 무난하게 변신하면서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다시 돌아가자. 나는 어떤 노년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들을 함께 떠올렸다. 그것은 절대 추하거나 주책스럽지 않았다. 여느 사랑이나 욕망과 다르지도 않았으며, 신성시해야 할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사랑’ 혹은 ‘욕망’의 한 단면이었다. 그 주체의 육체나 외모의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이 아름답고, 욕망이 당연했을 뿐. 영화 <죽어도 좋아>가 떠올랐고, 영화 <어웨이 프롬 허>가 머리를 스쳤고, 만화이자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다가왔다.
<사랑에 관한 다섯개의 소묘> 중 '할아버지 할머니'
뮤지컬 <사랑소묘>의 마지막 에피소드, ‘할아버지 할머니’ 역시 노년의 사랑을 다룬다. 앞선 에피소드인 ‘love start’가 시대착오적인 젊은이들의 다소 억지스런 사랑 풍경을 그린데 반해 이 사랑은 깊고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추억 한자락 담은 첫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는 모습은, 사회의 모진 시선 때문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노년 혹은 황혼의 존재를 사회는 감추고 싶기 때문일까. 으레 사랑은 노년 아닌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인식한다. 늙어서 하는 사랑은 ‘주책’이라고 치부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사랑과 욕망에 인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고 불만이었다. 수줍음 많던 시절의 첫사랑을 만나 노년의 로맨스를 꽃피우고 싶은 할아버지의 바람(물론 부인은 이미 사별한 상태다)과 고백이 왜 온전하게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런 할아버지에게 분명 마음이 있음에도 할머니(역시나 남편과 사별한 상태)는 자식들의 온갖 눈치를 다 살펴야하는지. 그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늙으면 판단력도 떨어지고,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의지해야 살 수 있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편견. ‘젊은’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노인’의 역할이나 틀에 가둬 그들을 사육하려 하는 건 아닐까.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를 잃고 있는 사회의 거친 풍경이다. 중요한 것은 노인을 돌보고, 노인에게 친절한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신에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늙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섣불리 규정하는 그 오류가 문제다.
나는 그 ‘로맨스 그레이’가 애틋하고 뭉클하면서도, 할머니의 주춤대는 마음이 못내 걸렸다. 옆집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할머니의 남편이 꿈에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면서, 나는 누구 손을 잡고 가야 한다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던 할머니의 에두른 고백도, 파란대문 너른 마당에 도란도란 함께 사는 꿈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욕망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주춤거림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의 단면을 봐야만 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건데!
<죽어도 좋아>는 노인에게도 분명 성(性)생활이 있음을 보여줬다.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를 통해 노년의 성은 부끄럽고 노망난 일도 아니며, 성은 젊음의 특권도 아니며, 노년의 성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운 성 중의 하나임을 각인시켰다. <어웨이 프롬 허>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아내와 그런 아내에 대한 기억과 사랑으로 그리움 가득 쌓아올린 남편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삶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노년의 어떤 사랑이 보여주는 웅숭깊음을 품고 있었더랬다. 한동네에 살고 있는 여든을 바라보는 네 노인네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역시 이 사회가 간과했던 사랑의 한 풍경에도 눈을 돌릴 것을 권한다. 젊고 예쁜 것들만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며, 노년 혹은 황혼의 사랑도 분명 축복하고 박수를 쳐야 할 일이라는 것도. 젊고 예쁜 것들도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노인을 위한 사랑이 있는 것도, 현재의 젊고 예쁜 것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궁금하다. 과연 이 사회는 노인들의 욕망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을까. 노인 복지가 한낮 그들에게 안주하고 쉴 곳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틀렸다. 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선의는 따지자면 위선이다. 나이는 숫자다, 나이가 뭐 중요한가, 라는 말. 노인들에게도 그 말은 적용된다. 느리고 더딜 지 몰라도, 그 욕망이, 그 사랑이, 젊디젊은 이들의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고, 왜 다른 시선을 적용해야 하는가 말이다.
“사랑이 어때서?” <사랑소묘>에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버럭한다. TV에서 나오는 사랑이야기에 할머니가 궁시렁대자, 할아버지의 대꾸다. 모두가 하는 사랑, 우리라고 하면 안되냐, 는 투다. 맞다. 하나도 틀리지 않다. ‘동화(童話)’도 있건만, ‘노화(老話)’는 없다. ‘육아(育兒)’도 있는데, ‘시노(侍老)’에는 무관심하다. 노인에 대한 무지와 무례가 기가 찰 정도다. 더 많은 노인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이 나와야 한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그 무엇이 될 때,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맨스 그레이에 감탄할 때, 그런 때가 와야 하지 않겠는가. 좀더 아름답고 품격 있는 노년은 누구나 바랄 터. 그것은 누구나 늙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로맨스는 끝나지 않는다. 황혼의 욕망도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생의 근원이다. 오래 살자.
아울러 파란대문집 너른 마당에서 상추․고추․유채꽃 기르며, 강아지도 키우고, 아침엔 새벽등산, 밤엔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손을 꼭 쥐고 꿈나라로 가고픈 할아버지의 사랑이 이뤄지길.
연극. 알다시피, 영화와 완전 다르다. 매력, 영화만큼 철철 많다. 말하자면, 연극이 영화보다 좋은 27가지 이유, 댈 수도 있다. 반면 영화가 연극보다 좋은 28가지 이유, 마찬가지다. 그냥 서로 다른, 장르다. 그럼에도 하나만 대보자. 연극이 영화보다 좋은 이유는, 연극이 전지현보다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 만진다고? 만진다고? 무엇을? 연극을? 배우를? 소품을? 아니, 도리도리. 무대의 공기를! 배우들이, 소품이, 연극 자체가 뿜어내는 공기를, 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연극의 매력. 그것이 내가 연극공연을 즐겨하는 이유다.
그런데 연극과 영화는, 아예 다른가. 아니. 둘은 '통'하는 것이 있다. 공통점. 그것은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 물론 실험적인 것들도 간혹 있지만, 둘은 서사구조를 갖추고, 그것을 관객과 나눈다. 이야기. 중요하다. 밑줄 긋자. 그것은 창조(창작)의 영역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그것은 뻥튀기자면, 창조주가 된다는 의미다.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애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 인물이 생기고, 사건이 발생하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완전 뻥튀겨 말하자면, 이야기가 스타트를 끊는 순간은, 천지가 창조되는 순간. 조물주가 마법을 부린 셈이다. 유후~ 환상특급행 열차를 타시라.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온 당신을 환영합니다.
<환상동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의 속성에서 출발하는 조물주(?) 3인방의 공동 작품이다. 광대 복장을 한 세명의 신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티격태격 한다. 보아하니 광대이나, 신을 어설프게 따라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고, 창조한댄다. 극장 들어오기 전 안내판과 포스터에서 보았던 세 단어가 생각났다. 사랑(Love), 예술(Art), 전쟁(War). 딱 떠오르지 않는가. 대하서사로망스. 익숙한 조합이다. 세 광대 각자가 지지하는 가치가, 그것들이다. 구라빨하곤. 현란하다. 어느 하나의 가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결국 합의하는 것이, 세 가지를 믹스하는 것. 사랑도 있고, 예술도 존재하며, 전쟁 또한 자리매김한 이야기. 프롤로그는 끝났다.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 창조주들의 환상연주곡.
주인공은 역시나, 피아니스트다. 예술의 개입. 한스라는 독일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광대(신)이 좋아라, 한다. 예술가의 손에는 피아노 대신 총이 쥐어지고. 아아, 어쩌란 말이냐. 인간의 생이란 원래 그러하지 않느냐. 역사의, 전쟁의 소용돌이 앞에선 자신의 의지나 재능 따위는 아무짝에도 무쓸모. 피아니스트라고 별 수 있나. 전쟁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는 인간의 삶. 전쟁통에서 헤매다 비슷한 처지의 적군 한명을 만나고.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각자의 처지, 혹은 예술적 감성이 서로를 알아보도다. 허허, 전장에서 적군과의 우정이 가능한지, 묻지 마라. 그들은 만나야 하고, 환상이 때론 전쟁을 이겨내는 법이다. 나는 비록,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하였으나.^^;
한적한 도시의 작은 카페를 상상하는 꿈 혹은 환상. 그리고 춤을 추는 한명의 무희. 적군의 여동생이란다. 꿈틀대는 한스의 예술적 감성. 아, 피아노, 피아노를 치고 싶어라. 그 춤에 어우러진 연주를 하고 싶어라. 전쟁이 생의 숨통을 조여오고, 피아노의 선율을 멈추게 했다지만, 어디 그냥 꼬꾸라지는 것이 사람이더냐. 노래하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자.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그러나, 전쟁의 힘은 역시나 세다. 인간의 의지를 개무시하고, 생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능력에선 아무도 따라오지마. 한스는 귀를 잃고, 적군의 여동생, 마리는 눈을 잃는다. 뭐냐. 피아니스트가 소리를 잃고, 무용수가 빛을 잃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럴 때 등장한다. 예술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낄 자리를 못찾던 사랑, 사랑, 사랑. 징징대며 땡깡부리던 사랑의 광대(신)이 신이 났다. 사랑이란다. 나도 애타게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사랑!
연극은 이제 각자의 소중한 것을 잃은 두 사람의 러브러브모드에 집중한다. 우연찮게 마주친 두 사람. 할 일은 러브러브 밖에 더 있겠나.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어디선가 누군가를 통해 듣거나 보거나 읽었음직한 이야기. 포연 가득한 전쟁 속에서 아름다운 예술이 꽃 피고, 전쟁도 어찌하지 못할 사랑이 이뤄지는 이야기. 전쟁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사람들의 사랑. 광대(신)들도 뻔한 아포리즘을 들먹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동화는 환상으로만 남지 않는다." "사랑은 마법이다."
그런데 이 통속과 상투성을 극복하는 힘이 이 연극에는 있다. 그것은 아마, 우리 마음 속 한켠에 자리한 환상의 결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세 광대의 절묘한 호흡과 익살, 이야기의 즐거움. 가뿐히 넘겨버리는 상투성. 포복절도할 뻔도 했다. 내가 햅틱한 무대의 공기에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마당에 마임까지 곁들인 세 광대(신)의 종횡무진은 그 뻔하고 빈약한 사랑의 결을 풍성하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진행된 한스와 마리의 러브러브가, 옛 동화와 결합돼 이야기는 좀더 풍성풍성. 아, 사랑은 애초 발생부터 환상이 아니던가. 환상 없는 사랑은, 사랑 아니죠. 누가 먼저 연주하고, 누가 먼저 춤을 췄는지 알 수 없게, 전쟁통에 포기했던 한스와 마리의 감성이, 꿈틀꿈틀. 아, 이 진득한 환상의 장면. 춤은 음악이 되어 울리고, 음악은 춤이 되어 공간을 채우는 사랑의 합연. 아아, 사랑이 꽃피는 앙상블. 친절이 친근함으로, 친근함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이 애틋함으로, 애틋함이 절실함으로 변하는 그 사랑의 마법을 읊조리는 사랑의 광대(신). 그들 각자의 불편함 또한 더 이상 불편이 아니게 만드는 그 사랑.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물론, 이건 거짓말. 그런데, 거짓이면 또 어떻고, 환상이면 또한 어떠리. 곰곰히 사랑했던 기억을 Rewind 시켜보라. 사랑이 뻥치지 않은 적 있더냐. "평생 행복하게 해 줄 거야"라는 가장 흔한 말. 아니라는 것 알면서 내뱉고, 아니라는 것 알면서 넘어가는, 사랑의 마법 혹은 구라빨. 그래서 나는 순순히 그들의 사랑에 넘어갔다. 눈물 글썽이며. "보이지 않음이 답답하지 않았고, 들리지 않음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쿨쩍쿨쩍. ㅠ.ㅠ 사랑의 광대(신)이 조정하는 사랑의 마법에 나는 걸려든 셈. 낚였다!!!
사랑은 또한 그런 것 아닌가. 산소같은 것이면서도, 벼락같은 것. 그래서 나를 살게도 하지만, 죽게도 하는 것. 물론 나의 말은 아니지만, <환상동화>는 그 말에서 '산소'와 '살게도'에 방점을 쾅쾅. 전쟁이 벼락처럼 다가와 소리를 잃게 하고, 빛을 잃게 하더라도,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 그렇다. 이 연극의 정체.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일임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사랑하고 싶음을, 알려주는 연극 아닌가. 전쟁 밑에서 납작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전쟁광대(신)의 진실 그 자체인 일갈마냥, "비명과 함께 태어나 고통과 함께 살고 결국 절망하여 죽는 것이 인간"이지만, 꿈꾸라고, 상상하라고, 사랑하라고, 말하더라. 또한 전쟁과 역사가 지나고 난 뒤 풍선처럼 빵빵해지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가를 느끼게 한 연극. 연극 자체의 서사가 대단하단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연극 보기.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이야기와 상상의 힘을 간과하고 있었다면, <환상동화 > 쪼아~ 천지가 창조되고 환상이 시작되는 순간의 황홀경에 빠질 수 있거든. 한스도 전장 속에서 그 작은 이야기와 상상 덕분에 살아나고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대사는 문학적이면서도 때론 반짝반짝 빛난다. 아포리즘에도 그닥 기름기를 느낄 수 없다. 작가 겸 연출가인 김동연 감독이 수많은 고전에서 영감을 얻은 덕인가보다. 무엇보다 세 광대(신)의 호흡은 쵝오.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음... 예술광대(신)가 마리와 한스의 사랑 마임 앞에서 뿜어내던 조그만 비눗방울의 향연. 그 방울방울에 올라타고 별들 사이에 길을 놓고 싶었던 내 마음.
다만 그 거대한 전쟁의 격변 속에서 짓눌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좀더 통찰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화자인 광대(신)들이 모든 것을 설명하다보니, 마리와 한스의 이야기는 별다른 힘을 발하지 못한다. 주객이 전도된 격이랄까. 광대(신)들이 한스와 마리보다 더 빛났고, 서사의 주체가 조연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더라. 그래서일까. 마리와 한스의 존재감은 완전 부족. 보고난 후, 광대(신)들의 재롱(?)이 우선 생각나. 전쟁통에서의 예술혼을 불태워야 할 한스의 연기도 어정쩡하고. 비중이 작아서 그랬는지, 연기력이 좀 안돼서 그랬는지, 선후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내가 본 공연의 캐스팅은, 사랑광대 - 최요한 예술광대 - 송재룡 전쟁광대 - 최대훈 마리 - 김지현 한스 - 이현배
P.S... 음, 근데 마리 역을 연기한 김지현의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갸름한 얼굴은, 옛날 여자친구를 연상시키더군. 이미지가 닮았달까. 내가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을 헤~벌리고 보더라는 친구의 말. 내 관람태도가 그랬던 건, 뭐 딴 이유 있겠어. 예뻐서. 예뻐서. 사랑스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