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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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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Wanted : 잭 블랙 (Jack Black)


Crime : 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2003),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2000) etc...


못생긴 얼굴에 작은 키로 어쩜 넌 그 애를 좋아하니.
끌리는 마음 이해하겠지만 넌 안 돼 안 돼...

...나처럼 괜찮은 남자 세상에 없는데 없어
하지만 난 착하고 겸손한데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정말 잘 났어
나도, 나 역시, 나만...

- 푸른하늘의 노래, <자아도취> 중에서 -

그래, 내 팔뚝 굵다!

<파리의 연인>에서 기주(박신양)가 태영(김정은)을 구박하는 방식은 한결같다. “넌 거울도 안 보냐” “너희 집에는 거울도 없냐?” 그런데 그 말할 때 기주는 알고 있었을까? 거울은 태영에게 강력한 무기이자 ‘나에게 힘을 주는 노래’라는 것을.

캔디렐라(캔디+신데렐라) 태영은 사실 나르시시스트다. 거울을 갖다 대주면 더 안하무인, 기고만장, 후안무치해지는 존재. 기주의 구박은 외려 태영의 나르시시즘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피박’이다. 겉으로 안 드러내서 그렇지 태영의 대답은 뻔하지 않나. “그래 (거울) 봤다, 어쩔래. 진짜 이쁘구만, 뭐~”

팔뚝 굵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자, 유죄다! 난치병을 넘어 불치병 수준인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경배를!!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해,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솔직히 태영은 약과다. 캔디에서 신데렐라로 신분상승을 하는 과정에서의 귀여운 공주병 증세 정도라고나 할까. 그 정도는 애교지. 진정한 나르시시즘의 경지는 멀고도 험하다. 어디 하찮은 공주, 왕자 정도 갖고 명함을 내밀려고 하나. 덱끼. 혼나요. 강호의 나르시시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 진정한 고수가 있다. 이 남자. 못생긴 얼굴에 작은 키, 라고 다들 생각하는 이 남자, 잭 블랙. 더구나 허리 주변부를 감싸고 있는 배둘레햄까지. 그런데도 그의 나르시시즘은 경악 그 자체다. 통제 불능, 제어 포기의 몽환적 나르시시스트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는 <스쿨 오브 락>을 보라. 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천만에 그건 록보다는 ‘자기애’에 빠져 주체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스스로가 대책없이 사랑스러워 그걸 분출하지 않으면 미치는 거다. 그 ‘잘남’은 당최 측정 불가능한 심해와도 같다. 행여 고두심 아줌마처럼 “잘났어, 정말~”하고 입 밖에 꺼내지도 마라. 그랬다간 뼈도 못 추스른다. 조심해야 한다.

꺄아~ 이 남자, 멋있다

사람들은 그를 루저(looser)라고 불러댔다. <스쿨 오브 락>에서는 자신이 결성한 밴드임에도 다른 팀원들에게 왕따 당하기 일쑤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빈둥빈둥 뒹굴 거린다. 친구한테 신세까지 지는 주제에 말이다. 다른 영화라고 별 수 있나.


<내게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도 잘난 것 쥐뿔도 없으면서 심심하면 여자에게 집적거리고 작업에 열중할 뿐이다. 이 험한 세상에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서 온갖 술수와 불굴의 투지를 짬뽕해서 이 풍진 세파를 넘어설 의지가 도무지 없다. 오로지 관심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나는 그에게 ‘루저’ 대신 ‘나르시시스트’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오버’를 넘어 ‘엽기’ 혹은 ‘광기’처럼 보이는 잭 블랙의 모습은 대체재를 찾을 수가 없다. 바로 거기 뽀인트가 있다. 그 수억 개의 신경세포가 동시에 작동되는 기상천외한 표정과 열성인자로 치부될만한 몸뚱이의 과감한 노출. 잭 블랙이 아닌 누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으랴. 원맨밴드 마냥 생쑈를 부리는데도 어색하거나 역겹지 않다. 오히려 열광이다. ‘잭 블랙 만만세~!’하고 부르짖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나르시시즘을 위하여 *

무엇보다 잭의 표정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간의 전형이다. 짝퉁 교사 주제에 초딩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록’의 개요와 역사를 설파하고 밴드까지 결성하면서 “세상은 man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그것을 타파하려고 록이 존재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이라니. 공연에 앞서 “록의 신”에게 기도하자는 오버의 극치까지. 그 색깔은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그 절체절명의 나르시시즘은 강호의 비기(秘技)로 우뚝 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런 면에서 잭 블랙은 마음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으면서도 겉으론 냉정하기 그지없는 나르시시스트를 보여준 <스캔들>의 배용준이나 고급 대중주의를 아젠다로 삼은 김윤아의 나르시시즘과는 분명 다르다.

“내가 좋아서 한다”는 자기애에 철저히 기반 해서 행동하고 마는 잭은 그만한 신념과 열정의 장작불을 어디서든 산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잭은 왕자들과 공주들의 가면무도회 같은 점잖 빼고 내숭 덕지덕지 붙은 자리는 사양이다. 이유는 별 것 아니다. 급이 맞지 않으니까!


모든 시험에는 답이 있듯 뻔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이 세계에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것도 하나의 탈출구이리라. 물론 그 경지까지의 수행도 만만찮을 터이지만. 그런 잭에 대해 열광하고 그러는 당신은 어디 급수냐고? 물론 나는, 당근 황태자다. 왕자나 공주 따위와 놀 수는 없지. 나도 언젠가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빠져 죽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돌 던지지 마시라. 황태자에게 돌을 던진 자, 역시 유죄다!



여하튼,
잭 블랙, 이 남자, 참 매력적이다. 멋있다.
미친 존재감? 맞다!

헌데, <걸리버 여행기>는 그렇다치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함께 지난 2010년,
<스쿨 오브 락2 : 아메리칸 락>을 연주(!)했다던데, 국내 개봉 안 해주냐?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아는 사람만 알아뿌는 얘기가 될 낀데, 함 드러바바.

2009년인가,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라는 으메이징한 드라마가 있었대이.
마따. 영화 <친구> 감독해뿟던 곽경택 감독이가 드라마로 만든 기다.

내가, 영화 <친구>는 짜달시리 안 좋아해도,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 이거는 대빠이 조아했거던.

시청률, 마 발발 기는데,
그거랑은 내랑은 상관엄꼬,
이 드라마, 와따 완전 슬프고 처연한데, 와 차말로 죽게 때.
그기 뚝뚝 묻어나는 기라. 영화 때보다 훨 섬세하고 주인공 감정이 사는 기라.

특히, 글마 있다 아이가,
요새 주원앓이, 현빈앓이 캐샀는 현비니. 

글마가, 장동건이가 맡았던 동수 역할을 해뿟는데, 
내 그때 와, 동수한테 푹 빠지뿌가꼬, 동수 흉내내고 그래따 아이가.
뭐라꼬? 아, 그래 니 기억하네? 그때 내가 진수기(왕지혜)도 윽빠이 조아했자나.

내가 현비니 조아한 기, <그들이 사는 세상>부터였는데, 
<친구, 우리들의 전설>로 완전 방점 빡 찍어뿟다 아이가. 
일마, 연기도 잘 하고, 와 그 섬세하고 미세한 감정 드러내는 기 장난이 아이데.

이 드라마, 본 사람이 마이 없어 글치.
본 사람들은 마이 인정한다. 진짜 잘 만들어따고.

물론 영화랑은 비교하지 마라.
영화보다 캐릭터의 내면과 이야기에 훨 깊이 들어가가꼬,
단순 볼라카면 거칠고 슝악한 깡패들 이야긴데도 서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거던.


특히 동수가 그래따.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개연성 있고 감정이 살아나는데,
그기 현비니가 맡아가 동수의 아픔을 잘 표현한기 아인가 싶거던.
 
이거, 이 장면부터.
감옥 있는 동수한테 진수기가 면회 와가꼬, 
 
진수기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문서,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요?” 라꼬 전하자나.
와, 나는 내가 동순줄 알아따 아이가. 동수 = 준수.

“힘내야 된다. 알겠제. 잘 있어야 된다”고 진수기가 말하는데,
와 눈물 찡 나대. 알았다, 가스나야. 힘내가 잘 버티 보께. 기다리 바라. 
동수도 아이문서 내 이래 말해뿟잖아. 혼자 완전 지랄염병 떨었다 아이가.


 
역시, 바비 킴! 노래 직이고.
 
글고 와, 내 이 장면 보면서 펑 터지뿌던 기억도 나네... 
 
 
"기억하나?...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게, 딱 두 개 있다고...
지금 두 개 다... 같이 있다."

현비니, 표정 바바... 눈물 하고...
 
"인쟈... 하나도 없네..."
 
사랑하는 거, 진수기랑 준서기(김민준)이거든.
근데, 진수기랑 준서기가 결국 살거든.
 
절망적이다 아이가. 동수...
 
요새 현비니보고 주원앓이 캐샀는데,
글마 보면, 말도 안 된다만, '준(수)동(수)일체' '동수앓이'하던 그때가 생각나네.
DVD 나오길 그리 고대했건만, 나오도 안 하고, 나올 생각도 엄꼬. 아쉽따, 아쉬버.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이런 경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관, 극장이다. 스크린에 눈을 박고 있는데, 꺼이꺼이 소리내 펑펑 울고 싶은 그런 경험. 으이구! 그게 뭔, 쪽 팔림에 주책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아주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온다. 물론, 영화 때문이다. 혹은 영화에 나온 배우 때문일 때도 있다.

어제, 그러니까 시월의 마지막 날에 그랬다. 그대가 예상하듯, 맞다. 내 청춘의 한 얼굴(내 낯짝과는 무관하다만!)이었던, 리버 피닉스의 기일. 17주기였다. 된장, 하늘은 부끄러운 듯 맑았고, 날씨는 한량처럼 부드러웠다. 하긴, 여기는 한국이다. 리버 피닉스가 쓰러진 미쿡이 아니다.

어떤 커피를 마시느냐, 고민도 눈앞에 놓인 커피노동의 고단함 앞에 쉽게 꼬리를 내렸다. 미쿡이잖아. 아메리카노. 올해는 어쩔 수 없다. 대신, 나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밤 10시로 예정된 거사(!)였다. 리버 형의 기일에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는 리버 형의 영화라니! 리버루야~

내 오랜 시간 형의 기일을 기려왔건만, 이런 영광은 없었다. 기껏해야 DVD로 때워야 했던 내 가난하고 소박한 의식.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은총이! 오래 살고 볼 일 맞다. 더구나, 이번에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작품은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였다. 처음 가는 장지역 가든파이브의 CGV송파도 문제될 게 없었다. 리버 형아 만나러 가는 길에 그까짓 초행길쯤이야!

음, 이런 특정한 날, 이런 특정 영화를 보는 관객들 아우라는 여느 영화의 것과 다르다. 다양한 영화적 기호나 취향을 갖고 자리에 기댄 게 아니다. 오로지, 리버 피닉스. 그 이름에 기댄 영화적 경험을 위함이다. 그러니, 공기부터 다르지. 이들과 나는 리버 피닉스라는 끈으로 서로의 마음이 묶인 그런 기분. 물론, 옆에 앉은 내 친구처럼 꼬드김에 의한 관람도 있겠지만. ^^;
 

그래, 초장부터 "야구는 내 인생이야(Baseball is my life)"라고 나오는 영화에 무장해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금발의 열여덟 살 소년, 리버 피닉스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그런 대사를 친다. 물론, 야구는 극중에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나 혼자서, 좋아서 히죽거렸다.

리버 형은 시종일관 알흠답다. 어쩜 인간이 저렇게 알흠다울 수 있는 거야. 저러니, 하늘이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일찍 데려가지. 알흠다운 건 알아가지고 말야. 하나님 취향도 거참. 난 오래 살겠구나, 된장. 박제된 알흠다움에서 숨막힘을 느껴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

아참, <허공에의 질주>? 베트남전의 연장선상이요, 68혁명의 이음선이었다. 가족영화이면서 성장영화였다. 그런데, 여느 같은 장르의 영화와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반전운동 차원에서 군사실험실 폭파를 시도했다가 예기치 않게 경비원을 다치게 하고, FBI를 피해 15년간 도망다니는 가족. 이름은 수시로 바꿔 진짜 이름도 헷갈리고, 집은 살 엄두도 못낸다. 평생 직장은 고사하고, 일자리만 구해도 다행이다. 친구? 세상엔 그런 단어도 있어? 재학증명서나 성적증명서 같은 건, 다른 별 얘기다. 

이런 '운동권 히피'를 봤나, 싶고 혁명 운운하면서 뭔가 가르치고 계몽하려 들지 몰라, 의심하면 당신은, 틀.렸.다. 아니면, 가족은 무조건 떨어져선 안 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함 그 자체다, 라는 가족의 소중함을 설파할 거라고 단정한다면, 꿀밤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제목은 절묘하다. (세간의 기준으로) 허공에 대고 그들은 삽질만 한다. 그런데, 조낸 열심히, 어떤 설명적 훈계 없이, 그렇다고 뚜렷하거나 특별한 목적지 없이 도망가고 또 도망간다. 세상과 불화하는 가족의 도망자 신세를 표현하는데, 제목은 딱이다.

리버의 존재감이 빛나는 것은, 모태집시적 몸짓이,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드러나는 흔들림이 완벽하게 체화된 듯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어떤 도망자의 몸짓과 표정이 있다. 이 세계의 것에서 벗어나고야 만.

더불어 사랑 앞에 그저 한없이 약해지는 열여덟의 순정에 나는 펑펑펑 울음보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가족과 꿈·사랑 사이에서 안간힘을 쓰는 대니는 리버가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물론, 영화는 극적인 임팩트도 준비해 놓는다. 도망자의 굴레와 운명 속에서 가족의 선택은, 심장을 겨냥하고 눈물샘에 꽂힌다.

어머니 애니와 아버지 아서의 결정이 어떤 미래를 낳을지 뻔히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일도 있다. 그 선택 전에 차곡차곡 쌓아둔 그들의 관계와 사랑, 굴곡을 우리는 알기에 '팡' 터질 수밖에 없다. 하긴, 더 잃을 것도 없다, 그들은.

본투비 (전통적) 혁명가였던 아서가 대니에게 길을 열어주며, "네 자전거를 타라. 넌 이제 너의 길을 가는 거야. 변화는 네 몫"이라며 떠나는 장면에선 온전하게 폭발한다. 아서는 대니의 미래를 가족에게 옭아매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과거와 '다른' 혁명적 모색을 하라는 68세대의 전언처럼 느껴진다. 혁명의 단절이 아닌 시대에 맞는 혁명의 변신.

대니는 아마 줄리어드에 입학했을 것이며, FBI의 짜증나는 밀착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해리는 가뭄에 콩나듯 스쳐 지나듯 만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음악적 재능이 진보했으리라 장담은 못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대니의 미래에 모든 것을 베팅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대니를 자신의 것처럼 엮은 리버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리버 때문에, <허공에의 질주> 때문에, 끝난 뒤 나는 눈물범벅이었다. 곳곳에서 들린 눈물 범벅 소리에 나도 일조를 하고야 말았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접혔고, 미치도록 알흠다운 남자를 생각했던 하루도 지났다.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었던 소박한 의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영화, 어떤 영화평론가든 관객이든, 1993년 이후 제대로 된 칼날 비평을 하긴 글렀다. 아무렴. 리피 피닉스 때문이지. 안녕, 내 청춘의 한 자락. (정)은임 누나도, 안녕. 구름의 저편에서 리버를 만나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
그, 빠바바바 바 바바, 빠바바바 바 바바... 하고 사운드가 기어나올 때,
나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런 감격이 있나, 허. 눈물까지, 시큼.

<대부>를 필름으로 첫 대면하는 그 순간.
이제야 필름 스크린으로 알현하게 된 송구스러움도 꾸물거리고,
지금에라도 필름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도 꿈틀대고,
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엔 내 필력이 딸릴 뿐. 띠바.

<대부>가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빌어먹을 가족 서사는 지금에서도 충분히 현실을 향한 사유를 가능케한다.
하긴 어느 시대에든, 이 서사가 사유와 흥분을 멈추게 할 리는 없지.


아울러, 말론 브란도가 아닌 돈 콜레오네는 상상 불가능.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탓해도 어쩔 수가 없다. 된장.

그가 떠난지 6년.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돈 콜레오네가 쓰러질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부>에선, 시쳇말로, 브란도의 미친 존재감!이 캐작렬.

말론 브란도를 그렸다.
지난 1일이 6주기였다. 아래 기고문은 그래서 나왔다.

p.s. 지난 5월에 개봉한 <대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은,
아직 극장(씨네코드 선재)에 걸려있다. 놓치지 않길 권한다.
특히, 필름으로 아직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오는 30일 팡파레를 울리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 서울!

그 바캉스 시즌에 <대부>가 역시 껴 있다는 즐거운 소식.
8월8일(일) 김영진 평론가의 씨네토크와 함께 펼쳐지는 <대부> 박항스~
13:00다. 엔간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



말론 브란도,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부정한 이름
예술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지난 5월 <대부>가 재개봉했다. 국내 개봉이 1977년(미국은 1972년)이니, 33년 만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이번 버전은, 향수와 함께 바뀐 세대의 스크린 경험을 위한 것이겠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부>는 그렇게 다시 왔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난 <대부>는 위엄 있고, 웅장했다. 경건함과 비장미까지 갖춘 고전적 서사의 재등장이었다. <대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후광효과에 기댄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대부>는 표피만 놓고 보자면, 마피아 협잡극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오해가 되겠다. 마피아로 포장됐을 뿐, <대부>는 당시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관된 문화적 산물이자 서사였다.


마리아 푸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로 우선 각인돼 있다. 재능 있는 신예 감독에서 이 영화로 거장 대열로 성큼 올라선 코폴라의 연출력이 <대부>를 만신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마피아 세계를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류학적으로, 뭣보다 누구도 자유롭기 힘든 가족서사로 <대부>는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돈 콜레오네였던 사나이


그 핵심에, ‘돈(비토) 콜레오네’가 있다. 가족과 패밀리의 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오해받는) 가부장, 돈은 <대부>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말론 브란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제임스 딘도 선망했던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그는, 당시 전성기가 지난 처지로, 제작사는 그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다. 코폴라의 고집이 위대한 <대부>를 만들어냈지만, 돈을 스크린에 현현시킨 것은 전적으로 브란도의 공이었다.



여기, <대부> 카메라 테스트에서의 일화. 브란도는 구두약을 머리에 발라, 비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설 속 인물이 불도그 같이 생겼으니, 화장지를 입안 양쪽 볼에 집어넣었다. 늙은 얼굴과 염색, 어눌한 말투까지 곁들여 우리가 아는 비토, 대부는 창조됐다.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편으로 브란도가 비토를 맡은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이나 스크린에서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연기는 노동자 계급의 것에 가까웠다. 앞선 남자 배우들이 도덕군자와 정의의 사나이에 붙박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그는 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그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 <아가씨와 건달들> 등을 통해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반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는 당대 미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50~60년대 젊은 미국에게 어울리는 배우였다.


침체기였다고는 하나, 그런 반영웅이 선택한 <대부>는 의외였다. 말하자면, 돈 콜레오네는 가부장의 화신이다. “내 말이 곧 법”인 마피아의 절대군주로,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 아버지. 세월에 굴복한 것일까, 그도 늙은 것일까. 아버지가 만든 기성의 규율에 반항하고, 투쟁했던 그가 전성기 이후에 택한 배역이 아버지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거친 짐승 같은 그가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그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반항 기질과 퇴폐적인 매력은 불혹의 나이에도 어딜 가지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짐승을 어찌하겠는가.


파리에서의 한 가지 표정, 브란도


<대부>의 선택이 아버지의 규율에 편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다. 브란도의 다음 선택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졌다.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얼굴. 부성의 체화가 불러온 반발이었을까. 신랄하고 퇴폐적인 폴로 변신한 브란도의 무기력한 정사가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정사를 나누면서 그는 외친다.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세상에 지치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폴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하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허무가 감싼 폴의 얼굴. 그것은 또한 브란도의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증명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개봉 즉시 논란이 됐다.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신 등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것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폴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 그 표정은, 1970년대의 어떤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혁명의 시대가 지났거나, 실패로 끝난 혁명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에 남은 흔적은, 곧 당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끝난 혁명의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던 그 표정.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녹슨 해방구만 남았고, 파멸을 친구 삼아야했던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고.


내가 가장 강렬하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때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파리지앵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자취 때문이 아니었다. 68혁명의 도시를 가고 싶다는 욕구도 아니었다. 숱한 사상과 혁명을 잉태했던 커피하우스에서 향미를 맡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폴의 표정을 잉태한 파리가 궁금했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가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파리에 가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건 브란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배역과 한 몸이 되고 표정으로 말하는 ‘말론 브란도’를 볼 순 없다. 6년 전, 2004년 7월1일, 향년 80세, 그는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무명 시절, 돈을 벌려고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매부리코를 얻었던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이라기보다 반항을 일삼는 터프가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시대를 열어젖혔을 때도, 그는 쉽게 투항하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의 자세였다. 연기에 대해 늘 회의했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불평했지만, 그는 연기했고, 천생 배우였다. 오직 하나였던 배우. 그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죽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일.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일. 그것이 버르장머리 없는 반항아의 파괴적인 일탈일지라도 시도해보자. 예술 안에서 당신안의 짐승을 깨워보자.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7·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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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는 인간들, 살아있는 사람들…

<카우보이 비밥> 마지막 화. 이런 얘기가 흘러 나온다. "다들 줄이 끊어진 연처럼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렇다. 2071년의 인간들도 지금과 다를 바 없나 보다. 이런 것,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일까. 에이, 웃자고 한 소리다. 심각해지지 마시라.

그런데 한참 멀어보이는 그 미래를 그리 쉽게 단정지을 수 있냐고? 오호, 당신은 진짜 미래가 알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오래오래 살아라. 실은 나는 시간의 흐름을 미래니 현재니 하면서 토막내고 싶은 게 아니다. 그것이 미래든 현재든 과거든 상관없다. 단지 현실에 발을 디딘 이야기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의 언급처럼 <카우보이 비밥>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곳엔 현실에 뿌리를 박되 깨지 않을 꿈을 꾸면서 삶을 지탱하는 어떤 현실적인 인물들이 있다. 꿈, 사랑, 과거, 죽음과 삶도 있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어떤 사람살이의 풍경. 여기에 '현상금 사냥꾼'도 있다. 재미있는 직업? 맞다. 액면상으론 범죄자를 좇는 직업인데, 실은 어떤 사람살이의 풍경을 좇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마다 나름의 것을 느낄 수 있는 묘한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은 현상금 사냥꾼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들여다보게 한다. 미래를 빙자했지만, 그건 맥거핀이다. 갈 곳 잃고 헤매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알랑방귀(!) 좀 끼자면, <카우보이 비밥>은 '사람살이의 일면을 엿보고 다양한 해석을 담을 수 있는 우주 서부극'이라고 얘기하겠다. 그곳에선, 무법자들이 있고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들도 있다. 이래저래 여기저기 휘둘리는 장삼이사도 있다. 인간군상은 어쩔 수 없이 가지각색이다. 미래니 현재니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저 사람살이!

아, 이 짙은 허망함의 성(魔性) 하곤…

과거 따윈 상관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 남자, 스파이크 스피겔.


키 크고 미끈하게 잘생긴 꽃미남. 간지작렬이다. 27살의 더벅머리 총각. 과거 중국계 거대마피아 '레드 드래곤'의 간부, 현 직업 현상금 사냥꾼. 그는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어 우주를 떠돈다. 그에게 정의니 선악이니 하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액면상) 목적은 오로지 현상금,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 남자, 현상금에 쌍심지를 켠, 돈만 밝히는 기생 오라비인줄 알면 완전 착오다. 허무가 덕지덕지 묻은 품새가 우선 눈에 띤다. 허무작렬! 염세주의자? 맞다. 그 눈빛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여있다. '뭐 이래? 주인공이 이렇게 우울해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그렇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다. 그의 재능 중에는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치환할 수 있는 재능도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쿨(Cool)함을 저버리지 않는 매력. 그는 본질적으로 한 단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이다.

스파이크는 뭣보다 경계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꿈을 꾸고,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배회한다. 이 남자에겐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잃어버린 과거, 이미 죽음을 경험한 그에게 삶도, 죽음도 어느 것도 불분명하다. 그는 삶과 죽음이 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단지 스스로 어느 선상에 서 있는 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발길에 눈을 뗄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안에 똬리를 튼 스파이크. 삶과 죽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실존. 그의 짙은 허무가 온 몸을 휘감는다. 내 안에, 스파이크 있다.

기름과 섞이지 못하는 물

물과 기름은 섞이지 못한다. 제길, 나는 그걸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미 그런 건 휘발된 지 오래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더라. 당최 그처럼 섞이지 못하거나 겉돌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더라. 역시나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스파이크는 말하자면, 물이다. 끈적끈적한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세상과 화(학적 결)합(!)이 불가능한. 기름 같은 세상에 묻어갈 수 없는. 그는 대개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과 동떨어져 있다. 둘러보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옷을 벗어던질 수밖에 없다.



스파이크는 그렇다면 왜, 부유하냐고? 그 부유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지닌 연유는 마지막 화에서나 밝혀진다.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보고 다른 한 쪽으로 현재를 봐 왔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깨지 않는 꿈이라도 꿀 작정이었는데 어느 샌가 깨고 말았지…" 현실에만 정착할 수 없는 눈, 그 시큰둥한 눈빛이 기름처럼 세상에 붙어있을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궁금했다. 과연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어떤 빛깔로 나타날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푸르다고 말하는 그 하늘에 대해 스파이크는 어떻게 말을 할까.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스파이크의 매력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굳이 말 혹은 글로 표현하려는 것이 불편부당해 뵌다. 그래서 이 글은 불완전함을 품고 있다. 그는 영상을 보면서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내 안의 스파이크는 그래야 찾을 수 있다. 스파이크는 또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다.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스파이크는 꿈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도 알고 있다. 생이 유한하다는 사실. 불멸에의 꿈은 그에게 가당치 않다. 죽음도 영원한 꿈으로 인식한다. 그가 천적인 비셔스와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비밥호를 떠날 때 페이(현상금 사냥꾼 동료)가 말린다. 하지만 스파이크는 말한다. "죽으러 가는 게 아냐.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 그건 현실로 돌아가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는 자신만의 길을 거닌다. 누가 뭐라하든, 과거나 현실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든. 그리고 우리에게도 살며시 귀띔한다. "꿈을 꾸든, 현실을 살아가든, 그건 당신의 몫이야!" 멋진 놈...

(* 권하건대, 스크린에서 선보였던 극장판보다, 26회로 구성된 작품을 꼭 보시라.)


(※ 오픈아이 기고문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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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자의 갱생기. 딱 이 한마디로 정리가 가능한 영화 <크레이지 하트>를 세간에 주목받게 한 것은, 늙은 사자를 연기한 제프 프리지스 덕분이다. 연기와 배우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온전히 배우 그 자체의 영화. 누군가의 말마따나, ‘일생에 한번 있을 영화와 만난 경우’다. 세간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은 아카데미는, 그에게 첫 오스카(남우주연상)를 안겨줬다. 아카데미나 대중 모두에게 행복한 선택이었다. 불만은 없다. 아마 영화를 본다면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한쪽으로 치우친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면당한 이름을 꺼낸다. 진 크래드독. 그러니까, 이를 연기한 매기 질렌홀.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대, 매기가 아니었다면, 제프를 향한 세간의 관심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이 혼자 빛나는 법, 없다. 이 뮤즈, 완벽하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뮤즈는 생각할 수가 없다.


<크레이지 하트>의 늙은 사자, 배드 플레이크(제프 브리지스). 한때 잘 나갔던 컨트리 뮤지션이었다. 나오는 족족 히트를 쳤고, 후배 뮤지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꽤나 많은 여성 그루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사자도 늙기 마련이다 보니, 이빨은 거의 썩어 문드러졌고, 갈기는 숭숭 빠졌다. 축 처진 뱃살, 덥수룩한 수염, 공연이라 봐야 시골 선술집이나 볼링장 콘서트. 취미래야, 싸구려 모텔에서 포르노 틀어놓고 술을 입에 달고 있는 것. 서커스 장에서 단물 쓴물 쪽쪽 빨아 먹힌, 묘기 사자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늙은 사자가 죽기보단 재기하는 것, 사실 익숙하다. 누군가에겐 진부할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에서도 많았을 뿐 아니라, TV를 켜거나 책을 봐도, 이런 이야기 흔하다. 황혼기에 새로운 기회가 오고, 생기를 되찾는 이야기구조 자체가 지닌 한계도 있다. 뻔하다는 관습적인 구조를 피하기 어렵다. 지난해 우리가 본 <레슬러>는, 확실히 셌다. 미키 루크라는 스토리텔링이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자면 <크레이지 하트>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그런 빈틈을 메운 것이 배드의 뮤즈, 진. 영화를 이끌어간 것이 배드라면, 이를 지탱한 것은 진이다. 


진은 그렇다. 뮤즈다. 늙은 사자가 더 이상 나락에 떨어지지 않고, 삶을 회생시키는 동력이다. 아니 모든 것이다. 내가 스크린을 통해 본 것도, 여느 평범한 남자의 로망이자 판타지라는 한계, 인정한다. 늙은 사자를 취재하러 온 신참내기 기자. 싱글맘. 배드는 아마도 자신이 진에게 빠지리라는 생각, 그로인해 삶(의 태도)이 바뀔 거라는 상상,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잠시 거친 간이역에서 하룻밤을 나눌 상대로 생각하고 추파를 던졌을 것이다.


별 일 아닌 것에서, 사소한 것에서 삶은 균열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변한다. 재미있다. 삶의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되는 순간. 어느 순간, 진에게 빠진 배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음악이다. 늙은 사자에게도 있던 당연히 있었던 발톱과 이빨. 진은,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이 있음을 깨우는 조련사다. 그렇다고 채찍을 든 것도 아니요, 먹이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부드럽고, 조용하며, 복잡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배드의 삶에도 그렇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그녀는 쑥 들어찬다.


알겠지만, 그건 의식적으로 상대를 대하거나 의도를 갖고 접근할 때 가능한 게 아니다. 흔해 빠진, 식상한 말이지만, 그건 ‘진심’이다. 그녀는 섹시한 몸매와 자태를 지닌, 혹은 초절정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 아니다. 한 순간에 사람을 뒤흔들어놓을 그런 여자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묘하게 사람을 당기는 매력을 지닌 여자랄까. 흰 티셔츠와 청바지만으로도 충분히 섹시함을 드러내는 사람.



배드가 다른 뮤즈를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든 갱생하게 됐을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이야기를 진즉에 그렇게 꾸민 것 아니었냐고? 아니, 그건 온전히 매기 질렌홀이 연기한 진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을 획득한 거다. 앞서 언급했듯, <크레이지 하트>는 매기의 진이 있었기에 지탱가능한 이야기다. 두 사람의 교감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 누군가는 흔치 않다. 진이었기에 배드의 삶도 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안에 있는 음악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다. 진이라고 다른가. 그 망가진 늙은 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 위험하고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안다. 진짜 나를 위하는 것, 당장 내 행복을 위해 해야 하는 것. 나쁘고 위험하다는 전제가 아니라, 그것 따위 상관없이 내 마음이 향하는 것.


그녀는 약하면서도, 강하다.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두 사람 모두 결함투성이이기에 가능한 결합. 배드는 아마 나쁜 남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진은 왜 빠졌냐고. 그건 진의 마음만 알 수 있는 거다. 나쁜 남자, 나쁜 여자라고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늘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니잖나. 우리는 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고,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다.


진이 이 영화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뭣보다 배드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진짜 사랑은,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거다. 육체에 빠져도 좋고, 마음 씀씀이에 혹해도 좋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를 만나게 해주는 그런 사랑에 혹한다. 진이 배드에겐, 그런 사람이다. 그건 의도한 것도 아니요, 바꾸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흐름이 세계를 바꿔놓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진이 배드에게 했던 이 말, 아직 생생하다. 다친 몸으로 진의 침대에서 음악을 만드는 배드에게 건넨. “당신이 내 침대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잖아! 당신은 떠날 테지만 난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 노래가 생각날 거라고!” 마음이 짠... 사랑하는 당신과 나눈 사소한 시간, 그것이 10초, 1분에 지나지 않을 거라도, 마음은 그냥 저장하고 마는 걸. 내 기억은 그렇게 당신을 담아버리고 마는 걸.


어떤 자극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더 마음을 움직인 여자, 진을 연기한 매기 질렌홀은 제프 브리지스에 비해 저평가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온전하게 이 영화를 함께 지탱한 양대 축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크레이지 하트>에 대한 찬사를 한다면, 마땅히 그녀에게도 가야하고, 그것만이 찬사가 온전해질 수 있다. 티셔츠와 청바지, 스니커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섹시하고 멋진 여자, 진. 이 영화, 늙은 사자의 갱생기도 맞지만, 뮤즈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겠다.



매기는 이 한편으로 내가 모셔놓은 배우 만신전에 올라섰다. 비록, 올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만 오르고 수상은 놓쳤지만, 뭐 어때. 수상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오스카보다 나의 만신전에 올라 영원히 내게서 남아 있는 것도 나름 괜찮을 듯. 그녀는 이제 나의 여신, 아니 뮤즈. 이 여자, 정말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참, 만신전에는 누가 있냐고? 천천히 말해주마. 기다려주시라. 싫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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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2003년 12월9일.

요즘과 같은 강추위가 강타하던 그날,
혜화동 부근에서 한 사람이 추위에 떨다 숨을 거뒀다.
그야말로, 동사. 누구도 챙기지 않은 혹은 외면한 죽음.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2005년 김동원 감독님(<송환> <상계동 올림픽> 등)께서 국가인권위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다섯개의 시선> 가운데 <종로, 겨울>을 연출하신단 소식과 함께였다.


오늘 모진 추위, 알코올 유혹을 뿌리치고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를 찾았다.
세상엔 알코올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 (음, 인간이 초큼 학실히 달라졌다;;)

영화는 장률 감독님의 <이리>.

그것 자체로도 뿌듯했는데, 상영 직전에 꺄아아아아아아~ 소릴 지를 뻔 했다.

내 앞앞자리에 김동원 감독님이 성큼 앉으시는 것 아닌가!!!!!!!!!!!!!!

역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3년 전 뵀을 때와 함께, '아, 이 즈음이었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그 사람, 고 김원섭 씨.
우리의 무관심으로 차디찬 고국 땅에서 동사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를 본 뒤, 냉큼 김동원 감독님께 꾸벅, 인사했다.^.^
당연히 감독님은 날 기억하지 못했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고,
사진을 부탁드렸다.

언제 다음 작품을, 내년에는 볼 수 있냐는 질문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확답을 못하시던 감독님.
"괜찮습니다. 계속 기다릴 수 있습니다." (-> 내 마음 속)

간단히 감독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바깥 무시무시한 추위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종로통을 거니면서,
6년 전 길바닥에 쓰러져 살을 에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을,
무엇보다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마음 깊이 후벼파는 추위에 더욱 쓰라렸을,
김원섭 씨를 떠올렸다.

흥청망청 종로의 밤은 깊어갔고,
나의 마음에도 밤이 내렸다.
오늘 나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스치듯 지나갔는가.
봉석아, 오늘 너의 아픔을 충분히 위로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외로웠을 김원섭 씨,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김동원 감독님을 만나뵀던 3년 전의 인터뷰를 꺼냈다.


"동북공정엔 흥분하면서 그 땅에 사는 동포엔 왜?..."

2년전 세밑을 앞두고 흥청거리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골목통에서 한 조선족 동포가 동사한 채로 발견됐다. 경찰 지구대 사무실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장소였다.

고(故)김원섭씨. 그 날의 사건을 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법무부의 장기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농성을 해오던 중국동포가 체불 임금을 받으러 나간 뒤 하루만인 9일 새벽 서울 도심 거리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이 중국 동포는 숨지기 전에 112와 119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김씨에게 고국의 품은 차가웠다. '잘 살아보겠다'며 조국을 찾아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김씨에게 고국의 기업은 임금을 체불했다. 정부는 장기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여 김씨를 강제추방 대상에 넣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 속에서 헤매던 그가 십여 차례 이상 119,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돼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불법체류로 체불의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한 재중동포는 차디찬 골목바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죽어갔다. 그는 '동포'였지만 '우리 안의 타자(他者)'였다. 차별과 소외가 내재화한 사회. 그런 엄혹한 현실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어떻게 보면 김원섭씨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한 셈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 이번에는 동사한 조선족의 흔적을 좇았다.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종로, 겨울'을 연출한 우리의 어떤 시선이 조선족 동포를 동사하게 만들었는지, 왜 그는 죽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짧지만 굵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감독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상황들을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게끔 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다음은 29일 서울 신대방동에 위치한 푸른영상에서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  이번 영화의 참여 제안은 언제 받았으며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찍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지난해 8월 인권위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제안을 받고 상계동 철거민(<상계동 올림픽>)이나 비전향장기수(<송환>) 뒷얘기 등 다른 것들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고 김원섭씨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맺혀 있었고 이를 풀고 싶었다.

또 조선족동포를 바라보거나 우리의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에 이 문제를 택했다. 우리는 만주 땅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그 땅에 있는 동포한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이쪽 동포들은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다. 재외동포법에서도 미국과 유럽과 같은 제1세계 동포보다 한국에서의 권리를 차별받고 있다.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 처음 고 김원섭씨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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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물론, 낚시질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낚시질로 끝나질 않았으면 좋겠다. 

즉 어느날, 그것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를 유영하고 있는 지금.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들과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나는 나름 그것을 즐기고 있다.  

온전하게 거기에만 에너지를 쏟을 순 없지만.

 

그런 와중에, 씨네21에서 오다기리 조의 인터뷰를 접했다. 

알다시피, 나의 빛나는 완소배우.

 

그는 최근 대학생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는 그런 일환으로 이뤄졌는데,

그는 역시나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 줄 아는 배우다.

 

내 마음을 흔든 그의 발언은 이거다.

"벌써 10년 정도 일하고 있는데 일하다보면 생각할 게 많다.

내 요구뿐만 아니라 이 시대, 사회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느 배우와 다른, 좀더 특별한 포스와 아우라를 갖고 있다.

예술가연 한다거나  스타성을 좀더 발휘한다는 그런 뜻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에게 '사회적(성) 배우'라고 레떼르를 붙이고 싶진 않다.

 

그는, 사회적 발언과 행동에 적극 나서는 조지 클루니와도 또 다르다.  

물론 나는 스타 혹은 배우가,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만질 수 없으나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스타 혹은 배우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니까.

연기 등을 통해서 주는 즐거움도 빠질 순 없겠지.

 

그럼에도, 나는 오다기리 조가 주는 마음의 환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내가 사는 이 땅에도 오다기리 조와 같은 배우(스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우리 사는 이 세계를 염려하는, 시대와 사회가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오다기리는 인터뷰를 통해,

한국영화계의 제안이 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대학생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영화제쪽에서 제안한 결과다. 아마 해당영화제쪽도 큰 기대는 않고 제안한 것이리라.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의 인디영화가 그를 영화에 출연시키거나,

서독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시키는 것은 어떨까. 

물론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나는 '오다기리 조'.

관객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벅찬 일인가.

서독제와 궁합도 잘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떤까.

 

가까우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이뤄진다면,

나는 더덩실 춤이라도 출테오. 

 

그렇게, 오다기리 조를 만나고 싶다.

 

인터뷰 한 대목을  잠시 인용하자면.

- 이번 영화제 참가뿐 아니라 부쩍 한국에서의 활동이 많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 이유는 내가 더 궁금하다. (웃음) 생각해보니 타이밍이 아닐까 싶다. 최근 들어 일본영화계에 비해서 한국영화계가 더 발전했다. 한국은 작품성있는 영화가 꾸준히 생산되는 곳이고, 좋은 감독도 많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세상 모든 아들들의 엄니 …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미시적인 반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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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석. 누군가에겐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겠는데, 배우다.
영화배우이기도 하고, 연극배우이기도 한. TV에도 나온 바 있는.

뜬금없이 이 이름을 꺼낸 건, 그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가 개봉해서다.
영화의 제목하야, <부산>


이 쉐이,
그걸 빌미로 지 고향 얘길 꺼낼라카나,
아니면  못 가서 한이 맺힐라카는 PIFF를 꺼낼라카나,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이고. 고마 고창석.

<부산>에서 유승호, 김영호와 삼각 트라이앵글로 주연을 맡은 배우, 고창석 아저씨. 
사실, 나랑 나이 차는 별로 나진 않는다. ^^;;  

지난해 연말 무렵, 시네시티 부근의 커피집에서 만났다.
<영화는 영화다>로 막 대중과 근접조우하면서, 이른바 떴다.
봉 감독이란 애칭으로 사랑을 받던 시절, 
오랜 연극배우 생활 끝에 늦둥이 영화배우로 주목을 받았고,
보폭을 넓히기 시작할 찰나였다.
겁내 무섭게 생겼지 싶어도, 앞에서 얘기 나누이 꼭 정겨운 동네아저씨 같드마.


그를 만난 전후로,
그는 꽤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인사동 스캔들> <이태원 살인사건>,  
그리고 TV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 <드림> 까지.

이번에는 그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이다.
인터뷰 할 때, 부산을 로케이션으로 하는 작품에도 출연할지 모른다더니,
과연 <친구, 우리들의 전설>와 <부산>에 출연했다.  
<친구, 우리들의 전설>을 볼 때는 브라운관 속인데도 어찌나 반갑던지, 헐~

거의 9개월 이상 묵은 기사지만,
<부산> 개봉을 맞아, 그를 스크린을 통해 다시 만나고픈 생각에 꺼낸다.
뭐, <부산>의 영화평은 그닥 좋은기 아이다만,
고마, 부산이라니까 함 가줄라꼬.
내 이번에 PIFF때 몬가서 슬픈, 부산이 우째 나왔는가, 함 봐야게따 싶어가꼬.

아래, 인터뷰의 흔적은 그와의 만남을 토대로 재구성한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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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봉 감독, 아니 고창석.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레디~액쑌!”

사실 지금까지 연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20여 년 전만 해도 내가 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국악’이었거든. 1989년 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는 안 하고 발 디디고 마음을 둔 곳이 탈춤 동아리였어. 국악이나 타악, 재미있더라. 남원에 가서 풍물도 배우고, 거리공연도 하고, 작품도 많이 만들었어. 그냥 그렇게 시작한 것이고, 그땐 그게 취미가 아니고 업이었어. 그러니까 특별히 연극을 시작하겠다고 한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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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하나의 상품.(화폐와 연관된 거래의 개념이 아니라)
6년 전 오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국영이형을 4월1일이면 어김 없이 되새김질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내 안에서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

사건이 있었던, 2003년 4월1일.
그날의 그 사건 이후, 내가 관통했던 어떤 한 시대가 접히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 이후의 4월1일은, 최소한 내겐 만우절보다 국영이형을 떠올리는 날. 꽃보다 국영!

그날 이후 4월1일이면,
DVD를 돌려 <아비정전>의 희뿌연 영상과 마주대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글로 사부작댔지.
☞ 국영이형, 황사바람에 잘 계시우?
☞ '아비'와 함께 우리 모두 '해피투게더'~
작년에는 <아비정전>이 재개봉한 광화문 스폰지에 있었다.
스크린에서 처음 마주하는 <아비정전>의 감격.
꺼이꺼이 극장에서 목 놓아 울고 싶었던 어떤 기억.
☞ 국영이 형, 제 맘보춤 봐 주실래요?

역시나, 올해 스폰지는 작년에 이어 <아비정전>을 불러냈고,
☞ 스폰지 <아비정전>
허리우드 극장에서는 '장국영 메모리얼 필름 페스티벌'을 펼치고 있다.
故장국영 6주기 추모 영화제
장국영 추모영화제 여는 김은주 대표 "해야할 일일 뿐"


벌써 6주기인가 싶은데,
더 이상 늙지 않는 국영이형을 본다는 건, 한편으로 괴로운 일이긴 하다.
오늘 하루, 자신의 울타리에서 그를 추모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또 그렇게 1년을 난다.

<아비정전>에서의 '아비'가 가장 애잔한 모습마냥 기억되지만,
<해피투게더> '보영'의 까칠함 뒤에 도사린 쓸쓸함도 무척 아릿하지만,
나는 <동사서득>의 '구양봉'만큼 세상 모든 고독을 품은 이를 알지 못한다.

내게 있어,
국영이형 최고작(더불어 현재까지 왕가위 감독의 최고작)은,
그래서 <동사서독>.

(왕가위 감독은 최근,
“<동사서독>에서 진정한 스타는 장국영 한 명뿐이었다”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국영이형에게 바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한다.
<동사서독 리덕스>.
제발, 플리즈.
개봉개봉.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지만, 나는 못 봤을 뿐이고.
중국에서는 지난 3월 <동사서독 리덕스> 프리미어가 열렸다는데.
부디, 내년 4월1일엔 구양봉을 만나게 해 주시오.
그 사막의 모랫바람에 함께 휩쓸리고 싶소.
 
그  의미는, 결국 '장국영 리덕스'.
매년 4월1일의 장국영 리덕스.
형아 리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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