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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2 01:01 메종드 쭌/무비일락

어린 날, 친구 놀려 먹을 때 쓰던 단어들. 바보, 똥개, 축구, 천치, 온달 등 많았다. 그 가운데 똥개. 개 중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고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씹혔던 존재였다. 똥을 핥아먹는 개였고, 이른바 족보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밥 구걸하는 개, 똥개였다. 


뭐 어설프지만, 좀 어린 시절, 진짜 양아치를 꿈꿨다. 건들건들, 유유자적, 허허실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닐 수 있는.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지닌 'A급' 양아치. 그러나 그리 되지 못할 팔자였나 보다. 어설픈 B급 양아치도 되지 못했다. A급 양아치 선망은 여전하지만, 나는 그냥 대세를 따르는 순응자로 살아가고 있다. 간혹 궁금하다. 내가 설계했던 그 양아치,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의 도플갱어?   


똥개, 양아치. 세상은 그들을 루저 혹은 떨거지라고도 부를 것이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의 부족에 따른 잉여인간. 이른바 잘 나가지도 못하고 학벌, 돈, 빽 어느 하나 기댈 곳도 없다. 세상이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 한 번 제대로 던져줄 리도 무방하다. 소외되고 배제된 아웃사이더에게 세상이 왜 눈길을 던지겠나.


꼰대들이 하는 말이래야, 고작 이런 말일 것이다. "너 그 따위로 살래?" 판에 박힌 으름장. 아니면 "인생은 여차저차하니까 이래저래 살아라" 고리타분한 일장 훈시.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처럼 개무시하는 세상의 작동원리가 있다. 화폐가 심화시킨 경쟁구도에서 낙오한 자들에게 이곳은 동정없는 세상. 그러고선, 이런 말도 내뱉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위로하는 척, 멘토링 하는 척, 자신들이 펼쳐놓은 그물에 포획된 먹잇감을 살살 달랜다. 그들이 날뛰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그물망이 찢어지거나 흠집이 생기거든.  


<똥개>. 그 잘난 분들이 세팅해 놓은 세계 밖에서 부유하는 평범한 청춘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만의 소박한 꿈을 품고 사는 이른바 열외자의 삶.

 

그 중에서도 "아부지는 경찰, 내는 양아치"라고 읊조리는 청춘, 차철민(정우성)이 있다. 정우성이 똥개? 양아치?

 

사실,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다.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이자 청춘의 아이콘을 '똥개'이며 '양아치'로 전락(?)시키다니! 곽경택 감독, 큰 맘 먹었구나.  

 

정우성은 똥개다! 


<똥개>의 콘셉트, 명확하다. 정우성, 망가뜨리기. 청춘, 반항, 자유의 아이콘인 그를, 여전히 꽃미남이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같은 그를, 하릴없는 양아치 '똥개'로 바꿔치기 하기. 정우성은 망가지기로 작정했고, 곽경택 감독은 그를 망가뜨리기로 합의했다.


망가지기로 작정한 정우성, 그때까지 쌓아온 이미지에 한 방 날린다. 생각해보라. "제 친구입니다. 성공보다 중요한 건 행복이라나요." 광고에서 그의 친구는 이런 멋진 멘트 날려주셨다. 근사한 식당, 폼 나는 명품 정장을 입고 아름다운 고소영을 향해 미소를 띄우며 카드에 사인을 하던 그다. 멋있다. 아름답다. 그것을 코스프레처럼 입고 있던 그였다.

 

<똥개>의 그는 다르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에, 걸쭉한 사투리를 구사한다. 삐딱하고 구부정한 어깨로 어기적 어기적 걷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긴장 풀린 자세로 일관한다. 코에서 액체까지 질질 흘린다. 정우성에 대한 환상을 깨기로 작정했다.


정우성, 말한다. 이미지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똥개>를 선택했다. 노력한 흔적, 엿보인다. '똥개' 같기도 하다. 느릿느릿, 뮝기적뮝기적, 어리버리, 어영부영. 여느 길가에서 볼 수 있는 똥개다. 방바닥 긁으며 TV를 보며 소일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놓고 아버지와 싸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토라진다. 싸움을 걸어오는 동네 양아치들에게 "겉저리에 밥 좀 묵고하자. 어차피 싸움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 아이가"라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무심한 듯 시크함.

 

친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가 속한 MJK(밀양주니어클럽, 당연 'K'라는 철자법, 오류다!)의 멤버들, 별 다를 바 없다. 엉뚱한 꿈 하나씩 간직한 시골의 똥개모임. 그들 역시 소박한 언저리의 삶이다. 도시의 입장에선 루저들이고, 양아치에 똥개다. 감독이 너무 기름을 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면도 있다.  

 


차철민에게 붙여진 똥개라는 별명, 사연이 있다. 철민을 낳고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 죽고 나자, 이집저집 밥동냥하면서 키워진 데서 유래했다. 아버지가 똥개를 키우는 방식도 도시의 것과 다르다. 사람을 죽고 살리는 문제나 감옥에 들어갈 일이 아니라면, 똥개가 하는 대로 내비둔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나, 똥개가 친 사고를 뒷수습하고, 부자간에 계란 프라이를 놓고 아웅다웅하면서도 속 깊은 정을 품고 있다. 하나 같이 선한 사람들. <똥개>의 약점이다. 

 

정우성 또한 약점이다. 똥개 코스프레에도 불구, 그만의 이미지와 모습, 살아 있다.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 멋진 놈은 아무리 코스프레를 해도 멋지다. 기침, 가난, 사랑만 숨길 수 없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까불지 마라, 확 물어 삔다, 콱 쌔려뿔라.


어쨌든 그렇게 띄엄띄엄한 똥개도 눈이 뒤집힐 때가 있다. 허허실실 똥개 같아도 그만의 기준이 있다. 무기력하게 흐느적 거리는 듯해도, 철민은 정의파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없는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고, 있는 놈은 밖에서 떵떵거리는 현실, 외면하지 않는다. 잔머리 굴리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다. 아니다 싶으면 달려드는. 철민 역시 그렇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 그것이 똥개의 진수 아니던가.

 

영화는 한결 같다. 조미료나 향신료, 뿌리지 않는다. 싸움도 정직하다. 생생하다. 속된 말로 개싸움. 오로지 상대방의 피를 봐야겠다는 정신 하나로 똘똘 뭉친 쌈마이들의 맞장뜨기. 살과 살이 맞부딪힌다. 똥개가 감옥에서 펼치는 결투신,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똥개>는 어느 소도시의 일상을 과장되지 않게, 소박하게 담았다. 어깨에 힘을 뺀 티도 난다. 그런 한편으로 너무 정직하다고나 할까. 경박한 오버 액션과 말 장난으로 치장한 허접한 코미디보다는 낫지만, 지나치게 담백하다. 

 

다만, 잉여에게 눈길을 준 것에 나는 더 집중한다. 우리는 늘 크고 빛나는 반짝이는 성공에만 집중하고 관심을 주지 않았던가. 세상엔 빛나지 못하는 언저리 청춘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까지 빛나지 않을 것이라 보장도 없다. <똥개>는 잉여를 구박하고 내친 어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어른들, 치졸하다. 그들은 여전히 언저리 청춘에게 열패감과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고부가가치 인간형 양산에만 매몰돼 있고, 그들만 바라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인간형 양산에만 골몰한다. 이명박은 그들의 아바타였고, 박근혜라는 또 다른 아바타를 내세우려고 한다.

 

그들에게 똥개를 풀어야 한다. 한 번 물어서 절대 놓지 않게끔. 다 물어라, 똥개야. 그래, 나도 양아치 똥개가 되고 싶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6.29 01:12 메종드 쭌/무비일락

Bad Boys. 직역하면, 나쁜 녀석들.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을 응시하기도 전에 이미 안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되레 나쁜 적을 검거하고 섬멸하는 '착한' 우리(?) 편이다. 그들은 정의(正義)와 선(善)의 편에 있(다고 주입 받)는 경찰이며, 그들의 종횡무진은 악(惡)을 없애는 정당한 작업이자 활동이다. 그들은 물론, 현실에서 늘 만날 수 있는 비리(非理)와 결탁한 무적 경찰도 아니다. 그냥 '우리' 편이다.


그렇다면, 왜 '나쁜(bad)'이란 수식어를 선사했지? 심각하게 생각할 이윤 없겠다. 그저 웃고 즐기자는 레토릭이다. 일종의 반어법? 표현하려는 내용과 반대되는 말을 통해 어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 아마도 이런 표현 효과를 통해 그들이 '좋은 녀석들(Good Boys)'임을 주입시키고자 한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좋은 녀석들이 맞을까? 


미안하다. 솔직히 이런 고민, 불필요하다. <나쁜 녀석들2>는 여름 무더위를 날려 보내기 위한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일 뿐이다. 때리고 부수고 깃발을 높이 들어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악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아드레날린 지수를 치솟게 하는 것이다. 별책부록으로, 행여 비위에 맞지 않아 성질이 나면 '우싸~'라고 외치면서 '성질 죽이는 법'도 들어가있다. 이래저래, 여름 영화, 맞다.

 

You Guys, Back... Man~


그들을 만나는 건, 여름이 제격이다. 1편 <나쁜 녀석들>의 성공이후 8년, 오래 걸리긴 했다. 성공한 블록버스터 치고는 말이다. 2편이 나오기 8년 전, 빛나는 재담과 익살을 통해 쾌감을 선사해주던 두 악동들. 돌아온 조건은 하나다. '더 커져라, 세져라, 빨라져라'는 주문을 외치며 속편의 룰에 충실할 것.

 


마커스(마틴 로렌스)와 마이크(윌 스미스), 재미난 콤비다. 두 악동, 2편의 출발선상부터 화끈하다. 백호주의에 인종차별을 일삼는 KKK단의 집회에 깜짝 등장한다. 극의 긴장감 단숨에 유발시킨다. 총알, 무차별로 갈겨댄다. 관객을 향한 선전포고다. 보고 화끈하게 즐기시라. 앞으로 나올 영화의 모든 것을 그렇게 규정짓는다.


도로 추격씬이 빠질 수 없다. 전반부 관객의 시각을 압도한다. 무분별한 차량 파괴, 짜릿한 속도감 등을 통해 관객의 재미와 긴장감을 보장한다. 60대의 차량, 150여명의 경찰을 투입했다는 이 추격씬, 페라리의 위용은 유난히 돋보인다(PPL로 추정되지만). 끝내준다. 스크린이 터져나갈 것 같다. 1편보다 더 커지고 세진 증거다.  


더불어 살상과 폭력의 강도에서도 전편을 압도한다. 고어 장면도 태연하게 선보인다. 시체는 거리를 나뒹굴고, 머리 뚜껑이 툭하니 열린다. 주검의 배를 갈라 아무렇지 않게 심장을 들어내기도 한다. 비위 약한 사람, 토 나온다. 너무 나간다. 속편의 중압감에 눌렸다는 증거다.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유쾌하다면, 두 악동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입담 덕분이다. 물에 빠져 익사해도 주둥이는 죽지 않고 둥둥 떠다닐 것 같은 현란한 입담. 두 악동, 제리 브룩하이머(제작자)와 마이클 베이(감독)의 자장 안에서 빛을 발한다. 콤비 플레이의 정수다. 


마이크와 마커스. 흑인이라는 인종적 동질감 외에 다른 요소에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과잉․과격(마이크)과 온순․소심(마커스)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펼쳐진다. 그건 필연적으로 한쪽의 이탈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그들을 묶는 끈이 단단하다. 'Bad Boys For Life'라는 슬로건이 이를 대변한다. 전자양판점에서의 게이 소동이나 마커스의 동생, 시드를 둘러싼 신경전은 둘 사이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삐걱거리면서도 의리, 충만하다. 때론 달라서 더 좋은 사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경멸 등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도 존재하지만 블록버스터 유머로 넘길 수는 있다. 물론 그것,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게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추정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들은 뭉쳤고 콤비 플레이는 잘 빠진 상품이다. 그들의 화학 작용, '1+1=2'라는 수학적 공식을 넘어선다. 신나고 박진감 넘친다. 아드레날린 팍팍. 함께 붙여 놓으니, 그야말로 두려울 게 없다. 시너지 확실하다. 다만 그들의 찰떡궁합, 과잉 화학작용도 야기한다. 쿠바 반격 작전이 그렇다. 오버였다. 미국의 적성국 쿠바에 대한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방법도 밉상이다. 밉다면 쿠바 정부가 미워야지, 쿠바 인민, 그것도 판자촌에 사는 인민을 무시하는 건, 졸렬하다. 그 잔혹무도함, 불편하다. 그것만 놓고 보면, 그들은 진짜 나쁜 녀석들이다. 똥오줌 구별 못하는 무지의 처사이자 소양 없는 짓거리다. 

 

그래서, 짧지만 불편한 어떤 여운!  


또 있다. 이념에 의한 냉전시대가 일단락된 이후 미국은 '마약'도 적으로 상정해 놓은 것 같다. 허나 그것이 지독히 편향적인 데다 왜곡까지 가세한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마약에 대한 응징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정작 그들의 의도는 따로 있다. 그걸 교묘히 감췄다. 불편부당하다.


<나쁜 녀석들2> , 1편과 마찬가지로, 마약 카르텔의 소탕 작전에 이야기의 핵심을 둔다. '마약 제조지'라는 설명까지 친절히 곁들여 쿠바의 판자촌을 밀어버리는 무대뽀 과격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시감을 느낀다.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땡깡으로 이라크를 밀어 버렸던 미국의 모습. 바로 오버랩 된다. 쿠바가 왜 그들의 파괴행각에 희생양이 돼야 하는지, 타당성 떨어진다. 적성국? 이념 대립?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더 이상 무기를 투하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이념차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그냥 미국에게 개기는 모든 녀석들이 미운 거다. 졸렬한 미국이다. 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그런 미국의 졸렬함이 DNA처럼 박혀 있다.  

 


또 하나, 마커스가 마약을 우연찮게 흡인하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 (마약이라면 극도로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 읽지 마시라. 심경이 극도로 불편해 질 수 있다.) 개인의 자유는 그 행위가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자유주의에 근거했을 때, 마약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는 뭔가 구리다. 물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마약이 늘 범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 가정 파괴니 범죄 유도니, 온갖 해악의 근원인 것처럼 호도하는 건 뭔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물론, 중독의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만, 마약류 모두가 중독성을 지닌 건 아니다. 마약이라고 규정된 것을 해서 행여 자해를 하더라도 그것이 범죄로 규정돼야 하는가의 문제. 도덕적인 비난은 가능하겠다. 그러나 법적인 제재는 우습지 않나? 순수한 개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장전 중 하나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 개인에게 실존의 책임을 안겨준 의미가 있었다.


마약을 굳이 옹호하기 위한 발언은 아니다만, 마약이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 당하는 건 불편하다. 가령, 1960년대 문화적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도어즈, 특히 짐 모리슨. 그(들)에게 문화적 자유주의의 질료는 마약이었다. 고종석 선생에 의하면, 이들의 문화적 자유주의는 기성체제의 갑각을 깨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로 뻗어나갈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였으며, 앙드레 지드의 문학적 선양을 받았던 미쇼의 경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신의 한 극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마약복용을 했다. 마약복용, 반드시 비난만 받아야 하는 걸까?


아, 오해는 마라. 예술성 발현을 위해 마약 복용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니다. 면죄부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영역 안에서 마약소지 혹은 복용이 범죄의 요소가 되는 게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함께 고민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이다. 그래서 이땅에서 대마초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대마초가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대마초, 무조건 마약이다. 왜 마약인지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펴도, 지배층은 막무가내다. 무조건 마약!

 

대마초 경험을 한 연예인들도 왠지 불쌍하면서, 한 번쯤 제대로 한 판 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유 영혼을 지닌 예술적 연예인들이 끼를 부려보는 건 어떤가. 대마초를 했다가 발각될 때마다 그들은 죽을 죄를 지은 듯 스스로 범죄자임을 실토한다. 미안하다고 별 생각 없이 사과를 한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유'를 떠올린다.

 

아울러, 그것이 진짜 속마음일까, 가끔 궁금하다. 그러다 죗값(?)을 치르고 복귀할 때마다 왈가왈부 말도 많다. 마약쟁이라는 주홍글씨까지 꼼꼼하게 새겨서 주신다. 과연 우리는 자유를 얼마나 알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무책임한 발언일 수 있다. 연예인들, 여전히 권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밥줄 끊기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용히 수그리고 들어가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누구를 위한 것일까. 대중을 위한다면 그러진 않을 텐데. 결국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 직조해 놓은 시스템은 허투루 된 것이 아닐세. 허허.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6.24 23:11 메종드 쭌/무비일락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의 버스. 일부러 볼 생각은 아니었다. 바깥을 보고자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문자가 들어왔다. 이별을 통보한다.  

 

'오빠랑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연락하지 마.'

 

힐긋. 옆에 앉은 여자의 표정을 본다. 무덤덤한 듯 짜증이 섞인 얼굴. 물론, 그 뒤에 일렁이는 감정은 또 다른 물결이리라. 헤어짐 앞에 무덤덤과 짜증은 제3자의 남의 속도 모르는 지껄임일 테니. 오빠라는 남자, 전화를 시도했으나 여자는 받지 않더니, 전원을 꺼버렸다. 본의 아니게, 헤어지는 연인들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

 

그냥 궁금했다. 다시 힐긋.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쓸쓸해 보였다. 어떤 생각들이 여자를 헤집고 있을까. 알 수 없었지만, 사랑이 깨지는 세계는 슬픈 표정일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트루먼 카포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그들에겐, '멈춤'이 필요하나, 세상은 무심한 듯 시크하다. 젠장, 내가 다 슬프네.   

 

그 상황이 참으로 묘했던 것은, 애틋하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만나고 직후였기 때문이다.

<스롤란 마이러브>. 캄보디아에서 펼쳐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어떤 실화였기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냐!

  

 

남자는 대학 졸업 후 캄보디아로 배낭여행을 온 독일 남자.

여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에이즈에 걸린 캄보디아 여자.

장난 같이 시작한 사랑, 그러나 남자,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캄보디아판 <너는 내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허나 만듦새, 구성 등 영화는 허술하다. 

그토록 애절한 사랑이건만, 영화는 극적인 소재의 무게감에 턱도 없이 모자란다.

어설프게 소재를 휘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극중에선 벤이 스레이케오와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결연함의 계기나 이유가 크게 와닿진 않는다. 

왜 그가 그토록 매달리는지, 왜 저토록 백방으로 애를 쓰는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충실하게 그려주지 못했다. 

오로지 신파와 감정적 접촉으로 뒤범벅한다.   

 

그럼에도 나는 묵묵히 그들을 지켜봤다. 

벤(데이빗 크로스)과 스레이케오(아핀야 사쿨자로엔숙)의 사랑을 흡입했다.

첫 눈에 빠진 사랑을 믿으니까. 그것이 때론 생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음을 아니까.

그녀가 생계를 위해 몸을 판다는 것을 알아도,

그녀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들어도,

벤이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음을 바라본다. 

살다보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거나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는, 그래야만 하는 사건이 온다. 

물론 벤도 짜증도 내고, 슬픔을 억누르기도 한다. 사람이니까.

그래서 지켜봤고, 끝까지 그들을 응원했다. 그것을 사랑으로 봐야할지 헷갈렸지만.

 

스레이케오를 연기한 아핀야는 태국의 유명 배우라는데,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벤의 데이빗은 <더 리더>의 바로 그 어린 남자다. 어느덧 훌쩍 큰 청년이 됐다.

 

극중 성격도, 문화도, 국적도, 그 모든 것이 다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을 하고, 헤어짐을 거부하더라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확인했던 버스 안. 문자(디지털) 통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헤어짐의 방식. 그렇게 당해 본 나는,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안다.

 

문자 통보를 당한 그 남자. 여자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별의 방식 때문에, 나는 그 남자가 아팠다.

영화는 잠시 아름다웠지만, 세상은 잔인하구나.

 

아, 그나저나 나는 캄보디아에 갔을 때,

스레이케오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왜 만나지 못했을까. ㅠㅠ

팔자로다. 운명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5.20 14:46 메종드 쭌/무비일락

최근 '사령카페'라는 기이한 모임이 입길에 올랐다. 한 젊은이의 죽음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사령(死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사령카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낼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이들은 사악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사령을 불러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칠게 말해 종교적 의식의 일환인데, 물론 그것을 종교라고 말할 순 없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가 뒤를 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소리, 한 교회 목사가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이건 해프닝 이상이다. 사람들의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사기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지옥불 같은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의 약함을 악용한 사기극이다.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년의 스웨덴 영화가 그런 즈음 개봉한 것은 우연일 것이다. 종교(기독교)가 득세한 시절, 중세의 십자군 기사가 저승사자와 맞닥트린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죽음의 사자"라고 답한다. 그러고선 별다른 놀라움도 없이, 기사와 죽음의 사자는 체스를 둔다. 이기면 24시간 죽음을 유예한다는 조건을 걸고. 

 

<제7의 봉인>은 체스의 승자인 기사가 24시간 세상을 돌아보는 것으로 풀어나간다. 신, 종교, 죽음, 구원 등이 그의 행보에 따라붙는다. 중세를 빗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의 원초적 질문을 던지는 구조다.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만드는 구조.

 

이 영화의 미덕은 그것이다. 영화가 사유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영화를 얕본 지식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 잉마르 베리만이라는 거장이 있었다. 지난 2007년 7월30일 세상을 떠난 스웨덴의 영화철학자.

 

그도 신의 존재와 종교적 구원이 궁금했나 보다. 저승사자와 승산 없는 내기를 펼치는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의 존재는 그것을 대변한다. 신의 부르심이라는 명분을 내 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페스트다. 그런 배경부터 베리만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내기에서 이겨 24시간 세상을 돌아보지만, 그가 원하는 구원은 보이질 않는다.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은 별로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교회를 찾아가도 그렇고, 마녀사냥을 당하는 소녀를 지키봐도 그렇다. 어딜가도 죽음만 횡행한다. 신(종교)가 말한 구원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광대 부부를 만나 평화를 느끼고, 블로크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동행한다. 영화가 흑백톤을 유지하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다. 흑백이라는 형식은 사유를 또 다른 공간으로 이끈다. 그러나 마냥 재밌지는 않다. 간간이 끼어드는 유머가 흑백톤의 무거움을 상쇄하지만, 기본적으로 최근의 영화적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런 형식이 버거울 수 있겠다. 

 

뭔가 삐가번쩍한 자극도 없다. 그저 사유를 끊임없이 요하는 스크린 앞에 자극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영화적 몰입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이 이 영화의 헛점은 결코 아니다. 죽음과 구원, 혹은 종교에 대한 이 영화의 화두는 극장 밖에서 충분히 이어질 테마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지만, 그 죽음마저도 악용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사령카페도 그렇고, 최진실도 그렇다.

 

 

여전히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 되고, 종결되지도 않겠지만, <제7의 봉인>은 신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사유를 요구한다. 기사의 여정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신도 지금의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이 원한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신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일까?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5.19 23:37 메종드 쭌/무비일락

‘성인’ 혹은 ‘성년’의 꼬리표는 그냥 오지 않는다. 세월 먹는다고, 시간 보낸다고 거저먹거나 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무살이 되면 으레 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편의상 정한 제도일 뿐이다. 성년의 날도 그렇다. 스무살이 됐다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변화는 그리 분명치 않다. 19년 364일과 20년 1일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클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그만한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성장통이라고 불리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 세상은 내 의지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본격적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세상 아니던가. 자고로 어른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점점 더 많아지는 시기이다. 어릴 때야 떼 쓰고,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갔던 것이 이젠 그렇지 않다.

 

그렇다. 훌쩍 커버리는 어느 날이 온다. 그건 그만한 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몸으로 체화해야 한다. 소화불량이 될 수도 있다.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역시 성인이란 타이틀은 그냥 딸 수 없다.

 

한편으로 성인은 홀로 갈 것을 명받는 나이이다. 그 어린 날 함께였고 함께일 거라고 생각도 했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나를 지키고 돌보는 건 수호천사의 몫이 아니다. 이젠 ‘홀로서기’라는 것도 배워야 한다. 불안이 엄습해 온다. 어린 새는 둥지를 벗어나기 위해 날개 짓을 하지만, 그 날개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 아득한 추락의 이미지까지 감안하면서 어린 새는 날개 짓을 습득한다. 온전하게 혼자서 날기가 되는 날, 어린 새는 온전한 새로서 자리매김한다. 


청춘, 부유하면 또 어떠리


신지와 마사루(마짱). <키즈리턴>은 아이에서 어른이 돼 가는 그들을 덤덤하게 담는다.

 

이른바 문제아로 불리는 마짱은 신지를 ‘시다바리’ 삼아 하릴없이 부유하고 다닌다. 그들, 어떤 목적이나 목표도 없다. 선생님을 희화화해서 골탕 먹이고 학생들에게 삥을 뜯거나 성인영화를 보면서 전전할 뿐이다. 그들에게 인생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잔혹사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밀착으로 대충대충 연기하는 무대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런 그들에게 이런 말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희망 없는, 싹수 노오란 놈들. 이름도 있고 존재도 있지만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고 외면한다. 그들에겐 따뜻한 시선보다 무시 혹은 무관심의 그늘이 익숙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권투가 온다. 불온한 목적으로 권투도장에 나간 마짱과 달리 신지는 권투가 재미나고 신난다. 적성에도 맞는 것 같다. 신지는 권투에 더욱 몰두한다. 체육관의 유망주로 도약한다.

 

그런 신지와 달리 마짱은 권투를 떠난다. 대신 야쿠자로 편입돼 차츰 인정을 받는다. 조직내에서 위치도 올라간다. 이러다 보니, 끈적끈적하던 두 부유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발걸음을 달리 하다보니, 서먹해 진다.


인생은 늘 그렇게 우연 투성이다. 운이 좌우한다. 그들, 예기치 않게 누군가를 대신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특별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년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주어지니까 할 뿐이다. 새장에 갇힌 새들은 먹이가 주어지니까 먹을 뿐이고 날지 못하니까 날개가 퇴화한다. 영화는 그저 덤덤하다. 그들 각자 가는 길, 묵묵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그래도 달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혹은 다리를 움직이면서. 혹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누군가도 있다. 현실은 거칠게 나누면,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꾸준히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하는 인간과 이리저리 부유하고 치이다가 어느 순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

 

<키즈리턴>에선 콤비 만담가를 꿈꾸던 두 녀석들만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승장구 하던 신지, 실패한 선배 퇴물복서에게 끌려 다니다가 패배에 익숙해진다. 중간보스까지 올라선 마짱,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시쳇말로 '깝'치다가 고꾸라진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돌진하던 두 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후 그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신지와 마짱,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오래 전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그 모습, 영화는 끝을 맺는다. 성인이 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현실 같다. 각자의 길이랍시고 거닐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한 채 낙마했다.

 

신지, 묻는다. “우린 이제 끝난 건가요?”

마짱, 대답한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두 사람, 절망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자전거는 그들이 다시 달릴 것임을 예고한다.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드는 것일까. 세상은 아직 성인으로 돋움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공포를 심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조정하기 위한 꼼수다. 아픈 것은 기득권이 조작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마짱이 먼저 앞서나가고 신지가 뒤를 좇는 모양새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관계와 같다. 앞바퀴가 그어놓은 흔적과 절망은 뒷바퀴가 수습하고 쓰다듬는다. 절망을 지우려는 희망의 목소리는 “다시 시작한다”로 귀결될 것이다. 그들, 이전의 절망도 어쩌면 달콤했던 것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자전거 페달을 돌려 단절된 희망의 속삭임을 되살리려 노력할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다. 그럼에도 되풀이되는 것들도 있다. 자전거를 다시 타고 나타난 그들처럼, 커피하우스에서 데이트를 신청하는 그 누군가처럼. 하지만 그들은 이전과 다르다. 비포와 애프터.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 더불어 강에서 노를 젓는 노하우도 익혔다. 그렇기에 다른 강을 만나더라도 쉽게 그 기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성장은 그렇게 몸에 익는 무엇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 되는 날, 축복해주고 싶다. 설혹 그것이 앞으로 닥칠 절망과 고생의 가시덤불을 예고하는 스타트라인일지라도 말이다. 껍데기를 벗고 세상에 알몸으로 뒹굴어야 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언젠가 그들은 마짱과 신지와 같은 품새로 “다시 시작”을 얘기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싱긋이 웃어주면 된다. 그게 우리였고, 우리일 테니까. 절망의 기운이 뚝뚝 떨어진 그곳에서 누군가는 희망의 페달을 밟고 있을 테니까. 궁상맞고 우스꽝스러울 지라도 누구에게도 성장은 비껴가지 않는다. 비록,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이 영활 만든 기타노 다케시. 좋은 어른이다. 무턱대고 희망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아파한다. 흔하지 않은 좋은 어른이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성인됨을. 그리고 미안하다. 아프라고 강조하는 이 세상의 가혹함 때문에.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그러니,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 함께 만들면 좋겠다. 함께 자전거를 타자.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3.25 15:17 메종드 쭌/무비일락

나와 이건희(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작자!)는 전혀 다른 세계다. 같은 성씨를 갖고 있지만, 누가 됐든, 한쪽은 화성인이다. 서로간의 거리? 아마도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정도? 건희 일가가 지배하는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을 주야장천 부르짖지만, 개소리다. 가족은 개뿔. 그건 그저 거짓부렁 상술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 해도 되겠다. 건희(개인이 아닌 계급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그리 일컫겠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불가촉천민. 내 입장에서 건희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총수님 되시겠다. 그와 나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건희가 멘붕(멘탈붕괴)된 금치산자(?)라는 루머 따윈 고려하지 말자. 쉽다. ‘돈’이다. 우리 둘은 화폐(의 많고 적음)로 갈라진다. 건희는 돈이 천문학 망원경을 끼고 바라봐야 할 정도로 미친듯이 길게 늘어서 있고, 나는 당장 눈앞에 돈도 안 보인다. 왜? 없으니까!

그런 우리, 서로에게 삼투할 수 있을까? 화해 가능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지구인과 화성인이 어찌 눈이 맞을 수 있단 말인가.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사이가 어찌 가까워질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우리를 만날 수 없는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됐든, 건희가 됐든, 누구든 레떼강(망각의 강)을 건넌다면 모를까. 우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래서 슬프냐고? 아니. 나는 그닥 슬플 것 없다. 애초 화성이나 안드로메다를 동경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건희가 슬플까? 아니, 그럴 리가. 진짜 멘붕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촉천민을 동경할 화폐는 없다. 우린, 만날 일도 없고, 서로를 동경할 일도 없다. 그러니 서로에게 삼투하는 건 건희가 삼성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확률과 같다. 나는 건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못 되 처먹은 삐뚤어진 놈이고, 건희는 나 따위의 인간은 없는 존재일 테니 우리는 어떻게든 만날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이 영화, <언터처블 : 1%의 우정>. 희한하다. 각자 1%의 위치, 즉 상위 1%와 하위 1%에 있는 존재가 서로에게 삼투한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교육이나 학습에 의한 주입이 아니다. 지금 1:99의 시대, ‘언터처블’한 관계가 ‘터처블’한 관계로 바뀌는 마술.     

영화의 제목인 ‘언터처블(Untouchable)’.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을 뜻하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뜻이다. 이 영화에서 언터처블을 꼽자면 드리스(오마르 사이)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섬이자 소외된 삶의 공간인 방리유(banlieueㆍ도시외곽지역)에 사는 흑인 하층민. 절도죄로 감옥살이도 했고,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인 삶이다.

반면 필립(프랑수아 클루제)는 가진 건 돈밖에 없다.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얼굴 부위를 제외한 전신불구가 됐다. 24시간 돌봐주는 손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백만장자. 그러므로 두 남자, 전혀 다르다. 딴판이다. 극과 극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 (돈으로 나눠진) 계급이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 것은 필립의 간호인을 뽑는 자리다. 드리스는 실은 그런 일, 관심 없다. 사회복지사들이 맡아야 할 영역 같은데, 그는 무일푼 건달이다. 복지수당을 타기 위한 사인이 필요할 뿐이다. 필립이 그런 드리스에게 보인 관심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경직된 채 빤한 대답을 내놓는 다른 간호인 후보자들과 다른 면모.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파국이 예정된 관계. 무거운 주제다. 그런데 드리스의 넉살이 이를 뛰어넘는다. 돈 때문에 고통당해도, 그는 돈 앞에 굽실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무언가를 동정하지 않는다. 전신마비의 장애인을 돌보게 일이지만, 그의 머리엔 동정이 없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내뱉고 행위 한다.

놀라울 뿐이다. 어떤 사회복지사도 할 수 없는 일, 그는 한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이론과 논리가 무색하다. 장애인을 다루면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 고용주에게 어떤 자세로 해야 한다는 복무규정도 없다. 그에게 필립은 그냥 사람이다. 돈 많은 고용주도 아니요, 전신마비의 장애인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농담과 유머는 어떤 악의도 없다. 순진무구함이라고 해도 좋고, 사려 깊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가 자연스레 혼재한다. 드리스의 눈에 필립은 욕망을 지닌 똑같은 사람이다. 다른 상류층의 행위 또한 그에겐 우습다.

영화는 그래서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도 유쾌하게 꼬집는다. ‘구별 짓기’를 하고 싶은 1%들에게 날리는 드리스는 똥침이라고 할까. 최상류층이 즐기는 오페라에 함께 한 드리스는 우스꽝스러운 무대의상과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에게 한 방 먹인다. 그림은 또 어떻고. 고상한 단어를 써가며 펜팔을 하며 간을 보는 필립에게 드리스는 바로 전화를 걸도록 만든다.


쓸데없이 엄숙해서 숨 막힐 듯한 상류층의 예절 따윈 가라. 이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한가. 그런 틀에 사로잡힌 필립에게 드리스는 공기요, 산소다. 다친 이후 당최 맛볼 수 없었던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나눠 피는 장면. 누가 전신마비 장애인에게 담배를 나눠 피자고 할 것인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큰 일 날 것처럼 펄쩍 뛰겠지만 필립의 표정은 그 모든 것을 휘발시킨다. 그토록 행복한 표정이라니. 유리벽처럼 분리된 계층 간의 벽이 그 순간만큼은 허물어졌다. 명장면이다.

더불어 클래식 연주로 무장됐던 필립의 생일 파티. 드리스의 해석은 간단하다. 휴대폰 소리요, 광고이자, <톰과 제리>의 음악일 뿌니다. 이어 드리스의 MP3플레이어에서 나오는 ‘Boogie Wonderland(Earth Wind and Fire)’. 그 모든 엄숙함과 진지함을 뛰어넘어 모두의 춤을 이끈다. 필립에겐 피하고 싶은 생일파티가 새롭게 탄생했다. 드리스의 힘이다.

이 두 명장면, 나를 사로잡았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계급이 서로에게 삼투하여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상황. 그것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 하는 의심도 없었다. 그것이 설혹 판타지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만큼 건희와 나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너고 싶었다. 용매가 스며들면서 두 액체의 농도가 같아진다는 삼투현상에 나는 가슴이 시원하고 상쾌․유쾌했다. 재기 넘치는 진짜 우정. 

무엇보다 실화란다. 놀랍다.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낸 농담 같은 현실에 나는 그만 감동 먹었다. 터처블한 것이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 엄숙하지 않아서 좋다. 음악이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를 더욱 따스하게 감싸준다. 멋진 영화다. ‘언터처블’이 ‘터처블’로 가는 과정, 그것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배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3.04 21:29 메종드 쭌/무비일락

누군가 그러더라. 살아서 지옥을 맛보는 것, 그게 바로 배우자의 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배우자 없는 나로선, 끔찍할 것이라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가니>를 보곤, 하나 덧붙였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살아서 지옥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데도 그것은 생지옥. 
내가 직접 당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아프고 아팠다. 
성폭행. 강간과 폭행.
그것도 권력과 위계에 의해 저항조차 불가능했던.
더구나 그 권력은 타인의 장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았다. 개새끼, 아니 개새끼보다 더 못한. 

나는 꽤나 극장을 찾는 편인데,
극장에서 그렇게 많은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온 것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서 겪어야 하는 지옥에 대한 공감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도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후벼팠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진짜 모르고 있었던가. 

<도가니> 개봉 직후 이른바 '여론'이 들끓었다. 그것은 공분.
실재 사건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그 지옥을 방조·방치한 것은 물론 지옥을 조장한 세력과 협잡 아닌 협잡을 한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그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고 있냐며 미친듯이 들끓는데, 나는 그것이 더 불편했다.
삐딱한 성정 때문이겠지만 씨바, 지들이 사는 곳은 다 천국이가 사는 곳인가? 
진짜 몰랐단 말인가?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것은 아니고? 내 것만 후비느라 제쳐놓은 건 아니고? 

<도가니>. 단순 장애인 성폭행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과 구조,
그것이 어떻게 약자에게 지옥을 조장하는지 보여준다. 

교육청과 시청은 사건이 벌어진 시간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책임을 미룬다. 당장 내게 닥칠 비판과 책임이 두렵다. 그러니, 그들에겐 은폐가 유일한 능사다. 
경찰은 교장(교사)와 짜웅하고, 돈독(이 오를대로 오른 끈적)한 관계를 유지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는 '지역사회 발전'을 들먹이며 가해자를 두둔한다.
교회라고 다른가. 사탄의 무리 운운하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강인호(공유)와 아이들에게 돌을 던진다. 돈이라는 신종 예수에게 죄를 씻은 죄 없는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변호사? 그가 변호하는 건, 지옥이다. 물론 있는 자들에겐 천국. 

동물농장이요, 동물의 왕국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동물들의 리더는 동지 운운하지만 실은 그 동지 동무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이요, 내게 돌아와야 할 이득이다.

<도가니>의 그 어이 없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학교장, 교사라는 권위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사랑의 매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법과 질서의 유지는 또 어떤가. 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그저 이름을 달리한 자웅동체다.
이른바 '뿜빠이(N분의 1)'의 논리가 물밑에 흐른다.
힘 없는 99%의 약자가 대면해야 하는 것, 결국 지옥이다.

들끓는 여론에서 또한 불편한 것은 처벌('도가니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 왜 그것에는 처벌만큼 비중을 두지 않는가.

당연히 도가니법의 제정(장애인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대책)은 <도가니>가 가져온 성취이자 긍정적인 영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처벌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양 착각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왜 그렇게 치유에는 인색한가? 
향후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당한 사람은 치유가 되는가? 지옥을 맛본 것이 희석되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서 지옥을 맛본 사람, 개인에 대한 치유 아닌가. 사회적인 치유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방을 위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선적인 치유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회적 시스템의 구멍과 불합리로 지옥을 맛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치유이며,
그것이 가능해야 정상적인 사회다.
그들이 맛봐야 했던 지옥은 혼자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옥이요, 우리의 수수방관이 빚어낸 무간지옥이다.


치유부터 신경쓰자.
용서는 지옥을 맛본 아이들의 부모도, 할머니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는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트라우마, 그들이 겪은 지옥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
정혜신·이명수 선생님의 '와락(http://thewarak.com)'이 아름다운 이유다.
물론 당연하게 그것은 개인들의 몫이 아닌 국가와 공동체의 몫이어야 한다.
개인이 그렇게 나서도록 하는 것, 역시 이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분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표적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 가해자들에게만 향해선 안 된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본디 시스템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단순히 선거에서의 승리로 끝낼 게 아니다. 시스템과 세계를 갈아 엎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래봤자 기득세력, 민주통합당도 아니다. 처벌도 신통찮지만 치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2.01 13:03 메종드 쭌/무비일락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다. <첨밀밀>이 그랬다. 처음으로 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는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다.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다.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2.22 23:42 메종드 쭌/무비일락
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
그토록 애가 타게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혼자가 힘들어 곁에 있는 여자 친구가 이제는 사랑이 되 버렸잖아. 운명같은 여잘 만났어.
이제 나를 떠나 달라고, 그녀에게 말해 버리면 보나마나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그녈 다시 볼 수 없게 돼버리면 나도 역시 망가질 것 뻔한데...

- 쿨, <운명> 중에서 -

웬만해선 운명의 장난을 말릴 수 없다
 


그렇다. 운명이란 '넘', 장난을 무쟈게 좋아한다. 웬만해선 그 넘의 장난,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대개의 사람살이, 그 장난에 울고 웃는다. 운명과 맞장뜨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운명이 치는 장난은 다 받아줘야 하나? 운명을 거스른 자에겐 천벌이? 벼락이? 에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운명이 뭐길래?

그런데, 태생적으로 운명이라는 말, '닥치고 복무'를 내포한다. 즉, '따라야 할 무엇'이다. 때론 그 복무가 좋을 수도 있으나,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솔깃한 측면도 있다. 운명이랍시고, 질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뭐하다 안 되면 운명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넘, 실체는 불분명하다. 모호한 대상이다. 이 넘도 뜬금없이 덤태기쓰는 건 억울할 터. “지가 잘못해 놓고선 왜 나보고만 그래”하며 눈을 흘길 지도 모른다. 운명은 어쨌든 장난꾸러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은 장난에 넘어가지 말란 얘기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우연이 겹겹이 쌓은 운명

좋다. 질문하나 하자. 당신,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당신 사랑은 운명적인가, 아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체 운명이 무엇이기에?


운명은 필연이란 말과 통한다. 필연은 또 우연과 한껏차이의 한통속이다. 운명은 결국 우연의 중첩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야~”라는 말, 우연을 쌓아서 운명으로 치환하겠단 기대의 표현이다. 한편으론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겠단 의지다. 아, 거룩할 손, 장난에 아랑곳 않는 저 대범함. 


<세렌디피티>, 그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운명으로 치장된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주되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려선 안 된다고 속삭인다. 운명이란 넘, 앞서 얘기했듯 어떤 장난질로 우릴 당황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늘 운명의 어떤 장난에도 열려 있을 것!


7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 친 조나단(존 쿠삭)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당시 그들 귓가에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울린 것일까. 운명이 문을 두들긴다. 그들, 운명을 놓고 배팅을 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겹이 쌓인다. 물론 예상 가능하듯, 그 우연(들)은 운명을 위한 깔맞춤이다. 


이런 우연을 보자. 그 사람이 좋아했던 옛 영화 포스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붙는다. 동명이인이 자꾸 등장한다. 그 사람 이름을 담은 노래도 울려 퍼진다. 뭔가 작위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화는 우연을 중첩한다.

하긴 대개의 우리는 어떤 만남앞에서 그런 착각(!)을 부른다. 그저 우연일 뿐인데, 운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주술을 건다. 운명에 굶주렸다는 얘기다. 혹은 생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태어난 것도 운명이니, 그 정도는 애교겠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허나, 조나단과 사라에겐 각기 다른 사람이 있다.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들의 존재감이라는 게 그렇다. 조나단과 사라를 엮어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쉽고 대수로울 수 있으랴. 어떤 만남이든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비율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거기에 우연섞인 특별함까지 가미된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운명론자’ 사라와 ‘개척론자’ 조나단은 어떻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운명을 만들 것인가.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운수좋은 뜻밖의 발견’이란 뜻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운명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수단을 나열한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란 옛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데서 유래한 Serendipity. 영화에선 ‘운명의 사랑을 발견하는 능력’이란 뜻으로 포장돼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집중한다. 배팅 치고는 지나치게 센 것 같은데, 5달러 지폐와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동원된다. 전화번호가 그곳에 있다. 모험심, 참 충만하다. 기민 기고, 아니면 말고, 이거나. 나는 운명과 저런 배팅 못한다.

어쨌든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치고는 가혹하지만 그건 또한 ‘영화적 운명’이다. ‘우린 운명, 곧 필연’임을 확인하기 위한. 그래서 두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뺑이를 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불일치가 ‘이끌림’을 희석시킬 수 없듯, 운명적인 사랑을 찾겠다는데 그까이꺼 대수로울 거 없다는 자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몇 년 전, 뉴욕을 찾았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가 명분이었지만, 내 욕심 중 하나는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장)에 있었다. 왜 그곳이었냐고? 조나단과 사라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손을 잡는다. 스케이트를 탄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그것을 밟고 싶었고, 결국 밟았다. 내 영어 이름은 조나단(조너~선)이다. 사라. 하긴 그 이름.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영어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얘기해줬을 때, 그녀는 우리를 '운명'이라고 했었다. 하하.;;
 


<세렌디피티>. 가슴의 ‘끌림’을 ‘운명’으로 치환하기 위한 적재적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운명론’의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된다. 여느 만남이 날줄과 씨줄의 오묘한 엮임이 아니겠느냐마는, 특별한 이끌림은 분명 있다. 이때, 감정의 동요는 좀 더 격렬하게 수반된다. 세월이 꼭 망각과 결부되지는 않는 듯하다. <세렌디피티>는 그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그렇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각자 결혼식을 앞둔 조나단과 사라, ‘한 순간’을 잊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애교’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7년이 지난 영수증을 찾아 헤매는 조나단이나 친구를 억지 대동해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사라의 애처로움. 작위적인 우연이지만, 그 끈을 연결해주고픈 애틋함을 유발한다. (허나, 케이트 베킨세일 정도의 여자라면, 어떻게든 없는 운명도 조작하고 싶다!)


우연과 운명은 다른 빛깔이 아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잘 짜인 각본의 무대에서 시간의 흐름이 상정한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각본을 미리 엿볼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둘 끼워 맞추고 “운명아! 덤벼라 내가 간다”며 큰 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도 사람살이의 재미니까. 옥동자는 외친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그러니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며 연말연시다. <세렌디피티>의 시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 시즌이라야 이 영화는 산다.
이 작위와 상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오직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니까.

참, 어쩌다 보니 남자3호가 됐다. 세렌디피티다.
무슨 말이냐고? 글쎄... 세렌디피티다.ㅋ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1.12.05 02:24 메종드 쭌/무비일락

<마당을 나온 암탉> 이전, 내겐 <오세암>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그닥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 이 애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카우보이 전쟁광의 온당치 못한 침략전쟁이 일단락됐던 시기였다.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은 ‘끝’이란 단어를 쉬이 허용하지 않을 터이지만, 당면했던 전쟁의 포성은 멎었다(고 여겨졌다).

21세기에도 야만이 계속되고 있음. 그것을 증명하는 건, 언제나 전쟁이다. 명분이야 그럴듯해도, 결국엔 이권을 위한 다툼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이권과 폭력.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길지 않았다. ‘꽃보다 아름답고 픈’ 바람도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부르짖음도 공허한 메아리이자 거짓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자위할 순 있어도. 

문명의 발전이 곧 인류의 진보를 보장하거나 확언하지는 않는다. 문명이랍시고 시작돼 늘 그래왔듯, 세상은 가혹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세상을 조장하거나 혹은 세상에 공조해 왔다. TV브라운관을 통해 나타나는 전쟁이후의 혼란상을 보자니, 상반된 감정들이 파편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끝난데 대한 안도감. 그리고 오만한 카우보이 매부리코를 꺾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 혹은 아쉬움.

당시 나는 전쟁을, 파병을 반대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목소리를 냈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른 방향이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자잘한 메아리들이 희망의 지푸라기를 부여잡게 해 줬지만, ‘힘’과 ‘다수’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현실은 존재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나마 전쟁의 포화가 멎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내 마음의 야비함.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평온함을 갈망했을 뿐인 이기심.

궁금했다.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 천인공노할 무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나의 무력함.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라크 아이들의 상처입은 눈망울을 향해 눈물밖에는 짜낼 게 없는 허탈함. 분노와 슬픔은 관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구호와 시위 속에 던져졌지만, 그것은 평화와는 무관했다.

그리고 그 피흘림이 채 마르기 전에 우린 '핵'이라는 위험에 직면했다. 어디 하나 마음 편히 둘 곳 없이 불안을 품고 살아가야 할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역시나 하는 마음의 교차로는 위태로운 사람살이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줄 따름이다.

그렇듯 마음의 위무가 필요한 시기. 위태롭게 출렁이는 현실의 강 위에서 무엇이 평정심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런 힘을 가진, 차가운 금속성의 첨단 무기들이 박힌 시신경에 따스함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런 상상의 세계가 그리워지는 나날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시절을 위로하듯, 그땐 고 정채봉 동화작가의 따스한 감성을 담은 동화 《오세암》이 스크린에 부활했다. 작은 위안이나마 얻을까하고 담채화 같은 풍경을 눈에 넣었다.


영화 <오세암>은 남매의 엄마찾기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얼핏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시킨다. 맞다. 엄마를 찾아 길 떠나는 길손이와 감이의 여정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슬픔’을 동반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야하니까. 문득,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엄마아빠를 잃은 이라크의 아이들이 중첩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세암>의 동심은 ‘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소재로 그리움을 덧칠한다. 다른 이름도 아닌, 엄마니까. 다섯살배기 개구쟁이 길손이와 눈 먼 누나 감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오누이. 그들의 여정은 이미 슬픔과 신파를 동반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상황을 보자. “하늘처럼 생긴 물이 꼭 보리밭처럼 움직인다”며 바다의 모습을 길손이가 묘사하면, 누나는 귀를 통해 이를 형상화하면서 세상을 마주대한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이런 형용모순의 순간. 

그러나 뭣보다 감이는 엄마를 보는 것이 소원인 길손이에게 차마 불길에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떠돌던 오누이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설정스님을 따라 절간에서 겨울을 나기로 한다. 개구쟁이 길손이는 절간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고 악동짓을 해댄다. 그것이 결코 밉지 않다. 그 천진난만한 동심에 깃든 애틋함이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길손은 그것이 궁금하다. “자신보다 나쁜 아이들에게도 있는” 엄마가 자기에겐 없다는 것. 마음의 눈을 뜨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스님의 말에 길손이 혹하는 건 당연하다. 설정스님을 따라 길손이 암자로 들어가는 건, 눈 먼 감이가 엄마를 보고도 놓쳐버릴까 걱정이 돼서다.

문제는 거기서 또 발생한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터로 내려간 설정스님은 거친 눈보라를 만나고, 발을 헛디뎌 의식을 잃는다. 비극이 깃든다. 홀로 암자에 남은 길손. 스님을 기다리다 지쳐 관세음보살과 대화를 시작하고,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엄마를 애타게 찾던 아이는 마음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된 암자, 그래서 ‘오세암’은 탄생한다. 

<오세암>은 이렇듯 길손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았다. 굴곡도 별로 없고 클라이맥스의 극적인 구성도 없다. 다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감성을 자극하고 동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을 건드릴 뿐이다.

느린 구성과 듬성듬성 드러나는 어색한 신들은 관객의 감정폭을 극대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할 것을 권유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불교적 해탈이나 기적에 대해 쉽게 동화하기 어렵다. 길손의 바람이 이뤄졌다는 기쁨보다, 마무리가 느닷없이 빠르게 치달음으로써 관객들에게 감정의 파고를 조정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라는 <섬집아기>의 선율이 가슴속에 몽클하게 접근하고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같은 스크린 속 빛깔이 미덕이 될 순 있지만, 이것이 완성도를 보장해 주진 않는다. 한국형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지만, 일본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길을 돌리기엔 힘이 부친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일정 간격의 틈을 둔 <오세암>은, 다만 꽃(?)같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동심을 접하고 싶을 때, 미덕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발을 빼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이미 주변부로 내몰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패권주의가 피를 튀기고 사람을 살육한다. 국가의 이기심은 현대판 흑사병과 같은 사스(SARS)가 창궐하도록 방치한다. 되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국가의 시스템이자 체제다. 실체도 없는 국익논쟁은 또 어떤가. 거기에 개인은 없다. 인간은 없다.  

서로를 불신하고 피하게끔 만드는 세상의 이기는 점점 파괴력을 키운다. 자본은 교묘하고 이권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것들은 정감 있고 따스한 세상에 대한 기대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유도한다. 무력함을 심어주는 가장 극악한 방법. 주변에서 힘을 북돋아주기보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서 타인을 짓밟고 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더 많은 현실. 영화는 동심은 과연 탈출구가 될까.

정말, 마음을 다해 원하면 세상의 평화가 올까? 지금의 인류에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고 정채봉 작가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중에서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