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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 17:29 메종드 쭌/무비일락


<슬로우 비디오>(http://슬로우비디오.kr)에서 혹했던 장면이 있었다. 


마을버스가 바다로 향한다. 상상해봤나? 늘 좁은 골목길과 마을을 누비던 버스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 붕붕붕, 꼬마자동차가 달린다~ 마을버스 붕붕. 그 여정에서 마을버스가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을지 감히 모르지만, 느껴진다. 



<슬로우 비디오>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봉수미(남상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여장부(차태현)가 마을버스 운전기사 상만(김강현 분)에게 부탁한다. 아니 협박에 가깝지만.ㅋ 상만이 운전대 방향을 달리한다. 늘 가던 길에서 이탈한다. 아니, 자유를 찾아나서 본다. 


내가 한 번씩 꿈꾸던 장면이었다. 버스가 늘 다니던 노선을 벗어나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순간. 버스에 타고 있던 모두들, '벙' 찌면서도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 거지. 그렇게 버스는 달리고, 우리 영혼도 즐거워진다. <슬로우 비디오>에서도 외로운 영혼들이 마을버스 한 자리씩 앉아 바다를 보러 간다. 고속도로를 타고 달린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있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장면들이 그렇게 좋았다. 그러니 고속버스 톨게이트에서 마을버스를 잡고 가지 못한다고 우겨대는 경찰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결국 바다를 꿈꾸던 마을버스는 꿈을 접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것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바다를 향했으니까! 


마을버스도 어쩌면 그런 순간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늘 다니던 출근길에서 방향을 틀어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꿈꾸듯, 마을버스도 늘 다니는 골목길이 지겨운 날이 있지 않을까. <슬로우 비디오>가 일상의 다른 의미를 건네고 싶었다면, '느림(슬로우)'을 콘셉트로 잡을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기'로 잡아줬으면 어땠을까. 다르게 보기로 잡았었다고? 그럼 연출력이 아쉬운 거고! 



다소 안이한 만듦새였다. 기대가 있었던 만큼 영화가 끝난 직후 약간 아쉬웠다. <헬로우 고스트>의 (흥행) 성공이 독이 된 것일까. 이야기는 엉거주춤했고, 의미 전달은 미흡했다. 로맨스는 애틋했으나 뭔가 부족한 차림새였다. 차태현의 연기는 선글라스 때문이었을까, 그저 그랬고, 감독의 연출도 밍숭맹숭했다. <헬로우 고스트>의 성공 방정식을 별다른 변주 없이 가져온 듯해서,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세상에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겠다는 의도, 좋다. 그래서 꺼냈을 동체시력.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순간까지도 '슬로우 비디오'처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진 사람, 좋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쁜 일상에서 놓치는 것들을 그는 볼 수 있을 테니, '빨리빨리'가 아닌 '느리게'에서 만날 수 있는 삶의 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있었다. 



그러나 의도나 등장인물, 소재가 좋다고 다 잘 풀리라는 법은 없다. 바쁜 현대인의 삶에 쉼표가 되어주고 싶다는 영화의 카피는 마케팅적인 수사 같다. 이야기가 더디고 서툴다. 쉬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극중 상황은 납득하기 힘들 때도 있다.  


동체시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는 여장부(차태현 분)가 가족의 보살핌도 없이 칩거 생활만 했던 것도 이상하다.(그들 나름 화목한 가정임을 초반부에 보여주고 여장부의 성격이 괴팍한 것도 아니다!) 드라마에 빠져 있던 여장부가 "진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해서 나름 큰 결심을 하고 나온 바깥 세상 적응기도 뭔가 매끄럽지 못하다. 물론 상영 시간 때문에 가지를 치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유추하지만 감정이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여장부가 CCTV 관제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한 사람 뒤만 졸졸 쫓는 것은 다른 의미에선 스토킹이 될 수 있다. 좋아한다고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스토커들도 '좋아해서'라는 이유를 달지 않던가. 여장부의 사랑이 순수하고 애틋하다손, 공공의 안전을 위한 CCTV를 사유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나중에 그것이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자를 잡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진다지만, <슬로우 비디오>는 비약으로 극을 꾸리면서 상황 몰입을 강요한다. 


아예 영화가 판타지였으면 모를까, 판타지도 아니면서 왜 무리수를 두는 것인지 다소 불편했다. CCTV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요, 200편의 드라마라고 하지만, 여장부나 <슬로우 비디오>는 타인의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어 봰다. 주인공들의 드라마에도 뭔가 빠져 있는데, 조연이라고 오죽하려고. 특히 석의사(고창석 분)와 심(진경 분)은 왜 굳이 출연했는지 의아하다. 그들의 연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 안타까워서 그렇다. 충분히 좋은 연기로 활용할 수 있는 배우들이었는데 말이다. 



여장부가 진짜 느리게 흐르는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사회 적응이 서툴고 느릴 뿐이다. 영화에서 눈물이 흐를 만한 지점은 분명히 있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그렇다. 그런데 첫사랑 봉수미(남상미 분)와 애틋하게 만나기 하기 위한 장치들은 서툴고 작위적이다. 사채 빚에 쫓기는 것으로 설정된 봉수미의 상황도 너무 안이하게 다뤘다. 용역 깡패들이 한 번 헤집고 가고 울고불고 곤경에 처한 봉수미가 나오면 그것으로 끝? 연출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로우 비디오>는 욕만 들어먹을 영화인가. 그렇지 않다. 현실 정합성이나 상황적 논리성을 이래저래 따지고 들었지만, 논리적으로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름 미덕도 갖고 있다. 차태현의 연기는 믿고 볼 만하다. 차태현을 좋아하고, 찬바람이 불 무렵, 애틋한 로맨스가 가미된 잔잔하고 심심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슬로우 비디오>는 10월의 추천영화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아울러, 차태현은 늘 믿고 볼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맞다. 그럼에도 선글라스를 끼운 것은 아쉽다. <슬로우 비디오>를 보면서 느낀 것인데, 차태현 연기의 일정 부분은 그의 눈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 그에게 선글라스를 끼우다니, 자연 연기도 안 살고, 영화도 살지 못했다. 감독의 책임이다. 동체시력이 문제였던 건가?ㅋ 


남상미의 연기는 상큼하다. 영화 출연이 잦은 배우는 아닌데, 모처럼 출연한 영화에서 나름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 남상미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봐도 좋겠다. 추천한다. 


사랑스러운 배우다. 만세. 나도 따라 만세를 하고 싶다. 파마 머리도 잘 어울린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3.02.27 02:20 메종드 쭌/무비일락


2월25일, 

거리를 거닐 때도, 미디어를 만날 때도, 온통 한 사람의 얼굴이 도배질하고 있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앞으로 5년 잘하길 바란다는 이성을 비집고 나오는, 저 지겹고 구린 얼굴과 쇳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싫었다. 그가 오십 차례 이상 내뱉은 '국민'이라는 카테고리에 나는 포함이 안 됐으면 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진짜, 이땅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설프게 형성된 '국민'이기보다 자주적인 근대화 과정을 섭렵한 '인민'이나 '시민'이고 싶으니까. (물론 알다시피 이 땅에 자주적인 근대화 과정은 없었다!)


그걸 꿍한 마음을 치유해준 것이 아카데미 시상식이었으니. 

이땅을 아주 이상하게 만들어놓은 미국(정부)이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아니 아주 무관할 수는 없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내게 하루 힐링이었다. 


눈물이 찔끔.ㅠㅠ 


내게서 줄리아 로버츠를 은퇴시킨 여신, 

앤 헤서웨이(여우조연상)부터 시작된 힐링 릴레이는,

<레미제라블>팀의 감동적인 군무와 노래로 감정을 고조시키더니. 



연기가 곧 '운명'이었던 십대의 소녀에게 혹했던 기억이 아직 짠하건만,

스물 셋의 나이, 마침내 오스카 트로피를 치켜 든 '꽈당' 제니퍼 로렌스. 




늘 새로운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나를 놀래키는 사랑과 이야기의 연금술사인, 

아시아, 그리고 대만의 감독 이안과 그가 만든 눈과 마음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랍고 감동스러운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 땡큐, 쉐쉐, 나마스떼! 이안 감독님의 천진난만한 수상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미친 연기자 <링컨>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그리고 방점을 찍은 건, 미셸 오바마의 깜짝 등장에 이은 최우수 작품상 호명! 


그의 입에서 <아르고>가 툭~ 나올 줄은 전혀 일절 네버, 와우~


감독 벤 에플렉의 기쁨 한 바가지를 우물에서 길어올린 듯한 속사포 랩 소견 발표와 

그 옆에서 므흣하고 웃고 있는 제작자 조지 클루니의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모습.



할리우드의 시상식이 내 마음의 앙금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제 나라 대통령보다 남의 나라 영화와 배우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힐링된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나라는 인간이니까. 


2월25일, '원 배드 데이'에서 '원 파인 데이'로 바뀐 어느 날.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앤 헤서웨이의 노예로다~ㅋ 


<브로크백 마운틴>, 잭(제이크 질렌할)의 아내 루린에 대한 이야기를 외전으로 만들면 좋겠다. 그전부터 <프린세스 다이어리>로 알았다손 치더라도, 내게 처음 '배우'로 다가온 앤을 발견했던 그때 그 이야기. 그러고보니, 두 사람이 겹치네. 앤 헤서웨이, 리안. 덩달아 5년 전 1월22일 떠났던, 히스 레저. 


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보고 싶다. 

제니퍼 로렌스의 반짝반짝 빛나는!!! 구름의 흰 가장자리, 한줄기 빛나는 희망.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3.02.12 23:52 메종드 쭌/무비일락

HD리마스터링 된 <러브레터>.

재개봉에 앞선 시사회, 가슴이 뛰었다. 보는 내내 뛰었다.

 

 

이 장면 하나로도 충분한 영화다.

슬픔을 애도하는 법. 

극 중에서 아키바가 언급했듯,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를 그제서야 보낸다.

'오겡끼데스까(잘 지내나요?)'

 

그 옛날, 나도 히로코를 통해 애도하는 법을 배웠다.

함께 시사회를 본 친구도 무척 좋아했다.

슬픔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눈물을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어제(11일) 1주기를 맞은 휘트니 휴스턴의 유작, <스파클>도 보고 싶어졌다.

가족의 유대감과 성공의 어두운 면, 음악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영화.

 

출연은 물론 제작까지 겸했다는, 휘트니가 마지막을 불살랐다는 영화.

영화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 얻었다고 하나, <스파클>은 그것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세상에 없는 여자, 휘트니 휴스턴의 것이기 때문이다.

 

휘트니 휴스턴, 오겡끼데스까.

열여덟의 나는 <보디가드>를 보고 보디가드가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원한 보디가드. 휘트니 휴스턴의 음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3.01.22 17:21 메종드 쭌/무비일락

재난은 이야기를 낳는다. 재난의 불가피한 속성이다. 그 속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재난의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다. 지금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인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많은 재난영화가 스펙터클 보여주기에 급급한 이유다. 그리고 실재 사건마저도 그것을 재난처럼 다루는 미디어로 인해 우리는 마음을 뺏기고 있다. 제 마음, 없다. 오로지 수동성만 지배한다. "영화 같다"는 말로 우리는 이미 재난을 스펙터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 수동성이다.

 

<더 임파서블>은 그러나 다르다. 다른 재난영화가 보여주기에 급급해 하는 스펙터클을 무기로 내세우지 않는다. 쓰나미(tsunami)가 소재라고 해서 스펙터클의 전시와 억지 인간애를 끌어내는 구도이겠거니 했다. 뭐, 비슷하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르다. 쓰나미가 덮치지만 카메라는 쓰나미 아닌 쓰나미에 휩쓸린 인물의 육체적 상처에 집중한다. <해운대>에서 엄청난 파고를 과시하던 쓰나미의 것과 다른 태도다. <해운대>는 쓰나미를 스펙터클로만 소비했었다.

 

100년도 더 된 쓰나미는 이제 지진해일의 대명사가 됐다. 1896년 일본 산리쿠 연안, 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쓰나미는 국제 공용어가 됐다. 익숙하지 않던 그 단어, 널리 알려진 것은 2004년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였다. <더 임파서블>은 그때를 다시 호명한다. 실화에 기반해 이야기를 푼다. 다시 말하지만, 스펙터클은 뒷전이다. 쓰나미가 덮친 폐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래서 상처에서 피는 계속 나오고 찢긴 살점은 너덜거린다. 그럼에도 약은 물론 병원도 없다. 걷고 또 걷고 쓰나미가 또 닥칠까 나무에 기를 쓰고 올라야 한다. 인간은 이다지도 나약하다. 그것을 보는 것, 일종의 통각(痛覺)다. 내 것이 찢겨 떨어진 양, 피가 철철 흐르는 양, 아프고 아프다. 앞도 보이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야말로 멘붕(멘탈 붕괴). 객석에 앉아서 이런 대리체험을 하게 하다니. 이 영화의 배짱은 한편으로 놀랍다.

 

생각해보라. 여느 재난영화가 스펙터클을 소비하게 만드는 방식은 '쾌감'에서 비롯된다. 즉, 내가 저기(재난)에 없음으로 느끼는 안도감에 맞물려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으로 파국 직전 일거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게임은 끝. 관객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자본은 재난영화를 소비하는 패턴을 그렇게 길들였다. 재난영화가 블록버스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블록버스터가 재난영화를 선호하는 이유이다.  

 

<더 임파서블>을 그래서 선뜻 여느 재난영화와 같은 선상에 배열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재난영화라 함은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를 뜻한다. (물론 재난영화마다도 결이 조금씩 다르다.) 이 영화의 감독 후안 안토니요 바요나도 재난영화라기보다 재난을 당한 가족에 겪은 체험기라고 했단다.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공식은 없다. 재난에 저항하는 인류애와 위기 극복의 드라마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재난으로 모든 것이 망가지고 흩어진 페허 위에서 가족이 고난을 헤쳐 상봉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이 가족에게 오로지 집중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다. 가족의 성장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숱한 인간 군상의 등장으로 헤맬 이유도 없고, 복선이나 암시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성장한다. 정확하게는 등장인물들이. 내가 받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함께 돌봐주기, 서로 챙겨주기.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가족과 헤어진 아픔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전개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성장한다. 나는 그것을 '서로 돌봐주기의 신공' '상호 챙겨주기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큰 아들 루카스의 변신(?)이 가장 극적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 사치라고 여기던 루카스(톰 홀랜드)는, 고통과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엄마 마리아(나오미 왓츠)를 간병하던 중,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을 맛본다. 마리아의 권유였지만, 그는 그것에서 기쁨을 맛본다. 뭔가 가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마리아의 말이 허튼 말이 아님을 확인한다.   

 

 

마리아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되찾은 아빠 헨리(이완 맥그리거)는 엄마를 잘 돌봐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성큼 성장한 루카스는 이리 답한다. "서로 돌본 거예요." 아,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이 저릿한 감정은 무엇인가. 함께 돌보고 챙김으로써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디 삶이요, 세상의 원리다.

 

헨리도 그런 경험을 한다. 아내와 루카스를 잃고 상심에 빠져 있는 그가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오열하면서 남의 전화라며 서둘러 끊은 헨리에게 휴대폰을 빌려준 남자는 말한다. "다시 거세요. 그렇게 끊으면 안 돼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번져야 산다. 혼자여선 안 된다. 서로 챙기고 함께 돌봐줘야 한다. <더 임파서블>이 내게 준 번짐이다. 블록버스터니 재난영화니 따위의 수사에 현혹되지 마시라. 이것은 번짐의 영화요, 함께 돌봐주기의 신공을 보여주는 영화다. 자본의 쓰나미가 모든 것을 삼킨 시대. 그 쓰나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쓰나미는 메타포(은유)인 셈이다. 자본의 쓰나미로 고통이 일상화된 시대, 우리는 서로 함께 돌보고 챙겨야 하는구나. 마을공동체, 공유도시, 사회적경제, 공정무역,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어들이다. 쓰나미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영화 <더 임파서블>, 재난영화 블록버스터가 아닌 감동 실화 블록버스터다. 감동이 블록버스터급으로 다가온다는 얘기다.  

 

그래서, 고맙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11.17 00:51 메종드 쭌/무비일락

(스포일러 있음! 알아도, 영화관람에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다음에 꺼내는 이 말, 우스개지만, 백퍼 진실을 담은 뼈대 있는 우스개. 

답을 보기 전, 한 번 유추해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가 50대가 넘어설 때, 필요한 다섯 가지는? 


친구, 딸, 집, 돈, 건강.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50대는? 


아내, 부인, 와이프, 마누라, 집사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의 모습, 그려진다. 우리나라 남자를 놓고 한 뼈대 있는 우스개지만, 아이슬란드의 이 남자에게도 다르지 않아 뵌다. 



화장실에서 우는 남자


그 남자가 화장실에 앉아 울고 있다. <볼케이노 :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그것은, 온 슬픔을 담은 몸짓이다. 삶의 회한이 묻은 울먹임. 그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뚝뚝하며, 퉁명스럽고, 가족들에게 심술 궂은 말만 내뱉는데다, 가시 돋힌 행동만 일삼던 남자. 중요한 것은 그 남자, 하네스(테오도로 줄리어슨)는 아버지였다. 우리네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은 그 남자, 울고 있다. 왜? 


그것은 단순히 오십 넘은 남자에게 닥친, 아내의 뇌졸중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가 쓰러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바다에 뜨지 못한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은 결국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삶의 공허함과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때문이리라. 


하네스에겐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섬을 떠났고, 어부의 이름을 포기했다. 나중에 실토하지만, 그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부 역시 그의 진짜 꿈이었다. 꾹꾹 아니라고 눌렀으나, 결코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학교 수위로 37년을 근무하다가 은퇴한 그에게 닥친 것은 공허함이요, 무상함.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에게 은퇴가 주는 충격이란 그런 것이다. 죽을 것도 생각했으나, 결국 그것도 당장 그의 몫, 아니었다. 


한때 가장이었으나 이제는 '뒷방 늙은이(꼰대)'로 전락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다. 심술과 심통. 오랜 세월, 뒷바라지만 해 온 아내 안나(마그렛 헬가 요한스토디어)에게 줄 수 있는 건 면박과 트집뿐.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는 외계인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존재는 곧잘 무시당하며, 가장의 권위는 안드로메다에 있는 무엇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은퇴때문에 불거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였고, 가족에겐 '불통'의 대명사였다. 


물론, 안 됐다. 불쌍하게 보인다. 애초롭다. 아무리 자초한 것이지만, 뒷방 늙은이도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네스의 '버럭'은 그런 심리에 기초하리라. 자신을 알아달라는, 내 무력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호소다. 몸부림이다.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볼케이노'는 그럴 때 갑작스레 터진다. 오십 넘은 남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 아내가 쓰러졌다! 뇌졸중. 그것도 전날, 아내에게 쭈뼛쭈뼛 할 말이 있다며 힘겹게 다가가 모처럼 애정을 나눈 그들이었다. 못난 지아비는 아내에게 수줍은 사과를 건넸고, 아내는 지아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온몸으로 받아줬다. 오래된 부부의 진한 교감이 이어졌던 다음날, 터진 볼케이노. 아내가 좋아하는 넙치수프를 준비한 하네스 앞에서 아내가 쓰러졌다. 


그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명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쓰러진 안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달려온 딸과 아들은 하네스와 뚝 떨어져 앉아 자기들끼리 위로한다. 그 장면을 멀리서 풀숏으로 찍은 장면은 그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존재인지 보여준다. 아버지, 외롭다. 슬프다. 


볼케이노의 폭발, 그 이후...


             

그런데 이 남자, 변한다. 아니, 이제야 본래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 남자가 철 드는 것도 그럴 때이다.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 아내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니, 알았는데, 쑥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그녀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쏟는다. 병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온종일 옆에 두고 병간호를 한다. 아들의 반대를 평생을 함께 한 남편으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잘할 수 있을까? 스크린을 응시하는 나의 염려는 곧 그의 염려였다. 하네스 자신도 그것이 궁금했고 불안했다.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몸 곳곳을 닦아주고, 수프를 떠먹이면서, 말 못하는 아내에게 계속 말 걸어주고 책 읽어주기. 그의 삶의 중심은 이제 아내다. 평생 구박만 했던 아내에게 그는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속단을 했다. 그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아내가 깨어나리라는 흔한 결말을 떠올렸다. 아내를 병간호 하는 외에 그가 오로지 매달린 배의 수리.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물림하여 내려온 그 배, 그것의 재탄생과 함께. 치유된 아내와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것으로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다. 

설마했지만, 나는 살짝 경악했다. 아니, 그가 행한 행동을 수긍할 수 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리라. 배는 완성됐다. 손자와 함께 수리한 배는 어쩌면 그가 또 다른 삶의 전환점에 섰음을 보여주는 징표. 배의 존재는 곧 그였다. 배의 난파와 수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다시 섬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또 다른 오해를 했다. 기성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은 영화임을 간과하고, 익숙한 관성에 의해 사유한 셈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가 아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신파를 떠올렸다. 


아내 덕분에 다시 섬으로 돌아온 하네스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담고, 또 많은 것을 비우는 얼굴이라니. 그 얼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얼굴만한 스펙터클은 없었다. 지 아무리 가파른 해안절벽과 드넓은 바다도 그의 표정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나즈막이 읊조리고 말 나의 감상은 이랬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모든 게 조금씩 빛이 바래도, 삶은 짧은 계절만큼이나 전환에 전환을 거쳐 흘러간다.   


(* <볼케이노>라는 영화 제목 때문에 흔하디 흔한 재난영화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삶에 닥친 '재난'을 다룬 것은 맞지만,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와는 사유의 지점이 다르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24 00:08 메종드 쭌/무비일락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도둑들>(의 장르)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단어인데, 제목에 걸맞게 하나 같이 훔치는데 바쁘다. 강탈하고 절도하는 범죄를 향한 치밀한 준비와 실행과정의 묘사가 그렇다. 날고 기는 한국과 중국의 '전문가' 10명을 모이게 하기 위해 <도둑들>이 카드로 내세운 것은 으마으마한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이다. 2천만 달러. 군침이 돈다. 침이 고인다. 꿀꺽. 저 정도면 케이퍼, 할 만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태양의 눈물'은 맥거핀이로다. 

프로들께서 눈에 쌍심지는 물론 레이저까지 쏘면서 뎀비는 이 다이아몬드. 홍콩의 카지노에 고이 모신 이 다이아몬드의 '자리이동(?)'을 위한 위험천만한 모험담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이거 순전히, 연애 영화다. 그러니까, 멜로물이야! 다이아몬드, 훔치고 독차지하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지? 근데, 정작 그들 각자가 훔치고 싶은 건, 마음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꺄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로다. ㅠ.ㅠ 


사랑은 마음을 훔쳐야 한다. 

한때, 90년대의 실없는 혹은 닭살표 우스개. 

남자가 여자에게 공격적으로 묻는다. "당신, 도둑이죠?"  

여자, 갑자기 놀라서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요?"

남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내 마음을 훔쳐갔잖아요. (흐흐흐)" 

뻑뻑. 대패로 닭살을 깎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이 대화의 핵심은 세상에 더 없을 진실. 사랑은, 그래, 마음을 훔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것 쉽지 않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울 거다. 기가 막힌 재주를 가진,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절도의 프로께서도 마음을 훔치는 것만큼은 손사래를 칠 것이다. 이건 당최 용의주도한 계산이나 치밀한 계획과 실행도 통하지 않는다. 예측 불허다. 내 마음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는 마당에 남의 마음을? 에구구, 섣부른 도둑질이 화만 부른다. 


물론 흥미진진하다. 

태양의 눈물을 향한 동상이몽의 한중 전문가들이 펼치는 전문성은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훔쳐보겠다는 의지에 속한다. 즉, 부분집합이라는 거다. 잠파노(김수현)는 '미친년' 예니콜(전지현)을 향해 줄곧 순정이다. 마음을 훔치고 싶어 안달이다. 안 그런척 해도 숨길 수가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잠파노의 모든 것은 예니콜에 속한다. 극중 그의 마지막 외침이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복희야 사랑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가 꿈을 잘못 샀어." 

첸(임달화)를 향한 씹던껌(김해숙)의 마지막 고백인데, 진짜 잘못 샀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들린다. 10년 만에 벅찬 오르가슴을 선사한 첸을 향한 씹던껌의 찬란한 고백. 두 사람, 서로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티파니(태양의 눈물 소유자)를 잠깐 이용할 뿐이다. 그들, 진짜 훔치고 싶었던 것을 훔쳤다! 안타까운 결말이긴 해도.


삼각구도 역시 마찬가지. 

마카오박, 뽀빠이, 그리고 '으~~마으마한 쌍년'(예니콜의 표현) 팹시. 뽀빠이는 팹시의 마음을 빼앗고 싶었고, 마초상남자("여자는 치마는 짧고 머리는 길어야 해") 마카오박은 안 그런 척, 오해의 늪에 빠진 팹시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 배신 당했다는 생각에 마카오박에 대해 빠득빠득 이를 가는 팹시지만,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엔 마카오박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이 엇갈린 마음의 행보와 훔치고 싶은 사람의 마음. 뽀빠이가 마카오박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질투'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훔쳐간 수컷에 대한 수컷의 질투. 극중 앤드류(오달수)는 그런 상대가 없어 안타까울 뿐.ㅋㅋ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가 맞다.  

무언가를 훔치는 것을 묘사한 영화 장르가 케이퍼 무비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맥거핀을 써가며 용쓰는 <도둑들>은 케이퍼 무비가 맞다. '도둑들'이라는 제목 앞에 '(사랑하는 마음의 훔치고 싶은)'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는 거지. 주도면밀한 연애의 기술과 방법이 담긴 <도둑들>은 그래서 또한 로맨틱한 멜로물이기도 하다. 내 눈엔 그 도둑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질)하고 싶어서 태양의 눈물을 이용한 거다. 


아무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좆도 아니야.~ 

<도둑들>의 멋진 교훈이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18 23: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정직하고 우직하다. 둘러 가지 않는다. 휘어서 가지도 않는다. 직사광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는다. 직구다. 그것도 돌직구. <토끼 울타리>가 그렇다. 스트레이트로 우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가슴을 움직인다. 감동이라면, 격정적인 격랑이 휘몰아치는 감동이 있고, 밑바닥부터 찰랑찰랑 물 차오르듯 서서히 수위를 높이는 감동도 있을 터. <토끼 울타리>의 감동은 후자다. 마음 저 깊은 곳을 움직인다. 먹먹함을 동반하는 감동이다.


그 감동,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도리스 필킹턴의 《토끼 보호 울타리를 따라서 》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 


필킹턴의 어머니, 몰리가 14살 때 거닐었던 여정을 다룬다. 무려 1500마일(약 2400㎞). 이 길을 가냘픈 발로 따라갔던 소녀의 이야기.


3명의 소녀, 어른도 상상하기 힘든 길을 떠나고 관객의 눈길을 모은다. 


"엄마를 찾아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똘똘 뭉친 험난한 도피길. 그들은 왜 도망을 가야했으며 왜 이토록 먼 길을 걸어야만 했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묵직한 발길을 멀리서 관찰하고 뒤따를 뿐이다. 카메라는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우리도 그 길을 묵묵히 따른다.


"엄마, 보고 싶어요…"


이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모성'을 향한 자연적인 끌림을 묘사했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달리 <토끼 울타리>는 그것 이상의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왜 인간에게 중요한가. 단지 엄마를 찾겠다는 것뿐 아니라 자유를 찾는 여정. 시대와 사회, 그리고 역사가 소녀들에게 부여한 가혹함이다.


이곳은 1931년의 호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 백인들, 박힌 원주민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굴러온 돌'인 백인이라는 이름의 지배계급, 1910년부터 '원주민 법'을 제정했다. 이어 지속적으로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을 말살하기 위한 칼을 빼든다. 그 칼에는 야만과 광기가 묻어 있다. 혼혈을 통해서라도 원주민의 '색깔'을 빼겠다는 어이 없음 혹은 안하무인. 그것이 영화를 지배하는 시대의 공기다.


지갈롱에 살고 있는 몰리와 데이지 자매, 사촌 그레이시는 백인과 애보리진의 혼혈아다. 색깔을 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낸 호주 (백인)정부, 세 자매를 엄마들에게서 떼어내 1500마일이나 떨어진 무어강 보호소로 보낸다. 당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는 격리 수용의 최우선 대상이다. 백인의 피로 희석해 백인에 가깝게 만들겠다는 것. '어이없는' 색깔론. 물론 우리의 색깔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몰리, 노예와 같은 생활도 싫고, 즉 자유가 그립고, 엄마도 그립다. 결심을 한다. 그래, 이곳을 떠나자! 두 동생과 함께 비 오는 날, 탈출을 감행한다. 비가 흔적을 지워줄 거라는 믿음을 품고. "다시 엄마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제아무리 광활하고 거친 호주 대륙이라도, 그들에겐 그것이 안중에도 없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사진 꺼내 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라는 노래조차 그들에겐 적용될 수 없다. 꺼내 놓을 엄마 사진도 없다. 곧 그들에게 '엄마'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허나, 정부가 그들의 탈출을 쉽게 허용할 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색깔을 다시 오염시키는 행위다. 소녀들을 수용소로 끌어오기 위한 백인들의 추격이 따른다. '엄마'를 보겠다는 사소하고 소박한 생각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이라고 백호주의는 봐주지 않는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소녀들의 소박한 희망도, 백인만의 울타리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욕망 앞에선 장애물이다.


가냘픈 발자국, 속 깊은 눈


단순한 구도다. 쫓기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영화적 구도의 핵심이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고 도망가는 자와 "붙잡고야 말겠"다고 추격하는 자들의 대결.


헌데, <토끼 울타리>에는 어떤 기교도 없다. 현란한 사기꾼적인 기질이나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한 술수, 없다. 자연 지형을 활용하거나 추격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지가 있을 뿐. 몰리는 잡힐 듯 말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같다.


이 영화의 장점, 바로 거기에 있다. 묵묵히 따라간다. 의도적이거나 억지로 고난을 부여하지 않는다. 흉포한 백인들을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도망가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몰리의 속 깊은 눈이 관객 마음을 움직인다. 그 눈이 이 어린, 그렇지만 여리지 않은 소녀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만든다. 진정성을 획득하는 순간! 감독은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공들여 치장하거나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하지 않아도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물들, 하나 같이 자기 일에만 열중한다. 몰리와 그의 자매들, 백인에 반대하고 체제 전복을 꿈꾸는 게 아니다.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다. 원주민법의 집행자인 네빌(케네스 브래너)도 마찬가지. 자신의 업무를 정확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은 성실한 직장인이다. 아이들을 뒤좇는 원주민 '개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개처럼 따를 뿐이다. 그게 그의 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순 없다. 생각해보자. 나치에 대한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념적 복무가 없었다손 전범이 아닌가.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일에 성실한 가장이었다. 아렌트는 그를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또 "아이히만은 말하기, 생각, 판단의 무능성을 지닌 지극히 보통사람이었으며, '나치에 대한 몰이해와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실행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무지 등을 이유로 나치를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거나 비서로 살육의 현장에 동참했던 사실을 씻을 수는 없다. 또 시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친일 행위를 했다손, 그 과오가 지워질 순 없다.


네빌이나 개코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죄를 사할 수는 없단 얘기다. 백호주의라는 분별 없는 신념(혹은 열정)의 이름으로, 피의 순결함에 집착하는 행위가 가져온 타인의 삶의 파괴.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패악이다. 타인의 자연스런 삶을 망치고 억압했다. 백인은 문명은커녕 야만의 씨앗을 뿌렸다. 


나는 소망한다, 강요당하지 않는 삶을...


철거가 일상이 된 시절이다. 자본은 토끼몰이처럼 원주민(세입자)을 내몬다. 용역깡패까지 동원한다. 철거라니, 도대체 그 무지막지한 단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자본의 피는 자본만의 울타리를 치고 싶다. 순수하고 싶은 것이다. 왜 가난한 자들까지 자신들이 먹여살리고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철거 용역 깡패는 그래서 자본의 군대다. 그들이 복무하는 건, 자본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역사는 형태를 바꿔 되풀이될 뿐이다. 우울함을 지울 수 있을 턱이 없다. 몰리는 엄마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 뒤에 숨어살아야 했다. 호주에서 원주민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된 것은 70년대다. 그들은 "도둑맞은 세대"로 불렸다. 강요와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평생을 숨어 지내야만 했다.


21세기. 별 다를 바 없다. 자본은 더욱 세차게 토끼몰이를 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산다. 고작 자본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우리는 강요 당하고 억압 받고 있다. 자유는 없다. 자유롭다는 착각만 유령처럼 떠돌 뿐. 노예의 편안이다. 철거 깡패의 무력이 두렵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는 돌직구처럼 직설로 우리의 사고를 깨운다. 갇힌 안온함보다는 거칠고 험한 자유가 낫다! 14살의 몰리가 그것을 몸소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깡패 자본주의에게 더 이상 '도둑 맞은 세대'처럼 숨어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토끼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18 15:52 메종드 쭌/무비일락


민족은 허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강력한 현실이고,

이 허구와 현실을 이어주는 것은 날조와 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이며, 이 기억이 만드는 집단적 정체감이 개인을 개인으로 정립시킨다.

현실적 실체가 된 상상의 공동체가 억압과 폐쇄의 위험을 벗어버리려면 ‘열린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민족적․문화적 소수파(이방인)의 존재다.


-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민족은 없다> 중에서 -


뜨겁다. 계절도 그렇지만, 올림픽 때문이다. 공식적인 국가대항전. 자본이 숨은 주인공이지만, 어쨌든 나라를 걸고 싸운다.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 없이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는 올림픽 공식 멘트는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다.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져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지만, 기억은 거기까지. 이긴 자만 기억하는 세상은 여전하고, 꼭 이겨야만 하는 그런 나라, 있다! 


후끈하다. 한국과 일본. 식민과 피식민의 기억은 영원할 마당. 쥐새끼는 느닷없이 바다를 건너 독도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뜬금포.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한일 양국 시끌시끌하다. 축구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점이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3·4위전. 한국이 이겼다. 그것도 2대0. 잘 했고, 이겼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공식적' 멘트도 막상 경기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고스란히 나는 태극전사였다. 한국팀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쏠렸다. 울트라 닛뽄은 그냥 들러리였다. 이겨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도 승리의 기쁨 앞에선 그저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


살짝 궁금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면 달랐겠지?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겠지? 독도에서 찍찍 거리는 쥐새끼, 당장 쥐어패고 싶었겠지? 일본에서 태어나서 조용한 외교라는 명분아래 일본에 슬쩍 마음을 두던 평소와 달리, 뭔 뻘짓을 한 거야? 


흠, 그건 그렇고 재일교포라면 어떤 심정일까? 재일교포도 물론 살아온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그 층위가 다르겠지만. 스기하라에게 묻고 싶었다. 

스기하라? 뉴규? <고(Go)>의 주인공이다. 



아참, 

이 글은 나(스기하라)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GO>,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다


나? 태어날 때 선택 따윈 못했다. 당연하다. ‘수십억분의 1’의 경쟁률을 힘겹게 뚫고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처지잖아. 어쭈구리,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족쇄가 나를 묶고 있었다. 가족의 일원, 국가의 구성원, 민족의 자손. 오호,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닌데, 그렇게 주어졌다. 


어쨌거나, 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코리안저패니즈.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만 살았어. 일본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그런데 남들은 나를 “재일한국인”이라고 불러. 이런, 이건 누가 붙인 이름이야? 이봐, 사자는 자신을 사자라고 안 불러. 너희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잖아. 난 나라구! 왜 날 너희 맘대로 만든 틀에 묶어 놓구 평가하나? 그렇게 이름을 붙여 차별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차이를 차별로 내모는 또라이들.


아차, 좀 오바했군. 이건 나의 연애 이야기였지. 잊어버려...^^;


나 좀 묶어 두지 말고 내버려 둘래?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애국, 통일, 동포, 친선

지배, 억압, 예속, 침략, 편견, 차별 … 제기랄

배타, 배척, 선민, 혈족, 순수, 혈통, 단결 … 지.겨.워.”



아빠는 이런 족쇄에서 나를 풀어주려고 국적을 바꿨다. 엄마와 하와이를 간다는 핑계로 대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는 내게 구시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재일교포니, 일본인이니, 엿이나 먹을 짓이다. 이 넓은 세상. 국경선 따위가 나의 행로를 제어할 게 무어냐고. 


그래서 닭들이나 할 짓인 ‘슈퍼그레이트치킨레이스’는 그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원 밖의 강한 적들과 싸우면 된다. 나를 둘러싼 이 허구의 세상과도 마찬가지. 다른 건 없다.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나는 즐긴다. 


사쿠라이(나의 여자친구지)! 그런데 넌 왜 그래? 내 피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그렇게 뭉개버리다니.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안 따라온다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피는 더럽다고? 이런,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론데 나는 ‘재일한국인’이 되는 순간, 왜 피가 더러워지는 거지? 웃기는군. 너처럼 자유분방해 뵈는 애가. 그것도 아빠 얘기라며 그걸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우스워.


아,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였지. 너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인데 너를 이렇게 묘사하면 안되지...^^; 어쨌든, 넌 예뻐서 좋아. 팬티가 보여도 쪽 팔리는지 모르는 네가 좋아.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건, 어느 민족이건, 정말 상관 않는 거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라잖아, 하하.


살아 있다, 사랑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이야기, 너무 무겁게 보인다고? 걱정마. 이건 발랄하고 경쾌한 사랑이야기니까. 그냥 내 연애이야기야. 살아있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즐겁고. 그래, 사랑 그놈, 부질없는 짓인줄 알지만, 그래도 어떡해. 내겐 사랑이 우선이고 최고야. 친구 정일의 죽음도 사쿠라이, 널 향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순 없어. 민족, 국가, 그런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물론 국경이 있고, 핏줄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잘 알아. 그렇지만 나 호들갑 같은 거 떨지 않아. 한국 국적이라고, 단일민족 한핏줄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내 나라 내 동포 내 민족이라고 감싸 안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지 않아? 5·16 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일이라고 빡빡 우기고, 공천을 현금으로 장사하는 족속들과 내가 한 동포라는 테두리에 들어갈 이유? 없잖아! 독재자의 딸이자 독재자 DNA를 그대로 물려 받은 자를 향해 거짓 충성을 맹세하는 권력 불나방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 받는 것도 기분 나빠. 완전 나빠! 


아, 또 깜빡했군. 이건 내 연애이야기일 뿐이야. 넘어가지...ㅋㅋ 정치적 발언? 그런 건 없는 걸로~ 내가 뭔 정치이야기 같은 걸 하겠어, 킁킁. 


그래, 불만 있냐?


뭐, 하나가 돼야만 직성이 풀리고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배알 꼴리겠지만, 별 수 있나? 난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이야. 당신들에게 동질감이나 민족 감정을 느껴야할 이유 따윈 없어!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것도 없고 ‘민족’을 기치로 연대해야 할 의무도 없지. 그 광란의 한-일전. 난 어느 편도 아니야. 내가 응원하고 싶은 쪽을 응원할 뿐이야. 어느 편인가 묻는 당신에게, 조까라 마이싱~! 


아, 내 연애이야기는 이걸로 끝. 난 사랑에 빠졌고 너무 아프다.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 내가 지껄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래. 불만있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난 당신들에 의해 내 삶의 선택과 주체성을 휘둘리고 싶진 않다! 다 맞아주마. 다 뎀벼!!!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8.05 17: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사료에 의하면) 세종은 '성군'이라는 호칭에 가장 부합한 임금이다. 진짜 그만한 성군이 없단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의 대가, 김별아 작가는 그랬다. 소설을 쓰기 전, 철저하게 역사를 공부하고 파악하는 그의 작가의식을 감안하면, 그 말은 100%일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는 조선조 처음으로 '대왕'이라는 직함을 세종에게 부여했을까. 그 뒤 정조대왕이 있지만, 글쎄, 잘은 모르지만, 정조에게 대왕은 좀 어색하다.


그런데, 그의 즉위는 좀 놀라운 데가 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는 장자(맏아들)가 아니다. 그것도 셋째 아들.

장자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권이 부여된 시대, 그는 왕에 즉위했다.

물론 나는 자세한 이유와 배경을 잘 모른다.

양녕과 효녕의 실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충녕에 대한 아비(태종)의 신뢰와 왕의로서의 자질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왕위에 올라서 성군이 되고 대왕이 됐으니까, 그건 아비의 정확한 판단이었다.


헌데, 왕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왜냐!

태종도 다섯째 아들이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조도 둘째 아들, 세 번째 왕 태종도 다섯째임을 감안하면,

태종으로선 장자에 당연히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그리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충녕은 간택됐다.


아마 아비는 갈등했을 것이다.

정당성이냐, 왕권의 안정이냐. (물론 그것은 연결돼 있기도 하다.)

충녕이 왕권 안정에 적합한 인물이자,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아비의 선택은 옳았다.


그런데, 궁금했던 건, 충녕 본인은 왕위에 오를 생각이 있었을까?

공부가 가장 쉬웠고, 형들과 달리 놀 줄도 모르고, 잘은 모르지만, 범생 분위기가 자욱하게 풍겼을 그에게 그런 야망이 있었을까?

찌질한 것은 아니어도, 그는 딱 FM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육두문자를 지껄이는 세종은 완벽하게 허구다!)

충녕은 야망 없는 날라리를 꿈꾸는 내 기준에서는 슈퍼울트라 비재미.

친구할 생각은커녕, 신하였어도 그를 임금으로 모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 간단하다. 재미 없을 것 같아서!

그의 뇌구조를 뒤적이면 한 83.27%는 '백성의 고단함'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본투비 킹.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그런 궁금함에서 출발한다.

이제야 영화 이야기에 본격 들어가는 셈인데, 장규성 감독은 충녕을 찌질한 샌님으로 설정한다. 아비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후덜덜. 형들한테도 미안하고,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언감생심, 왕이 다 뭐다냐! 야망도 없고, 성장에 대한 욕심도 없으며, 그렇다고 책 외에는 삶을 즐길만한 건덕지도 없어 보인다.


영화는 '왕자의 거지'의 모티브를 차용, 심약한 충녕이 어떻게 세종이라는 성군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결정적 계기!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만듦새, 영 아니올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야 만다. 


심약한 샌님, 충녕이 어떻게 임금이 되고자 하며 성군이 되는지, 

그 역사적 상상력의 소재,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가!  

허나, 소재로만 끝난다. 아쉽다. 

연출력이 가장 큰 문제로 보여지는데, 

충녕과 우연히 뒤바뀐 노비 덕칠의 왕 행세는 어설프다. 

충녕이 백성들이 고단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세자 행세를 한다고 모질게 맞고, 고난을 당하는데, 대역죄인이라는 어명까지 내려온 마당인데, 너무 쉽게 빠져나간다. 세자임을 증명할 방법도 충분히 있을 터인데, 덕칠은 궁궐에서 너무 무기력하고, 충녕의 민생탐방(?)은 작위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살짝 아깝다. 

변희봉, 백윤식, 김수로, 임원희 등 연기력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어딘가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극에 완벽하게 묻어있지 않다.   

 

그리고 연기 잘'했'던 젊은 배우, 주지훈의 복귀작. 그는 덕칠일 때보다 충녕일 때 더 빛난다. 확실히 그 간지, 제 아무리 분장을 하고 열연한다손, 노비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연기가 완벽하다거나 충분하다는 뜻, 아니다. 

배우 주지훈, 충분히 몸이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재밌다. 주지훈의 캐스팅. 

마약사건으로 불가피하게 군대에 가야했던 주지훈의 처지.

그리고 '벌써?'라는 논란이 따르고 있지만, 그는 어쨌든 복귀했다.  

그것, 극중 충녕의 탈피와 묘하게 맞물린다.

샌님 나부랭이였던 충녕의 깨달음 그리고 성군의 탄생.  


이 캐스팅, 충분히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주지훈 역시 마찬가지일 듯하다.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렸지만, 

이 영화에 왜 별 세 개를 줬냐고? 

물론 이유, 있다! 

만듦새만 놓고 보면, 꽝이요, 두 개로도 충분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만듦새에 대해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진정성 같은 걸 느꼈다. 

어떻게든 잘 만들고 싶은 필사의 노력 같은 게 내 마음에 닿았다. 


나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 아무런 관련도 호감도 없다. 

그저 연기 잘하는 배우 주지훈이 다시 배우로서 뿌리를 내리는 정도?

(그가 군대 가기 직전, 내가 매니저로 있던 카페에 화보를 찍으러 왔던 어설픈 '인연' 정도는 있다.ㅋ 눈앞에서 주지훈을 보면서, 감탄했다. 저 길쭉길쭉한 간지, 깎아지른 외모. 남자가 봐도, 주지훈, 아름다웠다!)  


관객들과 호흡하고 싶다는 열망을 감지했고, (어느 영환들 그게 없으랴마는!)

뭔가 지금의 정치적 세태와 맞물려 좋은 지도자를 갈망하는 어설픈 정치의식까지 느꼈다. 

그러니까, 별 하나는 그 잘 만들고 싶은 그 마음. 그 마음에 대한 화답이다. 


일부러 영화를 권하지는 않겠지만, 

이 장면만큼은 찡하였다.  


백윤식이 분한 황희 정승, 야인으로 살면서 일갈한다! 임금의 도리에 대해. 

충녕임을 알아차리진 못한 채. (근데, 황희가 충녕을 못 알아보는 것, 아무리 영화적 장치라지만, 이해가 안 돼!ㅠ.ㅠ)


"백성의 고단함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더냐?"


충녕이 세종으로 탈피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 한 마디!

충녕이 180도 변신하는 것이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어설픔에도, 

영화를 관통하는 이 호통(?)은 찡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세상에서 멸종한, 더 이상 우리에게 없을 지도자(최고통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는 결론을 짓는다. 국민성군은 더 이상 없다. 

안철수? 개뿔! 그는 그저 온건한 보수이자, 포악한 자본주의에 살짝 균열을 가게 하고 싶은 체제 지킴이다. 그만한 대안이 없다는 게 참 아쉬울 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많은 사람들, 안철수를 삶의 태도와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에 대한 신물, 단순한 트렌드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우습게도 단언하건대, 혁명이 없는 한,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성군을 향한 열망도, 결국 내 삶의 미세한 부분에서도 바꾸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말만 번지르르하다. 안타깝게도 그것, 생명력이 없다. 

삶의 최소주의와 일상의 정치의 최소주의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내가 씨부렁한 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결코 심각한 영화가 아니로소이다~ㅎㅎ  

<선생 김봉두> <이장과 군수> 등의 장규성 감독은 너무 오랜만에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참,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있다. 마지막 풍경. 

노비 덕칠과 양반집 규수 수연(이하늬)가 가정을 이뤄 애들 순풍순풍 낳고 산다. 

노비와 양반의 결합. 당대로선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일텐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담긴 장면이리라. 

물론 수연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영애인데, 계급을 넘어선 사랑과 결혼, 그것은 늘 감동을 준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2012.07.21 20:35 메종드 쭌/무비일락

인간 잔혹사의 발자취

 

이성(理性)을 동력으로 삼았던 근대는 인류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했다. 이성중심주의의 굳건한 구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의 발현, 세계의 주체를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겼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식민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근대성은 물질적 풍요까지 등에 업었다. 이성의 힘은 더욱 탄탄해졌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찬란한 문명의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세울만 했다. 그리고 인간도 변화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이성, 어느 순간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유래없이 쌓아왔던 물질적 풍요를 단숨에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광기 혹은 야만이 출현했다. 계량화와 각종 수식과 이론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던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물살에 휩쓸린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했다. 인류의 생존과 이성의 힘은, 전방위로 위협당한다. 만신전에 오르길 그토록 열망하던, 혹은 장담했던 인류는 그렇게 나락을 경험했다.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그토록 믿고 싶었던 근대이성의 총체적 결과물은 인류문명의 허구성에 대한 직시였다. 우리(인간)는 만물의 영장인가, 지구라는 혹성의 지배자인가. 회의와 의문. 실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 만들어졌다. 이성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란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한계와 역기능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이라 명명된 근대이성의 한계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른바 ‘비판 이성’을 주장, 이성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강조하면서, 믿고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인류는 첫 번째 이성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생채기를 발판삼아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패가 반드시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니다.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며,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인류의 문명 발전에 대한 집착은 이어졌다. 숱한 전쟁과 살육 등에 의한 희생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야만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 협잡과 조작을 일삼는 동안 대중들도 이에 현혹됐다. 지배세력의 이권이 곧 자신의 것인양 착각했다. 노동은 차츰 힘을 잃었고, 자본은 더욱 힘을 불렸다.

 

과거라면 손사레를 쳤을 유전자조작, 복제인간 등 디스토피아적인 발상도 활개를 쳤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합리적 이성마저도, 가출했다. 인류 스스로 집단 취면을 걸었다.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인 멘붕의 시대. 그것이 마냥 허풍은 아니다. <28일 후...>는 그 뚜렷한 징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은유일 수도 있고, 직유법일 수도 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하나. <28일후...>는 인류의 이성을 부정한다.

고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워야 할 인류문명의 결정체(이성)는 차디찬 돌멩이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분노', 그 사소한 감정조차 조절 못하는 족속이다. 인류 따위에게 이성이란? 서류상의 유물에 지나지 않을 뿐! 세상은 분노하지만 인간은 어떤 힘도 없다. 허세였고, 허풍이었다. 고작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등 돌리기. 내게 불이익이 닥칠까봐, 서로를 밀어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단초는 바이러스. 그것도 인간에 의해 배양된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바이러스의 기승은 인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고 영화는 출발한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유혈폭력과 광기의 현장. 영장류들은 이른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들에 의해 비극의 종이 울렸다.


바이러스 유출이후 28일이 지난 날, 주인공인 짐(킬리언 머피)이 병원에서 깨어난다.(그가 '퀵서비스 배달원'이란 사실도 재미있다. 분노 바이러스가 20초안에 감염자를 극단적인 분노상태로 이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 산업화가 시작된 문명의 땅, 영국은 폐허인 상태다. 거리엔 아무도 없다.(황폐화된 도시의 풍경은 <28일후...>의 영상미가 표현할 수 있는 압권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힌 불안과 의심을 품은 런던은 장엄한 레퀴엠(장송곡)이다.) 


이 살풍경, 피로 얼룩진 묵시록이다. 이성 따윈 없다. 이미 대피령이 떨어진 도시, 런던에서 짐이 처음 대면한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붉은 눈빛의 좀비. 역시 이성은 없다. 오로지 (바이러스)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 본능, 진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집어삼킨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본능이다. 신자유주의가 전파한 물성 바이러스와 다르지 않다. 경쟁과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 좀비 자본주의가 오버랩 된다.  

 

좀비는 짐을 습격한다. 위기에 처한 짐, 몇 안 되는 생존자, 셀레나와 마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를 모면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건, 그들은 고립돼 있으며 살기 위해 한때 같은 인류였던 좀비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 20초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룰은 이성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명제만 뚜렷하다. 그것이 생존의 룰이다.


할리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보증수표를 내세우고 참패한 <비치>이후, 대니 보일 감독, 심기일전을 했나보다. 생존 앞에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이성을 들고 나왔다. 감히, 누가 목숨 앞에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장삼이사라면 말이다. 그는 폐허 혹은 연옥의 현장을 짠하게 펼친다. 인간 이성을 철저히 짓밟는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인류에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양.


<28일후...>는 지옥화다. 곧, 현실이다. 과장했으나, 그 실상은 다르지 않은. 마크도 죽고 짐과 셀레나는 또 다른 생존자, 프랭크와 해나 부녀를 만난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무장 군인의 방송도 듣는다. 얼마나 반가울 쏜가. 지옥에서 만나는 인류의 흔적이라니. 그들, 무장군인이 있다는 맨체스터로 떠난다. 지옥에도 찰나의 행복은 있다. 그들, 유사가족의 형태를 띠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행복을 맞본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을 향한 눈속임이다. 바이러스 감염자, 좀비의 습격보다 더욱 흉포한 존재의 등장. 대니 보일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다.  잠시의 안도감은 영화의 속도조절을 위한 장치였다. 짧은 잔치가 끝나고, 대니 보일은 진짜 타깃을 향한다. 인간의 진짜 속성을 까발린다. 폭력과 권력의 힘은 어떻게 이성을 배반하는가! 팡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인간의 진짜 내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 


그런 본성은 무장군인 둘의 대화를 통해서도 발설된다. 철학적인 한 군인은 말한다. "지구상에서 인류의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은 결국 정상으로의 회귀다" 이성에 따를 것을 호소하는 말이다. 반면 부대를 지휘하는 군인의 입장은 다르다. 그에게, "인류사는 폭력의 역사"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국 생존자들을 지킨다던 군인(인간), 이성을 시궁창에 처박는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위장술에 불과한 레토릭이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당신은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 그리곤 파열음을 내며 대답한다. 그것? 믿을 거 못된다.

 


둘. <28일후...>는 이성의 한계 인식과정에서 나타났던 파시즘(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을 비꼰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무렵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갓 지나간 직후였다. 영국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무인도로 전락했고 어디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는 마스크로 대변되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남겼던 어떤 고립감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홍콩, 사스가 창궐했던 국가가 당했던 혹은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왕따의 순간들. 미국의 음모론까지 유포됐던 고립무원의 현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돌아올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근거조차 희박한 갖가지 유언비어와 침소봉대의 맞춤법은 '피의 순결함'으로 무장해 유대인 학살의 기치를 들었던 나치의 만행과 연결된다. 그 경계가 희미해도, 그 호들갑에 심어진 국가 혹은 민족적 분파의 연결고리는 섬뜩했다.


대니 보일은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보인다.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이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28일후...>에서도 영국에 대한, 국가에 관한 밀착감은 약하다. 대영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마크는 초반에 죽고, 애국심에 불타는 것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종족 번식과 성욕의 충족에 미친 괴물이었을 뿐이다. 국가를 내세운 이들을 일찍 죽이거나 괴물로 삼는다는 것. 박수, 짝짝짝.  


다만 유순하고 투덜이 스머프였던 짐의 반전은 극적이긴 하나 영웅주의 냄새도 살짝 풍긴다. 증오와 생존을 위한 폭력 전사로 변신한 폭이 너무 컸다는 얘기다. 

 


뱀발로, 제목과 관련해 들었다. 왜 28일일까. 한달에 약간 못 미치는 4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의아심, 가질 법한데. 여성들은 어쩌면 빨리 눈치 챌 수도 있었겠다. 28일은 여성의 생리주기.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극중 미래를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는 장교의 말을 떠올리면, '28일후'라는 제목,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는 말씀. 그렇다면? 28일후는, '새로운 시작'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희망의 도래'보다 '절망의 지속'에 배팅하고 싶다. 다시 '28일후...'가 지나도, 이성의 개안(開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 문명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당장 지금-여기의 우리는 그것을 목도했다. 과거 위정자들과 지배세력은 위선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마저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뻔뻔함이 지배하는 시대, 멘붕이 일상화된 시대, 이성은 없다! 물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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