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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9 18:23 메종드 쭌/무비일락

알리.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알리, 맞다!

알리 아저씨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반가웠다. 나는 아저씨를 좋아한다. 권투선수로서 멋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몇년 전, <알리>란 영화를 보고 완전 좋아졌다. 현재 파킨슨병을 앓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멋진 투사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성화의 최종주자로서 점화를 하던 아저씨의 모습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저씨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건, 그의 활동에 따른 결과다.
미국 아동평화재단의 공동설립자로서, 흑인해방·평화·어린이권익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는 알리 아저씨. ☞ 무하마드 알리, 노벨평화상 후보에

아저씨는 2005년 유엔평화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은퇴 후 아저씨는 벌어들인 돈과 자신을 활용해, 세계의 빈곤과 장애인을 위해 앞장섰다. 파킨슨병을 본격 앓으면서도 빈곤층과 장애인들에게 열정과 신념의 바이러스를 유포했다. 그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인종차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저씨의 투쟁에 파킨슨병도, 나이듦도,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아저씨에게 '투사'라는 칭호를 붙인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도, 헤비급 세계챔피언이어서는 아니다. 파킨슨병에도 꿋꿋한 아저씨의 노력을 경하해서만도 아니다. 아저씨가 걸어온 궤적엔 좀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하게,
노벨평화상 심사위원회가 아저씨에게 노벨평화상을 쥐어줄 것인지는 그닥 궁금하진 않다. 아저씨가 상을 타지 않아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른 더 적합한 사람이 그 상을 쥐었겠거니 한다. 그러나 심사위원회가 실수나 의도적 배제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은 바람이다.

언젠가 아저씨도 구름의 저편으로 가겠지만, 나는 아저씨의 바람대로, 아저씨를 기억할 것이다.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나는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또,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내가 희망의 끈을 높지 않고 싸워온 것처럼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맞서 승리하길 바랄 뿐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당신들께 영감을 주었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너에게 알리를 권한다. 영화, <알리>라도 보면 좋겠다.  
아래는 2005년 7월, <알리>를 보고 알리와 내 존경하는 선배들을 향해 긁적인 연서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투사'가 아니었고, '투사' 아저씨와 선배들에게 무언가 표하고 싶었나보다. 그땐 종합주가지수가 1070을 넘어섰다고 호들갑을 떨던 시기였다. 지금 2000을 바라보는 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지? 그러나 투사는 여전히 생과, 세계와 투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신념'위해 세상과 맞짱 뜬 진정한 챔피언, 투사 '알리' (2005. 7) 


연일 뜨겁다. 액면 상 날씨 탓이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후덥지근한 날씨, 낮은 낮대로 축축 늘어지고 밤은 밤대로 잠 못 이룬다. 그 뜨거움과 다른 성격이지만 종합주가지수는 10년7개월 만에 1070선을 뛰어넘어 상승 기류를 유지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정부의 의지도 뜨거운 반면 자본에 영악한 자들도 발에 땀나게 내달린다. 


그런가 하면 대입 통합교과형 논술시험을 놓고 정부와 서울대의 갈등도 후끈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국립대 총장께서는 “현행 고교 평준화 제도도 재검토해야 한다”며 학벌 특권층 양산을 화끈하게 밀어붙인다. 평준화는 세계를 불타게 만든 무한경쟁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단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교의 총장께서 화를 돋운다. 뜨겁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노조 파업의 불길도 계속 타오르고 있다. 이래저래 논란이 한창이다. 억대 연봉 운운하며 ‘배부른 파업’을 한다며 잘못을 전적으로 노조에 돌리는 일부 언론들의 작태도 후덥지근하다. 일부 언론은 파업의 쟁점을 냉정하게 짚지 않은 채 귀족 노조 운운하며 노동자들을 몰아붙인다. 이 뜨겁게 작열하는 여름의 한가운데, 투사들이 여기저기 넘쳐난다. 에너지 만빵이다. 그들의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투사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수사가 아니다 


‘투사’란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수사가 아니다. 연일 뜨겁게 싸워댄다고 그들 모두가 투사냐. 아니다. 욕망 앞에 충실할 뿐이다. 자본이든 권력이든 부귀영화든 그들에게 브레이크는 없다. 그들이 발산하는 뜨거움 앞에는 그저 숨 막힐 뿐이다. 


그렇다면 감히 누구에게 ‘투사’란 작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는 어떨까. 부조리한 시스템 내에서 저항하거나 체제 전복을 감행하는, 자신의 안위와 영달보다 공적 정의에 부합하는 신념에 따른 행동을 통해 세상과 맞장 뜨는 사람. 그런 이들에겐 투사라는 작위를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주어진 체제와 환경 내에서 순응하는 소시민에게 ‘투사’의 포효와 행동은 무의식에 잠재한 뜨거운 숨결을 깨우는 충격을 가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고 한 사람에게 ‘투사’ 작위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그 이름과 일련의 타이틀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내게 유명인사였을 뿐이었다. 최근에 들은 소식이야 2012년 뉴욕 하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IOC총회에도 나타났다는 것.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 스타이지만 현재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왕년의 복서. 그렇다. 알리, 무하마드 알리. 지난 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최종주자로서 온몸을 떨면서 힘겹게 성화에 불을 붙이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의 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권투선수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그 사람, ‘무하마드 알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알리> 포스터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이 수사에 갇혀있던 그의 이미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부러 찾아 끄집어내지 않았던 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 단초는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을 스크린에 담곤 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스크린에서 장난꾸러기 이미지가 강했던 ‘윌 스미스’가 뭉쳤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화학작용에 대한 궁금증이 우선이었고 그들의 화학작용 결과가 ‘알리’에 귀착되자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을까’라는 주제로 그 궁금증은 전이됐다. 


스크린은 알리에게 가장 파란만장했던 10년의 세월을 보여준다. 헤비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국가에 의해 이를 부당하게 잃고 다시 찾는 과정이 흘러간다. 이 과정은 20세기 스포츠가 낳은 최고의 전사라는 칭호가 쉽게 획득한 노획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알리는 정체성, 국가, 종교, 개인 등 다양한 가치를 놓고 철저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가와 싸우고 세상에 딴죽을 건다. 국가나 가정, 핏줄 등 이른바 ‘대의명분’이 개인에 앞서야할 것이 아니란 점을 그는 주장한다.


주먹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주먹이 아닌 다른 무기에 의한 논쟁과 항쟁을 묘사하고 이어 가슴으로 시점을 이동시킨다. 링 안에서 상대방을 향해 끊임없이 주먹을 날리던 알리는 링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대는 개인이 아닌 세상이다. 상대방을 향해 내뻗는 주먹이나 풋워크는 알리가 발 디딘 현실 속에서도 궤를 같이한다. 세상을 무대로 그는 끊임없이 손을 뻗고 발을 옮긴다. 그저 링 안에서 싸우는 기계가 아님을 증명한 그의 행보는 차츰 심장 박동을 끌어올린다. 그의 투쟁에 빨려든다. 가슴은 그의 주먹과 발걸음에 동조하게 된다. 


챔피언으로 첫 등극한 알리는 우선 이름을 바꾼다. 그 바뀐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극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과거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이슬람교 개종과 함께 ‘무하마드 알리’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의 경멸과 꾸지람에도 아랑곳없이 노예시절 백인이 붙여준 성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알리는 '떠벌이'라고도 불렸지만 그 포효는 공수표가 아니었다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그의 신념은 핏줄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도 거리를 둔다. 당시 언론과 대중은 알리의 이런 행동에 비아냥을 보냈다지만, 알리는 굽히지 않았다. 알리는 자신을 클레이란 (노예의) 이름으로 지칭하던 상대 선수를 링에서 넉다운시키면서 외친다. “내 이름을 다시 말해봐!” 그는 그렇게 링 위에서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감과 신념을 포효한다. 누가 감히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세상아! 덤벼라”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알리가 베트남전에 참전 않기 위해 군대 징집을 거부하는 신념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나에게 손톱만큼도 해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총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일개 개인이 국가에 싸움을 건 것이다. 불이익을 예감하면서도 국가의 ‘부름’을 거부, 국가와 주류(백인)사회를 정면으로 치받아 버린다. 링 위나 밖에서 그는 언제나 싸움닭이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개인(알리)의 항쟁은 국가의 분노를 사게 마련이다. 타이틀 박탈, 선수면허 정지, 재판 회부, 파산 등 국가가 가만 있을 턱이 없다. 그때문에 오랜 기간 법적 투쟁으로 전성기를 흘려보내는 그를 보자니 청춘의 한 페이지를 국가에 헌납(?)하며 군대로 끌려가는 한국의 청년 남자들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나는 왜 저항 한 번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군대를 갔을까’하는 자괴심도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알리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절,

‘병영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대한민국에서 ‘청년(남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군대와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제도권 교육의 틀에 길들여진 청년은 ‘신성한 국민의 의무’라는 감언이설에 현혹당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되고 남자로서 역할을 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에 놀아난다. 


이는 국가의 틀에 청년들을 훈육시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만든 수사다.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대개의 남자들이란 ‘권위적이고 권력화된’ 관계를 익혀 이를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살아간다. ‘군대에서 조직사회가 돌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들먹이는 건 이 사회가 병영화 돼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억압적 군대 체제는 유령처럼 이 사회를 배회한다. 알리의 것과는 반대다.  


알리는 자신과 무관한 베트남 사람들을 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으려고 한다. 알리는 병역징집을 거부한 뒤 당당히 외친다. “나는 자유와 정의, 평등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나의 신념을 방해하는 자가 바로 나의 적이며 싸워야할 상대는 바로 그들이다.” 개인의 의식과 행동에 재갈을 물리려는 국가의 의도에 맞선 끝에 알리는 재판에서 승리한다. 권투선수로 살지 못한 공백기간에 반전 등 여러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투사’로 거듭 태어나고 1974년 32살의 나이로 챔피언 타이틀을 재탈환하는 ‘기적’을 연출한다. 


불이익을 감수한 이들의 ‘용기’ 


투사는 혼자 태어나지 않는다. 알리에게는 동반자가 있다. 명스포츠 해설자, 하워드 코셀(존 보이트)과의 우정이 바로 그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공식적으로 처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불러준 그는 그것 때문에 평생 항의와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끝까지 알리의 신념을 지켜주고 지지한다. 혼자일 수 없는 길에 뜻이 맞는 동반자를 만났다. 알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운! 부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스포츠해설자, 하워드 코셀은 알리와 절친한 우정을 나누며 알리의 신념을 지탱해줬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이익을 감수한 이들의 ‘용기’는 아름답다. 알리의 용기는 어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과 비교된다. 몇 년 전 팬덤이라는 알량한 핑계를 대며 병역을 ‘기피’했던 가요계의 한 인물이 그랬다. ‘창창한’ 정권 창출의 야욕을 보였던 과거 권력자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허약해서’ 군대를 가지 못할 정도의 그에겐 “북한 동포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야 될” 이유를 댈 수 있는 신념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권 창출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겠지.  


“남들이 원하는 내(챔피언)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 자신(챔피언)이 되겠다”고 포효하던 알리의 목소리가 그립다. 징집여부가 왜 챔피언 타이틀과 상관이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챔피언으로서의 길을 거닐었던 알리를 우리 안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세상의 ‘무지’와 싸우기로 했던, 명징한 삶의 목표로 세상의 수레바퀴가 되고자하는 선배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었던 한 시절에서 한줌 멀어진 채 궁상을 떨고 있는 내게 용기를 심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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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08.22 15:13 메종드 쭌/무비일락
장마 뒤 간간히 흩날리는 소낙비와 함께 폭염이 한창이다. 최근 한국에서 쓰이는 가장 흔한 말이 '덥다' 아닐까. 탈출하고 싶고, 피서하고프다. 대구시에서는 오죽하면 "더우면 은행으로 대피하라"고 하겠나. '폭염 발생 시 시민행동 요령'이라나. 거참,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아닐진데, 그만큼 폭염이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진짜 그렇긴 하지.

(폭염을 피해) 이 땅에서 탈출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잠깐. 지구 여기저기가 이상고온 즉,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온통 불볕더위란다.
그나마 남반구로 가면 낫겠지.

아직 휴가를 가지 못했다. 언젠가(조만간!) 휴가를 떠나겠지만,
이 폭염을 아직은 견뎌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엑~스피드는 아니고.
가슴과 머리가 뻥 뚤릴만한 씨~원한 영화.

그래서~
<폭풍 속으로>!
무엇보다 거부할 수 없는 파도의 유혹.
저 높디높은 파도를 보자면 그저 온몸을 투항하고 싶을 정도니까.
직접 가진 못하더라도, 그저 브라운관 속의 파도일지라도, 내 마음이 시원해지길 바라면서.
공상이라도, 망상이라도 좋다.
나도 혹시 서퍼가 된다고 나설지 누가 아는가.
삶이 때론 그러하듯, 병적인 유머센스가 혹 발휘된다면.

그래, 끌(꼴)리면 질러야 하는데, 지르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향한... 된장!!!

몇년 전 긁적인 <폭풍 속으로> 관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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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all be planing out a route
We're gonna take real soon
We're waxin' down our surf boards,
We can't wait for June
We'll all be gone for the summer,
We're on safari to stay
Tell the teacher we're sufin
'Surfin' U.S.A...

- Beach Boys의 노래, < surfing U.S.A. >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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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 : 폭풍 속으로 (Point break, 1991)
감   독 : 캐서린 비글로우
주   연 : 키아누 리브스, 패트릭 스웨이지

◐_ 북치고 박치고, 그리고 파도치고

여름,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고 싶다. 무엇이 있을까. 공포와 오싹함만이 더위를 ‘물렀거라~’ 하지 않는다. 저 끝없이 펼쳐진 파아란 바다는 어떤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 그 집채만 한 파도에 온 몸을 맡기는 서퍼들. 하얗게 부서지고 산산조각 나면서 튀기는 파도. 이만하면 일상에 찌든 회색빛 거대도시의 찌꺼기는 한방에 ‘아웃’이다.

그래, 바다가 있다. <그랑블루>에 심연의 도저한 매력과 아름다움이 있다면, <폭풍 속으로>는 거친 바다 표면의 변화무쌍함을 다룬다. 굴곡 많고 당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파도타기의 매력. 그 유혹은 거부 불가능이다. 무섭게 덮치는 파도의 위협 앞에서 ‘파도를 탄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덮는다. 파도는 열차마냥 서퍼들을 태우고 마구 치달린다. 아드레날린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황홀감,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짜릿함. 북치고 박만 칠 것이 아니라 파도를 치자. 그게 정 안 되면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보는 거다. “끌리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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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사나이 대 사나이, 연애하다

마초들에게 ‘싸나이’란 단어는 주술과도 같다. 논리나 근거를 갖고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싸나이들의 세계’라는 말로 울타리를 쳐놓고 함부로 침입을 허용치 않는다. <폭풍 속으로>의 마초들도 그렇다. 전도유망한 풋볼선수였다가 부상 때문에 FBI수사관이 된 죠니 유타(키아누 리브스)와 은행을 터는 서퍼들의 두목, 보디(패트릭 스웨이지)가 그렇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처지지만 그들은 ‘통(通)’한다. ‘파도타기’와 ‘스카이다이빙’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래서 <폭풍 속으로>는 사내들의 ‘연애’이야기다. 서로에게 끌리고 반하는데 뭐 특별한거 없다. 서로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도 ‘끌리면 가는’ 거지.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반항적이고 극단적인 삶을 사는 죠니의 이면을, 세상에 대항하고 비판적인 보디의 그늘을. 그들은 파도 앞에 겁대가리없이 덤벼드는 'Fucking Crazy Men'이며 파도로 맺어진 숙명이다. “다음 생애에서 보자”는 보디의 말은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끌리면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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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일생을 확 바꿔놓은 서핑

죠니의 실수라면 “(서핑이) 일생을 확 바꿔놓을 지도 모른다’는 서핑가게 점원의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은 것이다. 하긴 그걸 누가 알겠어. 서핑이 죠니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 사랑, 우정과 같은 연애사의 등장도 그렇지만 죠니는 미련없다는 듯 FBI신분증을 훌러덩 버리기까지 한다. 결국 죠니가 보디를 파도 속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 불가능. 거기엔 서핑이 있을 뿐이다. 통하는 사람이 ‘좋아라~’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대략 난감해지는 한이 있어도 인생은 때론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다. 일생에 한번 오는 유일한 기회란 게 있다.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말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 두렵지만 100% 순수한 아드레날린이다. 고장만 나지 않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기분, 그 짜릿함과 대면하고 싶지 않은가. 넙죽 입을 벌린 파도 앞에 ‘난 죽을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손을 힘차게 내젓는 무모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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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헤이~ 락앤롤

<폭풍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미친 듯 몸을 맡겨도 좋으리라. 거기 삶이 있다면. 파도가 됐건, 하늘이 됐건, 빌딩 숲이 됐건...” 삶의 궁극은 그런 거다. 추구할수록 마땅한 댓가를 받고 치루기도 하는 것.

그런데 그 댓가는 사후적이다. 모르니까, 모르니까 무작정 뛰어드는 거지. 알고 하는 짓은 심심하다. 인생은 한치 앞을 몰라서 좋다는 말. 때론 진실이다. 그래서 미쳐보란 얘기도 나오는 거지. 삶의 포인트는 ‘끌리면 하라’에 있다. 아니면 ‘꼴리는 하라’다...^^;;;

헤이~ 락앤롤(Rock & Roll), 파티 시작이야!  (2004. 7 오픈아이)


P.S... 이 영화를 통해 초절정슈퍼울트라꽃미남 키아누 리브스의 앳띤, 솜털 뽀송뽀송한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건 덤이다. 그리고 감독인 캐서린 비글로우는 <터미네티어>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전 부인이었다는 사실. 요즘은 뭐 하시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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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07.30 22:34 메종드 쭌/무비일락
한여름 폭염. 낮에는 열대우림의 정글을 헤치고 다니느라 지치고, 밤에는 열대야의 고통에 휘둘린다. 늘상 여름이면 겪는 일이지만, 꼭 올해만큼 격렬한 때가 없지 싶다. 당장 겪고 있는 열대의 짓눌림이 가장 고통스런 법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뭐 수영장도 좋고, 피서도 좋지만. 형편이 안 된다면? 그렇다. 괴담. 무서운 이야기. 빨간 휴지줄까, 파란휴지줄까의 오싹한 스토리텔링. 이른바 납량특집, 공포특급이 필요하단 말씀. 근데 여기저기서 동어반복하는 폐교놀음 말고. 좀더 현실적이고 밀접한 공포를 찾는건 어떤가. 하긴 이 공포는 여름에만 나타날 것도 아니고 평소에도 뒤집어쓰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가족들이 집안이나 야외에 올망졸망 모여 수박을 햝는 풍경이 낯설진 않겠지? 삼삼오오 모여서 한여름밤의 별을 헤아리는 이 정겨운 풍경. 대개의 경우 '가족'이라는 우산 아래 모여있기 마련이지. 애들도 적당히 끼고.

그런데 이 가족들. 다들 그렇게 평온하기만 할까. 그 풍경에서야 돛자리와 수박만 있으면 되지만, 거기서 벌어지는 괴담들은 없을까? 단 한건의 공포도 발생하지 않을까? 뭐 괜히 그 좋은 자리에 훼방놓자는 건 아니고.^^;  

어제 <4인용 식탁>을 하더라. 2003년 8월에 봤으니 어언 4년이 흐른 영화. 영화가 뭐 걸작이거나, 딱히 좋아서는 아니다. 그저 여름에 적당히 어울리는 가족괴담이랄까. 평상에 수박 놓고 이 영화를 가족들이 함께 보면 각자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궁금함이 일었다. 하긴 그동안 가족을 놓고도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고 고정관념을 파괴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좀 나왔지.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 <위기의 주부들>… 아 물론, 그럼에도 따지고보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김질하는 영화들이 더 많을 걸? 모래성 같은 가족의 실상을 끄집어내는 건,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니까.

일본의 영화인, 기타노 다케시가 그랬다. 이 말, 술자리나 만남의 자리에서 여러번 써먹었는데 대부분 호응을 하더군.^^; "남들이 보지 않으면 몰래 어디론가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다."

과연 당신은 어떤가?
가족이라고 다 용서되는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
그리고 제발, 회사에서 '가족'이라고 말하지 마. 제.발!

가족개념이 약간이나마 변하면서 지금은 좀 약발이 떨어진 이야기지만, 4년 전 <4인용 식탁>을 보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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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혹은 “사랑은 곧 믿음이다”는 명제는 관습적이거나 상투적이다. 그래서 너무 지당하고도 타당한 것 같다(고 인식하게 된다). 어떤 논리가 태클을 걸어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명제는 일종의 종교와 같다. 사랑은 그렇게 전제를 깔고서 신화로 등극했고 신성시됐다. “믿어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사랑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전파한 주역은 그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믿음과 사랑’을 미끼로 쓸 필요가 있었던 어떤 세력이었다.

가족, 역시 사랑이 우선이다. 믿어야 한다. 믿지 못하면 사랑도 아니고 가족도 되지 못한다. 가족의 최초 구성은 엄연히 ‘다른’ 사람들끼리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가끔 그들은 믿음이란 명목으로 서로를 옥죄며 스스로 주문을 건다. 사랑과 믿음의 가족. 아~ 거룩할 손, 가족의 신성함이여...

한편으로 이 땅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뚜렷하다. 이른바 ‘정상성’에 대한 희구는 단단한 성(城)을 쌓아왔다. 국가나 사회가 (궁핍한)개인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고 사회안전망의 그물코가 얼기설기 엮인 상황에서 기댈 곳이 가족 말고 어디 있단 말인가. 불안정 속에 내던져진 개인에게 유일한 안전망은 ‘가족’이었다.   

아직도 내가 엄마로 보이니?

(내가 보기엔) <4인용식탁>은 ‘가족괴담’이다. “때론 학교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여고괴담의 경구에서 학교를 가족으로 바꿔 놓아도 무방하다.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쳤다는 가족 신화에 대한 도전. 여름괴담 중 하나였던 “아직도 내가 엄마로 보이니?”는 이같은 전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핵가족이 보편화된 시대의 풍경은 ‘4인용식탁’으로 상징된다. 가족과 일상이 묻어나는 풍경. 그러나 <4인용식탁>은 가족에 대한 신화를 거부한다.

신성한 가족의 신화에 칼을 들이댄 시선은 그리 신선하고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공허하고 차가운 조각난 가족을 담은 리안의 <아이스스톰>이나 허구의 중산층 가정을 다룬 <아메리칸 뷰티> 등에서 가족은 이미 할퀴고 살퀸 상처가 나 있다. 그러나 아직 현실에서 가족은 어떤 테두리 안의 구성원을 묶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4인용식탁>은 절제의 영화다. 대개의 공포영화가 주는 영상의 과잉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너무 밝지 않은 로(low)키를 써서 배경은 늘 어둡고 영상은 거칠다. 때때로 극 중 전개는 툭툭 끊어진다. 감독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건너뛴다. 속도감은 느리기 그지없고 일상적인 소음(혹은 음향)은 찢어질 듯 감정의 동선에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전략을 택한 것 같다. 특히 극 중에서 귀신은 맥거핀이다. 원혼을 풀어주거나 복수를 하는 것 따위의 공포는 없다. 주인공들의 고통을 연결해주는 매개일 뿐.

연(전지현)은 정원(박신양)은 물론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된) 과거를 볼 수 있다. 결혼, 즉 새로운 가족을 꾸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원은 갑자기 환상에 시달린다. 약혼녀, 희은(유선)이 마련한 4인용식탁에 두 아이의 주검이 떡하니 나타난 것. 정원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고통스럽다. 우연히 연이 자신이 보는 환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정원은 ‘혼자만의’ 고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아는 정원에게 연은 구원이다.

당신...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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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은 그런 정원의 첫 손길을 냉정히 뿌리친다. “당신...미쳤어...”라고. 그건 믿음에 대한 상처를 지닌 연의 자연스런 조건반사다. 연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멀어진 상처가 있다. 믿음의 붕괴에서 오는 단절은 연의 기면증을 통해 드러난다.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몸(육체)은 움직일 수 없는... 멀쩡하다가 픽픽 쓰러지는 연의 행위는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위에 축조된 것인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연은 자매보다 더 자매 같다던 이웃집 언니로부터, 일찍 결혼했던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로부터 어떤 믿음도 부여받지 못한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신병원을 찾는 것뿐. 정원이 그녀에게 말한다. “난 당신이 무엇을 말하든, 믿.어.요.” 하지만 전자현미경으로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을 측정할 수 있을까. 사랑의 믿음도 솔직히 유구한 거짓말(?)을 품고 있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혹은 “널 영원히 사랑한다”는... 하지만 그 거짓말은 그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달콤하다. 믿고싶다. 감정이 앞서간다.

연은 정원의 ‘믿음’(으로 가장한 말)을 배반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그 믿음이 언젠가 흔들리란 것을, 자신이 상처받으리란 것을. 연의 선택은 그래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믿음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연이 어떤 문을 통과하리란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믿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목적이 수반되거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징표로서. 그리고 가족 안에 뿌리를 내린 믿음의 전제도 너무 태연자약하다. 언제든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임에도. 연의 기면증 때문에 정원이 호텔로 갔다가 희은에게 그 장면을 들켰을 때, 연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부딪힌 연의 남편이 가지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있다. 물론 관객은 알고 있지만 그들은 알 수 없다. 믿음은 오히려 관객의 것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 혹은 감독의 재치. 

연은 “사람들은 직접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뭔가를 믿는다”고 전한다. 정원은 먼저 “믿는다”고 말했지만 과거의 기억과 만나고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믿기 싫다고, 그 믿음은 거짓이었다고. 가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그 어린 날의 기억은 가족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영향을 가한다.

당신, 정말 알고 싶어요?

정원은 자신의 과거를 알려달라고 연에게 조른다. 연은 “당신, 정말 알고 싶어요?”라고 되묻는다. 이 물음 다음에는 (“알고 나면 후회할거에요”)라거나 (“알고 나서 날 믿지 못할 텐데요...”)라는 말이 올 것이다. 잊고 싶은데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는 반면 잊고 싶지 않은데도 탈색되는 기억이 있다. 망각은 어쩌면 기억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그럼에도 <4인용식탁>은 뜨거운 수프를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원한지, 뻐근한지, 아픈지는 뜨거운 걸 일단 삼켜봐야 알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베이거나 긁힌 상처와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곪아터진다는 것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가족도 언제든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는 것을. 잔혹 가정사는 그렇게 4인용식탁의 허구를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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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족은 미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모래성 같은 믿음을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지탱할 수 있는. 영화를 보며 최근 아이들을 차가운 바닥으로 내던지고 투신자살한 모성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결혼이 미친 짓이듯 가족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신화성을 배제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폐부를 콕콕 찔러댄다. 어머니는 아기를 베란다에서 떨어뜨리고, 아이는 밀폐된 우물 속에서 어미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아이는 연탄불을 피워 일가족을 몰살로 이끈다. 

미국에 <제리 스프링거쇼>라는 엽기 TV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에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려주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출연자들로 득실거린다. 언니가 동생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고 둘은 머리칼을 붙잡고 싸운다. 엄마가 딸의 남자친구와 자고선 딸에게 “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현실이다.

‘가족’은 이 사회에서 면죄부이거나 만병통치약인양 남발되거나 오용된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광고카피로 써먹는 쓰리스타그룹의 CF는 한마디로 역겹다. 지깟 것들이 무슨 가족이라고. 보수적이고 고통을 감춘 가족의 안온한 이미지를 기업에 대입, 스스로의 허구성을 감추려는 수작은 지능적이지만 경멸스럽다.

여지껏 몇몇 회사를 거치며 CEO라는 작자들의 주둥이에서 나온 공통적인 말은 정말 우연찮게도 ‘가족’이었다. 어떤 일 앞에서 그들의 논리는 하나다. “우린 가족이잖아...” 우라질, 그들에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나 합의가 필요 없었다. 가족 앞에 서열과 무조건적인 (아랫사람의) 이해만이 필요했었다. 그들이 정작 필요로 했던 건 가부장적인 질서와 희생이었던 것이다. 그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입양되거나 산산히 흩어지기도 했다.

가족이란 명목으로 더 이상 개인에게 족쇄를 씌우는 건 죄악이다. 신성시되고 신화화된 가족에 의해 개인이 고통 받는 건 불편부당해 뵌다. 고통을 수반한 가족괴담은 이어 ‘바람’이 나거나 다른 항해의 방향을 찾아갈 것이다. 개인도 이에 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면서 가족과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하리라. 가족괴담은 언제든 물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믿고 사랑했을까’라고...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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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07.02 14:48 메종드 쭌/무비일락
비를 타고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준비도 미처 돼 있지 않았다. 이런 갑작스런 소식으로 7월을 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하나 그리고 둘> 이후 언젠가 선보일 차기작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차기작 소식은 언감생심. 환갑을 채우지 못한 채 힘겨운 투병생활을 끝냈다는 소식이 먼저였다. 결국 <하나 그리고 둘>이 유작이 돼 버린 셈이다.

괜히 허해진다. 후미진 골목에서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생을 둘러싼 통찰을 넌지시 건네주던 멘토 혹은 스승을 잃은 기분이랄까. <하나 그리고 둘>은 나에게 그런 존재감의 영화였다. 그가 대만 출신의 감독이라거나,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거나 등의 거적은 내게 필요없었다. 그는 내게 생의 한 단면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이였다. 그것이 -한번 만나본 적 없어도- 그의 죽음이 내게 비통한 이유다.

결국 3년 전 국정브리핑에 올렸던 <하나 그리고 둘>의 감상평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 본다.
에드워드 감독님의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래도 남은 그의 자식(영화)들을 보며 그를 기억하련다.

안녕,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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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현대인의 일상. 속도와 경쟁의 논리는 현대 문명의 대표 논리다. 속도와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삶은 일견 구차한 것으로 전락했고 거짓부렁 철학은 삶을 기만한다. 등 뒤에, 어깨 위로 놓여진 짐은 점점 무게감을 더하건만 우리에겐 뒤돌아볼 여지도 많지 않다. 이젠 반성이란 단어도 텍스트 속에서만 맴도는 단어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말이다. 앞만 보고 달리니 성찰할 틈이 어딨나. 그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작동기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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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당에 스스로 볼 수 없는 뒤통수는 또 어떻게 볼 것인가. 볼 수 없고 겪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불신. 현대인들은 그렇게 쓸쓸한 내면으로 침잠하고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은 그런 현대인들의 흔들리는 자화상을 미니멀하게 그려낸다.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삶에 대한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파한다. 세상 어디에 있건 충분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로 말이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칭얼대는 도회적 삶. 앞만 보고 뒤를 보지 못하는 반쪽 시선은 그래서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파편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 그리고 둘>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파도와 풍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모래알들이 지난날의 상처를 통과의례로 삼고 한자리에서 연대감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뒤통수는 영원히 뒤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뒤통수를 제대로 봐 주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 진전되기도 한다.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 그리고 둘>이 지난 미덕 중 하나는 삶의 구석구석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다. 영화는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삶의 미묘한 조각과 원자들을 한 꺼풀씩 벗긴다. 사실 <하나 그리고 둘>에서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삶은 마냥 쪼개진 채 흩뿌려지지 않는다. 파편같이 조각난 삶의 그림들이 모여 하나로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각 개인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동선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한 물줄기를 본다.

아버지, NJ는 소란스러운 처남 아제의 결혼식에서 첫 사랑과 우연찮게 해후한 뒤 혼란을 겪게 되며 어머니(민민)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초라한 삶에 지쳐 가족들을 잠시 떠난다. 그리고 갑자기 쓰러진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지닌 채 사춘기의 혹독한 연애담을 겪는 딸(정정)과 꼬마철학자 같은 풍모로 감정에 미묘한 파동을 주는 아들(양양). 이밖에 이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갈 시초를 주는 할머니와 어쩌면 도회적인 일상의 플롯을 간직한 아제(외삼촌) 등 <하나 그리고 둘>은 3대의 가정·개인사를 통해 연애담, 사업, 돈, 결혼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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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결혼식에 모인 NJ의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꼬마철학자, ‘양양’이다. 양양은 감독(에드워드 양)의 대변자이자 관객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다. 양양의 호기심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다.
“아빠가 보는 걸 난 못보고 난 보는데 아빤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하죠? 왜 우린 뭐든 반밖에 못 보죠?”
이에 아버지(NJ)가 권한 카메라는 양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도구다.
“왜 뒷모습을 찍느냐”는 물음에 양양은 대답한다. “못 보니까 보여 주려고요”

자기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다른 사람은 볼 수 있다는 것. 그야 누가 뭐래도 자명한 사실이고 모르는 사람도 없을 법한 얘기지만 누군가의 입 혹은 어떤 글이나 영상을 통해 그것이 발설될 때 그 의미는 자못 심장하다. 일상에서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달음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또 한번 살다갈 인생의 소중함을 넌지시 속삭인다. 윤회사상이나 부활 같은 거듭남보다 현실에 뿌리를 내린,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각. 일장춘몽이라고 그랬거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일탈을 꿈꾸거나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린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가장 많은 힘과 노력을 쏟아야 할 곳”이라는 경구는 진실을 품고 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이를 위해 한 일본인 비즈니스맨을 등장시킨다. 어려워진 회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즈니스의 추잡한 면모를 드러내는 NJ의 사업 파트너와 달리, 그는 ‘진짜’를 위해 NJ와 대화하고 신뢰를 쌓는다. 그는 이미 NJ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루하루가 그 날로선 처음이고 아침마다 새롭다는 사실’을, ‘똑같은 날을 두 번 살지 않음에도 아침에 깨는 걸 두려워하’는 우리네 일상에 의문을 던진다.   

이 말은 후반, NJ의 가족이 고비와 풍랑을 겪은 뒤 다시 되새김질 된다. 부인이 자리를 비운 새 옛날로 돌아갔다 왔음을 고백한 NJ는 깨달음을 읊는다.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다시 부딪혀 보면 다를 줄 알았어. 하지만 결과는 같고 다를 게 없었어. 다시 태어나는 건 별 의미가 없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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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을 만났던 NJ는 아내에게 이를 고해성사하며 깨달음을 읊는다.


그렇다. 인간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반성하고 깨달으면서 삶을 지속시킨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다. 미래를 미리 알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별다른 고난의 흔적을 남길 여지도 없고 그건 또한 심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측 가능한 인생이란 여러 노력이 어우러진 성과일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수시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 앞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법이다.

한편으로 세대를 건너뛴 연애담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린다. 첫 사랑과 도쿄 출장길에서 재회해 첫 데이트의 감상을 되새김질하는 아버지와 같은 시각 대만에서 첫 데이트에 나선 딸이 병치된다. 또 30년 만에 만나 애틋한 감정의 선율을 보여주는 NJ-셰리(NJ의 첫사랑)와 꼬인 관계 속에서도 결혼 이후 가끔 ‘서비스’를 주고받는 아제-운운(옛 애인)의 두 종류의 재회는 다른 빛깔을 드러낸다. 전자의 경우 피천득의 ‘인연’을 연상시켜 서로 간절히 원하면서도 엇갈릴 수밖에 없는 회한의 감정을, 후자는 지극히 속물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경박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자

21세기 인류는 광포한 전쟁의 현장을 그대로 목도하고 있는 한편 일상에서도 총성 없는 전쟁의 작두 위에서 굿판을 펼치고 있다. 살아남는다는 명목으로 타인에 대한 관용을 버리고 무식해지기 위해 자신에 대한 존중을 무시해버리는 현대인의 일상은 충분히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일까. 에드워드 양 감독은 날이 갈수록 잔인의 강도를 더해가고 인간에 대한 배신과 오해를 거듭하는 세상에서 매일 같은 굴레를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단면을 쪼개볼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가끔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 실패와 실수의 반복에서도 배우거나 깨닫지 못한 일이 많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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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정정은 할머니에게 고민을 이야기한다.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은 어쩌면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도시인의 삶을 가리키는 지도 모른다. 영화 카피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뒷모습 같은, 나머지 진실 반쪽을 담고 있는” 얘기라고 표현했듯, 가끔씩 뒤에도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길 위에 무엇이 나있는지, 나의 뒷모습은 어떨지 물끄러미 되새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느 순간, 한 꼬마가 당신 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럴 땐 한 마디 해주는 건 어떨까. “그 사진 나에게 주겠니?”라고. 우린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마주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담담하면서도 인상적이다. 거센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온 가족들은 할머니의 장례식에 모두 모인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평소 얘기를 않던 양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얘기를 담담하게 읊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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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영전 앞에서 이야기하는 양양.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하는 말은 죄다 할머닌 아시니까 안했어요.
할머닌 가셨는데 하지만 어디로 가셨죠? 아마 우리가 아는 곳일 거에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 계신 곳도 찾겠죠.
그러면 모두에게 말해서 함께 할머니께 가도 되나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이름이 없는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유작이 된 <하나 그리고 둘> 예고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06.04 11:27 메종드 쭌/무비일락
2002년 여름, 전국이 월드컵으로 들끓던 시기에 외따로 만난 영화. 그래서 내겐 6월의 영화. <후아유>!

국정브리핑에도 올렸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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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아름답다”는 식의 청춘예찬은 결코 식상해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낯두껍을 하고 있어도 청춘은 한없이 투명에 가깝다. 누가 청춘을 비하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다. 청춘은 그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머리끝까지 피를 역류시키게 만든다, 식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건 청춘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경구로 장식된 ‘청춘’의 이름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시기의 청춘을 특정한 말로 규정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X세대, N세대, W세대, P세대 등등 청춘은 시시각각 다른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각종 문구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바뀌는 청춘의 빛깔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거나 정의하는 것과 별개로 ‘정체성’은 청춘의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두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되묻는 과정은 통과의례이며 위태로운 외줄타기 또한 타당한 수순이다.

<후아유>는 그런 청춘의 한 단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팔딱대는 청춘의 감성을 길어내 스크린 상에 펼쳐놓는 감각은 예사롭지 않다. 아바타, 채팅, 게임 등 네트워크 세대의 아이콘을 소재로 활용해 사이버와 현실의 간극 속에서 ‘정체성’을 되묻는 작업까지. 아날로그적 정서와 디지털 감각의 융합이 돋보인다. 복합적인 청춘의 정서를 ‘딱히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릴 순 없지만 말이다.

그런 한편으로 청춘의 한켠에 자리한 흔들림도 함께 포착된다. “불안하다. 내 미래가, 내 인격이, 내 사랑이... 다 불안하다”는 대사는 청춘이 맞닥뜨린 현실과 불안감 등을 집약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변덕스런 청춘의 자화상, 맑음과 흐름이 수시로 교차하는 청춘의 날씨는 머나먼 항해를 떠나는 선박이 만나는 바다의 표정과도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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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상에서 아바타를 만들어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젊은 세대’의 감성은 디지털과 어떤 동고동락을 이룰까? 인주(이나영)와 사이버 분신(ID 별이), 형태(조승우)와 사이버분신(ID 멜로) 사이를 오가는 사각관계의 영상은 신선한 감각의 멜로영화를 표방하는 상징이다.

‘1인칭과 2인칭의 3각관계 4랑법’이란 독특한 카피를 통해 <후아유>가 되묻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답변. 네 가지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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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1. 준비하시고 쏘세요. - 파트너 선택, 자기소개하기

◎ 디지털로 대변되는 21세기, 네트워크의 확산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을 어떻게 형성하고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게 되는 거지?

★ 별이 : 글쎄,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코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늘려놓은 것 같아.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나를 대신하고 아바타로 ‘또 하나의 나’를 상징하게끔 하는 거지. 나를 표현하는 다양한 기호들 속에 숨거나 갇혀버릴 수도 있고 자아가 확장되거나 혹은 변질되는 경험도 가능하게 된 거지. 일상에서의 나와 사이버에서의 나를 분리하느냐 동일시하느냐의 문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어쨌든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이 대면접촉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가능한 기회는 늘어난 셈인데... 만남의 진실성은 보장받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아.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리가 더 놓여졌지만 어느 다리가 튼튼하고 건너기가 좋은 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 멜로는 어쨌든 사이버상이지만 내 힘든 과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날 이해해줬다는 생각이 들어.

♥ 멜로 : 별이와의 만남은 우연이야. 별이가 베타테스터로서 ‘후아유’게임을 비방하는 글을 적었는데, 이런! 같은 빌딩에서 근무하네. 한 건물에서도 모르고 사는 게 대개의 사람살이일 뿐인데 괜히 호기심이 가더라구. 결국 사이버상에서 발견된 그런 작은 요인들이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는 작은 요인이 된 셈이지.


그런데 그 캐릭터가 승부욕에 불타고 있더구만. 매일 30층을 뛰어오른다는 조직의 일원이라는 별이가 궁금해졌어. 다른 건 없어. 우연한 네트워크상의 만남으로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을 겪었고 감정의 변화를 겪었을 뿐이야. 오프라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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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2. 꽂히셨나요? 데이트를 시작하세요 - 커플게임 선택하기


◎ 그럼 현실과의 차이는 어때? 서로간 정보가 불평등하게 형성됐는데 사이버에선 둘도 없고 현실에선 싸우고 엇갈리고... 그건 서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거 아냐?

★ 인주 : 현실과의 차이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어. 세상 모든 것과 헤어진 3년 전 그 날부터 자폐소녀였던 내가 멜로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과거를 열었어. 목표가 생기면 씩씩해지지만 난 청각장애라는 것 때문에 누군가의 동정을 받고 싶진 않아. 사이버에서 난 청각장애가 아냐. 그래서 현실과는 약간 달라.

누군가에게 일부러 과거를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투명인간 친구를 가지고 싶었어. 만나는 것도, 전화도 안돼, 그러나 사이버에선 곁에 있을 수 있는. 굳이 현실과 사이버에서 똑같아지려고 애 쓰진 않아. 전적으로 한 쪽에 기울어진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멜로는 훌륭한 투명인간 친구였어. 샅샅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날 잘 알고 내 힘든 고백을 처음으로 들어줬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지.

♥ 형태 :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사이버와 현실 양쪽에서 그녀를 동시에 알아가는 게 불평등한 건 분명하지. 어쩌면 현실에서 그녀를 알지 못했고 그렇게 이쁜 여자가 아니었다면 접근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과거 역시 한 몫 했을 테고.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가 커플이 된 건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빚어진 나의 작업의 결과였을 지도 몰라.

인주에게 사이버에선 선택됐지만 현실에선 돈만 아는 속물로 받아들여지는 웃긴 관계야. 사이버상의 멜로를 현실의 내가 질투한 거야. 현실과 사이버를 오가며 겪은 삼각사랑! 웃긴 일이야. 나는 하나인 데 상대방에겐 난 두 존재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만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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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3. 둘만의 공간을 원하시죠? - 아지트 만들기

◎ 사랑하는 사람들, 아니 사람들은 주변에 되묻지. “날 잘 알아?” 그리고 그렇게도 요구하지. “널 알고 싶어”라고.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다른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어떤 거지?

♥ 형태 : 글쎄, 다른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만큼 나를 아는 일도 만만치 않아. 누군가에겐 곤혹스럽기도 하고 당연히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지. ‘나와 너’는 도대체 누구이지? 그리고 우린 자신을, 서로를 얼마나 아는 걸까? 혼란스럽긴 매 한가지야.

하지만 이건 확실해.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부분 중에 ‘사랑하는 너’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너의 정체성에도 ‘사랑하는 나’가 있었으면 한다는 것. 내가 보지 못하는 뒤통수를 넌 볼 수 있듯이, 너의 뒷모습에서 나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

★ 인주 : 멜로는 그랬어. ‘투명하게 다가서고 싶은 날, 하고 싶은 말이 터져 나오는 날, 나를 불러’라고.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 기뻤어.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어. 현실 속에 있는 내가 진짜라고 믿고 싶지만, 넷상의 나를 ‘저건 내가 아니야’하고 단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어. 어차피 난 단 하나의 단어나 문구로 명확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야. ‘난 이중인격자가 아닐까’하는 자괴심이 들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

♥ 멜로 : 인정해. 내가 비록 형태의 사이버 ‘분신’이자 ‘아바타’라고 하지만 형태와 별개로 생각할 순 없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만에! 다만 형태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야. 어느 쪽이든, 그것은 다 한 사람이 가진 분신이자 아바타인 것을 인정하면 되는 거지.

한 사람을 단 한마디로 단정 짓는다는 건 웃기고 건조해. 상대적인 데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해석일 뿐이고 겪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거나 선입견을 가지는 건 우스운거야. ‘걘 이래’라고 말해서 그렇게 규정된 상태에서 ‘이렇지 않은 것’을 했을 때 용납하기 어렵게 돼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

★ 별이 : 정말 착한 것이 어떤 것이고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을 해야 해. 단순히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잘해준다고 해서 ‘착해’라고 규정하는 것보다는 평소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도 살피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도 들어보는 것. 그것이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방법이고 나의 정체성을 살피는 한 방법이 아닐까도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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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4. 진짜 사랑을 시작하세요 - 밤새 채팅하기

◎ 불안한 청춘들의 행로가 위태로워도 자리를 찾아가는 건 이상이나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꿈을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고 사랑이 늘 감미롭고 달콤한 것만은 아니란 것도 젊은 날의 통과의례지. 어정쩡한 3각관계 4랑법을 관통하는 기분은 어때?

★ 인주 :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티티카카’에서 수영하고 싶다던 내 얘기... 거기서 수영하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수영하는 셈이잖아. 그건 이상을 가지고픈 젊음이 품은 이야기야. 이루기 힘들기 때문에 매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젊은 날의 한 자화상 같은 거.

내가 청각장애인인 건 사회적으로 ‘장애’를 얘기하자는 의도는 아냐. 어쩌면 혼란스런 청춘의 시기에 앞선 세대가 만들어놓은 세상과 단절될 수 있는 현실 속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상징한 거지. 하지만 마냥 그러진 않아. 형태와 내가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에선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젊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 형태 : 돈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른바 대기업이란 안정된 생활을 떠나 벤처에 뛰어든 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도전하고 싶었어. 미래가 불안하지만 내겐 꿈이 있고 도전하고 싶은 가치가 있으며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 싶은... 완전한 건 없잖아. 그냥 자아는 죽을 때까지 형성되고 만들어가는 거지.

사랑도 마찬가지. 노래방에서 “사랑하고 싶어 이젠, 사랑하고 싶어라”며 불러 제낀 것도 사랑이 주는 달콤함을 그리는 한편 현실은 마냥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야. ‘여자들은 절대 떠나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는 내 경험도 이미 생채기가 된 채 마음 깊은 곳에 둥지를 튼 아픔이지. 잊은 듯 지내지만 불쑥 불거져서 마음을 태풍처럼 긁고 지나가는 그런 사랑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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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춘의 시기에도 꿈, 이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팍팍한 일상의 굴레가 수시로 젊음을 몰아세우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선택한 꿈의 색깔 앞에 꼬꾸라질 이유는 없어야 할 터이니.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낯설었던 소년(소녀)시절을 지나 청춘의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닥친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내가 내 꿈을 꾸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청춘은 여러 빛깔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유한 채 여러 굴레를 넘나든다. 그럴 때 이런 한마디씩은 어떨까.


“Good Luck to You”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07.05.21 14:37 메종드 쭌/무비일락
'성년의 날'이다. 스무살은 그렇듯 '경계'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인장이 찍히는 제도적, 관습적 경계.

나는 스무살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 시절을 군대에서 보냈기 때문이지 아마? 일종의 연민인 셈이지, 킁. 나는 사회적인 인정 시스템에 의한 어른이 되는 시기를 '군대에 뺐겼다'는 박탈감(?)이 있다. 따지고보면 어처구니 없는 것이긴 한데, 사실 혼자만의 넋두리다. 스무살을 군대가 아닌 곳에서 보냈다손, 내 스무살이 크게 달라졌으리라 생각진 않는다. 뭐 당신도 마찬가지일걸?

대개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랬어. 아이 때는 커 보인다. 어른이 되면 얻을 수 있는 권리들이. 인정욕구 또한 자리매김한다. 어른이 됐다는데 대한 주변의 인정. 그러나 막상 그 '어른'이 되면 그 권리에 따르는 '책임'때문에 버거워한다. 아이 때는 모르지 몰라.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물론 그 책임을 회피하는 어른들 부지기수다.

한 선배가 그랬다. 어른이 된다는 건, 조아리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그래. 어른이 되는 게 한편으로 권위에 쉽게 복종하고 "사는 게 다 그런거지"라며 희망을 뒤로 밀어넣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아끼고 함께 나누는 것보다 남의 것을 빼앗는데 더욱 힘을 쓰는 그런 것. 하긴 요즘 아해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아해들도 많다드라만, 그건 순전히 어른의 잘못이지 뭐. 애당초 DNA는 그렇지 않았건만 그렇게 주입한 어른들의 잘못. 미친 어른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 더 빨리 우리의 기억에서 마르는 스무살이 지나가고나면, 스물한살이 오는 것이 아니 스무살 '이후'가 온다."(소설가 김연수)
 
나는 다시 성년을, 어른을 생각한다. 스무살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철이 무겁다는 핑계로, 책임질 것이 점점 많아진다는 핑계로, 열아홉에서 멈추고 싶은 나의 욕망도 현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꺾이는 부분도 쎄고 쎘다. 권력에, 권위에 조아리는 일도 점차 많아진다. '마흔'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스무살에서 다시 이십년을 더 해도 '성년의 날'과 같은 이벤트는 더 이상 없다. 스무살은 그렇게 놀라운 나이다. 이제 스무살은 머리가 아닌, 사진첩을 뒤져야 나오는 시간이다.

몇년 전 김규항 말로는 "한국에서 아이들은 삶의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유일한 인간들"이라는데, 아직도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년의 날을 거부하는 것도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지.ㅎ 김규항의 아이와 어른에 대한 단상들. 새겨들을 만.
희망
우주

난 아직 모르겠다. 결혼했다며 어른이 됐다고 깝죽대는 아해들은 알고 있을까?ㅋㅋ 글쎄 아직도 철을 들기엔 근력이 멀었다는 뜻인지 몰라도 나는 아직 어른이 멀구낭.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