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레이’는 살아 있다

‘황혼의 사랑’ 다룬 어떤 작품들을 보고 든 단상


“파란 대문의 우리 집 / 넓은 마당엔 널 닮은 유채꽃 / 니가 좋아하는 상추, 고추, 강아지도 몇 마리 기르고~ / 아침 햇살이 밝으면 / 새벽등산은 언제나 그대와 / 밤엔 도란도란 둘의 얘기 / 너의 손을 꼭 쥐고 자는 꿈.”


그리고 거듭 강조한다. 진심이라고. 이제는 돌아오라고. 내 꿈을 받아달라고. 사십년 동안 품어왔다는 그 꿈. 어떤 황혼녘, 사랑을 원하는 한 남자의 노래다. 갈구다. 욕망이다. 고백이다. 한 여인 앞에서 그는 여느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광경이 익숙하지 않다. 왜냐고. 고백하는 그와 고백 받는 그녀는, 눈에 익은 ‘젊은’ 이가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노인네’들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등이 구부정하며, 어두침침한 눈과 잘 들리지 않는 귀를 가진,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잃고 있는 이들.


묻고 싶었다. 그 익숙하지 않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들은 사랑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존재들인가. 그들의 욕망은 그저 늙은 자의 ‘노망’이고 ‘주책’인 걸까. 그 대세라는 ‘동안(童顔)’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어리게 보임 혹은 젊게 보임’에 대한 과도한 찬사가 야기하는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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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이 가져온 단상이었다. 여관 혹은 모텔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섯 빛깔 사랑을 그린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이하 ‘사랑소묘’)>. 소노여남(小老女男)의 ‘사랑’을 버무린 이 뮤지컬은 1996년 연극으로 초연된 뒤 뮤지컬로 변신한 작품이다. 연극시절부터 <사랑소묘>는 캐릭터보다는 드라마의 힘이 강한 작품이었다. 뮤지컬로 변신하면서도 드라마의 힘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동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극 때 봤던 작품을 뮤지컬로 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연극에서 힘을 발휘했던 언어가 뮤지컬에서의 음악으로 무난하게 변신하면서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다시 돌아가자. 나는 어떤 노년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들을 함께 떠올렸다. 그것은 절대 추하거나 주책스럽지 않았다. 여느 사랑이나 욕망과 다르지도 않았으며, 신성시해야 할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사랑’ 혹은 ‘욕망’의 한 단면이었다. 그 주체의 육체나 외모의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이 아름답고, 욕망이 당연했을 뿐. 영화 <죽어도 좋아>가 떠올랐고, 영화 <어웨이 프롬 허>가 머리를 스쳤고, 만화이자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다가왔다.


<사랑에 관한 다섯개의 소묘> 중 '할아버지 할머니'

뮤지컬 <사랑소묘>의 마지막 에피소드, ‘할아버지 할머니’ 역시 노년의 사랑을 다룬다. 앞선 에피소드인 ‘love start’가 시대착오적인 젊은이들의 다소 억지스런 사랑 풍경을 그린데 반해 이 사랑은 깊고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추억 한자락 담은 첫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는 모습은, 사회의 모진 시선 때문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노년 혹은 황혼의 존재를 사회는 감추고 싶기 때문일까. 으레 사랑은 노년 아닌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인식한다. 늙어서 하는 사랑은 ‘주책’이라고 치부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사랑과 욕망에 인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고 불만이었다. 수줍음 많던 시절의 첫사랑을 만나 노년의 로맨스를 꽃피우고 싶은 할아버지의 바람(물론 부인은 이미 사별한 상태다)과 고백이 왜 온전하게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런 할아버지에게 분명 마음이 있음에도 할머니(역시나 남편과 사별한 상태)는 자식들의 온갖 눈치를 다 살펴야하는지. 그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늙으면 판단력도 떨어지고,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의지해야 살 수 있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편견. ‘젊은’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노인’의 역할이나 틀에 가둬 그들을 사육하려 하는 건 아닐까.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를 잃고 있는 사회의 거친 풍경이다. 중요한 것은 노인을 돌보고, 노인에게 친절한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신에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늙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섣불리 규정하는 그 오류가 문제다.


나는 그 ‘로맨스 그레이’가 애틋하고 뭉클하면서도, 할머니의 주춤대는 마음이 못내 걸렸다. 옆집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할머니의 남편이 꿈에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면서, 나는 누구 손을 잡고 가야 한다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던 할머니의 에두른 고백도, 파란대문 너른 마당에 도란도란 함께 사는 꿈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욕망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주춤거림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의 단면을 봐야만 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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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는 노인에게도 분명 성(性)생활이 있음을 보여줬다.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를 통해 노년의 성은 부끄럽고 노망난 일도 아니며, 성은 젊음의 특권도 아니며, 노년의 성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운 성 중의 하나임을 각인시켰다. <어웨이 프롬 허>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아내와 그런 아내에 대한 기억과 사랑으로 그리움 가득 쌓아올린 남편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삶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노년의 어떤 사랑이 보여주는 웅숭깊음을 품고 있었더랬다. 한동네에 살고 있는 여든을 바라보는 네 노인네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역시 이 사회가 간과했던 사랑의 한 풍경에도 눈을 돌릴 것을 권한다. 젊고 예쁜 것들만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며, 노년 혹은 황혼의 사랑도 분명 축복하고 박수를 쳐야 할 일이라는 것도. 젊고 예쁜 것들도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노인을 위한 사랑이 있는 것도, 현재의 젊고 예쁜 것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궁금하다. 과연 이 사회는 노인들의 욕망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을까. 노인 복지가 한낮 그들에게 안주하고 쉴 곳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틀렸다. 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선의는 따지자면 위선이다. 나이는 숫자다, 나이가 뭐 중요한가, 라는 말. 노인들에게도 그 말은 적용된다. 느리고 더딜 지 몰라도, 그 욕망이, 그 사랑이, 젊디젊은 이들의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고, 왜 다른 시선을 적용해야 하는가 말이다.


“사랑이 어때서?” <사랑소묘>에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버럭한다. TV에서 나오는 사랑이야기에 할머니가 궁시렁대자, 할아버지의 대꾸다. 모두가 하는 사랑, 우리라고 하면 안되냐, 는 투다. 맞다. 하나도 틀리지 않다. ‘동화(童話)’도 있건만, ‘노화(老話)’는 없다. ‘육아(育兒)’도 있는데, ‘시노(侍老)’에는 무관심하다. 노인에 대한 무지와 무례가 기가 찰 정도다. 더 많은 노인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이 나와야 한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그 무엇이 될 때,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맨스 그레이에 감탄할 때, 그런 때가 와야 하지 않겠는가. 좀더 아름답고 품격 있는 노년은 누구나 바랄 터. 그것은 누구나 늙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로맨스는 끝나지 않는다. 황혼의 욕망도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생의 근원이다. 오래 살자.


아울러 파란대문집 너른 마당에서 상추․고추․유채꽃 기르며, 강아지도 키우고, 아침엔 새벽등산, 밤엔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손을 꼭 쥐고 꿈나라로 가고픈 할아버지의 사랑이 이뤄지길.


추신. 나도 늙어서도, 계속 사랑하련다. 사랑아, 우리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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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일락(舞馡劮樂)] 눈으로 마시는 신의 물방울,

<와인 미라클 (Bottle Shock)>


‘와인’하면 떠오르는 국가는 어딘가. 아마 프랑스나 이태리가 먼저 떠오를 것이고, 칠레와 미국, 스페인도 빠지지 않겠다. 물론 와인은 취향이다보니 국적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와인 종주국은 유럽이다. 그래서 미국산 와인은 어쩐지 젖비린내가 나는 사람도 있겠다. 미국에서 와인이 본격적으로 생산된 역사는 1848년 골드러시 이후다. 더구나 그것도 해충과 금주법 시행으로 못다 핀 꽃 한송이가 된 것을 감안하면 1960년대부터 기지개를 켰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반세기가 되지 않은 세월동안 미국 와인산업은 어떻게 절치부심하면서 짧은 기간 유럽 와인에 대적할 정도가 됐을까.  



그 하나의 단초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와인 미라클(Bottle Shock)>이다. 말하자면, 미국 와인의 ‘깜놀(깜짝 놀랄만한) 뒤집기 한판’.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1976년의 ‘파리의 심판(Judgement Paris)’이 그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그 사건이 도대체 뭐냐고? 실상은 그랬다. 어떤 품종이건 코카콜라 맛이 난다는 둥, 프랑스 와인계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던 미국 와인. 그러다 1976년, 미국의 독립 200주년 되던 해, 어쩌면 단순 이벤트였다. 영국인 와인판매상 스티븐 스퍼리어가 제안을 했다. 프랑스 보르도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의 원산지와 상표를 모른 채 마셔보고선 어느 것이 나은지 평가해보자는 것. 말하자면 ‘블라인드 테스트’.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프랑스 대표선수들을 미국의 신예들이 눌러버린 것.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모두 왕좌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인이었던 샤토 몬텔레나 1973년산과 스택스 립 와인셀러스 1973년산의 몫이었다.


당시 이 자리에 있던 유일한 언론인, 타임지의 조지 테이버가 이를 <파리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타진했고, 이후 동명의 제목으로 책까지 나왔다. 이 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영화는 캘리포니아산 와인의 알싸한 맛을 전하고자 허구를 덧붙였다. 캘리포니아의 휘황한 햇살 아래 근사하게 펼쳐진 나파 포도밭의 풍광, 그에 곁들인 ‘포도밭 그 사나이들(부자)’의 갈등과 화해, ‘구름 속의 산책’처럼 알콩달콩한 로맨스. 눈으로 마시는 와인이랄까. 포도(와인)에 담긴 어떤 생의 결을 다룬 이야기다보니 굳이 와인을 속속들이 몰라도 되겠다. 2004년 눈으로나마 캘리포니아를 돌아다니며 와인 맛을 음미하게 해준 <사이드웨이(Sideways)>의 감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그곳을 만나는 기쁨도 있겠다.


참고로, 원제인 ‘Bottle Shock’는 와인을 병에 담거나 옮기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향이나 맛이 변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돌아오는 일시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참, 블라인드 테스트는 한번으로 끝났냐고? 아니. 1986년과 2006년에도 있었다. 결과는? 미국 와인이 정녕 신의 물방울인겨? 말 한해도 알겠지?



‘대세윤복’의 스크린 환생, <미인도>

‘혜원 신윤복’이 대세다. 문근영이 신윤복으로 환생해서 브라운관을 채우더니, 이번엔 김민선이 신윤복이 돼 스크린을 공략한다. 역사학자 등이 신윤복은 분명 남성이었다고 못을 박고 있지만, ‘신윤복이 여성이었다면’이라는 가정은 매력적인 소재인가보다. 화원 가문의 아들이 신통치 않자, 재능이 뛰어난 막내딸 신윤복(김민선)이 가문의 영광(?)을 짊어질 운명이 된다. 남자 행세를 하면서 오빠의 삶을 살게 된 윤복. 단원 김홍도(김영호)의 제자로 정을 쌓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나타난 강무(김남길)는 사랑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김홍도와 기녀 설화(추자현)가 얽힌 사랑의 엇박자. 자유롭고 과감한 사랑의 풍속화를 그렸던 윤복과 <미인도>의 이면에 대한 상상도.


애니와 다큐의 새로운 접합, <바시르와 왈츠를>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벌어진 대학살. 개인이 감당하기엔 그 학살의 충격이 너무도 컸던 탓일까. 친구의 악몽을 들으면서 자신에겐 말소된 어떤 기억의 행보를 좇는 영화감독인 ‘나’의 이야기. 그는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나서 기억퍼즐을 끼워 맞춘다. 과거의 비밀을 알아갈수록 선명하게 나타나는 어떤 그림들에 의해 역사 또한 분명해진다.  

독특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바시르와 왈츠를>은 새로운 영화적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실존인물을 토대한 한 영화내용 또한 역사와 개인의 관계를 새삼 자각하게 만든다. 2008년 칸에서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고, 국내 영화제 등에서도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영화적 신경험도 되고,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수작 애니메이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추악함, <눈먼자들의 도시>

갑자기 전 인류의 눈이 먼다면? 그런데 나 혼자만 눈이 보인다면? <눈먼자들의 도시>는 이 끔찍한 상황을 다룬다. 실명(失明)이 대세가 된 시대와 장소가 불분명한 어느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아마도 보이지 않는다고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틀렸다! <눈먼자들의 도시>는 이를 아수라장으로 묘사한다.

포르투갈의 문호, ‘주제 사라마구’는 인류문명의 취약함을 안다. 그의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와 『눈뜬자들의 도시』는 인간의 취약한 본질을 꿰뚫는 현미경 같은 책이다. 그의 소설이 어떻게 영상화됐는지, 궁금하다고? 소설보다 약할지는 몰라도, 영상으로 구현된 상상력도 나름 볼만한 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소설을 통해 당신의 머리와 가슴이  구현한 상상력이겠지만. 


[코엑스몰 내방객을 위한 감성매거진, '몰링'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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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시네마디지털서울 2008 (CinDi 2008).
CinDi클래스 <24시티>.
처음 만난 지아장커.


지금-현재 세계영화계의 핵인 지아장커를 눈 앞에서 봐서,
아, 약간은 감개무량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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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해들은, 그런 소년을, 미친놈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이 바로 다음날이었죠.
타율학습(!), 그까이꺼 땡땡이 치고 갔습니다.
안 갈 수 없었을 겁니다.
소년의 방 벽면의 곳곳에서 저를 향해 미소짓고 있는 (최)진실누나가 부산에 첫 행차했답니다!
어찌 그런 누나를 알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원에벤에셀이 부산 남포동에 매장을 내면서, 전속모델이던 누나를 델꼬 온 겁니다. 사인회라는 명목.
문현동에서 남포동까지 날랐습니다.
역시나, 사람들 미어 터집니다.
더구나 대부분 여자입니다.
사춘기의 그 고딩 소년, 쪽팔림을 무릅쓰고 줄을 섰습니다. 줄이 줄어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헉~! 숨 막히는 순간. 진.실.누.나가 눈 앞에 있습니다. 그것도 소년을 향해 미소를 띄우면서.
심장이 벌렁벌렁, 콧구멍은 푸슉푸슉, 숨이 가쁩니다. 이런 순간이 오다니.
이름을 묻습니다. 아, 감개무량. 소년의 입에서 '준수'라는 이름이, 아주 조그맣게 나옵니다. 부끄러웠나 봅니다.
진실누나에게 친히 싸인을 받은 브로마이드를 고이고이 신주단지 모시듯, 품에 품고서 집에 돌아옵니다.
행여나 구겨질세라, 가상합니다.
그까이 꺼 시험, 망쳐도 좋아~
소년은 그저 행복합니다. 누나를, 여신을 직접 눈앞에서 알현해서, 누나가 소년을 향해 웃어줘서.
그날 밤, 별이, 바람이, 소년의 마음을 알싸~하게 스치웁니다. 아해들 말마따나, 미친놈 같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누나가 스타로 뜰 무렵, 일간스포츠에 연재되던 누나 스토리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누나가 출연한 CF광고가 나올라치면, 브라운관을 빵꾸 나도록 쳐다봤으며,
<우리들의 천국>을 눈 빠지게 기다렸던 이유도, 최초엔 누나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꼬박꼬박 봤지요. 대학생활, 저런 건가 싶어서.
사실 나쁜 드라마지요. 현실의 쓴맛은 쏘옥 빼버리고 당분만 잔뜩 넣어 단맛을 낸.
그럼에도 그때는 왜 그리 흥미진진했는지...
어쨌든, 누나는 극 중 승미라는 이름으로, (홍)학표 형과 열애합니다.
그러나 백혈병에 걸려서 학표 형을 떠납니다. 
아, 미치겠습니다. 더 이상 누나를 볼 수 없다니.
실제론 영화 출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 빠지게 된 거라, 그런 설정을 한거죠.
그런데,
그렇게 승미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한 대사가, 지금 오버랩됩니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그대로겠지..."
그리 잘 알았으면서도, 누나는...


술 사러갔다가, 추리닝 차림으로 멀거니 훔쳐봤습니다.
촌놈, 서울로 올라와 홍대 부근에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하숙집에선 만날 술판. 하숙집 막내였던 청년은 하숙집 형들의 명을 받들어 편의점으로 술사러 댕겼습니다.
어라, 늘상 가던 세븐일레븐 앞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봅니다.
오, 어디선가 많이 보던 빨간색 프라이드.
맞습니다.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거야~♪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 있는데~♩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마~♪ 웃고  있을거라 생각지마~♬"
당시 최고의, 그리고 대한민국 트렌디드라마의 최초 격인 드라마 <질투>의 촬영. 당시 청년의 완소이자 애청 드라마.
역시나 오오오~ 진.실.누.나.가 있습니다.
추리닝 차림으로 털래털래 나섰던 술 배달길. 목적은 내팽개치고, 멀거니 누나를, 촬영현장을 지켜봤습니다.
"누나~ 접니더. 부산 남포동에서 싸인 받았던 아입니더."하고 외쳤냐구요?
에이, 그럴리가요.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그 청년은 그저 바라만 봤습니다.
그렇게 바라만 봐도 좋았던 그때 그시절.
 


진실은 저 너머에...

알다시피, 셀리브리티들에 대한 호감의 업&다운은 으레 있기 마련 아닙니까.
누군가는 청년에게 무슨 좋아하는 게 그리 많으냐고 타박하지만,(아름답고 예쁜 건 특히나 좋아하죠.ㅎㅎ)
사실 따지자면, 무관심과 경멸 혹은 비호감의 리스트도 아련하게~ 깁니다.
좋아하는 애호의 리스트만 주로 입에 담아서 그런 거지요. 무관심, 경멸, 비호감까지 굳이 입 밖에 낼 이윤 없잖아요?
다시 돌아가서, 그토록 흠모하고 좋아하던 진실 누나였지만,
알다시피 사랑은 움직이잖아요?
애정은 점점 버석해졌습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며 CF로 얼굴을 알린 국민(여)동생 혹은 국민누나가,
억척살이 생활형 연기를 펼치는 연기자로 차츰 변해가는 동안,
그녀를 여신으로 떠받들던 소년도, 다른 여신으로 옮겨가는 변심(?)을 했지요.
물론 그것이 대체나 보완의 대상이 생겼다고 말할 순 없지만요.
험한 얘기, 루머도 많이 들었죠.
어쩌다보니, 이혼 뒤 (조)성민이와 스캔들이 있었던 룸살롱의 마담까지 만나 진실누나에 대한 뒷담화를 들어야 했으니까요.
모르죠. 그 사람 입장에서의 진실도 있겠지만,
진실 누나의 입장은 또 다를 테니, 청년은 그저 누나가 안타까울 뿐.
남들 뭐라고 입방아를 찧고 떠들어대도, 진실여부를 떠나 누나가 잘 되길 바랄 뿐.
<장밋빛 인생>도,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도 안 봤지만,
'재기'로 일컬어지거나 '연기자'로 돌아온 진실 누나가, 방가방가.^^  
참고로, 청년은 (조)성민이보다 (변)진섭이 형과의 조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동년배인 성민이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마냥 부러웠답니다.

그런데, 오늘, 서늘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1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도, 1200원대를 뚫고 올라선 환율도 묻혀버린 그 소식.
진실누나가 구름의 저편에 갔습니다.
아침에 소식을 전한 아버지의 말씀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어요. 정말이냐고.
어머니는 소름이 끼쳤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이 덜거덕덜거덕 거렸습니다.
점점 희미해지고 있던 누나의 존재가, 제 마음의 방 한칸에 서식하면서,
아직 제 DNA에 흔적처럼 박혀있었음을 확인했어요.
오늘 제가 만나거나 스친 남녀노소 모두 종일 그 얘기만 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언니를 갑자기 떠나보낸 것 같아 울었다고 그랬고,
누군가는 자신의 아내가 아이들이 밟혀서 눈시울을 붉혔다고 했습니다.
스캔들에 치이던 누나의 생애 마지막 스캔들이었나 봅니다.
마음은 그닥 좋지 않았고 스산했습니다.
낮동안, 하늘은 더럽게 맑고, 바람은 치사하게 시원했습니다.
우습지만, 씨바, 이래도 되냐, 는 생각도 들었구요.

진실 누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셀리브리티라는 표현보다는, 아이콘.
그저 개인에 국한되지 않았죠. 90년대, 그 시대의 대표성을 가진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스타들과 차별화된.
한 기사에 따르면,
특채로 드라마에 출연한 첫 세대였고,
영화나 드라마 아닌 CF로 스타덤에 오른 첫 번째 CF스타였고,
트렌드 드라마의 주연을 꿰찬 최초의 신세대 톱스타였습니다.
또한,
이혼이 커리어에 더 이상 족쇄가 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최초의 톱스타요,
신세대 스타에서 중년 연기로 자연스레 넘어간 최초의 중견 연기자요,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스타일을 유행시킬 수 있는 유일한 중견 연기자요,
무엇보다,
전 남편의 성을 거부하고 자식들의 성을 누나의 것인 '최'씨로 바꾼 강한 엄마. 

하지만, 그런 누나, 이제 없습니다.
1990년대 요정 최진실의 시대를 넘어,
2000년대의 배우 최진실의 시대를 열어젖힐 것 같았던 누나는,
세상이 버거웠나봅니다. 저도 정확한 진실은,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젠 더 이상 최진실이라는 이름의 배우는 볼 수 없다는 것.
남은 건, 확인할 수 있는 건, 누나의 박제된 모습.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느 날과 다름없었습니다. 차는 빡빡하게 막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분주했다죠.
감당키 힘든 어떤 죽음 앞에서도,
'그래도 살아야겠다. 떠난 사람을 위해서라도'라는 다짐을 했던 저는,
오늘 다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곱씹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살이잖아요.
밥을 먹고, 똥을 싸며, 잠에 빠지는 한편,
주위 사람들과 웃고, 때론 혼자이거나 함께 우는 것.
내일이면 아마, 저는 야구장에서 목청껏 웃고 떠들며 울부짖을 겁니다.
신나게, 또 신나게, 언제 진실누나를 떠나보냈냐는 듯이.
그게 접니다. 그게 제 사람살이입니다.
진실누나는 그렇게, 차츰 제 마음의 방에서 옅어져 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지금 이 순간에서만큼은, 누나를 생각합니다.
짙은 어스름이 지배하고 있는 어느 가을밤.
서러운 마음,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칩니다.
누나를 처음 알현했던 그 어느 밤, 소년의 마음을 알싸~하게 스쳤던 별이, 바람이,
오늘 이 밤은 참으로 다릅니다. 별과 바람도, 세월을 따라 그렇게 달라졌나 봅니다. 
오늘 이 바람은 내 심장을 할큅니다. 어쩌면, 그렇게 슬픈 밤입니다. 
커피빛깔보다 더 진하디 진한 이 밤. 커피향보다 더 쓰디쓴 이 밤.
하지만, 더 울적한 건,
누나가 떠남으로 인해 남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어떤 슬픔.
누나가 구름의 저편으로 가기 전과 간 후가 달라지고 만 어떤 사람들의 일상.
그 일상은, 아마도 버티고 견디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괴담을 퍼뜨렸다는 혐의로 입건된 그 사람이 직면했을 비난과 야유,
무엇보다 자괴감이 들법한 이 상황, 그 사람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를...
한편으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해,
따라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누나는 그래도 이렇게 말할 것 같애요...
따라하지 마라, 응.

이젠 누나의 이름 앞에는 '故'가 붙겠네요.

진실 누나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습니다.
아~ 부디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당신은...
저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주세요...

오늘이 그렇게 누나와의 마지막 추억인가 봅니다.
말하자면, 누나는 그 어린 시절 나의 (일방통행) 연인이었습니다.
기억 저편에 사라졌던,
누나의 모습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이런 날, 문득 생각난 노래는, 소라누나의 <바람이 분다>.

우연히 만난 이 문구.
어쩌면 진실 누나가 우리에게 해 줬을 법한 이 말.
가정주부이자, 자연주의자이자, 동화작가인, 무엇보다 행복한 사람이라 자부하는,
'타샤 튜더'가 했던 이 말.
"사람들은 날 장밋빛으로 본다.
보통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우리는 달과 같아서,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지니는 것을..."

-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중에서 -

그래,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는 달과 같은 것인데...
우리가 진실 누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했던 것일까요,
아니, 이해까진 아니더라도 얼마나 안다고 쉽게 입방아를 찧었던 걸까요.
사람이 사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미안합니다.

또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스스로 세상과 절연하게 만든,
그 아이콘을 지켜내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단절시킨,
우리네의 문화적 척박함과 옹졸함.
반성합니다.

아울러,
망자에 대한 예의 따위 내팽개친 채,
애도를 가장해 각종 루머·추측으로 장사에만 열을 올리며,
망자를 부관참시하고 있는 '언론'이라는 이름의 찌라시들이 행한 작태들.
콕콕 따져보지요. 그들의 입방아처럼 괴소문이 진실누나를 절망에 이르게 했다면,
그 괴소문에 대한 사실확인이나 여과를 하지 않고 보도함으로써 되레 괴소문을 증폭시켜,
고인의 아픔과 상처를 더욱 깊이 후벼판 책임에서 그 언론들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베르테르 효과에 의한 연쇄자살의 예방을 위해,
한국기자협회, 한국자살예방협회 등의 '언론의 자살보도 권고기준'과,
생명인권운동본부가 내놓았던 '언론인의 자살예방 보도 권고사항'을,
그 언론들은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을까요.
참 대한민국 언론수준, 알고 있지만,
너무합니다.


어쨌든,
이런 끝장면, 바랐지만,

결국 홀연히 떠나버린 누나에게 전하는, 내 짧은 마지막 인사는,
안녕, 진실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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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딘은 53년 전, 스물 넷의 나이로 요절했다.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 그래서 보기 좋은 시체를 남긴다."

폴 뉴먼은 지난 26일(현지시각), 83세로 영면했다.
마지막으로 (스크린에서) 본 것이, <로드 투 퍼디션>이다.
<컬러 오브 머니>에서 앳띤 탐 크루즈와 공연한 것이 처음 대면이었는데.
<타워링>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
우리 딘 형님에 비해 훨 오래 살았다지만, 그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이들에겐 아프긴 매 한가지다.

제길, 그 빈자리를 메우기 전에 하나둘 떠나버리면 어쩌자구.

그려, 거기서 잘들 계시유.
나도 언젠가는, 그쪽으로 갈테니, 그때 봅시다.
그때까지 부디, 안녕...

당신들을 추억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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