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763호의 피쳐기사인,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를 만나다 ① -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무척 흥미롭다. 세 명외에 정성일, 허문영 씨까지 해서 다섯 영화문필가들이 나누는 대화는, 흥미진진한 탁구경기를 보는 것 같다.

뭐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니고, 좀 엉뚱한 거다. 피쳐기사의 첫 장면에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사진을 보자마자 팡~ 터졌다. 김혜리 여사님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에 비해, 사람남자 둘의 포즈와 표정은 뭐랄까. 뭔가,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

사진은 여러모로 재미난 대비를 이룬다. 시소를 놓으면 사람남자 둘 쪽으로 기울어야 할 듯 싶지만, 구도 등 여러가지를 봐도 왠지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희한하기도 하지. 뒤에 있는 나무들을 봐도 그렇고. 참 재미난 사진이다.

김영진 씨는 몇 년 전, 그가 <필름2.0>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는 기억 못하겠지만) 목소리 좋고, 글 좋고, 무게감 짱이다. 이동진 씨는 광화문의 커피스트에서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고, 몇 번 그가 초대된 행사에 간 적이 있는데, 의외로 유머가 좔좔좔. 그의 글과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사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본인들은 어찌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봤다. 전설처럼 제목만 설핏 들었던 그 영화. 당최 뭐라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내겐 없다. 이동진 씨가 그 자리에 함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였구나. 괜히 반가웠다. 나는 빠돌이까지는 아니지만, 고레에다 감독 작품을 참 좋아한다. 특히, <원더풀 라이프>. 이동진 씨도 참 좋아한다고 했다. 괜히 또 반가웠다.

<환상의 빛>은, 동명의 원작에 나온 구절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좋겠다.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시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p.12) 그날의 기록이다. <환상의 빛>이 내 마음에 틈입했던 기록. 



‘왜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는가’

<환상의 빛> 출간기념 영화평론가 이동진과의 대화


“다만 삶의 하중荷重이, 그 무게가 불현듯 어깨를 짓누르고, 일상의 생의 부담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들면 홀연히,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뿐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질박하다면 그런대로 또 질박하다.”(『도깨비 본색, 뿔난 한국인』, p.251)


물론,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 알 것이다.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욕망. 아니,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저,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 걸어도 걸어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주무주주(住無住住)’라고 했던가.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머무름이라고 했던. 바람이 분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떠남은, 분명 그런 것이다. 이 자리에 있고도 없어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


안타깝다. 어디서 본 표현이었을까. 출처를 미처 적어놓질 못했다. “사슬을 풀고 구름이 되고 싶다. 연줄을 자르고 안개가 되고 싶다. 연관의 고리를 부수고는 물 흐름이 되고 싶다. 우리는 그러기를 바라는 존재다.”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공기인형> 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인 「환상의 빛」을 읽고, 퍼뜩 메모해놨던 이 표현이 틈입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혹은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의 마음이 아녔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미코. 남겨진 사람. 남편이 훌쩍 그렇게 떠난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당최 알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불쑥불쑥 침입하는, ‘왜’를 지울 순 없다. 생은 그렇잖나. 바삐 길을 가면서 모퉁이를 돌다, 전혀 예기치도 않게 첫 번째 첫 사랑을 만날 수 있듯,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아니 10년을 떠올리지 않다가도 느닷없이 한 순간을, 생각을 만난다. 하물며, 어떤 이유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에게서야.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온다. 허무함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감내해야 하며, 느닷없는 슬픔을 만나야 한다. 마침내, 삶에 덕지덕지 묻은 부조리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먹먹했다. 내겐 달리 표현할 방도도, 필력도 없다. 적어도 내게, 그 빛은 환상적이진 않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식상하고 진부하다. 내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을 뿐. 어둠과 빛을 등가로 놓는 감독의 시선에 마음이 때론 덜거덕거렸다. 특별하고 유별난 삶을 다룬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를 직접 비춘 것도 아니었다. 인물을 묵묵히 따라갔을 뿐인데, 그 카메라엔 삶이 묻어났다. <원더풀 라이프> <죽어도 죽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형이라. 명백한 인장이자 징표가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영화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난 7월13일, 서울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상영회였다. 원작인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지음/송태욱 옮김|서커스 펴냄) 출간 기념. “미야모토 테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박명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고 추천사를 썼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혈 팬인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름답고 쓸쓸한데, 장면 몇 개를 잘라서 벽에 걸어두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 한편으로 (그렇게 하면) 한 달 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웃음)” 지금부터 이것은, 그와 관객이 함께 나눈 기록의 일부다. 그 옛날, <원더풀 라이프>에 흠뻑 빠졌던 나는, 그 역시 이 영화의 신봉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무척 반가웠다. After Life…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맺은 인연


“저는 동시대 외국 감독 중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하면 <원더풀 라이프>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의 경험 자체가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매우 깊은 정서적 충격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을 선사한 사람에 대한 원초적 끌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말하자면, ‘고빠(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에 특히 좋아한다다.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 근작인 <공기인형>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환상의 빛>을 찍기 전까지 TV다큐멘터리 등을 찍다가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늦둥이인 셈인데, 이 영화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 중에 처음 본 것은 <환상의 빛> 아니고 <원더풀 라이프>(1998)다. 과할 정도로 좋아한다. 고레에다 감독 필모 중 가장 잘 만든 것은 <걸어도 걸어도>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나 <원더풀 라이프>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 간 이동진 평론가. 이런저런 시놉시스를 훑어보다가 재밌겠다 싶었던 것이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신인인가? 그런데, 이건 뭔가. 영화를 다 본 뒤, 다리가 꿈쩍을 않는다. 감동 먹어서, 영화에 취해서. 별 수 없이 관객과의 대화까지 지켜보게 됐다.


여든 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캐나다에서 오셨다는 할머니가 손을 들고 영화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뭐랄까, 묘했다. <원더풀 라이프>에 나오는 할머니를 언급하면서, ‘나는 오늘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며 예찬을 했다. 그리고선 고레에다 감독이 말을 시작하는데, “아, 저런 사람이니까 이런 영화를 찍는구나 싶더라.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도 감동을 받았다.” 감동 두 배. 이동진이 고레에다에 빠진 날.


그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더풀 라이프> 상영됐다. 극강이었다. 이동진 가라사대. “여태껏 내가 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GV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GV였다.” <공기인형>이 개봉했을 때, 주연배우였던 배두나와 인터뷰를 했다. 배두나가 던진 진담 혹은 농담? “고레에다 감독이 무척 멋있어서 미혼이었다면 프러포즈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유부남만 인기 좋은 더~러운 세상.


물론, 아무리 좋다손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아쉬움, 왜 없겠나. 완벽한(?) 감독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 그러니까, 네(사)가지까지는 아니고. “꽤 많이 만나본 감독 중 하나고, 고레에다 감독도 날 알게 됐다. 그의 영화는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는데, 세 번째 영화인 <디스턴스>만 없다. 만났을 때, 그 얘길 하니까, 반색을 하며 보내주겠다는 거다. 주소를 적어줬는데, 1년이 지나도 안 오더라. <걸어도 걸어도> 국내 상영 당시에도 인터뷰를 했는데, 끝나면서 이 얘길 하니까, 너무 미안해하면서 다시 주소를 받아갔다. 지금, 1년 반이 지났는데...(웃음) 그거 하나만 빼고는 완벽하다.” 고레에다 감독님, 들리세요? 줄 건 주셔야죠. ^.~


환상의 빛, 책과 영화 사이



<환상의 빛> 원작이 번역 출간되면서, 추천사 얘기가 들어왔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 때문에 책을 들었다. 그의 데뷔작을 잉태한 원작은 어떨까.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깜짝 놀랐다. “어떤 면에선 소설이 (영화보다) 더 훌륭한 면도 있다. 플롯으로 읽는 소설이 있는데, 이 책은 문체로 읽는 소설이었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은 중편인데, 문장을 보니 활자에서 소금기 같은 냄새가 났다. 짠 내. 문장이 워낙 좋아서 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남성 소설가가 여성을 화자로 서간체로 풀어나간다는 점이었다. 시쳇말로 ‘삑살이’도 없을뿐더러, 여성 작가도 써도 이렇게는 못 쓸것 같을 정도. 번역도 상당히 좋았던 데다, 예상 외로 소설이 무척 좋아서 기분 좋게 추천사를 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설은 영화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내용을 최대한 줄이자고 작심한 듯 영화를 풀어나간다. “소설에서 유미코가 다미오에게 시집가는 날, 기차 안에서 재일교포 여자를 만난다. 상당히 좋다. 그런데, 영화에선 생략됐다. 또 영화의 첫 장면. 유미코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집을 떠난 뒤 ‘아들이 죽여서 구들장에 묻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경찰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들장을 파본다. 물론 없다. 소설에 있는데, 영화에선 묘사가 안 돼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원형 같은 부분이 역시 있다. 이야기가 될 만한 부분을 거세하고 길을 거닐거나 노동을 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특히,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고레에다 감독은 대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데, <환상의 빛>은 원작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머릿속 꼬마전구가 ‘반짝’했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비유적으로 ‘박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엷을 薄, 빛 明. 일기로 말하자면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순간, 두 번이다. 두 번의 시간이 중요하다. 가장 인상적인 이 시간을, 영화는 프레임을 세로처럼 쓰면서 보여준다. 가로 프레임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문이나 벽을 이용하는데, 열린 문 사이로 좌우 벽을 보여주고 내부를 어둡게 보이게 하면 흡사 세로 프레임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세로 프레임에 애착이 많다. 이 영화 그런 게 많다. 고레에다 감독이 좋아하는 앵글 중 하나가 실내는 어둡고 바깥은 밝은 거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찍는. 근경의 어둠은 실내, 원경의 빛은 실외인 장면을 애호한다. 나는 그것이 폼 잡기로서의 애호가 아니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드러내는 징표라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삶은 어둠이자 실내에서, 빛은 저 멀리 바깥에, 작은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에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눈빛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진단한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이 영화에도 첫 장면부터 있으니까.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그렇듯.


“이건 감독의 인장 같은 거다. 오우삼의 흰 비둘기 같은 거. (웃음) 스타일면에서 이런 특성이 있는 한편, 이야기 측면에서도 그런 게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보면, 저밀도잖나. 드라마틱한 얘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얘기라면 아내가 한 대 후려친다거나 남자를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관습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없다. 재혼도 자연스럽고. 그게 원숙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p.47)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남은 여자. 이동진은 여자의 마음을 따라 간다. 첫 아이를 낳고 3개월, 그러니 생활력도 왕성할 즈음, 아침에 시시덕거리며 출근했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 왜, 왜, 왜!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나. 영화엔 안 나오지만,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다. 그런데, 이 남자가 죽은 거다.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깡촌으로 시집을 가고. 끝까지 해답을 주진 않는데, 영화는 소설보다 조금 더 나간다.”


그것이 클라이맥스였다. 여자가 지금의 남편과 바닷가에서 대화하는 장면. “좋긴 한데, 과하다고 생각한다. 환상의 빛, 바다의 유혹, 죽음의 유혹 같은 건데,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타나토스에 대한 근원적인 유혹이랄까. 살아야겠다는 유혹도 있지만, 스스로를 소멸하고픈 욕망도 있잖나.” 삶과 죽음 사이의 외줄타기. 연인 사이에만 ‘밀당(밀고 당기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밀당이 있다. 생사, 그 다르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그 무엇.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p.60)


남겨진 사람,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



그는 그리하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을 들먹인다. 이유를 찾고 싶은,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생각해보라. 셀러브리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신문은 방송은, 어떻게든 ‘왜’를 규정짓고 싶어 안달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이유가 단순하게 하나일까. 그럼에도 신문의 사회면은, 인간이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을 증명하듯, 불쑥 내뱉는다. “폭음을 한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나. 사실은 90%가 알코올 중독이라서 마신다. 그런데도 이유를 댄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니 뭐니 하면서, 사람은 이유를 갖다 댄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p.59)


다시 돌아가, 이 영화는 고레에다 영화가 그렇듯,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초지일관 남겨진 사람 혹은 던져진 사람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영화, “남편이 왜 죽었을까, 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질문했을 때, 답이 주어질리 만무하잖나.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살아야 하잖나. 그것이 <환상의 빛>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뒤집어 말하면 의미가 애당초 없었을 때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데, 텍스트가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든 예는, 여자가 지하실 계단을 닦는 장면. 오랫동안 여자는 계단을 닦는다. 한참 그것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자가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따라간다. 그때, 남편을 생각했다고 가정한다면, 근원적인 질문은 그렇게 느닷없이 삶에 틈입한다는 것.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끊임없이 그 문제만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남자는 왜 죽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부재와 쓸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여자의 재혼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팬티 하나만 입고 교태부릴 때의 행복도 있다. 그저 현재 생활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는 거다. 그것이 끊임없이 삐죽삐죽 삐져나와 틈입한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영화고 소설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p.80)


이어 이동진 평론가와 가진 질의응답 시간. 


영화 첫 부분에 미스터리처럼 죽음을 몰고선 풀려나갈 것처럼 가다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죽음이후 남겨진 시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레에다 감독은 왜 끝까지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가. 동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전제할 것은, 내가 고레에다 감독은 아니다. (웃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만약 이 텍스트에 반전이 있어서,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거나 ‘재혼남이 그 남자의 환상이었다’고 하면 이 텍스트는 완전히 깨지겠지. (웃음) 고레에다 감독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는다. 나는 고레에다 감독이 아직은 완성된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도상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볼 땐, 방법론적 회의론자 같은 측면이 있다. 장편 7편이 스타일 등이 다 달라서 같은 사람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환상의 빛>에서 롱쇼트와 롱테이크로 찍은 감독이, <원더풀 라이프>에선 전반은 다큐처럼, 후반은 극영화처럼 찍었다. <디스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찍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정해진 각본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배우의 미세한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찍었다. 연기부터 카메라, 편집까지 철저하게 가장 지독한 일본감독이 찍은 것처럼 만들었다. <하나>는 장르영화로 사무라이 코미디이며, <공기인형>은 한국배우를 데려다 만들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찍었던 베드신을 찍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직도 뭔가를 시도해보는 단계인거 같다. 흥미롭고 당분간 이렇게 할 것 같다. <하나>처럼 삑살이를 낼 것도 같지만, 현재 생각으론 끝까지 좋아할 것 같다. 좋은 영화는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고레에다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감독이 완성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완성된 감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고레에다가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의 온화해 보이는 영화들은 의외로 세상이나 삶 자체와의 철두철미한 마찰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에서 촬영 스타일까지, 전부 다르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아마도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끝까지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왔는데, 유미코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어떻게 봤나.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거기다. 유미코가 앙탈을 부리듯이 ‘왜 전부인을 사랑했는데, 나랑 결혼했냐’ 하면서 수습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불쑥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장면을 영화는 떼서 맨 뒤에 붙였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그래서 과하다싶은 장면을 만들었다. 


남자(다미오)도 그 못지않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삶의 길이 남은 거고, 두 사람은 그 길에서 만난 동반자인 거지. 그 장면은 리얼한 앙탈이면서 장면으로서도 좋다. 그런 부분을 덜어낸 것도 좋고. 


고레에다 감독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영화를 찍고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이 허우샤오시엔이고, 대만까지 가서 이 영화를 보여줬다더라. 딱 보고 스승님 왈, 영화 참 좋다. 근데 너는 모든 걸 미리 결정하고 찍었구나. 고레에다 감독이 머리에 한방을 맞은 것 같았다더라. 소설엔 강박이 없는데, 영화는 좋고 아름답지만 내 느낌엔 강박 같은 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지. 형식이 먼저 결정된 것 같은. ‘멀리 관조적으로 찍을 거야’와 같은 강박이 있었다는 거지.


[예스24 기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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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거야."



아, 이 말 참 좋다.
오랜만에 꺼내본 말인데, 속으로 읊조릴 때도, 입 밖으로 꺼낼 때도 참 좋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해>의 좋아하는 대사다.^^

내 좋아하는 당신도, 한 번 입 밖에 내봤으면 좋겠다.
참, 이 음악, 꼭 틀어놓고 해봐야 한다.


나는 당신이...
나는 당신을...
참 좋다. 참 좋아해.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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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여신

2010/08/22 17:05
나와 친구는 그녀를,
열하여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

여신을 알현한다는 것, 복이다.
다만, 일전에 언급했듯 아무나 여신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리 대답할지도. 
다른 여신이 '그냥' 여신이라면, 이 열하여신은 내 'TOP' 여신이야.
다른 여신이 '인스턴트' 커피라면, 이 열하여신은 내 '원두' 커피야.

(헐, 손발 오그라들어도 우짜겠노!)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이지만, 나도, 아저씨가 되고 싶다.
(원)빈이 때문에 이젠 그냥 아저씨 되기도 글러버린 더러운~ 세상. 흙! ㅠ.ㅠ
((신)민아는 돈성의 아파트 브랜드인 '내먄 (잘 살면 돼)' 광고출연 땜시 여신 자리에서 미끄러졌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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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사랑하긴 쉽지만,
(물론, 쉽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왜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누구에게 들은 건지 기억나진 않지만,
늘 실감, 빠득빠득 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곧,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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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가, 2006년의 11월이었죠.

사실, 11월은 그래요. 여느 달과 달리, (주말을 제외한) 휴일도 없고 특별한 축제나 기념할만한 날도 없어요. 맞아요. 무미건조한 달! 만추의 기분요? 에이, 설마~ 그 달은 겨울과 가을 사이에 끼여서 딱히 제 나름의 계절적 정체성도 가지기 힘든 달이에요. 친구는 그러더군요. 겨울로 가는 길목에 '사산아'처럼 던져진 달이라고. 떨어지는 낙엽들 때문에 스산하기까지 해요(그나마 '빼빼로데이'가 있는 것이 위안이랄까요~ ^^;).


그런 낙엽을 보자면,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그해 11월, 우리는 당신을 보내고야 말았죠. 사산아 같은 달에 누군가를 그렇게 보내는 건, 더 큰 감정노동을 동반해야 해요. 누군들 누울 자리, 누울 달을 따져서 눕겠느냐마는, 그렇게 ‘천국’으로 당신을 보내는 일, 쉽지 않았어요. 


그래요. 알프레도 아저씨. 당신은 그때 그렇게, 떠났습니다.
뭐랄까. 아저씨를 대면하거나 얘기를 나눈 적 없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 원한다면 기댈 어깨를 언제든 빌려주는 사람이 갑자기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까요. 아저씬 그런 사람이었어요. 집 나간 고양이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에 치이고 치이다가 다시 돌아가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반가이 맞아줄 것 같던 사람.


하긴, 아저씨는 영화 속에서도 그랬어요. 토토에게 말이에요. 아저씨를 토양으로 삼고 자란 토토가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뒤에도 아저씨를 찾아오지 않았죠. 하지만 아저씬 토토를 믿었고, 언젠가 돌아올 그를 위해 눈물겨운 선물을 준비해 둔 사람이었죠. 그 선물. 토토가 아니라도, 그 선물을 보고선 눈물 한번 흘리지 않은 사람 없을 걸요. 아, 제게도 아저씨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긴 몰라도, 아저씨는 <시네마 천국>을 심장에 깊이 새긴 사람에게 영원히 자리매김하고 있을 거예요. 어린 토토가 그렇게도 따르고 좋아하던, 토토에 대해 절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당신. 토토의 (유사) 아버지였고, 선생님이었으며, 두목인 한편, 무엇보다 친구였던 당신.



2. 친구, 맞아요.

그래서 아저씬, 욕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 사람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그랬기에, 영화나 인생을 즐겼으며, 친구를 묶어두지도 않았던 거겠죠? 그리고 친구에게 멘토가, 카운슬러가 되어주었겠죠. 특히, 종종 보여주신 약자를 향한 애정, 그것 또한 인상 깊었어요. 스스로 부유하진 않았지만, 넉넉하고 풍족한 마음씨로 없는 사람을 대했던 친구.

그런 친구를 구름의 저편으로 보냈을 때, 슬픔도 슬픔이지만, 참 아쉬웠어요. <클로저>에서 주드 로가 분했던 부고전문기자, 댄이 말했듯, 제대로 된 부고기사를 접하지 못해서, 내가 그것을 제대로 못해서.ㅠㅠ 부고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1인분의 생이 마감됐음을, 그 죽음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람들은 때론 간과하는 것 같아요.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에 말이죠. 그 세계가 다른 세계에 미친 영향은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그래서 알프레도 아저씨를 제대로 알렸어야 했는데 말이죠.


어쩌면, 이 포스팅은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친구처럼 당신을 생각했던, 한 젊은이가 보내는 연서이기도 하지요. 더불어, 지금까지의 제 생애를 지탱하게 만들어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아저씨와 같은 친구들에게 건네는 이야기. 아저씨 없는 토토가 없듯, 아마 그 친구들 없이는 제가 없었을 거예요. 그렇기에 ‘시네마 천국’은 어쩌면, 제 얘기가 아니었을까요. ^.^  




3. 저는 한때, ‘ToTo’라는 아이디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당연히 <시네마 천국>의 ‘토토’에서 빌린 아이디였죠. 내 인생의 영화, 많지만 0순위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시네마 천국>을 말합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였죠. 그보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하고 극장을 드나들던 저였지만, 그건 일대 사건이었죠.  단순히 영화 제목이 마음에 들어 만났던 <시네마 천국>. 대수롭지 않게 앉았다가 끝내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시간이었어요. 눈물까지 범벅이 돼서, 몰입하고 말았던 그 첫 번째 대면의 시간.


그 전까지 <시네마 천국>만큼 가슴을 후벼 판 그런 영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토토와 알프레도 아저씨의 우정. 아버지 잃은 어린 토토가 유사 아버지이자 친구인 아저씨와 나눈 감정의 교류. 이전에 절 울렸던 한권의 책,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만났던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의 느낌이 영상으로 되살아난 기분이었어요.



그들은 서로 만집니다. 몸의 접촉을 넘어선, 서로의 마음을 만져주는. 그건 소통이고 정서적 공유였죠. 누구 하나의 의한 가르침이나 주입이 아닌, 서로가 삼투압하고 번집니다.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피부접촉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추구한다죠.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접촉을 통해 함께 자랍니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죠. 그들의 상호관계성이 형성되는 과정이 저는 눈물겨웠나 봐요. 처음 볼 땐 무작정 몰입됐던 그들의 이야기가 자라면서 더욱 가슴 한 켠에 숨 쉬게 된 건, 아마 그런 ‘관계’ 때문입니다.

알프레도 아저씨는, 토토에게 이런 말도 건네죠. 
“토토, 네가 영사실 일을 사랑했던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네 일을 사랑하렴...”

어린 날부터 뻔질나게 영사실에 드나들던 토토에게, 영화(일)를 하라고 얘기하진 않아요. 그저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고. 그건 곧 자신을 사랑하라는 의미까지 담은 표현. 아저씬, 만지고 만져질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존재가 커짐을 머리가 아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맞죠? 아저씨. 만질수록 커진다!



4.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제게 알프레도 아저씨이자, 뽀르뚜가 아저씨. 중학시절 만났던 내 친구 상현이. 녀석은, 정말 다른 친구와 달랐어요.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환경의 세계에 묶여 있던 제게, 녀석은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줬죠.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그는, 풍부한 감(수)성과 마음씨를 지닌 문학 소년이었어요. 녀석은 조숙했어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그는 너른 웃음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사람도 먼저 생각할 수 있음을 알려준 친구. 교내 백일장을 휩쓴 그의 글을 보자면, ‘아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오지’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었고요.


저는 무작정 녀석이 좋았고, 많이 따라다녔죠. 10대의 좁은 내 세계에 변곡점이 됐던 그 친구. 똥고집부터 부리고 혼자만 알았던 제게, 처음으로 세상에 가난이 있음을, 다른 친구를 우선 생각할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죠. 우리는 늘 밥을 함께 먹고, 녀석과 내 집을 오가며, 자전거를 함께 타고 공부는 물론 노는 것도 함께 했었죠. 내게 그렇게 번졌던 그 친구. 나는 얼마나 그 친구에게 번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고마운 친구.


그리고 20대. 나는 또 다른 알프레도 아저씨를 만났죠. 군대를 갓 제대하고, 폭력적이고 가혹한 율법에 날이 서 있던 제게, 타국에서 만났던 그녀는 내 안의 독을 빼주었어요. 한 지역방송사의 기자였던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다시 공부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죠. 그 먼 타국에서 우린 참 많이 걷고 이야길 나눴죠.
 

내가 놀란 건, 그의 선택이었어요. 당시 자본이 부추기는 욕망에 더 가까이 있던 내게, 그는 우리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죠. 그는 그 그늘은 결국엔 우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 중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를 품고 한 장애인 커뮤니티에 자원봉사자로 자신의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특수교육(Special Education)으로 진로를 잡은 선택이었죠. 


물론, 그의 선택이었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그는 내게 간혹 토로했었죠.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도 한 상황에 회의를 내비치면서. 그러나 그는 억지로 버티고 견디지 아니했어요. 자신의 몸이 고장이 나기 전까지는. 그는 많은 시간 즐거웠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달뜬 목소리로 자신의 행복을 말해주기도 했었죠.

그 사람, 또 다른 알프레도 아저씨였던 그 사람. 그 덕분에 나도 꿈이 생겼고요. 그는 알프레도 아저씨가 토토에게 했던 마냥, 내게 이런 말을 건넸죠. “건강하게 사회 속에 썩어 들어가기 바라네. 해서, 사회기둥의 한 뿌리가 되어 있는 자넬 보고 싶네,. 든든한 한 뿌리가..” 이건 내겐 절대반지가 됐어요. 그때 이후 내 생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대가. 영원히 지키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든든한 뿌리까지 될 자신도 솔직히 없지만, 늘 내 가슴 속에서, 숨이 멎는 그 날까지 간직한 그 말. “건.강.하.게. 썩.어.들.어.가”라는 그 말.


맞아요. 그들을 널 만나기 전과 만난 후, 저는 사람이 완전 바뀐 건 아니지만, 약간 달라졌어요. 그때그때 내 생은 그들을 만나기 전과 그 후로 나뉜 거죠. ‘before’와 ‘after’. 삶에서 경험하는 어떤 균열이라고 해도 좋을. 그리고 지금 새로 시작한 일. 그들이 추동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앞서 했던 일도 물론 그랬지만, 지금도 그래요.


내겐 그 친구들이 바로, 알프레도 아저씨랍니다. 사실 지금 그들은 나는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이유들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여행스케치의 ‘옛 친구에게’가 있어요. 그 노래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알프레도 아저씨를 떠올리죠. “지난 내 어리석음 이젠 후회해 하지만 넌 지금 어디에… 아직도 나를 기억 한다면 날 용서해주오♪” 그들, 잘 있겠죠?



5. 작은 바람이 생겼어요.


알프레도 아저씨가 토토에게 그랬고, 그들이 나에게 그랬죠. 그것이 단 한 사람에게 일지라도, 당신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맞아요. 당신은 내게 그런 번짐이었습니다. 우린 느닷없이 만나고 느닷없이 헤어진 상태지만, 그건 생에 있어 하나의 단계이자, 수순이라는 생각도 해요. 알프레도 아저씨를 훌쩍 떠나보낸 채, 뒤늦게 그를 찾아간 토토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해요.



그래도 느닷없이 잊히진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당신의 번짐이 아직 제 가슴에 번진 채 있어서 역시 다행이에요. 토토가 알프레도 아저씨를 만난 것이 우연이듯, 우리의 만남도 우연이었어요. 그 우연이 우연을 불러 인연이 넓어지고, 인연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 줬네요. 당신과 맞닥뜨린 이 우연이, 인연이, 저의 세계를 더 넓혀줬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번짐이었습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냉정과 열정 사이』)는 말이 맞다면, 당신들은 내 속에서 여전히 번지면서 있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는 저도 그런 번짐이고 싶어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사기를 통해 비치는 영상이 토토에게 경이로움과 감탄이었고,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된 창이었을 겁니다. 알프레도 아저씨가 그것을 전해줬고.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건네는 커피 한 잔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작은 번짐이자 아주 작은 위안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늘 커피와 함께 제 마음 한 잔도 담아주고 싶어요. 그것이 제 작은 바람이에요.
커피 한 잔, 번짐 한 모금...


마지막으로, 장석남의 ‘수묵정원9-번짐’이라는 시를 건넵니다.
고마워요, 알프레도 아저씨(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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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마도, 봄의 끝-여름의 시작 무렵이었을 거야. 콘서트를 봤어. 노래가 흘렀고, 사람들이 환호했으며, 이야기가 넘쳤다지.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약속이 있었어. 무대로 한 쌍의 커플이 불려 올라갔고, 여느 무대에서나 볼 법한, 흔해빠진 프로포즈 타임이 펼쳐졌어. 남자가 사연을 보내서 채택이 됐나 봐. 사실 그런 프로포즈, 사랑 그 자체의 사랑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용 쓰는 투쟁 같은 측면도 있지만, 때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뭉클할 때가 있지. 이 날 이때가 그랬어.

정확한 사연은 기억나질 않아. 다만, 손발 오그라들었다는 정도. 블라블라, 이야기를 풀던 구애남이 마침내 던진 결정구는 이것이었어. "Will you mary me?"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줄래? 익히 예상했던 말. 더 나가보자면, 뻔하고 식상하며 상투적인 그 말.

그럼에도 아! 그 순간은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

주술이었을까. 그 구애남, 혹시 연애술사? 호잇~


여자는 이 프로포즈를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두 사람, 여길 오기 전, 사전 교감이 있었겠지. 두 사람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더니, 이 구애남, 준비라도 해 둔 양, 좔좔좔 보따리를 푼다. 연인과 꿈꾸는, 행해야 할 혹은 행하게 될 행위를 나열한다.

그건 약속이었어, 약속. 자신의 연인을 향한, 수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증명 받기 위한. 그 약속,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 탈색돼 버리거나 날아갈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염려를 퉁~쳐버렸다. 그 남자의 진심일 확률 99.587%. 여기는 곧, 그 연인의 약속의 장소.


모르긴 몰라도, 그 약속,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구애남의 삶 일부를 규정하는 무엇으로 자리매김했을 거야. 물론, 두 사람의 이후 행보는 몰라. 결혼을 했거나, 헤어졌거나, 아니면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약속, 지키고 있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졌거나.



약속은 때론 분명, 그럴 수도 있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무엇이 될 수 있지. 깨지라고 있는 것이 약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깨려고 하지 않아도 깨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약속이라면, 그건 거부할 수 없는 계시!!!

히로키에게도,
사유리는 그런 존재였지.


“사유리가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이 보였다.”


반짝반짝 눈이 부셔, 예예예예~♪

맞아. 내 또 다른 블로그가 품고 있는 그들이야. 사유리와 히로키. 그래서, 블로그 타이틀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을 그대로 딴. 얼마나 이 작품을 알싸하게 봤으면 타이틀을 그대로 붙였겠어, 그치? ^^ 넌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

모든 것은, 약속에서부터 비롯된 거야.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 사유리에게 던진 히로키의 약속. 언젠가 방과 후에 했던 히로키의 다짐.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여름이었구나. 딱히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한 작은 도시. 중학생 히로키가 절친인 타쿠야와 함께 매혹된 것은, 동경하는 것은, 츠가루 해협 사이에 국경너머로 솟아있는 거대한 탑이었어. 더불어 히로키에게 절대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유리. 아, 아름다운 소녀.

내게도 그때, 여름이었다.

모든 약속은 여름에 하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어쩌다가 여름이라는 계절이 맞물렸을 뿐이겠지. 노을, 가지를 내린 가로수, 가로등 불빛, 우리 마음을 비춰주던 그해 여름의 풍경. 아직도 난 기억해. 넌 그날 우리가 걷던 그 길이 그려지니.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 히로키에게도 그런 날이었어. “난 저 탑까지 갈 거야.” 다짐이었고, “너와 함께”는, 약속이었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 될지라도, 그때만큼은 진심이었어. 히로키는 늘 그 탑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매우 중요한 뭔가가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는 거기에 가야했던 거야.


하루키에게 그 특별했던 여름. 이곳에서 사유리와 함께 저 탑을 바라보며 했던 조그만 약속. 우리도 아주 조그만 약속이었어. 이루지 못할 무언가도 아니었지. 우리가 다시 돌아갈 그곳에서 만나기만 하면, 대수롭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물론 그 약속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때의 우리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됐겠지. 약속을 지키지 못함은, 두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의미하듯 말이야.  

하긴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약속이야 어쨌든, 그곳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으니까. 히로키에게도, 나에게도 그랬어. 약속을 하던 그 시절, 사유리와 세상은 얼마나 빛났던가. 사유리 하나로 세상이 빛날 수 있음을 확인한 이 중학생은 또 얼마나 조숙한 건가. 놀랍지 않나. 물론 그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지만, 그의 독백을 듣노라면, 그의 동경이, 그의 애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쉬이 짐작이 갈 거야.

“3천만 명 이상이 사는 이 도시에서 만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나 아닌 둘이 있을 때, 그리고 군중 속의 외로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는 깨달았나 봐. 이별할 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을 때, 위로랍시고 던지는 이 말들. 세상의 반이 여자라고, 세상의 반이 남자라고. 사실, 그건 위로가 되질 않음을 알지? 그 위로, 사실이긴 하지만, 진실은 아니잖아. 그 여자도, 그 남자도, 세상엔 단 하나뿐인 존재거든. 그 여자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여자도 없으며, 그 남자를 대신할 남자도 없으니까.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사유리.
어떻게 된 일이지? 사유리가 사라졌어.


생각해 봤어. 히로키에게 사유리 없는 세상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그 약속이 아녔을까. 히로키에겐 가끔 꿈에서나마 찾아야 하는 사유리였어. 어딘가 차가운 장소에 홀로 남겨진 사유리를 필사적으로 찾는 꿈. 그럼에도 결국 사유리를 찾지 못한 채 깨고 마는 꿈.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기분에 시달렸지. 그런 히로키를 버티게 견디게 해 준 것은, 지켜야 할 약속이었을 거야. 내가 그랬기에 말이지.


그래, 그때 내가 먼저 돌아왔잖아. 당신을 여전히 그곳에 두고. 당신 없는 이곳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당신과 내가 나눈 그 약속 때문이었던 것 알아? 아마, 모를 거야. 내가 늘 꿈꾸던 건, 당신과 나눈 약속이 지켜지는 순간이었지.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릴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착각을 하고 있었지, 나는.  

“이제는 이미 아득한 그날, 저 구름 너머에 그녀와 약속한 장소가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약속은 현실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어. 시간의 풍화작용에 깎이고, 얼룩도 지고 말겠지만, 어떤 순간에 내뱉은 약속은 그런 것들이 별반 무쓸모 아니겠어. 그건 어쩌면 격렬한 아픔이기도 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까 말이야. “어느 틈에 난 이런 아픔을 안게 됐을까”라고 되물어도 당최 답이 없는 현실도 있으니까.

사실 히로키가 부러웠던 건, 약속을 지켜서가 아니었어. “널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라는 약속 이후의 약속을 할 수 있어서도 아니었고. 아, 물론 그런 것들이 아예 없다고 하면 새빨간 뻥일 테지만, 그것보다 약속을 향해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어쩌면 그 기다림, 뼈가 피부를 찢는 듯 격한 아픔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어서 부러웠다.


내 가난했던 영혼을 채워주었던 당신. 그런 당신과 했던 약속. 그 약속이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미제’로 남은 순간을 나는 기억해. 그저 박제되고 봉인되고 만 그 약속. 그래, 기약 없는 기다림 때문에 바람 빠진 자전거처럼 흐느적거리진 않아도 되지만, 대신 자전거 핸들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순간. 줄곧 당신을 향하던 자전거가 갈 곳을 몰라 휘청거려야 했던.

어디에서였더라. 이런 말이 있었어. “나는 한 줄 책에 실린 글귀에 위안을 받고, 퇴근하는 저녁 길에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 불과했다.” 알다시피, 나 역시 그런 사람이잖아. 한 줄의 약속에 위안을 받고, 매일같이 퇴근길, 약속의 장소를 떠올리며 하루를 지탱했던 나는, 구름의 저편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어. 

그래도, 사유리와 히로키는 내게 또 하나의 ‘약속’을 알려줬어. “약속의 장소를 잃은 세상이라도, 그래도 앞으로 우린 살아갈 것이다.” 잃어도, 그것이 내가 아닌 세상에 의한 것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히로키가 사유리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에 가능한 게 아녔을까. 두 소년과 한 소녀의 염원이 담긴 비행체 ‘벨라실러’는 그런 생의 욕구를 에너지원으로 삼았던 것은 아녔을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던 우리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지만,
우리가 했던 변치 않을 약속은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에도 고마워하면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 사회의 취약한 곳과 소외된 세계에 닿았던 당신의 몸과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벨라실러를 타고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또 다른 약속. 나도 히로키를 따라. 당신을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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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빠바바바 바 바바, 빠바바바 바 바바... 하고 사운드가 기어나올 때,
나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런 감격이 있나, 허. 눈물까지, 시큼.

<대부>를 필름으로 첫 대면하는 그 순간.
이제야 필름 스크린으로 알현하게 된 송구스러움도 꾸물거리고,
지금에라도 필름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도 꿈틀대고,
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엔 내 필력이 딸릴 뿐. 띠바.

<대부>가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빌어먹을 가족 서사는 지금에서도 충분히 현실을 향한 사유를 가능케한다.
하긴 어느 시대에든, 이 서사가 사유와 흥분을 멈추게 할 리는 없지.


아울러, 말론 브란도가 아닌 돈 콜레오네는 상상 불가능.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탓해도 어쩔 수가 없다. 된장.

그가 떠난지 6년.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돈 콜레오네가 쓰러질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부>에선, 시쳇말로, 브란도의 미친 존재감!이 캐작렬.

말론 브란도를 그렸다.
지난 1일이 6주기였다. 아래 기고문은 그래서 나왔다.

p.s. 지난 5월에 개봉한 <대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은,
아직 극장(씨네코드 선재)에 걸려있다. 놓치지 않길 권한다.
특히, 필름으로 아직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오는 30일 팡파레를 울리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 서울!

그 바캉스 시즌에 <대부>가 역시 껴 있다는 즐거운 소식.
8월8일(일) 김영진 평론가의 씨네토크와 함께 펼쳐지는 <대부> 박항스~
13:00다. 엔간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



말론 브란도,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부정한 이름
예술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지난 5월 <대부>가 재개봉했다. 국내 개봉이 1977년(미국은 1972년)이니, 33년 만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이번 버전은, 향수와 함께 바뀐 세대의 스크린 경험을 위한 것이겠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부>는 그렇게 다시 왔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난 <대부>는 위엄 있고, 웅장했다. 경건함과 비장미까지 갖춘 고전적 서사의 재등장이었다. <대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후광효과에 기댄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대부>는 표피만 놓고 보자면, 마피아 협잡극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오해가 되겠다. 마피아로 포장됐을 뿐, <대부>는 당시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관된 문화적 산물이자 서사였다.


마리아 푸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로 우선 각인돼 있다. 재능 있는 신예 감독에서 이 영화로 거장 대열로 성큼 올라선 코폴라의 연출력이 <대부>를 만신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마피아 세계를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류학적으로, 뭣보다 누구도 자유롭기 힘든 가족서사로 <대부>는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돈 콜레오네였던 사나이


그 핵심에, ‘돈(비토) 콜레오네’가 있다. 가족과 패밀리의 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오해받는) 가부장, 돈은 <대부>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말론 브란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제임스 딘도 선망했던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그는, 당시 전성기가 지난 처지로, 제작사는 그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다. 코폴라의 고집이 위대한 <대부>를 만들어냈지만, 돈을 스크린에 현현시킨 것은 전적으로 브란도의 공이었다.



여기, <대부> 카메라 테스트에서의 일화. 브란도는 구두약을 머리에 발라, 비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설 속 인물이 불도그 같이 생겼으니, 화장지를 입안 양쪽 볼에 집어넣었다. 늙은 얼굴과 염색, 어눌한 말투까지 곁들여 우리가 아는 비토, 대부는 창조됐다.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편으로 브란도가 비토를 맡은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이나 스크린에서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연기는 노동자 계급의 것에 가까웠다. 앞선 남자 배우들이 도덕군자와 정의의 사나이에 붙박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그는 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그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 <아가씨와 건달들> 등을 통해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반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는 당대 미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50~60년대 젊은 미국에게 어울리는 배우였다.


침체기였다고는 하나, 그런 반영웅이 선택한 <대부>는 의외였다. 말하자면, 돈 콜레오네는 가부장의 화신이다. “내 말이 곧 법”인 마피아의 절대군주로,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 아버지. 세월에 굴복한 것일까, 그도 늙은 것일까. 아버지가 만든 기성의 규율에 반항하고, 투쟁했던 그가 전성기 이후에 택한 배역이 아버지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거친 짐승 같은 그가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그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반항 기질과 퇴폐적인 매력은 불혹의 나이에도 어딜 가지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짐승을 어찌하겠는가.


파리에서의 한 가지 표정, 브란도


<대부>의 선택이 아버지의 규율에 편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다. 브란도의 다음 선택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졌다.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얼굴. 부성의 체화가 불러온 반발이었을까. 신랄하고 퇴폐적인 폴로 변신한 브란도의 무기력한 정사가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정사를 나누면서 그는 외친다.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세상에 지치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폴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하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허무가 감싼 폴의 얼굴. 그것은 또한 브란도의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증명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개봉 즉시 논란이 됐다.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신 등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것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폴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 그 표정은, 1970년대의 어떤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혁명의 시대가 지났거나, 실패로 끝난 혁명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에 남은 흔적은, 곧 당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끝난 혁명의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던 그 표정.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녹슨 해방구만 남았고, 파멸을 친구 삼아야했던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고.


내가 가장 강렬하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때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파리지앵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자취 때문이 아니었다. 68혁명의 도시를 가고 싶다는 욕구도 아니었다. 숱한 사상과 혁명을 잉태했던 커피하우스에서 향미를 맡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폴의 표정을 잉태한 파리가 궁금했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가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파리에 가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건 브란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배역과 한 몸이 되고 표정으로 말하는 ‘말론 브란도’를 볼 순 없다. 6년 전, 2004년 7월1일, 향년 80세, 그는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무명 시절, 돈을 벌려고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매부리코를 얻었던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이라기보다 반항을 일삼는 터프가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시대를 열어젖혔을 때도, 그는 쉽게 투항하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의 자세였다. 연기에 대해 늘 회의했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불평했지만, 그는 연기했고, 천생 배우였다. 오직 하나였던 배우. 그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죽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일.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일. 그것이 버르장머리 없는 반항아의 파괴적인 일탈일지라도 시도해보자. 예술 안에서 당신안의 짐승을 깨워보자.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7·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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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우리에게, 그렇다.
피 묻은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항쟁이 있었고,
분노와 슬픔을 이끌어냈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다.
반 세기도 넘은 과거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6월을 얘기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것. 월드컵.
현재 진행형인 월드컵도 2010년 6월의 대한민국을 달구겠지만,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에서 이같은 광경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으며, 들은 적도 없었다.
일상의 굴레를 훌훌 던지고 빨간 색으로 국토를 뒤덮은 붉은 악마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자동차 경적과 응원의 함성, 초원을 질주하듯 녹색구장에서 터질 듯한 율동을 선보이던 육신의 황홀했던 순간들… 대한민국은 이 낯선 풍경을 경험했다.

그해 6월, 놀라고 뜨악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축제가 가능할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역주의, 안보반공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 거부하고 싶지만 일상과 밀착된 굴레를 그 축제동안 무시하고 ‘해방구’를 찾아 일탈을 감행했던 기억.
한마디로 짜릿하면서도 무서웠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했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광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고 사소한 취향과 쾌락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축제의 핵심이 몰입이듯, 그냥 즐겼을 따름이다.

축구라는, 전 세계가 공히 즐기는 단일 스포츠종목의 힘은 유사종교나 마찬가지였으나, 종교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교리따위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연대가 엄연히 존재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약자들의 반란이 즐거운 이유

그때 그렇게 우리를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 ‘한바탕 대동굿’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6월을 주도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변방에 있던 한국, 세네갈, 터키 등이 돌풍의 주역이 됐던 것도 즐거웠다. 약자들의 반란이랄까. 약자가 승부나 우열을 뒤집는 쾌감이란, 경기 그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소림 축구>가 그랬다. 그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힘없고 버림받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세상을 놀래키는 승자로 변모하는 ‘깜짝쇼’였다.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주성치’다. ‘희극지왕’이란 타이틀을 가진 홍콩영화계의 주춧돌, 주성치가 축구를 다뤘다.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국 관객들에게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유치짬뽕이거나 혹은 재기발랄. 주성치(영화)의 매니아들은 말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소림 축구>는 예상치 못한 웃음과 애수를 동반한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였으며, 관객을 한 순간에 자지러지게 만드는 황당무계함은 ‘판타지’나 다름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영화속 이야기가 고단한 현실과 오버랩될만 하면, 이내 딴죽을 피우며 농담을 건넨다. 그 예측불허의 기지는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한다. 장르도 뒤죽박죽 섞인다. 뮤지컬, 홍콩 느와르, 서부극, 전쟁극 등 그 변신 한 번, 기발하고 재기 넘친다. 축구를 소재로 이렇게 다양한 서브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랍도다. 한마디로, 예사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

사회적 약자들에겐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어떤 재능과 능력을 지녔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또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약자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실패는 뭣보다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씽씽(주성치)도 그런 면에서 돌연변이다. 소림사 여섯 사제중 한 명인 그는, 쿵푸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꿈꾸는’ 몽상가 청년.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쓰레기더미를 나르는 루저. 아무도 초라한 젊은이의 꿈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꿈에 동반자가 생긴다. 젊은 시절, 페널티킥 실축으로 스타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황금발’. 그 역시 한 번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 쿵푸와 축구의 접목을 원하는 씽씽에게 황금발은 축구팀을 만들자며 떡밥을 던진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현실 속에 침잠한 나머지 소림사 사형과 사제를 찾아 함께 꿈을 찾자고 설득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축구팀이 탄생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홍콩 영화지만, 그건 우리네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이권의 문제에서 어디 자유로운 곳이 얼마나 있으랴. 음모를 통해 탈취한 돈과 권력으로 약자를 깔보고 짓누르면서 자기 잇속만 고스란히 챙겨먹는 축구계의 불한당은 미디어를 조작하고 대중을 농락한다. 버려진 약자들만 고통을 ‘전담’한 채 쓸쓸한 정서를 덮어쓴다.

잠깐 잊지마라. 이 영화, 선전포고 했듯이, 판타지다.
축구라는 판타지를 통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쓸모없다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꾸린다. 굴욕을 당해도, 환멸속에 있어도, 그들은 참고 견디면서 있는 놈들에게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린다. 황당해도 짜릿한 쾌감이다.


그 와중에 끼어드는 씽씽과 무이의 로맨스는 가난한 연인들의 자화상이다. 묘한 울림이다.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와 이를 기우는 사랑의 모습. 사랑에도 스펙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랑은 조건으로 짜집기가 되지 않는다. 씽씽과 무이는 알려준다. 눈물젖은 만두와 함께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판타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소림 축구>를 판타지로 보는 명분은 명확하다. 범접할 수 없는 철통같은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현실은 약자 편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 이미 고정된 신분과 계급의 세습은 ‘질서파괴’라는 죄목으로 역전의 드라마를 어지간하면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구색을 갖추고 전복을 막기 위해, 개구멍 정도만 열어놓고선 ‘세상은 노력하면 이렇듯 살만해’하며 극소수를 받아들일 뿐이다. 선심 쓰는 척 한다.


<소림 축구>가 그런 약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법.
현실에선 뛰어 넘으려다 바지가랭이만 찢어질 일들을 태연자약하게 이뤄낸다. 판타지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 환멸을 참고 견디는 방법. 얼지 마, 죽지 마, 아마도 부활할 거야.


어쩌면 그것이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단한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마약과도 같은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왔었던 판타스틱한 축제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에겐 다시 축제가 열렸다. 신나게 외치며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자유.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으로 다시 편입된다. 축제도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뒤의 허망함을 우린 경험해야 한다. 하루둘 추스리며 생활속으로 편입된 사람살이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판 신명나는 잔치가 ‘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만 뇌리에 박힐 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소소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것. 혁명이든, 전복이든, 뭣보다 우리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에 따라 꿈을 꾸는 것. 그리하여,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어보는 것. 아마도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하며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려 할 것이다. 국운융성이니 국격 상승 등의 아리송한 수사를 써가면서. 국가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는 지도자분들의 근엄한 표정따위는 ‘헐리우드 표정연기’로 치부하라.


지금 필요한 건 뭐?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우리들만의 축제!

나는 그것이 '혁명'이었으면 좋겠다.
축제 같은 혁명.
좁은 뜻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그런 체제 전복적 혁명보다 더 넓은,
혹은 상상력이 가미된 진짜 일상의 혁명.
아, 그런 혁명이 어떤 것일지, 당신과 함께 상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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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많은 또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아니, 내가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주입된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무슨 꿈이 있는지.

대신 그들은,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얼만큼 오르고 떨어졌고, 누가 어떤 집을 샀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뭣보다, 아이들 얘기 빠지지 않는다. 자랑이든 아니든 하나 같이 전문가 나셨다. 특목고가 어떻고, 영어 유치원이 어떠하며, 이 땅의 교육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도 챙기신다. 오, 놀라워라. 더구나 자신의 격한 희생을 강조한다.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 토닥토닥.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철없음의 동의어다. 아이들, 놀게 하면서 자라게 하라, 고 할라치면, 결혼도 않은 철부지의 응석(!)으로 치부한다. 니가 뭘 아냐, 이거다. 가장 보통의 존재도 그때만큼은 가장 철부지로 위치이동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들도 가장 보통의 존재다. 지배세력이 조작하는 욕망에 많이 좌우되는.  

내가 아는, 지금의 많은 제도권 학교는, 격한 말로 ‘사육장’이다. 사람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을 들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이 구축한 세계에 어떻게 투항하는지 알려주고, 지배세력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의심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주입한다. 특히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친다. ‘경쟁 천국, 연대 지옥’.


경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틀 로얄>은 그 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경악할만한 상상력으로 피로 도배질한 학창시절의 풍경을 다룬다. 극단으로 몰고간 미래상이자,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른들이 구축한 악행의 뒤틀린 결과물이 토해놓은 난장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충격적이다.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 80만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 1,200명.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에 자신을 잃은 어른들은 위협을 느끼고 정부는 배틀 로얄(Battle Royale : BR)법이라는 무식한 법률을 제정한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법률은 전국을 통틀어 일년에 한 학급을 무작위로 선발, 무인도에서 3일동안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내용.

겁나게 살벌하다. 학살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강한 어른’을 만든다는 명분이다. ‘세상 = 정글’이란 방정식을 내놓고, 학생들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으로 내몬다. 학생들도 얼떨결에 이 수작에 휘말린다. 복불복이다. 여기, 수학여행길에 나섰다 얼떨결에 무인도로 끌려온 42명의 학생들이 황당한 현실에 직면한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 끔찍한 살인극의 무대에 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바이벌 게임의 아이콘으로 등장해야 하는 그들에게 친구는 없다. 친구는 곧, 장애물이다. 친구의 선택마저 조정하려는 지금의 많은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치도록, 아이들의 감정마저 조절하려는 어른들.



비정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독한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는 그들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다.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섬뜩한 영화 카피가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순간이다. 자, 죽일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하나다. 대체 뭐 이런 것이 있냐고 싶겠지만, 그것은 우리 현실에 이미 내재된 풍경이 아닐쏘냐.

그러니 이런 설정, 익숙하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를 폭력과 피가 뒤범벅된 판타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한 어른들은, 생존 역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서바이벌 게임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없애야 하는 게임.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 주어지는 ‘승자(Winner)’의 작위는 곧 생존에 따른 권리이자 선물. 승자 독식의 세상. 패배하는 자는 영원히 낙오되고 죽어야 하는 세상.


현실의 정글은 피나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경쟁사를 눌러야 우리 회사가 산다. 동료를 제쳐야 승진이 보장된다. 연대나 협력은 사치다. 모든 것은 승리와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체제다. 말이 좋아 ‘윈-윈’이지, 상생의 방법을 익히지도 습득하지도 못한 포악한 사회구조는 경쟁의 승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패자? 그들은 존재 가치도 없는 잉여일 뿐이다. 승자 독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사회, 너무도 흉악하고, 흉포하다.


더 꺼내볼까. 회사 생존을 볼모로, 무조건 돈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임을 내세우는 고용주, 사고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피고용인. 돈에 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많이 버는 것이 미덕이요, 최선의 가치다. 함께 사는 법? 되물을 것이다. 혼자 잘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함께 잘 살아? 관계 맺는 법을 모른 채, 경쟁자로 타인을 인식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비극

경쟁 체제는 이미 현대 사회의 습속이 됐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왜 우린 끝간데 없는 경쟁 구도에 편입된 채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까. 개발독재시대의 성장위주 사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지배세력에게 무한경쟁 구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다. 어차피 그들은 출발선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들과 다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권력과 지배력은 세습돼야 한다.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솎아내면 아랫것들은 불만이 없다. 그저 부모를 탓할 뿐. 


<배틀 로얄>은 물리적으로 더 가혹한 방법을 쓴다. 그것을 통해 생존의 법칙을 주입한다. 극중 선생(기타노 타케시)은 말한다. “모두 필사적으로 싸워라. 그래서 살아남는 자가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가치 있는 어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내 가치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만 가치가 정해줄 것이라는 어른들의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단다. 즉, 경쟁에서 이기란다. 친구를 죽여야 한단다.


<배틀 로얄>은 경쟁 체제를 극한의 폭력으로 포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 더욱 폭력적일 수 있음을.

학생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투입되자마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친구라고 부르던 이의 목을 화살로 꿰뚫고 낫과 도끼를 휘두르며 총을 쏘아댄다. 심지어 성숙한 육체를 살육을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여학생도 있다. 어른들이 행하는 패악을 그들은 그대로 따른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 학생들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죽어가던 한 소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난 단지 빼앗는 쪽에 서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서늘한 한마디.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생존을 체득한 소녀. 그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준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같은 비극에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만만치 않다. 살인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을 듣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열 다섯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시 70대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살인의 현장을 담담하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개한다. 사실적인 폭력 묘사는 섬뜩함과 동시에 그 비극의 기원을 되짚어보게끔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인이 된, 후카사쿠 감독이 <배틀 로얄>을 통해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게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슈야와 노리꼬. 그들은 ‘실패한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Run’이란 말을 건넨다.

영화의 질문은 그랬다.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고 더불어 사는 친구의 존재를 지우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세상은 다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 그것을 희망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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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갈대', 금강님이,
나으 등쌀(?)에 밀려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
(그렇다고, 불법 사찰이나 협박을 한 것은 아님ㅋ)

<브로크백마운틴>에 대한 리폿을 보자니,
맞다, 게보린~!

요즘 나으 뇌주름 일부를 마비시키고, 일부 짜증 이빠이 감정을 부르는,
어떤 주변 상황들에 대한 현명한 매듭 풀기. 


(결별과 재결합 등을 거쳤고, 지금은 연인 사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니퍼 애니스톤과 결별할 당시 존 메이어의 이너뷰 기사 중 일부라고 했는디.

메이어는 그간 그들의 결별에 대한 악성 소문에 대해 "거짓도 속임수도 아무것도 없다"며 부정했다. 그는 또 "그녀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하고 세련된 여자"라며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다르며 각자 다른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며 "홀로 있고 싶어 관계를 정리했다. 어떤 게 옳지 않다면 누군가의 시간을 소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마, 이왕 찢어진 거 부욱 확실히 찢어졌으면 좋겠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띠바, 물론 내가 속속들이 그 사정을 아는 건 아닌데,
나한테까지 악영향이 미치는데다, 나의 이해까지 필요없겠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을 깎아먹고 마음 다치면서까지 억지로 지탱할 이유들이 있나.

메이어의 말,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 아냐?
아예 다른 공감대, 즉 서로가 상대의 성감대를 더 이상 자극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잖아. 혼자 오랄한다고 지랄 빨아봤자 목석인데 어쩌라고.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하고 소비하는 건, 죄가 아니더냐!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것까지도.

구닥다리 꼰대들의 이런 말씀, "다른 사람들 어떻게 볼래?"
띠바, 다른 사람 눈치만 보고 살라는 말씀?
자기 머리속 타인의 시선에만 평생 끌려다니라는 허튼소리?

물론, 며칠 전에 씨부렸듯,
사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의 선택이 되어야 하고,
이별도 역시 당사자의 선택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한 번 사는 건데, 그렇게 남만 배려(?)하시고 생각하다가 뒤질 건가.
그래도 살겠다문 쫌 제대로 살던가.
<브로크백마운틴>도 못 봤으면서...(맥주맛도 모르면서?...)   

띠바, 좀 욱~했다.
십장생! 시베리안허스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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