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763호의 피쳐기사인,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를 만나다 ① -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무척 흥미롭다. 세 명외에 정성일, 허문영 씨까지 해서 다섯 영화문필가들이 나누는 대화는, 흥미진진한 탁구경기를 보는 것 같다.

뭐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니고, 좀 엉뚱한 거다. 피쳐기사의 첫 장면에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사진을 보자마자 팡~ 터졌다. 김혜리 여사님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에 비해, 사람남자 둘의 포즈와 표정은 뭐랄까. 뭔가,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

사진은 여러모로 재미난 대비를 이룬다. 시소를 놓으면 사람남자 둘 쪽으로 기울어야 할 듯 싶지만, 구도 등 여러가지를 봐도 왠지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희한하기도 하지. 뒤에 있는 나무들을 봐도 그렇고. 참 재미난 사진이다.

김영진 씨는 몇 년 전, 그가 <필름2.0>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는 기억 못하겠지만) 목소리 좋고, 글 좋고, 무게감 짱이다. 이동진 씨는 광화문의 커피스트에서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고, 몇 번 그가 초대된 행사에 간 적이 있는데, 의외로 유머가 좔좔좔. 그의 글과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사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본인들은 어찌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봤다. 전설처럼 제목만 설핏 들었던 그 영화. 당최 뭐라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내겐 없다. 이동진 씨가 그 자리에 함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였구나. 괜히 반가웠다. 나는 빠돌이까지는 아니지만, 고레에다 감독 작품을 참 좋아한다. 특히, <원더풀 라이프>. 이동진 씨도 참 좋아한다고 했다. 괜히 또 반가웠다.

<환상의 빛>은, 동명의 원작에 나온 구절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좋겠다.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시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p.12) 그날의 기록이다. <환상의 빛>이 내 마음에 틈입했던 기록. 



‘왜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는가’

<환상의 빛> 출간기념 영화평론가 이동진과의 대화


“다만 삶의 하중荷重이, 그 무게가 불현듯 어깨를 짓누르고, 일상의 생의 부담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들면 홀연히,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뿐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질박하다면 그런대로 또 질박하다.”(『도깨비 본색, 뿔난 한국인』, p.251)


물론,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 알 것이다.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욕망. 아니,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저,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 걸어도 걸어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주무주주(住無住住)’라고 했던가.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머무름이라고 했던. 바람이 분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떠남은, 분명 그런 것이다. 이 자리에 있고도 없어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


안타깝다. 어디서 본 표현이었을까. 출처를 미처 적어놓질 못했다. “사슬을 풀고 구름이 되고 싶다. 연줄을 자르고 안개가 되고 싶다. 연관의 고리를 부수고는 물 흐름이 되고 싶다. 우리는 그러기를 바라는 존재다.”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공기인형> 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인 「환상의 빛」을 읽고, 퍼뜩 메모해놨던 이 표현이 틈입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혹은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의 마음이 아녔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미코. 남겨진 사람. 남편이 훌쩍 그렇게 떠난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당최 알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불쑥불쑥 침입하는, ‘왜’를 지울 순 없다. 생은 그렇잖나. 바삐 길을 가면서 모퉁이를 돌다, 전혀 예기치도 않게 첫 번째 첫 사랑을 만날 수 있듯,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아니 10년을 떠올리지 않다가도 느닷없이 한 순간을, 생각을 만난다. 하물며, 어떤 이유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에게서야.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온다. 허무함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감내해야 하며, 느닷없는 슬픔을 만나야 한다. 마침내, 삶에 덕지덕지 묻은 부조리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먹먹했다. 내겐 달리 표현할 방도도, 필력도 없다. 적어도 내게, 그 빛은 환상적이진 않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식상하고 진부하다. 내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을 뿐. 어둠과 빛을 등가로 놓는 감독의 시선에 마음이 때론 덜거덕거렸다. 특별하고 유별난 삶을 다룬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를 직접 비춘 것도 아니었다. 인물을 묵묵히 따라갔을 뿐인데, 그 카메라엔 삶이 묻어났다. <원더풀 라이프> <죽어도 죽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형이라. 명백한 인장이자 징표가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영화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난 7월13일, 서울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상영회였다. 원작인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지음/송태욱 옮김|서커스 펴냄) 출간 기념. “미야모토 테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박명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고 추천사를 썼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혈 팬인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름답고 쓸쓸한데, 장면 몇 개를 잘라서 벽에 걸어두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 한편으로 (그렇게 하면) 한 달 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웃음)” 지금부터 이것은, 그와 관객이 함께 나눈 기록의 일부다. 그 옛날, <원더풀 라이프>에 흠뻑 빠졌던 나는, 그 역시 이 영화의 신봉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무척 반가웠다. After Life…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맺은 인연


“저는 동시대 외국 감독 중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하면 <원더풀 라이프>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의 경험 자체가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매우 깊은 정서적 충격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을 선사한 사람에 대한 원초적 끌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말하자면, ‘고빠(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에 특히 좋아한다다.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 근작인 <공기인형>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환상의 빛>을 찍기 전까지 TV다큐멘터리 등을 찍다가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늦둥이인 셈인데, 이 영화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 중에 처음 본 것은 <환상의 빛> 아니고 <원더풀 라이프>(1998)다. 과할 정도로 좋아한다. 고레에다 감독 필모 중 가장 잘 만든 것은 <걸어도 걸어도>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나 <원더풀 라이프>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 간 이동진 평론가. 이런저런 시놉시스를 훑어보다가 재밌겠다 싶었던 것이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신인인가? 그런데, 이건 뭔가. 영화를 다 본 뒤, 다리가 꿈쩍을 않는다. 감동 먹어서, 영화에 취해서. 별 수 없이 관객과의 대화까지 지켜보게 됐다.


여든 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캐나다에서 오셨다는 할머니가 손을 들고 영화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뭐랄까, 묘했다. <원더풀 라이프>에 나오는 할머니를 언급하면서, ‘나는 오늘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며 예찬을 했다. 그리고선 고레에다 감독이 말을 시작하는데, “아, 저런 사람이니까 이런 영화를 찍는구나 싶더라.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도 감동을 받았다.” 감동 두 배. 이동진이 고레에다에 빠진 날.


그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더풀 라이프> 상영됐다. 극강이었다. 이동진 가라사대. “여태껏 내가 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GV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GV였다.” <공기인형>이 개봉했을 때, 주연배우였던 배두나와 인터뷰를 했다. 배두나가 던진 진담 혹은 농담? “고레에다 감독이 무척 멋있어서 미혼이었다면 프러포즈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유부남만 인기 좋은 더~러운 세상.


물론, 아무리 좋다손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아쉬움, 왜 없겠나. 완벽한(?) 감독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 그러니까, 네(사)가지까지는 아니고. “꽤 많이 만나본 감독 중 하나고, 고레에다 감독도 날 알게 됐다. 그의 영화는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는데, 세 번째 영화인 <디스턴스>만 없다. 만났을 때, 그 얘길 하니까, 반색을 하며 보내주겠다는 거다. 주소를 적어줬는데, 1년이 지나도 안 오더라. <걸어도 걸어도> 국내 상영 당시에도 인터뷰를 했는데, 끝나면서 이 얘길 하니까, 너무 미안해하면서 다시 주소를 받아갔다. 지금, 1년 반이 지났는데...(웃음) 그거 하나만 빼고는 완벽하다.” 고레에다 감독님, 들리세요? 줄 건 주셔야죠. ^.~


환상의 빛, 책과 영화 사이



<환상의 빛> 원작이 번역 출간되면서, 추천사 얘기가 들어왔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 때문에 책을 들었다. 그의 데뷔작을 잉태한 원작은 어떨까.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깜짝 놀랐다. “어떤 면에선 소설이 (영화보다) 더 훌륭한 면도 있다. 플롯으로 읽는 소설이 있는데, 이 책은 문체로 읽는 소설이었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은 중편인데, 문장을 보니 활자에서 소금기 같은 냄새가 났다. 짠 내. 문장이 워낙 좋아서 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남성 소설가가 여성을 화자로 서간체로 풀어나간다는 점이었다. 시쳇말로 ‘삑살이’도 없을뿐더러, 여성 작가도 써도 이렇게는 못 쓸것 같을 정도. 번역도 상당히 좋았던 데다, 예상 외로 소설이 무척 좋아서 기분 좋게 추천사를 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설은 영화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내용을 최대한 줄이자고 작심한 듯 영화를 풀어나간다. “소설에서 유미코가 다미오에게 시집가는 날, 기차 안에서 재일교포 여자를 만난다. 상당히 좋다. 그런데, 영화에선 생략됐다. 또 영화의 첫 장면. 유미코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집을 떠난 뒤 ‘아들이 죽여서 구들장에 묻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경찰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들장을 파본다. 물론 없다. 소설에 있는데, 영화에선 묘사가 안 돼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원형 같은 부분이 역시 있다. 이야기가 될 만한 부분을 거세하고 길을 거닐거나 노동을 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특히,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고레에다 감독은 대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데, <환상의 빛>은 원작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머릿속 꼬마전구가 ‘반짝’했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비유적으로 ‘박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엷을 薄, 빛 明. 일기로 말하자면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순간, 두 번이다. 두 번의 시간이 중요하다. 가장 인상적인 이 시간을, 영화는 프레임을 세로처럼 쓰면서 보여준다. 가로 프레임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문이나 벽을 이용하는데, 열린 문 사이로 좌우 벽을 보여주고 내부를 어둡게 보이게 하면 흡사 세로 프레임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세로 프레임에 애착이 많다. 이 영화 그런 게 많다. 고레에다 감독이 좋아하는 앵글 중 하나가 실내는 어둡고 바깥은 밝은 거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찍는. 근경의 어둠은 실내, 원경의 빛은 실외인 장면을 애호한다. 나는 그것이 폼 잡기로서의 애호가 아니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드러내는 징표라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삶은 어둠이자 실내에서, 빛은 저 멀리 바깥에, 작은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에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눈빛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진단한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이 영화에도 첫 장면부터 있으니까.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그렇듯.


“이건 감독의 인장 같은 거다. 오우삼의 흰 비둘기 같은 거. (웃음) 스타일면에서 이런 특성이 있는 한편, 이야기 측면에서도 그런 게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보면, 저밀도잖나. 드라마틱한 얘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얘기라면 아내가 한 대 후려친다거나 남자를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관습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없다. 재혼도 자연스럽고. 그게 원숙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p.47)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남은 여자. 이동진은 여자의 마음을 따라 간다. 첫 아이를 낳고 3개월, 그러니 생활력도 왕성할 즈음, 아침에 시시덕거리며 출근했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 왜, 왜, 왜!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나. 영화엔 안 나오지만,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다. 그런데, 이 남자가 죽은 거다.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깡촌으로 시집을 가고. 끝까지 해답을 주진 않는데, 영화는 소설보다 조금 더 나간다.”


그것이 클라이맥스였다. 여자가 지금의 남편과 바닷가에서 대화하는 장면. “좋긴 한데, 과하다고 생각한다. 환상의 빛, 바다의 유혹, 죽음의 유혹 같은 건데,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타나토스에 대한 근원적인 유혹이랄까. 살아야겠다는 유혹도 있지만, 스스로를 소멸하고픈 욕망도 있잖나.” 삶과 죽음 사이의 외줄타기. 연인 사이에만 ‘밀당(밀고 당기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밀당이 있다. 생사, 그 다르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그 무엇.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p.60)


남겨진 사람,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



그는 그리하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을 들먹인다. 이유를 찾고 싶은,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생각해보라. 셀러브리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신문은 방송은, 어떻게든 ‘왜’를 규정짓고 싶어 안달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이유가 단순하게 하나일까. 그럼에도 신문의 사회면은, 인간이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을 증명하듯, 불쑥 내뱉는다. “폭음을 한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나. 사실은 90%가 알코올 중독이라서 마신다. 그런데도 이유를 댄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니 뭐니 하면서, 사람은 이유를 갖다 댄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p.59)


다시 돌아가, 이 영화는 고레에다 영화가 그렇듯,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초지일관 남겨진 사람 혹은 던져진 사람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영화, “남편이 왜 죽었을까, 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질문했을 때, 답이 주어질리 만무하잖나.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살아야 하잖나. 그것이 <환상의 빛>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뒤집어 말하면 의미가 애당초 없었을 때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데, 텍스트가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든 예는, 여자가 지하실 계단을 닦는 장면. 오랫동안 여자는 계단을 닦는다. 한참 그것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자가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따라간다. 그때, 남편을 생각했다고 가정한다면, 근원적인 질문은 그렇게 느닷없이 삶에 틈입한다는 것.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끊임없이 그 문제만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남자는 왜 죽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부재와 쓸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여자의 재혼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팬티 하나만 입고 교태부릴 때의 행복도 있다. 그저 현재 생활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는 거다. 그것이 끊임없이 삐죽삐죽 삐져나와 틈입한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영화고 소설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p.80)


이어 이동진 평론가와 가진 질의응답 시간. 


영화 첫 부분에 미스터리처럼 죽음을 몰고선 풀려나갈 것처럼 가다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죽음이후 남겨진 시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레에다 감독은 왜 끝까지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가. 동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전제할 것은, 내가 고레에다 감독은 아니다. (웃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만약 이 텍스트에 반전이 있어서,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거나 ‘재혼남이 그 남자의 환상이었다’고 하면 이 텍스트는 완전히 깨지겠지. (웃음) 고레에다 감독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는다. 나는 고레에다 감독이 아직은 완성된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도상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볼 땐, 방법론적 회의론자 같은 측면이 있다. 장편 7편이 스타일 등이 다 달라서 같은 사람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환상의 빛>에서 롱쇼트와 롱테이크로 찍은 감독이, <원더풀 라이프>에선 전반은 다큐처럼, 후반은 극영화처럼 찍었다. <디스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찍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정해진 각본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배우의 미세한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찍었다. 연기부터 카메라, 편집까지 철저하게 가장 지독한 일본감독이 찍은 것처럼 만들었다. <하나>는 장르영화로 사무라이 코미디이며, <공기인형>은 한국배우를 데려다 만들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찍었던 베드신을 찍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직도 뭔가를 시도해보는 단계인거 같다. 흥미롭고 당분간 이렇게 할 것 같다. <하나>처럼 삑살이를 낼 것도 같지만, 현재 생각으론 끝까지 좋아할 것 같다. 좋은 영화는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고레에다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감독이 완성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완성된 감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고레에다가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의 온화해 보이는 영화들은 의외로 세상이나 삶 자체와의 철두철미한 마찰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에서 촬영 스타일까지, 전부 다르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아마도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끝까지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왔는데, 유미코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어떻게 봤나.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거기다. 유미코가 앙탈을 부리듯이 ‘왜 전부인을 사랑했는데, 나랑 결혼했냐’ 하면서 수습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불쑥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장면을 영화는 떼서 맨 뒤에 붙였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그래서 과하다싶은 장면을 만들었다. 


남자(다미오)도 그 못지않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삶의 길이 남은 거고, 두 사람은 그 길에서 만난 동반자인 거지. 그 장면은 리얼한 앙탈이면서 장면으로서도 좋다. 그런 부분을 덜어낸 것도 좋고. 


고레에다 감독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영화를 찍고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이 허우샤오시엔이고, 대만까지 가서 이 영화를 보여줬다더라. 딱 보고 스승님 왈, 영화 참 좋다. 근데 너는 모든 걸 미리 결정하고 찍었구나. 고레에다 감독이 머리에 한방을 맞은 것 같았다더라. 소설엔 강박이 없는데, 영화는 좋고 아름답지만 내 느낌엔 강박 같은 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지. 형식이 먼저 결정된 것 같은. ‘멀리 관조적으로 찍을 거야’와 같은 강박이 있었다는 거지.


[예스24 기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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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가, 2006년의 11월이었죠.

사실, 11월은 그래요. 여느 달과 달리, (주말을 제외한) 휴일도 없고 특별한 축제나 기념할만한 날도 없어요. 맞아요. 무미건조한 달! 만추의 기분요? 에이, 설마~ 그 달은 겨울과 가을 사이에 끼여서 딱히 제 나름의 계절적 정체성도 가지기 힘든 달이에요. 친구는 그러더군요. 겨울로 가는 길목에 '사산아'처럼 던져진 달이라고. 떨어지는 낙엽들 때문에 스산하기까지 해요(그나마 '빼빼로데이'가 있는 것이 위안이랄까요~ ^^;).


그런 낙엽을 보자면,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그해 11월, 우리는 당신을 보내고야 말았죠. 사산아 같은 달에 누군가를 그렇게 보내는 건, 더 큰 감정노동을 동반해야 해요. 누군들 누울 자리, 누울 달을 따져서 눕겠느냐마는, 그렇게 ‘천국’으로 당신을 보내는 일, 쉽지 않았어요. 


그래요. 알프레도 아저씨. 당신은 그때 그렇게, 떠났습니다.
뭐랄까. 아저씨를 대면하거나 얘기를 나눈 적 없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 원한다면 기댈 어깨를 언제든 빌려주는 사람이 갑자기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까요. 아저씬 그런 사람이었어요. 집 나간 고양이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에 치이고 치이다가 다시 돌아가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반가이 맞아줄 것 같던 사람.


하긴, 아저씨는 영화 속에서도 그랬어요. 토토에게 말이에요. 아저씨를 토양으로 삼고 자란 토토가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뒤에도 아저씨를 찾아오지 않았죠. 하지만 아저씬 토토를 믿었고, 언젠가 돌아올 그를 위해 눈물겨운 선물을 준비해 둔 사람이었죠. 그 선물. 토토가 아니라도, 그 선물을 보고선 눈물 한번 흘리지 않은 사람 없을 걸요. 아, 제게도 아저씨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긴 몰라도, 아저씨는 <시네마 천국>을 심장에 깊이 새긴 사람에게 영원히 자리매김하고 있을 거예요. 어린 토토가 그렇게도 따르고 좋아하던, 토토에 대해 절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당신. 토토의 (유사) 아버지였고, 선생님이었으며, 두목인 한편, 무엇보다 친구였던 당신.



2. 친구, 맞아요.

그래서 아저씬, 욕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 사람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그랬기에, 영화나 인생을 즐겼으며, 친구를 묶어두지도 않았던 거겠죠? 그리고 친구에게 멘토가, 카운슬러가 되어주었겠죠. 특히, 종종 보여주신 약자를 향한 애정, 그것 또한 인상 깊었어요. 스스로 부유하진 않았지만, 넉넉하고 풍족한 마음씨로 없는 사람을 대했던 친구.

그런 친구를 구름의 저편으로 보냈을 때, 슬픔도 슬픔이지만, 참 아쉬웠어요. <클로저>에서 주드 로가 분했던 부고전문기자, 댄이 말했듯, 제대로 된 부고기사를 접하지 못해서, 내가 그것을 제대로 못해서.ㅠㅠ 부고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1인분의 생이 마감됐음을, 그 죽음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람들은 때론 간과하는 것 같아요.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에 말이죠. 그 세계가 다른 세계에 미친 영향은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그래서 알프레도 아저씨를 제대로 알렸어야 했는데 말이죠.


어쩌면, 이 포스팅은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친구처럼 당신을 생각했던, 한 젊은이가 보내는 연서이기도 하지요. 더불어, 지금까지의 제 생애를 지탱하게 만들어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아저씨와 같은 친구들에게 건네는 이야기. 아저씨 없는 토토가 없듯, 아마 그 친구들 없이는 제가 없었을 거예요. 그렇기에 ‘시네마 천국’은 어쩌면, 제 얘기가 아니었을까요. ^.^  




3. 저는 한때, ‘ToTo’라는 아이디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당연히 <시네마 천국>의 ‘토토’에서 빌린 아이디였죠. 내 인생의 영화, 많지만 0순위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시네마 천국>을 말합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였죠. 그보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하고 극장을 드나들던 저였지만, 그건 일대 사건이었죠.  단순히 영화 제목이 마음에 들어 만났던 <시네마 천국>. 대수롭지 않게 앉았다가 끝내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시간이었어요. 눈물까지 범벅이 돼서, 몰입하고 말았던 그 첫 번째 대면의 시간.


그 전까지 <시네마 천국>만큼 가슴을 후벼 판 그런 영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토토와 알프레도 아저씨의 우정. 아버지 잃은 어린 토토가 유사 아버지이자 친구인 아저씨와 나눈 감정의 교류. 이전에 절 울렸던 한권의 책,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만났던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의 느낌이 영상으로 되살아난 기분이었어요.



그들은 서로 만집니다. 몸의 접촉을 넘어선, 서로의 마음을 만져주는. 그건 소통이고 정서적 공유였죠. 누구 하나의 의한 가르침이나 주입이 아닌, 서로가 삼투압하고 번집니다.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피부접촉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추구한다죠.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접촉을 통해 함께 자랍니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죠. 그들의 상호관계성이 형성되는 과정이 저는 눈물겨웠나 봐요. 처음 볼 땐 무작정 몰입됐던 그들의 이야기가 자라면서 더욱 가슴 한 켠에 숨 쉬게 된 건, 아마 그런 ‘관계’ 때문입니다.

알프레도 아저씨는, 토토에게 이런 말도 건네죠. 
“토토, 네가 영사실 일을 사랑했던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네 일을 사랑하렴...”

어린 날부터 뻔질나게 영사실에 드나들던 토토에게, 영화(일)를 하라고 얘기하진 않아요. 그저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고. 그건 곧 자신을 사랑하라는 의미까지 담은 표현. 아저씬, 만지고 만져질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존재가 커짐을 머리가 아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맞죠? 아저씨. 만질수록 커진다!



4.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제게 알프레도 아저씨이자, 뽀르뚜가 아저씨. 중학시절 만났던 내 친구 상현이. 녀석은, 정말 다른 친구와 달랐어요.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환경의 세계에 묶여 있던 제게, 녀석은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줬죠.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그는, 풍부한 감(수)성과 마음씨를 지닌 문학 소년이었어요. 녀석은 조숙했어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그는 너른 웃음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사람도 먼저 생각할 수 있음을 알려준 친구. 교내 백일장을 휩쓴 그의 글을 보자면, ‘아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오지’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었고요.


저는 무작정 녀석이 좋았고, 많이 따라다녔죠. 10대의 좁은 내 세계에 변곡점이 됐던 그 친구. 똥고집부터 부리고 혼자만 알았던 제게, 처음으로 세상에 가난이 있음을, 다른 친구를 우선 생각할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죠. 우리는 늘 밥을 함께 먹고, 녀석과 내 집을 오가며, 자전거를 함께 타고 공부는 물론 노는 것도 함께 했었죠. 내게 그렇게 번졌던 그 친구. 나는 얼마나 그 친구에게 번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고마운 친구.


그리고 20대. 나는 또 다른 알프레도 아저씨를 만났죠. 군대를 갓 제대하고, 폭력적이고 가혹한 율법에 날이 서 있던 제게, 타국에서 만났던 그녀는 내 안의 독을 빼주었어요. 한 지역방송사의 기자였던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다시 공부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죠. 그 먼 타국에서 우린 참 많이 걷고 이야길 나눴죠.
 

내가 놀란 건, 그의 선택이었어요. 당시 자본이 부추기는 욕망에 더 가까이 있던 내게, 그는 우리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죠. 그는 그 그늘은 결국엔 우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 중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를 품고 한 장애인 커뮤니티에 자원봉사자로 자신의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특수교육(Special Education)으로 진로를 잡은 선택이었죠. 


물론, 그의 선택이었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그는 내게 간혹 토로했었죠.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도 한 상황에 회의를 내비치면서. 그러나 그는 억지로 버티고 견디지 아니했어요. 자신의 몸이 고장이 나기 전까지는. 그는 많은 시간 즐거웠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달뜬 목소리로 자신의 행복을 말해주기도 했었죠.

그 사람, 또 다른 알프레도 아저씨였던 그 사람. 그 덕분에 나도 꿈이 생겼고요. 그는 알프레도 아저씨가 토토에게 했던 마냥, 내게 이런 말을 건넸죠. “건강하게 사회 속에 썩어 들어가기 바라네. 해서, 사회기둥의 한 뿌리가 되어 있는 자넬 보고 싶네,. 든든한 한 뿌리가..” 이건 내겐 절대반지가 됐어요. 그때 이후 내 생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대가. 영원히 지키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든든한 뿌리까지 될 자신도 솔직히 없지만, 늘 내 가슴 속에서, 숨이 멎는 그 날까지 간직한 그 말. “건.강.하.게. 썩.어.들.어.가”라는 그 말.


맞아요. 그들을 널 만나기 전과 만난 후, 저는 사람이 완전 바뀐 건 아니지만, 약간 달라졌어요. 그때그때 내 생은 그들을 만나기 전과 그 후로 나뉜 거죠. ‘before’와 ‘after’. 삶에서 경험하는 어떤 균열이라고 해도 좋을. 그리고 지금 새로 시작한 일. 그들이 추동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앞서 했던 일도 물론 그랬지만, 지금도 그래요.


내겐 그 친구들이 바로, 알프레도 아저씨랍니다. 사실 지금 그들은 나는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이유들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여행스케치의 ‘옛 친구에게’가 있어요. 그 노래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알프레도 아저씨를 떠올리죠. “지난 내 어리석음 이젠 후회해 하지만 넌 지금 어디에… 아직도 나를 기억 한다면 날 용서해주오♪” 그들, 잘 있겠죠?



5. 작은 바람이 생겼어요.


알프레도 아저씨가 토토에게 그랬고, 그들이 나에게 그랬죠. 그것이 단 한 사람에게 일지라도, 당신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맞아요. 당신은 내게 그런 번짐이었습니다. 우린 느닷없이 만나고 느닷없이 헤어진 상태지만, 그건 생에 있어 하나의 단계이자, 수순이라는 생각도 해요. 알프레도 아저씨를 훌쩍 떠나보낸 채, 뒤늦게 그를 찾아간 토토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해요.



그래도 느닷없이 잊히진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당신의 번짐이 아직 제 가슴에 번진 채 있어서 역시 다행이에요. 토토가 알프레도 아저씨를 만난 것이 우연이듯, 우리의 만남도 우연이었어요. 그 우연이 우연을 불러 인연이 넓어지고, 인연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 줬네요. 당신과 맞닥뜨린 이 우연이, 인연이, 저의 세계를 더 넓혀줬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번짐이었습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냉정과 열정 사이』)는 말이 맞다면, 당신들은 내 속에서 여전히 번지면서 있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는 저도 그런 번짐이고 싶어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사기를 통해 비치는 영상이 토토에게 경이로움과 감탄이었고,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된 창이었을 겁니다. 알프레도 아저씨가 그것을 전해줬고.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작은 번짐이자 아주 작은 위안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늘 커피와 함께 제 마음 한 잔도 담아주고 싶어요. 그것이 제 작은 바람이에요.
커피 한 잔, 번짐 한 모금...


마지막으로, 장석남의 ‘수묵정원9-번짐’이라는 시를 건넵니다.
고마워요, 알프레도 아저씨(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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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우리에게, 그렇다.
피 묻은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항쟁이 있었고,
분노와 슬픔을 이끌어냈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다.
반 세기도 넘은 과거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6월을 얘기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것. 월드컵.
현재 진행형인 월드컵도 2010년 6월의 대한민국을 달구겠지만,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에서 이같은 광경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으며, 들은 적도 없었다.
일상의 굴레를 훌훌 던지고 빨간 색으로 국토를 뒤덮은 붉은 악마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자동차 경적과 응원의 함성, 초원을 질주하듯 녹색구장에서 터질 듯한 율동을 선보이던 육신의 황홀했던 순간들… 대한민국은 이 낯선 풍경을 경험했다.

그해 6월, 놀라고 뜨악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축제가 가능할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역주의, 안보반공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 거부하고 싶지만 일상과 밀착된 굴레를 그 축제동안 무시하고 ‘해방구’를 찾아 일탈을 감행했던 기억.
한마디로 짜릿하면서도 무서웠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했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광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고 사소한 취향과 쾌락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축제의 핵심이 몰입이듯, 그냥 즐겼을 따름이다.

축구라는, 전 세계가 공히 즐기는 단일 스포츠종목의 힘은 유사종교나 마찬가지였으나, 종교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교리따위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연대가 엄연히 존재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약자들의 반란이 즐거운 이유

그때 그렇게 우리를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 ‘한바탕 대동굿’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6월을 주도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변방에 있던 한국, 세네갈, 터키 등이 돌풍의 주역이 됐던 것도 즐거웠다. 약자들의 반란이랄까. 약자가 승부나 우열을 뒤집는 쾌감이란, 경기 그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소림 축구>가 그랬다. 그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힘없고 버림받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세상을 놀래키는 승자로 변모하는 ‘깜짝쇼’였다.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주성치’다. ‘희극지왕’이란 타이틀을 가진 홍콩영화계의 주춧돌, 주성치가 축구를 다뤘다.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국 관객들에게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유치짬뽕이거나 혹은 재기발랄. 주성치(영화)의 매니아들은 말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소림 축구>는 예상치 못한 웃음과 애수를 동반한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였으며, 관객을 한 순간에 자지러지게 만드는 황당무계함은 ‘판타지’나 다름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영화속 이야기가 고단한 현실과 오버랩될만 하면, 이내 딴죽을 피우며 농담을 건넨다. 그 예측불허의 기지는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한다. 장르도 뒤죽박죽 섞인다. 뮤지컬, 홍콩 느와르, 서부극, 전쟁극 등 그 변신 한 번, 기발하고 재기 넘친다. 축구를 소재로 이렇게 다양한 서브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랍도다. 한마디로, 예사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

사회적 약자들에겐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어떤 재능과 능력을 지녔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또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약자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실패는 뭣보다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씽씽(주성치)도 그런 면에서 돌연변이다. 소림사 여섯 사제중 한 명인 그는, 쿵푸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꿈꾸는’ 몽상가 청년.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쓰레기더미를 나르는 루저. 아무도 초라한 젊은이의 꿈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꿈에 동반자가 생긴다. 젊은 시절, 페널티킥 실축으로 스타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황금발’. 그 역시 한 번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 쿵푸와 축구의 접목을 원하는 씽씽에게 황금발은 축구팀을 만들자며 떡밥을 던진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현실 속에 침잠한 나머지 소림사 사형과 사제를 찾아 함께 꿈을 찾자고 설득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축구팀이 탄생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홍콩 영화지만, 그건 우리네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이권의 문제에서 어디 자유로운 곳이 얼마나 있으랴. 음모를 통해 탈취한 돈과 권력으로 약자를 깔보고 짓누르면서 자기 잇속만 고스란히 챙겨먹는 축구계의 불한당은 미디어를 조작하고 대중을 농락한다. 버려진 약자들만 고통을 ‘전담’한 채 쓸쓸한 정서를 덮어쓴다.

잠깐 잊지마라. 이 영화, 선전포고 했듯이, 판타지다.
축구라는 판타지를 통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쓸모없다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꾸린다. 굴욕을 당해도, 환멸속에 있어도, 그들은 참고 견디면서 있는 놈들에게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린다. 황당해도 짜릿한 쾌감이다.


그 와중에 끼어드는 씽씽과 무이의 로맨스는 가난한 연인들의 자화상이다. 묘한 울림이다.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와 이를 기우는 사랑의 모습. 사랑에도 스펙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랑은 조건으로 짜집기가 되지 않는다. 씽씽과 무이는 알려준다. 눈물젖은 만두와 함께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판타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소림 축구>를 판타지로 보는 명분은 명확하다. 범접할 수 없는 철통같은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현실은 약자 편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 이미 고정된 신분과 계급의 세습은 ‘질서파괴’라는 죄목으로 역전의 드라마를 어지간하면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구색을 갖추고 전복을 막기 위해, 개구멍 정도만 열어놓고선 ‘세상은 노력하면 이렇듯 살만해’하며 극소수를 받아들일 뿐이다. 선심 쓰는 척 한다.


<소림 축구>가 그런 약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법.
현실에선 뛰어 넘으려다 바지가랭이만 찢어질 일들을 태연자약하게 이뤄낸다. 판타지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 환멸을 참고 견디는 방법. 얼지 마, 죽지 마, 아마도 부활할 거야.


어쩌면 그것이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단한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마약과도 같은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왔었던 판타스틱한 축제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에겐 다시 축제가 열렸다. 신나게 외치며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자유.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으로 다시 편입된다. 축제도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뒤의 허망함을 우린 경험해야 한다. 하루둘 추스리며 생활속으로 편입된 사람살이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판 신명나는 잔치가 ‘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만 뇌리에 박힐 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소소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것. 혁명이든, 전복이든, 뭣보다 우리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에 따라 꿈을 꾸는 것. 그리하여,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어보는 것. 아마도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하며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려 할 것이다. 국운융성이니 국격 상승 등의 아리송한 수사를 써가면서. 국가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는 지도자분들의 근엄한 표정따위는 ‘헐리우드 표정연기’로 치부하라.


지금 필요한 건 뭐?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우리들만의 축제!

나는 그것이 '혁명'이었으면 좋겠다.
축제 같은 혁명.
좁은 뜻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그런 체제 전복적 혁명보다 더 넓은,
혹은 상상력이 가미된 진짜 일상의 혁명.
아, 그런 혁명이 어떤 것일지, 당신과 함께 상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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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많은 또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아니, 내가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주입된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무슨 꿈이 있는지.

대신 그들은,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얼만큼 오르고 떨어졌고, 누가 어떤 집을 샀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뭣보다, 아이들 얘기 빠지지 않는다. 자랑이든 아니든 하나 같이 전문가 나셨다. 특목고가 어떻고, 영어 유치원이 어떠하며, 이 땅의 교육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도 챙기신다. 오, 놀라워라. 더구나 자신의 격한 희생을 강조한다.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 토닥토닥.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철없음의 동의어다. 아이들, 놀게 하면서 자라게 하라, 고 할라치면, 결혼도 않은 철부지의 응석(!)으로 치부한다. 니가 뭘 아냐, 이거다. 가장 보통의 존재도 그때만큼은 가장 철부지로 위치이동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들도 가장 보통의 존재다. 지배세력이 조작하는 욕망에 많이 좌우되는.  

내가 아는, 지금의 많은 제도권 학교는, 격한 말로 ‘사육장’이다. 사람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을 들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이 구축한 세계에 어떻게 투항하는지 알려주고, 지배세력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의심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주입한다. 특히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친다. ‘경쟁 천국, 연대 지옥’.


경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틀 로얄>은 그 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경악할만한 상상력으로 피로 도배질한 학창시절의 풍경을 다룬다. 극단으로 몰고간 미래상이자,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른들이 구축한 악행의 뒤틀린 결과물이 토해놓은 난장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충격적이다.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 80만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 1,200명.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에 자신을 잃은 어른들은 위협을 느끼고 정부는 배틀 로얄(Battle Royale : BR)법이라는 무식한 법률을 제정한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법률은 전국을 통틀어 일년에 한 학급을 무작위로 선발, 무인도에서 3일동안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내용.

겁나게 살벌하다. 학살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강한 어른’을 만든다는 명분이다. ‘세상 = 정글’이란 방정식을 내놓고, 학생들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으로 내몬다. 학생들도 얼떨결에 이 수작에 휘말린다. 복불복이다. 여기, 수학여행길에 나섰다 얼떨결에 무인도로 끌려온 42명의 학생들이 황당한 현실에 직면한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 끔찍한 살인극의 무대에 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바이벌 게임의 아이콘으로 등장해야 하는 그들에게 친구는 없다. 친구는 곧, 장애물이다. 친구의 선택마저 조정하려는 지금의 많은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치도록, 아이들의 감정마저 조절하려는 어른들.



비정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독한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는 그들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다.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섬뜩한 영화 카피가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순간이다. 자, 죽일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하나다. 대체 뭐 이런 것이 있냐고 싶겠지만, 그것은 우리 현실에 이미 내재된 풍경이 아닐쏘냐.

그러니 이런 설정, 익숙하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를 폭력과 피가 뒤범벅된 판타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한 어른들은, 생존 역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서바이벌 게임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없애야 하는 게임.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 주어지는 ‘승자(Winner)’의 작위는 곧 생존에 따른 권리이자 선물. 승자 독식의 세상. 패배하는 자는 영원히 낙오되고 죽어야 하는 세상.


현실의 정글은 피나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경쟁사를 눌러야 우리 회사가 산다. 동료를 제쳐야 승진이 보장된다. 연대나 협력은 사치다. 모든 것은 승리와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체제다. 말이 좋아 ‘윈-윈’이지, 상생의 방법을 익히지도 습득하지도 못한 포악한 사회구조는 경쟁의 승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패자? 그들은 존재 가치도 없는 잉여일 뿐이다. 승자 독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사회, 너무도 흉악하고, 흉포하다.


더 꺼내볼까. 회사 생존을 볼모로, 무조건 돈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임을 내세우는 고용주, 사고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피고용인. 돈에 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많이 버는 것이 미덕이요, 최선의 가치다. 함께 사는 법? 되물을 것이다. 혼자 잘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함께 잘 살아? 관계 맺는 법을 모른 채, 경쟁자로 타인을 인식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비극

경쟁 체제는 이미 현대 사회의 습속이 됐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왜 우린 끝간데 없는 경쟁 구도에 편입된 채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까. 개발독재시대의 성장위주 사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지배세력에게 무한경쟁 구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다. 어차피 그들은 출발선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들과 다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권력과 지배력은 세습돼야 한다.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솎아내면 아랫것들은 불만이 없다. 그저 부모를 탓할 뿐. 


<배틀 로얄>은 물리적으로 더 가혹한 방법을 쓴다. 그것을 통해 생존의 법칙을 주입한다. 극중 선생(기타노 타케시)은 말한다. “모두 필사적으로 싸워라. 그래서 살아남는 자가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가치 있는 어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내 가치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만 가치가 정해줄 것이라는 어른들의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단다. 즉, 경쟁에서 이기란다. 친구를 죽여야 한단다.


<배틀 로얄>은 경쟁 체제를 극한의 폭력으로 포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 더욱 폭력적일 수 있음을.

학생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투입되자마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친구라고 부르던 이의 목을 화살로 꿰뚫고 낫과 도끼를 휘두르며 총을 쏘아댄다. 심지어 성숙한 육체를 살육을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여학생도 있다. 어른들이 행하는 패악을 그들은 그대로 따른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 학생들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죽어가던 한 소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난 단지 빼앗는 쪽에 서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서늘한 한마디.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생존을 체득한 소녀. 그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준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같은 비극에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만만치 않다. 살인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을 듣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열 다섯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시 70대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살인의 현장을 담담하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개한다. 사실적인 폭력 묘사는 섬뜩함과 동시에 그 비극의 기원을 되짚어보게끔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인이 된, 후카사쿠 감독이 <배틀 로얄>을 통해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게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슈야와 노리꼬. 그들은 ‘실패한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Run’이란 말을 건넨다.

영화의 질문은 그랬다.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고 더불어 사는 친구의 존재를 지우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세상은 다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 그것을 희망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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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서사의 힘은 의외로 세다.
아마, 로맨스와 그 합을 겨뤄본다면, 로맨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족이 맺는 정서적 관계 등 가족간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히나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천륜(天倫)이란 인식도 작용할테고, 부성애(父性愛)․모성애(母性愛)에 대한 신화가 강건하게 구축된 영향도 있을 테다. 당장 당신이 본 영화만 떠올려 봐라. 부모와 자식 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 꽤나 있을 거다.

내 메신저에 등재된 사람들의 닉네임만 봐도, 이 가족 서사는 일상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곧 아빠가 된다고 대문짝하게 걸어놓은 지인, 낳은 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지인, 아이들 이름을 나열해 놓은 지인 등등. 솔직히 그걸 보면 저리도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아버지(어머니)가 된다는 것.
‘새가 자유롭다는 건 날지 못하는 자의 편견’이라는 말마따나,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자에겐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그런 명제가 아니다. 여태 자식의 삶만 꾸려온, 내리사랑의 수혜만 받던 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종족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내가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겠지만. ^^;

 ‘아이 낳기’를 시대적 사명으로, 국민의 의무로 강요(?)하는 지금 이 시대. 결혼도 못한 노총각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국가시책이 된 ‘아이 낳기’에 대해 많이 회의하지만, ‘자식이 태어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찬양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강보에 쌓인 핏줄을 향한 애틋한 심정은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이기보다 본능에 가까우리란 생각은 든다. 그 본능이 DNA유전자의 종족번식 염기서열에 의해 작동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고기 부자는 어떤가.
픽사의 <니모를 찾아서>를 따라가 봤다. 이 영화,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들 찾아 삼만리를 떠난 아빠의 성장사다. 불의의 사고를 아내를 잃은 홀아비 물고기 말린. 지나치게 소심하고 대양(Big Blue Sea)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심쟁이 아버지다. 니모는 그런 말린의 유일한 혈육. 그러다 보니, 말린이 인간 세상만큼이나 험한 바다 속 생존게임의 장에서 니모를 과잉 보호하면서 울타리를 쳐두는 건 일견, 이해도 된다.

말린이 니모에게 하는 호언장담. “아빠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줄게.” 오호,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그 마음, 부성애. 당연히 진심이겠지만, 공허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생각해보라. 세상은 아무 일없이 자란 아이에게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에서 의당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가장 보통의 아버지인 말린이 무슨 재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준다는 말린의 말은, 허풍일 뿐더러 아이를 망치는 길처럼 들린다.

아니나다를까!
유일한 혈육을 품안에서만 키우다 학교에 보내놓고선 말린은 안심을 못한다. 니모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아이 말은 그냥 무시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결코 부모의 마음대로만 자라진 않는다. 호기심 충만하고 파파보이 소리를 듣기 싫은 니모. 아빠 말을 뿌리치고 세상을 유영한다. 물론 좋지 않은 일, 생길 수 있다. 니모는 열대어를 수집하는 스쿠버 다이버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젠 <니모를 찾아서>가 본격 펼쳐진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찾기 위한 아빠의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뛰는 모험담. 소심한 새가슴 말린이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상, 그 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양 속으로 들어가 ‘아들 찾기’의 깃발을 높이 든다. 짜잔~ 이럴 때 으레 등장하는 동반자.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주위 산만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읽는 도리가 이 험한 여정에 동참한다. 말린과 도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인간까지 넘어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상은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소심한 물고기였던 말린. 세상을 몰랐던 말린. 장애물도 많고 굴곡도 많은 아들 찾기는 한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우물 안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빛깔을 본다. 바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하나둘 지혜를 터득하고 깨우침을 얻는다. 대양(세상)의 광활함 속에서 다양한 개체들과의 조우하면서, 니모의 마음에 한걸음 한걸음씩 접근한다.

니모와 함께 있을 땐 안온한 공간이었는데, 떨어져 있는 동안 바다의 다른 모습도 봤다. 아니 그렇게 바다가 거대한 벽으로 작용할 줄도 몰랐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다의 모습조차 몰랐던 게다. 숱한 위험이 닥치지만, 이런 장애물들이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린의 의지를 막을 순 없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의 재회는 디즈니 월드의 전제이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바뀐다.
재회의 순간, 말린은 니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의 말이 옳았어.” 겁쟁이로, 우물 안에 갇혀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거다. 아이라고 어른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때론 어른을 일깨우는 것도 아이다. <니모를 찾아서>는 그렇게도 말한다. 아빠(엄마)의 세상을 그대로 주입하고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능력을 믿으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행여나 일이 생길까 손만 꼬옥 잡고 있기보단 그 손을 놓는 순간 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빠(엄마)의 성장통도 때론 아이와 함께 자란다. 니모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린이 대양을 누비고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왔을까. 애 키우는 기쁨은 아마도 그렇게 세상을 넓히는 경험에서도 비롯되겠지. 이 영화의 감독, 스탠튼은 다섯 살배기 아들을 공원에 데려갔다가 내내 잔소리만 하는 자신을 보고 문득 이런 가슴 속 소리를 들었단다. “넌 아들과 지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그 후 그는, 겁이 많으면 좋은 아빠가 되기 힘들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니모를 찾아서>를 구상한 계기가 됐다.

그러면 ‘아이 없는 삶’은 어떤가.
아이 없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이른바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이나 결혼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둘이서 살아가는 것(<네 번째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주인공들은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다!)도 하나의 선택이자 가치다. 결혼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폭력이다.

나는 가능하면, 결혼한 사람을 만나도 아이 여부를 묻지 않는다. 본인이 먼저 말하면 모를까,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 ‘아이 중심’이다. 나는 그게 불만이다. 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로 찍힐 정도로 이 땅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절대선이자 완고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선택, 즉 ‘아이 낳기’가 선택일 수 있는,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

한편으로 거북하다.
후세를 위해 존재한다거나 핏줄을 잇기 위해 애를 낳는 일. 무엇보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나, 아이가 아닌 부부(혹은 동반자)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는 일도 꽤나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고? 종족 번식? 조까라 마이싱이다. 언제 그렇게 종족과 인류를 생각해 왔다고 그러나. 웃기는 짬뽕들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쨌든 아빠(엄마), 그리고 아이. 그 천륜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끝이 없을 거다. 이 영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가 뼈대인데, 말린과 함께 다니던 도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자식 없이 사는 삶에서 친구를 만나 대양을 누빈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도리와 같은 독특한 캐릭터라면 충분히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어때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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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 남자. 이소룡이라는 신화 혹은 전설의 모태라니, 이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엽문1>은 그래서 봤다. 이소룡이라는 신화의 원천에 있는 무술(무예)을 전수한 사람. 그것은 이소룡(이라는 세계)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창이 될 것이고, 이소룡과 별개로 엽문이라는 어떤 세계에 대한 입문일 수도 있겠다. 더구나 이름을 직접 딴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면, 장삼이사로선 그가 구축한 세계가 궁금도 할 터.  

<엽문2>는 <엽문1>의 결을 그대로 따른다. 말인즉슨, 좋게 말해서 내부 단결용 영화, 내 식대로 까발리자면, 중화민족주의 프로파간다(선동) 영화다. 1편이 반일감정을 부추겼다면, 2편은 좀 더 넓어졌다. 반서구다. '양코(극중에서 그렇게 부른다) 고홈'.

아, 오해말자. 당시 시대가 시대니만큼 반일이나 반서구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걸 드러내는 방식이, 만듦새가 촌스럽다는 거다. 너무 직설적이다. 극 중의 서양인들은 아예 이마에 두르고 나온다. '서양은 악'. 생긴 것부터 어쩜 그리 악질적으로 생긴 놈들만 캐스팅을 했는지. 부러 표정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더욱 헐겁다. '나, 악당이요'하고 대놓고 내세우는 꼴은 선악 구분에 혼동될 관객을 위해서였드냐.


내용이라고 다르지 않다. 때는 바야흐로 1950년대. 극 초반 중국을 떠나 홍콩에 정착하고자 온 엽문(견자단)은 생계 때문에 도장을 차린다. 파리만 날리다,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돌(잘 생겼다!) 하나 받아들이면서 제자가 하나둘 늘어나나, 여기라고 텃세가 없는 게 아니다. 협회 비스무리한 것이 있어서, 용 나는 꼴 못 봐준다. 각 파의 사범과 겨뤄 실력도 인정 받아야 하고, 돈(협회비)까지 내란다.

엽문의 무예야, 말해야 똥구멍만 간지럽고. 돈은 외세로부터 지켜주는 비용이래나 뭐래나. 영화만 본 바로선, 홍콩의 무술협회장격인 홍진남(홍금보)는, 외세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양다리 내부 결속자로 파악된다. 뭐 홍진남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애비라고 영화는 슬쩍 비춰주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그림이다. 물론 이것이 엽문의 훌륭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들과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청렴결백 꼿꼿무예인 엽문이다. 갈등이 불거지지만 그는 깨방정 떨지 않는다. 중재하고 화해하고자 애를 쓴다. 영춘권이 중용의 무예라고 하더니, 고수 답다. 그의 무예는 예의가 있으며 개념이 있다. 멋지다. 더구나 실제 무예고수인 견자단이 만든 엽문의 몸놀림은 캬~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멋지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외세(서양)의 본격적인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국면 전환. 아니, 그 내부 갈등을 통해 흥미진진한 무언가가 도출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건 뭔가요~ 털이 복슬복슬도 아니요, 수북하게 쌓인 짐승 권투챔피언 트위스터와 비리 양코 경찰서장이 험악한 인상을 들이밀면서 영화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파르게 급전직하 한다.

영국의 위대함을 권투로 보여주려는 무식한 식민주의자들이 미개한(?) 피식민지인들의 무술에 시비를 건다. 문제는, 서양인들의 무식함을 너무 무식하게 드러냈달까. 또 중국 무술인들이 민족적 자존심, 무예인의 긍지 등을 내세우는데, 앞서 자기네들끼리 보여준 찌질함을 생각하자면, 놀고 있다. 깨방정 와르르르르.


더 이상은 굳이 얘기 안 해도, 안 봐도 비디오 되겠다. 티격태격하던 중국 무예인들은 하나로 뭉친다. 외부의 적 앞에 내부가 본의 아니게 하나되는 그 흔하디 흔한 경우. 홍진남이 먼저 나서서 KO 되고, 언제부터 홍진남을 진정한 무예인으로 인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엽문이 비장하게 영국에, 트위스터에 도전한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 엽문의 대역전극. 정해진 수순이다. 그들의 손발 오그라드는 반서구 중화민족주의가 아주 극강의 게이지를 친다.

물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실제 엽문은 훌륭한 무예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항일투쟁도 하고, 서구의 억압에 저항한 인물이 아닐까도 싶다.
당대 존경 받았고, 존경 받아 마땅한 스승이자 선대. 그러나 영화에서 그는, 그저 도구다. 아마 중국내 몰지각한 막장 개발과 천민 자본주의의 창궐로 내부 갈등 게이지가 높아지니, 이런 프로파간다를 통해 중화민족주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가? 이건 아니잖아~ 엽문만 불쌍해. 엇비슷한 내용을 담았지만, 만듦새가 훨씬 좋았던 <황비홍>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엽문은 그러니까,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없을 남자다. 영화는, 그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 '팍스 차이나'겠지만. 그 대망이 자꾸 위험해 뵌다. 영화도 찌질해지고.

그나마, 영화의 마지막이 가장 좋았던 이유. 이소룡이 마침내 등장했다. 13살의 꼬마 이소룡이 등장해, 은근히 <엽문3>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 이소룡 특유의 액션을 보여주면서 은근슬쩍 후속작을 흘리는 센스!

2010년은 야뵤오오~ 이소룡(1940.11.27~1973.7.20)의 탄생 70주년이다. 덩달아 엽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엽문3> 곧 나오는 것이냐. 다른 엽문도 만들어지고 있단다. 홍금보, 원표 등이 나와 엽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엽문전전>이 있고, 특히, 왕가위 감독. 장삼이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아파트 광고에 더이상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주신 우리의 현명한 여신 송혜교와 양조위가 주연을 맡아 엽문의 일대기를 재조명했다는 <일대종사>. 나는 왕가위니까, 송혜교니까, 무조건 기대! 아무렴, 왕가위가 '팍스 차이나' 깃발을 들 리는 없잖아!

뱀발.
엽문의 아내로 나왔던, 웅대림.
웅, 예뻐라~

나도 나의 알흠다운 아내가
웅대림 정도면, 엽문이 될 수 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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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월드컵을 즐기지 않아. 돈 잔치라거나 축구공에 담긴 불편한 진실 혹은 한 방송사의 독점 횡포 등과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라규! 축구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는 것, 알아. 팽팽한 근육끼리의 충돌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몸의 향연! 그것이 왜 싫겠느냐마는, 한국팀 경기는 왠지 좀 불편해. 때론 끔찍해. 그 한 목소리 때문이야. 대~한민국. 일사불란함을 유도하는 그 함성,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것 같애. 그곳에 개인은 없지. 오로지 군집만, 무리만. 대~한국인들만.


맞아. 지금은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월드컵 시즌. 슬슬 달아오르고 있네. 곧 후끈해지겠지. 어딜 가나 월드컵이 덤벼. 싫건 좋건, 이벤트를 비롯해 각종 광고를 맞닥뜨려야 하고, 어딜가도 화제로 꺼내지. 그러고 보면, 월드컵은 일견 우리 사회를 멈추게 하는 마취제 같지 않아? 어떤 사유도 허락되질 않지. 다른 목소리와 다른 이슈도 납작 엎드리지. 아무리 소리쳐도 삐져나올 구석은 없어. 감히 월드컵 앞에. 으르렁. 물론 나라고 과거가 없었겠니. 나도 한 때는 그 한 목소리에 파묻혀 지랄발광했더란다.



때가 때이니만큼 지금 다시 사람들이 월드컵을 화제로 꺼내. 별 관심 없다고 답하면, 허허, 완전 의외라는 눈초리 찌리릿! 별종 취급을 당하지. 약간 과장하자면. 어디 외계에서 왔니? 감히 월드컵을, 대~한민국을 외치는 않는다고? 넌 우리와 같은 족속이 아니구나. 월드컵을 앞둔 한국인의 방침에 어떻게 따르지 않니. 똑같은 생각만 하라는 무의식적 강요. 그러니까, 어느 편인지 답해야만 하는 구조. 다른 생각이라고? 넌 ‘틀린’ 놈이다. 나가 죽어라. 흑.


맞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저 함께 즐기자는데, 뭘 그리 까칠하게, 까탈스럽게 구냐, 응? 음, 그러고 보면, 그것도 맞아. 즐기지 못하는 놈이 바보지, 뭐. 전체가 원하는데,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그런데, 그게 좀 무서워. 거칠게 말해,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든. 오버지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무의식의 유령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도 했더란다. 나, 아마 월드컵에 대해 삐딱한 생각, 불온한 생각 한다고, 끌려가지 않을까. 국가적인 시책에 동조 안 하니까. 한국인 아닌 거야, 그런 거야? 


그래, 나는 이미 ‘틀린’ 몸. 그냥 포기할래. 응원하고 싶어도, 즐기고 싶어도, 그 한 목소리가 여전히 무서워. 앞서 우리를 들끓게 했던 천안함, 교원노조 명단 공개, 지방선거 등에서도 사회 일각에서는 ‘니가 어느 편인지 커밍아웃해’라고 깨방정을 떨더라. 지들 높은 양반들 생각과 다르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며 윽박이나 지르고 말이지. 나, 한국인이긴 한데, 월드컵 때 꼭 한 목소리 내야 하는 거야? 어느 팀인지 꼭 밝혀야 되는 거야? 다른 팀 응원하면 안 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드래곤 길들이기>가 기가 막혀~


그런 찰나에 만난 이 영화, 짜잔. <드래곤 길들이기>. 결론부터 말할게. 나, 위로 받았어. 바이킹과 용(드래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빚어낸 앙상블이 와우, 완전 죽여. 아니, 정확하게는 용맹한 바이킹의 못난(?) 자손, ‘히컵’이 드래곤을 통해 바이킹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완전 감동이었어. 한편으로 꼭 지금의 우리네 풍경을 풍자하는 것 같아서 감탄도 했다규. 저 멀리 할리우드(드림웍스)에서 만들었는데, 어쩜 우리네 모습을 대입해도 저리 어색하지 않을까. 신기신기~



아니, 뭘 어떻게 봤길래, 그리 호들갑 떨고 있냐고. 좋아 좋아, 한 번 들어봐. 호들갑 한 번 신나게 떨어볼게.


이 영화가 실재 바이킹(족)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긴 그건 상관이 없겠다. 여기 버크섬에 살고 있는, 내가 본 바이킹만 놓고 말하자규. 이 바이킹의 모토는 ‘용맹’. 그 옛날, 반공을 국시로 했던 대한민국마냥, 버크섬에서 용맹은 족시야. 그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 드래곤과 싸워서 이겨야 해, 죽여야 해.


포악하고 사나운, 하늘을 날고 입에서는 불을 뿜어대는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말이야. 바이킹이 되려면, 즉 바이킹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드래곤을 포획하고 죽이는 ‘사명’을 품고 전사로 살아야한다는 거지. 그 옛날, 간첩이라면 곧장 신고하고 북한이라면 쳐 죽여야 할 주적으로 간주해야 대한민국의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바이킹의 방침, 대한민국의 방침(아 물론 정확하게는 권력자의 방침).


어린 바이킹들, 어른들로부터 주입된 그 방침, ‘받들어 총’이야. 전사가 되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씩씩대더군. 진짜 바이킹이 돼야 한다는 미명 하에, "드래곤과 싸우는 것 그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명제를 고스란히 주입받는 아이들. 예쁜 미소녀 바이킹, 아스트리드도 거침 없이 말해. "바이킹이라면 용을 마땅히 죽여야 해." 무셔워, 무셔~



문제는 이것. 일생을 바쳐 용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데. 가공할 공격력과 습격을 일삼는다는 용들 때문에 만나는 즉시 죽여야하는 규율이라는데. 사실, '왜'인지는 모르겠다는 거. 드래곤을 불안해하고 보면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왜 드래곤과 주야장천 싸워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만나면 죽여야 한다는 것도 대대로 내려온 한 목소리일 뿐.


그런데 ‘히컵’은 여기서, 좀 별종이야. 사실 참 어렵게 살지. 왜냐고? 아버지가 바이킹 족장이거든. 허나, 히컵은 아버지의 풍채와 호기를 물려받질 못했다네~ 근육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치기만 잔뜩 가진 허약체질 어린이. "위대한 바이킹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라면서 용은 쓰는데, 사고만 치지. 바이킹 사회가 요구하는 전사의 조건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발버둥은 치나, 마음만 앞서지, 몸은 영... 드래곤 훈련도 받아보지만, 적성에도 안 맞고, 전사 기질도 없음을 확인할 뿐이야. 위대한 바이킹 전사의 아들로서 가지는 스트레스, 오죽했겠어.


녀석은 아버지에게 말도 해보지. “빵 굽는 바이킹도 있어야 하고, 하수구를 뚫는 바이킹도 있어야 하잖아요.” 드래곤 잡는 ‘전사’ 바이킹만 있어야 하는 법은 아니라고욧! 전사가 되지 못하는 녀석의 변명 같지만, 아 난 그만, 그 말이심장에 콱! 나도 외치고 싶었다규. 꼭 붉은 악마가 돼야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한 번만 더 되씹어봐. 대한민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잖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이 세상에 말이야. 17등 하는 한국인, 36등 하는 한국인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기자 말고그냥 다른 사람 커피 만들어주는 사람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어쨌든 그런 히컵. 말하자면, 버크섬 바이킹 사회의 루저. 어떻게든 인정투쟁도 해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해. 칼 찌르고 도끼 휘두르는 건 젬병인걸. 그랬던 그가 부상당한 드래곤, 특히 바이킹의 드래곤 교본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신비함과 두려움의 존재인 나이트 퓨어리, ‘투쓰리스(toothless)’와 만나는 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우연한 시발점이더라.


녀석은 부상당한 투쓰리스를 죽이지 못하는데. 우연하게도 바이킹 역사의 한획까지 긋게 되지. 짜잔~ 300년 만에 처음으로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는 바이킹의 탄생!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어린 그리고 완전 새로운 바이킹. 바이킹의 방침에 어긋나는 뉴 바이킹의 탄생. 브라보~ 신인류여.


히컵과 투쓰리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지. 한쪽을 죽여야 사는 줄 알았는데, 어라 그게 아니네~ 서로 알지 못했던 존재들이, 각자의 취향도 알게 되고, 조금씩 자신을 보이면서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 참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어떤 현실의 풍경이 떠올라 짭쪼름하더라. 아예 등 돌린 채, 이전보다 더욱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남조선과 북조선. 오해를 거두니까, 서로를 알게 되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히컵과 투쓰리스는 보여주더라, 이 말씀.



우리에게도 히컵이 필요해

딱 나오더라. 날 때부터 바이킹의 DNA에 박혀 있던 것으로 알았던 ‘드래곤 죽이기’는 ‘바이킹 길들이기’의 과정에서 심어 놓은 사육의 결과! 사실 바이킹 꼰대들도 몰라. 자신들이 드래곤을 진짜로 알고 있는지. 그저 자랄 때부터 싸워서 죽이라는 것만 배웠고, '왜'라고 묻지도 않았으며, 드래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거야. 드래곤을 오해하고 있으니 만나면 죽여야하고 두려워했던 거지. 자신의 아이들에게 알려준 정보도 그렇게 갇힐 수 밖에 없는 정보일 뿐. '적'이라고 하면서 진짜 그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야. 


히컵은 분명 다른 존재야. 바이킹이면서 전혀 바이킹스럽지 않은. 그들 사회에서도 혀를 끌끌 차게 만들던 존재였지만, 그의 진짜 재능과 능력은 다른 곳에 있었던 거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어른 바이킹들은 그야말로, 아둔한 꼰대들. 죽여야 할 드래곤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드래곤임을 알아챈 히컵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바이킹이었던 거야. 적을 대하는 자세부터 어른 바이킹과 다른. 드래곤의 생태를 알게 되면서 오해를 풀고 두려움까지 거세하고 종국엔 함께 공존하는 기틀을 다지는. 멋지다, 히컵~ 한 목소리에 풍덩 빠지지 않았다는 것도. ^.^



어른 바이킹들은 왜 드래곤이 자신들에게 포악하고 사나운지,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거기서 반짝! 다른 타인을 배척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모습과도 오버랩. 누구 편인지 물어보고, 내 편인지, 남의 편이지 갈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상대를 무력으로 무너뜨려야 제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적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고 죽이는 것이 만사지탄이라고 여겼던 가치. 뭔가 떠오르지 않아? 해석이 약간 지나칠지 몰라도, 대한민국을 헤집고 떠돌아다닌 그 유령. 아직도 잔재가 남아 심심찮게 떠돌아다니기도 하는 유령.


“너희들에 관해 우린 전부 틀렸어.”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드래곤을 제압했던 히컵의 유레카(바로 이거야)! 어쩌면 우리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타인을 이해는커녕 인정하려는 노력도 않고, 우리가 틀린 것도 모른 채, 관행처럼 관성처럼 과거의 맹목에 끌려 다닌 것은 아녔을까.우린 제대로 저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지, 우리에게도 히컵이 필요해. 사회가 요구한 것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난 얼마 전, 쥐소굴에서 흘러나온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어.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할 생각이 없다.” 세상에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지금의 통치자 입에서 나올 소리야? 전쟁이 어떤 것인지 뜨겁게 데여본 나라의 통치자가 전쟁이 두렵지 않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쟁을 해야 유지되는 나라니? 대한민국 누구보다 샤우팅을 사랑하는 동혁이 형아~ 좀 혼내주쇼잉~


꼰대 바이킹들과 똑같은 소릴 해대는 저들은 아직 드래곤을 제대로 몰라. 그저 학습된 잘못된 정보에 의해 조건반사처럼 움직일 뿐. 꼰대 바이킹들도 나중에 히컵에게 사과하던데, 글쎄, 선거결과를 놓고 저들은 제대로 사과할까? 2년 전 반성한다고 했던 것을 하루아침에 반성의 주체를 뒤집었던 쥐새끼는 또 어떤 변덕을 부릴까. 저어기 파란 쥐들이 이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어. 물론 본다고 이해할까마는. 당최 불안한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아서 그걸 사전에 잡아족치려고 삽질부터 하고 보던 현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에게도 권함. 우린, 드래곤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러니. <드래곤 길들이기> 보고 정신 쫌 차려, 응!!!

(아 근데, 이런 불온한 애니를 국내에서 개봉하게 하다니, 쥐세이 니들 참 아무 생각이 없었구나, 그치? -.-;)



아, 그리고 진정 이 이야긴 네게 꼭 해야겠어. <드래곤 길들이기>의 활공 장면! 히컵이 부상당한 투슬리스의 비행을 돕는 기구를 만들어 부착해 주면서 시작한 비행은, 암석 사이를 투과하는 곡예 비행을 거쳐, 아스트리드를 태우고 활공할 즈음이면 그건 짜릿함의 극치야. 롤러코스터를 타고 하늘과 바다를 오가는 쾌속의 쾌감이었달까.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짜릿했었어. 그런 비상 쾌감. 그리고 석양이 비춰올라치면 그건 거의 극점에 가까운 아름다움. ^_______^ 


아, 나도 드래곤이랑 함께 살고 싶어. 그의 등에 올라타 그 짜릿한 비상 쾌감을 느끼고 싶어. 물론 여자친구도 태워야지. 앙, 드래곤 드래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니. 몰랐다~얘~~ 정말, 드래곤과 함께 살고 싶어질지 꿈에도 몰랐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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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인권영화제!
올해도 인권영화제가 피어난다. ^.^

올해 15주년, 거리 상영 3년째.

행여 열리지 못할까 불안감을 품어야하는 현실이,
참으로 비상식적이고 졸렬한 지금의 시대를 방증하는 것이지만,
그 모든 고난과 난관을 고스란히 품고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 또한 작은 축복이자 기적이 아닐까.

어떤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개인들의 푼돈이 모여 거리에서 우리들과 만난다.
뭣보다 무료라는 것!

굳이 인권에 방점을 찍지 않아도 좋다.
영화 한 편 본다고 생각하자.
우리 행여나 마주치면 반갑게 눈인사라도 나누자. ^.~

메일을 통해 인권영화제는 이렇게 말을 건넨다.

"표현의 자유를 향해 떠나는 거리 개막의 설렘을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모두,
오늘 마로니에 공원으로 와주세요!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그래, 당신이, 내가 화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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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의 과거 인기코너였던 '분장실의 강선생님'. 이 코너는 때론 지금-여기를 '독하게' 풍자했다. 액면에서 드러난 선후배 사이의 관계뿐 아니었다. 사실 '관습법'에 의해 지배당하는 선후배 관계는, 단순하다. 서열과 (위계)질서. 선배-동생인 안영미가 후배-언니(김경아, 정경미)들을 다그칠 수 있는 기제이다. 그리고 안영미는 강유미에게 절대 복종한다. 온갖 알랑방귀를 다 뀌면서. 대한민국에서 서식한, 제도권 교육(이라고 읽고, 사육이라 말한다)을 습득한 사람은, 특히 남자라면, 사무치게 느껴봤음직한 기시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기시감을 포획한다. 지금 이 엄혹한 시대를 뒤덮고 있는 공포와 좌절이다. 다시 말하자면, '분장실의 강선생님'은 실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메타포(은유)를 품고 있다(고 나는 봤다).


우선 그들의 분장은 하나같이 독하다. 웃기지 않으면, 즉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그들은 퇴출이다. 잘린다. 아웃이다. 많은 이들은 그 분장에서부터 '빵' 웃음부터 터뜨리지만, 그 분장에서 나는 절박함을 본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묻어난다. 성과를, 효율성을,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구조조정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실직의 공포. 개그우먼인 그들의 분장이 독한 것은, 어쩌면 그런 시대의 엄혹함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안영미는 말한다. "똑바로 해, 이거뜨라(이것들아)." "우리 땐 안 그랬어, 이거뜨라." "미친 거 아냐?" 후배-언니들은 쩔쩔 맨다. 선배-동생의 일 제대로 하라는 다그침이 아니꼬우면서도 무섭다. 그것이 합리적이라면 상관없지만, 이 '어린 것'은 일단 다그치면서 자신의 권위를 강요할 뿐, 알맹이라곤 없다.

자, 그런 안영미를 보자. 경기 안 좋다고, 세상 어렵다고, 고통 분담하면서 일만 하라고 다그치는 회사와 그리 다른가? 조직의 권위와 유보금 쌓기가 우선인 그들(회사)이 칼자루를 쥐고 있기에, 우리는 쩔쩔 맬 수밖에 없다.
화폐의 시대, 일하지 말라는 곧, 죽음에 가깝다.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님에도. 화폐는 생존여탈권을 쥔 것으로 간주된다.

강유미도 말한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말은 좋다정작 그는 후배-언니들의 고충을 모른다. 알려고도 않고, 안영미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 그의 분장은 늘 무겁다. 최고 선배,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도 한 방송분에선 비정규직의 비애를 보여줬다. 안영미가 아닌 다른 누군가, 골룸 분장을 하자는 PD의 요청이 있었단다. 후배-언니들의 연기가 신통치 않자, 그대로 안영미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잘못 들었다. PD는 골룸 분장을 강유미가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 거다. 당장 강유미는 골룸 흉내를 낸다. 비정규직은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PD(회사)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실직이 뇌관을 건드린 가족공포


아, 미안. 서론이 길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쿄 소나타>는 실직, 그것도 가장인 아버지의 실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름 좋은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사사키(가가와 데루유키)는 허울 좋은 세계화의 희생양이다. 회사는 뻔한 말을 건넨다. "회사를 위해 충분히 해 준 것은 알지만, 사사키씨가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가요." 나가란 얘기다. 너, 아웃. 그렇지, 깜빡했다. 지금-여기의 자본주의는, 성실하게 일한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지~ 화폐에 노예처럼 복무하는 곳에선 어딜가나 마찬가지~

물론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비밀. 서무업무를 오래해서 인간관계 좋음이 유일한 내세울 거리지만, 집안에서 그는 허울뿐인 권위로만 유지되는 시체(?)다. 그는 아내는 물론, 자식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직업소개소를 전전하고 노숙자 배급소에서 끼니를 해결하지만, 아무 일자리에서나 일할 생각은 없다. 회사의 후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개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실 이 '도쿄 가족'('서울 가족'이라고 바꿔도 무방하지 않을까!)의 누수는 그것만이 아니다. 어머니 메구미(고이즈미 교코)를 보자. 그녀는 늘 외롭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다손, 그들이 메구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손 내밀어 "날 좀 일으켜줘"라고 말해보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도 손길도 뻗치질 않는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상이 시큰둥한 큰 아들 다카시(고야나기 유우). 그는 갑작스레 미군에 지원한다. 이유? 어쨌든 명분은 있다. "일본을 지켜주는 건, 오로지 미국이다." 진짜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정치적 진공상태의 젊은 세대. 아마도 그는 영미식 신자유주의가 주입한 정치적 쾌거(!)의 산물이 아닐까.

역시나 기댈 곳 없고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과 어긋난다고만 느끼는 막내 켄지(이노와키 가이)가 있다. 이 아이, 피아노에 갑자기 홀리고 몰래 배운다. 어쩌면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가족은 과장하자면,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나씩 거짓말을 품고 억지로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탱하는 그들. 신경쇠약 혹은 침몰 일보 직전의 가족이다. 이 살풍경, 어쩐지 낯설지 않다. '외환위기'라는 이름의 IMF체제에 이어 맞닥뜨린 불황의 시대. 자본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고 지탱된 가족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다시 내쳐진 신세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실직 가장인 아버지는 외친다. "뭐든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왜 우릴 받아주지 않지?" 미군은 꿈도 꾸지 말고 일본에 있으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아들은 되묻는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죠?" 어머니는 집에서 청소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복면 쓴 강도를 맞닥뜨린다.

이 가족에게 자존이나 실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그들은 일상의 공포에 짓눌려 있다. 싫든 좋든, 현실이라는 복면을 쓰고 그들을 옥죄는 자본의 테두리에서, 그들은 단지 그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가족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거짓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가 "나와 함께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게요"라고 속삭인다면, 그들은 냉큼 따라 나설 것이다. 실제로 메구미는 그렇게 한다. 강도의 인질로 끌려 나왔다가 자발적으로 그를 따른다. 황망하지만, 이건 그들이 살고 있는 감옥을 보여주는 증명이자 바로미터다.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각자 큰 사건사고를 겪은 사사키와 메구미는 절규한다. "이게 아니야!" 그건 자신의 삶을 향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시대를 향한 울부짖음이다. 어떤 혐오나 환멸을 거쳤다손, "시대나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온전하게 거짓이다. 개인이나 가족이 시대나 정치에 격리돼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요, 착각이다. 자신이 가족을 지킨다고 큰 소리 뻥뻥치는 사사키지만,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아들이 묻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세계와 세계는 직간접적으로 잇닿아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도쿄 가족은 일본 뿐 아니라, 현대, 그리고 우리사회와도 공명할 여지를 갖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구로사와가 직조한 파국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난다. 쇼핑몰 청소부로 일하면서 아내를 맞닥뜨린 사사키의 자동차 사고도,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며 바닷가로 향하는 메구미의 일탈도, 가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켄지의 철장행도. 모두가 한꺼번에 집을 비웠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정신적 공백을 드러내는 은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집안에 모여 밥을 함께 먹는다. 판타지 같은 느낌을 주는 장면이 이어진다. 나는 아직 그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던 켄지는 음악중학교 입학 오디션을 본다. 드뷔시의 <월광>(Clair De Lune)을 신들린 듯 연주하는데, 사사키는 아들의 연주에 눈물을 글썽인다. 꿈결 같은 연주가 끝나고 가족들은 함께 일어나 퇴장한다. 미군으로 중동에 파견됐던 다카시도 예전에 미국을 잘못 알았다며, 이제는 침공당한 그들(중동)의 아픔을 알고 싶다며 그곳에 남아있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사사키는 한껏 핀 얼굴로 쇼핑몰 청소를 한다.

켄지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그들의 불협화음은 과연 봉합이 된 것일까. 모르겠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세상과의 관계를 부정한 채 가족 안에서만 맴돌았던 그들의 세계가 넓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해결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물론 그 시도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들은 분명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니까. 분명하게도, 삶은 어떻게든 지속될 것이니까. 

"왜 피아노를 배우면 안돼요?"라고 물었던 켄지의 질문을 무시했던 사사키였지만, 이제는 그도 왜 켄지가 피아노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다. <도쿄 소나타>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의 변화를 갈구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바람이 담긴 영화다. 우리는, 세계는, 분명 변화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고 싶다고? 그건 군대나 자본, 그러니까 탐욕의 체제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직 그 답은 모르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고민하게끔 만든다. 그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미안하다. 한마디만 더 하자. 이 가족잔혹사 혹은 가족변천사를 가정의 달, 5월, 특히 21일, '부부의 날'에 긁적이는 건, 짓궂은 짓이겠다. 이 좋아야 할 날, 실직과 가족간 공허를 들먹이다니. 이해하시라. 시큼털털한 노총각이 설움(?)에 겨워 괜한 딴죽을 건다고 치부하시라. 그런데, 마지막으로 딴죽 더 걸자면, 이 부부의 날, 그 의미 한 번 시대착오적이다. 둘(2)이 하나(1)가 돼서 21일이라니.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를 말하고자 함인가 본데, 개뿔.

이 감언이설, 참 많은 사람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유배시켰다. 결혼생활은 으레 그래야한다고 강요하면서. 봐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된다는 것. 가능하던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가? 환상이요, 거짓이다.

그러니까, 이심이체(二心二體)가 맞다. 각자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이견을 허용하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가장 최소한의 것이다. 또한 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일심동체랍시고,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에 맞추거나 내가 상대방에게 끼워맞춰야한다는 것, 건강하지 않다. 불건전한 타협보다 건강한 갈등이 나은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니, 차라리 (5월)22일로 바꿔라. 두 사람 각자가 스스로 개별성을 갖고 움직이면서 연대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도쿄 소나타>의 부부, 사사키와 메구미는 그것을 못했다.

혹여나, 부부가 되더라도, 나는 일심동체 않겠다. 내 이렇게 선언(?)했으니, 기억해주시게. 당신이 곧, 증인이다. 다만, 나는 '남(의)편'이 아닌, '네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장담하냐고? 에이, 결혼 생활은, 부부는, 장담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당신에게 들려주고픈 오늘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 또,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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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것부터 말해야겠다. 나는 어떤 종교(에 대한 믿음)도 갖지 않은, 비종교인이다. 어떤 종교활동도 않는단 뜻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어떤 종교든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선 거의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힌 책이라면, 성경(Bible) 되시겠다. 관련 종교의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도 성경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의 삶 또한 정말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김규항 선생님의 《예수전》을 읽고선 그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니까, 성경이나 예수는 종교적 가치를 넘어 인류적 가치로서 더욱 빛나는 무엇이다.

그런 성경을 둘러싼 묵시록적인 세계를 그린 <일라이>. 주연을 보자. 덴젤 워싱턴이다. 게리 올드만이다. 그 호명만으로도 관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이름들. 100%야, 너무 비인간적인 수치겠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이름값을 하는 영화라고 선택해도 무방할 정도는 되겠다. '콩 심은데 팥났다'고 해도, 덴젤 워싱턴이라는 이름이 경작자로 올라가 있다면, 아마 나는 덜컥 믿을지도...^^;;

그런데, 결론적으로 <일라이>는 덴젤의 필모그래피 중에 따로 빼놨으면 하는 영화다. 여느 필모와 달리, 선교를 위해 특별 출연했다고 (믿고 싶다고) 할까. 그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 봉사한 그런 영화. 같은 종교인들을 위해 덴젤이 우정 출연한. 물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덴젤에 대한 애정의 발로에서 나온 땡고집 되시겠다.

영화의 표피는 그렇다. 지구 종말 혹은 인류 종말이후의 사건을 다룬 '종말 액션 블록버스터'. 지난 연초 <더 로드>를 좋게 봤기에, 이번 종말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다뤄질까 하는 기대감, 분명 있었다. 더구나 <더 로드>에는 없는 '액션'과 덴젤 워싱턴, 게리 올드만이라는 든든한 '빽'까지 가세했으니. 유후~

그렇다고 내가 종말론적 세계관을 신봉하거나 끌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종말의 세계관은 대개 현실에 대한 메타포를 품고 있기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것을 나는 좋아한다. 더구나, 종말적 세계는, 영화적으로 봤을 때 한 마디로 장관이다. 그 엄청난 스펙타클의 향연. <나는 전설이다>의 그 텅빈 종말적 뉴욕을 떠올려보라. 뜨아아~
 
<일라이>는, 그 모든 기대와는 무관하다.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남보원'에 출연하는 박성호의 말을 빌자면, "괜히 봤어~~ 안 볼 걸 그랬어(들썩들썩)" 나름 독실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혹은 신앙심 작렬하는 신자들에겐 충분히 "아멘(에이멘)~"을 연호하게할 영화였겠다. 딱 교회에서나 제한 상영됐으면 좋을. 아, 물론 기독교가 모태신앙인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다보니, 그쪽 나라에선 나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줄거리 내달을 필요도 없겠다. '그 사건'이후 종말에 다다른 인류가 '성경'을 찾아서 새로운 불씨를 키워보자는 건데, 심하게 말해, 개수작이다. 끊임없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작태야, 성경홍보 영화겠거니 참고 넘어가겠는데, 과도한 비장미에 곁들인 슬로모션과 음악은 고문에 가까울 지경이다. 성경의 진짜 의미를 되짚고 넘어갈 틈새도 없다. 성경 한 권 때문에 벌어지는 무자비한 악행과 폭력은 어떤 개연성도 없다. 그저 성경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단다. 성경이 담고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나 성찰은 어디에도 없다.

덴젤이 연기하는 일라이도 그렇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건 좋다 이거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은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실천적 태도를 견지한 책이 아니던가. 일라이는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악행의 현장 앞에서 "지나가자.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며 되새김질하면서 외면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태도같은데, 글쎄 순교자의 운명을 지난 자 치고는 어설프다.

뭣보다 성경을 빌미로 벌어지는 악행의 나열은, 성경에 대한 단순집착적 애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말하자면, '바이블필리아'들의 난장. 네크로필리아(시체 애호증)와 대체 무엇이 다른가. 성경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세계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단순 책 읽기의 무의미함과도 이어졌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일부는 자신이 읽었다는 책(들)을 블로그 등을 통해 나열한다. '나 이만큼 읽었소', 하는 자랑질로 삼고 싶은 이도 있겠고, 목표에 대한 담금질적인 의미를 가진 이도 있겠으며,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겠지.

하지만, 그런 애호가적 소비, 왠지 책에 대한 배신같다. 그 책 읽기,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될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종종 의심한다. 그렇게 자신이 읽은 책을 나열하는 것, 무엇을 위함일까(리뷰와는 또 다른). 그것을 매개로 한 한 세계(사람)의 변화, 혹은 실천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상실된 것, 아닐까. 비판적 독서도 아니요, 그저 읽고 보자는 맹목적인 향유는 아닐까. '나, 이만큼 책 읽는 사람이니 우습게 보지 마시오'라는 자기 과시?

뭐 꼭 그것이 나쁘다 함은 아니지만,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지금의 책읽기 형태에 대해 이런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팬'이 되는 것. 즉, "라이프스타일 가꾸기의 방편으로 책을 수집하고, 읽고, 그 경험을 나누는" 새로운 지식소비 패턴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과 모색은 없이, 사회적 실천과는 유리된 지적 허영에 가까운 책 읽기.

책을 읽는 것,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만의 사유의 힘을 기르고 이를 생활에 녹여가는 것이 아닐까. 김규항 선생님은 유시민의 예를 들었다. 《청춘의 독서》는 좋은 책이지만, 더 중요한 교훈이 따로 있다고. "지식인 유시민과 정치인 유시민의 차이를 통해 사람의 지식과 실천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생생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
 
유시민의 글은 날카롭고 때론 유려하며, 종종 핵심을 찌른다. 그래서 감탄하기도 하며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그의 행보는 그가 잉태한 글(지식)과 다르다. 물론 누구도 완벽한 언행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진 않지만, 정치인 유시민은 글쟁이(지식인) 유시민을 완벽하게 갉아먹는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그러니, 책이 우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다면, 그 변화가 일상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실천되고 있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그런 균열이 우리라는 세계를 0.0001mm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데, 어쨌다고. 니 책 졸라 굵다, 고 말해주리? 심하게 말해, 성경 한 권 갖자고 똥지랄을 해대는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다시 돌아가 성경. 지금 이 세계를 야만으로 덧칠한 부시도 성경 말씀은 꼬박 인용하시더라.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 읽었다고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선구안을 가지느냐? 것도 아니다.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읽은 자의 태도와 실천이다. 성경 읽었다고 예수주의자가 되는 것 아님은 익히 경험한 바이고, 고작 예수의 팬으로서 예수 부르짖을 줄만 알며 종교 활동하고 있다면, 스스로 나이롱 신자라고 커밍아웃부터 하고 볼 일이다. 그렇담 깨끗이 인정이나 하지. 시시콜콜 예수 들먹이며, 예수를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아멘.

<일라이>의 미덕이라면, 그런 점 일깨우는 정도? 내 보기엔 종교적 신념도 개뿔.
어휴, <일라이>, 괴로운 영화관람의 경험. 관람지옥, 비관람천국. 에이멘.


근데, 궁금한 거.
미국에선 그 순교자 역할로 흑인인 덴젤 워싱턴이 한 것에 대해선 군말이 없었나?
덴젤이 연기한 일라이. 꼭 예수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더만. 물론 덴젤 워싱턴은 흑인이긴 하지만 백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다고 알고 있으니, 없었을 수도.

아, 그리고 마지막, 일라이를 대신해 칼 들고 순교자의 길을 나서는 솔라라. 완전 사족의 방점을 찍드만. 이 영화, 왜 만들었나이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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