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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세. 결코 이르지 않은 나이다. 더구나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얼마 전 스크린에서도 마주대했었는데. <어톤먼트>에서 노년의 브라이오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를 인터뷰하던 TV프로그램 진행자로 '카메오'로 출연했었다. 아울러, <어톤먼트>는 그의 연출작 <콜드 마운틴>이나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연상시키기도 했었다.

그런,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떠났단다. 뉴스 제목에서 그의 이름과 사망, 두 단어를 읽고선, 깜짝 놀랐다. 내가 알기론, 그는 아직, '젊은' 감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대량 출혈, 편도선 종양 수술 뒤의 치명적인 출혈이 그의 운명을 일찍 마감시켰다.  ☞ 영국감독 앤서니 밍겔라 54세로 사망

아, 어쩔 수 없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잊지 못할 장면들. 나의 기억은, 차르르 필름을 돌리고 있었다. 세계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격정과 오열로 내 눈시울을 적시던 두 사람, 알마시(랄프 파인즈)와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격정적인 운명의 눈맞춤이, 캐서린 남편의 질투로 부서질 찰나,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알마시가 심한 부상을 당한 캐서린을 동굴에 두고 행했던 약속, 그 눈물의 약속이 투사되고 있었다. "꼭 돌아와, 약속해줘"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캐서린을 향해, 책과 손전등, 물을 남기고 "삼일 후에 꼭 돌아올게"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해"라는 약속을 두고 떠나는 알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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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인들의 모든 약속은 사실 늘, 비극적이다. 모든 것을 깎아내는 세월 앞에, 무모하게 영원을 맹세하는 약속부터. 두 사람도 그랬다. 우여곡절 끝에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동굴로 돌아온 알마시 앞에 주검으로 그를 맞이하는 캐서린. 그렇게 떠나버린 연인을 안고 오열하면서 흘러내린 눈물, 눈물... 스물 중반이 채 되지 않았던 관객석의 청년도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홀로, 그것도 부상당한 몸으로 덩그러니 동굴에 남아야 했던 캐서린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루하루 피 말리며,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땠을까. 혹시, 하루하루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미워했을까.그럼에도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향해 써내려간 마지막 연서. 평생 그 편지를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알마시. 마지막 안락사의 순간, 간호사가 읊는 편지를 들으면서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알마시의 표정...
My darling, I'm waiting for you.
(내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How long is a day in the dark, or a week?
(어둠 속에 있던게 하루? 아니 일주일?)
The fire is gone now, and I'm horribly cold.
(이제 불도 꺼지고 너무나 추워요.)
I really ought to drag myself outside, but then there would be the sun.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해가 있을 텐데.)
I'm afraid I waste the light on the paintings and on writing these words.
(그림을 보고 편지를 쓰느라 전등을 너무 허비했나 봐요.)
We die, we die rich with lovers and tribes, tastes we have swallowed.
(우린 죽어요. 많은 연인들과 사람들, 우리가 맛보았던 쾌락들과 함께요.)
Bodies we have entered and swum up like rivers.
(우리가 들어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
Fears we have hidden in like this wretched cave.
(이 무서운 동굴처럼 우리가 숨겨왔던 두려움들.)
I want all this marked on my body.
(이 모든 자취가 내 몸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We are the real countries, not the boundaries drawn on maps with the names of powerful men.
(권력자들의 이름으로 지도에 그려진 경계선이 없는 우리가 진정한 국가예요.)
I know you will come and carry me out into the palace of winds.
(난 당신이 돌아와서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갈거란 걸 알아요.)
That's all I've wanted to walk in such a place with you, with friends, on earth without maps.
(지도가 없는 땅, 그곳에서 당신과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에요.)
The lamp's gone out and I'm writing in the darknes...
(전등이 꺼진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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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디리 극장으로 기억한다. 군 제대 후 복학을 하고, 누군가와 함께 갔던 그 극장. 앤서니 밍겔라 감독을 처음 만났던 그때. 퍼퍼펑펑 울음보를 떠뜨렸던, 그때. 그리고 이후로, 그의 이름을 간혹 마주대했다.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리플리>에서, 역시나 비극적인 전쟁 앞에 연인을 향한 간절한 애원으로 들끓던, <콜드 마운틴>에서도. 지난해 가장 먹먹하게 봤던 영화 중 하나인 <마이클 클레이튼>에는 제작에도 관여했었던. 오늘,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풋풋한 모습이었던 줄리엣 비노쉬가 나온 <빨간 풍선>도 보고 왔는데, 거참 타이밍 하곤...

그러나, 그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도 못했으리라. 실제,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수술 받다가 급작스레 떠나버린 그를 만날 곳은, 영화 밖에 없구나.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다시 끄집어 내는 순간이 있구나. 11년 전, 앤서니 밍겔라를 처음으로 맞이했던 즈음도, 아마 3월 즈음이었다. 개봉일을 찾아보니, 1997년 3월15일.


 
안녕, 앤서니 밍겔라 감독님. 안녕, 잉글리쉬 페이션트...


2008/03/14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돌이킬 수 없는 풋사랑의 속죄…<어톤먼트>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