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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한때는 사치의 대명사로 치부했었다.
그것은 오산. '샤넬'이라는 이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지 알기 전의 오해.
명품이라고 일컫기 이전의 샤넬은 그야말로 어떤 혁명. 특히나 여성들에겐 해방의 이름.

샤넬은, 곧 코코 샤넬.
진부하고 식상한 이야기 한 토막.
세기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밤에 뭘 입고 주무삼?" (그따위가 궁금하더냐, 이 기자놈아!)
마릴린 먼로의 우문현답. "샤넬 No.5다, 이놈아." (먼로에 대해서라면 다음 기회에~)

그렇다. 샤넬은 본능이었다.
전세계 여성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핸드백이,
샤넬 '2.55 퀄팅백'이라지?
1955년, 코코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선보인,
퀼팅(누빔)처리한 가죽백에 금색 체인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만든 이 제품.
하나의 2.55를 위해 180여개 공정을 거쳐 장인 6명이,
일주일 이상 정성을 들인다는 이 제품.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은 물론, 샤넬을 갖는 것을 로망으로 삼게끔 했다.
당시,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었단다.
"샤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여자가 아니다." 허허.

스타일, 샤넬의 모든 것.
카디건 슈트, 샤넬 슈트, 샤넬 No.5...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터.
하나로 정리하자. 샤넬 스타일(Chanel style).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
가식 따윈 아듀~ 쓸모없는 복장에 대한 저항.

장 콕토는 말했다.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잔인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자. 분노, 변덕스러움, 친절함, 유머, 반짝이는 생각, 검소함, 그리고 관대함이 샤넬이라는 다시 없을 독특한 여자의 모든 것이다."
장 콕토도 샤넬, 무척 좋아했었나보다. 행간마다 꼼꼼한 애정이 넘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 표현할까.


물론 과장도 있었겠다.
코코는 스스로 "마음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며 도둑에다 거짓말쟁이, 엿듣기의 명수"라 말했다.
의상 제작에 있어 여성 해방을 적극적으로 내비친 적도 없단다.
그저 샤넬 스타일이, 여성 해방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난 게고, 
사후 누군가가 과장했을지도.
코코는 또 사랑에 빠져, 독일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했다.

왜 샤넬 이야길 꺼냈냐고?
1971년 1월10일, 39년 전, 코코 샤넬이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꺾었다.
미터기도 아닌데, 왜 꺾냐고. 내릴 때가 됐으니, 꺾는 게지.
어쨌든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샤넬은 (여성) 몸의 혁명을 만든 장본인이다.

샤넬, 알고 입으면 당신은 더욱 멋진 사람.
내게 샤넬은 더 이상 사치의 대명사, 아니다.
샤넬의 옷이건 액세서리건 향수건, 당신의 스타일을 위해서라면 향유해야지.
그러면서 샤넬의 것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코코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나는 당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겠소이다. 하하.
샤넬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샤넬이 된다면, 더더욱 얼쑤~~~

P.S. 샤넬은 여전히 개인기업 형태로 운영된단다.
말인즉슨, 주주나 투자자에게 공개한 주식회사가 아니며 경영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인 사업의 확대나 이윤의 추구만이 샤넬이라는 기업의 모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란다. 믿거나 말거나, 당신의 몫.

영화 <코코 샤넬>은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봤다. 어떻든가?
오드리 토투의 샤넬. 정말 구미 당기는 조합이긴 하다.

==============


문화․예술 혁명을 기대한다, 당신도 샤넬처럼

20세기 여성을 해방시킨 패션혁명가에서 엿보는 우리 시대


“20세기 여성 해방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샤넬이다. 코르셋을 벗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이 아니냐. 물론 코르셋 없는 속옷을 만든 이는 따로 있지만, 상품으로 팔릴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든 사람이 샤넬이다. 핸드백에 끈을 달아, 한 손을 풀어준 사람도 샤넬이고. 샤넬은 화도 잘 내고 말도 막 한 사람인데, 살면서 가장 분노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크리스티앙 디오르다. 디오르는 H라인, A라인 등을 만들었는데, 남성의 눈으로 남성이 보기에 괜찮은 옷을 만든 사람이다. 샤넬은 디오르를 향해 반동이라는 말을 썼다. 20대들은 샤넬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샤넬이 되면 된다. 샤넬은 돈도 잘 벌고 재밌게 살았다. (웃음)”


- 우석훈 (≪88만원 세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저자)의 강연 중-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는, 늘 달라야 한다”


지난 1971년, 39년 전 1월10일. 한 시대가 저물었다. 코코 샤넬.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별칭이 코코(Coco). 패션 브랜드이자 아이콘으로서 주로 회자되던 그 이름. 산책을 한 뒤 자신의 침대로 향했던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고 가정부가 달려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의 죽음 치고는 황망했나. 아니, 그렇지만도 않다. 어쩐지 죽음을 예감한 뉘앙스 아닌가. 향년 87세. 1월의 찬바람을 살짝 만끽한 뒤, 육신을 접은 것은 영원한 스타일리스트이자 혁명가의 센스일지도.



샤넬의 이름 앞에 혁명가라는 레떼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떠올려보자.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것, 그것은 몸의 혁명이 아녔을까. 샤넬 이전, 복잡하고 불편한 옷을 감내하고 살아야했던 여성들이었다. 샤넬은 ‘왜 여성만’이라고 반문했다. 손을 움직였다. 우아하면서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의상디자인이 그녀의 손끝에서 나왔다.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에서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여성미가 넘치는 스타일이 나왔다.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지드레스, 슈트, 나팔바지, 단발머리, 트렌치코트, 터틀넥스웨터, 리틀블랙드레스 등. 이른바 샤넬 스타일의 시작이었다. 유행은 흐르고 바뀌어도, 변함없이 애용되는 바로 그것, 샤넬 스타일.


또 들어볼까. 핸드백으로부터 손을 자유롭게 한 것, 무릎 근처로 올라간 치마로 땅에 닿는 긴 치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샤넬의 공이었다. 여성용바지 또한. 무엇보다 철 지난 것이 아닌 불멸의 것으로 스타일을 창조한 사람. 기존의 것과 달라야하는 것. 그것은 혁명의 다른 이름.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잊거나 모르고 있지만, 여성을 옷뿐만 아니라, 시대의 속박으로부터 자물쇠를 연 사람, 샤넬이다. 당신에게 지금 샤넬 제품이 없을지 몰라도, 둘러보라, 샤넬 스타일은 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한가”



샤넬은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일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세간의 입방아로 비유하자면, 스캔들 메이커였다. 어린 시절의 불행을 보상받으려는 듯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다. 1895년, 그녀 나이 12살.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샤넬을 포함한 세 자매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아버지가 버젓이 있는데도 고아가 돼야 했던 소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18세, 낮에는 보조양재사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코코란 별칭도 이때 얻었다. 본인은 이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커리어의 시작은, 젊은 장교 발잔과 연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는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량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1910년, 발잔의 친구이자 영국 폴로 선수인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고 곧 스웨터, 스커트, 액세서리 등도 취급했다.


하지만 카펠의 죽음은 샤넬에게 지울 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한 그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샤넬은 “모든 것을 잃었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가 남긴 이 말은 카펠의 죽음이 남긴 상흔이 아녔을까. “나는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성과 사랑하는 의상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남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도빌룩, 리블블랙드레스 등을 통해 패션의 전설을 기워나갔다. 남성의 눈이 아닌, 여성의 편리에 초점을 맞춘 샤넬 정장도 만들었다. 샤넬은 옷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혁명을 진두지휘한 혁명가였다. 1921년 5월5일 선보인 ‘샤넬 넘버5’는 당시 연인이자 샤넬이 결혼을 꿈꿨던 러시아의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의 소개로 만난 향수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게 제작을 의뢰해 선보인 제품이다.


샤넬은 일과 함께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 폴 이리브 등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첩보원으로 활동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이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슈파츠)에게 빠져 ‘모자 견본’이라는 작전(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독일에 협력한 배신자로 구금됐다가 처칠의 영향력으로 풀려났으나, 슈파츠와 함께 스위스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모르핀을 주사했던 시기를 거쳤다.


“패션은 건축,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여정이었다. 1939년 사업상 부티크를 닫아야했던 샤넬이 패션계에 복귀한 것은 1954년, 71세 때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 앞서 말했듯, 샤넬에게 그는 가장 분노한 대상이었다. 기껏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옷을 만들어놨더니, 남자의 시각에서 여성을 재단한 옷으로 흐름을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그녀는 트위드 슈트, 앞부분이 까만 구두, 금색 체인의 누빈 가방 등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샤넬 스타일을 창조했다.



샤넬은 그렇게 자기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자존감을 세운 혁명가였다. “나는 자신이 사용하는 향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여성들이 불쌍하다. 향은 그 자체가 말해야 한다. 향은 은밀하게 속삭인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녀는 늘 달라야한다는 혁명적 주체였기에, 문화예술계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염문설도 끊이질 않았고. 그녀는 피카소 등 예술가와의 우정을 위해 최초의 남자 향수 ‘뿌르무슈(Pour Monsieur)’를 만들기도 했으며,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리네 디트리히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창작활동을 도왔다.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세기(20세기) 프랑스에는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샤넬, 드골, 피카소.” 폴 모랑도 그녀를 향해, “19세기의 막을 내린 천사”라고 일컬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다. 패션을 건축과 비유하면서 균형과 비율을 강조했던 샤넬은, 종합예술가였다. 스타일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이길 바랐던.


그는 늘 시대를 읽고자 애를 썼으며, 시대에 함몰되지 않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남들만큼, 남들 보기에’라며,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를 대세처럼 늘어놓고, 획일화될 것을 강요하는 이 몰개성의 시대. 샤넬을 사는 것보다 샤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혁명을 향한 디딤돌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당신을, 기대한다. 


  [뷰즈 2010 1·2월호 기고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개인마다 시각 차가 있겠지만,
굳이 음악적이라는 수사를 쓰고 싶진 않고.

존 레논은, 비틀스보다 오노 요코 때가 좋다.
말인즉슨, 존 레논의 완성은, 오노 요코를 만나고 나서.

1966년 11월의 런던, 마음으로 못을 박게 한 여자, 오노에게 훅~ 간 존은,
“내 주위에는 예쁜 여자가 널려있지만, 내겐 요코 뿐이라며 닭살(?)도 날렸다.

존에겐 아내와 아들, 오노는 남편과 딸이 있었으나,
1969년 3월20일 지중해의 관문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이 세기의 커플은, 신혼여행도 반전·비폭력 퍼포먼스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힐튼호텔 침대 위, 하루종일 침묵시위로 베트남전 끝내라!


오노가 존을 품은 대가. '못생기고 젖가슴은 늘어진 창녀' 같은 비난도 들었지만,
존이 오노를 품은 이유. '요코는 내 스승', 7살 연상의 여인을 향한 존의 완전자폭.

세계적인 뮤지션이자 백만장자 셀러브리티였지만,
오노와의 결합 이후, 존은 전위예술을 하는 뮤지션으로 스스로를 갱신했다.

결혼 이듬해, 존은 존 윈스턴 레논에서 존 '요코' 레논으로 이름을 바꿨고,
오노와 헤어지자 존은 극심한 자아해체를 겪다가 재결합 뒤 진정될 정도였다.

헤어짐과 재결합을 오가는 진통이 있었지만,
서로는 서로의 일부이자 전부로서 예술적 동반자이자 삶의 동지였다.

이젠 누구도 그들을 '잘못된 만남'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12월8일, 그 남자의 가슴에는 그 여자만 있었는데, 생뚱맞게 총알이 박혔다.

1980년이었다.
탕탕탕탕, 네발의 총성.

그 남자, 존 레논이 죽었다.

1980년 ‘비틀스’ 존 레넌 피격 사망


1980년은, 광주를 비롯해 그렇게 잔인했던 해.
아무 것도 모르던 초딩의 나는, 내 친구의 생일을 축하했을 뿐.

그리고 오늘, 바로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그리고 피플 투 더 파워.


아울러 내 친구, 큰별의 생일!
축하한다. 짜슥아! 존이 떠난 날이 니 생일이라 기억하긴 좋구나. 하하.
그러고보면, 존 레논도 큰 별이었지, 지구의 큰 별. ㅋㅋㅋ
 

환생한 존 레논, ‘오노 요코(Ono Yoko, 1933.2.18~)’와 다시 사랑하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오늘(11월10일).

나는 어쩔 수 없이, 랭보를 떠올렸고,

아무래도 그에 걸맞는 커피레시피는 '내 심장의 임무', 에스프레쏘 리쓰뜨레또.

그 검은 액체를 내 심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삶이든, 커피든, 두 번이 없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를렌이 랭보와의 사랑을 회상하며, 아마도 나지막히 읊조렸을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검은 액체는 내 심장에 묻고 있었다.

네 생애 가장 빛나는 죄악이 있니? 너는 살아가는 동안, 그걸 만날 수 있겠니?

글쎄... 동성애까지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럴 것까진 없겠지만,

나는 심장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길 건넸다.

삶이야말로, 어쩌면 꾸역꾸역 삼켜야하는 비루한 생과 일상이야말로,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지 않을까.


.... 물론, 내 심장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액체를 꿀꺽~ 삼켰을 뿐...



젠장, 바람 참 많이도 분다. 너도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를 그리는 것이냐.

아니면, 랭보의 시마냥,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고, 퇴출시키며, 강제출국이나 시킬 줄 아는, 

이 기똥차게 엄한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존재가 없음을 한탄하는 것이냐. 

<토탈 이클립스>라도 보고 싶은 날이다... 하~~~


자고로,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랭보가 그랬듯, 우리에게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시인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랭보의 이말도.

"시인은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1871년 5월 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차츰 그가 세상과 절연했던 나이에 도달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시인도 아니요, 꽃미남도 아니기에,

어느 순간, 그가 살았던 시간을 훌쩍 건너뛸 것이다.

다행스런 일이지. 하~~~


에라잇, 술 모임이나 가야지~ 랭보를 위하여~

오늘 누가 랭보를 떠올리기나 하겠냐만.

뭐, 어때. 내가, 내 심장이, 바람구두를 얘기하잖냐.

당신의 랭보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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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랭보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머니의 꿈, 그것보다 더 따뜻한 침구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새들,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듯이

손발이 얼어버린 이 어린아이들은 아름다운 환영으로 가득 찬 감미로운 꿈을 장만한다.

- 아르튀르 랭보, 「고아들의 새해 선물」 중에서 -


열다섯 살, 아직은 청소년이었던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0.20 ~ 1891.11.10)의 데뷔작은, 어쩐지 지금의 우리 시대를 연상 시킨다. 어머니가 없는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을 하는 존재의 부재에 시달리는 우리들. 열다섯의 천재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우리들. 찬바람이 불어줄 이즈음, 랭보를 떠올리는 이유다.


그러나 이 천재시인은,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 방랑이 질퍽댈 것 같은 11월, 세상과 절연했다.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난 연인처럼, ‘바람구두’를 신고 떠났다. 그것은 아마 외로움과 불화 때문이었으리라.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폴 베를렌과의 격정적인 연애를 끝내고 세상에 삼투압하지 못한 천재가 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기에, 시큰둥해져버린 생. 더디 가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의 예술적 탐험은 조금이라도 더 가능했을까.


반항과 불화가 만든 시 세계


우리가 아는 랭보의 모든 것은 불과 5년, 열다섯부터 스무 살 무렵에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조숙한 천재를 만든 것일까. 그의 생을 잠깐 훑어보자. 보병 대위였던 아버지는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 그는,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과도한 엄격함과 아버지 없는 결핍감 사이에서 랭보는 반항을 꾀하고 자유를 갈구했다. 중학시절 은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열여섯 살, 학업을 포기했다. 이듬해 스승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서 절대자에게 도달”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탕아적이고 반항적인 천재의 기질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열일곱,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천재의 행보는 ‘견자(見者, voyant)’라는 말로 압축된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우스, 루소와 보들레르 등으로부터 문학적․사상적 자양분을 흡수한 그는, 가출을 하고 방랑을 일삼았다. 시도 함께 익어갔다. ‘시인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하듯, 그의 시는 세상을 꼬집고 흔들었다. 동시대 유럽문명에 대한 회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혐오, 제 구실을 못하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경멸, 우월주의에 빠진 식민통치자들의 거만함과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부패와 타락을 향한 개탄 등 그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론자이기도 했다. 즉, 시인은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을 꿰뚫고 개인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제약과 통제를 무너트리는, 예언자적인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시 세계를 펼쳤다.


십대의 천재시인은 그렇게 기존의 문학을 초월하려는 일대 모험에 나섰다. 그가 처음 견자라고 믿었던 시인이 바로, 폴 베를렌이었다. 대중들에게 세기의 스캔들로 더욱 많이 회자되는 랭보와 베를렌의 사랑. 대작이었던 「취한 배」를 들고, 그는 베를렌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1871년, 랭보는 열일곱의 나이였다. 문학적으로 서로에게 매료된 두 사람에게 닥칠 운명은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당시 베를렌은 결혼한 상태였지만, 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관계도 영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방랑의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아내와 랭보 사이에서 베를렌은 때론 갈팡질팡했고, 랭보는 지나치게 집착했다. 1873년 브뤼셀에서 술에 취한 베를렌이 랭보와 논쟁을 벌이다, 권총을 쐈다. 랭보는 왼손에 상처를 입었고, 베를렌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이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랭보는 이 2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썼다. 베를렌은 이때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회상했다. 형용모순이 빚어내는 이 아찔한 생의 기억, 예술가들의 특권일까. 베를렌이 랭보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다. 하지만 천재에게도 힘겨운 시기는 상흔을 남기는 법인가보다. 문학적 열의가 식기 시작했는지 랭보는 살 길을 모색한다. 그 시기를 관통하는 산문시집 《일루미나 시옹》(1886)은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랭보에게 더 이상 시는 모든 것이 아니었다.




바람구두를 신고 떠난 모험가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라르에서 쓴 랭보의 편지 중에서 -


부르주아와 물질만능의 부조리를 십대에 깨닫고 이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시대를 거스르던 랭보는 그래서 모험가였다. 예술적 방랑도 너무도 많은 체험이 압축된 탓일까. 새롭고 물질적 세계를 향한 마음의 쏠림 역시 강했다.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스무 살이 넘자 문학을 단념했고, 예술적 자아를 배신했다. 시를 황금과 상품으로 바꿨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무대로 상인이자 무기밀매상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오만이 잃어버린 자비보다 낫다”며 예술적 자유인으로서의 오만은 풀이 꺾인 것이다. 그것이 견자로서의 또 다른 방랑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돌아온 탕아’와 같은 레떼르를 거부했다. 시인과 무기밀매상의 간극이 메워지진 않지만, 한편으로 시 역시 세상에 저항하는 랭보만의 무기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만의 극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혐오하던 물질세계에 빠져 지내다 한쪽 다리를 절단(매독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있다)하고, 홀연히 서른일곱의 나이로 쓸쓸히 맞이한 죽음.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마냥 보내다 요절한 바람구두. 그 바람구두의 생이 끝난 지점은 11월이 맞다.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그를 떠올리기에도 11월은 어울린다. 다만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격정의 시절을 관통하면서 랭보에 매혹당할 순 있겠지만, 두 번은 없다. 랭보 역시 그러했으므로.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2009 11·12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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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또 다른 이름, 피나 바우쉬

영면한 무규칙 다종예술가에 대한 추모


“두려움은 이 시대의 주요문제 중의 하나로, 피나 바우쉬의 창작 작업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두려움이며 그녀의 등장인물들 두려움이다. 그것은 사람을 마비시키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두려움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그래서 상대편에게, 파트너에게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상대방의 반응들이란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어쩌면 - 다시금 두려움에서 - 맞받아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일찌감치 피나 바우쉬는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자신의 창작 작업 및 무용수들과의 작업을 위한 제동장치인 동시에 추진력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녀는 "그것은 과정이에요. 사랑받고 싶음. 그것이 분명히 추동력이에요. 만약에 내가 혼자였다면 아마도 상황이 달랐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 연관이 되잖아요"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앙상블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녀는 앙상블에 해를 입히지 않고 싶을뿐더러, 일종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피나 바우쉬: 두려움에 맞선 춤사위』(요헨 슈미트 지음/이준서, 임미오 옮김|을유문화사 펴냄) 중에서 -


죽음은 그렇다. 태어남으로서 가지는 권리이자 의무, 한편으로 두려움. 그렇기에 그 두려움과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사랑. 두려움과 사랑을 주제로 춤을 췄던, 창작열을 불태웠던 피나 바우쉬(Pina Bausch)였다. 영원히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함이었을까. 자신이 받은 사랑에 만족했기 때문일까. 지난 6월, 마이클 잭슨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추모와 애도가 들끓던 와중, 30일 ‘현대 무용계의 전설’ 피나 바우쉬가 춤사위를 멈췄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이자, 한 세계의 멸실이며, 인류의 손실이었다.


향년 68세. 암 선고를 받은 지 5일 만의 황망한 죽음이었다. 어떻게 손 써볼 도리도 없을 만큼 급작스런 일이었다고 한다. 피나 바우쉬는 여전히 춤과 함께 생을 견디고 있었고, 앞선 10여일 전에도 무용단과 함께 무대에 섰다. 아마 본인도 짐작하지 못하게 다가온 죽음이 아니었을까. 춤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예술가도 죽음 앞에선 어쩔 수 없었나보다.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


그를 단순하게 춤꾼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오독이다. 독일 출신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무용가’와 같은 타이틀이 붙지만, 그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춤,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탈장르 양식인 ‘탄츠테아터(tanztheater)’가 바로 그것. 20세기 현대무용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면서, 경계 없는 예술의 전형을 보여준 그는, 말하자면 ‘무규칙 다종예술가’였다. 


그랬다. 그에겐 경계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관습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무(無)’를 버무려 또 하나의 예술을 빚어냈다. 그것은 기존 질서와 권위에 저항하면서 나온 파격이었고, 혁신이었다. 탐험과 탐구의 정신 그리고 실천이 만들어낸 성취. 고이고 머물면, 썩은 물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그 덕분에 대중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도 명백하다. 이런 찬사는, 그리하여 호들갑이 아닌 진실이다. “피나 바우쉬는 무용을 근본적으로 재창조해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통틀어 가장 뛰어난 혁신가중 한명이다.”


사실 그는 낯가림이 심했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무대에서 검은 복장을 즐겨 입은 것은,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를 좋아했고, 명성에 우쭐하지 않고 겸손했다. 그런 그였지만, 무대에서는 달랐다. 관객을 휘어잡았고, 예술적 목표의 관철을 위해 무모하리만치의 용기와 추진력을 발휘했다. 본디 성정과 다른 그런 분열(?)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감히 유추하자면, 앞서 언급했던 두려움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그는 인간에 심연에 주목했다. 어떻게 인간이 움직이는가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흥미를 지녔다. 그의 작품은 그래서,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질문을 다뤘다. 어쩌면 관객들에게 당혹감 혹은 위안을 받게 만들었다. 춤사위와 어우러진 스토리텔링. 두려움과 사랑은 물론, 그리움과 외로움, 좌절과 공포, 인간에 의한 착취, 어린 시절과 죽음, 기억과 망각 등. 우리 내면 속의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들. 무대에서 펼쳐지는 그 마음 속 심연에 때론 당혹하면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구나, 하는 위안.


스토리텔링, 인간의 실존과 만난 춤사위


1940년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난 그는, 엣센 폴크방 예술대학, 줄리어드 음악원 등에서 수학한 뒤, 1962년 폴크방 무용단의 프리마돈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7년 뒤, ‘시간의 바람 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쾰른 콩쿠르 1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안무가의 길로 들어섰다. 33세가 되던 해, 부퍼탈(Wuppertal) 시립 무용단 예술감독을 맡았다. 여기서 탄츠테아터는 탄생했고,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인 ‘Nelken(카네이션)’이 1982년 선보였다. 무대를 채운 1만 송이의 카네이션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이 밖에 ‘카페 뮐러’와 ‘마주르카 포고’ 등의 대표작이 있다. 평소 그를 무척 흠모하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녀에게>의 처음과 끝을 이 두 작품으로 열고 닫았다. 그를 모르던 많은 사람들도 이를 통해 ‘피나 바우쉬’라는 이름을 접하면서 강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공간’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발휘했다. ‘세계 도시 시리즈’는 이를 증명한다. 한 도시에 장기 체류하면서, 그 도시를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1989년 ‘팔레르모, 팔레르모’(이탈리아 팔레르모)를 시작으로, ‘마드리드’(스페인 마드리드), ‘비극’(오스트리아 빈), ‘Only You’(미국 LA), ‘유리 청소부’(홍콩), ‘비젠란트’(헝가리 부다페스트), ‘아쿠아’(브라질 브라질리아)등에 이어, 2005년에는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 컷’을 초연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일관되게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들 사이의 접촉의 어려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만남을 갈구하는 모습. 그는 추상적인 예술을 추구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의 언어를 몸짓으로 드러냈다. 삶에 어쩔 수 없이 스며든 아픔과 고통의 순간, 그리움과 사랑의 편린 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춤사위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 명성에 힘입어 인구 40만의 작은 지방도시 독일 부퍼탈은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이름 알려지지 않은 시립무용단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독특한 색깔을 지닌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발돋움했다(한국인 무용수 김나영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고스란히 유산이 됐다. 이젠 박제된 무엇으로만 그의 춤사위와 이름을 호명할 수밖에 없게 됐다.


위대한 유산, 피나 바우쉬


하지만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공연을 비디오나 DVD로 만들어서 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던 한 예술가의 고집 같은 것. 그렇기에 지난 2005년 내한 공연을 보지 못한 것은 크나큰 아쉬움이다.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김갑수는 1960~70년대의 음악적 아이콘이자 초대형 피아니스트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Sviatosiav Richter) 생전에 그의 연주장에 못 가본 것이 정말 한이라고 했다. 피나 바우쉬의 영면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동시대의 예술과 감흥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순간을 놓친데 대한.


더 이상 춤사위를 접할 순 없지만, ‘피나 바우쉬’를 호명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의 예술을 좀더 풍성하게 만드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는 기존 질서나 권위만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경계를 넘어, 껍데기를 깨고,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예술은 자기복제가 아닌 창조와 새 역사를 빚었다. 예술은 완성형이 아니고, 우리는 더 많은 예술과 만나야 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6월의 마지막 날이 오면, 담배를 입에 물리라. 골초였던, 내한 공연 당시에도 공연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서 담배를 입에서 놓지 않았던 피나 바우쉬를 떠올리면서, 작별을 고하지 않을까. 안녕, 피나 바우쉬.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2009 9·10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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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애초 파블로 네루다 때문이었다. 더 따지자면 영화에서 비롯된.
<일 포스티노>!(물론 네루다는 주인공이 아니고, 영화적 상상도 가미됐다.)

그리고 칠레를 알아보니,
아옌데가 있었고, 빅토르 하라가 따라왔다.
무엇보다, 그곳엔 혁명이 있었다. 아옌데가 주도했던.

칠레혁명에는 인민들이 있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던.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에게 칠레는,
자유무역협정(FTA)를 맺은 상대국이자, 와인의 나라지만,
내겐 혁명을 만들어낸, 네루다, 칠레, 빅토르 하라와 같은 혁명가를 탄생시킨 부러운(!) 국가다.



오늘(9월23일)은 다시, 파블로 네루다의 36주기다.

그는 대문호였지만, 정치가이자 혁명가이기도 했다.
1970년 9월, 대선을 앞두고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그는,
후보직을 사퇴하고 공산당과 사회당이 주축이 된 인민연합의 단일후보로 아옌데를 내세웠다.


그것이 칠레혁명을 만들어냈다.

빅토르 하라는 불러댔다.
"우리 승리하리라(Venceremos·벤세레모스)"


칠레는 모름지기, 9월에 가야한다.
칠레혁명이 일어난 것도 9월이었지만,
혁명의 스러짐, 자본가의 쿠데타가 혁명을 매장한 것도, 9월이었다.
아옌데가 11일, 빅토르 하라가 16일, 네루다가 23일, 9월의 혁명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바리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네루다의 집에 들이닥쳤다.


네루다는 군바리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단다.
"잘 찾아보게, 여기 당신들에게 위험한 게 한 가지 있지, 바로 ‘시’라는 거지."
어쩜. 이것이야말로 아직 죽지 않은 혁명간지 아니겠나.
그러나, 그도 결국 2주 후 세상을 떠났고.

앞서 혁명가들의 나라였던 칠레에 발 딛기 전, 봐야 할 영화목록들.
 <칠레전투> (칠레전투 3부작)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실종>

그리고, 후식으로 또 보는 <일 포스티노>.


근데, 사실 칠레를 가고 싶은 솔직한 이유 중의 하나는,
W.

뭔, 소리냐고?
적도에서 남극까지 총 4270㎞에 달하는 긴 국토를 지닌 칠레, '3W의 나라'로 불린다.
'기후대’(Weather)'가 우선 다양하다.
와인벨트를 걸친 덕에 향 좋고 맛있는 '와인'(Wine)이 있다.
 진짜는 이거다. 아름다운 '여자'(Women)가 많다는 것.

그리고, 그닥 유명하지는 않지만,
커피도 있다. 긴 국토 덕분에 커피벨트에도 걸치니까.
칠레에 가서 보고 확인할 것도 참 많다.
그나저나, 칠레 가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칠렐레팔렐레하면 안 될텐데.
너무 싼티 나잖아!!!


어쨌거나, 지금 여기에도, 벤세레모스!
MB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자본꾼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현실 아닌가.
버티고 견디면서, 당신과 나, 벤세레모스!

☞ 네루다, 피노체트, 바첼레트

☞ 1973년 9월11일의 아옌데




2008/09/23 -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파블로 네루다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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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티 댄싱(Dirty Dancing>, 방방 뛰며 발을 구르게 만들었던 영화.
그래서 2007년 재개봉 때, 다시 한번 발구름을 하기도 했지만.
 

패트릭 스웨이지의 진짜 매력은,
<폭풍 속으로(Point Break)>.
나에겐 그랬다.

<사랑과 영혼(Ghost)>의 로맨틱 가이 따위는,
말하자면, 쉬어가는 페이지.

패트릭은,
진짜 마초일 때 빛났더랬다.

패트릭이 맡았던 보디, 악당임에도 도저한 카리스마로 극을 압도했고, 진짜 마초의 향을 풍겼지...


애송이 FBI요원 죠니(키아누 리브스)를 매혹시키고야 말았던 싸나이, 보디.
폭풍우 몰아치고 해운대를 삼킬 법한(물론 오버) 파도 앞에서도 서핑을 나섰던, 
그 진짜 싸나이를 기억한다면,
지금 그의 떠남은 아마, 다음 생애를 기약하자는 신호임을 알 것이다.

패트릭의 폭풍간지가 가장 빛났던 이 때.
마지막 장면, 유유자적 서핑하러 들어가며, 보디가 죠니에게 그러잖나.
"다음 생애에서 보자."



그래, 내 스크린 속 진짜 마초, 패트릭 스웨이지.
췌장암 따위가 싸나이의 길을 막을 순 없는 법.

안녕, 나의 진짜 마초.
잘가요, 나의 폭풍 간지.
이번엔 또 어디로 서핑 갔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다음 생애에서 봅시다.

 
2007/08/22 - [메종드 쭌/무비일락] - 차가운 파도의 유혹, 끌(꼴)리면 가랏!!!...<폭풍 속으로>
2007/11/21 -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더티 댄싱'이 돌아왔다! 환호하고 구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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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팔월에 날아온 두 통의 편지.
믿기 힘든, 아니 믿기 싫은 작별을 고하는 편지였어.

우선, 백두대간과 씨네큐브의 결별.
그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씨네큐브가 작별을 고한다는 말이었어.



거기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크로스 카운터.
뭬야, 이래도 돼?란 말이 절로 나왔던 압폰지(스폰지하우스 압구정)의 작별인사.


여느 만남이 그러하듯,
이별도 대개 느닷 없이 훅~ 다가오더라.
사람의 힘이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지.
작고 사소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생의 어떤 균열이야.

어떡해, 어떡해.
알면서도 떠나보내야 하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이런 작별의 순간들.

흑, 저들과의 헤어짐.
이유나 명분이야 각자 있지만,
크게 보면, 자본과의 싸움에서 밀려난 억울하고 아쉬운 작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내뱉으며 자조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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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소익선배랑 뺑이랑 맛난 점심을 먹고 길을 거닐다가,
내 이름을 누군가 부른다.
휙 돌아봤더니, 대학 과동기놈이다.
정말 오랜만. 방가방가.

얼마 전, 녀석은 이메일 주소가 바뀌었다고 동기놈들에게 단체메일을 뿌렸고,
나는 오랜만이라고 아직 살아있냐(!)고 답장을 보냈고,
녀석은 한번 보자는 의례적인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렇게 우연히 해후할 줄이야.
대면한 것은 거의 6~7년 만이지 싶다.

그닥 절친한 사이는 아닌데,
녀석은 대뜸, 잊고 있던, 아니 깊이 잠수하고 있던, 한 문장을 꺼낸다.
"오징어는 문어라 불리길 원치 않는다."
녀석이 이 얘길 꺼내는 순간, 녀석과 난 거리에서 펑~ 터진다.

뭔 말인가 싶겠다.
내 생애 첫 번째 시나리오 제목이다.
대학 2학년인가, 3학년 때 교양으로 영화학개론을 수강한다.
시나리오 과제가 주어지고, 나는 단편 애니메이션용 시나리오를 얼렁뚱땅 만든다.
제목하여, "오징어는 문어라 불리길 원치 않는다."

같이 수강하던 녀석들, 제목에서 자지러졌다.
뭐 내용은 이젠 기억나지 않지만, 내 딴엔 나름 공을 들였으리라.
명목이야 어쨌든, 생애 첫!이지 않은가.
녀석은 그때 함께 수강했던 멤버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
따식, 날 흠모하고 좋아했구나. 캬캬.
참, 그 영화학개론 수강결과는, 내 성적표에서 보기 힘든 'A+'이었다.
시나리오가 손발이 오그라들게 좋았던 것 아닐까! 흠흠.

그리고, 어제 흘러나온 이 뉴스. 
문어로 둔갑한 오징어 다리 뷔페40곳 유통
깜딱이다.
오징어 입장에서 보자면, 완전 내 시나리오 제목 아닌가.
"오징어는 문어라 불리길 원치 않는다."

허허. 이런 우연의 연속이 있나.
오래 기억에 웅크리고 있던 그 문장이 이틀 연짱으로 부활하다니.
어쩌면 하늘의 계시?
시나리오를 한번 보정해서 완성해 보라는?
다시 되씹는다.
"오징어는 문어라 불리길 원치 않는다."

강원 삼척시 임원항 앞바다에서 잡힌 갑오징어와 문어의 양쪽 특성을 모두 가진 희귀 연체동물이란다


근데 젠장,
그때 쓴 것이 남아있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주제와 내용으로 썼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썅.
오징어만 불쌍하게 됐다. ㅠ.ㅠ
문어아저씨는 주례만 서면 된다.(응? 뭥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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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온 휴대폰 문자엔,
뭔가 현실의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 찍혀 있었다.
마이클 잭슨 사망. 심장마비 추정.


아니, 뭔 '뻥'을 치나 했다.
얼마 전, 삼년 간의 공백을 깨고,
다음달부터 순회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그랬거나, 사실이었다.
초딩, 중딩 시절이 스쳤다.
'팝'을 처음 알게 한 이름, 마이클 잭슨.
'팝 = 마이클 잭슨'이었고,
어린 나는 '문워커'를 하고 싶었다.
영화 <문워커>를 봤던 기억도 몽실몽실.
(이 영화, 혹평이 난무했지만, 누구와 같이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이 영화 좋았고, 재미있었다.)

스캔들성 가십이 난무하고,
오해와 조롱 섞인 언사들이 그의 주변을 감싼 듯 했지만,
나는 그를 '슈퍼스타' 지위에서 내린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세기의, 절대적인, 팝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말마따나, 그는 대중의 오해와 편견에 고통받은 스타.
 

김강 선생님은,
그에 대한 각종 가십 때문인지, 그를 동시대의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충격적인 죽음 소식을 듣고선,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었구나하면서 슬펐다고 하셨다.


나도 슬펐다.
오늘의 커피엔 그래서, 마이클 잭슨 형아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이말이 떠올랐다.
"개인의 죽음이 한 시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스타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다." 어때, 동의할만하지 않은가.

그렇게, 또 하나의 시대가 갔다.
나의 추억 한켠도 봉인됐다.
이제, 6월25일은 다시 채색될 것 같다.
내가 겪지 못한 한국전쟁이 머리로 떠올리는 영상이라면,
내 가슴 속에서는 동시대를 관통한 마이클 잭슨 형아가 펄떡거릴 것 같다.

그래 그렇게,
안녕, 마이클 잭슨 형아...

어쩌면, 이 노래, 형아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네.
우리 모두 그렇게, "You Are Not Alone"

그래도 내게 형아의 베스트는,
빌리 진(Billie Jean).




P.S... 이 글을 쓰면서, 또 하나의 별이 졌음을 알았다.
파라 포셋.
원조 '미녀 삼총사'의 멤버이자, 70~80년대의 섹스심벌.
고백하자면, 그는 내 중딩 시절 한때의 원초적 욕망이었다.

며칠 전, 암투병 중인 그에게 청혼했던,
오랜 연인, 라이언 오닐의 '러브 스토리'와,
"나는 살고 싶다"던 포셋의 말이 나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내 80년대가 점점 더 멀어진다.
정작 뒤져야 할 80년대 피의 짐승은 29만원으로 잘도 버티건만.

안녕히, 내 사춘기의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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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커트 코베인.

15년 전 불꽃처럼 산화한 너바나의 리드싱어. 

4월8일, 그의 죽음이 발견됐다지만, 5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 것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커트 코베인 사망 15주기 음반 이벤트


어쨌든, 최근 나는 우리가 듣고 있는 어떤 음악들이,

커트 코베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감성과 마음과 교감하는 어떤 음악들.

그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어떤 계기. 


언니네이발관 리더 이석원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그러니까,

커트 코베인은 그렇게 우리에게 여전히 속삭이고 향을 풍기고 있는 셈이다.

Smells Like Teen Spirit.

☞ 2008/04/08 -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볼륨을 높여, 'Smells Like Teen Spirit'

시간을 뒤로 돌려보자. 생각해보면 1996년은 정말 놀라운 해다. 그해 홍대쪽에선 언니네이발관, 델리스파이스, 크라잉 넛, 코코어 같은 밴드들이 한꺼번에 등장했고, 그 성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음악을 만들겠다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대체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90년대 중반에 그런 인디 문화이자 창작 문화가 동시에 붐업한 건 간단한 이유다. 커트 코베인 때문이 아닐까. 그 사람이 모든 걸 바꿔놨다고 본다. 이 발언은 되게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커트 코베인이 “너도 음악 만들어봐, 음악 만드는 거 되게 쉬워”라고 유혹한 게 아니다. 어떤 계기를, 물꼬를 터줬다고 해야 하나. 재능이나 감각은 있었지만 쉽게 시작해볼 생각을 미처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냐면(웃음),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참 쉽게 이야기한다. 그전에는 특별한 재능과 자격이 있어야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90년대 중반 이후로 아무나 음악하는 세상이 되었다라는 식의 일반화. 거기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90년대 중반 이전에 음악하던 사람 중에는 프로가 한명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다. 한국 그룹들은 왜 이렇게 창작곡을 못 쓰고 다 카피곡만 하지,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거다. 그들에겐 어떤 음악적 재능이나 자격이 없었고, 하눅에만 존재하는 어떤 보호막 덕분에 특권을 누리다가 그게 너바나라는 밴드에 의해 다 깨졌고, 정말 재능있는 친구들이 그제야 음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