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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항동의 푸른수목원, 해 지는 노을이 끝내줍니다. 그 노을빛으로 이 가을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싶을 정도죠. 그런 곳에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정은임 아나운서를 떠올리는 '기억의 숲'이 무성하게 잎을 피웁니다.


기억의 숲이 무성하게 잎을 피울 무대는 단촐하며 정든님 정은임을 이야기하기 딱 좋아요. 크거나 거대하지 않습니다. 조곤조곤 속삭이기 좋은 무대와 넓지 않은 풀밭.



19일(일) 오후 5시 푸른수목원에서 정은임과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눕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정도 나누고 기억과 추억을 공유합니다.


더불어숲 축제 전체를 연출하는 장주원 PD님의 요청으로 <기억의 숲 : 제 목소리 들리세요?_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매년 정은임 추모바자회를 여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기억의 숲: 제 목소리 들리세요?>은 영화와 음악 그리고 사람과 사회를 담았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을 기억하고 현재에 맞춰 재구성하는 시간입니다.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정은임 아나운서의 10주기, 46번째 생일(10월 13일)을 맞아 정은임이 누구인지,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왜 그를 여전히 품고 있는지, <정영음>의 현재적 의미 등을 공유합니다.


1부 순서에는 ‘우리 마음의 공동체, 느낌의 공동체 <정영음> 그리고 정은임에 대하여’ 노래하고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는 정은임과 <정영음>이라는 감성 브랜드를 품고 있는지, 90년대 정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감성브랜드의 관점으로 [정영음, 정은임]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정영음>은 단순히 영화음악을 전달하는 기능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청춘의 감수성을 짚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건넸다기보다 시대에 필요한 가치와 의미를 넌지시 생각해보게끔 만들었습니다.


2부에는 '우리 목소리 들리세요? 정은임을 기억하는 현재에 대하여' 노래하고 이야기합니다. 정은임과 <정영음>은 여전히 우리 마음에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자리가 될 겁니다. 지금 왜 다시 '정은임'이며 <정영음>을 떠올리는지, 그 현재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주시 하늘동의 은임씨, 듣고 계세요?"라는 제목으로, 제가 은임 누나에게 보내는 연서를 낭독할 예정입니다. <정영음>에 단 한 번도 보내지 못한 엽서를 아주 늦게 보내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정은임을 말하고,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시간입니다. 푸른수목원으로 오세요.



<정은임의 FM영화음악> 팟캐스트 => http://www.podbbang.com/ch/1813


오시는 길 : 성공회대에서 가깝습니다. 푸른수목원 오는 길입니다.

http://parks.seoul.go.kr/tem…/common/park_info/location.jsp…


저녁 무렵 되면 추울 수 있으니, 아니 분명 추울꼬야. 옷 껴입고 오세효!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아름다운 사람, 정은임. 

그 어느 때보다 말랑말랑한 시기인 10~20대, 
누군가로부터 받은 '세례'가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기도 한다.

10년이 흘렀다. 
정든님으로부터 이 세계와 영화, 음악 등에 대해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매년 추모바자회를 연다. 그게 올해는 오늘(8월 3일)이다. 8월 4일 기일을 하루 앞두고 1년에 한 번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지금,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서 10주기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다.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녀가 떠난 10년, 여전히 우리는 1년에 한 번 이렇게 만나고 정든님 정은임을 그리워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오늘 시간이 허락하거들랑,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 와서 정은임의 목소리와 모습을 보고 가는 건 어떻겠나. 물론 당신이 정은임의 세례를 받았다면 말이다. 

그리고, 
10년 전 울면서 썼던 정은임 추모칼럼 : http://swingboy.net/27



[행사자료]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

“누나처럼 편한 존재였다. 우리의 고민이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아직 실감 못하겠다. 여전히 그녀는 우리 곁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다.”(정대철님)

“벌써 라고 생각될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흘렀다. 방송을 들으며 사춘기를 보냈고, 아직도 정든님(정은임)을 그리워하며 그때의 방송을 들으며 내 일기장 속의 영화 주인공들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정든님을 추모하고, 정든님을 여전히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일 수 있게 끝까지 우리를 한자리로 뭉치게 해주는 정든님, 고맙고 그립다.”(박유정님)

지난 2004년 8월4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정은임 아나운서. 10년 전 그녀는 떠났지만, 마음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8월4일(일)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서 추모바자회를 연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여는 10주기 행사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의 회원들이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함께 한다. 

이들은 매년 정은임 아나운서 기일 즈음에 맞춰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FM 영화음악> 등을 통해 영화와 세상, 그리고 삶을 형성했던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그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속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기억을 지속하기 위해, 그 목소리, 그 얼굴, 그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아름다운 하루’를 함께 보내고 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 모여 봉사활동도 하고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 소외아동지원 금으로 사용된다. 

다음은 10주기 추모바자회 내용이다. 

1. 행사일 : 2014년 8월3일 일요일 오전 11시~오후 6시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 (서울역 14번 출구, 서울 용산구 동자동 43-54 1층, 02-363-8778) 

[관련 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사이트 ‘정든님’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말로@마을캠프

 

 

비가 음악소리처럼 흐르던 지난 5월의 봄밤, 말로님이 들려주던 자유의 선율에 취해 있었다. 

재즈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임을 확인했던 봄밤이 기시감처럼 살아났던 늦가을밤. 

마을캠프에서 다시 재즈를 만났다. 

말로님의 재즈가 가을밤을 휘감고 있었다.

 


 

자유! 


다시, 말로님이 그 봄밤에 내게 건넸던 자유를 꺼내 본다. 
그러니까 지금은 서울의 밤, 서울야곡에 취해도 좋을 늦가을밤.

 

 

 

22~23일, 한국 재즈의 산실 '클럽 야누스'(서초동)에서 자유가 흐른다.
아, 가고 싶다. 말로님을 비롯해 웅산, 혜원 등 나의 재즈 여신님들이 나오니까. http://news1.kr/articles/1412699

아름다운 밤이다. 
그 가을밤에도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잘 있나요?, 당신!

 

가을이 떨어지고 있다. 이 가을밤, 평생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다.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쓴다. 기억한다. 느낀다. 그 해 그 가을밤처럼. 

내겐 오직 하나뿐인 순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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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안녕. 

잘 지내나요? 

그곳도 여기처럼 후텁지근 한가요? 


오늘, 폭풍처럼 뜨겁고 무더운 하루, 

우리는 누나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버텼습니다. 


매직 아워(Magic Hour)와 같은 시간이었죠.

매직 아워, 해가 넘어가서 사라졌지만 밝은 빛이 아주 약간은 남아 있는 순간. 

하루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순간. 밤이 됐지만 아직 낮이 남아 있는 그런 순간.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서 누나를 만나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누나를 그렸죠. 


이 세상에 없는 누나라지만, 우리는 압니다. 

누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요. 


누나 덕분에 우리는 만났고,  

누나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추억을 나눴습니다. 

누나 없는 세상, 살아남은 자로서 가지는 슬픔을 함께 공유했죠.


우리 때문에 누나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죠? 



어쨌든 누나, 참 고마워요. 

눅눅했었던 각자의 흑역사 한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누나가 건넨 한 마디와 음악, 그리고 영화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은 아녔을까요!  


누나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누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에요.


누나는 누나 방송을 보고 들었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른 뒤,

영화감독이 되고 아나운서가 되고 기자가 되고 심지 곧은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참 기뻐했다고 하셨죠?


오늘 목포 부산 대전 안산 인천 등등 그렇게 먼곳에서, 

정든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를 위해 모인 우리를 보고, 

누나가 참 기뻐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제 말이 틀리지 않죠? :)

 

누나가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하고 좋은 방법이라죠? 

그렇게 사는 것이 단순한 기억이 아닌 누나를 존경하는 방법이라는 것. 


아마 우리는 그렇게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싶습니다. 



오늘 여전히,  

우리는 누나가, 언니가, 그렇게 당신이 그립습니다. 

 

한여름 밤, 정든님이 별에 스치웁니다. 별처럼 빛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하루를 함께한 아름다운 당신들에게도 고맙습니다. :)

우리, 내년 10주기 위해 또 만나요. 


안녕, 잘 자요. 

누나도, 아름다운 사람들도...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신청은 위즈돔 : http://www.wisdo.me/2743)


지킬과 하이드가 등장합니다. 
'클림트적' 표현이라고 말해도 좋을,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이라고나 할까요??? 

먼저, 하이드가 선수를 치네요. 악마적 퇴폐에 대하여. 

원나잇스탠드를 호명합니다.  
어감부터 뇌리에 박히는 이미지까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합니다. 유후~ 얼레리꼴레리~ㅎㅎㅎ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나잇스탠드라니, 이거 뭔 고양이가 풀 뜯어 먹는 소린가요?
(헌데 실제로 고양이는 풀을 뜯어 먹습니다!) 

그 광경, 슬쩍 지켜봅니다. 

"내일이 지나고 나면 우린 아마 다시는 못 만나게 되겠지?"
"오늘밤뿐이라고 해도 그리 나쁘진 않잖아?" 
"왜 사람들은 관계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오늘밤뿐이라고 생각해. 망상도 추측도 없겠네." 
"그냥 오늘밤을 멋지게 만드는 거야."

오늘밤, '원나잇 스탠드'라고 규정해도 좋을 그들만의 시간. 쿵쿵따~
눈 맞은 그들에게 하이드는 뿅 갑니다. 하악하악. 
애초 ‘내일’이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에게 그 '하룻밤', 
어쩌면 그들 생의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만큼은 말이죠. 


맞습니다. <비포 선라이즈>
셀린느와 제시가 열차칸에서 눈이 맞아 오스트리아 빈에 함께 내려 원나잇스탠드를 하는 영화.

설명 참 단순명료하죠? 

물론 하이드는 오로지 원나잇스탠드에 꽂혀있지만 지킬은 다른 지점에서 혹합니다. 

음반가게 청취실에서의 장면, 기억하나요?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를 들으며 몰래 상대를 훔쳐보다가 상대방 시선이 느껴지면 아닌 척 다른 곳을 쳐다보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표정과 분위기. 
아, 지킬의 가슴은 콩닥콩닥 아련해집니다. 
 
결국 셀린느는 나중에 고백하죠. "내가 다른 곳을 볼 때 날 몰래 훔쳐보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꺄아아아아아아~앙! 두둥, 여기서 연애의 팁 하나. 몰래 훔쳐 볼 때, 상대방이 알게 하라!

그리고, 원나잇스탠드 끝내고 헤어지는 마당에 진한 딥키스 한 방 날리며, 
흐물흐물해진 지킬의 심장에 카운터블로를 날리며 온전하게 허물어뜨리고야마는 이 한마디.

"9번 트랙, 6개월 후 6시."  


이 미친 한 마디 때문에 지킬과 하이드는 후일담을 궁금해하며 9년을 기다리고야 말죠. 

아, 세상 모든 것은 이렇듯 완벽하지 않은 법입니다. 
"오늘밤뿐이라고 생각하자"던 그들이 다시 만날 약속을 힘겹게 하고야 맙니다. 
"내 맘과 다를까봐 두려웠어"라며 다시 만나자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던 그들, 
5년 후부터 시작해서 1년, 그리고 6개월까지 시간을 줄여서 낙찰을 봅니다.   

허허. 이게 또한 바로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어젯밤과 또 다른 다음날 아침의 마음. 아침의 주림을 저녁의 다담상으로 잊는, 우리네 사람살이!

그렇다면, 이 영화를 왜 보는가? 


잊지 않기 위해서죠. 무엇을? 비포 선라이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나잇스탠드를?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20대의 빛나는 시절을? 오스트리아 빈의 아름다운 풍광을? 아님 우리의 20대를?

아뇨. 한 사람. 여자사람. 
그녀는 지금 부재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육체를 지닌 생명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숨을 쉽니다. 
그녀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속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 고 정은임 아나운서입니다. 
지난 2004년 8월 4일, 세상에 작별을 고한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입니다.
[정은임의 FM영화음악(정영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화와 음악과 세상을 알려주던 그 사람.
(참고 :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http://swingboy.net/27)

우리는 매년 그녀의 기일에 맞춰 추모바자회를 열고 그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해 8월 4일에도 아름다운가게 서울역점에서 9주기 추모바자회가 열릴 예정인데요.
(참고 : 정은임 추모사이트 '정든님' http://worldost.com

그 전에, 정은임 아나운서도 좋아했을 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추모바자회를 앞두고 사전모임을 갖습니다. 사전모임이라고 특별할 건 없습니다. 
그저 정은임 아나운서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좋은 감정이면 충분하고요. 
그냥 모여서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 뿐입니다. 
커피와 맥주가 무한 제공되고요. 안주만 알아서 갖고 오면 됩니다.  

다만, 정은임 아나운서를 모른다면 애로가 있으니,
정은임 아나운서를 알고 있으며 그녀를 기억하고픈 분만 오셨으면 합니다.

이날 수운잡방에는 그녀(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끝날 무렵, 우리는 제시와 셀린느처럼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수운잡방, 1년 후 6시"  

(신청은 위즈돔 : http://www.wisdo.me/2743)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12. 여기저기서 고통 섞인 비명이 섞여 나옵니다. 미디어에 게재된 사진을 봅니다. 그런데, 사진을 그냥 사진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사진에 담긴 이미지가 통각을 불러옵니다. 아픕니다. 슬픕니다.

 

12, 그렇습니다. 체로키족이 명명한 '다른 세상의 달'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크리크족이 말한 '침묵하는 달'이 됐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침묵하는 달. 주류 언론 대부분은 침묵합니다. 지난 21, 한진중공업 복직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른다섯, 두 아이의 아빠는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 먼저 나쁜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나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듦입니다. 이제야 내가 많이 모자란 걸 압니다. 슬픕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자신의 행복이라던 가족을 버려야 했을까요.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을까요.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뽑은 커피 한 잔, 내 눈물 한 자락이 담깁니다. 우리는 그의 힘겨움을 덜어주지 못했습니다. ‘함께 살자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녔습니다. 22, 현대중공업하청지회 노동자가 19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습니다. 한중노동자 소식을 듣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곳일까요.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사회라니요. 그럼에도 이 국가는, 이 나라의 정치(권력)는 묵묵부답입니다. 젊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응답하라고 부르짖건만 말입니다. 이 사회는 왜 남의 고통에 무덤덤하기만 한 것일까요.

 

생각해봅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크리스마스였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만으로 흥겹고 즐겁고 벅찼던 시간,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하는 부류로 나눠지나 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본(화폐)의 자장 안에 들어간 까닭일까요? 온 누리에 선물을 베풀지 못하나 봅니다. 크리스마스가 슬픈 이유입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1.16~2004.12.28)을 떠올립니다. 8년 전, 세상을 떠났던 뉴욕의 지성이자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뭣보다 지금 그를 떠올린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성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지 속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도 간파한 대중문화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손택 여사는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였습니다. 1966, 그가 서른세 살에 내놓은 문화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는 세계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책은,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발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었죠. 미국 뉴욕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빠져 지냈고, 영민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를 닮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철두철미했습니다. 평생 4시간의 수면을 삶의 규칙으로 삼았고, 스물다섯에 이혼하면서 남편이 준다는 양육비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강의와 기고로 고집스럽게 자신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졌고, 자신만의 사상적 체계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손택 여사는 그렇게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쉽게 자신을 놓거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40세 무렵 유방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2년 이상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은유로서의 질병을 발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임에도 불구, 학자나 작가들이 만들어낸 병에 대한 은유적 이미지가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라는 삶의 좌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발터 벤야민, 아르토, 바르트 등의 유럽의 지성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했습니다. 생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로 사회현실에의 참여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뭣보다, 특정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작가, 문화비평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시대와 세계에 문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의 자극을 줬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예술적인 심미안을 갖춘 사회적 행동가로서, 이성과 감성이 균질하게 배분된 행복한 경우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실천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무엇보다 손택 여사, 911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 불어 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비판하며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언급했고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전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미국의 패권욕에 제동을 걸고, 세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고자 현실 참여와 감수성의 자극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2003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독일출판협회는 그에게 "거짓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하면서 '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손택 여사, 문학가이면서 세상과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실천한 운동가였습니다. 무릇 작가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그는 백퍼센트 작가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이 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지 않나요?

 

손택 여사가 사라예보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고 나의 고통처럼 받아들여야합니다. 어떤 매체가 타인의 고통을 어떤 태도로 다루는지,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의식을 가지는 일, 중요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것은 능력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손택 여사가 떠났던 이맘 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힘들어서, 돈이 없고 무서워서, 세상을 등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어떤 아픔과 고통에도 응답하지 않는 이 사회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세상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내 책임도 아닐 법한. 그러나 그 모든 것, 동떨어진 무엇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억해야 합니다. 나 역시 아무런 악의 없는 누군가나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고 아픔을 겪게 될 수 있음을. 내가 외면하면 언젠가 혹은 곧 나도 외면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편하지만, 잊어선 안 될 진실입니다.

 

그렇다고 막연히 희망을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차라리, 희망을 버려!’ 이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망은 현실에서 꽃필 수 있는 것이지, 막연한 기대에선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은 그랬습니다.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전쟁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이상적인 세상은 오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나빠지거나 최악으로 가는 것만 막아도 다행이 아닐까요. 수잔 손택은 그런 면에서 당연히 읽어야 할 작가이며, 타인의 고통도 반드시 읽어야할 책입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버려!”, 그것은 비관이 아닌 현실 긍정이며, 고독한 자기푸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사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소식과 인류를 짓밟는 해악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다손,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몸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당사자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고문과 폭력을 연구한 영문학자인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도 아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투쟁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는 눈길, 자본과 폭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폭도로 모는 시선. 이 모든 것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와도 연결돼 있지 않을까요.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지금 시대의 명징한 징후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챙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고통은 타자를 분석하거나 교정하지 말고 돌봄의 윤리를 갖는 시선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을 것은 물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까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는, 수잔 손택의 나지막한 속삭임을 지금 떠올리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워야했던 수잔 손택도 힘을 잃고 마는 때가 왔습니다. 20041228, 향년 71,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지성을 잃었습니다. 8년 전,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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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한비야도 지치고 힘들어서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를 달래주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기, 또 하나는 베스트 프렌드,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 물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그녀, 일기를 들었다. 그녀, 여전히 매일 같이 일기를 쓴다. 틈날 때마다 쓴다. 현재와 순간을 살아가는 바람의 딸에게 일기는 일상다반사. 그녀는 말한다. “아마 나는 일기를 안 썼으면 건달이 됐을 거예요. (웃음)”


그녀 이전, 일기쓰기로 삶을 지탱한 사람이 있었다.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 6.12~1945.3.12). 


일기는 나치 치하의 유대인 소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의 결과였다. 개인적인 것이 곧 역사적인 것임을 상기시켜준 《안네의 일기》. 그것은 어떻게 한 소녀를 지켜준 것일까. 6월, 안네가 태어나고,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달. 학살과 억압을 뚫고, 세계를 품은 여인들의 정신을 지켜준 ‘일기의 힘’을 엿보자.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6월12일, 안네가 태어난 날이자, 《안네의 일기》가 시작된 날이다. 1942년, 피난 생활 중이었다. 안네는 13세 생일 선물로 붉은 체크무늬 일기장을 받았다. 안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키티(Kitty)’라는 이름을 붙였고, “생일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적었다. 일기는 일기 이상이었다. 열세 살 소녀는 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일기는 자연스레 안네의 친구가 됐다.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소녀의 모습처럼, 안네는 키티에게 시시콜콜 털어 놓았다. 일기는 그렇게 가혹하게 바뀐 주변 환경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소녀의 절친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제도 됐다. 그녀는 외로웠다. 친구도 없었다. 아니, 친구를 둘 수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일기에 그것을 토로한다.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를 말할 차례인데,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내겐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할게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외롭고 또 외로웠다. 몸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마음마저 닫아야했던 억압적인 상황. 세상이 좁다며 발랄하게 뛰어다닐 열세 살 소녀에게, 현실은 감옥이었다. 독일군을 피해자니 어쩔 수 없었다. 은신처가 세상의 전부였던 소녀.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친구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법을 차츰 터득한다.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완성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www.annefrank.org)에는 각국에서 번역된 《안네의 일기》가 전시돼 있다.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는다. 그럼에도 개인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네의 일기》에는 시대 상황이나 나치의 만행 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십대 소녀의 눈으로 본 세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얀 백지는 안네의 마음이 쓴 필체로 채워졌고, 거기엔 안네가 또박또박 새겨졌다.


소녀는 글의 힘, 종이의 힘, 일기의 힘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안네의 일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딥니다.” 그녀의 생은 너무도 일찍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일기를 쓴) 종이는 남았다. 잘 참고 견뎠다. 오래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남았다. 십대 소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른들이 만든 참혹한 세상에서 일기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던 소녀는 일찍 어른이 됐던 것일까.


일기를 통해 성숙해진 소녀


실은 안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란 그녀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자, 유대인에 대한 온갖 박해와 차별이 이뤄졌다.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1938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거주의 자유를 박탈당한데 항의하던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의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했다. 이를 구실로,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집단 테러를 가했고, 학살을 본격화했다.


유대인이었던 안네의 집안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안네의 아버지는 미국 망명에 실패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그녀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1942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유대인을 색출해 수용소로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안네 가족(과 다른 가족들)은 옴짝달싹도 못한 채 네덜란드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 숨죽이며 살았다. 건물 내 비밀공간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오로지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소수의 지인만이 유일한 소통 통로였다.


 안네 프랑크 우표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은 살고야 만다.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먹을 것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부족했고, 한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갈등도 많았다. 어머니나 언니와 말다툼을 했다. 불만도 쌓였다.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도 있었다. 오랜 감금에 따른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따랐다. 반면 작고 소박한 행복이라고 그들을 지나치진 않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도 일기장 곳곳에 자리한다.


안네는 일기를 통해 성장했다. 또한 일기를 통해 갑갑하고 꽉 막힌 생활에서 탈주했다. 상상력이 나래를 폈고,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기다렸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녀의 키는 계속 자랐고, 그녀의 글도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그 일기, 1944년 8월 1일로 끝이 난다. 8월 4일 밤, 나치의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급습, 전원이 체포됐고, 안네 가족은 수용소로 이송했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한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45년 3월 12일, 열여섯의 나이, 안네는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죽었다. 나치로부터 해방되기 불과 2달 전이었다.


은신처에서 함께 지내면서 사랑을 느꼈던 페터도 사라졌다. 안네의 아버지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게슈타포가 휩쓴 은신처에 덩그러니 남겨진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던, 은신생활을 도와준 미프 기스에게 일기장을 건네받았다.(미프는 지난 2010년 1월, 100세로 타계했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안네의 일기장을 출간했다. 우리가 아는 《안네의 일기》는 그렇게 빛을 보게 됐다. 물론 첫 출판 당시 아버지는 안네의 성적 호기심과 부모와 다른 가족을 비난한 부분을 삭제했었다. 무삭제판은 안네 사망 50주기를 맞아 출판됐다.


일기를 쓰면서 여성은 강해진다!


안네의 은신생활을 견디게 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일기쓰기’를 통해, 자유를 박탈당한 엄혹한 시절을 버텼다. 다른 것을 하기도 힘든 환경이었지만, 안네의 글쓰기는 어머니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글 쓰고 있는 안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프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보다시피, 나의 딸은 작가랍니다.”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결과적으로 과소평가됐다. 작가 앞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생략된 셈이다. 《안네의 일기》는 약 60개 언어로 번역돼, 약 3200만 권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 소녀의 기록이 후세에게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과감 없이 보여줬다. 안네가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공기를 그만큼 정교하게 포착하진 못했을 것이다.


한비야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안네 프랑크가 있었다. 일기를 쓰면서 강해지고 세상을 좀 더 품게 된 여성들을 우리는 이제 안다. 삶이 힘겹고, 위로 받고 싶다면,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내 작고 사소한 글쓰기가 세상을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조 : 《안네의 일기》, 위키백과

 

[서울여성가족재단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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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촌부라고 생각했었다. 미셸 윌리엄스. 그녀를 처음 인식했을 때 그랬다. <브로크백 마운틴>. 동성애자(게이)임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에니스(故 히스 레저)의 슬픔, 그것이 이 영화의 정조를 지배했었다. 

 

헌데 그런 에니스를 지아비로 삼고 살아야했던 엘마(미셸 윌리엄스). 동성애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와 공간. 그속에서 그저 보수성을 머금고 살아야 했던 엘마. 가슴에 돋는 슬픔을 품은 그녀의 이야기, 나는 궁금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뒤로 밀려야 했던 두 여자, 루린(앤 헤서웨이)과 엘마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히스 레저의 죽음이 있었고,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와 결혼하질 않아서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헤어진 히스 레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어머니. 그런 삶의 비극 역시 품은 여성으로서 미셸 윌리엄스. 실은 예쁘거나 아름다운 배우는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엘마의 배역 정도로 스크린에 존재할 줄 알았다.  

 

 

그러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깜딱이야. 알마가 마릴린 먼로라고? 뭐야, 미친 거 아냐? 말도 안돼. 그러나, 내가 틀.렸.다. 그것도, 완.벽.하.게. 마릴린 먼로와 다르지만, 그녀는 마릴린 먼로였다. 마릴린 먼로를 우리가 몰랐던 만큼, 미셸 윌리엄스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던 그녀(마릴린)의 로맨스'를 살짝 드러낸 그녀(미셸)는 결과적으로 '소수만 알았던 그녀의 진면목'을 드러낸 셈이다. CNN은 그녀의 연기에 대해 이리 표현했다. “미셸 윌리엄스는 사라지고 마릴린 먼로만 남았다.”

 

미셸 윌리엄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어야 했다. 

마릴린 먼로는 물론, 미셸 윌리엄스를 알게 해 준 이 영화. 괜찮다아~

 

그리고,  우리가 오해했던 마릴린 먼로. 올해 50주기. 

살아 있었다면, 6월1일은 86세 생일이다. 마릴린,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 선물로, 그녀에 대한 오해 한꺼풀, 벗긴다.

내가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뷰즈> 기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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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먼로 씽킹(Monroe Thinking)!

[People View] 마릴린 먼로 50주기,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그녀가 진짜 예쁜 이유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배우,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던 용기 있는 배우,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배우,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 속에 투사하며 가부장적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존을 시도했던 파워 페미니스트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성, 연기를 통한 자아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 시인 같은 지성적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하게 자기 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인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성, 그러면서도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을 직면했던 마릴린 먼로!”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이 발언, 도발적(?)이다. ‘영원한 섹스 심벌’이자 ‘백치미의 대명사’인 마릴린 먼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뒤집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마릴린 먼로’라는 설명이 없다면, 저 발언에서 먼로를 끄집어내기란 쉽지 않다. 유지나에 의하면, 먼로는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용기와 지성을 갖춘 배우였다.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먼로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섹시와 관능으로만 덧씌워진 그녀의 이미지, 정당한 것일까? 마릴린 먼로가 궁금하다!


2012년, 마릴린 먼로 50주기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6.1~1962.8.5).

 

2012년, 사망 50주기를 맞았다. 죽은 먼로를 향한 다양한 이벤트, 당연한 일이다.

 

칸영화제는 먼로를 ‘2012년의 아이콘’으로 선정, 그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공개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협회 매그넘 소속 작가들이 찍은 미공개 사진들이 수록된 ‘마릴린 바이 매그넘’도 출간된다.

 

앞서, 먼로의 전성기 중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도 만들어졌다. 먼로의 새로운 모습이 대중들에게 속속 공개되고 있다.

 

헌데 이런 움직임, 과연 먼로에 대한 전형적이고 박제된 이미지를 깰 수 있을까. 섹시하다, 관능적이다, 와 같은 수식어로부터 먼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글쎄, 아닐 것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먼로의 지성미는 어색하다. 먼로에 대한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먼로의 농염한 사진으로부터 지성과 사회적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긴 싫다. 먼로의 지성, 한마디로 배신이다. 먼로가 섹시할 때에라야 대중은 반응하고, 소비할 뿐이다.   


먼로가 탄생시킨 고유명사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먼로 효과(Monroe Effect). 그녀가 주연한 <7년만의 외출>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고층빌딩 아래 발생하는 난기류나 지하철 환기통에서 발행하는 바람 때문에 스커트가 갑자기 뒤집히는 경우를 일컫는다.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걸음걸이에는 먼로 워크(Monroe Walk)라고 이름을 붙였다.

 

먼로 룩(Monroe-Look)은 허리를 졸라매고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글래머룩을 뜻한다.

 

먼로 메이크업(Monroe Make-up)도 있다. 하얀 피부, 입가의 점, 새빨간 립스틱으로 메이크업할 경우, 이렇게 붙이는데 당시 여성들은 일부러 입가에 점을 찍기도 했다.

 

먼로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더욱 각인시킨 명사들이지만, 한 결 같이 진짜 먼로(의 삶)는 없다. 먼로의 (영화 속) 이미지에만 기댔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먼로의 불행이었다. 지독하게 불행했던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지독하게 애를 썼던 한 여성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그녀의 육체에만 관심을 가졌다. 조울증에 시달리면서 36세에 요절한 그녀. 의혹은 여전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의해 타살당한 것 아닐까. ‘섹스 심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다. <라이프>紙와 했던 마지막 인터뷰에 실렸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섹스 심벌이 사물화 될 때 그렇다. 나는 물건 취급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든 스튜디어의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살고 있다.”


다시 지켜보자, 먼로의 삶

 


먼로가 가장 좋아한 미국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그녀처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이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살지 않았고,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였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먼로는 양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고아원을 전전했다. 그녀는 철저히 가난했고,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16세, 첫 결혼을 했고, 먹고 살기 위해 방위산업체에서 위장도색 페인트칠을 했다. 우연하게 사진 모델 일을 하게 됐고, 단역배우로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일과 꿈을 하찮게 여겼다. 결혼한 지 4년,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후 먼로는 단역배우를 거쳐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마릴린 먼로는 이 과정에서 얻은 이름이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로 섹시스타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7년만의 외출>(1955), <버스 정류장>(1956), <왕자와 쇼걸>(1957), <뜨거운 것이 좋아>(1959), <부적합자>(1961) 등에 출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연기자로서의 그녀는 결코 다른 배우에 뒤지지 않았다. 섹시와 관능의 이미지에 매몰돼 연기력이 저평가 받았을 뿐이다. 섹스 심벌은 다분히, 남성판타지가 만든 산물이었다.

 


아울러 먼로를 ‘하찮게 여기게’ 만든, 사생활에 대한 편견도 따랐다. 그녀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극작가 아서 밀러 등과 결혼과 이혼을 했고, 아인슈타인, 프랭크 시네트라, 이브 몽탕, 존 F 케네디 등과 염문설을 뿌렸다. 이런 것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바람둥이 이미지를 그녀에게 각인했다. 그것은 동서고금 대중들의 악취미다. 셀러브리티의 연애담을 멋대로 각색한다. 그리고 주홍글씨를 새긴다.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에 의하면, 먼로는 진정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은 여인이었다. 조 디마지오와 혼인했을 때, 남편 가족의 종교인 가톨릭을 믿으려 애썼고, 아서 밀러와 혼인하고선 그를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그녀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남자를 사랑했다.

 

성격차이에 의해 헤어졌지만, 디마지오와 다시 재결합을 추진했다. 재결합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사랑은 더욱 아파해야했지만. 실제로 디마지오는 20여 년 이상 매주 그녀의 무덤을 찾아 장미꽃을 바쳤다. 1999년, 그가 숨을 거두기 전 했던 말에서 우린 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구나.”

 


 

마릴린 먼로, 자신의 가난만을 극복하려고 애쓰진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언론인이자 작가, 링컨 스테펀스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녀 지인 중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녀 또한 FBI에 의해 그렇게 분류돼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한 이의 편에 서서 모순된 사회구조에 맞서고자 했다. 가난이 개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금발의 백치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지 50년이 흘렀지만, 많은 우리는 먼로를 섹스 심벌과 백치미에 가둔 채 오해(!)하고 있다. 금발의 반쯤 풀린 눈과 도발적인 입술로 교태를 부리는 몸짓, 풍만한 가슴과 큼지막한 엉덩이로 발산하는 관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여인. 《마릴린 먼로: : The Secret Life》의 저자, J.랜디 타라보렐리는 말한다. “마릴린 먼로는 단순한 유명 영화배우, 훨씬 그 이상이다. 그녀는 연약한 정신이자 관대한 영혼 그리고 그녀 자신의 마음과 황폐한 싸움을 한 용감한 투사였다.”

 

모순과 비겁, 정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백치미라며 우습게 여겼던 마릴린 먼로만큼의 사회 인식을 품고 있을까? 먼로의 50주기.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다가올 먼로의 모습을 지켜보자. 그 속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찾자.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함께 지켜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 먼로의 또 다른 고유명사, 먼로 씽킹(Monroe Thinking).   

 


참고자료 : 위키백과, <네이버 [인물 세계사] :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 : The Secret Life》(J. 랜디 타라보렐리 지음/성수아 옮김|체온365 펴냄),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칼 롤리슨 지음/이지선 옮김|예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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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위인이자, 
같은 해(1809년) 같은 날(2월12일) 태어난,
(찰스 로버트) 다윈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보다,

어쩌다 그들과 같은 날짜에 태어난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보다,

오늘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흔드는 것은, 휘트니 휴스턴.

그러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듣는 것밖에 없다.

듣고 또 듣고 흥얼거리고 또 흥얼거린다.

<보디가드>의 케빈 코스트너가 묻는다. "YOU, OK?"
나는 답한다. "I'm Not OK!"

나도, "Wait!"라고 외치고 싶다. 휘트니를 향해.
아직 휘트니는, 그 목소리를 박제할 때가 아니다.

허나, 나는, 우리는 세기의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1992년 12월의 겨울, 스무살이 채 되기 전의 어린 준수는,
'보디가드'가 되고 싶었다. 그땐 그랬다...

안녕, 휘트니...
당신의 노래가 때론 부서지고 흩어진 내 마음을 보듬고 지켜줬다. 
그러니, 안녕, 내 마음의 보디가드여...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듣는 것. 당신의 목소리와 노래를 듣는 것.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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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넘어 혁명을 꾀한 사진예술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멕시코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영화, <프리다>.

섹시한 배우로 각인됐던 셀마 헤이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프리다 칼로를 표현함으로써 화제가 됐었다.

프리다에 가렸지만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다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가 아니다. 극중에서 프리다와 춤을 췄던 여자. 자유분방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사진가로, 애슐리 주드가 연기했던 티나 모도티.

나는 <프리다>처럼 <티나>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가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사랑의 화신이었던 티나 모도티를 다룬. <프리다>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듯, 티나를 다룬 영화는 그녀를 되짚어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되짚어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혁명. 닥치고, 혁명!


티나 모도티, 독립적이면서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에드워드, 부드럽게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오늘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여기 홀로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오. 에드워드,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는지! 아침까지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베고 누워 있었답니다.

그런데 날 깨운 게 그것의 희미한 향기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서 발산되는 듯한 당신과 내 욕망의 혼? 그래요. 어떻게든 달성하고픈 욕망에 취하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고 미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겠지요.

(《티나 모도티》, p.86, 티나 모도티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에드워드 웨스턴이 찍은 티나 모도티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는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 사진에 입문했다. 1919년이었다. 앞서 그녀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로보와 사랑했었다. 로보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만나 예술과 사회, 인문을 습득했던 그녀였다. 멕시코 문화를 보길 원했던 로보가 현지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는 웨스턴의 모델이자 조수가 됐다. 이어,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으며 티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멕시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혁명 후기 멕시코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나게 해준 이도 티나였다. 당시 프리다는 티나를 숭배했던 소녀였다. 문화계 모임에서 티나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했다. 허나 웨스턴은 결국 그녀를 떠났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드워드가 떠난 뒤, 멕시코에서 사진의 길을 걷고 있던 1928년. 그녀는 쿠바출신의 망명정치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연인이 된다. 티나는 특히 멜라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사랑이 인도한 길을 자연스레 따랐다.

로보가 알려준 예술,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 안토니오가 제시한 혁명. 그 모든 것이 티나의 것이 됐다. 티나는 사랑 덕분에 존재했던 것일까. 티나를 사랑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듬해, 안토니오는 정적들로부터 암살당했다. 티나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도 악의적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을 향한 세상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었다. 한 번은 “미국에선 美가 모든 것의 기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오의 저격은 그녀에게 팜 파탈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미지의 저주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혁명을 향한 전진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과 혁명은 그래서 통한다. 사랑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티나 모도티, 운명과 싸워 혁명을 꾀했던 여인

티나는 언제나 주어진 운명에 싸워야했다. 그녀의 외모에서 덧씌워진 부당한 이미지도 그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봉부터 시작했다. 연극․영화에도 몸을 담았고, 사랑을 통해 예술가․작가들과 교류했다. 주어진 대로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이 혁명을 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티나의 예술세계에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였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멕시코에서 그녀의 예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티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를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는데, 티나의 작품은 그런 도덕적 감정을 동반한다. 다큐멘터리적 요소 없이도 클로즈업해서 찍은 ‘손’시리즈. 그것은 예술과 혁명을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에 거주한 1923~1930년에 찍은 250여 컷에 잘 형상화돼 있다. 멕시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시기, 그녀는 그런 시대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에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첫 개인전.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혁명이 계속 꽃피진 못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6주 후 돌아온 것은 멕시코 정부의 추방 명령이었다. 그녀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혐의를 벗었지만 그녀는 멕시코를 떠났다. 사진에 우호적이었던 독일이 다음 행선지였다. 케테 콜비츠, 게오르그 그로츠 등과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회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치가 있는 독일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사용하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선 라이카 카메라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가 찾은 곳은 모스크바였다. 그녀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혁명동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도 나눴다.


혁명은 여전히 그녀의 오브제였다.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도 활동했지만,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녀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그녀는 사진을 접었다. 자신의 혁명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2년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다.


티나 모도티.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빈 여인. 그녀에게 사진은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내용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은 사후 더욱 큰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의 소더비 경매. 그녀의 작품 <장미>는 16만5000달러에 팔렸다.


시절은 점점 더 노동자에게 각박해진다. 99%의 피눈물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예술과 혁명의 접점을 본 티나 모도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에게서, 혁명을 되짚어보자. 행동하자. 점령하자.

사랑과 혁명은, 각자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문화예술 크리틱저널 뷰즈 21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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