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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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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15:56 메종드 쭌/무비일락
5월. 이 따뜻한 봄날이 오면 생각나는 이야기와 선율.

우선, 우연과 약속이 빚은 어떤 영화들이 있다.
매년 5월8일이면 나는 그들의 행로를 좇아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먼저, 이 영화, <첨밀밀>.


10년이었다. '만나야 될 사람은 꼭 만나게 된다'는 사랑의 아포리즘을 촘촘하게 형상화했던 이 영화. 홍콩으로 함께 넘어온 친구로부터 시작해 숱한 엇갈림을 거쳐 마침내 뉴욕의 한 전파상에서 우연 같은 필연을 빚었던 두 사람.

이요(장만옥)과 소군(여명)의 사랑은 그랬다. 한끗 차이의 미묘한 엇갈림에 한숨 짓게 하고, 애타게 만들었다. 그들이 빚어낸 10년의 돌고도는 운명(론)은 5월에 결국 마무리됐다. 그들이 마침내 10년의 새침함을 뚫고 만났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순간을 이렇게 읊은 바 있다.

[5월8일의 영화 ①] 10년을 그리워한 사랑을 다시 만나는, 5월8일의 전파상...



참고로, 5월8일은 등려군이 사망한 날(1995년)이자, 그들(이요와 소군)이 뉴욕에서 다시 만난 날이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는 말을 믿고 싶은 사람, <첨밀밀>을 꺼내봐도 좋겠다.



이요와 소군이 만난 뉴욕의 5월8일은, 또 다른 연인들이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러브 어페어>의 테리(아네트 버닝)와 마이크(워렌 비티).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그들. 각기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풍덩 빠진다. 그야말로, 러브 어페어.


어찌할 수 없는 끌림. 불과 사흘이었지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3개월 후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과 장소가, 5월8일 오후 5시2분,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그렇게 그때, 서로의 사랑을 증명하듯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약속을 한 두 사람. 다만 한 사람이라도 나오지 않는다면 서로 찾거나 연락하지 않기. 진짜 그것이 사랑인지 고민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날, 그들은 그곳을 향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들을 기다린다.

나는 이 사랑에 쩔쩔맸다. 보는 내가 다 안타까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 나는 이렇게 읊었다. [5월8일의 영화 ②] 3개월의 약속, 5월8일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러브 어페어>. 1932년 처음 만들어졌고, 1939년에 첫 리메이크됐으며 데보라 카와 캐리 그랜트 주연으로 만들어진 1957년 리메이크작은 맥 라이언, 탐 행크스 주연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모티브가 됐다. 특히 애니(맥 라이언)은 눈물을 쏟으면서 이 영화를 보는데, 애니가 삭막한 현실에서 잊고 사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꿈을 되살리는 영화가 바로 1957년작 <러브 어페어>다.


1994년작은 가장 최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바람둥이 워렌 비티를 잠재운 아네트 버닝의 극강의 아름다움이 반짝반짝 빛난다. 캐서린 헵번의 깜작 등장도 작은 선물이다. 그래, 뭣보다 영화가 알려주는 이것. "누구의 인생에도 끼어드는 위험, 그러나 늘 위험을 무릅 쓸 가치가 있는 것, 그건 사랑이다." 사랑 지상주의자에게 권한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 5월25일에 꺼내보면 좋을 영화다. 그날은 아오이(あおい)의 생일이다. 아오이? 누구냐고? '아오이' 유우나 미야자키 '아오이'를 떠올린다면 땡! 그녀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히로인이다.


스무살, 아오이와 쥰세이는 약속을 했다. 우리,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 10년 후에는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자. 바야흐로, 사랑의 약속.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0년 전, 스무살에 했던 사랑의 약속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만날 사람은 역시나,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의 사랑이 복원되는 그날, 사랑을 복원하고픈 누군가는 이 영화를 봐도 좋겠다. 쥰세이가 회화 복원사로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쥰세이는 이리 말한다. “복원사는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리고 싶은 연인들의 이야기, <냉정과 열정사이>. 아오이의 생일이 5월25일인 것도 이유가 있으리라. 일본어 '아오이(あおい)'는 푸르다, 파랗다, 풀 등의 의미인데, 봄의 절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품은 것 아닐까.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불끈 이렇게 다짐했었다.
5월25일, 당신의 가슴 속에도 누군가가 있는가...



아울러, 잊히지 않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 말.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 이말의 출처는 바로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이었다. 사실 영화가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책이 훨씬 더 낫다. 5월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연애하듯이 썼다는 이 소설. 에쿠니가 한 챕터를 쓰면, 그 다음 츠지 히토나리가 자신의 챕터를 쓰면서 Rosso와 Blu를 완성했다.


참고로, 내가 좋아라~하는 우에노 주리의 생일이 5월25일(1986년)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데뷔한 그녀는 <스윙 걸즈>에서 존재감을 본격 피력했고,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 메구미 역으로 만개했다. 25일,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봐도 좋겠다.


사랑을 하건, 사랑을 하지 않건, 사랑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그러니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한다. 10년동안 애타게 엇박을 냈어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3개월 후의 약속을 부득이하게 지키지 못했지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10년 후 사랑의 약속을 서로가 지켜낸 것도, 모두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사랑!


어쩌면 그들 모두에겐 '약속'이라는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입밖에 꺼낸 약속이든, 마음으로 행한 약속이든. 그 약속은 미래였다. 추억은 과거이고, 약속은 미래라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말은 그래서 맞다.  한편으로 그 약속이 기적을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이들 영화가 빛난 것은 배우들의 연기, 감독의 좋은 연출 등도 한몫했겠지만, 뭣보다 음악의 힘이 컸다. 그러니, 음악도 함께 추천해야겠다.

우선, <첨밀밀>의 절대 공신은 '등려군'이다. 대만에서 태어나 중화권의 국민가수로 활동한 그녀였다. 첨밀밀에는 그녀의 대표작인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이 나온다. 이 음악, 잊지 못할 사람들 많을 거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5.02 18:39 메종드 쭌/무비일락
# 1. 일리노이 주립대학 병원이 궁금했나보다. 의료사고 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그래서, 수년에 걸쳐 조사했다. 의료사고 후, 병원의 실수나 잘못이 있을 경우, 그것을 환자에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사례가 37건 있었다. 그 중 환자가 소송을 진행한 건은 단 한 건이었다. 잘못의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가 의료사고의 후폭풍을 막았다. 환자 가족의 찢어지고 분통 터지는 심정, 말로 표현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진심 담은 사과가 있어서, 의료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병원, 의사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 2. 한국의 예를 보자. 2009년 '쌍용차 사태'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있었다. 이 폭력 이후, 지난 4월 기준으로 14명이 사망했다. 그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7명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쌍용차 해고자 193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10명 중 8명이 중증 이상의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


갑작스런 해고에 "나도 사람이다"라고 절규하고, "나는 살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취업? 복직? 아니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회사와 국가의 진정한 사과라고 한다.

쌍용차노조 이창근 해고자의 말을 들어보자. "생뚱맞지만 지금 쌍용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게 뭘까? 돈일까, 복직일까? 더 필요한 건 뭘까? 매번 조합원들과 얘기할 때 첫 번째 요구 사항이 뭐냐 물으면, 늘 ‘사과’라 말한다. 정부 차원의 유감 표명과 회사 쪽의 사과. 이게 가장 힘있고 설득력 있는 조치다. 돈도 안 들지 않느냐. 돈 안 들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게 첫 번째 치유 아닌가. 해고노동자들을 보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사과.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게 그리 힘든가 싶은데, 어찌나 고개가 빳빳하신지, 정부나 회사는 사과하지 않는다. 되레, 불법 행위를 했다며, 그들의 절박함을 순식간에 '죄'로 둔갑시키고, 그들을 '죄인'으로 내몬다. 하긴, 용산 참사 때도 그랬다. 사과하는데 그토록 오래 걸렸고, 그 사과라는 것도 진정성은 없어 보였다. 떠밀려 하는 사과. 잘났다. 


사과, 절망의 클러스터를 끊는 한 가지 방법

다시 사과를 생각한다. 인권영화프로젝트 옴니버스 영화 <시선 너머> 덕분. 특히 <반두비> <방문자>의 감독, 신동일이 만든 <진실을 위하여>가 그랬다. 거기도 사과하지 않고 외려 덤터기를 씌우는 무리들이 있었다. 유산의 위기 때문에 유명 병원에 입원한 보정(심이영)과 그의 남편, 인권(김태훈)이 있다. 헌데, 병원 쪽의 잘못으로 보정은 유산을 하고, 그들이 병원 로비에서 잃어버린 300만원은 병원 간호사(임시직)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병원장은 사과하지 않는다(고 버틴다). 돈은 임시직의 소행이라고 나 몰라라,하며 유산의 책임도 없다고 배째라다. 억울한 보정이 병원의 부당함을 인터넷에 올려 일이 커지자 병원장은 그들을 부르지만, 사과는커녕, 글을 내리라고 윽박지른다. (정규직) 간호사도 한통속이 되어, 임시직을 폄하하고 병원(장)을 옹호하는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고. 보정의 유산 경력을 들어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기까지하는 병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보정과 인권이 원한 것은 잃어버린 돈도 아니요, 유산에 대한 보상도 아니었다. 병원의 진심 어린 사과. 그것만 바랄 뿐인데, 병원은 '그것조차' 못해준다. 돈 들 일도 아닌데 말이다. <진실을 위하여>의 병원은 우리 사회의 뜨악한 단면이다.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시선. 존중은커녕 어떡해서든 인정하지 않고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 술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이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일인 것일까? 어릴 때 콧대만 세우는 법만 배우고, 사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일까.  낙인 찍힌 존재에 대한 긍정과 호명이 없는 세상. 그것이 못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절망의 클러스터가 형성되는 지점에 '사과 없음'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 이후의 태도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내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나는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인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적은 없는가. 나를 반성하고 성찰하게 만들었던 시간.

사과할 줄 모르는 사회가 빚은 관계망의 파괴는 지금 목도하고 있는 대로다. 사과만 제대로 해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정보인권에서 시작했던 <진실을 위하여>는 다양한 폭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다양한 층위에서 반성하게 만든다.


다른 옴니버스 영화들? 괜찮다. <파수꾼>으로 떠오르는 신성이 된 윤성현 감독의 <바나나 쉐이크>는 송곳 같은 유머로 인권을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봉주(정재웅)의 능청 맞은 연기는 정말로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꼬집는 영화.

그리고 김대승 감독의 <백문백답>. 요즘, 내가 꽂혀 있는 여자, 김현주. <반짝반짝 빛나는>의 히로인이자 평소의 밝은 이미지 그대로의 그녀가 드라마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온다. 불안이 잠식한 그녀의 신경증적인 모습은, 또 하나의 김현주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김현주의 또 다른 얼굴만으로 내겐 충분했던 영화.

김현주, 그녀라면, 송편이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외친 그말, "내 여자한테 손끝이라도 건드리면 가만 안 둬"(내 여자 = 정원(김현주))의 심정을 108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나는, 김현주 덕분에 산다. 우헤헤...


굳이 인권 따지지 않고 봐도, 충분히 재밌는 영화들이다. 나는 어쨌든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정재승과 김호의 공동저서, [쿨하게 사과하라]가 전하는 올바른 사과의 네 가지 요건.


1. 유감의 표현
2. 책임의 표현
3. 재발 방지의 약속
4. 개선책 제시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4.30 23:53 메종드 쭌/무비일락
봄짓.
4월이 간다. 봄 같지 않은 봄이다. 맞다. 오늘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봄비가 주룩주룩. 헌데, 봄은 모름지기 변덕대마왕.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아이의 몸짓 같아도, 봄이니까. 그래, 봄짓이다. 봄짓, 4월.

벚꽃.
벚꽃이 거진 떨어졌다. 이번 비에 후두둑 끝장을 냈다. 봄비, 벚꽃 종결자.  벚꽃은 피는 순간부터 '벚꽃비'를 잉태한다. 나는, 벚꽃의 몸짓으로 4월을 읽는다. 매일, 벚꽃의 상태를 보면서 하루를 읽는다. 벚꽃은 주목 받는 시기가 무척 짧다. 그럼에도 벚꽃은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벚꽃 축제. 전국 각지에서 벚꽃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소비된다. 그것으로 끝? 벚꽃은 비가 되면서, 어쩌면 슬프다. 봄꽃, 벚꽃.

4월 이야기.

그래. 4월이니까. 내 4월에 빠져선 안 될, 연례행사. 마지막 날에서야 틀었다. 역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벚꽃비가 내렸다. 마츠 다카코는 여전히 대학 신입생이다. 좋아하는 선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학1학년의 여학생.

그 서툶이, 어리바리함이 더욱 사랑스러웠던 영화. 이와이 슌지 감독. 이 미친 감성의 소유자. 마츠 다카코. 더 없이 그 감성에 어울리는 여자. <4월 이야기>는 훌쩍 지나가는 4월의 봄날처럼 러닝타임이 짧다. 어떤 사랑이 그러하듯.

봄날, 사랑.




시작.
화려한 벚꽃 사잇길로 이사차량이 들어서는 것으로 <4월 이야기>는 시작한다. 우즈키(마츠 다카코)의 도쿄 입성이다. 춥디 추운 훗카이도에 살던 그녀로선 이 봄, 이 벚꽃이 그리 좋을 수 없다. 좋아하는, 아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야마자키 선배가 있는 도시니, 그가 있는 서점까지 사랑스럽다. 봄빛, 반짝.


미소.
저 미소를 보라. 4월의 여신이 짓는 저 미소. 딴 건 다 필요없다. 이런 미소를 날리는 여자만 옆에 있다면. 세상은 저 미소 하나로도 충분하다. 존재의 이유? 그 따위, 저 미소 앞에서 삭제! 고로, <4월 이야기>를 보고 나면, 세상엔 딱 두 여자로 나뉜다. 저 4월의 미소를 짓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눈에 콩깍지가 씌인 놈에겐 그녀의 어리바리도 서툶의 미학처럼 느껴질 뿐이다.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기억에 깊이 각인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4월이면, 저 미소 하나면 충분하다. 4월을 버틸 수 있는 이유. 봄눈, 미소.


흠칫.
놀라면서 전율이 일었다. 저렇게 서늘한 아우라. 저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한마디로 '돋았다'. 저 4월의 미소 소유자가 저런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니. <고백>. 내용이나 그녀의 역할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 사진 하나에 나는 완전 압도당했다. 4월에 볼 엄두, 나지 않았다. <4월 이야기>에 나는 복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손. 봄밤, 오싹.


기사.
풋풋한 여대상에서 창백한 복수의 화신까지. 기사의 제목이다. 국내 개봉일자로 따지면, 11년, 제작년도로 따져도 그 정도는 될 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발목 치마를 펄럭이며 하얀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던 소녀가 표정이 없는 말투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복수를 하는 엄마로 바뀌었다. 대변신. 기사 표현대로 잔인하다. 추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살짝 그런 점도 있었다. 아직 <고백>을 보지 않은 건. 지금은 어쨌든 4월이니까. 봄날, 추억.

마츠상.

과거, 그녀를 소개한 적도 있다.( 당신은, 내 4월의 여신...) 사실, 4월에만 거의 떠올리다시피 한 그녀였는데, 기사를 보고 더 좋아졌다. 야망 없음에 대한 '고백' 때문이었달까. "배우라면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게 옳지만, 나는 변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고백>의 내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그건 감독이 끌어낸 것이다. 나는 온힘을 다해 노력했을 뿐이다. 더 나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야망이 없는 게 내 문제라면 문제다. (웃음)." 야망 없음을 토로하는 이 무서운 배우. 참고로, <고백>은 지난 2월, 일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봄신, 여신.

마츠상2.

하나 더 있다. 더 좋아하게 된 계기. 그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던 그녀, 눈물을 흘리며 "살아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녀는 삶이라는 선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각인하고 있는, 보기 드문 배우다. 일본 동북부 지진에 대해 그녀가 남긴 말. "지금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진심을 다해 판단하고 선택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렴, 아무나 여신이 되는 건 아니다. 마츠상, 당신은 여전히 제 여신입니다.^.^ 봄밤, '4월의 고백'. 

봄비.

그래. 방사능이니, 최악의 황사니, 봄비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날려버려~ 그냥, 봄비.

첫사랑을 만나 그에게 빌린 빨간 우산을 들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면서 환하게 미소 짓던 우즈키. 얼굴 가득 미소.

봄비는 그런 것이야. 봄비가 품고 있는 낭만을 쏟아지게 하는 것.

4월의 봄비 오는 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빨간 우산이 되고 싶다.

봄비, 낭만.



4월.

오늘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그 어느해 4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즈키의 흔적을 좇아 벚꽃비 혹은 벚꽃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도쿄를 누비리라.

빨간 우산도 하나 챙기고, 자전거도 기왕이면 빌려서. 도란도란 <4월 이야기>를 나누면서.

4월이 지나는 봄, 나는 그런 4월을 다시 기다린다. 봄달, 당신.

 
오늘이 지나면,
나는 이제 <고백>을 보러갈 수 있다. 마츠상, 만나러 갑니다~




P.S... 벚꽃, 고백이 함께 맞물린 오늘의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송편(김석훈)이 오늘, 마침내 정원(김현주)에게 고백을 했다. 담백한 고백. "내 여자 합시다." 내가 왜 좋았는지 몰라.ㅋ 정원의 눈이 초롱초롱. 그 돋는 고백을, 정말이지, 그만의 스타일로 해댄다. 그런 닭살 고백을 그렇게 담백하게 할 수 있다니. 중요한 건, 벚꽃 아래에서였다. 나는 벚꽃이 그 고백을 부추겼다고, 벚꽃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벚꽃 고백.

"누군가한테 내 마음을 주고, 슬픔을 주고, 내 시간을 준다는 게 나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오래 망설였어요... 나보다 내 눈이 먼저 당신을 보고 있고,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당신을 담고 있어요. 좀 더 버텨보려 했는데 더이상은 무리에요.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방. "내 여자 합시다. 친구 때려치우고 남자, 여자로 만나 봅시다, 우리." 하악하악. 내가 송편이 된 줄 알았다. 왜 그리 좋아서 바둥댔는지. 흥, 벚꽃 때문이다. 나도 벚꽃 아래서 고백하리라! 송편과 정원, 건투를 빈다. 진심이다. ^_^

근데, 정원이 나는 좋아 죽겠다. 이런 캐릭터를 좋아한 적은 처음이다. 꺄아아아아.

내일이 다시 기다려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짱이다. 4월의 고백, 반짝반짝 빛나는.
 
엉뚱하게도,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 생각나는구나. 그래, 4월의 도쿄, 벚꽃눈이 내리는 봄밤, 나는 [봄밤]을 읊조리며 고백한다. 그 고백의 당사자,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날엔 이 노래를 연주해도 좋겠지.
'봄날, 벚꽃, 그리고 너'(에피톤 프로젝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3.12 17:41 메종드 쭌/무비일락
<블랙 스완>의 히로인은 나탈리 포트만이지만,
숨겨진 히어로는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아닐까.
지금은 없는, 종로의 코아 아트홀에서 내가 본 그의 첫 영화, <레퀴엠>.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다. 흔들리는 스크린은 충격에 휘둘린 내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제니퍼 코넬리는 뭘 어찌해도 치명적이고, 아름답다. 여신, 맞다. 
'치명적 지성미'라는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 나도 한 표 보탠다.

중독된 당신에게 고함, 꿈은 죽었다!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참함을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영상을 대면하는 동안 먹먹해지는 가슴은 감독의 의도인 듯하지만,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감정을 피할 수 없다. 피폐함이 밀려오고 갈증도 수반된다. 데뷔작, <파이>로 미국 독립영화계의 앙팡테리블이 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인 <레퀴엠>의 원제는 <Requiem for a Dream (꿈을 위한 진혼곡)>
.

중독된 자들의 추락사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극과 같은 꿈을 다룬다. 현대사회의 ‘중독’에 대한 가감 없는 표정과 뜨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절망에 대한 보고서다. 중독이란 ‘늪’에 한발씩 다가서면서 파멸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사회의 빛과 어둠사이 간극을 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독의 이면에 존재하는 ‘결핍’까지.

<레퀴엠>은 도입부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신경전을 통해 각자가 집착하는 -내면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중독을 한 꺼풀씩 드러낸다. TV다이어트쇼 시청이 유일한 낙인 어머니와 그 TV를 팔아 마약비용을 마련하는 아들간의 허무맹랑한 핑퐁식 공방은 차츰 외연을 확대하는 모양새다.


어머니, 사라(엘렌 버스틴)는 TV다이어트쇼와 다이어트약에 빠져들면서 환상에 빠진다.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친구 타이론은 마약과 본격적인 거래를 튼다. 그들에게 마약은 정신적인 만족뿐 아니라 폼나는 삶을 꿈꾸게끔 만드는 ‘무기’다.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중독의 확장성은 놀랍다. 차츰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게끔 유도한다. 그 과정은 계절의 바뀜을 통해 드러난다.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은 중독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그들의 경쾌한 발걸음처럼 빠르고 희망적으로 채색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도달하면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결국 그들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봄은 결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계절로 망각되고 만다.

그 절망의 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희망, 꿈은 바로 여기에 있어’라고 간드러진 울림으로 그들 삶의 구심점이 됐던 중독은 단숨에 갈라진 목소리로 ‘카운트 블로’를 날린다. ‘이건 현실이 아냐’라고 거부하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산산조각난다. 누구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환멸로 가득한 시선만이 배회할 뿐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남은 건? 맞다. 결핍’밖에 없다. 사라에겐 좋았던 시절의 가족에 대한 공허함이, 해리는 꺾어져 버린 지난 꿈에 대한 상실감이 둥지를 틀었다. 마리온에겐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애정이 결핍돼 있다.

한편으로 영화는 중독과 결핍, 파멸의 수순을 숨 가쁜 영상으로 표현한다. 관객이 흡사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영상 메시지를 전파한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반쪽으로 조각내고 하얀 가루, 동공의 숨 가쁜 움직임, 덜거덕거리는 이를 빠르게 교차 편집한 몽타주(감독은 이를 ‘힙합 몽타주’라고 명명했다). 편집은 정교하고 빠르다.

그러나 이 같은 현란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담은 화면이 영상의 기교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인간 내면의 풍경을 극한으로 끌고 가면서 관객을 화면에 부착시킨다.

중독은 자기 증식한다


사라는 중독의 자기 증식과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TV부터 다이어트, 약물로 이어지는 중독의 확대 재생산. 냉장고는 ‘변신괴물’이 되어 사라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고, TV다이어트쇼의 환영들은 스멀스멀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와 사라뿐 아니라 관객을 혼비백산하게끔 만든다. 중독의 심화로 치닫는 계단을 통해 현대인이 맞닥뜨린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난다.

중독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산물이다. “소비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행복해질 것이다”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자본의 횡포는 이미 일상을 주무르고 있다. 일례로 자동차와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문명화는 인간 영혼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준족의 발전(?)을 이룬 상태다.

헤로인,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에 대해 ‘중독’이란 단어를 우선 떠올리지만 기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TV, 음식, 과자, 섹스, 다이어트, 게임 등 버라이어티한 상품이 진열된 자본의 백화점은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중독이라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고 강요하고 자본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낙오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즐기는 것을 넘어 집착과 의존의 단계로 점프하는 순간, 삶은 다름 아닌 중독과 마주대하게 되는 셈이다.

<레퀴엠>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허버트 셀비 주니어는 “그러한 판타지의 뒤를 좇을 때 마음속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돼간다”라고 일갈했다. 구멍은 곧 결핍을 뜻하고 중독은 자연스레 결핍과 공존을 꾀하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일지도 모른다.

꿈이라고 자위하면서 더욱 집착하는 중독은 상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통령병’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중독 증세를 보인 사람들을 보아왔고 ‘신용카드’란 이름의 병폐를 겪고 있다. 미디어를 가장한 중독성 전파는 여전히 횡행하고 인터넷도 자칫 잘못하는 순간 중독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중독돼 있을지 모르는 우리네 모습.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중독된 영상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는 금요일(9일) 밤 0시 55분 KBS1TV 독립영화관에서 <레퀴엠>을 방영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2004년 7월 국정브리핑 기고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2.12 23:47 메종드 쭌/무비일락
그레이 아나토미(그아) 시즌6.
지난해 11월20일 막을 내렸다.
내 일요일의 고갱이이자 종결자였다. 

일요일 늦은 밤의, 월요일로 넘어가는 그 낙하하는 깊은 밤의,
낙(樂)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 때가, 절기상 '소설'이었다.
눈이 내렸고, 겨울이 왔다. 가을이 뚝하고 떨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그아 빠돌이'.
의학드라마로서도 그렇지만 사람의 이야기로서 그아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감초처럼 곳곳에서 숭숭 이어지고 어긋나는 사랑의 작대기 또한 흥미진진이고.
(뭐, 나도 동의하는데, 그아는 틈만 나면 크로스 액션 연애질하는, 사랑 이야기!)

시즌6, 다른 시즌보다 흥미나 재미에서 약간 떨어졌었는데,
피날레가 아주 폭풍이었다. 등장인물 누군가 죽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호러!
시즌7을 극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구성으로, 한방에 시즌6의 인상을 바꿨다.

"모든 앎이 그렇지만, 의학이야말로 보편적인 앎이다. 생로병사에 관계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는 화폐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절대 화폐화될 수 없는 것이 의학이다. 내 병을 고쳐 주는 것을 어떻게 상품을 사고파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가늠할 수 있으랴.… 요컨대, 의료는 원칙적으로 '화폐의 외부지대'인 셈이다."(《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p.165)

나도 병원이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래서 의무(무상)의료를 지지한다만,

어쨌든 그아 시즌6에선, 
화폐의 외부지대 아닌 자본주의 종속물로서의 병원의 고민도 보여줬다.
죽음 직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셰퍼드가 어떤 깨달음을 보여줄지도 궁금.
임신했다가 유산하고 만 메러디스는 심리적인 충격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크리스티나와 오웬의 트라우마 사랑과 그 사랑에 끼어든 테디는 어찌 될 것이며,
그밖에 렉시, 알렉스, 마크, 웨버, 베일리 등등에 새 인물은 어떠한 파장을 던질까.
 

현재 미국 abc 에선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7이 방영 중이다.
다운 받아 보지 않는 성향상, 이제나저제나 목 빼놓고 한국 방영을 대기중인데.
아, 저들의 웃는 모습을 보라. 저들의 웃음에 동참하고 싶구나.

그나마, 그아의 공백을 대타로 나와서 훌륭히 메우던, <시크릿 가든>도, 끝.
어쩌다, 지난 2년 전(<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어,
'이어 클로저(Year Closer)'가 됐던 현비니.


<만추>, 보고 싶다. 탕웨이도. 하악하악.;;

결론? 아, 그아도 시가도 없고, 으...
일요일 종결자가 필요하다! 일종, 당신을 원해요!! 훅~ 쪼옥~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2.06 14:48 메종드 쭌/무비일락
 
“야구하자.”

지금은 야구 비시즌. 야구팬들에겐 고역인 계절이다. 겨울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야구가 없는 건 참 싫다. 그래서 영화 보는 도중 나는 벌떡 일어났다... 고 하면 뻥이지만, 그러고 싶었다. 가슴이 울렁거렸거든.

김상남(정재영)이 청각장애인 야구소년 차명재(장기범)에게 스케치북에 써서 건네는 말. “야구하자!” 아, 나도 저 말, 진짜로 하고 싶거든. 봄을 기다리는 이유. 야구. 야구하자! 이 영화 <글러브>는 그러니까, 염장(지르는) 영화다. 아니, 비시즌의 오아시스?


“야구는 마약이잖습니까.”
우리 돈 잘 버는 주원이 아니, 야구 잘했던 김상남의 친구이자 매니저 찰스(조진웅)는 안다. 비록 홈에 들어오다 다리가 부러져 야구를 그만둬야했지만, 그놈(김상남)을 통해 알게 됐다. 야구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뿔싸. 정부는 대마초를 금할 것이 아니라, 야구를 금해야 하는 거 아냐? 야구가 마약이라잖아! 대마초가 무슨 마약이니, 쯧. 담배도 차라리 금해라. 인민 건강에 더 악영향을 주잖아!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H2》 중에서)
청각장애인들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는 타구 소리를 듣지 못해 낙구지점 포착에도 큰 애로가 있다. 타구와 함께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야구인데, 그들은 그러질 못한다. 전국대회 1승은 그래서 ‘꿈’이다. 어떡하든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은. 야구계의 말썽꾼 김 선수가 처음, 그들의 꿈을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이다. 야구부에 열성인 음악 선생님 나 선생(유선)에게 아이들을 그냥 즐기게 하라고 툴툴대는 것도 야구를 알 만큼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기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즐기기 위해선 이겨야 한다. 김 선수도 결국 토하듯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망’없는 야구선수이지만 야구를 즐기는 히로(《H2》의 주인공). 그는 “뭐, 야구야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할 거지만. 난 동네야구든 뭐든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동네야구든 뭐든, 이기려고 던진다. 야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년에게, 야구를 즐기기 위한 방법은 이기는 것이다. 명재도 즐기고 싶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여기서 뭐가 자꾸 올라와요. 1승하고 싶어요.”

‘야구는 즐기는 것’이라고 자꾸 세뇌했다. 워낙 지는데 익숙한 내 야구팀(노떼 자얀츠)이니 그리 했을지도 모른다. 내 팀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대범한 척, 대인배인양 포장(?)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털어놓겠다.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면 속상하고, 짜증난다. 이기면 세상을 다 가지는 거다. 정말로 이기고 싶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1승에, 그들의 야구 경기 승리에 목을 쭉 뺀 이유다.

히까리의 어머니는 히로에게 말했다.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 히데오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속 시원해지려는 거 아냐? 히데오에겐 비밀이지만, 아줌만 히로 편이야.” 히로 편이기에, 우리 히로가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이겨야 한다. 1승, 거둬야 한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불쌍하게 보고 봐준다면 더욱 용납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는 도저히 이기기 힘든 강팀이 아니다. 바로 우리를 불쌍하게 보는 팀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 뻔한 것임에도, 임팩트 빠바방이다. 자존감. 김 선수는 그것을 안다. 무엇이 그들을 야구하게 하는지. 세상의 불쌍한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것. 아마도 그들은 김 선수를 통해 세상을 한 번 더 배웠을 것이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요구하고 권리를 내세워야 한다. 터트려야 한다. 그건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비장애인은 물론 장애인들도 요구해야 한다. 야구도 함께 하듯, 세상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도 마찬가지다. “밟는 건 상관없는데, 일어설 힘마저 뺐으면 안 되잖아!”

“벙어리라뇨, 청각 장애인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이겠다. 영화는 자주 지적한다. 심각하지 않게, 웃음을 통해.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언어, 영화는 자연스럽게 추방하자고 권고한다. 더불어, 일반인, 정상인 따위의 말도 조심해야 하겠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장애인을 일반이 아닌,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구획 짓게 돼 버리니까.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왔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한다. 야구의 재미를 알아차린 소년들의 땀과 노력이 빛난다. 유명 야구선수인 김 선수의 눈빛 하나에도 그들은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만큼 그들은 야구를 하고 싶은 거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볼을 던지고, 사인을 맞추고, 견제 연습을 하는 아이들. 그들은 소리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왔다! 너희를 짓밟아 주겠다. 꼭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나는 눈물을 꾹꾹 누르지 않았다. 그저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뒀다. 자연스러운 내 감정이었으니까. 나도 파이팅을 보탰다. <글러브>는 마냥 눈부시지만은 않지만, 그들의 소리없는 함성에 한 목소리 보태고 싶은 영화다. 누군가에겐 야구는 그렇게 새벽녘에 몸이 부서져라 던지는 공이다.


“가끔은 필요하지 않니? 얻어맞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으니까” (《H2》)
물론,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은 매번 얻어맞고 진다. 그렇다고 지기 때문에 야구를 포기해야 할 까닭은 아닌 게다.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도, 아까와 지금은 다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며, 일구일구, 모든 것이 다르다. 야구공 하나에 실린 마음부터 모든 것이. 그들은 배우고 있는 거다. 야구를 통해. 지는 것을 통해. 또한 이기기 위해. 나의 영웅, 히로도 말했다. “대체로 스포츠란 이긴 시합보다 진 시합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이니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그들은 이미 야구를 시작했고 하고 있다. 상처는 이미 예견된 바다. 상처 입은 날들이 많아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만 받고, 동정만 받을 순 없다. 대개의 어른들은 위해주는 척 하지만, 실은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마음을 위해서다.

‘GLOVE에서 G를 빼고, LOVE’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글러브>는 우직하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내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김 선수와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이 맺는 관계가 그렇고, 김 선수와 찰스가 맺는 관계도 그렇다. 변화구 구사하지 않고 직구로만 승부한다. 아무렴, 그건 스트라이크다.


원장 수녀(물론 나중에는 바뀌게 되지만)를 비롯해 학교 운영위원회 어른들을 묘사한 것도 그렇다. 과장하자면, 지금 한국 교육계를 향한 일갈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배제된, 일선 교사가 배제된, 교장 등 교육 정책가(정치꾼)들의 책상머리에서만 결정된. 그들의 나쁜 머리에서 나오는. 김 선수, 일선에서 애들 가르치다보니 잘 알게 되잖나. 그의 일갈이 유쾌통쾌상쾌했던 이유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의 의지보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꿈을 포기해야 된다는 거, 아직 모르는 애들입니다. 이런 게 교육이면 뽕이고, 우리가 그런 어른이면 니 뽕이고, 학교가 그런 거라면 니미 뽕입니다.” 아, 정말 아쌀했다. 니미 뽕들.

야구는 그러니까, 사랑. 야구 안에 사랑있다. 뭔, <파리의 연인>인가 싶지만, 그만큼 뻔한 설정이지만, 고개를 끄덕댈 수밖에 없다. ‘GLOVE’에서 ‘G’를 빼자. ‘LOVE’. 야구 없는 시즌. 야구 없이 못살겠다는 아우성을 강우석 감독은 잘 캐치해줬다. 내 평가? 단순하다. 야구를 다뤘다. 그것이 다다. 나는 <글러브>를 강우석 최고의 작품으로 뽑는 아주 편파적인 판정을 내린다.


극중 김 선수의 스케치북 대사를 재인용하겠다.
“야구하자. 야구, 혼자 볼 때보다 같이 볼 때가 더 재미있다. 너, 알지?”

봄이 와야 하는 이유, 단순하다. 야구해야 하니까. 야구봐야 하니까.


참, 나는 가린다.
여자. 거칠게 말해, 세상에 여자는 딱 두 부류다. 야구 좋아하는 여자와 야구 안 좋아하는 여자. 야구 좋아하는 여자가, 진짜 여자다. 나는 그렇게 가린다. 니미 뽕이라고? 맞다. 나는, 니미 뽕이다. 니미 유치 뽕이다.^^;; 우헤헤~ 야구, 빨리 하자! 야구는 사랑을 싣고, 사랑은 야구를 싣고. 봄은 야구와 함께 온다. 봄은 야구로 시작된다. (남하당의 박영진 풍으로, "준수의 야구사랑을 매도하지 마아아~)



거듭 촉구한다.
야구하자!

1승도 하자,
충주성심학교야구팀!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1.02 14:40 메종드 쭌/무비일락

끝내 다시 건너지 못한 이름, 황해
[영화하나객담]  <황해>


(* 스포일러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 들어서 있음.)

김훈 작가였지, 아마. 세계의 기본 구조는 악과 폭력이라고. 세상의 온갖 야만성과 폭력은 사랑이나 희망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 폭력의 근저에 ‘이권’이라는 것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이권을 향해 치닫고, 그것에 의해 조율된다. 이권 없이 세상은 옴짝달싹 않는다. ‘인맥’이라는 말속에도 그 이권의 냄새가 배여 있을 정도다.

아, 오해는 말자. ‘이권’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로, 이권의 모든 것을 말할 의도는 없다. 이권은 때론 세상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힘도 된다. 내게 가해지는 부당한 억압, 그것에 저항하는 것, 또한 거칠게 말해, 이권이다. 이권을 위해 저항하는 거다. 내가 불편하고 힘드니까. 이권을 향한 인간의 촉수는 본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은 이성이다.

물론,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 그 이권은, 오로지 화폐의 규모나 집이나 자동차로 환산할 수 있는 화폐성을 뜻한다. 아마 그것을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할 가능성이 꽤 클 테지만.


어쨌거나, <황해>를 보고선,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이권 외에도 플러스 원.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 그것은, 치정(癡情). ‘치정극’하면, 여느 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 아침의 치정극이야,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조미료에 가깝지만, <황해>의 것은 세상의 근간이자, 퍼즐을 맞추는 메인 재료다. 숨겨진 레시피라고나 할까.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싶은, 세상 깊은 곳의 추잡함 혹은 더러움.

황량한 멜로드라마 


이 영화, 폭력성 혹은 잔인함으로 얘기하는 수사들, 많다. 그것도 맞다. 허나, 나는 그것보다 로맨스로 봤다. 다만 그 앞에, ‘삭막한’ 혹은 ‘쩨쩨한’을 붙여야 되겠다. 어째 하나 같이 이곳의 수컷들은 삭막하고 쩨쩨한 존재들이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상상하거나, 이를 추궁한다. 구질구질한 궁상남(들). 그러면서 센 척, 있는 척, 대범한 척 한다. 억지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돈이 많으면 뭘 하나. 늘 불안에 떨고 이권만 먼저 생각한다.
(물론, 정부와 짜고 악행을 저지르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어둡고 잔뜩 찌푸린 채 시작하고, 시종일관 이 톤은 유지된다. 옌볜의 택시기사, 구남(하정우)의 표정부터 그렇다. 빚더미에 짓눌려 있으면서 그는 한탕을 바라며 마작놀음에 매달려 있다. 아내는 돈 번다고 한국으로 갔는데, 깜깜무소식이다. 그런 그에게,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면정학(김윤석), 면가라고 불리는 개장수가 한 놈 찌르고 오면, 빚을 갚아준단다. ‘공존’은커녕 ‘생존’만 희번덕대는 공간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밀항을 하고, 주소 하나만 들고 살인대상을 향해 구남은 황해를 건넌다. 열흘의 시간. 6만 위안에 목숨을 걸고, ‘살인자’라는 죄명까지 쓰건만, 구남에게 큰 고민은 없어 보인다. 노모와 아이도 있지만, 그는 빚과 아내 없는 현실, 부정한 상상이 빚어낸 삶의 피로감을 견딜 재간이 없다.

돌고 있다는 개병(광견병)이 그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일까. ‘어미를 물어죽이고 나중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죽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물어 죽인’, 어릴 적 기르던 개를 닮아간다. 칼에 묻힌 피를 씻어낼 도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흔들리던 아마추어 범죄자도 도리가 없다. 모든 상황이 그를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애달프게 보고픈, 바람난 것이 아닌지 불안한 아내 찾자고, 빚진 돈 갚아 집안 꾸리고자 한 가장이었을 뿐인데,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아, 이런 몹쓸 멜로드라마를 봤나. 사랑도 야만과 폭력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 사실이구나. 아니, 사랑은 야만과 폭력 앞에 쉬이 힘을 쓰지 못한다.


악의 다양한 얼굴


구남이 그렇게 입체성을 띠고 있다면, 구남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장본인, 면가는 악의 전형성이다. 이권에 눈 먼 극악한 인간의 단면이랄까. 면가는 오로지 하나만 본다. 내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차갑고 단순하다. 그것을 본능이라 말할지 몰라도, 철저하게 이성에 의한 작동이다. 이권을 취하려면, 잔머릴 굴려서 앞뒤 재야 가능하다. 동정이나 연민? 그런 건 없다. 이성으로 그것도 몰아내니까.



면가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소용없으면 죽인다. 살려주는 건 하나, 돈이 될 때, 돈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구남에게도 그러하며, 또 다른 폭력과 악의 축인, 김태원(조성하) 패거리에게도 그러하다. 이권의 취득 여부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다. 그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온몸으로 체화한다. 소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후려치는 모습. 면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순 없다. 그 모습은 또한, 소뼈다귀만 안 들었을 뿐이지, 우리 사는 세상과, 우리와 다르지 않다.


김태원도 전형적이다.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한 없이 약한 존재. 운수회사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만, 실은 그는 양아치이자 조폭이다. 형-동생 한다는 관계의 동생을 살인청부하고, 그게 밝혀질까 관련자들을 없애자고 안달복달이다. 눈앞에서 협박하는 면가 앞에선 설설 기지만, 뒤에선 살인을 교사한다. 그에겐 물론 이권 외에도 또 다른 살인의 이유가 있다. 사랑 아닌, 소유욕. 그건, ‘내 걸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이권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니, 양아치나 조폭에게 의리 같은 게 있다는 건 착각에 가깝다. 그들이 부르짖는 의리 같은 건,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에 한한다. 의리 없이 뒤통수친다고 욕할 것도 없다. 그게 그네들 생리다. 의리라고 쓰지만, 이권이라고 읽는. 조폭 아닌 이들이라고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의리는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만 지키는 것이고, 의리는 많은 경우, 이권의 소소한 작동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된다.


면가나 김태원, 세상의 기본 구조다. 쉽게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캐릭터를 구축해 놨다. 감독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이라는 현실의 알레고리


한국은 그런 세상을 더욱 실감나게 절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의도였건, 그렇지 않건, <황해>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은, 황량하고 건조하다. 강남구 논현동, 부산, 울산 등 어딜가도 그렇다. 현실의 알레고리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우선, 옌볜에 있는 조선족 구남에게, 한국은 돈 벌겠다고 간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내가 일했던 식당의 주인은, 아내의 행방을 묻는 구남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여기, 진짜 부부가 있는 것 같냐며.
그리고선,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구남이 직접 발 디딘 한국은, 동족이라곤 하나, 그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수사임을 확인할 뿐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로 치부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더 없이 가혹한 곳이 한국이다. 도움을 묻는 구남에게, 식당의 이주노동자는 냉랭하다. 이주노동자끼리도 별다른 교감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계급의 가장 아래 부분에 있는 이주노동자를 등치는 한국인, 그게 다 이권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나.


영화는 또, 먹는 장면을 통해 지금-여기의 살풍경을 비춘다. 극 중에서, 구남은 허겁지겁 먹는다. 살기 위해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살인을 위해 잠복하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시지를, 도망 다니다가 한 폐허가 된 식당의 냉장고를 뒤져 깍두기를 걸신들린 듯 먹는다. 여기의 많은 이들은 생존을 명목으로 그렇게 주어진 것에만 매달린다. 어떻게든 눈앞의 것을 먹고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만 번뜩인다.



경찰은 더 없이 무력하다. 지들끼리 총을 쏘고 맞고, 떼거지로 몰려들면서도 눈앞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을 놓친다. 화면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채우는 카체이싱 장면도, 알고 보면 경찰의 아둔함 덕분이다.


때론, <황해>는 거칠고 건너뛴다.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도 담지 못한 건너뜀이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엔 에너지가 있다. 잔인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 그 표면적 잔인함에 묻거나 뒤에 숨은 세상의 어떤 구조들. 끝내 다시 건너지 못한 황해의 풍경은,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머뭇거림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기야, 건넌다고 해결이 됐을까. 마지막 장면은 뭔가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사족 같았다.

<황해>는 현실의 잔인무도함에 비한다면, 오히려 디스카운트된 영화다. 스크린이라는 필터를 통해 순화된. 굳이 이 영화에 잔인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곳곳에서
‘악의 평범함’을 목도하는 마당에 무슨. 하물며, 내 안에도 악과 폭력이 있거늘. 내 안을 먼저 들여다볼 것을, 내 안의 개병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는 영화, <황해>다. 우리도 지금, 황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0.11.27 22:57 메종드 쭌/무비일락
이런 분들, <날아라 펭귄> '강력 추천'(강추)!!!

· 내 아이의 취향·기호·성향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영어교육 시켜야한다고 뎀비는 부모.

· '사랑하니까'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러기'가 되길 자처하거나 등 떠밀리는 부모.

· 조직의 명령이나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술이나 음식 등에 대해 타인의 취향을 인정않는 상사나 선배.

· "소는 누가 키워, 누가!"라며 윽박질러야만,
자신의 권위가 서고 우위를 점한다고 생각하고 마초 혹은 가부장.

· 한국 사회엔 많은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픈 사람.

· 뭣보다, 다양한 영화적 재미나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추!!!

· 아울러,
펭귄의 비상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 (여기여기 다 붙어라!)

지난 9월15일 임순례 감독님을 뵀다. 꾸벅, 감독님, 안녕하세요. :)
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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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펭귄은 날지 못한다.

그래서 펭귄은 슬플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새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건, 날지 못하는 자의 편견일지도 모르니까. 또 한편으로, 어쩌면 펭귄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펭귄은 우리에게 자신이 비상하는 것을 보여주기 싫을 수 있다. 인간 몰래, 날개를 펼치고, 해수면을 활공할 지도! 그러니까,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 날지 않는 것일지도…


여하튼, 펭귄은 조류고, 날지 못한다고 인식되는 몇 안 되는 조류의 하나다. 그렇지만 펭귄은 대부분 사람에게 귀여운 존재다. 동물원에 가둬 그들을 관상하는 게 그닥 편치 않지만, 인기가 좋은 건 사실이다.

그 귀여움 한편으로, 일상에서 통용되는 펭귄의 이미지는 마냥 긍정적이진 않다. 많은 경우, 썰렁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존재가 펭귄이다. 혹은, 날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연수나 유학 등을 핑계로 해외에 가족을 보내놓고도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을 펭귄에 비유한다.


김두식 교수의 『불편해도 괜찮아』의 얘기를 한 번 보자.

“임순례 감독이 국가인권위원회와 손잡고 만든 영화 「날아라 펭귄」 3부의 주인공은 기러기아빠 권과장(손병호)입니다. 권과장은 동료들에게 기러기, 독수리, 펭귄 아빠의 차이를 자조적으로 설명합니다.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아이를 보러 가는 아빠는 기러기, 돈이 많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아빠는 독수리, 돈이 없어서 공항에서 손 흔들고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하는 아빠는 펭귄이라는 것이지요.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하는 권과장은 공무원 신분이라 기러기보다는 펭귄 쪽에 가깝습니다. 기러기생활 4년째에 접어든 그는 닭고기만 먹어도 부하직원들에게 같은 조류를 먹는다고 놀림을 받습니다.”( ‘미친 교육과 펭귄의 시대’, p.27)


펭귄 아빠. <날아라 펭귄>에 그렇게 등장한다. 맞다. 현실이다. 어떻게든, 자식 잘 되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많은 부모가 스스로 ‘펭귄’이 된다. 스스로, 라고 말했지만, 따지자면 사회가 강요한 구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되고 말 거라고 겁박하고, 협박하며, 명박(?)하는 우리 사회. 그 노예적 구조에 포박된 많은 사람들. 영화는 그런 우리네 풍경을 무겁지 않게 다루면서도 우리네 의식에 일침을 가한다.


일상의 교육문제부터, 직장 내 채식주의자가 맞닥뜨리는 곤혹스러움, 한평생 권위만 내세웠던 퇴직가장과 아내의 갈등까지, 영화는 일상의 차별적 풍경을 그려낸다. 지난 9월15일, 서울 이화여대 내 아트하우스 모모. 개봉 1년 여가 지난 시점이지만 <날아라 펭귄>이 상영됐고, 임순례 감독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한 관객은 이렇게 감상평을 말했다.


“영화가 참 훈훈하다. 정말 가족들과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줘서 감사한다. 영화 제목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펭귄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펭귄이) 날개가 있지만 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유토피아를 바라면서 닿을 수 없는.”


<펭귄이 하늘을 날다 : 아사히야마 동물원 이야기>의 한 장면.
일본 훗카이도 아사히카와 시에 있는 동물원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폐원 직전의 동물원을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원장과 그 직원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펭귄이 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날면 행복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펭귄은 날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 펭귄이 펭귄 사회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임순례 감독은, “영화의 기능 중 하나가 나의 생각, 감정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펭귄을 다시 생각했고, 우리네의 펭귄적 풍경도 곱씹었다. 이 영화, 좋은 영화다. 사유를 하게 한다는 것, 좋은 영화가 가진 미덕이니까.

지난 9월15일, 서울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날아라 펭귄>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가 상영된 뒤, 감독과 대화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장이 우선 임 감독과 얘기를 나눴다.


작품 기획은 어떻게 하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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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0.09.19 03:04 메종드 쭌/무비일락
내 심장의 일부를 말하기 전, 이 얘기부터 하지요.

얼마 전,
한때 야큐계를 풍미했던, 구대성(이라 쓰고, 대성불패라 읽는다!)의 은퇴 경기.


아, '쿠옹'도 이렇게 떠나는구나.
우리의 한 시절도 이렇게 접히는구나.
'대성불패(臺晟不敗), 안녕', 을 마음속으로 외치던 날입니다.

헌데 이날,
나를 '가장' 뭉클하게 만든 건, 한 여성팬의 피켓 문구였다지요.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가슴이 찡찡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극강의 상찬이 있을까요. 흑ㅠ.ㅠ
생을 송두리째 야큐에 바친 야큐선수의 은퇴경기에 피켓문구로서 가장 좋은 예.

'모태야큐'가 아니라면, 친구의 꼬드김이 아니라면,
야큐를 보고, 야큐장을 찾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 겁니다.

야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이가,
TV에서 야큐 경기가 펼쳐지면 '대체 뭐가 재밌다고 저런 걸 보나'싶던 이가,
어느 순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야큐에 빠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떤 특정 선수의 활약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고요.

그 여성에겐 그 대상이 '대성불패'였던 것이죠.
그 어떤 수치나 수상 경력보다 은퇴선수의 심금을 가장 울리지 싶은 저 말.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저요? 전 모태야큐, 모태노떼(자이언츠)였다지요.^^)


미안. 서론이 길었죠? ^^;
이 영화, <마루 밑 마루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The Borrowers).
보고선 쿨쩍훌쩍 했습니다.ㅠ.ㅠ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쿠옹의 은퇴에 최고의 상찬이었던 그 피켓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르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신상입니다.

메리 노튼의 소The Complete Borrowers(국내제목 :《마루 밑 바로우어즈》)가 원작이죠. 하야오 할아버지가 젊은 날 읽고, 품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40여년을 삭힌 내공, 과연 하야오 철학과 잘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기획과 각본만 하야오 할아버지가 맡았다는데, 지브리의 최연소 감독인 서른일곱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연출은 하야오 할아버지의 자장에 있습니다. '하야오'라는 이름이 여전히 각인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자, 옆의 이 초상이 바로 아리에티입니다. 보는 순간, 훅~ 갔습니다. 곧 '여신 포스'를 발산할 것 같은 요정 포스의 그녀는, 14살입니다. '아니, 14살짜리가 왜 저래?'하면서 같이 보던 친구에게 툴툴(?)거렸습니다. 성숙하다못해 섹시하다니. 요정은 저런 거야, 응?


물론, 그렇게 아리에티가 그려진 것은 다 이유가 있더군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전한 아리에티 탄생의 비화(?). "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아리에티>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다음 프로듀서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처음 받은 주문은 아리에티를 아주 관능적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미소짓는다. 뚜렷한 로맨스 일화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이같은 분위기는 영화에 줄곧 첫사랑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하, 아무렴. 아리에티의 관능에 매혹되지 않는 자, 유죄!

아리에티는 10cm 작은 생명입니다. 현재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칠레의 33인 광부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 8.8cm의 구멍보다는 약간 큰 10cm. 그들은 크기만 다를 뿐, 사람의 형상과 똑같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죠. 그들에게 인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거든요.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도, 인간에게 존재가 '뽀록'났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일까요. 자신들의 종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리에티 가족. 걱정작렬하는 엄마, 아빠는 아리에티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인간에게 틀켜선 안 돼. 그리되면 우리 종족은 멸망이란다. 멸족 여부를 고민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니, 나는 인간(!) 땜시 멸족(멸종)한, 혹은 멸족 위기에 처한 생명(들)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숭악함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지구의 어떤 이들.

괜히 미안해집니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탈을 쓰고 있잖아요.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의 쥔장처럼 행세하는 인간은, 때때로 수시로, 기고만장에, 안하무인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말, 이 애니에서는 실감납니다. 작은 생명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은 한 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오롯이 '공포'라지요. 아,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에겐 공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요정, 아리에티의 눈으로 인간남자(소년) '쇼우'를 처음 봤을 때의 방식부터, 시계의 초침소리는 어찌나 큰지, 공포감 작렬입니다. 문 여닫는 소리도 천둥치는 것 같고, 작은 생명들이 부엌과 방, 테이블을 오갈 때의 거리감과 모험도 장난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죠.
익숙한 우리네 인간 세계임에도, '아, 저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것 참, 나쁘지 않습니다. 묘합니다. 짜잔.

그건 역시 지브리, 곧 하야오 할아버지의 대부분 작품이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관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어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숭악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성찰을 은연중에 요구하기도 하는.

아마, 이 애니를 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다보니 극중 악당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은 집사 여자를 통해서일 겁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일 그녀는, 딱히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캐릭터지만, 어느덧 감정이입이 된 아리에티 가족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탓에 그리 느껴지게 됩니다. 그녀를 통해 어떤 죄의식도 없이 다른 생명(심지어 같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아,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도 있어요. 아리에티와 그 가족이 인간에게 '빌리는' 각설탕, 티슈, 빨래집게 등의 '전리품'은 우리의 일반적인 용도와 달리 활용이 돼요. 아하, 세상 모든 것의 용도가 하나로 묶인 것은 아니구나.

뭣보다, 아리에티와 그 가족의 생존방식인 '빌리기'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감탄했어요. 찌리릿. 커피 한 잔 찐~하게 마시고 싶더라고요. 애니의 원제, 원작의 제목을 잠깐 볼까요? '빌려서 생활하는(더부살이)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 혹은 '빌려 쓰는 사람들(The Borrowers)'.

아리에티와 가족은,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훔치'는 행위를 '빌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것을, 아주 조금씩 빌려 가면서 생존을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인간에게 큰 손해가 닥치는 것은 아니죠. 있는 둥 없는 둥,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들에게 나눠주는 형국입니다.


이런 빌리고 빌려 주는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혹은 세계가 지닌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 빌려 쓰는 주제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존재인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어떤 생명들로부터도. 작은 생명이 인간에게 그러하듯, 인간은 자연(지구)로부터 그러하지요. 인간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아리에티 가족과 자연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인간들.

김혜리 씨네21 기자는 또한 그것을 '이삭줍기의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회 구성원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남아도는 재화를 공짜로 취해 생존을 유지하도록 용인하는 세계가 <아리에티>의 이상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빌리는 일과 훔치는 일이 다름을 수차례 강조한다. 한데 ‘빌리기’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아리에티>는 문명의 이기가 필요없는 수렵과 채취의 야생으로 돌아간 소인 소년 스피라를 통해 쓸쓸한 대답을 제시한다." 


솔직히 나는 의심해요. 지금 이 시대, 더 이상 '빌리기'와 '이삭줍기'가 힘을 발할 수 있을까. 한 예를 들어볼까요? 한때 우리에게도 '대지의 여신'이 있었잖아요. 여신의 뜻을 받들고 자연의 힘을 빌어 먹을 것과 살 곳을 빌려서 살았죠. 그런데 지금 시대는 여신을 경멸하고 아예 겁탈을 했죠. '소유'라는 명목으로 빌리기가 아닌 훔쳐 버리고야 만 시대.

그리고 다르다 싶으면 무조건 박멸하고 내쫓고야 말지요. 집사 여자의 행태처럼.해충박멸 회사까지 불러들인 그녀를 보면, 기업(자본)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른바 '문명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집시 추방 조치를 보세요.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닐까요. 날짜만 바뀌었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직 20세기일지도 몰라요.

많은 것이 사라졌으며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소년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잔인하게 대놓고 말합니다. "너희는 곧 멸종할 거야. 그건 섭리야." 그런데, 그 말이 꼭 인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들린 건 왜일까요. 그 말을 내뱉은 인간소년 쇼우야말로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잠깐 <마루 밑 아루에티>의 결말에 도달해서,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이 애니는 인간의 위협으로부터 아리에티 가족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해피 엔딩' 구조를 취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더라고요. 이 애니는 느슨하게 뻔한 이야기 공식이 아닌 나름 반전(?)의 형태를 가지거든요.



자, 생각해 볼까요. 인간이 아닌 작은 생물의 세계를 그나마 긍정하고 함께 살기를 바랐던 쇼우. 하지만 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이미 생의 의욕을 잃은 조숙한 아이입니다. 아리에티 가족이 '인형의 집'을 새로 얻게 되지 않을까, 허술하게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쇼우의 집을 아예 떠납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빌리기'를 거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연주의적, 생태주의적 삶을 사는 듯한 스피릿을 따라간 것을 보면 말이죠. 

인간과 공존하기보다 자신들만의 종족과 뭉쳐 살기를 선택한 아리에티 가족. 결과적으로 인간이 그들을 내쫓은 셈이죠. 그나마 공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인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멸종 운운하다가 던진 이 말. "죽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야." 어쩌면, 이는 지브리가, 혹은 하야오 할아버지가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희망으로 포장된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말자고 건넨 말 아닐까요. 죽는 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야. 된장, 식빵~ 



하지만, 절망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희망이 그렇듯.
대성불패 쿠옹을 맨 처음 꺼낸 이유도 이젠 말씀 드리죠.
아리에티 가족이 새로운 곳에서 자신들의 종족을 만나 잘 정착했는지, 쇼우가 수술을 잘 마쳤는지는 모릅니다. 이 애니는 그것까지 펼쳐 보이질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이 불친절함(?)이 외려 좋았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니"라며 인간소년 쇼우를 옹호하던 아리에티의 말에서 '절망의 구'에서 탈출하려는 소수의 모습을 봤다면,

떠나는 아리에티에게 쇼우는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아리에티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

죽기로 결심한, 죽을 것을 예감한 누군가도 아주 작은, 10cm에 불과한 생물의 존재에서 힘을 얻을 수 있구나. 8.8cm의 지름도 33인을 살게 하지 않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당신이 잘 볼 순 없지만, 당신 옆의 하찮은 무엇일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속물이자 평범한 악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길" 바란 그녀의 말이었듯 말이죠.

쇼우가 수술을 잘 마치고 살아있을까,를 내게 묻는다면, 음, 고개를 도리도리흔들 것 같아요. 매정하고, 냉정한 답변일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아리에티가 수술을 앞둔 그에게 준 '살아갈 용기' 덕분에 그저 맥없이 눈을 감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몰라도 좋을 것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 작은 존재가 준 선물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아울러 아리에티 가족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종족들과 계속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아리에티가 멸망 운운하던 쇼우에게 했던 이말처럼 말이죠.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아리에티 가족을 보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잘 보이진 않아도, 자그만 생물들이 지구상에는 무지하게 많고 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구나. 잘 빌려주고 잘 빌려야겠구나. 우리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꾸준히 돌아가는구나.

아, 혹시 멀쩡하게 있었는데, 없어진 게 있다면 아마 바로우어즈가 빌려간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효~ 아, 애니를 본 뒤 후유증이라면, '내 심장의 일부, 아리에티'가 침대 밑에 혹은 의자 밑에 행여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는 건데, 아파트는 바로우어즈가 살기엔 참 좋지 않은 환경이에요. 된장. 

* 참, 장난감에 숨을 불어넣은 픽사의 <토이스토리3>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픽사와 지브리, 미국과 일본, 더 크게는 서양과 동양의 어떤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0.09.14 16:37 메종드 쭌/무비일락
세 여자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또한 나를 낳고 키운 곳에서 그들은 학교를 다녔다. 우연하게도 한 시대를, 한 공간을 공유했을 거라는 짐작.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더욱 눈이 갔고, 마음도 그를 따랐다.

<땅의 여자>의 세 여자, 강선희, 변은주, 소희주 씨는 스스로 농촌에 발을 담았다. 농사꾼(농민)이 됐다. 어떤 로망도 자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의지의 결정체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학창시절, 농활이나 운동 등을 통해 그들에게 자리 잡은 정신적 근력이 그들을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선택은 운동에 의한 관성도 따랐을 것이다. 농민운동을 통해 새겨진 사명 같은 것. 그런 한편, 애초 그들에게 허울 좋은 귀농이나 전원생활은 그림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작당하고 뛰어들 도시 여자(들)는 흔치 않다. 사명감이면서 꿈. 도농 간의 벌어진 간극을 메우며, 농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의 일부를 바꾸고 싶었을.

하지만 어떤 결단이든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강고한 의지나 결정도 현실 앞에선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십 년을 훌쩍 넘어선 세월, 견고한 일상은 그들을 이미 삼켰다. 햇살은 맑고, 논밭에 일렁이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탐스럽다. 그녀들의 모습 또한 같을까. 마냥 그렇진 않다. 멀찍이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달리 그녀들의 표정에선,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 자연은 그녀들에겐 때론 형벌일 테니.

그게 무엇인지,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이라면 감지할만하다. 일상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의지 이상이다. 누군가의 며느리요, 아내이자, 어머니, 이웃이기까지. 관계는 생의 동력이면서도 생을 버겁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들이라고 처음 발을 디딜 때부터 하나였을까. 품은 뜻은 같았지만, 각자 처한 현실은 미세하게 틈을 벌려놓기 마련이다. 때론 그들은 서로에게 비수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요, 일상이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는 명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때론 굴레다.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그들이라고 왜 없었을까. 소희주 씨가 여성 농민들을 만나러 나가는 밤. 그녀의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땡깡’을 부린다. 그걸 뿌리치고 나가야 하는 그녀의 선택. 차 안에서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렇게 떼어놓고 가면 애들한테 안 좋겠지?” 아, 어쩌란 말인가.

남편이라고 눈이 곱지 않다. 뜻 맞아 함께 살 붙이고 사는 남편이라지만, 아내가 외부 일에 더욱 신경을 쓰니,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서운한 눈치다. 변은주 씨는 공동체를 꿈꾸며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 하지만 시댁은 이를 반대한다.

뭣보다, 강선희 씨가 그토록 죽이 잘 맞던 시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일상과 관계의 강고함을 느낀다. 농사는 기본이요, 가족을 지탱하는 와중에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역 정치활동에도 열심이던 그녀. 병든 남편의 수발까지 함께다.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새로운 정치적 역량을 불어넣고자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떨어진다. 결정타는 남편의 죽음. 며느리를 믿고 밀어주던 시어머니는 그 지점에서 멀어진다. 


솔직히 나는 그 일상이라는 존재가 버겁다. 밤이 되면 무심코 내려놓기도 하는 일상의 무게이건만, 그건 모르핀이다. 아주 잠깐의 안도. 이런 일상을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생각했다손, 막상 맞닥뜨리는 일상의 강퍅함은 다른 문제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이 다큐는 기본적으로 이런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들은 희열과 마주대하며, 일상적 행복에 유기농 미소를 지운다. 그들은 일상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뚜벅뚜벅 자신의 선택에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갈 뿐이다. 아, 저들 역시 내가 아는 많은, 가장 보통의 존재. 그렇기에 이것은 긍정의 현실이다. 세상과 싸우고 때론 고됨과 아픔, 상실에 노출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감내하는 법을 안다. 그야말로 도망가지 않고 맞장 뜸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선물.

이 영화, ‘순도 100% 유기농 다큐’라는 카피가 붙어있지만, 유기농에 대한 환상은 없다. 생태주의적 삶을 다루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가장 보통의 존재가 삶을 꾸리는 현장을 본 것이다. 학창시절의 앳된 얼굴은 세월의 더께 앞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의 훈장이다. 나이듦이 자연스러운, 더구나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 여느 농촌의 아낙네가 된 그들의 말간 얼굴이 주는 청량함. 땅의 여자다.

여성을 말할 때, 늘 여신이나 선생님 타령이나 해대는 가장 보통의 수컷에게, <땅의 여자>는 또 다른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여신 포스가 아니라도, 선생님 포스가 아니라도, 땅과 바람과 햇살과 일상과 노동의 시간이 만들어준 장삼이사의 포스. 


나를 돌아봤다. 나는 농부의 손자다. 하지만 시티 키드로 태어나 자란 내게, 이십대까지 농촌은 도시문명보다 한참 뒤떨어진, 그닥 발 딛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농활 한 번 제대로 가질 않았다. 아니 가기 싫었다. 어린 시절, 농촌은 내게 심심함과 무료함, 고된 일거리만 가득한 공간이라는 경험 때문에. 죽도록 일만 하시면서도, 그만한 대우나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보면서, 학교나 어른들의 말씀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농촌이 우리의 젖줄이라느니, 농부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메아리치는 박제된 언어였다.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공허함.

지금의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내게 가르침과 울림을 안겨줬던 분들 덕분이다. 이분들은 하나 같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공동체를 꾸리거나 자연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등 '다른' 삶도 있음을 보여주고 알려주셨다. 나는 어느덧, 서울을 떠나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아직 낭만이자 로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이고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나는 이말에 동의한다. “농사꾼으로서의 삶이란 도시의 그것보다 더욱 꽉 찬 일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도시보다 꽉 찬 삶,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씩씩한 언니들의 이야기는 좀 더 강력한 의지와 실천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그리 사는 그들이 좋’았고, 차츰 나를 달궈서 ‘땅의 남자’로 살아가는 나를 꿈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한다. 세상은 그런 장삼이사들이 밀어붙이는 노동에 의해 굴러간다. 살아야겠다. 버티고 견뎌야겠다.

과거. 얼마되지도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땅의 기운을 믿고 땅이 생명의 근원임을 알았다. 그래서 땅에 대한, 대지를 향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물론, 지금은 그 과거를 배신(?)했다. 땅은 그저 재산증식의 일환이자, 투기적 대상이다. "돈이 최고다"라는 화폐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그 시대를 거슬러 땅의 진짜 기운과 만나고 싶다. 커피 역시 땅의 힘이 절대적이다.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 땅을 존중하고 경외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세간의 기준에선 루저인 나도 그래서, 당당하게 말하련다.
“나는 이래 사는 내가 좋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녀들처럼 걸어가고 싶다.
인생 뭐 있나. 그냥 경운기의 속도로 가면 되는 거지.

몸 생각해서 유기농 찾아서 먹는 당신,
마음 생각한다면, 이 유기농(영화) 찾아가서 섭취하면 딱 좋겠다.
건강해진다. 장담한다. 아니면, 손해배상 청구하시라.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