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으로 체감하고 있지.
특히나 백수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자 조력자이며, 나침반과 같은 것이, 책.
그렇게 책은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씨앗을 심어줬단다.
돈이 아닌 다른 종류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해주는 존재이며,
비금전적인 풍요함을 맛보면,
관계망이 바뀌면서 주변을 둘러싼 세상의 또 다른 아름다움과 마주치게 되더라.
또 어쩌면 창의성을 발휘하게 될 공간을 넓히게 될 지도 모르고.
오늘, 특별히 고마움을 전해, 책!
니 생일, 책의 날(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잖아.^^
음습하고 칙칙하며, 어둡다. 빛이라곤 평생 틈새라도 열고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이 꽉 막힌 공간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른바 ‘어둠의 자식’들이 암약하는 곳이다. 그 자식들은 세상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 마약을 하고, 동성애를 하거나, 성 전환을 하기도 했다. AIDS 바이러스 보균자까지. 아니, 취급부주의 품목을 경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웬 막장인생들의 나열? 이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경고다. 뭐, 꽃 같이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순수한 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일 수 있으니, 관람을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
뮤지컬 <렌트>는 그렇게 막장(?)에서 시작한다. 세상 끝으로 밀린 어떤 청춘들의 발악(!)같은 몸짓. 막장이라, 어둡다고? 천만에. 정작 <렌트>는 빛보다 더 뜨거운 에너지가 있다. 그건, 놀랍지 않다. 밝은 곳에서의 빛은 묻히고 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야말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알다시피, 이 세상은 대체로 어둡다. 밝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 이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음침한지는, 당장 눈앞의 신문만 펼쳐도, 방송만 틀어도 빤~하다. 전쟁의 포화로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스펙터클처럼 펼쳐진다. 화폐 아니면 가치 따윈 없는 양, ‘대박’은 쉴 새 없이 입을 오르내린다. 삽질을 향한 욕망은 또 왜 그렇게 강한지. 정부의 정책이라는 것은 온통 부자들을 위한 것뿐이다. 살다보니, 알겠더라. 이 땅은 부자들의 나라지, 서민 혹은 시민을 위한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
그런데 <렌트>가 왜 그런 거대한 힘을 조롱하느냐고?
그래,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렌트>, 그 탄생의 비화
올해 여섯 번째 공연(1월9일~2월8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렌트>는 2000년 초연 이래 탈을 바꿔 쓰면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오리지널 <렌트>의 시작은 1996년 1월 오프브로드웨이에서였다. 계보를 보자면, 뿌리는 프랑스 작가 뮈르제가 쓴 《보헤미안 삶의 풍경》이다. 이를 토대로 오페라로 올린 것이 푸치니의 <라 보엠>. 조나단 라슨은 ‘보헤미안’을 열쇳말로 <렌트>를 꾸렸다. 시인을 예술가로 바꾸고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다.
시기는 1989년, 레이건이 조장한 신보수주의가 창궐하던 때. 기득권과 위정자가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이면에는 통제와 억압,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라슨은 그게 숨 막혔고, 7년 동안 <렌트>에 모든 것을 쏟아 각본을 썼고 무대로 올리기로 했다. 마침내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을 하루 앞둔 1월25일, 그러나 라슨은 정말 드라마틱하게 3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대동맥혈전이었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렌트>는 초장부터 흥행에 불을 붙였다. 150석에서 시작된 <렌트>는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4월에 브로드웨이 중심가로 옮겼다. 당시, <렌트>는 새로웠다. 위선적이지만 안정을 갈구했던 중산층 정서를 내던진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뮤지컬로서는 보기 힘든 반사회적인 소재. 영화와 달리 소재 등에서 뮤지컬은 보수적이었다. 가족 단위의 관람으로 흥겹고 휴머니티가 가미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다양한 인종은 물론이요, 소외계층 인종을 주연으로 기용하는 파격(!)까지 감행한 <렌트>는 엄청난 화제를 몰면서 2008년 9월7일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13년을 넘은 세월. 브로드웨이 역사상 일곱 번째로 오래 공연된 작품으로 남았다.
가난한 예술가와 군상이 꾸리는 난장
<렌트>는 국내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남경주, 조승우 등 톱뮤지컬 배우들이 남주인공 ‘로저’를 맡았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거의 신예들로 채워졌다. 톱스타의 캐스팅 없이(그나마 그룹 ‘쥬얼리’ 출신의 조민아가 여주인공 ‘미미’를 맡았다는 정도). 이야기는 변함없이 전개됐다. 기존의 ‘정상적’ 가치에 별반 관심이 없는 가난한 예술가와 군상이 꾸리는 난장.
그들은 각자의 예술 활동을 영위하면서 때론 즐겁지만, 그것은 외줄타기 같이 위태위태하다. 뮤지션 로저(유승현)는 에이즈로 영혼이 잠식되고 있고, 마크는 카메라를 늘 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지만, 언제 영화를 찍게 될지는 깜깜하다. 미미(조민아)도 스트립댄서로 마약쟁이에 에이즈 보균자다. 컴퓨터 천재 콜린(최재림)은 거리에서 강도에게 맞은 뒤 거리의 드러머인 여장남자 엔젤(이지송)의 도움을 받으면서 눈이 맞는다.
가난하지만 연대할 줄 아는 그들을 괴롭히는 건 건물주 베니. 가난과 에이즈, 동성애 등 사회가 품어야 하지만 불편해하는 가치들. 자본주의 사회 뒷골목에 내동댕이쳐진 생의 단면이다. 한편으로 위정자들이 감추고 뿌리 뽑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종종 드러나는 삐걱거림이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신예들로 풋풋한 기운을 드러낸 것은 좋았으나, 그것이 또한 보헤미안의 흔들림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으나, 로저와 미미 두 축이 흔들리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이른바 ‘삑살이’로 표현될 수 있는 미끄러짐이 종종 드러났다. 열정적인 연기는 별개로 뮤지컬에서 몸과 소리의 기운이 제대로 합일되지 못하는 것은 관객모독이 될 수 있다. 음정이 미끄러지거나 리듬의 탄력이 떨어지면서 극이 느슨해지는 경험은 뮤지컬로선 치명적이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인 로저와 미미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엔젤과 모린(최혜진)은 가장 빛났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인데 그 역을 소화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죽음에 도달하는 엔젤의 연기는 콜린의 애절한 노래와 함께 눈물을 쏟아내기에 충분했다. ‘음메~’로 대변할 수 있는 모린의 퍼모먼스도 인상 깊었다. 조연들의 연기가 빛이 난 것은 좋으나, 주연들이 살아나지 못함으로써 극은 다소 불균형하게 전개됐다. 배우 간 연기 편차를 조정하지 못한 것은 연출의 오점이 될 수 있다.
<렌트>가 상기시키는 지금-여기의 어떤 살풍경
<렌트>는 일종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맞물려 이에 맞서 현실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몸부림. 초연 당시의 <렌트>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조롱이었다. 범죄와 전쟁한답시고 부동산 값을 올려대고 예술을 압사한 줄리아니 시장에 대한. 부자를 위한 도시로 꾸미려는 행정에 대한 반발.
부자를 위한 나라를 만들려는 어느 국가의 풍경과도 겹칠 수밖에 없다. 그 국가는 보수 정도가 아닌 반동을 품고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기운까지 보이고 있다. 부자, 정규직, 비장애인, 남자, 내국인과 같은 기득권자의 목소리와 처지에만 신경을 쏟을 뿐, 정작 관심이 필요한 분야엔 귀를 막고 있는 양상이다.
그들은 다르거나 불순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힘이 없는 것은 대놓고 무시한다. 다르거나 불순한 것, 그리고 힘이 없는 것을 보듬었고, 그래서 환호성을 받았던 <렌트>와는 다른 모습이다. 권력은 저절로 변하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예술이 들려주는 어떤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시절이 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리지널 <렌트>가 가졌던 힘을 지금 목도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앞의 <렌트>는 번역이 아닌 의역이나 각색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에이즈에 걸려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노래한 <렌트>의 한 메시지를 “가난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로 바꾸고 싶었다. 에이즈가 천형이나 죽을 병이 아닌 것으로 차츰 인식전환 되는 것처럼,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변명은 지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전환돼야 할 과제다. 가난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부를 쌓은 것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준 것이지, 개인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어쩌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도 치열한 논쟁과 열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오리지널 <렌트>가 당대의 지배적 시선에서 벗어난 화두를 던짐으로써 논쟁과 열광을 동시에 몰고 다니면서 사회의 지배적 시선에 금이 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쉬운 점은 그거다. 우리가 <렌트>를 보면서도 ‘렌트헤드’(Rent Head)가 탄생되지 않는다는 것. 그만큼 오리지널 <렌트>가 품은 에너지를 우리 식으로 각색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현실의 고난을 질료로 삼아야 한다고 <렌트>는 넌지시 화두를 던진다. 고난은 세상에 머무는 대가로 렌트해야 하는 것으로 삼고,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이라며 버티고 견디는 것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임을. 비록 그 ‘오늘’이 한물 간 클리셰(상투어)처럼 들리더라도 말이다. 52만5600분(1년을 ‘분’으로 계산한 시간) 제대로 활용하기. ‘52만5600분의 4년 남짓한 시간’ 또한 견뎌내기.
참,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나홀로 집에>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2005년 동명으로 연출한 이 영화는 국내에서 2007년 개봉한 바 있다. 뮤지컬만큼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상상화’가 공개됐다. 상상마당이 1000만원 상당의 제작비를 지원,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 상상마당의 단편 야심작들이 공개됐다. 1년여의 시간을 거쳐 마무리된 ‘2008 상상메이킹 제작프로그램’ 가운데 극영화 부문에 선정된 5편의 작품이 2월25일 상상마당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그 시사회 현장을 담아본다.
■ 영화 ‘고래를 본 날’
<고래를 본 날>(권오광 감독)은 새 아빠를 맞이하는 소년, 준호와 그를 떠나보내야 하는 친구, 영광의 마음을 다룬다.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사는 준호는, 내일 다시 서울로 간다. 친구 영광과도 이별이다. 영광에게는 미국 출장 간 아빠가 귀국해서 다시 돌아간다고 빡빡 우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광도 그걸 안다. 준호 앞에서 그걸 말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그런 내일은 없는 양, 오늘 하루를 즐긴다.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함께 뛰논다. 영광도 영광 나름대로 ‘아빠 콤플렉스’가 있다. 늘 술에 절어 사는 아빠. 준호와 놀다 돌아온 집 마당엔 술 취한 아빠가 쓰러져 있다. 그런 아빠를 힘껏 차는 등, 영광은 현실이 싫다.
약속했던 것처럼, 두 아이는 쓰러져가는 정미소를 찾는다. 그곳엔 본드를 마시고 취해 있는 아이들의 아지트다. 처음엔 마시고 싶지 않았던 준호는 영광의 ‘천천히 깊게, 딱, 세 번’ 재촉에 본드를 마신다. 준호는, 고래를 본 것일까. 환각상태에서 준호는 새 아빠를 만나고 결국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란다. 아빠가 있거나 없거나, 그들에겐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래를 본 날>은 거칠게 훑고 지나가버리지만, 결코 잊지 못할 아이들의 성장잔혹사를 다룬 서늘한 보고서다. 한편으로 하염없이 맑은 하늘과 푸름 속에 어우러진 두 소년의 우정은, 꼭 어린이판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는 마냥, 눈시울을 들뜨게 한다.
■ 영화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이어진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이하 <경북 문경…>, 이경원 감독)도 시골이 배경이다.
이번에는 그곳을 떠나는 ‘소녀’의 성장사다. ‘마원3리’라는 푯말 아래 할머니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은아가 문경을 떠나기까지의 소소한 갈등과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은아는 그림을 제대로 배우고 그리고 싶다. 집중하는 거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림이다. 그렇다고 문경을 굳이 떠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은아를 붙잡아주지 않는다. 은아가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갈 때 되면 가야지”라며 시큰둥하고, “내 가면 안 서운하겠나” 물어봐도 “서운한 건 지나봐야 알겠지”라는 썰렁한 대답 일색이다. 아버지도 매한가지다. 은아 주변의 남자들은 그렇게 무심하다. 속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몰라도.
그나마 은아가 애살을 부릴 수 있는 대상은, 할매와 고모다. 할매한테 담배를 배우고, 고모한테는 술을 배운다. 아빠한테는 말 못해도, 고모한테는 말할 수 있다. 그런 은아에게 갑자기 할매의 죽음이 닥친다. 그림 공부 때문에 도시로 잠시 올라간 새였다. 아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갔건만, 할매는 이미 죽은 뒤였다. 가고 싶은 곳을 적으라는 동생의 재촉에 제주의 어떤 마을 주소를 적으며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던 할매.
<경북 문경…>은 그렇게 떠난 사람의 풍경 뒤에 남은 어떤 여운을 보여준다. 집 떠나며 밥을 먹기 위해 길을 걷던 은아는 길에서 담배를 피던 할머니를 보고 갑자기 자신의 할매가 떠올라 주저앉아 운다.
그리고 떠나는 사람과 흘러 들어오는 사람. 버스를 타고 떠나려는 은아에게 한 남자는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를 들이민다. 그는 아마도 문경에 정착하려나보다. 누군가에겐 추억을 남기고 떠난 곳이,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추억을 잉태하는 곳이 되리라.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마음 속에 ‘OOO’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를 적었다.
■ 영화 ‘경적’
<경적>(임경동 감독)은 최근의 남북관계 긴장보다 더욱 팽팽한 긴장(?)을 선사하는 이야기다. 탈북자를 감시하고 일을 처리하는 남한의 고형사는 강 근처에서 차를 발견한다. 탈북자(새터민)의 차인데, 사람은 없고 덜렁 차만 있다. 경적을 눌러도 울리지 않는 차는, 어쩐지 찍소리 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눌려 살아가는 탈북자 모습 같기도 하다.
고 형사는 차주와 아는 사이인 듯한 철민을 부르고, 또 한명의 탈북자인 보험담당원 영림도 조사차 그곳을 들른다. 세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고 형사는 순간순간 눈을 번뜩이며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두 사람은 메모인지, 유서인지 모를 쪽지를 보고 표정이 좋지 않다.
그리고 차를 끌고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던 철민이 경적을 눌렀는데 이번엔 소리가 난다. 문제는 그 경적이 손을 떼도 울고 있다. 길 한 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경적. 그것은 어쩌면 늘 경적이 울린 채 남한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탈북자들의 모습을 빗댄 것일까. 경적을 울려대며, 겉으론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행동은 그들을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취급하는 남한의 이중성?
■ 영화 ‘불안의 최전방’
가장 엉뚱하면서도 불안(?)한 영화가 <불안의 최전방>(정미나 감독)이다. 뭔가 ‘정상성’에서 약간은 벗어난 듯한 등장인물들은 군대와 가족을 가지고 논다. 하나의 유희 같은 시각으로 다루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가끔씩 불안하다”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불안의 방정식이다. 현수와 배준이 그렇고, 현수와 아빠가 그러하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이 커플, 현수와 배준은 방에서도 함부로 ‘허튼 짓’(?)을 않는다. 언니가 올까봐 불안하고, 옷장에 숨어들어가서 결국 들키게 되는 것이 불안하다. 그래서 차라리 안전하게 집에 가는 것을 택하는 배준이 날리는 뜬금없는 이 한마디. “나 살 빼는 거 잘 돼서 군대 안 가면 너랑 결혼할래.”
거기에 또 어릴 적 자매를 버리고 간 아버지가 등장한다. 언니는 어느 날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유기의 기억 때문에 언니는 아버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장례비용을 낼 수는 있지만 돌볼 수는 없다는 것. 결국 현수는 단독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엉뚱한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자신을 숨긴 채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아버지라는 양반, 재미나다. 현수가 자신의 딸인지 모른 채, 그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곧이곧대로 드러낸다. 가족을 싫어하고 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왜 가족들에게서 도망갔냐는 현수 물음에, 너무 도망가고 싶었단다. 부담돼서 도망을 갔단다. 현수는 그 아버지와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결국 3급을 받아 입대를 하는데, 마음속으로 결혼을 했다고 우기는 남자친구. 군대를 보내주고 오는 길. 나는 현수가 불안의 최전방에서 되레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와 남자친구. 어쩌면 현수의 불안을 야기했던 존재들은 그들이 아니었을까.
■ 영화 ‘아들의 여자’
쇳소리를 뚫고 “돈이 필요해요…. 돈이 필요하다고요!”라고 외치는 교복 입은 소녀의 외침이 예사롭지 않다. <아들의 여자>(홍성훈 감독)는 그렇게 시작한다. 뭔가 일이 벌어졌군, 하고 생각할 찰나, 역시나 소녀의 입을 통해 사연이 공개된다. 사고뭉치 아들, 지금은 군대가 있는 아들이 임신을 시켰단다. 그래서 낙태할 돈을 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거다. 애만 떼면 귀찮게 안 하겠다는 맹랑한 아이. 집 앞에 시뻘건 애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당당한 아이.
그런데, 이 아저씨. 별로 놀란 기색도 아니다. 소녀를 데리고 돈을 뽑으러 가고, 병원을 간다. 중간에 소녀는 도망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두 사람은 팽팽하다. 소녀는 당돌하고, 아저씨는 냉정하다. 뱃속의 아이는 그저, 그 둘을 연결시키는 매개일 뿐, 두 사람 모두에게 소중히 다뤄지는 것 같지도 않다.
과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 하루는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하루일까. 그렇지 않다. 낙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충돌하고, 아버지는 사고뭉치 아들 때문에 뭉쳤던 울분을 터트리고, 소녀 또한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그렇게 생명을 지워야 하는 현실이 버겁다. 자신의 아들과 알고 지내봐야 득 될 게 없다고 단단히 충고하는 아버지, 내가 내 애 떼겠다는데 왜 지랄들이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소녀.
그 하루는, 그냥 보통의 하루가 아니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그들에게, 그 하루는 심장에 박혔다.
그렇게 다섯 편의 단편이 상영된 2월25일의 상상마당. 영화 상영이 끝난 뒤, 김태용 심사위원장을 비롯, 심사위원 4명은 하나 같이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각자의 품평을 남겼다. “재미있게 봤다”는 무난한 평부터 “고생한 만큼 좋은 영화들이 나왔다”는 칭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성되길 바란다”는 기대, “어떤 작품은 짧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어떤 작품은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촌철살인의 평을 남기기도 했다.
각자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감독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그들 누구도 만족하진 않았으리라. 혹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지도. 그것이 거개의 초짜 감독들이 가지는 심정 아니던가. 아니 베테랑이라도 마찬가지일까? 어쨌거나 그들은 더 나은 내일,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이를 꽉 물었으리라. 영화는 그렇게 흘러갔지만, 어떤 장면은 심히 심장에 박힐만한 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감독. 나는, 내 심장은 아마 기억할 것이다.
심사평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자는 말에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은 하나 같이 뻘쭘해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카메라를 들고 혹은 카메라 앞에서 능수능란하게 감독과 배우로서 자리매김했을 그들은 정작, 기념사진을 찍자는 말 앞에는 한 없이 수줍어하고 있었다. 허허. 이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몰두하고 몰입해야 할 천상, 영화인들인가 보다. 그들의 이름과 영화를 기억하는 일. 그것은 우리네 영화의 미래를 기약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시간을 뒤로 돌려보자. 생각해보면 1996년은 정말 놀라운 해다. 그해 홍대쪽에선 언니네이발관, 델리스파이스, 크라잉 넛, 코코어 같은 밴드들이 한꺼번에 등장했고, 그 성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음악을 만들겠다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대체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90년대 중반에 그런 인디 문화이자 창작 문화가 동시에 붐업한 건 간단한 이유다. 커트 코베인 때문이 아닐까. 그 사람이 모든 걸 바꿔놨다고 본다. 이 발언은 되게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커트 코베인이 “너도 음악 만들어봐, 음악 만드는 거 되게 쉬워”라고 유혹한 게 아니다. 어떤 계기를, 물꼬를 터줬다고 해야 하나. 재능이나 감각은 있었지만 쉽게 시작해볼 생각을 미처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냐면(웃음),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참 쉽게 이야기한다. 그전에는 특별한 재능과 자격이 있어야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90년대 중반 이후로 아무나 음악하는 세상이 되었다라는 식의 일반화. 거기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90년대 중반 이전에 음악하던 사람 중에는 프로가 한명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다. 한국 그룹들은 왜 이렇게 창작곡을 못 쓰고 다 카피곡만 하지,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거다. 그들에겐 어떤 음악적 재능이나 자격이 없었고, 하눅에만 존재하는 어떤 보호막 덕분에 특권을 누리다가 그게 너바나라는 밴드에 의해 다 깨졌고, 정말 재능있는 친구들이 그제야 음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