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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리 보이는 계기는 무엇일까?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계기나 순간,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가령,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로, 애써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달리던 내가 ‘일단 멈춤’을 택한 것은 그 어느 해 가을날의 햇살 때문이었다. 햇살은 고왔는데, 내 삶은 질척거렸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어떤 간극이 자꾸만 생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갑갑했고, 우울했다.


그런 날, 내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 한 잔. 어쩌면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관성처럼 바라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달리 보였고, 달리 보게 됐다. 내 생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허위로 날 지탱하던 직업을 그만 뒀고, 나는 커피를 만들기로 문득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고의 커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에스프레소나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드립커피를 내리는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간극은 좁혀졌고, 나는 이전보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나의 원래 속도를 찾았다. 커피, 아 템포(본래의 빠르기로).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된 첫 계기는 질병의 역습이었다. 서른네 살의 유럽여행, 심각한 신경장애 증상을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또는 세균성 병원체가 그를 덮쳤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졌고, 모든 신체기능들이 고장 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밖에 없었다. 질병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앗아갔다. 행간을 보건대, 절망으로 도배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한다. 제비꽃 화분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건. 달팽이가 그에게 왔다.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느림보 생명체가 느닷없이 다가왔다. 세상 모든 속도가 급하게 멈춘 그에게, 달팽이는 유일하게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다. 두 생명은 의기투합했다. 《달팽이 안단테》는 그러니까, 두 생물의 동거의 기록이다.


흥미로웠다. 세상의 주류 속도에서 생래적 혹은 불가항력의 사고로 이탈한 두 생명의 교류와 교감. 물론 저자의 일방적인 관찰처럼 보이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생명은 눈을 맞추고 속도를 맞추는 순간,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받는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이 형성하는 생물 환경.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공진화(coevolution)’인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달팽이의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나와 관계된 인간 세계는 반대로 점점 더 멀어졌다. 나와 같은 종은 너무 크고 너무 경솔하며 너무 혼란스러웠다.”(p.55) 


그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부터는 방문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데 몰두하는 자신도 발견한다. 달팽이와의 동거와 관찰이 야기한 새로운 시선이다.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p.57)


내게 커피가 그랬다. 커피의 우아한 맛은 나를 평화의 상태로 이끌었고, 커피의 역사와 유통을 통해 나는 세상의 불공정한 교역실태를 새삼 깨달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양한 변수에 의한 변덕(?)은 사소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뭣보다 나는 내 생에 맞는 속도를 찾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생에 묻은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보면서, 그에게 있어 달팽이가 내겐 곧 커피임을 알았다. 

읽는 내내, 그에게 이입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질병이 바꾼 저자의 삶은 더욱 격했을 터이다. 삶이라는 질병이 내게도 틈입했지만, 그는 거기에 바이러스의 침공까지 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과거나 지금이나 존재하긴 매 한가지이지만, 그에게 닥친 질병의 무게는 그를 더 고립상태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그것을 토로한다.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는 변하는 상황에서 고립은 그를 더욱 깊이 병들게 하기도 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달팽이는 구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작고 사소한 달팽이라는 생명이 주는 영향력이었다.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p.152)


그것에서 나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고 말한,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저자는 달팽이(들)가 아니었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삶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관찰자인 저자에게도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달팽이가 작고 느리다고 멸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오만이다. 다윈이 자신의 일기에 썼다는 한 다짐이 떠올랐다. 어떤 생명체를 논하든,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저자는 되레 달팽이의 존재감이 인간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달팽이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리라. 달팽이는 주로 죽은 것들을 먹어치우고 배설물로 분비하여 토양에 영양분을 되돌려주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반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다. 오히려 해만 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오만으로 똘똘 뭉친 채.


달팽이를 다시 생각했다. 속도를 다시 돌아봤다. 이 책, 달팽이의 속도에 대한 찬양복음서 같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p.181)


그것은 아울러 너무 급하게, 너무 빠르게, 관성처럼 달려온 삶이 불러온 파열음을 알아채자는 호소다. 그런 파열음에서 비롯한 균열이 우리 세계와 자신의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하자는 성찰적 호소. 느닷없이 다가온 질병에 이어 달팽이는 저자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꿨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독자는 달팽이가 주는 사유에 동참할 수 있다. 암세포의 속도보다 달팽이의 속도가 인류 본연의 것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한없이 늦춰진 속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입증했다. 《달팽이 안단테》, 그것의 명백한 증거다. 커피와 함께 한 달팽이의 속도. 나는 내게 맞는 속도, 나만의 속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역주행도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라'는 주술을 거부할 순 없다. 그것이 내겐 '달팽이 안단테'이기도 하니까.  


주류 속도와는 명백히 다른 빠르기.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렴, 세상이 달리 보이거나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일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만을 위해 내리는 나의 커피, 아마도 우연이 빚은 사고(?)일 것이다. 《달팽이 안단테》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 죽기 전 다시 들춰보고, 살아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축복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3,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