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낭만_커피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688,721total
  • 34today
  • 23yesterday
2009.03.01 02:08 메종드 쭌/무비일락

이스트우드는 어떻게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가

<그랜 토리노>, '올해의 영화'로 우선 '찜' 해놓다


여기 이 영감,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홀아비. 장성한 아들 둘은 따로 떨어져산다. 부자간 별다른 애틋함이라곤 없다. 그의 옆에 남은 건, 늙은 개 한 마리, 이름도 고상하여라. 데이지. 늙은 개 키우면서 혼자 사는 늙은이. 거참, 누가 보면 혀를 끌끌 찰 조합이다.


그래 봬도 그는 전쟁용사다. 한국전에 참전했고 적군을 살육한 공로로 훈장을 받은 퇴역군인이다. 포드에서 일했고 1972년 산 자신이 조립한 ‘그랜 토리노’를 금과옥조로 아낀다. 일본차 세일즈를 하는 큰 아들에게 늘 불만이다. 그 좋은 미국차 브랜드 놔두고 왜 하필, 일본차냐고. 눈치 챘겠지만, 그에게 아시아인, 경멸의 부스러기다. 왜 그들이 자신의 동네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도 짜증난다. 교회도 싫다. 아내 때문에 다녔을 뿐. 아내의 유언 때문에 그를 챙기는 신부도 귀찮다.


그렇다. 그는 고집불통 보수주의자다. 성조기 나부끼는 그의 집을 보면, 이 사람, 나름 애국주의자구나 싶다. 그러면서 인종주의자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은 그의 DNA에 박힌 어쩔 수 없는 색인이다. 부라린 눈은 고집불통의 성격을 드러내고, 심통이 얼굴 가득 빡빡하다. 척 보면, 누구나 알법할 정도니. 어찌 그의 아내가 버티고 살았을까 싶은, 그런 얼굴. 물론, 첫 눈에 박힌 선입견이겠지만. 그런 한편, 한 꺼풀 벗겨보면, 그는 은근 로맨티스트다. 아내를 위해 내키지도 않는 교회를 다녔고, 여전히 아내의 빈자리가 애틋하다. 자칭, 별 볼일 없는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아내와의 결혼이란다. 허허. 이 영감탱이. 지고지순 사랑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뼛속 깊은 사랑 보수주의자다. 


<그랜 토리노>는 그런 아내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의 미스터 코왈스키는 슬픔보다 되레 분노한 표정이다. 장례식부터 하객까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 거린다. 아마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남자를 먼저 보낸 여자는 오래 버텨도, 여자를 먼저 떠나보낸 남자는 그렇지 않다. 즉, 나이 들수록 여자는 강해진다. 반면 ‘수컷’은 약해 빠진다. 그것이 수컷의 실상일지도 모른다. 괜히 강한 척 가오를 잡아보지만, 그 역시 늙고 병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주의자의 가치 지키기


아내의 장례식이 끝난 미스터 코왈스키의 시골 마을. 옆집에 ‘몽족’계통의 베트남인들이 이사를 온다. 그 쪽 할머니는 연신 자신을 향해 궁시렁거리고, 한 눈에 봐도 그들이 싫다. 아시아계가 동네를 장악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개탄스럽다. 아들의 일본차만 봐도 열불 뻗치고. 한국이 어딘지, 어느 나라인지 모르는 꼬맹이들과 달리, 그는 내면부터 주변부까지 온통 아시아가 퍼져 있다. 그에겐, 그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것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전쟁에서의 끔찍한 기억. 훈장 따위로는 씻을 수 없는 피의 업보.


자연히 옆집 사람들과의 접촉, 꺼린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엮인다. 어쩌겠는가. 온통 주변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사촌이 소속된 아시아계 갱단은 옆집의 심약한 소년, 타오을 충동질해 그의 애마, 그랜 토리노를 훔치도록 사주한다. 거사(?)는 실패하고, 차량절도미수범과 늙은 홀아비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여기에 가세하는 것이 소년의 누나, 수. 딱딱 부러지는 반면 애살도 넘치는 영민한 낭자다. 동생과 달리 사교성 철철이다. 고약한 고집불통 늙은이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인종 뿐 아니라, 세대와 문화까지. 철저히 그들은 다르다. 다만 계급적으로는 절충이 가능할까, 타진하는 정도? 그러나 희한하게 그들은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무척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보수주의자의 타협이냐고? 아니. 도리도리. 네버. 노.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보수주의자가 철저히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과정이었다. 스펙트럼을 넓혔을망정, 그는 자신의 가치를 놓거나 바꾸지 않았다.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사건을 통해, 그들은 ‘유사가족’처럼 지낸다. 영감탱이가 외로웠겠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가족’에 대한 미스터 코왈스키의 죄의식이 씻김굿을 행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극 중 잠시 토로한다. 두 아들과 애틋하게 지내지 못한데 대한 저 깊은 곳의 회한을.



혈육인 두 아들은 이미 멀어졌고, 손자손녀들까지 그를 멀리한다. 그에게도 상처였으리라. 알면서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상황. 아내까지 떠난 마당. 말했다시피, 그는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을 지키고 싶은 보수주의자다. 그런 그에게 피붙이는 아니지만, 살가운 이웃이 생겼다. 유사가족이 됐다. 죄의식을 품고 사는 그에게 이것은 기회다. 그는 정말로 헌신한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스스로 가족을 지킨다. 나는 짧은 단발마의 탄성을 내질렀다. 앞서, 그가 말했던 어떤 것이 저렇게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구나. 아하. 


그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서 행동한다. 행동하는 보수주의자다. 나는 그가 인종주의자의 굴레를 벗었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는 그저, 가족으로 그들을 포섭했을 뿐, 그의 DNA에는 여전히 인종차별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는 건, 맞지 않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들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선택은 인종주의자의 탈을 벗어던지기보다, 가족이라는 가치에 집중한 듯 했다. 그는 가족의 외연을 넓히는 변화를 겪었을 뿐이다. 그렇듯,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보수는, 선량하고 약한 자들을 지키는 참된 보수다. 무력과 폭력 혹은 권력, 즉 힘의 우위로 약자를 괴롭히는 꼴을 못 보는 것이 미스터 코왈스키다. 그것이 또한 영화를 통해 보아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당연하게도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힘을 보탰다. 그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 이 땅에서 보수라고 빡빡 우기면서 뻗대는 작자들, 명함도 내밀어선 안 된다. 그건 ‘진짜 보수’에 대한 모욕이다. 그 수구꼴통들의 짓거리를 보자면,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고. 에휴~

 


자경단원 이스트우드의 속죄 혹은 속풀이


미스터 코왈스키가 ‘가족’을 위해 취한 행동은, 또 다른 함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씻김굿’이었다. 극중 인물과 함께 실제 자신의 지배적 이미지를 향한 것이었다. 우선 영화 속의 그에겐 어떤 죄의식 혹은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에서 행한 살육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참회하지 못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는 그것을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빨을 가는 것, 침을 뱉는 것, 어떤 작은 동작을 통해서, 그는 코왈스키를 내면화하고 있는 듯하다. 밖으로 표출된 그 행동의 이면에 자신을 향한 분노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늘 총부리를 끼고 산다. 한국전에 대한 씻지 못한 상흔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건 좀 묘하다. 현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지배하는 젊은 시절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그는 늘 자경단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경단원. 그러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이스트우드를 본격적으로 알린, 법보다 총이 앞선 <더티 해리>의 칼라한 형사. 웨스턴 장르의 서부영웅처럼 그는 스스로 악을 소탕하고자 나선 정의의 사도였다. 총은 그런 그에게 분신이었다. 심심하면 총을 들고 총부리를 겨누는 이 노인네에게서 그의 옛날 옛적을 꺼내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느덧 ‘늙은’ 그는 고작(!) 동네 꼬맹이 갱들 때문에 총을 든다. 선량한 이를 괴롭히는 나쁜 놈들을 소탕하는 것 또한 자경단의 몫이겠으나, 거대하고 센 적들에 맞서왔던 이스트우드의 이력을 떠올린다면, 이건 좀 아니잖아~ 그래, 늙어서 어쩔 수 없구나. 칼라한의 노년도. 꼬질꼬질한 고집불통이 돼서 가끔 피를 토하는 늙은 자경단원이라니. ‘비열한 거리’에 놓인 건 마찬가지지만, 화력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미스터 코왈스키의 총은 화끈하게 불을 뿜지 않는다. 칼라한처럼 무데뽀로 총알을 내뱉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확인할 일이지만,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타오에게 건네던 이 말. “난 이미 손에 피를 묻혔으니까. 난 이미 더렵혀졌으니까. 그래서 혼자 가야한다.” 그리고 뚜벅뚜벅 갱들이 있는 아지트로 혼자서 떠난다. 이에 앞서 50년 동안 모아온 엄청나게 많은 공구가짓수에 놀란 타오에게 그는, 말한다. “각자 다 역할이 있다.” 맞다. 그건 늙은 자신도 어떤 역할을 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이지만 그는 과거, ‘살인 기계’였다. 총과 피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 개의 함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미스터 코왈스키의 한국전에 대한 참회가 우선이라면, 과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자경단원 심볼에 대해서도 스스로 단죄를 내리는 행위다. 자경단원으로 이름을 알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심볼과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하지만, 미스터 코왈스키는 칼라한 형사의 노년이다. 참고하자면, <수색자>에서 이산 에드워드(존 웨인)가 홀로 문밖에서 황야로 멀어져 가는 장면이 있었다. 서부사나이의 죽음을 표현했던 장면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했다. 존 웨인의 역사가 끝나고, 그로 인해 웨스턴의 역사가 접히는 순간이었다. 비록 이를 체감하지 못한 관객을 위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다시 한번 이를 확인했지만 말이다.



영화 속 인물은 물론, 현실에서의 그가 지녔던 심볼을 상기시키는 이 함의는 놀라운 것이다. 고해성사가 있었고, 속죄와 참회의 순간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스트우드는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를 속풀이한 것은 아닐까. 더욱이 이 영화가 80살 먹은 노인네, 이스트우드의 배우 은퇴작, 마지막 연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연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나이대의 이야기였고, 내게 딱 맞는 역할이라고 느껴졌다.” 그래, 딱이다. 딱. 그래서 이 영화를 놓친다면, 특히 스크린을 통해 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올해 중요한 일을 하나 놓친 것이 될 것이라고 감히 나는 건네고 싶다.


좀더 나아간다면, 영화에는 수를 통해 몽족과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미스터 코왈스키가 수와 타오를 지키고자 하는 것 또한, 베트남전에 대한 속죄 차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국 정부를 대신해 건네는 사과.


나는 감사했다. ‘월트’(앞서 계속 미스터 코왈스키라고 언급하다가 갑자기 월트라고 지칭하는 건, 영화를 보시라!)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사유할 수 있는 행복한 영화보기를 하게 해줘서. 물론, 머리 빈(MB) 작자는 아무리 봐도 도통 뭔 얘기인지, 알 수 없겠지. 아마 아시아계 갱들은 모조리 없애야한다고 생각할 걸. 아니면, 이건 얼마 투자해서 얼마 벌었냐 따위를 ‘역시’ 묻겠지. <그랜 토리노>도 적은 돈 들여서 1억달러(약 15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거든.


하긴 지금의 경제공황에 대해 ‘워낙쏘리’해야 할 양반도 ‘보수주의자’이긴 하다. 보충하고 수리해야 하는 그 보수(補修)말이다. 온통 보수해야할 것투성이니 보수주의자지 뭐. 바라건대, 머리 빈(MB) 사람은 우선 ‘사팔뜨기(SD, 상득)부터 ‘보수’ 좀 하시고, ‘미래사년 고난’이라는 우리네 삶도 제발 ‘보수’ 좀 해주라.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민주주의’도 보수해주고. 에휴, 이것저것 따지자니, 너무 많네. 전면 보수해도 안 될 것 같은데, 아싸리 교체하면 안 될까?



월트(클린트) 할아버지, 어떡하죠? 총 들고 와 주세요. 한국전 참회하는 김에, 여기 정리 좀 안 될까요? ^^;;





posted by 낭만_밤9시의커피 낭만_커피