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691,258total
  • 6today
  • 126yesterday
2011.12.05 02:03 메종드 쭌/무비일락
“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 안도현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관계》 중에서 -


우리, 관계 맺을까?
‘나’, 하나만 덜렁 있다면, 관계는 없다. 그래, ‘너’, 좋다. 나와 너가 합쳐서, 함께 하면 ‘우리’가 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기본. 즉, 관계 맺기는 원맨밴드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 사물, 그 누군가가 됐건, 무엇이 됐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가진 무언가들 사이, 관계가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연과 사람 등 모든 자연지물 사이에 나타나는 일종의 의식. 그것이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가슴 한 구석을 텅 비워야만 살 수 있는 이 역겹고 험한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관계 맺기 아닐까. 그럼에도 세상은 부인할 수 없이, 관계 맺기의 연속이다. 하다 못해 이글을 읽는 당신과 나도, 독자와 필자라는 ‘관계’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린 ‘관계인’이고.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이 어찌 그냥 두고 넘기겠는가 말이다.
 
생각해 봤다. 웃고 울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며, 홀가분하고 참담한, 사랑하고 무관심한, 세상 모든 감정과 우리가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일이 힘들기보다 인간 관계 때문이라지 않나. 아무렴.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알려줘야 할 것은, 국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관계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사랑, 우정, 미움 등의 모든 관계가 세분화될 수도 있겠다.


왕따에서 행복 전도사로 

그땐 좀 그런 게 어려웠다. 학교는 물론이요,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도 있고,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다. 직장에서 동료라곤 하지만, 이거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니, 어떤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조건 옳았다고 내세울 건 아니지만, 그 관계들, 참 어려웠다. 나를 비롯해 다들 지가 잘났다고 고집하는데, 스파크가 튀고 마찰이 생겼다. 여자친구와의 관계 역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맺기의 꼬임.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럴 때, 세상 속에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그 때,  아멜리를 만났다. 《아멜리에》. 와우, 보면서 놀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관계 맺기의 명수였다. 그것도 ‘행복 바이러스’를 세상에 별빛처럼 뿌리는 행복 전도사.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관계 맺기의 달인이었던 건 아니다. 아빠의 오해가 낳은 심장병 때문에, 그녀는 외롭게 자랐다. 관계 맺기가 심장에 줄 충격을 염려해, 제대로 관계 맺기를 못했다. 그런 아멜리가 변신하는 것은, 관계 맺기의 달인으로 바뀌는 것은 극적인 이야기를 품는 것으로 처리됐다.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상자의 구슬, 플라스틱 군인, 빛바랜 사진 따위가 아멜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와 닿지도 않고,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할 따름이다. 말과 글의 한계다.

하여튼, 낡은 상자는, 절망을 담았던 판도라의 상자와 다르다. 그 상자와의 만남은 행복을 나눠주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상자만 아니었다면 아멜리는 아마도, 흐지부지, 지리멸렬, 엄벙덤벙에 불과한 소녀이자 여자였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순간, 그녀는 그 어렵다는 관계와 무척 친해진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던 관계도 초강력 오공본드처럼 척척 그리고 단단하게 붙여줄 수도 있고, 관계를 행복하게 만든다. 혹시 그녀는 초강력 슈퍼접착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와중에서도 아멜리의 능력은 신통방통이다. 

신경과학자들이 그랬다. 인간의 마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천체물리학도, 뇌수술도 아닌,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견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곧, 관계 맺기의 핵심이 아닐까. 
아멜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아멜리, 이 깨물어주고 싶은 깜찍녀

변신에 이어 아멜리가 꾸미는 음모는, 앙증맞고 깜찍하다. 종횡무진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폐쇄적이 된 아빠를 위해, 친구에게 부탁해 세계 각지에 아빠의 인형 사진을 놓고 찍는다. 그렇게 아빠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아래층 아줌마를 위해 남편의 편지인양 가짜 편지를 보내고, 50년 전 추억의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담배 가게 아가씨와 그 주변을 맴도는 총각을 연결해주고, 착한 야채가게 청년을 구박하는 주인아저씨를 혼내주고... 굳이 정의를 위해 나서진 않더라도 상관 없다.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아멜리가 원더우먼이다.

아멜리의 관계 맺기는 환상적이다. 그녀가 맺는 관계 속에, 행복의 꽃이 가득 피어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바이러스를 팍팍 뿌려대는데, 왜 부메랑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니노와 눈 맞은 아멜리. 달콤한 미소를 지닌 정체불명의 그 남자, 니노. 행복은 이제 아멜리 차례다.

아멜리의 심장은 주책없이 방망이질을 해대고 사랑은 찬연한 불빛을 뿜어댄다. 모든 관계 속에서도 제일은 ‘사랑’ 아니겠는가. 아! 두근두근 콩콩!! 국보자매의 노래, '두근두근'이 아니라도, 심장이 뛴다. 독고진(<최고의 사랑>)이라도 그럴 것이다.  

행복 포자의 생명력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엉뚱한 행동이 결합된 아멜리의 행복 포자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가 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삶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수고롭고 짐진 자에게 행복을. 그것이 바로 아멜리식 관계 맺기의 정수가 아닐까?

아멜리는 자신을 위해 산다. 행복을 주는 것이 기쁘다. 단지 그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녀는 바이러스를 살포한다. 아멜리가 있어 모든 무생물들도 금방 숨 쉬고 뛰어다닐 것처럼 생명력을 가진다.

아, 내가 행복해야 하는 구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돌아볼 수도 있고,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할 수 있구나.

아멜리를 찾습니다, 혹은 내 자신이 아멜리?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을 통해 고래처럼 숨 쉰다. 아멜리가 꿰어 맞추는 관계의 앙상블은, 이 동정 없는 세상에는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가깝게 평택의 쌍용차도 그랬고, 지금 부산의 한진중공업이 그렇다. 그 속엔 관계라곤 찾아볼 수 없다. 특히나 있는 자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관계 맺기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세상.  

그래서였을까. 아멜리가 펼쳐놓는 판타지에 한없이 중독되고 싶다. 기실 동화적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그 도저한 선한의지의 전염성에는 마찰 계수를 계산하고 싶지 않다.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이 일갈한 자신의 삶에 대한 규정을 관계 속에서도 대입해보고픈 욕심이 생긴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덕분일까. “당신 없는 오늘의 삶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이라는 관계망의 형성에 나는 마음을 뺏기고야 만다. 헤어짐이 잦은 세대, 그냥 가벼운 눈웃음만으로 충분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했지만. 안도현 시인은, 이 세상 어른들은 ‘눈사람을 만들 줄 모르는, 단지 눈사람을 발로 찰 줄만 아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지만.

묻고 싶은 거지.
 
관계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관계 덕분에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아, 현실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딨니? 아멜리...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좋은 관계는 삶을 재밌고, 풍요로우며 흥미롭게 만든다. 뭣보다 살아갈 용기와 열정을 제공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좋은 관계란 그런 것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좋은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참, 직장에서의 관계 맺기는 어떻게 됐냐고? 아멜리가 돼서 직장의 화목한 웃음을 책임졌냐고? 아니. 그런 마찰적 관계 맺기에 내 마음을 더 이상 썩어 문드러지게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 나갔지. 내 진짜 마음을 감춘 채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건, 더 나쁘다는 걸 아멜리가 알려줬거든. 그러니, 안녕. 

다만, 함께 본 여자친구에겐 더 깊고 너른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됐었지. 그녀를 나는 '아멜리'로 불렀고, 그녀는 아멜리처럼 내게 행복포자가 됐다. 물론, 과거형이지만. ^^; 그래도 행복했다, 아멜리. 고맙다, 아멜리.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1.21 02:44 메종드 쭌/무비일락

애원했다. 딱 하룻밤. 원나잇만 같이 보내자고. 격정적이고 격렬하며 가슴 뛸 일이니, 원나잇, 원나잇만!

뭐, 원나잇스탠드? 유후~ 앙큼하게 그런 상상을. *^.~* 최근 팡 터졌던 일화도 떠오른다. 한 어른이 중딩에게 물었다. 호텔에서 파는 게 뭘까요? 중딩 왈, "하룻밤이요." 아, 이 스스럼 없는 직설의 향연. 물론 그것은 원나잇스탠드 아닌 액면 그대로의 것일 게다. 나는 그 중딩의 답변을 전해듣곤 팡 터졌었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찌들만큼 찌든 수컷남자인 나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까? 도 궁금했다.

그런데, 원나잇을 간절히 원하는 이 남자의 애원은 아들을 향한 것이다. 최악의 아빠였으나, 이번만큼은 잘해보고 싶다는 아빠. 자신이 양육할 수 없는 아들, 부자 이모와 이모부가 양육권을 지닌 아들과 어쩌면 생애 최고로 짜릿한 원나잇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철덩어리 '아톰(ATOM)'과 함께.

<리얼 스틸>.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전직복서 찰리 켄튼(휴 잭맨)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팔리기까지 한 아들 맥스 켄튼(다코다 고요)의 엎치락뒤치락 감동작렬 부자(父子)드라마! 라고 규정하고 싶진 않다. 

나는 마냥 부자의 이야기로만 보질 못했다. 둘은 그냥 한대의 고철로봇을 공유한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했으니까. 

찰리는 끝내 챔피언엔 오르지 못했으나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던 전직 복서다. 말하자면, 심심한 챔피언보다 버라이어티한 도전자. 지루한 챔피언 벨트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전을 했던 복서. 

뭐, 때로 인생은 그런 것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지루하게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다가 권태에 빠지느니, 반짝하는 순간을 지니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허나, 그 순간만 움켜쥐고선, "내가 왕년에~" "나도 해봐서 아는데~" 따위만 읊는 것도 참 비루하고 너절한 짓이다. 찰리는 그렇진 않으나 좀 궁색하긴 하다. 은퇴한 뒤 로봇복싱으로 근근히 먹고사는데, 신통치 않다. 시합은 번번이 지고, 돈은 없으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표현할 줄 모르는 먹통이다.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인생. 99%다.

파트너이자 아들인 맥스의 등장이 그를 달라지게 한다. 그렇다고, 없는 아들이 갑자기 생겼다고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이를 앙 다무는 건 아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건, 사소하고 작은 승리에서 비롯된다. 번번이 실패만 하던 그에게 이 사소한 성공은 다르다.

고철더미에서 건진 로봇, 아톰의 처지는 찰리와 다르지 않다. 폐기처분된 것이나 다름없던 아톰에게 파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건, 맥스다. 어리지만, 훌륭한 사업파트너. 로봇과 교감할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어찌 욕하리오. 그런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자라면. 

그리고 <리얼 스틸>은 익히 예정된 수순을 따른다. 고철 로봇파이터의 승승장구. 비루하고 궁색하던 찰리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는가. 맥스의 천진난만함과 우격다짐은 최강 로봇파이터 제우스와의 경기를 성사시킨다. 

생각해보라. 폐기직전의 고철과 세상 모든 첨단(돈)으로 무장한(쳐바른) 명품의 대결. 자, 누구 편을 들겠는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겠는가. 승패? 물론, 중요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만큼 99%의 우리를 옥죄는 것이 있으랴. 그런데도, <리얼 스틸>은 그것을 뛰어넘었던 <록키>를 뒤따른다. 모방한다.
 

따지고 보면, <리얼 스틸>은 인생 역전을 꿈꾸는 비루한 자들의 환상이다. 고철더미에서 꽃 피기, 개천에서 용 나기, 그로기 상태에서 카운터블로를 날려 역전하기. 인생 한 방을 바라는 99%의 통쾌한 역전극. 일종의 마약이다. 남들 못해도 너라면 (죽어라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살살 꼬드겨 불구덩이로 볏짚 짊어지고 뛰어들게 만드는.

심지어 이 영화, 보수적이다. 실패한 복서 찰리와 버려진 아들 맥스, 고철덩어리 아톰이 뭉친 오합지졸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최첨단 기술로 로봇복싱계를 주름잡는 제우스(와 기업체)를 상대로 '사실상' 승리한 이야기. 그러니, 번번이 실패하는 니들도 (우리가 던져주는) 희망을 가져!, 라고 말한다.  

뭣보다 거슬리는 건, 아시아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은연 중에 주입한다. 제우스(와 기업체) 뒤에 있는,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해 물리쳐야 할 상대(적)로 묘사한 인물들이 아시아계(인도, 일본)다. 과장된 몸짓과 서툰 영어를 구사하고, 악의 섞인 표정과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백인 부자의 기적을 위해 아시아인을 악인 비슷하게 상정한다. (맞아, 이 영화는 디즈니가 만들었지!)

그렇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나는 그 고철덩어리 아톰(과 찰리)에게 그만, 우리 99%의 모습을 투영하고야 말았다. 쓰러질 때마다 나는 "Wake up(일어나)"을 외쳤고, 레프트 라이트 어퍼컷, 외치는 프로모터가 됐다. 아톰이 다른 로봇을 제압하거나 제우스가 삐걱거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리얼 스틸>은 99%가 1%를 점령하는 내용의 영화다, 라고 하면 새빨간 거잣말이다. 이 영화를 그리 보는 건 오독이다. 그럼에도 왠지 오독하고 싶었다. 이 미친 시대를 정면돌파하기 위해선, 그런 오독의 낭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톰이 어퍼컷을 날릴 때, 찰리가 셰도우 복싱으로 복서의 본능을 되찾을 때, 속이 다 시원했다.

두 사업파트너의 짜릿한 원나잇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맥스는 수영장도 있고, 스파도 있는 안락한 부자 이모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찰리는 좀 더 의기양양해져서 인민의 챔피언(People's Champion) 아톰을 데리고 로봇복싱쇼를 전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민을 위해서!

(영화의 번역은, 'People's Champion'을 '시민의 챔피언'으로 하고 있었는데, 글쎄 좀 불만이다. people을 인민 혹은 민중으로 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흠...)  

허나, 그러면 어떤가. 그들에겐 그토록 짜릿한 원나잇이 있었는데. 그 한순간으로도 생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게 때론 인생이다. 혹은, 이런 것?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하기 위해 1200마일을 달려가는 것. 찰리가 베일리(에반젤린 릴리)에게 그랬다!!! 베일리가 물었다. 키스하려고 1200마일을 달려온 거야? 찰리 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쉬파, 이 오글거림 돋는 대사, 휴 잭맨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이 자가 하니까 오글거림 없이 그냥 깔맞춤이다. 잘 나고 볼 일이군, 된장. 센스, 그냥 돋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이인지 아닌지, 다소 헷갈렸던 두 사람의 관계. 이 짧은 장면과 대사로 내겐 모든 것이 정리됐다. 두 사람의 애정이 얼마나 단단한지 엿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 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할 법한 인생. (이정도 여자라면, 나도 그런다, 뭐!!!)

그리고 떠올랐던 한 순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워싱턴 시애틀로 내달렸던 그때 그 순간... 그때의 나도 1200마일 정도는 내달린 건 아닐까.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툭 던졌다. 복싱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쎄, 마냥 자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이토록 가슴을 끓게 하는 복싱, 과거에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있으리라 믿고 싶어졌다. 슈거 레이 레너드가 이 영화의 복싱 슈퍼바이저를 했단다.

마지막으로 휴 잭맨, 이 남자.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믿고 말 이 남자의 얼굴. 멋지다, 이 남자. 울버린은 잊어도 좋다. 이 남자, 이젠 찰리 켄튼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1.12 16:19 메종드 쭌/무비일락

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의 근간은 폭력이다.

자, 스크린을 지켜보자. 주먹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자른다. 칼로 얼굴을 긋는다. 치과용 드릴로 입 안을 휘젓는다. 젓가락으로 귀를 쑤신다. 몸에 칼을 넣는다. 총을 쏜다. 좀 더 나가볼까?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길가의 기둥에 줄을 매달아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상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이보다 더한 폭력(의 기술)이 난무하니까.

악(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저건 조직폭력배(갱, 야쿠자)의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믿고 싶을 수도 있겠다. 지금-여기를 보라. 가카의 통치 아래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하냔 말이다. 뭔 일이 터지든, 가카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광화문에 산성을 쌓고, 용산에 불을 지르며, 쌍용차나 부산 영도(한진중공업)에 경찰폭력배들을 투입하는 일 따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 하실 일이 아니다.


강력한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있다. 조직폭력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군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어디든, 겉으론 그렇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 행위만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런 곳엔 '의리'가 있지 않냐고? 왜 이러시나. 그건 이미 박물관에 박제된 유적이다. 의리 대신 탐욕과 배신, 협박이 난무한다. 이권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악을 때론 혹은 수시로 추동한다.

김훈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이권'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아니, 지금은 이권 때문에 악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국가마저도 '국익'으로 포장한 '이권'에 몰두하는 세상.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놈들은 더 많은 이권을 삼키지 못해 안달이다.  

장담컨대, 지금 세상에 순수한 악이나 온전한 폭력은 거의 없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혹은 선언한다. 악의 순정한 결정체로서, 마초적 폭력의 완성체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여느 갱스터 영화와 다르다. 멋있게 죽는 법이 없다. 하나같이 동정 없이 죽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엔 냉혹함만 흐른다.


참, 많이도 죽는다.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임과 죽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건조하다. 더구나 죽임과 죽음 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협박을 밥 먹듯 하고 폭력은 몸에 배인 행위다. 배신은 일상다반사다. 이권을 향한 생존본능만 번뜩이는 수컷들 앞에 다른 명분이나 정서의 흔들림은 사치다. 

그 모든 것은 이권 때문이다. 서열 파괴, 의리 박멸, 양심 증발, 모두가 이권이 추동한다.
     

<아웃레이지>의 원제(일본)는 ‘全員惡人(전원악인)’이란다. 글쎄, 순정한 악인조차 될 수없는 이들에게 그런 타이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그저 장삼이사 아닌가?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서적으로 피폐한 건가?


모르겠다. 일상에서 나는 늘 폭력(물리적이진 않아도)을 목격하고, 협잡을 목도한다. 분칠한 협박은 표백제를 뒤집어 쓸 정도고, 악의 평범성은 이제 식상하다. 나라고 거기서 자유롭진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여전하면서도 더 촘촘하고 냉정한 유머를 발산한다.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권을 향한 대물림. 사람이 바뀔 뿐, 세상의 근간은 뿌리 깊다.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 우리는 이권과 폭력과 악을 패션처럼 입고 있다. 

<아웃레이지>의 폭력이 잔인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영화가 폭력을 전시했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잔인했다. 세상의 잔인함을 스크린을 통해 새삼 확인해서. 내가 너무, 이권에 예민하고 폭력이 일상화됐으며, 악을 내면화한 인간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글러먹었다. 된장. 조심해라. Outrage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해치진 않아요잉~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1.03 23:37 메종드 쭌/무비일락

마법이 시작된다!

2001년이었다. 그 유명했던 해리 포터는 시작을 그렇게 알렸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땐 20대였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잉이었던듯도 싶다. 일도 그랬고, 술도 그랬으며, 사랑도 그랬다. 쿨한 척했으나, '척'이었다. (불완전연소가 되고 말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때.

해리 포터의 시작, 그녀와 함께였다.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녀였다. 지금은 없어진 정동 스타식스 였던 것 같다. 그녀와 나, 우리 한 쌍의 바퀴벌레 머글은 마법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서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가 가장 놀라웠다. 우리, 머글인 것이 안타까웠을정도? 

또한 심술궂은 이모 부부와 못된 사촌, 그 머글들에게 구박 받는 해리 포터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런 그에게 날아온 마법세계의 초대장. 더구나 그는 마법세계를 구원할 전설적인 영웅이라니. 응원했다. 해리, 널 응원해. 우리가!
 
꺄르르르르, 10년 전 그 사랑과 나는 그렇게 마법행 특급열차를 탔다. 마법의 세계에 몰래 훔쳐탄 머글들은 당최 앞을 내다볼 재간이 없다. 머글에겐 마법의 기운이 없으니까.

그 마법세계는 해리 포터(와 그의 친구들인 헤르미온느와 론)에게 롤러코스터였을 뿐 아니라, 내게도 그랬다. 살짝 좌충우돌, 생은 다이내믹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작고 사소하게 성공하는 대부분 청춘의 시간에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청춘은 어쩌면 마법의 연속이니까. 

음울한 다락방을 빠져나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타고 마법의 세계에 도달한 해리 포터를 만나는 머글의 마술기행은 계속 됐다. 다만 함께 그것을 즐기는 상대가 바뀌거나 혼자였다. 

시리즈는 흘렀고, 지날수록 희한했다. 마법세계와 현실은 왜 그리 닮은 거야! 그러다 결국 소리쳤다. 이게 뭬야! 우리 사는 곳이 마법세계인 거야, 마법세계가 너무 현실화 된 거야?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것도 점차 풀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해리 포터가 친구들과 함께 마법세계를 지키기 위해 펼치는 모험과 분투는, 우리의 것을 닮았다.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 주변의 가족, 친구들과 소소하게 나누는 이야기와 작당. 마법세계는 머글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악은 번번이 이기고, 해리는 소심하게 헐떡거리며 똥침을 찌른다. 그래도 좋아!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7편 시리즈를 끝내는 10년의 내달림. 한마디로, 뭉클하고 멋지다. 뜨거운 안녕이었다. 거의 마지막 개봉 극장의 마지막 편에서 만난 해리 포터. 


볼드모트와 마지막 대전에 다다른 해리 포터의 결사항전은 스펙터클로 가득했고, 롤러코스터처럼 박진감이 넘쳤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장에 박힌 것은 스네이프였다. 해리 포터보다 더. 10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뺏아간 신 스틸러. 심장이 터질 뻔했다. 그 미친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스네이프의 아픈 과거와 사랑,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 압축은 10년을 모두 집어삼켰다. 재배열시켰다. 해리 엄마인 릴리에게서 파생된 해리와의 관계 또한.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겼다.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랑이 아프고 또 아팠다. 물론 스네이프는 그 아픈 사랑 때문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버텼을지도 모르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과 끝.

해리 포터의 영원한 선생님, 덤블도어도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금지된 숲속에서 만난 해리에게 이런 말을 던진 것, 아닐까.   

"해리, 죽은 자들을 비통하게 여기지 마라(Do not grieve to the dead, Harry). 산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렴(grieve to living). 그 중에서도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거라(And above all.. all those who live without love)."

이런 뜨거운 안녕이라니. 눈물은 주룩주룩, 심장은 벌렁벌렁. 아쉬운 점이라면, 이 마지막을 함께 한 여자는 그런 날 이해 못했다. <해리 포터>시리즈를 처음 봤는데, 그것이 하필 뜨거운 안녕을 고하는 마지막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녀의 10년에는 '해리 포터'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문득 궁금했다. 10년 전 나와 해리 포터의 처음을 보고 꺄르르르르했던 그녀는 마지막을 봤을까. 혹은 해리 포터의 성장 과정에 함께 한 다른 그녀들은? 

사랑이 지나가면, 훌쩍 중년의 어른이 된 해리가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 다시 나타난다. 지니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탈 요량이다. 론과 헤르미온느도 맺어졌는지, 그들의 아이도 함께다. 마법세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아이에까지 관심을 두기에 나라는 머글은 글러먹었다. 

장영엽 씨네21 기자의 말따마다, 가짜가 아닌 한 시절이 끝났으므로.  
"소년 마법사는 조앤 롤링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지만 영화 현장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세명의 소년소녀와 시리즈와 함께 ‘성장한’ 팬들은 가짜가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모두의 한 시절이다." 

한 시절을 끝낸 머글은, 이제 어떤 한 시절을 맞이할까. 아니 맞이하고 있구나.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만,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매조지한다.

마법이 끝났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9.11 01:19 메종드 쭌/무비일락
가장 최근에 만난, 9.11(의 상처 혹은 트라우마)
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내 이름은 칸>이었다. 무슬림계 인도인 칸이 미국에서 겪어야 하는 생의 균열. 


"나는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칸이 그 말을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야 할 이유는 절실하고 절박하다. 무슬림을 향한 무조건적인 공격성과 배타성, 편견의 심화. 칸은 희생자다. 희생자를 만드는 이유는 하나다. 9.11. 미국인들의 심장에 박힌 테러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물론 그 테러는 무슬림과 상관이 없다. 편견이라고 했잖나.

9.11이 꾸준히 삶에 틈입한다. 그건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영화를 통해서도 9.11은 그 자장이 퍼진다. 직접적으로도 다루고(<화씨 911>,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내 이름은 칸>처럼 간접적으로도 다룬다.

간접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어줍잖은 분류다.
9.11의 자장에서 직간접적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9.11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더 참혹하다 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누구할 것 없이 이미 상처 입고, 고통에 짓눌리고 있다. 9.11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것을 잘 모르고 간과할 뿐이다.  

<레인 오버 미>는 쓸쓸했다.

2007년 9월, 9.11 6주기 즈음 개봉했던 이 영화를 본 곳은, 지금은 없어진, 당시 압구정의 스폰지하우스(구. 시어터 2.0)였다. 작은 극장에 관객은 많지 않았고, 홀로 찾아든 극장은 왠지 숙연했다. 9.11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미디 배우로만 각인된 애덤 샌들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9.11이 한 사람의 삶을, 한 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가슴을 서서히 파고든다.

찰리 파인먼(애덤 샌들러)에겐 단 하루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생의 균열은 대개의 경우 그러하듯, 순식간에 다가온다. 수많은 '만약'을 잉태하면서 말이다. 찰리에게도 다르지 않아서, 2001년 9월11일은 생의 모든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내와 세 딸을 잃은 남자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찰리에게 과거는 악몽이고, 그 기억은 그의 현재와 영혼을 잠식했다. 그 상흔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는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대학시절 룸메이트이자 치과의사 앨런(돈 치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찰리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닫고 살아가는 자폐증 환자나 다름없다. 생의 감각을 열었다간 그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신 앞에 닥친 슬픔은 감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이를 감당하나.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다.

일상이 늘 슬픔에 잠겨있지 않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슬픔 앞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한없이 침잠한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불쑥 미워져서 세상에 한 대 아구를 날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아프고 슬픈데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 무언가.

그런데 한 쪽에서는 네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게 뭐지?

네가 왜 이렇게 아프고 슬픈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아니? 그렇게도 묻는다.  

<레인 오버 미>의 찰리가 자신을 철저하게 닫았다면, 
앨런은 타인의 시선에 포박된 삶을 살았던 경우다. 이른바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것 없고, 버젓한 삶이었는지 몰라도, 그건 순전히 타인의 시선에 복무하는 삶이었다. 그가 갑갑함을 느끼고, 진짜 자유를 맛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 그래서 당연하다. 

그런 앨런에게 자기 탐구의 길을 열어주는 존재가 찰리다. 
세상에 문을 닫은 찰리에게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존재가 앨런이다.
 


세상엔 같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해도, 서로를 할퀴거나 튕겨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내를 잃은 찰리와 딸을 잃은 장인·장모가 그렇다. 상처의 골이 한없이 깊어서일까. 함께 보듬고 안아도 부족할 마당에 각자의 상처를 후벼파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그것이 한길 마음속 알 수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보듬는 게 얼마나 힘든가. 더구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슬픔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때, 대단한 리액션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찰리와 앨런이 서로에게 건네는 것은 눈물겨운 위로나 포옹이 아니다. 일상을 함께 호흡하면서 견디고 버티자고 건네는, 고요한 사투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을까. 
누구나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참혹한 세상에서. 그래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찰리와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나를 지배해달라'는 액면가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아마, 내 곁에 있어 줘, 정도가 좋겠다.
앨런이 찰리를 감싸고 도움을 주는 것 같은 관계는 액면이나, 오독이다.
앨런과 찰리는 서로에게 삼투한다. 충돌과 마찰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곁에 머문다. 앨런은 고요한 사투를 통해 찰리의 슬픔에 비로소 접근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포박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되찾는다. 그가 일방적인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슬픔앞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지금이 그렇다. 과거의 슬픔(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슬픔의 폭과 깊이가 같지도 않고, 겪어도 겪어도 그건 익숙해지지 않는 무엇이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보다 자아탐구가 필요하구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리 말했단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룸메이트였던 찰리나 앨런이 다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소울에이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융의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성장했을 것이다. 슬픔을 한 순간에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딱지가 생기기 마련 아닐까.

모두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9.11이 알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10주기가 된 9.11. 얼마나 많은 일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라.
9.11은 그런 당신의 10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가위면서도 9.11이 겹치는 시간. 묘한 순간이다.

레인 오버 미. 지금 내게 필요한 자아탐구의 시간이다. 당신도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다. Reign over me.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9.08 23:39 메종드 쭌/무비일락
요즘, 딱 그 꼴이다. 2004년 대통령 탄핵안을 들고 나왔던 패거리들의 동어반복. 숫자만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국회의 패거리주의는, 몰래하고 싶었으나 뽀록난 동료 사랑이다. 공공연하게 성희롱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강)용석이를 국회의원에서 잘라내자는 안건이 부결됐다. 국회에서!

눈물 나는 동료사랑이다. 재적 의원 297명 중 198명의 찬성표만 얻으면 용석이의 주리를 틀 수 있었다. 제명이 됐어요~ 이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찬성은 111표였다. 반대는 무려 134표. 미친 게지. 이놈들, 더 이율배반적인 건, 앞서의 행동이 결국 가식이었음을 드러낸 거다. 그 주둥이 서식지인 한나라당은 이미 용석이가 당원조차 될 수 없다며 출당을 결의했고, 국회 윤리위원회는 제명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애틋한(?) 동료 사랑이다.


그러니 세간에 떠도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
"강용석은 여대생을 성희롱하고 국회는 국민을 성추행했다."

띠바, 졸지에 성추행 당한 거다. '용석이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용사모)'에 의해.
이런 식으로 또 당하게 될지 몰랐다. 134명의 패거리에 의한 집단 성추행이라니.

민의 운운할 수가 없다. 용석이의 나불댐이 결국 나의 일인양, 덮어주고 감싸안는 폼이라니.
'침묵하고 있는 다수 혹은 소수의 목소리'임을 자임하는 (김)형오의 내리사랑에 그저, 저놈들의 주둥이는 희롱을 일삼지 않으면 가시가 돋나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애정남(<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매한 것을 해주는 자)에게 물어보자.
패거리들, 언제 제명하면 될까?
애정남이 정리합니다잉~
2012년 4월! (총선이다잉~)
좀 남았긴 해도, 이때 싹 쓸어버립니다잉~ 제명해버립니다잉~

예전 2004년의 193부대원들,
정리해 놓고 역시 똑같은 엇비슷한 놈들이 들어선 기억이 있긴 해도,
정리할 거, 쓸어버릴 거, 제명해 버려야할 것들,
김영희씨 말처럼 "제명이 됐어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안)철수 사용도 잘 하고, (박)원순 활용도 잘 해서,
이젠 성추행 그만 당하고 싶으다. 똥꼬가 다 아프다. 된장.

2011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패거리주의의 창궐은,
2004년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은 터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 패거리들도 믿지 마세요.


지랄을 벗 삼고 있는 193부대원들

시절이 하수상타. 시국이 시국이고 정국이 정국이다. 평소에도 전혀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고 지 멋대로들 의회권력을 휘두르던 작자들이 개차반과도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일명 ‘193부대원들’. ‘대통령 목 따러 왔시다’를 외치는 이 작자들은 ‘(국민)실망도’ 훈련만 잔뜩 받은 주제에 ‘하야해라’를 외치고 다닌다(실망도에서 훈련이 너무 잘 된 탓일까).

그런데 만행을 저지르고 보니 시민들의 역습이 만만치 않다. 딴에는 ‘국민 나부랭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의외로 반발이 거센 것이다. ‘여론 조작’이니 ‘편파 보도’니 (자신들이 보기에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수세(!)를 설명하기 위해 치졸한 이유를 갖다대고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다.

저잣거리의 모리배들도 쓰기 민망할 수준의 정치적 행위를 국회에서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 그들의 광분을 설명할 길은 당최 없다. 쪽수 많다고 밀어붙이면 당연히 될 거라는 단세포적인 발상을 그대로 밀어붙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치적인 태생의 근본이 서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두 정당이 짝짜꿍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정치꾼들의 모략이야 어느 나라 정치판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건 전 세계의 웃음꺼리로까지 전락하면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데에야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나. 시민사회의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런 대대적인 대국민 이벤트를 만들어주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그들의 광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때다. 한마디로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쳤어야 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사기를 쳐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국회로 들여보내기엔 미숙아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판명됐다. 딴나라의 정당 같은 거대야당의 대변인으로 잽싸게 변신한 한 비열한 비유나 독설의 대명사, 또라이 한 여성 대변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에 넣어 배양을 더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자고로 정치인들은 사기를 제대로 쳐야만 한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4년 생명을 연장시키고 말고를 결정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에 맞는 표정 연기부터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어휘 구사와 의사 전달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구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진심 같은 게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김하늘이 가르쳐주는 ‘사기술’의 핵심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거대 사기를 꿈꾸는 193명의 모리배들이 벤치 마크할 대상은 바로 영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에 아무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봤다면 그런 무지몽매한 작당모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뻔뻔하고 새디스틱한 드라마에 국민들을 빠져들게 만들려면 그 정도로 해선 안 된다.


막 출옥한 사기꾼 구라걸, 그녀(주영주)가 구가한 ‘술수’는 가히 물이 올라있다. 관객들은 그녀의 사기를 빤히 알면서도 제목처럼 속아 넘어가주는 ‘관용’을 베푼다. 희철(강동원)이 제 아무리 집안 식구들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부르짖어도 희철은 파렴치한이나 망나니로 몰릴 뿐이다. 그만큼 그녀의 사기술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지금 그 ‘반국민’ 기치를 든 그들의 작태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기죄’로 복역 중인 영주는 언니 결혼을 맞아 절묘한 능청 연기로 가석방을 받을 정도로 ‘구라’의 귀재다. ‘지랄을 벗 삼고 있는’ 동료들의 연기를 지도하면서 그녀는 구라가 ‘천부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193부대원들의 귀감이다. 국민들을 상대로 ‘지랄을 벗 삼는’ 연기로는 당최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실망도’에서 빠져나와 사기계에서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희철처럼 국민이 순박하지만은 않다. 국민들이 청양고추를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집어넣는 ‘고추 청년’일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다. 그 사실은 국회의원들에겐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영주와 같은 천부적인 사기꾼도 한 동네는 홀라당 구라로 장악했지만 국민들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 풍선만 잔뜩 불고 있는 193부대원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구라’를 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짓말로 범벅된 그녀의 이야기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희철을 향한 그 숱한 학대와 갈굼에도 불구, 영주는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193부대원들의 이야기는 그리 만만치 않다. 국회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 만들어 놓고 놀 줄만 알았지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니 영주처럼 사랑마저 획득하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193부대원들도 열라 “우리의 충정을 믿어 달라”고 짖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기저기서 누수 현상만 드러날 뿐 역시 명분도 근거도 없는 아우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기광풍’은 분명 응징을 받아야 마땅할 뿐 아니라 언젠가 193부대원들의 공갈·협박을 그린 ‘사기의 추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국민들은 3월12일 국회에서 행한 193부대원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을 가장한 의회의 권력 남용 쿠데타는 그렇지 않아도 그 동네의 오욕에 지겨워하던 국민들에게 “짜증 다양하게 밀려오네!”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애정빙자사기극’이었던 영주의 좌충우돌은 다소 무리가 있어도 애정을 획득하게끔 마무리됐다. 그러나 ‘국민빙자사기극’을 감당하기에 193부대원의 허접함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던 희철의 몸부림은 “그녀를 사랑합니다”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를 믿어주세요”라던 193부대원들의 공허한 메아리는 “너희들을 탄핵하리라”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문명비판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디 인간사에 ‘낙원’(樂園)이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더구나 193부대원들이 활용하는 것은 악랄한 이분법 구도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 등 이분법이 유용한 때가 있으나, 193부대원들은 그것을 분할과 배제의 장치이자 선악과 우열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고 있다. 바로 친노와 반노라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구도를 들어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상대다. 21세기에도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가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낙원까지 바라는 국민은 없다. 다만 응징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국민 인식과 “우리 아니면 안 된다”라는 헛된 망상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9.03 11:15 메종드 쭌/무비일락
지구에는 강용석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딴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다(내 나라는 아녔음 하는 바람도 있음!). 작년에 학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낑겨서 모이를 주워먹다가 주둥이를 나불댔나보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학생에게,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 지랄입방정을 떤 것이다. 으응? 줘? 대체 뭘 줘?

(강)용석이는 구케으원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하긴 그 지랄맞게 달콤한 그 자릴 왜 스스로 마다해? 떡하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버텼다. 그래도 가시방석이었을텐데, 똥꼬 아프지 않았는지나 모르겠다. 


짜잔, 이런 와중에 8월31일 더 웃긴 쇼가 펼쳐졌다. 용석이 제명안을 놓고 국회에서 표 대결이 펼쳐졌다. 명색이 공인인데, 주둥이 잘못 놀린 죄로 당연 처단될 줄 알았다. 어라? 재석의원 259명 중, 용석이 자르자 111표, 용석이 그냥 두자 134표, 용석이? 난 몰러! 8표로, 용석이 안 잘렸다. 씨뱅 미친 거 아냐?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나으리께서는 한 마디 더 지껄여주신다. "우리 용석이는 지성 교양 예의 갖춘 정의롭고 호감가는 반듯한 후배"란다. 참, 좋은 후배 두셨다, 그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컷들의 소아병적인 연대다.

더 좆 같은 건, 한 신문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반응이었다. "두렵다"고 했다. "사회가, 정치가 이럴 줄 정말 몰랐다.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강 의원)이 했는데, 그런 잘못이 국회에서 용인된다면 그게 정의이고 공정사회인가? 곧 사회에 나가는 우리가 거꾸로 불이익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아마, 그녀에겐 세상이 공포로 채색됐을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것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사회라니.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벌건 여름에 펼쳐지는 공포잔혹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건, 혁명이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시저의 단호한 얼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뺏아 탄 시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껌뻑 죽었다. 그것은 김혜리 기자(씨네21)의 말처럼, '지성적 위엄'이었다. 시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 우두머리였고, 나는 그의 손짓과 몸짓에 전율했다. 나는 그를 따르고 싶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그것도 할리우드의 것에서 혁명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토록 짜릿한 순간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떤 혁명이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공장이니, 그게 신기할 건 없다만, 이 영화가 주는 혁명적 쾌감의 일부는 시저의 표정과 몸짓에 빚지고 있다.


맞다. 나는 시저에 반했다. 이런 혁명적 우두머리의 등장이 그만큼 필요한 시대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과 지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시저라는 혁명적 별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대수로울 게 없다. 걸작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그러고 보니, '68'이라는 제작연도가 의미심장해 뵌다!)의 프리퀄로 기획됐다는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시저의 표정과 지성적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으로, <킹콩>에선 킹콩으로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선보인 앤디 서키스에 온전히 빚지고 있다. 다른 실제 배우들은 시저의 뛰어난 표정과 몸짓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시저 찬양 도우미라고나 할까.



시저라고 처음엔 다른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애완동물이었다. 실험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이 여느 동물원 침팬지와는 다른 지점이었고, 지성의 진화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 정도. 덕분에 시저는 점점 자라면서 지성과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수화로 얘기하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묻고 태생을 고민하는 순간의 그 눈빛부터 나는 흔들렸다. 아, 혁명은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그도 허나 야생의 힘과 본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로드만의 아버지이자 시저를 사랑해준 사람이 타인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유인원 보호감호소(우리)에 갇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의실종된 상태로 줄곧 빨간 셔츠만 입고 다니던 시저가 혁명적 단초를 찾게 된 장소다. 앞서 자신은 다른 줄 알았다. 인간과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그런 유인원으로.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부속물로서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무엇이 자신들의 적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번 깨어난다. 지성이 또 한 번 점프를 하면서 그는 현실을 깨닫는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눈빛, 나는 또 흔들렸다.

압권은 이후였다. 수화만 가능했던 시저가 우리에서 가해지는 핍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No~"라고 외친다. 그리고 일어선다. 언어와 직립보행을 획득하는 순간. 아, 자유를 만나는 순간이다. 노예임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혁명적 기운이 스크린을 감싼다. 나도 함께 외치고 싶었다. No. 어떤 영화나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No"를 만난 적이 없다. 지성과 자유가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 혁명적 쾌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급적 본능에 의해 그들의 봉기에 이입했다. 레알 혁명이 돋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시저와 그 투사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 "No"라고 말하고 일어서기. 그들은 전진한다. 우리를 뚫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의 활엽 가로수를 타고 이동하고 마침내 금문교에 도달한다. 약간 과장해서 이 금문교 장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의 2011년 여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 유인원들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전진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금문교 교각을 긴 팔로 이동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진경은 아까도 언급했던, 시저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광포하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시저가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등 리더의 다섯가지 덕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저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미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 이토록 풍부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하게 한 기술에 대한 탄성도 탄성이거니와,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연기에 아카데미건 어디건,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용석 병'을 겪은 2011년의 한국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이다. 청년이고 장노년이고 없다. 청년들은 청년대로, 장노년들은 장노년대로 절망을 품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른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어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우두머리 다운 우두머리 없이 오합지졸들만 창궐하는 시대. 나는 시저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추천한다. 지구탈출을 권하는 바다. 혁명의 시작은 시저를 옹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터다. 나는 시저를 따르겠다. 인간보다는 시저다. 일단 영화부터 보고 더 이야기하자.


아 참, 뭣보다 시저처럼 제대로 분노(분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분노하라》, p.26) 


용석이나 형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 그런 동물들에게 눌리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살아있다면 시저처럼, "No"라고 외치고, 직립보행을 해야 한다. 노예 아닌 주인의, 핍박이 아닌 자유를 찾는 길이다. 침팬지보다 못한 용석·형오 개새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레알(REAL) 혁명 돋아야 할 사소하고 소소한 이유다. 그 동물들이 우리에게 도덕적 수치심을 안겨줬으니까! 쉬파~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8.27 23:43 메종드 쭌/무비일락
<최종병기 활>의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쏜살같이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을 뚫을 때의 통쾌함이다. 물론 그것은 적을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대라는 적,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정도의 육중한 육량시를 든 청나라 군인. 그들이 조선의 동생을 납치하고, 조선의 양민을 죽이고, 조선을 희롱했으니까.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의 긴장감이 곧 관객인 나의 긴장감이다. 나는 곧 화살이 된다. 나는 스크린을 향해 날아간다. 나는 꽂힌다.

영화를 지배하는 활의 쾌감은 짜릿하다.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겨냥한 덕분이리라. 납치된 내 동생 찾기(살리기). 즉, 동생 찾아 삼만리를 떠난 오라버니의 추격과 청나라 군의 대결은 황홀경에 가까웠다.

더구나 곡사와 애깃살(편전) 그것만 믿고 전쟁에 홀로 뛰어든 남이(박해일)와 온몸으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쥬신타(류승룡), 수컷 냄새 진동하는 두 야성이 숲과 벼랑, 폭포와 들판에서 펼치는 활극은 근래 보기 드문 진경
(珍景)이다. 비록 (CG)호랑이가 옥의 티처럼 삽입된 것은 아쉬움이 되겠으나!

 
<최종병기 활>은 그것으로 충분한 영화다. 병자호란이라는 시대나 배경은 중요한 역할이 아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남이의 처지나 청나라에 무릎 꿇은 조선의 굴욕 같은 것도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서 반드시 연관지어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치듯 지나가는 그 이야기들이 지금-여기의 현실과 오버랩 되어 망막에 남고 뇌리에 주름을 지웠다.

병자호란. 1636년(인조14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국제 정세를 오판하고 외교적 실수를 거듭하면서 빚어진 전쟁.

전쟁 발발 직후, 순식간에 청나라에 함락된 조선의 운명은 인조의 실기에 다름 아니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남이의 아비가 남긴 말이 그것을 방증한다. "외교를 모르는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니 이 나라가 곧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것이다"


뭐, 실기는 인간이니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치자. 그것이 임금이라도. 중요한 것은 실기 이후의 태도와 자세다. 인조는 용서 받기 힘든 자였다. 청의 용골대가 이끄는 병력이 한양으로 밀고 들어오자, 궁궐뿐 아니라 백성을 버렸다. 강화도로 가려다가 그러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간 그에게 남은 것은 백성의 원망이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그 유명한 남한산성 항전이 끝난 이듬해 1월,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향해 굴욕(삼배구고두례·여진족이 천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당했고,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청 장수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백성들이 역시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라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마는,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백성은 고난을 겪고, 국가는 굴욕에 다다랐다. 지금-여기를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남이가 동생을 구하고자 죽도록 고생하는 것의 근원도, 인조의 '반정'이라는 명분을 빌린 임금 욕심이 아녔을까. 공정과 공생을 부르짖으나 허울 좋은 말뿐이고, 외교적 헛발질에 여념이 없는 쥐쉐이가 그렇고, 아이들에게 밥 주기 싫다며 징징거리다가 물러난 5살 훈이가 그렇다.

배밖으로 임금(대통령) 욕심이 드러난 자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게 죄라면 죄다. 형벌은 고스란히 백성(국민)들의 몫이 되는 것도 똑같다. 그들이 버리는 것은 늘 똑같다. 그들은 버리고 갈 뿐이다. <최종병기 활>은 남이의 입을 빌어,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 하나를 쏜다. 

"나라를 버리고 백성을 버린 그 임금은 이미 큰 죄인이오."

오로지 동생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장애물을 넘어 온 남이의 자세를 보라. 청 진지에 잡혀 있는 동생에게 그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무사하냐? 미안하다... 늦어서..." 인조(혹은 국가)는 이런 자세였어야 했다. 오로지 백성만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임금의 자세이건만, 그들은 미안함도, 죄스러움도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하다. 


가만 보자. 한국의 국민, 서울의 시민도 툭 하면 버림 받는다. 물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다. 그러나 김진숙이라는 이 시대의 상징적 아이콘과 접속하기 위해 '희망 버스'를 타고, 해군기지로부터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평화 버스'를 몰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적 버림'에서 자신과 물론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 오로지 개인의 힘만으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역적의 오명을 감수하고 압록강을 건넌 남이의 모습과 겹친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이 무려 50만이었다. 임금과 나라는 그러나 그들의 송환을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싶거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만, 스스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거나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아주 일부만 가까스로 돌아왔다. 

힘겹게 압록강을 건너오는 자인(문채원)과 서군(김무열)의 모습이 있다. 압록강을 넘어섰기에 다시 나라가 받아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은 '희망'과 '평화'를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우리네 모습과 오버랩됐다. 아주 일부만 가까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희망과 평화의 온전한 회복이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최종병기 활>은 작은 힌트도 주고 있었다.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이 청나라로 보내지기 전, 압록강에 다다랐을 때다. 청 군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포로의 생사여탈을 놓고 장난을 벌이는데, 이때 나타난 최종병기 남이가 청 군대의 대오를 흩트린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분분하게 일어나는 민중봉기. 포로였던 그들은 단숨에 청 군대를 휘어잡는다. 민중봉기의 바람직한, 좋은 예. 그들은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는다. 봉기는 성공했고,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희망을 찾고,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몸짓이 그런 봉기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중봉기 곡사. 곧이 곧대로 가는 활이 아니라도 좋다. 팽팽한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서 휘어 들어가는 곡사. 적들이 지 아무리 꽁꽁 숨어 있어도 소용없다. 그 매복의 순간을 타고 단숨에 목을 관통하고야 마는 곡사 같은 봉기. 천박한 자본(가)으로부터 자유를 되찾는 우리의 노동, 우리네 삶. 

국가가 국가이길 거부하고, 기업이 되고자 자본 앞에 투항한 시대. 그것은 청나라 군대 앞에 손쉽게 무너지고 무릎을 꿇고 만 군대와 임금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되레 개인적 동기가 결합돼 혹은 비관적 처지 앞에 개개인의 연대로 청 군대를 무찌르는 백성들의 모습. 그것이 지금의 김진숙(들)과 강정마을 지킴이와 연결됨이라니. 이 영화, 묘하게 시대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최종병기 활>의 또 다른 미덕 중 하나는 자인의 역할과 태도였다.

영화를 보기 전, 그녀는 꽃으로, 장식으로 끝나고 말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칼을 만지고 활을 쏘는 자인은 생사여탈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는 멋진 여성이더라. 자신을 능멸하려는 청의 왕자 앞에서, 그녀는 닭꼬챙이를 먹고는 그를 향해 꼬챙이를 휘두른다. "죽어도 그냥 죽지 않을 것이고 살아도 그냥 살지 않을 것이다." 멋지다. 여자라면, 자인처럼.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지켜야 할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끔 웃음을 주면서도 칼을 내동댕이 치지 않고, 자신의 여자를 지키고자 애를 쓰는 서군이 나는 멋져 보이더라.

나도 내 여자, 내가 지키겠다. 멋지다. 남자라면, 서군처럼.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7.08 22:49 메종드 쭌/무비일락
To. 빌리(Billy).

안녕, 빌리. 소식, 들었어? 아마 지금 넌, 뉴욕 주에 살고 있어서 그 소식에 환호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긴 한데. 뉴욕 주의 동성 결혼 합법화! 동성 커플이 결혼할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됐고,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받는 기초적 보호를 누릴 수 있게 됐잖아.

물론 앞서 미국의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코네티컷, 아이오와, 버몬트 주가 동성 결혼을 제도화한 바 있어서, 이번 뉴욕 주의 담대한 결정은 6번째였지만, 인구(1900만명)를 감안했을 때, 그 파급 효과는 남다를 거란 분석도 나오더라.

너도 만났을지도 모를 이 사람. <천재소년 두기>에서 두기 역을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 5년 전 프러포즈를 했던 동성 약혼자와 곧 결혼하겠다고 하더라. 몇 년간 약혼반지만 끼고 있어야했던 고문(!)은 이제 끝이라지? 그래, 다행이고, 잘 된 일이야.

남들 다 하는 ‘결혼’이 그렇게 어려웠던 사람들. 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요, 그저 죄라면 사랑한 죄?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것, 당연한데도, 그것을 제도적으로 막는다는 게 말이 돼? 응? 그래, 뉴욕 주의 결정, 잘 된 거지, 잘 된거. 널리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동성을 좋아한다는 게 뭐가 나빠? 미국도 이번에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한다고 하잖아. 그네들 삶인데 그걸 왜,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욕할 필요는 없는 거야.” 데뷔 48주년, 1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한, <예술하는 습관>에서 동성애자 시인을 맡은, 일흔 살의 배우, 한국의 이호재 아저씨는 이런 말도 하더라. 배우 예술을 하는 분이라, 타인의 삶을 잘 이해하고자 하시는 것 같아. ^^



하여튼, 뉴욕 주의 소식을 듣곤, 빌리, 네가 떠올랐어. 뜬금없지? 네가 동성애자인 것도 아니고, (물론 극중에선 너의 성정체성을 알 순 없지만) 영화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내세운 것도 아닌데, 왜 너였을까?


아마도 그건, 너를 통해 내가 남자다움에 대한 첫 회의를 가지면서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야. 넌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게끔 도와준 거야. 무슨 얘기? 빌리, 그래 천천히 읽어보렴. 이 편진, 온전히 널 위한 연서니까.

<빌리 엘리어트>, 그 다양한 함의들

<빌리 엘리어트>. 그 영화를 통해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게서 꿈을 보았어. 아버지에게, 세상에게 번번이 부딪히고야마는 꿈이었지만, 네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나는 꿈을 꾸고 싶은 사람이었거든. 꿈이 있다면 좌절하지 말고, 발걸음을 내딛어라! 그렇게 단순했다. 그것이 발레이든, 무엇이든.

처음 봤을 때부터 <빌리 엘리어트>에 홀딱 반했던 나는, 간혹 널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잡곤 했어. 어떻게 널 잊을 수 있겠니. 두 발을 딛고 비상하는 네 모습. 그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했어. 헌데, 이상한 건, 널 볼 때마다 영화가 달리 보였다는 것. 희한했어. 그러니, 넌 늘 새로웠다.

다시 만날 때는, 성장 통을 다룬 성장영화였어.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갈등을 빚고 화해하는가. 그것도 처음에는 소년이 먼저였지만, 다시 볼 땐 아버지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성장할 수 있구나.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네 아버지의 변심(?)이 정말 놀랍게 보였거든.


그랬던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봤을 땐, 그것은 신자유주의 반대 영화이기도 했어.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마가렛 대처가 빚어낸 광산 공동체의 와해. 지금 폐해를 잔뜩 뿜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일어섰는지, 보여줬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대처해야 하는가 등등. 정말, 정치적인 영화였어, <빌리 엘리어트>는.

그것으로 끝이냐. 노노. 연대가 왜 중요한지도 알려준 영화였지. 그것은 꼭 노조의 이야기만 그런 것이 아녔어. 너와 네 친구, 마이클. 너와 발레 선생님이었던 윌킨슨 선생님. 그리고 네 진학을 위해, 없는 살림이지만 삼삼오오 돈을 내놓는 탄광촌 동네 분들. 그래, 네가 살던 그곳에서 느꼈던 짠한 공동체. 당장 눈앞에 닥칠 붕괴 앞에서도, 미래를 굳이 떠올리진 않았겠지만, 널 위해, 공동체의 아이를 위해 주머니에서 페니를 꺼내는 사람들. 그들은 널 희망이라고 불렀지, 아마.

<빌리 엘리어트>가 놀라운 건, 그 다양함 때문이었어. 어떤 시선에서, 누구를 주목해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카멜레온. 넌, 거기서도 물론, 항상 가장 강렬한 포스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성애 혐오증’이 남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그리고 뭣보다, 날 깨어나게 만들어준 건, 네가 빚어낸 남자다움에 대한 생산적 파괴였어. 처음에 한 얘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빌리 엘리어트> 곳곳에는 동성애 혐오증(호모 포비아)이 묻어나. 광산의 남자들. 거기서 연상되는 정형화된 이미지와 편견도 있겠지만, 그들이, 특히 아버지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행동이 그래.


남자다움. 아버진 네게도 권투를 하라고 강요하잖아. 그건 어쩌면, 널 게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마초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애(?)였을지는 몰라도, 난 그 모습이 위태해보였어. 그건 아마도 게이로 비춰지는데 대한 두려움이겠지? 정작 넌,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나 형, 대부분의 광산 남자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시달렸을지도 몰라.

네 아버지도 그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잖아. 고작해야 화내는 게 전부야. 그 화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나오는, 즉 자기 방어본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까, 동성애 혐오증 같은 거지. 호주에서 연구 결과가 있었대. 이성애자 남자들이 게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제한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는. 가령, 이런 거야. 학창시절, 미술, 음악, 문학 수업을 피한대. 여자들이나 하는 수업이라는 핑계로. 심지어 학문적 기술이 다소 여성적으로 보인다며 일부러 실력 발휘를 하지 않는 형태로도 나온대.

동성애 혐오증은 결국, 이성애 남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셈이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재능조차 감춤으로써 진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거지. 그게 뭐야. 자신이 자신을 감춰야만 하다니.

연구는 또 말한대. 나이든 남자의 경우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허참, 죽음을 부를지도 모르는 것까지 나아가다니, 그 동성애에 대한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거야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 아닐까?

빌리, ‘남자다움’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다

마초이즘이 지배하는 광산촌. 그 속에서 너의 결정(발레를 하겠다는)과 너의 행동(아버지에게 저항하는)이 가져다준 충격은 꽤 컸다. 나? 네 아버지나 형보다 아주 조금 덜 했을지는 몰라도, 나, 마초였다. 바닷바람 맞고 자랐다는 이유로, 마도로스의 고장에서 태어났단 이유로, 그곳 남자들은 ‘(비겁한 혹은 비루한) 남자다움’을 은연중에 강요받고 자라거든.

그 남자다움이란 게 이래. 투박하고 무뚝뚝한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풍토 속에, 퇴근해서 아내에게 하는 말이 딱 세 마디래. 아(애)는? 밥 도(줘)!, 자자. 남자는 여자처럼 입을 놀리는 것이 아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한단다. 이른바 한국 갱(경)상도 남자들의 전형. 그런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발레 하고 무용하는 남자는 머스마(사내)도 아닌 기라. 

조금씩 그런 물이 빠지곤 있었다고 하나, 그 마초이즘이 횡행한 도시가 아니더라도, 한국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덕목들이 있어. 빌리, 너로선 당최 이해가 안 될 것이긴 한데, 가령 이런 거야.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어때? 이 거 이 거, 완전 폭력적인 말이지 않아? 그런데도 그 말이 여기에선, 아직 통용돼. 남자의 눈물이란, 그저 끔찍한 것이거나 지질한 것이거나. 사실이 그러하니, 네 아버지와 형이 단호하게 너의 발레를 반대했던 건, 일견 이해가 가더라. 광산의 힘든 노동과 시위로 일생을 살아왔을 그들에게, 남자가 발레를 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더구나, 그게 아들이자 동생이? 아유. 그건 동네 창피한 일이자 수치였던 게지.

마초들에겐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모든 것이 될 때가 있어. 특히 어줍지 않은 남자다움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내가 널 보면서, 깨닫게 된 건, 그 남자다움에 대한 허상이었어. 그건 남자다움도 아니요, 남자로서 해야 할 일도 아니었던 거야. 아버지가, 형이, 그리고 세상이 옭아매온 인습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진짜 남자다움은 아닐까.

아버지 세대에서 형까지 묻어난 남자다움을 생산적으로 파괴했던 너. 나는 그것이 통쾌했어. 그리고 그 통쾌함이 내 가슴을 흔들어 깨우더라. 나의 남자다움이 얼마나 허술하게 조직돼 있었는지.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애 쓰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미숙하며,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하려고 애를 썼던 모습. 내 부끄러움이 보이더라.

동성애라면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짓처럼 여겼던 우둔함까지. 나는 널 보면서, 나를 감싸고 있던 허울 좋은 마초 옷이 날 얼마나 옥죄고 있는 것인지 알았던 거지. 그래, <빌리 엘리어트>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즉 동성애 혐오증이 어떤 식으로 소년을 가둬놨는지를 보여준 영화였어.

너는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그 마초 옷을 찢고 나온 용감하고 바람직한 남자였지. 모든 남자가 아마 너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겠지만, 널 만나 그런 옷을 입고 있고, 그런 옷을 찢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운 좋은 나도 있어.
 


성인이 된 네가 <백조의 호수>에 등장해, 멋있게 도약하고 비상하는 장면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물론, 너의 그 비상을 본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네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건, 네가 이뤄낸 남자다움의 생산적 파괴가, 내 속 좁았던 마음의 도약을 도왔다는 것. 그것으로 나는, 내게도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어. 남자다움에 포박되지 않고, 내 마음과 감정에 조금 더 다가가고 표현할 수 있음에 감사해. 

빌리, 네게 하는 말인데, 너처럼 멋있게 도약하진 못하겠지만, 60이 됐든, 70이 됐든, 나는 발레리노가 될 꿈도 꾼다. 취미일지라도, 나는 네 덕분에 발레가 그렇게 매력적인 것임을, 발레리노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네가 했던 이 말도 여전히 난 기억해.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물음에 네가 답했던.

음…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같은 느낌,
날아가는 것 같아요.
모든걸 잊어버려요.
춤을 출 때 저는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을 그때, 널 초대하고 싶어. 올 수 있겠니? ^.^
고마워. 빌리. 오늘, 이걸로 줄일 게. 안녕. 이만 총총.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06.18 02:17 메종드 쭌/무비일락
지금, 윔블던 시즌이다. 그렇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테니스 대회, 맞다. 세계 4대 메이저 대회의 하나로, 유일하게 잔디 코트에서 펼쳐지는 메이저 대회다. 올해 20일부터 125회째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여름이 왔을라치면, 칙칙한 영국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6월 중순이면, 런던의 한 지역 윔블던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윔블던의 잔디는 그야말로, 푸릇하다 못해 심장을 초록빛으로 물들일 것 같았었다. 말하자면, 윔블던 두근두근. (국보자매의 히트곡 '두근두근'의 6월판이랄까!)

역시 맞다. 과거형이다. 테니스, 잘 치진 못해도, 룰을 아주 잘 알진 못해도, 테니스 스타를 줄줄줄 꿰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비외른 보리부터 시작해서, 존 맥켄로, 지미 코너스, 보리스 베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슈테피 그라피, 안드레 애거시 등등 80~90년대를 풍미했던 테니스 스타들의 몸짓에 들썩거렸다. 오죽하면 야구공 대신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했을까! (사실은 야구공이 딱딱해서 맞으면 아프다보니, 소심한 우리 아해들은 테니스공을 즐겼다.ㅋ)

뭐, 요즘은 나달이니 페더러니, 조코비치니 하는 아해들이 깝쭉대지만, 그네들은 앞선 코트의 스타들 아우라에 비길 바가 아니다. 물론 순전히 내 기준에서만. 내겐 안드레 애거시가 거의 마지막 테니스 스타였다.(애거시 은퇴에 대해 뱉었던 소회도 다음에 공개하겠다.) 이후, 샘프라스라는 걸출한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그는 내게 사그라드는 (테니스를 향한) 마지막 불씨였다.

사랑이냐 일이냐, 선택의 기로

그러니 윔블던. 더 이상 심장박동이 멈춘 마당에, 윔블던 소리를 들어도, 테니스공이 팍, 팍, 하고 튀는 소리를 들어도, 시큰둥. 세월은 그런 변덕도 부려댄다. 테니스가 야구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흘러간 가요마냥 접했던 이름, '윔블던'. 영화였다. <윔블던>. 테니스 영화? 그럴 리가, 테니스를 빙자한 연애질! 로맨틱 코미디다.

윔블던(테니스 대회)을 향한 애정이 식었다손, 영화를 외면할 순 없는 법. 룰루랄라 윔블던을 향하는 마음은, 마냥 이야에로~ 공이 오가는 대신, 사랑이 오갔던 <윔블던>. 아, 테니스 코트엔 공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렴, 사랑볼이 통통 튀기는 잔디 코트. <윔블던>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의 사랑과 일은 안녕하신가!


맞다. 이 고전적이고 진부한 명제. ‘사랑이냐, 일이냐.’ 이는 여전한 위력을 지닌다. 갈팡질팡이다. 사랑을 따르자니 일을 망칠 것 같고, 일을 택하자니 사랑이 저만치 갈 것 같다.

선택은 가혹하다. 선택의 연속이라는 인생도 그래서 가혹한 것일까? 사랑과 일, 그 호락호락하지 갈림길은 가정을 허용치 않을뿐더러, 기회비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테니스공이 네트에 걸려서 넘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희비가 엇갈리듯, 사랑과 일은 서로 그물이 되어 넘을 것이냐 마느냐를 놓고 가슴을 조인다.

헌데, 이 선택! 어쩐지 불온한 냄새도 난다. 선택을 강요하는 객체가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척하지만 그 이면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타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과 일의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다.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사랑에 반대하는 누군가 혹은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하냐’며 사랑을 저울질하려는 누군가. 사랑과 일 사이,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불온한 자장이 있다. 과연 이 선택에서, 온전한 자유의지의 발현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 선택에서, 불리한 쪽은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사랑과 일의 양립을 더욱 힘겹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니까. 남녀평등이 상식이라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상식처럼 움직이는가. 일에 대한 기회 자체가 여성에게 적게 주어질 뿐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남성들의 카르텔에 의한 견제나 불합리한 대우를 견뎌야 하며, 더 많은 공력을 쏟아내야만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랑까지 병행하려면 여성에게 ‘슈퍼 우먼’은 필수다. 원하건 그렇지 않건 말이다. 더구나 자녀 양육까지 겹친다면 대개의 경우, 여성에게 일은 포기하거나 뒤로 물릴 수밖에 없다. 자유의지? 장난치냐. 사회는 여성에게 개인으로서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따지고 들 것이다. 자유 운운말라며, 시덥잖은 충고를 해댈 것이다.

이 비극적(?) 선택. 사랑과 일의 함수는 어쨌거나 꼼꼼히 따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방정식을 풀기는 만만치 않다. 과연 사랑과 일은 서로 융합될 수 없는 대극의 존재일까.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윔블던에서 생긴 일!

<윔블던>은 사랑과 일 사이에서 공을 넘기면서 경기를 펼치는 영화다. 로맨틱코미디의 명가(名家) ‘워킹타이틀’이 만든 영화답게, <윔블던>은 사랑과 일을 손쉬운 대립항으로만 만들어놓지 않는다. 사랑과 일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이들이 해피엔딩으로 내달을 것임을 충분히 예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사랑과 일의 스매싱! 박진감 넘치는 테니스경기를 보는 것 이상이다. 유후~

자, 우선 조합을 보자. 별 볼일 없는 테니스 선수생활 끝에 은퇴를 목전에 둔 우울한 남자. 그리고 세계 최강자로 매력적인 외모를 갖춘 쌩쌩한 여자. 이런 극과극의 만남은 뻔한 스토리를 상정한다. 특히 이런 구도는 이전에도 워킹타이틀이 써먹은 적이 있다. 그렇다. <노팅힐>. 세계적인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와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허름한 책방주인의 오렌지쥬스(로 맺어진) 로맨스. 이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갈팡질팡 로맨스는, 애틋하면서도 상큼한 감상과 짜릿함을 안겨줬다.

<윔블던>도 태생적으로 같은 어머니를 둔 때문인지 궤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운 좋게 윔블던 대회의 와일드카드를 따낸 ‘피터’(폴 베타니, 참고로 이 남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제니퍼 코넬리의 남편이다)는 <노팅힐>의 윌리엄(휴 그랜트)와 조응한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아본 적도 없고, 테니스 선수로서 더 이상 욕심도 없다. 그저 은퇴 후 유한부인들의 테니스 강사나 하면서 지낼 작정이니까.



반면 ‘리지’(커스틴 던스트)는 <노팅힐>의 안나(줄리아 로버츠)마냥 세계 최고의 테니스 여왕이다. 실력이면 실력,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남 부러울 것도 없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스컴의 관심을 끈다. 테니스를 더 잘하고 싶으면서도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싶다. 욕심쟁이, 우후훗~


이 두 사람. 쉬이 만날 것 같지도 않고, 만나봐야 별 스파크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들. 헌데 그러면, 영화가 되지 않잖나. 그들을 맺어주는 건, 이번엔 오렌지쥬스가 아니고 샌드위치다. 물론 우연을 가장한, 샌드위치 로맨스.

그리고 이어지는 데이트와 사랑의 시작. 그런데 이들은 테니스선수로서 테니스대회에 참가한, 즉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던가. 그것도 윔블던 대회다. 4대 그랜드슬램의 하나로 테니스계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

사랑은 꽃이 막 피려고 하나, 일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두 사람 각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 은퇴를 작정한 피터에게야 그저 닐리리 맘보다. 그저 마지막 대회 이상의 감흥은 없다.

반면 리지는 자기 앞에 잘나가는 선수는 없고, 수성만이 필요한 세계 최고의 스타다. 행여나 삐끗할 경우, 매스컴과 매니저를 보는 아버지의 등쌀과 눈총에 시달려야 한다.

일을 대하는 두 사람의 처지는 극과 극이다. 이런 마당인데, 사랑이 서비스 에이스처럼 꽂히고야 만다. 아, 과연 사랑은 일을 방해할 것인가, 사랑은 일을 업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일의 두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강서비스, 사랑을 엮다

로맨틱코미디의 습관성 서비스는 늘 우연에 꽂힌다. 우연으로 서비스 포인트를 얻는 습성이 있다. 피터와 리지의 만남과 사랑도 그러했듯, 별 볼일 없는 선수로 나이브하게 대회에 임했던 피터의 승승장구 또한 이변과 우연으로 점철된다. 우연찮게 시작한 사랑과 함께 일(테니스)에서도 시너지효과를 얻게 되는 케이스. 사랑과 섹스의 스매싱은 쌩쌩한 20대를 상대하기 힘들 것만 같던 30대의 피터를 구원한다. 우연이 빚어낸 기사회생.

그러나 그 사랑, 리지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게 아니다. 경기 전의 섹스가 실제 게임에서도 도움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리지는, 막상 시합에서 꼬리를 내린다. 서로 사랑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서 두 사람은 엇갈린 길을 걷는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강해지는 피터와 시합을 망치면서 세계 최고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리지.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각자의 일도 따라주면 좋으련만, 흑. 한쪽은 잘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경우, 갈등은 깊어진다. 사랑 때문에 일이 울고, 일 때문에 사랑이 운다. 사랑과 일은 정녕 양립할 수 없단 말인가. 


사랑과 일 사이에서 삐걱거리는 두 사람의 행보. 익숙하면서도 즐겁게 네트 위를 오간다. 사랑 때문에 시합을 망치는 리지가 ‘사랑과 일의 양립’이 어려운 여성의 입장을 보이는 것도 같지만, 리지의 선택은, '사랑이냐 일이냐'는 진부한 명제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건 윔블던의 선물이다. 커스틴 던스트의 매력이 물씬이다. 이 여자, 생긴 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매력적이다. 

사랑과 일, 모두를 거머쥔 피터도 한쪽만을 위해 코트를 내달리지 않는다. 그는 중요한 결승전을 치르면서도, “우승하면 리지와 결혼해야지, 나와 취향이 다르면 어떡하지?”라며 딴 생각을 하는 남자다. 어찌 보면 중요한 일(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가 황당하면서도, 그는 살아있고 입체적인 남자라는 느낌을 준다.

사랑과 일은 양립 가능하다. 지난 1월에 만난 명로진은 일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잘 하고, 사랑 잘 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믿음'을 내놨다. 사랑 때문에 일을 못한다거나, 일 때문에 사랑을 못한다는 말, 그건 변명이다. 딱 그만큼만 사랑하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일 때문이라는 어줍잖은 핑계를 댔던 적이 있다. 사랑은 늘 상대에게 거대하고 큰 것을 주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헛발질을 했다. 아마, 그것이 윔블던에 참가하지 못한 이유? ^^; 미안하다. 어줍잖았던 내 변명.

사랑과 일 사이의 외줄타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윔블던>의 두 사람은 그 와중에서도 각자의 내면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 리지와 피터가 은근슬쩍 건네는 메시지는 이런 거다. 사랑과 일 어느 하나가 ‘내부수리중’이라도 하나를 버리고 취하는 것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랑과 일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준 리지와 피터에게 감사. <윔블던>의 미덕.


아울러, 좋건 나쁘건 상대방 코트에 서비스를 넣고 볼 일이다. 매치포인트를 얻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할 일이다.

아, 윔블던에 가고 싶다. 6월 중순의 런던을 보고 싶으니까. 그러면 혹시 아나. 샌드위치로 로맨스를 만들 수 있을지... 아니, 난 그냥 커피로 하련다. 난, 커피 만드는 남자니까!!! 이름하여, 윔블던 커피. 그러니까, 사진속 피터가 쥐고 있는 저 커피. 두 사람의 웃음과 행복을 증폭시켜주는 커피 되시겠다.


6월 중순, <윔블던>을 보고, 혹은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보고, 나랑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드는 커피 메뉴, 윔블던. 당신을 만나고 싶다. 당신을 위해 뽑아주고 싶다.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서비스 포인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