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들은 연인, 헤어지기 싫어서일까.
당신이나 나나, 그랬던 경험.
어떡하니...


영국 체셔지역 워링턴의 한 기차역. 키스 금지(No Kissing)라니.
말도 안돼. 완전 싫어.
어떡하니...


어떡하긴!
커피하우스에 마련된, 키싱 존(Kissing Zone) 혹은 키싱 구라미.
아니, 키싱데이(Kissing Day)를 만들어 버려?
키스하는 커플에겐 20% 할인!
단, 딥키스일 것!!
키스 없인 못 살아!!!

당신과 내가 나누는 이토록 깊은 정감.
당신의 입술에 강력하게 흡입되는 내 마음.
나의 입술을 휘감는 당신의 체온.
우리, 키스해요. 후욱, 하악하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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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시시콜콜한 이야기] 

이 여자의 모놀로그 
커피가 가끔, 남자보다 좋은 11가지 이유



얼마 전, 그 머저리 등신 같은 남자와 헤어졌어요.

아 놔~ 진절머리 나는 수컷이었어요. 처음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살살 거리더니, 애인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확 달라지더라니. 아, 뭥미(뭐야)했지만, 내가 승낙했고 혹시나 해서 더 지켜봤어요.


그런데 본색이 드러나는데, 지랄 맞더군요. 허풍은 엄청 센데다,(만날 거짓 예언이나 실언만 해대요) 꼴보수 마초에,(마사지 걸을 고를 땐 못생긴 여자를 골라야 한대나) 자기중심도 없이 강한 자에겐 펄럭거리면서(자기가 무슨 오바마와 닮은꼴이래요),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선 자기고집만 내세우는(같은 교회 다닌다고 일을 망쳐도 아삼육처럼 붙어 다니는 거 있죠? 걔네들 사귀나?), 찌질이였어요.


여병추(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 외치고 싶더라니까요. 그러고도 지가 차일 것 같으니까, 눈치 채고는 먼저 차는 거 있죠. 여자에 대한 예의라고는 한 올도 없는 놈이었어요.


그때, 커피가 절 위로해 줬어요.

그 찌질이에게 상처 받았을 때, 커피가, 커피 한잔이 위로해 주더라고요. 희한한 게, 전엔 그렇게 커피를 마시지도, 음미하지도 않았었어요.그런 얼척(어이)없는 헤어짐이 있은 뒤에 마신 커피가 제 마음을 누그러뜨리더라고요. 어떤 안식처 같았어요.


그 놈은 헤어지고 나서도 나한테 계속 상처주고, 흠집 내느라 정신 없었어요. 지는 다 잘나고, 모든 게 다 제 탓이래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같은 놈이었어요. 인터넷에 자기 글 쓰면, 죽인다는 식으로 나오고. 참내, 지도 쪽팔린 줄은 알았나보지. 어쨌든 그런 수모를 추스를 수 있었던 게, 커피 덕이었어요. 정말 커피가 남자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어요!(반짝☆반짝★)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커피가 남자보다 좋은 이유에 대해서. 한번 들어보실래요?


일단 커피는 뜨거워서 좋아요.

놔두면 식어버리긴 해도, 커피 메이커 켜놓고 산책을 하고 돌아와도 커피는 여전히 뜨거워요. 지 마음대로 식어버리는 남자보다 훨씬 낫죠. 그 놈 봐요. 연애 전에는 그렇게 뭘 살리겠다고 주접떨더니 이젠 꼬랑지 내린 거. 미친 놈. 


둘째, 커피는 상스러운 욕설을 담지도 않아요.

아유, 심심하고 성질 뻗친다고 ‘씨~’를 수시로 내뱉는 수컷들, 아 재수 없어요. 문화적인 소양이나 교양 없는 짓거리 해대는 수컷들은, 그저 내동댕이쳐야 해요. 커피 주기도 아까워.


셋째, 커피(컵)는 사이즈가 문제 안 돼요.

남자는 왜 그리 사이즈에 신경 쓰죠? 747 비행기에만 꼭 타야하는 것도 아니고, 3000m 상공으로 올라가야 자기 공이 커지는 것도 아니고. 여튼, 수컷들은 이상해요. 사이즈에 그렇게 집착하고. 그런 남자들에게 지쳐요. “크기가 무슨 문제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 시간이 없네요. 나머지는 한번 읊어볼게요. 당신은 어느 정도나 동조하세요?


넷째, 커피는 권위적이지도 않고, 내 얘기에 항상 귀 기울여주며, 지적인 대화도 가능해요.


다섯째. 커피는 내 키스 자국이 남아도 내가 닦을 때까지는 스스로 지우지 않아요.


여섯째. 커피는 내가 원하는 만큼 달콤하게 혹은 진하고 연하게 만들 수 있어요.


일곱째. 커피는 내 외모, 몸무게, 헤어스타일 갖고 일일이 신경 쓰거나 왈가왈부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줘요. 


여덟째. 커피는 뚜껑을 올린 채 그냥 두지 않아요. 남자들처럼 양변기 뚜껑 올리고 물이 튀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족속이 아니란 거죠. 


아홉째. 커피에게는 제발 관심 가져달라거나 애정을 쏟아달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열 번째. 커피는 알코올을 섞어도 과격한 모습 보이지 않아요. 개가 되지도 않죠.


마지막. 커피 얼룩은 지우기 쉽고, 내가 버리지 않는 한 달아나지 않아요. 그러나 남자한테 받은 마음의 얼룩은 지우기도 쉽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죠.


아, 참, 이번주에는 카페쇼에 가야겠어요. 11월30일까지 코엑스 대서양홀에서 열린다고 하던데요. 커피 좋아하는 남자, 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남자, 어디 없을까요? 커피 같은 남자, 소개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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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스토리텔러 김이준수


어느 날, ‘커피’가 심장에 박혔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십여 년 직업생활을 때려 쳤다. 그리고 지금, 커피를 생의 중심에 두고, 커피공부를 계속하면서 커피하우스를 준비 중이다. 커피하우스 이름은 가칭, ‘세 번째 첫 사랑’! 지금은 수많은 커피지망생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커피와 스토리텔링을 엮은 커피하우스에서 평생 커피 향 맡으며, 커피 향처럼 살고 싶다. 당신에게 후지지 않은 커피 한잔을 건네고 싶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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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시시콜콜한 이야기]  한 남자가 커피에 빠진 이유


꼰대 같은 질문이지만, 남자가 웬 커피예요? 그냥 내키면 자판기 커피나 마시고 말 일이지. <커피프린스 1호점>의 완소남 공유를 보니까, 괜히 따라하고 싶었던 것 아니에요?

에이, 설마 간지공유와 감히 비교를 하겠어요. 커피에 조예가 깊지도, 커피를 달고 살지도 않았지만, 그냥 따지자면, 커피가 내게로 왔어요. 잊지 못할, 그날의 추억도 떠올랐고. (그날이 뭔데요?) 13년 전이었죠. 어느 햇살 좋은 가을날의 주말이었어요. 난 그날을 ‘One Fine Day’라고 이름 붙였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내생순)이라고나 할까. 하하.

내 설렘과 사랑이 시작됐고, 한편으로 용기와 통증을 동반한 날이었어요. 그런 경험해봤어요? 누군가를 보고 ‘아찔하다’는 생각을 해 본. 그 전까지, 난 누군가의 뒤에서 광채나 후광이 보인다는 말, 믿지 않았는데, 그날이 첫 경험이었죠. (에이, 설마) 허, 그런 경험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요.


뭔 소설 쓰세요?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커피가 밥이라도 먹여줬어요? 뭐 대단한 것 아니기만 해봐. 콱.

흠, 들어봐요. 까칠하게 굴지 말고. 에이 썅. 우리는 저 미쿡에서 타향살이하고 있었는데, 그 전날, 그녀가 카메라를 사고 싶다며, 다운타운에 동행해달라고 했어요. 뭐, 사실 그랬어요. 주말에 하릴없이 하숙집에 박혀있기가 무료했든, 바깥공기가 그리웠든, 쇼핑을 하고 싶었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하숙집을 나왔던 거죠.

난 음악을 들으면서 그녈 기다리고 있었죠. 저기 멀리서 그녀 모습이 보였어요. 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데, 와, 눈이 아득해지는 것 있죠?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파란빛 자켓, 얼굴을 감싸는 챙 넓은 모자와 푸른 선글라스로 한껏 분위기를 낸 모습이 가을 햇살과 뒤범벅됐던 순간, 난 아주 작은 탄식을 냈어요. 와와와. 이게 웬걸, 심장은 박동속도를 높이고, 쿵쿵쿵 우렁찬 소리까지...


아~놔, 뭐야. 커피 얘기하라니까, 첫눈에 뿅 간 얘기나 하고. 이런 식이라면 확 그냥 끊어버릴까 보다.

아, 이제 나오니까, 들어봐요. 디게 말 많네. 시시콜콜한 이야기 풀라면서요. 닥치고 들어요. 첫눈에 뿅 간 건 맞아요. 교통사고 같은 ‘사랑사고’였으니까. 느닷없이 당했다니까요. 그렇게 작동한 심장을 부여잡고, 다운타운을 거닐다가 백화점 옥상 테라스가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어라, 커피숍도 있네. 가을풍경이 잘 보일 것 같다며 들어갔어요. 커피 한잔 가격도 착해요. 25센트. 가난한 학생들에겐, 쌩유죠. 커피 한잔씩 놓고 서로 야부리를 풀었어요. 그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지만, 그날은 특별하더라고요.


커피값이 착해서 좋았다? 한국 커피값 비싼 것, 세상이 다 알아요. 한국 커피값 내리라고 시위하는 거예요? ‘된장녀’니 뭐니, 하는 찌질한 이야기라면 지겨워요. 핵심을 말해요. 핵심! 아니면 확 여병추(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로 몰아버릴테니까.

진짜 감 못잡네. 그런 ‘땡감’감성으로 뭔 이야길 듣는다고 그래요. 이뭐병(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어쨌든 우리는 ‘전혜린’부터 ‘사포’, ‘전태일’ 등등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죠. 마침 군대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터라, 악몽 같았던 군대 시절도 털어놓고 그랬죠. 주절주절 있는 것, 없는 것 다 풀어놓고 있었는데, 와, 그 커피향 죽이더라구요.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일까요. 그 25센트짜리 커피에 흠뻑 취했어요. 커피향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처음 느꼈다니까요. 역시 커피는 다방커피나 자판기커피보다 원두를 마셔야 해. (아, 또 이상한 소리하고 있어. 화나려고 그래, 콱) 에이 그러지 마요. 헤헤. 그날 커피는 어쨌든 그랬어요. 난 이끌림을 맛봤어요. 그 커피향에는 내 설렘이 가미됐고, 내 첫 번째 첫사랑은 그렇게 커피와 함께 시작됐어요. 가을날의 햇살이 그렇게 부추겼던 걸까요?


하악하악, 그래서 커피를 하겠다? 거참 낭만파시네. 가만 보니,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시군요. 큭. 어쨌든, 잘해보세요. 글설리(글 쓴 이를 설레게 하는 리플)은 기대마시고, 아마도 병설리(병신을 설레게 하는 리플)정도는 있겠군요.

뭐 커피 뉴비(뉴비기너․New Beginner)로서 그 정도는 감수하죠. 지금은, 커피에 항가항가(헤벌레)한 놈이니까. 마무리하죠. 뭐. 커피 한잔. 25센트 커피 한잔의 잊지 못할 가을의 기억. 25센트짜리 커피한잔에 담긴 25달러짜리 커피향을 맡으며 새긴 25만 달러짜리 기억. 조잘대던 그녀의 입술, 가을햇살 담은 그녀의 맑은 눈, 빙긋 미소 지을 때 들어가는 그녀의 보조개, 내 말에 자지러지던 그녀의 함박웃음, 그리고 내 심장박동을 뛰게 하던 당신.

나는 그날,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해요. 내 커피도 누군가에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때 그 25센트 커피가 내게 그랬듯. 커피와 함께 한, 커피향 같은 그녀와 마주한 그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요. 그리고 오늘 당신 까칠했지만, 내 커피 한잔 드리리다. 한번 마시러 오세요. 오덕후(오타쿠)로 만들어 드릴게. 우왕ㅋ굳ㅋ




커피스토리텔러 김이준수

어느 날, ‘커피’가 심장에 박혔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십여 년 직업생활을 때려 쳤다. 그리고 지금, 커피를 생의 중심에 두고, 커피공부를 계속하면서 커피하우스를 준비 중이다. 커피하우스 이름은 가칭, ‘Coffee, 세 번째 첫 사랑’! 지금은 수많은 커피지망생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커피와 스토리텔링을 엮은 커피하우스에서 평생 커피 향 맡으며, 커피 향처럼 살고 싶다. 당신에게 후지지 않은 커피 한잔을 건네고 싶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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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안에서 비현실을 발견해내는 능력과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에 적용하는 유연함을 갖고 장소를 찾아 헤매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골목과 언덕이 사라져가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보자. 계단을 오르고 골목을 지나, 담벼락을 끼고 돌면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눈빛들을 만나게 된다. 노인과 아이들, 동물들의 호기심어린 눈빛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고 용기있게 다가간다면 우리는 그 시대를 기록하고 묻혀진 이야기들을 파헤쳐 내는 '도굴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영 로케이션 플러스 대표 (씨네21 '기어코 찾아낸 풍경')-

그리하여,
나도 현실 안에서 비현실을 발견해내는 능력과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에 적용하는 유연함으로,
커피에 담긴 이야기를 파헤쳐 내는 '커피도굴꾼'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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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건넨 한마디
(1933.1.16~2004.12.28)


내 이름은 수잔 손택(Susan Sontag).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벌써 4년이 흘렀군. 4년 전 12월28일, 난 이 끔찍한 세계의 고통에 더 이상 삼투압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 어쩔 수 없었어. 나도 활동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병마가 날 더 이상 놔두질 않더군. 알다시피, 난 세 차례 암과 싸웠잖아. 그러면서 그 고난을 질료 삼았지. 내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한 말, 알지?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임에도 불구, 학자나 작가들이 만들어낸 병에 대한 은유적 이미지가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내 몸의 질병도 그렇지만, 세계가 앓고 있는 질병 또한 그래. 전쟁과 같은 ‘질병’을 스펙터클화하고 은유함으로써,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키지. 놀라운 잔대가리야. 특히 부시 같은 전쟁광이 그랬지. 나도 저 하늘에서 신발을 던지고 싶어. 


요즘 구름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끌시끌하면서도 골골거리네. 금융위기, 경제위기, 불황이니,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탐욕의 결과물에 거침없이 흔들리는 것이 안타까워. 입으론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만, 정작 몸과 마음은 풀이 죽었으니, 이 불협화음을 어찌해야 할까. 실업의 공포가 또 얼마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할 런지. 기득권들은 또 이것을 악용할 텐데...

다른 무엇보다 ‘악’소리 제대로 내지도 못하는 이들이 눈에 밟혀.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 내가 떠난 시점이기도 하지만, 연말이라 더욱 그러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할 땐데... 내 코가 석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개 돌릴 여지가 없으니.

내가 1988년에 김남주 시인 등 구속문인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한국에선, 이 엄혹한 시기에 더 엉뚱하고 해괴한 일이 벌어지더군. 파시즘이 창궐하는 것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엉성한 독재자가 온통 물을 흐려놓고 있어.

없는 사람보다 있는 놈을 위한 정책이 남발되는 건, 기본.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을 ‘일제고사’의 늪에 빠뜨리고, 아이들 앞에 떳떳하고자 한 교사를 해직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인정 않는 오도된 역사를 설파하고, 노동부가 최저임금을 깎자는 안을 내놓질 않나. 그 와중에 정작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정책은 시궁창 개만도 못한 신세고.


그래 맞아. 이 세계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어.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내 책임도 아닐 법한. 그렇다고 이를 개무시하는 게, 과연 맞을까. 남의 고통에 이렇게 정말 무심해도 될까.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은 무슨 악의나 큰 죄가 있어서 그런 걸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 누가 그랬을까.

우리, 눈길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제는 그곳을 떠나, 이 구름의 저편에 있는 나도 이렇게 눈이 가고, 마음이 향하는데. 같은 땅을 밟고 있는 사람들마저 그러면, 이 세계가 너무 슬퍼지지 않겠어?

 
무엇보다, 당신 역시 아무런 악의 없는 누군가나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줘. 내가 외면하면, 언젠가 나도 외면 받게 될 거라는 사실도. 이건 ‘불편하지만, 잊어선 안 될 진실’이야.

《타인의 고통》에서 내가 적은 이 글을 다시 읊조리고 싶어.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생전 내게 붙었던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과 같은 레떼르는 과분한 찬사였을 뿐이야. 나는 작가로서, 그리고 현실참여의 예술평론가로서,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이길 늘 바랐어. ‘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라던 내 삶의 좌표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서 난 작가, 문화비평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할 수 있었던 거야. 시대와 세계에 문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의 자극을 줄 수 있었다고 평가를 해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야.


그토록 환멸 했던 부시가 곧 물러나지만, 그것으로 이 세계가 착해진다거나 나아질 것이란 섣부른 기대는 않아. 이 세계가 구축한 공고한 흉포한 질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야. 그럼에도 우리는 괴물이, 바보가, 되지는 말아야지. 비록 당신들과 함께 그 엄혹한 현실에 동참하진 못하지만, 계속 위에서 주시하고 있을게. 세계를 조금이라도 덜 슬프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과 작은 행동이고, 난 이 말을 믿어.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참고자료 : 수전손택 공식 홈페이지(www.ssansontag.com), 위민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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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자,

2009/02/07 15:55

이런 여자,
매력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읽는 것만으로 기분을 좋게 만드는 여자,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여자가 되길 바란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기분 좋은 느낌을 풍기는 여자이고 싶다.

 

늘 가슴 설레는 일이 있어 보이고
사소한 일로도 행복에 겨워하는 것 같고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거나
웃는 모습이 참 환하다거나
왠지 모르게 모든 일에 두근거려 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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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놀란 것은,
메릴 스트립이었다.
앞서 봤던, <맘마미아>의 유쾌하고 철 없는 엄마, '도나'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
수녀, 그것도 너무도 깐깐한데다 철갑을 두른 듯한 종교인이라니.
과장하자면, 지옥에서 갓 내려옴직한 초상이었다.
검은 수녀복, 머리카락과 얼굴에 살짝 드리운 그늘까지 저승사자 '삘'이었다.
 
굳이 그의 변신을 얘기하자는 건, 아니다.
그의 연기가 두말해야 잔소리고.
그저 앞서 봤던 영화의 캐릭터와 완전 상반된 이미지에 살짜기 겁이 났을 뿐이다.^^; 잠시 혼란스러웠다고나 할까.

이에 더해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그의 전작 가운데 <카포티>에서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그는 '트루먼 카포티' 역으로 200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바 있다.)
그는 나의 '블루 칩' 가운데 하나다.

이  두 사람이 만났다.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딱 그것만 알고 갔다. 다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간 시사회.
그저,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터였다.

때는 1964년.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한 다음해.
신부와 수녀가 등장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
어라 종교 영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배경이 그렇고 캐릭터들이 그러하다보니.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신도들을 모아놓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케네디의 죽음을, 시대의 흔들림을. 그리고 그들을 위로한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구에서 풀어놓는 플린의 이야기는 어쩐지 묘한 반동감을 준다.

더구나 교구엔 보기 드물게 아프리카계 학생이 하나 있다.
가만, 생각해보라. 당시는 1960년대의 미국이다.
말도 안되는 '흑백분리법'이 있었다.
버스에는 백인전용좌석이 있고,
공공연히, 노골적으로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을 경멸하던 시기다.
흑인에게 투표권을 줬던 케네디는 어쨌든 암살당했다.
영화보다 뒷 시기이긴 하지만,
말콤 엑스가 65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68년에 '암살'당했다.
아직도 온갖 종류의 못된 차별이 날파리처럼 왱왱거리던 시기다. 

말하자면, 그런 시기.
이 보수적인 가톨릭 학교에 유일하게 있는 아프리카계 학생.
멸시와 경멸, 차별은 일상다반사.
그런 와중에, 그를 아껴주는 보듬어주는 백인 플린 신부.
그에겐 '진보주의자'라는 레떼르를 붙여줘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런 와중에 그의 맞상대로 수면 위로 떠오른 자는,
교장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다.
생긴 것 마냥(?) 그는 전형적인 골수 원칙주의자에 근본주의자 삘이다.
신부의 설교 시간에 자거나 딴 짓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는 가차 없다.
규율과 징벌, 공포를 믿는 철의 여인. 지나치리만치 엄격하고 딱딱하다.

대립은 불을 보듯 훤하다.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고자 하는 신부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길 원하지 않는 수녀.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다.
성 니콜라스 학교에 얼룩을 만든 것 같은 흑인 학생, 도널드의 이상 행동과 그에 연관돼 있을 법한 플린에 대한 다우트(의심)에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팽팽해진다.
 

초반부, 다소 느슨한 전개로 그닥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던 나는,
이 의심으로부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작은 의심이 불러온 파장은 생각보다 넓게 확산됐다.
여기엔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 간의 헤게모니 싸움과 진실 공방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추행 문제까지 거론되기 때문이다.
세간보다 더 강력한 도덕률에 의해 지탱되는 가톨릭 교구에서,
미성년자가 엮인 성추문이라니.
오 마이 갓!

그러나 분명히 하자. 이것은 사실 혹은 진실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마음 한 켠의 의심이며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익히 보아 왔고, 잘 알고 있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의심과 추측이 불러온 사회적 비용과 폐해를.
대량살상무기와 911 테러단체와 연관이 됐다고? 그래서 전쟁이라고?
그렇다. WPE(
역대 최악의 대통령, Worst President Ever)인 부시가 만들어냈던 전쟁의 근거. 의심과 추측에서 비롯된 허구와 허위의 전쟁, 이라크전. 

우리가 쉽게 믿고 단정내 버리는 어떤 것들.
가장 쉽게는 범죄 용의자에 대한 어떤 판단. 의심하면 믿어버리는.
최근의 한 영화에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만났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의심이 만들어낸, 진실과 관계없이 유죄를 양산하는 사법권력의 허점을 봤다.

플린 신부도 비유했지만,
지붕 위에서 베개를 찌르면, 그 내용물이 나풀거리며 온 사방으로 퍼진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 없이 내뱉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가십과 루머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장들.

<다우트>는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정점은 의심과 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공방이다.
교장수녀실에서 펼쳐지는 진실 공방은 가히 압권이다.
팽팽한 긴장감은 물론, 섹시함까지 느끼게 할 정도다.
의심에서 비롯돼 플린 신부를 확신범으로 몰아세우는 알로이시스 교장수녀와,
때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어떤 이유에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를 묻고자 하는 플린 신부.
아, 정말이지, 그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배우의 말과 행동, 그리고 스토리텔링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가히 도발적이고 관능적이다.


<다우트>는 미스터리영화의 형식까지 띤다.
사실, 어떠한 증거도 없다. 도덕적 확신과 개인적 신념과 함구가 전부다.
특히나 영화는 어떤 사실이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는 결국 헤어지지만,(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이 사건의 전말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나 역시도 의심의 줄다리기를 내도록 타야했다.
누구의 말이 과연 사실이고 진실인지, 내가 의심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 놓치지 마시라.
도덕적 확신범의 울부짖음이 가슴에 팍! 꽂힌다. "Such a Doubt!"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내려오고 극장 문을 나선 뒤에도,
이 영화는 끊임 없이 사고하고 토론하게끔 만들 것이다.
당신이 이 영화에 충분히 몰입했다면 말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작은 의심부터, 맹목적인 믿음과 어떤 진실까지.
미네르바와 이명박, 용산 참사와 경찰.
너무도 뚜렷하게 의심을 거둔 확신범은,
어쩌면 자신의 모순과 나약함을 알기 때문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건, 아닐까.


<다우트>는 조만간 열릴 제81회 아카데미시상식에 4개 부문이 노미네이트됐다. 앞서 브로드웨이의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지난 1월 미국 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메릴 스트립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나는, 비록 그렇게 말할 자격 따위는 없지만, 이 결과가 마땅하다고 본다. 

2009년 들어 몇 편의 영화를 봤지만,
<다우트>는 내 심장을 건드린 2009년의 첫 영화다. ^.^

참, 이 영화는 종교 영화, 아니다.
한 성직자의 성 추문을 고발하거나 까발리는 영화, 아니다.
종교나 성직자, 성 추문 '의심' 등은 그저 소재이자, 맥거핀이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마다 다양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뭐, 사실 그런 것 다 필요없다.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연기로도 이 영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다우트>는 2월 개봉영화다.

다우트 영화정보 보기




시네마유람객 ‘토토의 천국’(procope.org)
영화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비일락’은 그래서, 나온 얘기다. 그리고 영원히 영화와 놀고 싶은 소박한 꿈도 갖고 있다. “음식은 1분 만에, 음악은 3분 만에, 영화는 2시간 만에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말도 믿고 있다.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세계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겐, 가슴 뛰는 영화를 만난다는 건, 생의 숨 막히는 순간을 만나다는 것 혹은 생을 감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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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수 없는, 버려져선 안되는 생의 사랑 by 필감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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